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정녀 탄생
(저자:로버트 그러마키,임태우 역/출판사:요나출판사)
서론: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마22:42)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약속된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서 왕족의 일원일 것으로 믿어 왔다. 메시아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바로 그분'이어야했다. 그들은 역시 그리스도가 하나님일 것이라는 관념을 거부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모독으로 정죄했던 것이다."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실 수 있었는가?", "어떻게 한사람이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이 될 수 있는가?" 무신론자들과 회의론자들 그리고 자유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은 삼위 중 제 2위의 성육신에 관한 탄핵에 있어서는 하나가 되었다.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대학 조사연구센터에서는 동정녀 탄생에 관하여 긍정적으로 응답한 비율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였다: 회중교회 21%, 감리교 34%, 성공회 39%, 그리스도의 제자들 62%, 연합장로교회 57%, 루터교 66%, 미국 침례교 69%, 루터교 미조리 대회 신자들 92%, 남침례교 99% 등이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사실성은 바리새인들이나 현대 자유주의자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고 영원한 심판을 받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요 8:24).마찬가지로 이것은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에게 있어서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에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누구라 생각하는지 질문하셨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대답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독특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자신의 영적인 이해력을 열어주신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하나님의 일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동정녀 탄생, 한 인격 안에서의 양성의 결합 등도 마찬가지이다.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한 개인이 그리스동의 신성을 수용하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정비례한다. 이것이 달라스 신학교 학장인 죤 왈부드가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이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기독
교의 중대한 사실이다. 기독교 신학의 모든 상부 구조는 그것에 의존한다." 진정한 성육신은 문자적인 동정녀 탄생을 요구한다. 그것은 "같은 동전의 양쪽 면"과 같다.
제1부 동정녀 탄생의 논거
제1장 우리는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
1. 출발점
개신교 정통주의와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옹호된 한 분이신 하나님의 삼위일체개념은 유일한 논리적 출발점을 제공해준다. 뉴올리언즈 침례교 신학교의 전직 신학교수인 사무엘 미콜라스키는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진술하였다. " 하나님께서 삼위일체가 아니시라면 성육신을 조화시키는 방법의 문제는 훨씬 더 곤란해진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 성육신함으로써 나타나신 바 되었다는 두 가지 진리를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에게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적절하고도 실제적인 지식을 갖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그러므로 성경은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고(요 5:39), 아들은 아버지에 관하여 증거한다. 이 두 가지 증거는 일치해야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 혹은 영감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하여 그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해 오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본질에 관하여 편파적이지 않고 참된 이해를 하려면, 인간이 성경의 권위있는 목소리에 그의 이성적 능력을 복종시켜야한다.
2. 삼위일체에 관한 성경적 증거
한 분이신 하나님이 성경 전체를 통하여 가르치신다. 유일신을 섬기라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명령되어졌다(출 20:3). 모세는 이렇게 선언하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신6:4,5) 오직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그의 전인격을 가지고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해야한다. 예수께서도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선언하셨다.(막 10:18 ; 12:29,32) 참조) 하나님께서 그의 기본적인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시라면 어떻게 셋일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라는 것과 '셋'이라는 것이 똑같은 관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지적되어야한다. '하나'라는 단어는 오직 신적 존재의 본질에 있어서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신다. '셋'이라는 단어는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 계신 삼위(三位), 혹은 인격적 구분으로 설명된다. 구약성경에는 한 분 하나님 안에 하나이상의 위(位)가 있음을 확실하게 함축하고 있다.
1) 하나님에 관한 히브리어 이름들 둥의 '엘로힘'이라는 칭호에서 발견된다. '엘로힘'에 있는 '임'은 단수명사 '엘'에 덧붙여진 복수접미사이다.
2) 하나님께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복수 대명사에서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 이러한 1인칭 복수대명사의 사용은 성경의 다른 곳에
서도 역시 나타난다(창 3:22 ; 11:7 ; 사 6:8).
3) '하나'라는 단어의 용법에 있다(신 6:4 참조) 즉, 이 단어는 '하나의 인격' 혹은 '한사람'이라는 두 가지 용례로 사용될 수 있다. 이 용례는 일반적인 것으로(창 2:24 ; 출 24:3 ; 삿 6:16 ; 겔 37:19) 이 구절들은 불변의 동일성으로서의 하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일성안의 복수성을 계시해주고 있다.
삼위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해석들에 기초를 둔 것이다.
1)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론에게 이렇게 축복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셨다. "여호아는 녜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여기에서는 세 번에 걸친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세 번의 축복이 나타난다.
2) 이사야는 스랍들이 이렇게 창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사 6:3) 복수대명사의 용법과 관련하여 세 번의 창화하는 소리를 삼위와 연관 짓는 것은 찬성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점진적 계시라는 면에서 볼 때, 신약성경에서는 인격의 복수성에 관한 이전의 암시를 명백히 하는 '삼위일체' 개념을 강조한 반면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유일한 본질'을 강조하였다. 지금은 삼위일체가 분명하게 보여질 수 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삼위 전체가 역사하셨다. 하나님의 영이 내려왔고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마3:17)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 이름도 단수이다. 그러나 한 분이신 하나님안에는 삼위가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삼위의 개념은 나중에 성경기자들에 의하여 영적인 은사의 경영(고전 12:4-6 ; 성령, 주, 하나님), 축도(고후 13:13 ;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성령), 인간 구원의 계획(벧전 1:2 ; 하나님 아버지, 성령,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도의 생활 보존(유 20-21 ; 성령,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등과 관련되었다.
모든 삼위는 '성부'(롬 1:7), '성자'(히 1:8), '성령'(행 5:3-4) 하나님으로 불리워진다. 이러한 구분은 성육신의 본질과 동정녀 탄생 방법에 있어서 극히 중대한 전제인 것이다. 성부나 성령이 아닌 성자의 위(位)
가 육체가 되는 것이다
3. 교리적 진술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에 의해 계시된 진리이며 성경의 신비이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다.초대교회가 삼위일체에 관한 성경적 교훈안에서 그들의 신앙을 교리적으로 진술하려고 시도했을 때 바로 이 문제에 직면했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4세기)은 이렇게 진술했다. "우리는 삼위로 계신 한 하나님을 경배한다. 그 분은 위(位)들이 혼합되지 않고, 본질이 분할되지 않으시는 단일성 안에 계시는 삼위일체이시다." 교부들은 유일신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 '단일성', '본질' 등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였다.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 325년)는 보다 명백하게 진술되었다. "우리는 한 분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성부에게서 나셨고, 빛 중의 빛이시고, 바로 그 하나님의 하나님이시고, 태어나셨고, 만들어지지 않았고, 성부와 같은 본질이시며,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믿는다." 개혁교회에 의하여 도르트 회의의 표준으로 채택된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에서는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오직 단 한 분이신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 계신다. 신성의 통일성에서 한 본질, 한 권능, 그리고 영원한 삼위,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 성부는 낳으시거나 발출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낳으시고, 성령은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신다." 현대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20세기의 청중들에게 적절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이러한 단어들의 사용을 보류하는 것을 선택해 왔다. 로레인 뵈트너는 이렇게 썼다. "성부, 성자, 성령은 구분될 수 있다. 그러나 분리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각각 같은 수로 구분되는 본질 혹은 실체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종속관계
예수께서 자신에 대하여 그의 대적들 앞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말씀하신 것과 그 후에 그의 제자들 앞에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28)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순인가? 뵈트너는 이렇게 설명한다. "성부에 대한 성자의 종속과 성부와 성자에 대한 성령의 종속은 신성안에 계신 본질적인 생명과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역 방식 혹은 창조와 구속에 있어서의 사역의 분담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구분은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실제적인 삼위일체 사이의 차이로 불려왔다. 전자는 '하나님이 계신다.'라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다룬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라는 차원에서 다룬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 11:3) 이것은 본질적인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인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5. 삼위일체론의 부정
현대 오순절교회의 한 교파는 양태론을 주장하였다. 일반적으로 '오직 예수'집단이라고 알려진 이들은 하나님께서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실 뿐만 아니라 위(位)에 있어서도 하나라고 주장한다. - 한번에 아버지로서, 또 2천년 전에 아들로서, 오늘날에는 성령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 이라는 이름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해 오셨던 방식 혹은 나타나신 모습들로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견해들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다. "내가 너희에게 보낼 보헤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성령이 오실 때에"(요 15:26) 어떻게 동시에 세 가지 양식들이 모두 존재 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같은 위로 설명될 수 있는가? 삼위일체에 관하여 가장 맹렬한 부정은 여호와증인이라고 불리우는 이단으로부터 온다. 그들은 위(位)들을 혼합시켰으며, 본질을 분활하는 삼위일체를 비난해왔다.
