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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8장. 오광대
장지문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바늘에 꿴 실을 물어 끊은 강청댁은 실꾸리를 반짇고리에 내동댕이치며 용이 하는 양을 사나운 눈초리로 본다. 용이는 바짓가랑이를 발목에 꼭 쥐어쥐고 복숭아뼈 쪽으로 넘겨 접더니 옥색 대님을 친다.
"집구석에는 땔나무 한 단 없이 해놓고."
실밥이 툭툭 불거져나올 만큼 엉성하게 버선볼을 붙이면서 강청댁이 지껄였다.
"오광댄가 팔광댄가 구겡할라고 가나 머? 누가 그 속을 모를 줄 알고? 참말이지 내 간장이 썩어서, 이눔으 살림 그만 탕탕 뽀사부리고 절에 가든지."
용이는 일어서서 두루마기를 입는다. 올이 고르잖은데다 파리똥 같은 딱지가 붙은 열세 무명 두루마기는 그러나 입은 사람의 풍신이 좋아서 번치가 났다. 이미 망건은 쓰고 있었고, 벽에 걸린 갓을 내려서 용이는 입김으로 먼지를 턴다.
"세상에 무신 낙으로 내가 살꼬? 앵앵거리는 자식새끼가 있다 말가. 내외간의 정분을 믿고 그 낙으로 산다 말가, 남들겉이 살림 모이는 그 재미로 산다 말가. 남의 집은 삽짝에 들어서믄 따신내가 나는데 헌 살강 겉은 이눔으 집구석에는 냉바람만 돌고, 울타리가 썩어자 빠지니 그거 손볼 생각을 어디 한분 하까. 남들은 나무를 해서 집채만큼 쌓아놓고, 그 나무만 봐도 절로 땀이 나는데 이 집구석에는 강아지가 지나가도 때릴 나무 한가치 없다 카이. 나무가 뚝 떨어져야 지게를 지고 나가는 그런 게름뱅이가 천하에 또 있을라고."
집채만큼 나무를 쌓아놨다는 말이나 강아지가 지나가도 때릴 나무 한 개비 없다는 말이나 다 호들갑이지만 용이가 겨울에 땔 나무를 충분하게 준비 못한 것은 사실이다. 장지문 틈새로 새어든 광선이 뿌옇게 먼지 앉은 숭늉 대접을 거쳐 강청댁 치맛자락에 닿을락 말락한다. 대접을 밀어내고 두루마기 자락을 걷으며 앉은 용이는 곰방대를 꺼내어 담배를 넣는다.
"이럴 줄 알았이믄 내 머할라꼬 시집왔일꼬? 남들이 풍신 좋고 심세고 심덕 곱다고 부럽다 해쌌더마는, 시집 잘 간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부럽다 해쌌더마는 풍신 좋으믄 머하노. 심 세믄 머하노. 마음속에 보짱이 따로 있는데, 쪽박을 차도 마음이 맞아야 사더라고, 남은 한 해 사는데 나는 백 년 살 기든가?"
용이는 담배 연기만 뿜어낸다. 조랑조랑 매달아놓은 씨앗주머니 사이에 쳐놓은 거미줄을 스쳐 담배 연기가 빠져나간다. 문틈 사이, 햇빛 줄기 뻗친 속으로도 담배연기는 뒹굴면서 얽혔다가 밖으로 빠져나간다.
"참말이지 자나깨나 이녁 가숙, 이녁 자식밖에 모르는 두만아배 볼 적마다 그 성님은 무신 대복을 지고나왔이까 싶어서, 옷 밥이 그리 부러우믄 참말이지 도둑년 될 기구마."
집고 있는 버선 위에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강청댁은 눈물방울을 닦을 생각도 않고 맹맹해진 코만 들이마신다. 비로소 용이는 곁눈으로 마누라의 우는 꼴을 살폈다.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지나갔다.
"내가 머 가고 싶어서 가는가. 봉순어매가 아아들 좀 데리고 가 돌라카이, 그러라고 했지."
"실없는 여핀네! 와 해필이믄 이녁보고 가라 캅디까!"
"..."
"그년 어디 볼 구석이 있다고 최참판네는 우천자천하는고? 그 개눈깔, 어디 볼 구석이 있다고."
