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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진의 문화읽기1
고양이와 일상적 감수성
글 | 사진·이화진 (mysleepwalk@naver.com)
한가해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 속을 두드려 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中
고양이, 일상으로 잠입해 들어오다.
지금으로부터 꼭 백 년 전인 1905년, 무명의 고양이 한 마리가 인간이란 족속과 첫 대면을 갖는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화가 나면 열심히 화를 내고, 울 때는 죽기 살기로 울면 그만인 보통 고양이지만, 쥐는 절대 잡지 않는 것을 철학으로 삼는, 당돌한 놈이다. 어느 날부터 중학교 영어선생 집에 기거하게 된 이 고양이놈은 주인의 일상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주인과 그 주변 사람들을 상관하기 시작한다. (물론 인간들은 그 놈이 그러는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그 놈이 보기에, 인간이란 족속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걷지 않는 두 발을 말린 대구포처럼 하릴없이 드리우고 있는 꼴도 우습고, 날로 먹어도 될 것을 삶고, 굽고, 식초에 절이고, 장에 찍어먹는 것도 다 쓸데없는 수고다.
특히 집주인인 영어선생 쿠샤미는 가관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세상사를 달관한 얼굴로 서재에 틀어박혀 있으니 식구들은 그를 대단한 면학가로 알고 있지만, 서재에서 하는 일이란 대개가 낮잠이고 가끔은 읽다 만 책 위에 침도 흘린다.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코털을 뽑아 원고지 위에 심어놓기도 한다. 점잖고 고상한 교양인인 체 하며 하이쿠, 신체시, 바이올린, 수채화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흥미를 가지고 시작하는 쿠샤미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진득하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 자신의 신경성 위염뿐인데, 남들 앞에서는 “칼라일도 위장이 약했네” 하며 문명인의 훈장을 단 듯 으스대나 일기에서는 어떻게 하면 위장병을 나을 수 있을지 궁리하는 소심한 인간이다. 가끔 논리와 이치에 맞지 않는 궤변을 늘어놓는 허풍장이 ‘미학자’ 메이테이도, ‘개구리 눈깔의 전동 작용에 대한 자외선의 영향’을 연구하는 물리학자 간게쓰도, 쿠샤미와 마찬가지로 짐짓 진지하고 심각하나 고양이 눈에는 모두 우습게만 보인다. 집주인은 평범한 보통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고양이 입장에서는 집주인과 함께 살아주고 있을 뿐인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의 한 장면. (출처 http://www2.odn.ne.jp/~ccs50140/cat/index.html 신카이 마코토 공식 홈페이지)
일본 최고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1907)는 고양이의 시선에서 격변의 메이지기를 살고 있는 일본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예리하게 포착한 소설이다. 바깥에서는 러일전쟁이 벌어지고 여순함락의 승전보가 울려도 세상사에는 도통 관심 없는 쿠샤미와 그 주변사람들의 일상을 고양이 한 놈이 관찰하고, 보고하고, 비웃는다. 그런데 바로 여기 이 대목이 중요하다. 전쟁과 같은 비일상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바깥 세계와 단절된 그네들의 하루하루. 고양이가 바로 그 사람들의 일상,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잠입해 들어온 것이다. <장화 신은 고양이>(샤를 뻬롤, 1697)의 환상이나 <검은 고양이>(에드거 앨런 포우, 1843)의 공포가 아니라 낮잠과 코털과 위장병이 있는 일상 속에서 그 놈을 만난 것이다. 근대의 일상이 발견된 자리에 고양이가 있었다.
눈고양이, 코쿤의 일상을 대변하다.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는 전에 없던 고양이 열풍이 불고 있다. 웬만한 동네에는 동물병원이 없는 곳이 없고, 고양이용품점이나 고양이전문 분양숍도 많이 생겼다. 러시안블루, 페르시안, 스코티시폴드, 메이쿤 같은 수입 고양이의 품종이 귀에 익고, 한밤중에 우는 고양이의 ‘냐~옹’소리가 전보다는 덜 음산하게 들린다. 이런 추세에 맞물려서 만화<묘한 고양이 쿠로>, <알바 고양이 유키뽕>, 애니메이션<고양이의 보은>,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가요<낭만고양이>, <뻔뻔한 물루>, 드라마<옥탑방 고양이>, 영화<고양이를 부탁해>, 인터넷 웹사이트<스노우캣> 할 것 없이 고양이는 지금 한국 문화의 전방위에서 활약하고 있다.