6. 결론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 분이 영원한 삼위로 존재하실 때 성육신이 가장 그럴듯하게 설명된다. 미콜라스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성육신 교리'라는 진리에 의해서 '삼위일체 교리'라는 진리를 테스트한다. 그리고 역(逆)은 성립하지 않는다."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하나님이셨다면 동정녀 탄생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성육신은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은 삼위일체임이 틀림이 없게 된다. 이것이 논리적인 결론인 것이다.
제2부 동정녀 탄생의 위(位)
제2장 메시아에 관한 의문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요, 왕이요, 재판장이요, 구원자요, 그리고 하나님일 것이다. 일찍이 그는 "열방의 왕"이요 '영원한 왕"(렘 10:7,10)이신 여호와와 동일시되었다. 여호와는 그들의 왕이 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구원자이셨다. 그는 그들의 죄악과 그들의 정치적 대적들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렘 14:7,8 ;50:34). 다니엘은 그의 묵시적 환상 중에서 본 내용에서 (단 7:13-14), 메시아는 하늘에 계시고, 인자의 경배와 복종의 대상이며, 영원한 왕국의 왕이신 인자(人子)로서 확인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일찍이 '영원한 왕'(렘 10:10)으로 불리웠기 때문에 인자도 역시 신적인 존재여야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삼위일체 개념만이 이 역설적이고 해석적인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 미가는 그 미래의 왕은 다윗의 성에서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미5:2)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영원한 인간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시작도 없이 영원하신 분이시다.
여호와께서 찔림을 받기 위해서는(슥12:10), 사람들의 손에 고통을 당하시는 인간의 경험을 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셔야만 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말라기는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 3:1). 여호와께서는 그 자신의 길을 세례 요한이라는 사자에 의하여 준비하도록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주님(아도나이)을 보내신다. 그리고 역시 주님이 여호와이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사실과 신성 안에 계신 삼위의 복수성과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커버넌트 신학교의 구약 신학 교수인 페인(J.Barton payne)은 이러한 "메시아= 여호와"라는 개념의 분석을 제공해 주었다.
메시아=하나님=예수그리스도
마태는 처녀 잉태라는 사건 속에서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을 보았다(마 1:23;사7:14 참조) 오직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있다. 그리고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스라엘을 자기 죄로부터 구원하실 분이셨다(마1:21).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행4:12;요3:16,17 참조)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이다(시 49:7, 8, 15참조). 그러므로 구속자로서의 예수는 하나님이심이 틀림없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거룩한 자"(사 43:15)라고 주장하셨다. 그 후에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이렇게 알려주었다.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4:34)라고 불렀다. 여호와는 자기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간주된다(사 43:15). 일찍이 그 왕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리라고 예언되었다(슥 9:9). 마태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입성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한 것을 모든 복음서 기자들이 동의하였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마 21:4 ; 슥 9:9 참조).
성경적 예언 프로그램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재림하셔서 그 분의 통치를 확립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면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 19:16). 이러한 왕으로서의 예수께서는 역시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 "(사 40:28)라고 확언(確言)하였다. 물질 세계의 창조도 사도 요한(요1:1)과 사도 바울(골1:16)에 의하여 예수꼐서 하신 일로 돌려진다.
다윗(시 18;20과 한나(삼상2:2)는 여호와를 그들의 반석이요 힘으로 인식하였다. 바울 사도는 모세에 의해서 문자적인 광야의 반석이 내리침을 당한 것은 믿는 자들의 영적인 반석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대한 모형 혹은 상징이라고 주장하였다(고전 10:4; 출17:6참조).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를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을 필요없게 만드시는 "영영한 빛"(사60:19,20)으로 묘사하였다. 영원한 성에서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빛을 제공하실 것이다(계21:23). 하나님의 존재는 영광스러우신 분이시다. 이사야는 그 분께서 모든 영광과 거룩하심 가운데 계신 환상을 본 적이 있었다(사6:1-4). 나중에 사도 요한은 이렇게 주석하였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 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41). 사도 요한은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날에 관하여 이렇게 선언하였다."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피할 자가 있을 것이요"(욜2:32). 베드로는 그의 오순절 설교 중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동일시하였다(행2:21, 22, 25, 34, 36, 38 참조).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영적인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야"(롬10:9,13)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와 같다"(겔43:20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표현이 사도 요한에 의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음성(계1:15)으로 여겨졌다.모든 성경 기자들은 세례 요한이 메시아의 선구자에 관한 예언의 성취라는데 동의한다. " 외치는 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40:3 ; 눅3:4 참조). 세례 요한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길을 예비하였고, 그 분께로 그의 제자들을 보냈기 때문에 사도 요한과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를 이사야에 의해 언급되었던 "주 여호와"라고 인식했음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불변성은 시편 기자들에 의하여 분명히 표현되었다.(시102:25-27).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 보다 우월하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 구절을 그리스도와 연관시켜서 인용하였다(히1:10-12). 그리고 그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히13:8)하신 분이시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언급하셨다. "나 여호와는 변역치 아니하나니"(말3:6) 변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는 역시 변하실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호와 우리의 의(義)"(렘23:6)라는 호칭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의로우신 분이시다. 오직 그 분 만이 의의 근원이 되신다. 오직 그 분 만이 회개한 죄인을 의롭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해서 신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영적인 위치가 발견되는 것이다. 신약 성경 기자들이 여호와와 예수를 동등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제3장 사도들의 주장
성경 기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된 구약 성경 구절들을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에게 신성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불렀으며, 신적인 속성과 사역들을 그에게로 돌렸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사도 요한이 그 말씀의 신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심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도전을 받았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져 보고나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도마는 예수를 그의 인간적인 메시아(나의 주)이시며, 그의 하나님(나의 하나님)으로서 인식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도마의 경배를 받으시고 그를 반박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도마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일시한 것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 9:5).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한 유대인 인간일 뿐만 아니라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1절을 통해 그의 사도직을 변호하면서, 그의 목회 사역의 기원을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가 단순한 인간 이상의 존재이심을 알았다는 의미인 것이다.
바울 사도는 유명한 '케노시스' 구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과거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체"(빌 2:6)이셨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과 동등"(빌 2:6)하신 분이셨다고 진술했다. 여기에 사용된 "하나님과 동등
됨"이라는 말은 태도나 행동의 유사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동일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신자의 기대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우리의 질문은 명백해진다. 그리스도께서 구세주이실 뿐만 아니라 위대한 하나님이신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종말론 - 미래의 사건을 다루는 교리 - 과 헬라어 문법으로부터 주어진다.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성부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리라고 가르친 곳은 없다. 그러나 한결같이 성도들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라고 경고받았던 것이다(요 14:1-3 ; 살전 1:10).
사도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을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요일 5:20). 여기에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있다. 일찍이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이렇게 불렀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2).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것이다(요일 1:2, 4 ; 14:6 참조). 사도 요한은 여기에서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으로 알려진 한 사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 성경 시대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불렀을 뿐만 아니라 그 분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권을 합법적으로 행사하시는 분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분의 탄생이나 성육신 이전의 존재(신성)를 갖고 계신 분으로 본 것이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 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은 이렇게 진술하였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요 1:15). 여기에서 "나보다 먼저"라는 구(句)는 확실히 선재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아마도 영원성을 함축하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그 분에 관하여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히 1:8). 만약 그 분이 영원한 보좌를 갖고 계시다면 그 위에 영원히 앉으실 것이 틀림없다. 또한 그리스도에 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사람들은 마치 해 아래 있는 마른 풀(벧전 1:24)과 같이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동일성은 그 분의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 틀림없다(히 1:10-12 참조).
베드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이렇게 받아들였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요 21:17). 베드로는 그의 도덕적인 완전에 대한 후원으로써 그리스도의 전지하심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사도를 모두는 이 진리를 확인하였다(요 16:30).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으니라"(골 2:3).
사도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분이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분해된 인간의 티끌로부터 몸을 만드실 수 있다. 그러므로 창조는 전능하심의 표현이다. 성경 기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창조자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부활하신 몸으로는 셋째 하늘에서 아버지 곁에 계신다(행 1:9-11 ; 7:56 ; 살전 1:10 ; 4:16). 하지만 역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적인 편재로써 모든 믿는 자 안에 계실 수 있는 것이다(갈 2:20 ; 골 1:27). 그 분의 존재 전체로서 어디에서나 나타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이시다(시 139:7-10).
성경 기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셨다. 그 분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는"(히 7:26)분이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위하여 죄인으로 여김을 받았을지라도 그는"죄를 알지도 못하신자"(고후 5:21)였다고 진술하였다. 베드로는 그 분의 도덕적 특성을 가리켜서 "흠없고 점없는"(벧전 1:19) 분이시라고 덧붙였다. 이것은 결코 어떠한 도덕적인 인물에게도 붙여질 수 없는 표현이었다(롬 3:9-19 참조).
사도 바울의 확신 속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미묘한 참고 사항이 깃들어 있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중보자는 그가 중재하는 양쪽에 동등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인간을 대표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셔야만 했으며, 하나님을 대신하기 위하여 역시 하나님이셔야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오직 한 분의 중보자만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양성(즉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한 인간이셔야만 했던 것이다.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도들의 태도는 이러한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그들은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알았다. 그리고 역시 그들은 그 육체 안에 머물러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셨다.
제4장 그리스도의 주장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셨다. 유대인들과의 논쟁 중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요8:58) 그리스도께서 '내가 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에게 가르쳐 주셨던 바로 그 이름을 스스로 주장하시는 것이다. 여호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히브리어 동사 '존재하다'(hwh)에 접두사(y)를 덧붙인 것을 기본으로 한다. 헬라어에서 이에 해당하는 것은 예수에 의해서 사용된, 같은 단어인 '에고 에이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몇 몇 사건들에 있어서 서술 주격을 부가하심으로써 '나는 ∼이다'(I am)라는 개념을 강화시켰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 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9:5), "나는 문이다"(요10:7), "나는 선한 목자이다"(요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1:25), "나는 길이요 생명이다"(요14:6)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요15:1).
예수께서는 이렇게 확언 하셨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신성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 그들은 동등한 위(位)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요17:1), '거룩하신 아버지(요17:11), 그리고'나의 아버지'(요5:17)로서 하나님을 표현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실 때 결코' 우리 아버지'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제자들이 기도에 관하여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눅11:2)
그 분께서는 역시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하셨다고 주장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에 드린 중보 기도 중에서, 그는 아버지께 이렇게 간구 하셨다.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예수꼐서는 세상의 기초가 생기기 전부터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요17:24) . 그 분께서는 지상에 존재하시기 전에 하늘에 계셨다고 주장하셨다(요3:13; 6:33, 42, 50-51, 58, 62). 그 분께서는 더 나아가 아버지께서 그를 하늘에서 세상으로 보내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요7:16, 27-29, 33-34; 8:18, 26, 42; 16:28; 17:18) 그 분께서는 영원토록 "내가 있는니라"9요8:58)라고 주장하셨다. 부활 승천하신 후 60년이 지나서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1:8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역시 자기 자신의 편재성을 미리 알고 계셨다. 그 분께서는 지상 사역에 있어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보증하셨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그 분께서는 자기의 교훈의 영이나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그들이 있는 중에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몸소 거기에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역시 전지하신 분이시라고 주장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떡에 관한 설교의 결론에서 이렇게 선언하셨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요 6:64상반절). 사도 요한은 이렇게 부연 설명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요 6:64 하반절). 어떻게 그 분께서 아셨는가?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어날 모든 사건들을, 그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완전히 알고 계셨다. 즉 세상을 떠나실 시간(요 13:1), 체포와 계속되는 심문(요 18:4), 그리고 자기가 고난받는 것과 관련된 성경의 성취(요 19:28) 등을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단 한 번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예수께서는 역시 전능하심을 주장하셨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꺠달아 알리라" (요10:37,38) 자기의 주장을 지지해주는 증거로 그가 행하신 이적들을 지적하셨다. 예수께서는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셨고, 중풍병자를 낫게 하셨고, 열병을 제거하셨고, 풍랑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셨고, 귀신들을 쫓아내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고, 소경의 시력을 회복시키셨고, 귀머거리가 듣도록 하셨고, 벙어리가 말하게 하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게 하셨고, 물이 변하여 포도주되게 하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으며,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가셨다.
예수께서는 역시 치료하는 능력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셨다. 예수께서는 소경에게 이렇게 물으셨다."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마9:28).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예수의 옷에 손을 대고 나음을 입었을 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눅8:46).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이러한 선언 때문에 혼란을 일으켰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 8:28 참조).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인 쉐드(William Shedd)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예수께서는 마치 서로 다른 존재처럼, 아버지와 분리되거나 고립적으로는 일하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육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신적인 의지와 사역은 하나이시다. 한 분 하나님 안에 계신 '두 위'(즉, 성부와 성자)는 분리되지 않으시고 함께 일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권세가 가장 크게 나타난 것은 자기 자신의 부활에 서였다. 사도 바울은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자기 자신의 주장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의 생명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8). 영원한 영이시고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죽으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죽음의 상태에서 살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신 상태에서 이러한 권세를 받으셨다. 십자가 위에서 그 분은 그의 영을 떠나보내셨거나 "영혼이 돌아 가셨다"(요 19:30). 이러한 자기 부활의 권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신 바로 그 날에 실현되었기에 훨씬 더 인상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주장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5:23) 그분께서는 우리가 아버지를 향한 믿음처럼 자기를 믿는 똑같은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다(요14:1). 어떠한 선지자나 사도들도 이러한 명예와 자신감을 공표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핵심이 되신다고 주장하셨다. 그 분께서는 택자들을 선택하셨고(요13:18), 그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셨고(요10:3), 그들을 거룩하게 하셨고(요17:19),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고(요16:7,14), 그들을 보호하시고(요10:28), 그들의 육체를 부활시키실 것이며(요5:21),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요5: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교회의 건축자이시고, 소유자이시며, 머리이시다(마16:18).그리스도께서는 더 나아가 죄가 없으시다고 확언하였다. 모든 시대마다 가장 영향력있던 성도들은 그들의 도덕적인 무가치를 고백하였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고(사6:5) 하였고, 욥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을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욥 42:5,6) 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보다 육체를, 즉 종교적 지위나 실력을 신뢰할만하다고 믿고 있었으나(빌 3:4), 하나님 앞에서 그는 "죄인중의 괴수"임을 인정하였다(딤전 1:15). 하지만 예수께서는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것을 인정하시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강제로 자기를 경배하도록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자기를 경배하였을 때, 그 경배자들을 반박하시는 않으셨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경배를 기쁘게 받으셨고, 그렇게 경배하는 사람들을 칭찬하셨다. 예수께서는 성년기에 대중 앞에서 공공연히 경배를 받으셨다(마 8:2). 그리고 그 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경배를 받으셨다(마 28:1 ; 눅 24:52).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이 구약 성경의 주제가 되신다고 주장하셨다. 그 분께서는 자기 대적들에게 이렇게 도전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예수께서는 나중에 이렇게 덧 붙이셨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네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6).
예수께서는 오직 자기 자신 안에 있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네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또한 예수께서는 자기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14:6). 그리고 예수께서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시인하는 것과 부인하는 것이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선언하셨다(마 10:32-33). 성경에서 이러한 배타적인 주장을 한 어떠한 족장이나, 제사장이나, 왕이나, 선지자나 사도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 분의 신성은 예수께서 설교하시는 중에 말씀하신 것과 말씀하신 방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서기관들은 그들이 말할 때마다 권위있는 랍비들에 의하여 확립된 참고 문헌들을 말마다 덧 붙였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2,28,32,34,39,44). 예수께서는 결코 자기 자신보다 더 높은 권위를 지적하신 일이 없으셨다.
그는 아버지의 말씀과 아버지의 뜻을 자기 자신의 말씀과 의지와 동일시하였다(눅 6:46-49 ; 11:28 참조).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권위있는 새 계명을 주셨다.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 마 5:43 참조). 예수의 충성된 제자들은 그 분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죄를 사하시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렘31:34) 그리고 역시 그리스도께서도 이 권리를 주장하셨다.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 사죄는 밖으로 감지되는 것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께서 하신 일은 인간으로서는 훨씬 더 어려워 보이는 일을 하신 셈이다. 만약 그 분께서 말씀의 능력에 의해서 중풍병자를 걸어가도록 했다면, 마찬가지로 그와 똑같은 능력이 그의 죄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다(삼상 2:6). 그런데 역시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과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이러한 개념은 유사한 것이 최후의 심판이다.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아마겟돈에서 이방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하였다(욜 3:12). 예수께서는 감람산 강화에서 이렇게 확언하셨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아..."(마 25:31-32)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중에서 특별한 한 사건은 그 분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 사건은 예수께서 변형되신 사건이다. 예수께서는 지상 생애를 통하여, 신성의 외적인 표현이 실제적인 살과 뼈와 피로 구성된 육체에 의하여 덮여져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만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이다.