혼자 집안에만 있으면 우울해지기 십상인 개와 달리, 밖에 나가 스트레스 받느니 이꼴저꼴 안보고 집에서 뒹굴거리는 게 지상 최고의 낙인 고양이는 새롭게 부상하는 ‘칩거증후군의 사람들’, 소위 코쿤족(cocoon)의 성향을 대변하는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누에고치처럼 안전한 자신만의 공간(집, 차, 사이버 공간 등)에서 ‘나 홀로’ 놀기를 즐기는 이들은, 조직에 대한 충실성과 근면함을 미덕으로 삼는 기성 세대의 가치관과 충돌하면 할수록 누에고치 안의 익숙한 편안함을 포기할 수 없다.
코쿤으로 표상되는 이들은 사람 대 사람이 만나는 직접적인 대면을 부담스럽거나 귀찮은 일로 여긴다. 미니홈피나 블로그와 같은 1인 미디어를 통해 익명의 다수에게 (선택적인) 자기를 알리며, 메신저로 특정의 소수와 소통한다. 인터넷을 통해 ‘혼자 놀기’의 정보를 교환하고, ‘귀차니즘’을 공유한다. 이들에게 ‘면식’은 ‘나이 든 어른들’처럼 얼굴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느라 밥 대신 라면과 자장면 같은 면류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다시 말해, 코쿤들은 기존 사회의 관계 맺기와 소통 방식에 대해 “왜 꼭 그래야만 하는 거지?”라고 묻는 것이다. 이를 테면, 쇼핑을 해도 인터넷이나 TV 홈쇼핑으로 여러 곳의 가격과 품질을 비교하여 물건을 주문하고 택배를 기다리면 되는데, 왜 꼭 다리품을 팔아야 하는지, 왜 직접 눈으로 보고 직접 만져보아야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의아한 것이다. 코쿤들로서는 왜 귀찮게 고생을 사서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주목받은 고양이가 스노우캣(http://www.snowcat.co.kr)이다. 스노우캣은 한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의 분신으로 탄생한 하얗고 뭉실뭉실한 중성의 눈고양이다. 모래성 같은 인간 관계에 애초부터 많은 기대를 걸지 않고, 차라리 혼자 놀고 혼자 즐기기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스노우캣은, 코쿤들에게 취향과 감수성을 선물하고, 그 문화를 공론화하고, 상품화했다. 사람들은 스노우캣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일면을 발견하고 공감했으며, 자신이 누릴 수 없는 여유로운 게으름을 대리만족했다.
그러나 가끔씩 염장밴드의 “오늘도 하루 종일 폐인이로구나. 내일도 그렇겠지. 모레도 그렇겠지” 환청에 시달리는 스노우캣은 따지고 보면 그다지 고양이답지 않다. 함께 사는 고양이의 “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따위에는 관심 없어” 포즈를 디지털 카메라로 열심히 찍어 올린다거나, (‘매일매일’까지는 아니지만) 그림일기를 성실하게 업데이트한다거나, 조용하고 편안한 (물론 커피도 맛있는!) 카페에 앉아 긴 여행을 계획한다거나 하는 것을 보면, 스노우캣은 결코 게으르고 태평하기만 한 보통 고양이가 아니다. 팻 메쓰니의 음악을 좋아하고, 폴 오스터의 소설을 즐겨 읽으며, TV 외화 시리즈물을 꼭 챙겨보는 스노우캣은 누구와도 비슷할 수 있지만 누구와도 같지 않은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전체 노동자 중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고, 청년실업과 신용불량자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이 불안정한 시대에, 사람들은 자신을 어디까지 스노우캣과 동일시할 수 있을지 갸우뚱 하면서도, 스노우캣의 일상을 엿보고 부러워한다. 노동과 여가의 모호한 경계 위에 있는 스노우캣은 먼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지금 여기 자신의 하루하루에 충실함으로써 바깥 세상의 지속적인 불안에 응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시끌벅적 어울려 노는 것보다 혼자서 조용한 카페에 앉아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자신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이는 게, 훨씬 더 넉넉한 삶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는 많지 않아도 좋고, 자주 만날 필요도 없다. 외로워지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삶의 방식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다. 필요한 것은 낯선 사람들과의 서먹한 대면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을 담담하게 기록할 펜과 카메라다.