제5장 그리스도의 명칭들
나사렛 예수는 성경 기자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동일시되었다. 가장 대중적인 명칭은 '그리스도'이고, 두 번째는 '주님'이며, 사용빈도에 있어서 세 번째는 '인자'이다. 신약 성경에서 84회 발견되는 '인자'라는 명칭은 복음서 외에서는 단지 3회만 나타난다.(행 7:56 ; 계 :13,14) 구약성경에서는 시편 8:4, 단 7:13에서 발견된다. '인자'라는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명칭들 중에서 친히 좋아하셨던 명칭이다. 그 다음의 중요한 명칭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구약성경에서 그 이름은 이스라엘 국가에게(출 4:22),천사들에게(욥 1:6 ; 2:1 ; 38:7), 재판관들에게 적용되었다(시82:6,7) 믿는 죄인들이 회개하였을 때, 그들은 중생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요1:12). 그리고 영적인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갈4:5)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불렀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이와 관련된 명칭이"독생자"이다. 독생자라는 명칭은 요한에 의하여 그리스도에 관하여 오직 5번 사용되었다(요1:14, 18; 3:16, 18; 요일4:9). "독생"이라는 영어 단어는 헬라어 '모노게네스'에서 온 것이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오직 하나 뿐인 종족' 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이 단어는, 나인성과 어떤 아버지의 귀신들린 아들에게(눅9:38),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묘사할 때(히11:17) 사용되었다. 이중에서도 맨 마지막에 나온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련성이 있다. "아브라함은 시험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히11:17.18) 그러므로 이삭에게 그리고 오직 이삭을 통해서만 아브라함 언약의 약속들, 즉 장자권과 축복들이 주어졌다. 이삭은 약속된 상속자였기 때문에 독특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독특하셨는가? 그 분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아버지의 영광이 나타났으며(요1:14), 사람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셨고(요1:18),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셨고(요3:16),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믿는 신앙 여부에 따라서 구원과 멸망의 통로가 되셨다(요3:16 ; 요일4:9).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상속자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독생자가 되셨는가? 독생자라는 명칭은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혹은 인간적인 출생을 통하여 아들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은 메시아적 선언이 중심을 이룬다. "내가 영(令)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 히1:5; 5:5참조)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세례와 관련지어서 결론을 내렸다. (마3:17).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미 열두 살 되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인식하고 계셨다(눅2:49).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을 받으신 것이다. 이러한 기름부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보다는 오히려 그 분의 기능(즉, 설교와 치유 사역)과 관련된 것이었다(눅4:18-21; 행10:38참조).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교부들의 신학적 견해를 따라서 이러한 탄생을 "성자의 영원한 탄생"이라고 불러왔다. 그들은 '오늘날'이라는 것은 그 선언 자체만큼이나 영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것을 가리켜 "우주적 현재"라고 부른다. 미코라스키는 그 탄생이 하나님의 창조적 의지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아버지(성부)라는 명칭이 영원한 실체라면 , 아들(성자)이라는 명칭도 마찬가지로 영원한 실체로 간주되어야 한다. 가장 수용할 수 있는 타당한 견해는 그 영원한 선언이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에 있어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죤 라이스(John R. Rice)는 "독생자"라는 용어를 오직 그리스도의 인간적 기원에만 해당한다고 말하였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의 잉태 방법에 관한 질문에 대답할 때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
컬으리라"(눌1:35). 영어의 "shall be born"이나 "begotten"은 똑같은 헬라어 단어로부터 온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항상 탄생의 과정을 포함한다. 영적인 신생(新生)은 성령의 역사를 필요로 한다(요3:5 ;벧전1:23).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중요한 명칭은 '맏아들'(firstborn)이다. 헬라어 단어인 '프로토토코스.'는 신약 성경에서 9회 사용되었다. 기독론과 관련되지 않은 유일한 구절은 열 가지 재앙들 중에 마지막 재앙인 죽임당한 애굽의 장자들에게 적용된 경우이다(히11:28).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의 맏아들로 알려지셨고(마1:25; 눅2:7),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셨고(롬8:29), 모든 피조물 보다 먼저 나신 분이시고(골1:15),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고(골1:18;계1:5), 하나님에 의하여 세상 안으로 이끌려 들어오신 맏아들이시며(히1:6), 교회의 머리가 되신 분이시다(히12:23). 다음과 같은 구절은 사도 바울의 주요한 기독론의 핵심을 제공해준다. "그[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1:15) 그 구절은 그리스도의 선재나 모든 창조를 주관하신 주권과 확실하게 관련된다. 이같은 사실은 '왜냐하면'(for) 으로 시작되는 확실한 진술(골1:16-18)에 의하여 증명된다. 창조의 권세가 그리스도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의 대리자요, 목표이며, 동시에 보전자이셨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으로서 그 분의 본질과 우주의 창조자로서의 관계성으로 인하여 장자이시기 때문이다.
요약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행동들과 진술들을 통하여 확실하게 하나님이심을 주장하셨다. 신약 성경 기자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께서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된 구약 성경 구절들을 그리스도께 적용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들 자신의 특수한 주장들을 내세웠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성경의 표현들이 옳다고 한다면, 그 분은 하나님이심이 틀림없다. 우리가 한 번 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세상 안으오 들어오심이 초자연적인 역사가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되는 유일한 논리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위한 통로를 가장 적절하게 제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동정녀 탄생"인 것이다.
제3부 동정녀 탄생의 성(性)
제 6장 누가의 증언
누가는 '사랑받는 의사'(골4:14)이며, 사도 바울의 선교 동역자요, 두 권의 성경(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다. 비록 누가는 정식 사도가 아니었지만 그의 저작들은 그가 사도 바울과 친밀한 협력 관계를 가져왔기 때문에 사도적 권위가 부여된다. 틀림없이 누가는 디모데처럼(딤후2:2) 사도 바울로부터 신학적인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누가복음은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2년째 감옥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에 기록되었다(행24:27, 주후56-59년)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포함하는 사도 바울의 많은 저작들을 섭렵한 후에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누가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양성(兩性,즉 신성과 인성)에 대하여 이러한 개념들을 개인적
으로 가르치고,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 틀림없다. 누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사도 바울의 신념들이 반영된 신학적인 기술로 만들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눅1:1-4]
누가는 사도 바울과 함께 팔레스타인에 있을 때 입수 가능한 자료들을 개인적인 면담을 통하여 쉽게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사도들과 요한, 마가, 70인의 제자들 중의 몇몇 사람들(눅10:1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돕던 여인들(눅8:2,3), 초기의 회심자들(행21:16참조), 예수의 아버지가 다른 동생들, 그리고 아마도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서까지도 예수에 관한 자료들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누가는 '근원부터'(아노덴)확실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누가의 지식이 직접적이고 신적인 계시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그가 '신생'(新生)이라는 단어, 즉 '거듭난다'(요3:3) '의에서부터'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누가는 '근원부터'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탄생과 유년기에 관련된 사건들을 언급하고 있었다고 결론짓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오직 누가만이 근원적인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즉 세례요한과 예수의 탄생 고지(告知),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에 관한 기사들, 엘리사벳과 마리아와 사가랴의 경배 찬양, 예수의 할례, 예수께서 생후 40일이 지난 후 성전에서 보이신 일 , 시므온과 안나의 경배, 그리고 예수의 어린 시절의 사건 등을 다루고 있다. 누가가 동정녀 탄생을 "우리 중에 이루어진 믿을만한 것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특별한 사건의 '확실성'을 얻기 위하여 누가는 나이 많은 마리아와 대화했을지도 모른다. 이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미묘한 암시가 다음의 표현에서부터 번득임을 볼 수 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눅2:19, 33, 51) 누가는 모든 일들을 철저하게 검토함으로써 데오빌로에게 확신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누가는 의사로서 동정녀 탄생의 사실성을 그의 책 전체를 통하여 같은 논조(論調)로 언급하고 있다.[눅1:26-38] 기록에는 초자연적인 어조가 충만하게 배어있다. 즉 천사의 현존과 전언(傳言), 하나님의 행동 , 성령으로 덮으시는 사역 등이 그것이다. 윌버 스미스(wilbur smith)는 이렇게 추론하였다. "기독교의 초자연성은 기독교의 설립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성에 뚜렷하고 견고하게 의존하고 있다." 말구유에서 십자가까지 예수의 생애는'특별하다'라는 단어로 특징지을 수 있다.
마리아는 처녀임이 확인되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만났을 때 확실히 마리아는 처녀였다. 이 구절에서 처녀라는 단어는 두 번 언급된다(눅1:27). 그리고 천사의 예언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은 이같은 결론을 지지해준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1:34) 마리아는 비록 여전히 약혼기간이었으나 요셉이라는 합법적인 남편을 갖고 있었다. 만약 여자가 약혼기간에 임신을 하게 되면, 그녀는 부도덕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은 그에게 걸려있는 어떠한 간통의 조짐이 없이 그 계약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녀의 약혼기간 전이나 혹은 약혼기간 중에도 요셉을 포함한 어떤 남자와도 성 관계를 갖지 않았다. 천사가 사가랴에게 가서는 그의 아들인 요한의 탄생에 대하여 일려준 반면에 ,예수의 탄생을 알려주기 위하여는 어머니인 마리아에게로 갔다. 비록 나중에 한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났을지라도, 그 때는 이미 마리아에게 예수가 잉태된 것이 나타난 후였으며, 요셉도 마리아의 임신을 알아차린 이후였다(마1:18-25). 이것이 바로 요셉이 예수의 친아버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실증해 주는 것이다. 마리아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졌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기 때문에 거룩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영원하신 인격이 거룩하시며, 이같은 메시아적 과업을 위하여 분리되셨기 때문에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기 때문에 거룩하셨다고 말씀하셨다(요10:36). 마리아의 난소에서 난자가 생산될 때부터 예수의 실제적인 탄생에 이르기까지, 마리아의 태중에서의 태아의 상태는 전적으로 성령의 통제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 아래 있었다. 이같은 성령의 섭리 아래에서 유산이나 자연 분만시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결함들로부터 보호되었다.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는 그들의 약혼 전이나 약혼 후에도, 그리고 마리아가 잉태되기 전이나 잉태된 후에도 예수의 탄생 전까지는 결코 성 관계가 없었다. 즉 요셉과 마리아 사이의 최초의 성 관계는 예수의 탄생 이후에 있었던 것이다. 누가가 요셉과 마리아를 '그(예수)의 부모'(눅2:27-41)로서 언급한 사실은 고백이나 모순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마리아는 예수의 법적인 그리고 정상적인 친어머니였다. 요셉은 마리아의 정혼한 남편으로서, 그가 예수의 할례시에 '예수'라고 아들의 이름을 지었을 때 비로소 법적인 아버지가 된 것이다. 유대 공동체에서는 요셉을 역시 예수의 정상적인 친아버지로 생각하였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4:22) 누가는 항상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부모'라는 표현과 다른 표현을 비교하여 사용하였다. "요셉과 그(예수)의 어머니"(눅2:33,43) 라는 구(句)는 그러한 예를 제공한다. 만약에 예수께서 그들의 친아들이었다면, 왜 누가가 요셉과 마리아를 "그의 부모" 혹은"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언급하는 것을 계속하지 않았겠는가? 시므온은 예수의 다가오는 죽음에 관하여 말할 때에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예수께서 열 두 살이셨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여행길을 떠났고 예수만 우연히 예루살렘에 남게 되었다. 그들은 나중에 성전에서 장로들과 함께 대화 나누고 있는 예수를 발견하였다. 그 때에 마리아가 예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2:48). 동정녀 탄생은 그 당시에는 설명하기에 불가능하였다. 마리아는 이러한 방식으로 요셉과 예수의 관계를 표현해야만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렇게 반응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예수께서 최초로 말씀하신 이같은 기록을 볼 때 , 예수께서는 인간의 발달에 있어서는 단지 열두 살밖에 되시지 않았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의식을 갖고 계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7장 마태의 증언
누가는 마리아가 잉태하기 전에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알려준 탄생고지(誕生告知)를 기록한 반면에, 마태의 기록에서는 잉태된 후에 천사들이 요셉에게 설명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마1:18-25] 무엇보다도 먼저 이 구절에서는 요셉과 마리아가 합법적으로 결혼 혹은 약혼했다는 것을 밝혀준다(마1:18). 마리아는 두 번씩이나 '그의(네) 아내' 라고 불리워졌다.(마1:20,24) 그리고 요셉은 '그녀의 남편'(마1:19)이라고 불리워졌다. 비록 요셉과 마리아가 합법적으로 결혼했을지라도 그들 사이에 결코 성적인 관계는 없었다. 요셉은 마리아와"동거하기 전에"(마1:18) 그녀가 잉태된 사실을 발견하였다. 요셉이 마리아를 그의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은 , 대중들이 볼 때는 이제 막 합법적인 육체적 결합으로써 혼례가 끝나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께서 탄생하시기까지는 계속해서 성관계를 절제하였다(마1:25)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마리아는 그녀가 요셉에게 충실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인(神人)이신 메시아의 인간 어머니가 되기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천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마리아의 도덕적 순결성을 변호하셔야 할 필요가 있으셨던 이유이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들여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1:20). 마태 자신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에 관한 진술을 확신하였다(마1:18 참조) '두려워 말라'는 명령은 두 가지의 중요성을 갖는다. 요셉은 그의 아내의 간음을 두려워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와 헤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물론 마리아는 어떤 다른 남자와도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요셉은 마리아를 그의 집으로 데려오고, 그 아이의 이름을 지으라는 지시를 받았다(마1:20,21).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은 요셉이 공식적으로 그 아이의 법적인 아버지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일을 하였다(마1:25)
천사가 사람들에게 전사는 전형적인 탄생 고지(誕生告知)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주목해 보라. "그녀가 당신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창17:19)과 사가랴(눅1:13)에게 사용된 표현이다. 아브라함과 사가랴는 둘 다 사라와 엘리사벳의 잉태에 있어서 가가 성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에 있어서 인간적으로 행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즉, 성행위가 없었다) 확실히 성령의 역사는 마리아의 잉태에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그 탄생 기사와 마태복음 전체의 중심적인 묘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마1:1,18 참조). 마태복음의 처음 두 장(章)에서는 마태가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굳게 믿었다는 다른 지시들이 있다. 마태는 족보의 나열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문학적 양식을 사용하였다. 즉, "A가B를 낳고, B가C를 낳고...."(마1:2-15)라는 형식을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마태가 요셉과 예수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자리에 이르러서는 갑작스럽게 그의 문체를 바꾸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1:16, And Jacob beget Joseph the husband of Mary, of whom was born Jesus, who is called Christ). 여기에 사용된 영어 단어" whom'은 헬라어 관계 대명사 여성 단수 속격인 '헤스'의 번역이다. 이 관계 대명사의 선행사는 남성인 요셉이 아니라 여성인 마리아만이 될 수 있다. '낳다'라는 단어가 사용된 모든 형태는 ,마태가 마리아에 의한 예수 탄생을 단순과거 수동태 직설법으로 연결시키기 전까지는 전부 다 단순 과거 능동태 직설법이었다. 이러한 뜻밖의 변화들은 요셉이 예수를 낳은 것이 아니라, 그는 다만 마리아의 남편일 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마태복음 2장 전체를 통하여, 마태는 마리아를 '예수의 어머니'(마2:11.13, 14, 20, 21)로서 동일시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결코 예수의 아버지로서 지명되지 않았다. 헤롯의 적의(敵意)에 대하여 천사가 요셉에게 경고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마2:13). 나중에 천사는 가야 할 장소만 바꾸어서 똑같은 명령을 하고 있다.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마2:20) 두 번에 걸쳐서 천사의 명령에 순종할 때마다 마태는 요셉이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갔다고 기록하교 있다(마2:14,21). 마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애굽에 체류하신 것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마2:15 ;호11:1 참조)라고 하신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마태의 증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만큼이나 맑고 투명한 것이다.