고양이의 눈,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다.
스노우캣이 언제나 휴대하는 디지털 카메라는 누구나 특별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똑같지는 않은 개개인의 일상을 발견하게 해준다. 빼어나게 아름답거나 장대한 광경이어야 눈길을 주던 기성 세대의 눈과는 다른 시각으로 일상을 조명하는 것이다. 스노우캣으로 대표되는 세대에게 디지털 카메라는 ‘고양이의 눈’이다. 인간과 눈높이가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에, 고양이는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다. 소파 아래 떨어져 있는 먼지 낀 백원짜리 동전, 책과 책 사이에 끼워둔 가스요금 영수증, 퍼덕거리는 작은 새,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 무리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것들이 고양이의 눈에 포착된다.
고양이 세계에서는 “가거나 오거나 앉거나 서거나 똥누고 오줌누는 자잘한 일 모두가 진정한 일기”(<나는 고양이로소이다>)다. 오늘 갔던 카페의 머그잔이나 집에서 만든 파스타, 볕에서 몸을 말고 낮잠 자는 고양이, 이벤트 경품으로 받은 토이, 먹다 만 과자 조각, 지하철의 광고, 퇴근길의 가로등……. 이 모두가 진정한 일기다. 이 모두가 사소하고 익숙한 것이지만, 카메라로 기록되고 미니홈피에 전시되면 더 이상은 사소하고 익숙한 것이 아니다.
사실 일상은 하루 종일 구두 속에서 시달린 발처럼 고단하다. 내일 아침이면 또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에 눈을 떠야 하고, 허겁지겁 출근 준비를 하고, 다시 구두 속으로 발을 집어넣고, 하루 종일 낯선 누군가를 상대하고, 전날과 비슷한 시간에 집으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구두를 벗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보잘것없이 사소하고 어쩌면 비루하기까지 한 일상을 누군가는 응시하고 공감하고, 그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잠재되어 있다. 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낯선 고양이를 집안에 들여놓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고양이와는 세상살이의 복잡함과 사회의 경쟁을 재현하지 않아도 된다. 고양이는 버거울 정도로 충실하지도 않고, 때로는 그 냉랭함과 무심함이 편하기도 한다. 감정을 구걸하지도 정에 얽매이지도 않는 ‘쿨’한 애완동물이 어쩌다 발이라도 핥아주면 그만한 감동도 없을 것이다. 남자점원의 손길이 부담스러워 구두를 사지 못한 여자도 길에서 주워온 새끼 고양이에게는 발을 내맡긴다.(<여자, 정혜>, 2005)
영화 <여자, 정혜>의 한 장면. (출처 http://www.jeonghae.com 여자정혜 홈페이지)
조심스럽게 세계와의 소통이 새로 시작되는 것이다. 쟝 그르니에의 고양이 물루처럼, 곁을 지키는 고양이는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세계와 나 사이에서 다시 태어나는 그 간격을 없애”주는 존재인 것이다.(쟝 그르니에, <섬>)
하여 지금의 고양이 열풍은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의 발견, 즉 일상의 발견과 얽혀있다. 디지털 카메라에 찍힌 수많은 고양이 사진들은 우리 곁에 있는 고양이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한편, 이는 무릎 아래에서 어슬렁거리며 우리의 일상을 다르게 관찰하고 응시하는 존재에 대한 상상화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일상을 응시하면서 역으로 우리의 일상이 응시되기를 욕망한다. 노출의 겹은 물론 자신이 선택할 몫이다. ‘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가 부단히 교섭하는 한 장면이 고양이로 표상되는 일상적 감수성의 부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
이화진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전공은 식민지 시기 대중문화로,
<식민지 영화의 내셔널리티와 ‘향토색’>, <소리의 복제와 구연공간의 재편성> 등을 썼다.
현재, 연세대에 출강하고 있다.
윗 글은 월간 사진예술의 협찬으로 제작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