제8장 교부들의 증언
복음주의자들의 교리적 신념은 고대의 성직자들이나 장로들이 믿었던 것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술에 근거를 둔다. 만약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사실을 믿지 않았다면 , 우리가 이 교리를 전통적이고 근본적인 진리라고 지적할수 있겠는가? 사도 시대의 교회들의 신념과 2세기 교회들의 신념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주후 110년)는 그의 저작들인 에베소 서신(To the Ephesins), 서머나 서신(To the smyrnaeans), 마그네시아 서신(To the Mahnesians), 트랄레스 서신(To the Tralloans)에서 동정녀 탄생을 변호하였다. 아리스티테스(Aristides, 주후 125년)는 '로마 황제에게 보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변증서'( Apology for the Christian to the Roman Emperor)에서 동정녀 탄생 교리를 변호하였다.오리겐(Origen)은 3세기 전반에 그의 유명한 책인 ' 셀수스에 대항하여'(Against Marcion)라는 글에서 동정녀 탄생을 변호하였다. 약 5-6세기경에 고올(Goal)에서 발표된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은 주후 200년경까지 소급되는 고대 로마 교회의 세례 고배에 기초를 둔 것이다. 터툴리안과 이레니우스는 2세기 중반에 로마 교회의 세례 고백을 사용하였다. 중요한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으시고" 어느 누구라도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믿지 않고서는 기독교 회중 가운데 받아들여질 수 없었으며, 참된 신자로서 인정될 수 없었다. 미국 개혁교회의 원로 목사 중의 한 사람인 토마스 보슬루퍼(Thomas Boslooper)는 그의 최근 저작인'동정녀 탄생' (The Virgin Birth)에서 이렇게 결론 지었다. "니케아 회의 이전의 교부들과 니케아 시대의 교부들, 그리고 니케아 회의 이후의 교부들로부터 우리에게 보존되어 온 문헌들을 이그나티우스에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동정녀 탄생의 주제가 서로 다른 많은 장면들 속에 위치한 보석으로 취급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구속자의 기원에 관한 설명, 로고스가 세상 안으로 들어오게 된 방법에 관한 질문의 답변, 그리스도의 양성(兩性)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데 필요한 도움, 그리고 마리아 숭배사상(Marianim)의 기초가 되어온 것이다"
제9장 잘못된 개념들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나누어질 수 없는 3요소를 형성한다. 이 요소들이 논리적이고 성경저인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세 가지가 전부 받아들여지든지 아니면 거부 거부되든지 해야 한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 그러나 그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아니었다. 이러한 견해는 동정녀 탄생의 함축된 의미들과 씨름하는데 있어서 실패하고 만다.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문자적인 동정녀 탄생은 부인하지만 동시에 성육신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한다. 이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예수꼐서는 요셉과 마리아가 자연적으로 낳은 아들이라고 믿는다. 성육신의 정의에 의하면, 성육신이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육체가 되신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실제로 하나님이시라고는 결코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성을 신성화하는 시도이며, 사람을 하나님으로 만드는 시도인 것이다. 둘째로, 성육신은 변질(예를 들면 화체설 등)을 포함하지 않는다. 성육신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셨다. 처녀잉태 전에는 성자 하나님께서는 오직 신성만을 소유하고 계셨다. 처녀 잉태 사건 이후에 성자 하나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둘 다 소유하게 되신 것이다. 성육신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의 양성의 영원한 결합으로 나타났다.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도 예수꼐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셨다. 예수께서는 처녀 잉태시대에 그 분의 신성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그 분의 사망시에도 인성을 버리신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성육신과 변질은 두 개의 정반대되는 개념인 것이다. 셋째로, 성육신은 단순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인 신현(神顯, Theophany)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참된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은 9개월의 태아기와 자연적인 아기의 출생, 그리고 정상적인 인간 발달을 포함하는 것이다. 넷째로,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이 마리아를 ' 하나님의 어머니'가 되도록 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였다.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 라는 인간을 낳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성자 하나님께서 그 분의 성육신에 있어서 취하신 인성을 낳을 것이다. 다섯째로, 비슷한 오류는 성령을 예수의 인성의 아버지로 만드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어머니가 아닌 것처럼 성령께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아버지가 아니시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인간들은 되셨으나 항상 성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여섯째로,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은 마리아의 무흠수태 (無欠受胎, 혹은 무원죄 잉태 , Immaculate conception)를 포함하지 않는다...아담과 하와의 모든. 후손들처럼, 그녀는 본질과 행동에 있어서 죄인이었다.(롬3:23; 5:12). 오직 성령께서 지금의 크신 능력으로 마리아 덮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에 의해서만 그녀의 죄 있는 성격이 태아에게 감염되지 않도록 예방될 수 있었다. 은혜란 인간의 장점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호의(好意)의 전달인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는 다른 다윗의 처녀 후손 보다 도덕적으로 더 나은 것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가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영적인 젊음 여성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필요하셨기 때문에 구속자의 통로로 마리아를 선택하였다. 마리아는 그녀의 인격 안에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밖에서부터 혹은 은혜를 받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 영원한 처녀성(處女性)을 포함하지 않는다. 요셉이"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였다"(마1:25)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요셉이 예수의 탄생 이후에는 마리아와 성 관계를 가졌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의 탄생 이후에 그들 자신의 아이들을 가졌다는 경의 다른 암시들이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마리아의 처녀성은 요셉과 그녀 사이의 최초의 성행위에 의하여 끝나는 것이다.
제10장 자연과학적 암시들
어떻게 인간 생명이 시작되었는가? 어떻게 인간 남자의 수정 없이 마리아의 태중에서 인간 생명이 시작되었는가? 어떠한 생명체도 살아있는 피조물을 생산하기 위하여 수정 없이 난자에서 발달할 수 있겠는가? 과학자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처녀생식(處女生殖)'혹은 '단성생식'(單性生殖)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볼 때 '동정녀 탄생'을 의미한다. 램(Ramm)은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결론을 내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생물학적인 기적이다. 기적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인 증명이 가능하지 않으며, 생물계의 처녀생식에 관한 유추는 부적절한 것이다. 그것의 정당화를 위해서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어야 하며, 역사적이고 그것의 정당화를 위해서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어야 하며, 역사적이고 신학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동정녀 탄생에 관한 어떠한 생물학적인 증거도 제공할 수 없다. 그리고 역시 우리는 이 생물학적인 기적을 정당화 할 수 있다" 여자가 난자를 공급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예수께서 '여자의 후손'(창 3:15)이 되실 수 있겠는가? 마리아는 신적으로 창조된 인성을 태중에 기르고 출산하는 통로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실제적인 어머니였다. 마리아는 그녀 자신의 태중에 성자 하나님께서 들어오셨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자신의 태중에 난자가 성령의 감찰하시는 사역 아래에서 인간이나 신적인 수정 없이 잉태하였던 것이다.
제4부 동정녀 탄생의 결과
제11장 예수는 참으로 인간 이셨다.
참된 인간성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영원한 본질에 있어서는 원래 육체가 아니시고 영이시다(요4:24) 그리고 역시 하나님께서는 그 분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창1:27). 그러므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단지 신체적인 유사성만은 아니다(신4:15, 16:사 40:18-25 ;롬1:23; 딤전1:17 ;6:16 참조) 성경의 증언은 명백하다. 예수께서는 참된 인간이셨다. 사도 요한은 "말씀(그리스도)이 육신이 되어"(요1:14)라고 기록하였다. '되어'(was made)라는 동사는 헬라어단어' 에게네토'(단순과거 직설법 중간태 이포넌트 동사)의번역이다. 문자적으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육체가 '되시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육신의 모양은 '죄있는' 육신과 관련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 가운데 계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악한 생각과 악한 행동을 하는 죄성을 갖고 계시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에 있어서 천사가 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신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참된 인간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첫째, 예수께서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출생하셨다(마2:1; 죽2:11). 성령께서 능력으로 덮으시는 사역과는 상관없이, 마리아의 임신은 인간의 다른 어느 어머니의 경우와 다른 것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세례 받으시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결코 어떠한 기적도 일으키시지 않았다. 사도 요한은 갈릴리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이 실제적인 최초의 기적이라고 진술하였다(요2:11).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셨지만, 그 분의 인성은 참되고 완전한 인성이었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이 참으로 인간이셨다. 우리와 다른 차이점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예수께서는 두 가지의 중요한 예외 사항을 빼고 여느 아니, 여느 소년, 여느 청년들과 같이 자라나셨다. 그 두 가지의 예외사항은 "예수께서는 죄성이 하나도 없으셨다"는 사실과 "예수께서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인간적인 발달은 이간을 위한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을 반영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정상적인 육체적 경험들을 하셨다.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신 것뿐만 아니라 죽으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는 금식하신 후에(마4:2) 그리고 주무신 후에 배가 고프셨다(마21:1180. 또한 예수께서는 여행하신 후에(요4:7) 그리고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시는 동안에 목이 마르셨다(요19:28) 예수께서는 역시 정상적인 인간의 감정을 체험을 하셨다. 그분께서는 죄의 유혹을 받으셨다(마4:1-11).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편견에 대하여 변론하셨다.(막3:5). 또한 자기 제자들의 교만에 분노하셨다.(막10:14). 예수께서는 정상적인 영적인 경험을 하셨다. 그 분께서는 금식하셨다.(마4:2). 그리고 그 분께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복종하셨다(마4:4, 7, 10) 또한 예수께서는 기도하셨다(마14:23). 예수께서는 항상 성부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을 가지시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민감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있는 사역에 완전히 굴복하셨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갖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마26:38) 성육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인성에 결합되셨다. 예수께서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에 있어서 그 분의 인간성 전부나 일부를 내던져버리지 않으셨다. 그의 사망시에 죽을 수밖에 없고 썩을 수밖에 없었던 몸은 영원히 죽지 않고 썩지 않는 몸으로 변화되었다.
제12장 양성일위(兩性一位)
성자 하나님께서는 처녀 잉태를 통하여 참된 인성을 획득하셨다. 하지만 어떻게 같은 한 인격(位) 안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본질(性)이 존재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양성(兩性, 즉 신성과 인성)의 본질적 연합은 여전히 최고의 역설로 남아있다.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인 벌코프(Berkhof)은 이렇게 올바로 기록하였다. "한 인격 안에 계신 양성의 교리는 인간의 이성(理性)을 초월한다. 그것은 초감각적인 실체의 표현이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을 때에도, 인간의 생명에 관한 어떠한 유추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 이성에 관한 어떠한 지지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근거한 믿음으로써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정통 복음주의에서는 대체로 그리스도 안에 계신 신성과 인성의 복합적인 결합을 묘사하기 위하여'성'(性, nature)이라는 단어와 '위'(位,person)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동의한다. 이 두 개념이 함께 사용될 떄, "'위'란 독립적인 실체이며 개성이 부가된'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성을 가지신 위격(位格)이시다. 천사는 천사적인 성을 가진 위격이다. 사람은 인성을 가진 위격이다. 복음주의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이 진술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분 하나님 안에 계신 삼위(三位) 가운데 한 위이시고, 성육신 후에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개의 성을 가지시지만 여전히 한 위이시다."
성경기자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었다. 그들은 같은 문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을 언급하였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3-4).성경기자들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육신적으로는 사람이시며, 영적으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조금도 모순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인신(人神)이 아니라 신인(神人)이시다. 이 복합 형용사에 있어서 왜 신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에 선행(先行)해야 하는지에 관한 확실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인간이 되시기 전에 하나님이셨다. 그 분은 육체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양성(兩性)을 가지신 것이지 양위(兩位,두 개의 인격)를 가지신 것은 아니다. 처녀 잉태시에 예수께서는 이미 인간이었기 때문에 인성을 획득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새로운 속성을 얻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종류의 의식을 가지신 한 인격이셨다. 예수께서는 신적인 의식과 함께 역시 인간적인 의식도 갖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역시 두 개의 의지를 가지신 한 인격이셨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양성(두 개의 본질인 신성과 인성)을 가지셨다면, 그 분께서는 두 종류의 의지, 즉 신적인 의지와 인간적인 의지를 가지셔야만 한다. 양성은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서 연합에 의하여 변하지 않았다. 신적인 특성과 행동들 그리고 인간적인 특성과 행동들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혹은 인간적인 명칭들 아래에서 한 인격에게 귀속될 수 있다. 양성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지냄과 부활과 승천에 의해서도 변하지 않았다. 양성은 한가지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에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제13장 예수의 무죄성
잉태의 순간에 부모는 그들의 후손에게 하나님의 속성에 반대되고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을 행하려는 경향성을 지닌 죄성(罪性)을 물려준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그리고 그 역(逆)은 성립되지 않는다. 니고데모나 사도 바울과 같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도덕적인 사람들도 영적인 중생을 통한 인생 변화의 체험을 가져야만 했다(요3:3 ;빌3:4-9 참조)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남자와 여자로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 그들은 완전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역시 그들은 죄성을 갖고 있자 않았으며, 어떠한 악한 생각도 하지 않았고, 어떤 악한 일도 행하지 않았다. 그들이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 그들은 죄인이 된 것이다. 그 후에 그들이 획득한 죄성은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가되었다.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시며,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우신 분이라고 확실하게 가르쳐 준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자"(고후5:21)라고 말하였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15).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그의 대적들에게 이렇게 대항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8:46) 예수께서는 "항상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요8:29") 행하신다고 주장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오셨다.(요15:10)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들을 죄인들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결코 어떠한 개인적인 죄나 도덕적인 죄가 있음을 시인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죄와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위하여 간구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와 같은 기도를 요청하시지 않았다.
게다가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성전에서 동물 희생 제사를 드리셨다는 아무런 성경의 암시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 도덕법과 시민법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희생 제사 제도인 의식법을 세우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종교적인 상인들을 성전으로부터 쫓아내시고 성전에서 가르치셨다,그러나 예수께서는 결코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속죄해야 할 아무 죄도 없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 분의 생애에 있어서,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셨다.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 이전에 원래 거룩하고 무죄하신 분이셨다. 그러나 죄있는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기 위하여 동정녀 탄생이 일어나야만 했던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히4:15).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히2:18)도우시기 때문이다.
제14장 신조들의 문제
그리스도안에서 양성의 위격 연합으로 이루어진 성육신의 개념이 교리적인 혹은 신조의 고백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신조들은 믿음과 행위의 기초는 아니다. 오직 성경만이 믿음과 행위의 기초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고, 교회에서의 교제의 한계를 정하고 이단적인 사상들을 테스트하기위해 성경의 교훈들을 신조의 진술로 표현하기를 원하였다. 주후 325년경에 선포된 니케아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교회의 교리적 표준의 하나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만물이 생기기전에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신, 독생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믿는다. 그분은 빛 중의 빛이시고, 바로 그 하나님의 하나님이시고, 만들어지지 않으시고 태어나셨으며, 아버지와 같은 본질이신 존재이시다. 그분에게서 모든 것이 창조되었으며, 우리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동정녀 마리와 성령에 의하여 성육신이 되셨으며, 그리고 인간이 되셨다." 칼케돈 신조에서는 더 나아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혼합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분할되지 않으며, 분리되시지 않으시는 양성(兩性)을 소유하셨다." 5세기에서 6세기경에 고울(Gaul)에서 고대 로마의 세례고백으로 기초로 만들어 진 가장 유명한 사도 신경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신조들은 교회의 전통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 분의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5부 동정녀 탄생의 목적
제15장 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는가?
1.인간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함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에 대한 어떤 것을 계시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창조 사역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역시 각 개인의 원래적인 부분으로 형성된 하나님의 형상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다. 브루스(F. F. Bruce)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애속에서 정확하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보는 것과 아버지를 보는 것은 똑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시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경험들을 함께 체험하셨고, 인간들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었을 때 발생하였다.
2. 인간들에게 구속(救贖)을 제공하시기 위함
하나님께서는 임의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다. 재판관의 역할은 "의인은 의롭다고 하고 악인은 정죄"(신 25:1)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죄인이 의롭게 되지 않는다면, 결코 그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실 수 없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아들]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있는 인류의 중보자가 있어야만했다. 유일하게 적합한 중보자는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실제적인 성육신을 통해서였다.(딤전 2:5) 인간 자체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대속에 의하여 형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대신하여 단번에 무한하고 영원한 죽음의 고통을 받을 수 있으셨다.
3. 메시아 프로그램을 완성하시기 위함
그리스도께서는 공식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구약성경이 자기를 나타냈다고 선언하셨다(눅 24:27,44 ; 요 5:39,46). 메시아에 관한 구약성경의 계시는 초상화라기보다는 직소퍼즐로 간주되어야한다. 다양한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점진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퍼즐조각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예언은 다른 모든 예언서들과 고립되어서 고찰되어서는 안된다.
제16장 이사야 7장 14절의 성취
천사가 요셉에게 마리아가 잉태된 것은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한 후에, 마태는 이렇게 주석하였다. "이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2,23) 마태가 인용한 구약성경은 이사야서 7장14절로 마태는 이 예언구절의 성취를 확실히 보았다.
제 17장 족보상의 딜레마
신약성경에는 두 개의 중요한 족보들이 포함되어 있다(마 1:1-17 ; 눅 3:23-38). 그 족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바로 두 개의 복음서들에서 발견되지만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족보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에게까지 추적될 수 있는 육체적이고 합법적인 조상들이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마태가 요셉의 육신적 선조를 기록하였고, 누가는 마리아의 육신적 선조들을 나열하였다고 결론짓는 것이 최상의 결론이다.
육신적으로 예수께서는 아담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나단을 통한 다윗의 아들이셨다. 예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이러한 육신적인 상속 혹은 권리를 받으셨다. 요셉과 마리아가 합법적으로 약혼했으며, 결국 결혼에 의하여 육신적으로 결합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요셉의 장남이라고 법적으로 인정되셨다. 그러므로 다윗으로부터 솔로몬과 여호야긴과 요셉에게 전가된 합법적인 통치권을 포함하는 장자권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
제6부 동정녀 탄생의 부인
제18장 잘못된 교훈의 맹공격
구두로 전해진 하나님 말씀이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진정성은 줄곧 공격아래 있어 왔다. 진리의 부인은 노골적인 거절에서부터 미묘한 침묵에 이르기까지 많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단은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한 것처럼 하는 것에 따라서 흔히 결정될 수 있다. 이러한 공격들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달아나서도 안되며, 속담 그대로 머리를 모래 속에 숨겨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떠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 논쟁은 직면해야 한다.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에 관한 의문은 단지 학문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의 문제이다. 그리스도인과 모든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은 성경의 영감과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성,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에서의 대속, 그리고 육체부활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순진하고 잘 속지 않도록 해야한다.
1.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
사도 바울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선포되지 않은 예수(고후 11:4), 즉 다른 예수를 설교하는 목회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동정녀 탄생의 역사성에 대한 논리적인 거부로 귀결되었다.
1) 가현설자들(Docetists): 예수 그리스도의 물질적인 몸을 포함하는 참된 인성을 소유를 부인하고 단지 인간의 육체를 가지신 것이라고 주장
2) 아폴리나리스주의자들: 에수께서 인간의 몸과 영는 갖고 있으나 혼은 작고 있지 않다고 주장
3) 유티키스주의자들: 양성의 속성들이 혼합되어서 신인적 본성인 제3의 형태를 이루었다고 주장
4)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 그리스도의 인격을 둘로 나눔
5) 케린투스주의자들: 신적인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의 세례시에 자연적으로 출생한 예수에게 내려와서 머물렀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떠나가셨다고 주장
6) 여호와증인들: 그리스도께서 원래 미가엘과 같은 영적인 피조물이었다고 주장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모든 잘못된 개념들은 그 분의 영원하신 신성과 우리의 시공(時空)안으로 들어오신 동정녀 탄생의 부인에서부터 유래된 것이다.
2. 복음서들에 나타난 오류들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탄생기사의 진정성과 기록자들의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통합성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성경을 영감되고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는다. 18세기 독일의 합리주의가 도래한 이래, 역시 비평적인 자유주의 학자들은 성경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해 왔다. 그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것을 아무도 없다. 메이첸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라는 고전적 작품에서 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사들의 통합성을 훌륭하게 변호하였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기록들은 그 두가지 복음서에서만 발견된다. 그 복음서들의 현존하는 헬라어 사본들은 이러한 결정적인 기사들을 포함하고 있다.
3. 사실이 아닌 신화
비평적인 자유주의 학자들은 그 사람(예수)으로부터 신화를 벗겨내는 것을 그들의 과제라고 믿고 있다. 초연적인 것 즉, 동정녀 탄생, 기적들, 육체 부활, 승천 등이 모두 신화로 간주된다.
4. 생물학적 불가능성
한 세대 전에 가장 인기있는 자유주의의 대변인이었던 해리 에머슨 포스딕은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의 탄생에 관한 설명을 "우리 현대인들은 생각할 수 없는 생물학적인 기적에 관한 용어로" 나타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우리의 경험들 가운데서 발생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과거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성경에서 일어난 어떠한 기적도 믿지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약하시거나 무력하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복음주의자들도 역시 동정녀 탄생이 오늘날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복음주의자들이 그리스도 탄생의 독특성을 변호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단 한번만의 동정녀 탄생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 19장 이교적 기원에의 호소
복음서 기자들의 문학적 통합성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공격들 가운데 하나는 동정녀 탄생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동정녀 탄생을 포함하는 특별한 인간의 기원에 관한 이교도적인 개념으로 그들의 탄생기사들을 혼합시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거룩함에 젖어있었다. 그 분께서는 인간들의 죄악된 상태를 구속하시기 위한 대속적 죽음을 죽으시기 위해서 잉태되셨다. 이교도의 탄성 기사들은 인간 여성들을 향한 신들의 욕심과 성욕을 보여주고 있다. 이교도의 기사들은 조잡한 다신론 배경으로 기록되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완고한 유대교의 유일신교의 문화를 배경으로 기록되었다.복음서 저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인간적 기원을 동정녀 탄생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일어난 그대로의 정확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제20장 다른 성경들의 침묵
비평가들에 의해서 제기된 또 다른 논쟁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외에는 신약 성경의 다른 책들 가운데에는 동정녀 탄생에 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는 주장이다.해리 에머슨 포스딕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적인 의미에 관한 교회의 사상에 가장 크게 공헌한 두사람은, 동정녀 탄생에 관하여는 암시조차 하지 않았던 바울과 요한이었다." 예일 신학교의 교수인 데이비스는 이렇게 추측하였다. "아마도 요한과 바울이 그들의 저작들에 나타난 모든 참조구절들을 갖고서 선재(先在)의 개념과 동정녀 탄생의 개념을 조화시키는 어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국 국교회의 신학자인 그리피스 토마스는 "동정녀 탄생 - 믿음의 이유들"이라는 그의 저작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 성육신의 방식보다 오히려 성육신의 사실에 관한 선포가 복음을 제시하는 참된 방법이다. 즉 먼저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과 그 다음에는 오직 그가 어떻게 존재하시게 되었는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잃어버리고 죽어가는 세상에게,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 즉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그 분의 위격과 고난과 부활의 구속적 사역을 수행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선포하였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심을 믿었다. 그는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으며, 단순한 인간이 신격화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었다. 로마서에서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 이 아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3). 그분께서는 다윗의 혈통이 되시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부활이 그 진리를 나타내 주었다.(롬 1:4)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섰다. "때가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 4:4) '나게하신' 이란 말은 요한에 의해서 사용된 것과 같은 동사 어간과 시제를 가지는 부정과거 분가인 '게노메논'이다.(요 1:14) 성육신은 유명한 '케노시스' 구절에서 분명하게 가르쳐졌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빌 2:6-8) 성육신하시기 이전에 그 분의 존재와 신성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 라는 말과 "하나님과 동등됨"이라는 구절에서 보여질 수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의 획득은 "종의 형체를 가져" 라는 말과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라는 구절로부터 확인 될 수 있다.
결론: 동정녀 탄생의 교리가 필수적인 이유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하나님이셨고, 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참된 인성을 획득하시려고 동정녀 탄생을 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 분께서 양성(兩性)을 소유하게 되셨는가? 성경적인 설명은 동정녀 탄생을 통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들 중에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이다.
글을 읽고서
1.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 뒤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 죄 없으신 몸으로 오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케 하셨다. - 마리아의 순종함이 전제되었지만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을 위해 마리아를 도구화한 그런 역사로만 배웠습니다.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는 부담이 오히려 믿음을 방해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어 믿어지게 하시었습니다. 그러나, 왜 동정녀 탄생을 하셔야 했는가? 하는 질문에 설명이 쉽지 않았었습니다. 금번에 '동정녀 탄생' 책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자 하나님 되심과 동정녀 탄생을 통해 성육신 하셔야만했던 이유를 잘 깨닫게 되었습니다.
2. 동정녀 탄생에 관한 논거 제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에 대해 이해하려면,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에 관하여 '성경적 증거'와 '교리적 진술'을 제시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고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의 사실을 제시하였습니다.
3. 메시아 사상
구약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요, 왕이요, 재판장이요, 구원자요,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사도들에 의해 기록된 신약 성경을 통해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증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 예수께서 주장하신 말씀을 성경 본문 인용과 함께 정리해 놓음으로 보다 이해를 쉽게 하였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명칭을 정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성자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성육신의 통로는 오직 '동정녀 탄생'인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4. 동정녀 탄생
1) 동정녀 탄생에 대한 증거
동정녀 탄생에 관한 기록을 한 신약성경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저자인 누가와 마태의 증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었고 구약성경에 예언된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로서 태어나게 된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사상을 그대로 전수받은 교부들의 신앙고백을 제시하여 동정녀 탄생은 사도들이 전하여준 사실임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성육신에 대해 잘못 된 개념들을 정리함으로써 로마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화체설'이나 '마리아 무죄성'등에 대한 것을 바로 잡아주고 있습니다.
2) 동정녀 탄생의 결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탄생을 통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후 '참 인간' 이셨다는 것과 '신성'과 '인성'을 함께 지니셨다는 사실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으셨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3) 동정녀 탄생의 목적
하나님께서 왜 인간이 되셨어야 하는가 하는 점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나타난 메시아 프로그램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증거합니다.
4) 동정녀 탄생의 부인
성경과 다른 예수를 전하는 사상들 즉,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잘못된 견해들을 열거하고 이러한 것은 동정녀 탄생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있는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5. 결론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 했던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는 과연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며, 그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이신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기 위해 동정녀 탄생을 하셔야만 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졌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이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을 해준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장 교리적으로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하는 중요한 '동정녀 탄생'에 대해 자세한 설명보다는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한국 교회 현실에 가슴 아파하며 앞으로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더욱 배우는데 힘써야 함을 통감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