기어이 월선이를 걸고 나왔다. 강청댁이 그러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있었다. 월선이 어떤 타관 남자에게 시집간 후 여러 해가 지나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조차 없더니 재작년 가을에 가랑잎 같이 마을로 굴러들어왔던 것이다. 이때는 무당이던 그의 어미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두 해였었고 잡초가 우거진 빈집에 보따리를 하나 겨드랑에 끼고 월선이는 울고 있었다. 옛날, 월선네가 최참판댁을 드나들었을 무렵, 어미 치마꼬리를 잡고 따라다니던 월선이를 동생같이 귀여워했던 봉순네는 돌아온 월선의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 빈집에 왔었다.
"아이구 이 무상한 계집아, 어매 죽은 것도 모르고 살아 있음서 우찌 그리 소식 하나 없었노. 그래 니 꼴은 와 이렇노?"
월선이는 울기만 했다. 밤에 봉순네하고 함께 자면서도
"살아볼라 캤더마는..."
하다가 월선이는 흐느꼈다. 결국 간난어멈이 윤씨부인에게 이야기하여 얼마간의 돈을 얻어 월선이는 읍내 삼거리에 주막을 차렸다. 강청댁이 최참판댁에서 월선이를 우천자천한다 한 것은 그 일을 두고 한말이었다.
"어디 마님께서 그러싰나. 봉순어매가 아아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싱거운 여핀네. 간을 쳐도 소금이 한 말은 들겄다. 새끼 사당 맨들라꼬 오광대 구겡인가? 종놈 붙어묵은 구겡이 새끼들한데... 본보기가 될 기라고. 정 그렇거든, 지가 데리고 가지 와 남보고 가라 마라하노. 별수도 없는 기이 최참판네 세만 믿고."
울고불고, 행패를 부린다고 읍내행을 중지할 용이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여자의 눈물이 싫은 것이다. 아니 여자의 눈물이 두려웠던 것이다. 웬만치 바가지를 긁어도 말이 없고 심하다 싶으면 슬쩍슬쩍 농으로 돌려버리는 용이를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이름같이 사람이 용해서 그렇다고들 했다. 그러나 실상은 강청댁이 뭐라 하건 용이는 자기 고집을 꺾은 일이 없었다. 장날이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읍내에 나가서 월선의 주막에 들렀고, 술 한잔을 사먹고 돌아오는 그 짓을 일 년이 넘게 계속했으니 누구보다 강청댁 자신이 남편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여느 때와 달리 눈물까지 짜는 것은 오광대놀이로 설레는 밤, 그 밤이라는 게 탈이었고 아이들을 데리고 가니만큼 하룻밤을 묵고 올 수밖에 없는 형편이 불안했던 것이다. 이번만은 한사코 말리고 싶은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용이 두루마기를 갈기갈기 찢어서라도 가지 못하게 말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강청댁은 그러질 못했다. 힘 부쳐서 못하는 것이 아니요 최소한 지어미로서의 도리를 지켜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용하게 보이지만 밑바닥에 깔려 있는 남편의 요지부동한 고집 때문이었다. 볼품도 없고 알뜰한 살림꾼도 아니며 산골짜기, 강청에서 본 바 없이 자란 강청댁을 이러나 저러나 데리고 살면서 여자에 관한 뜬소문 한번 없이 지내온 것도, 죽은 모친에대한 효성과 아울러 맺어진 인연을 지키어 나가고 있는 것도 용이 나름의 고집 탓이라는 것을 강청댁은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그런 성미가 한번 방향을 달리하고 보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강청댁의 지혜로운 직감이며 자신의 행동을 다소나마 자제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해가 서편으로 많이 내려갔는가, 방안에 비쳐든 광선은 강청댁 무릎에까지 뻗쳐 있었다. 홈질하는 손이 바늘을 뽑아낼 때마다 엄지손가락 사이에 돋은 하양 무사마귀가 보송하게 솟아올라 보이곤 한다.
"초록은 동색이더라고 화냥기 있는 년들이 새끼들까지."
강청댁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곰방대가 재떨이를 힘껏 쳤기 때문이다. 놀란 강청댁은 힐끔 쳐다본다. 용이는 곰방대를 한 번 더 두드리고 나서 훅하고 빨아보더니 허리춤에 찔렀다. 그의 얼굴은 벌개져 있었다. 이때 삽짝 밖에서 뛰는 발소리가 났다. 언땅 위의 발소리는 맑고 튕기듯 울렸다.
"아제요!"
계집아이의 목소리 역시 맑고 튕기듯 울렸다.
"아제씨!"
이번에는 신나하는 사내아이의 목소리, 발소리는 바로 마당 안을 어지럽힌다.
"왔나."
방문을 털거덕 열고 용이 내다본다.
"숨차라! 개똥이가 따라올라 캐서 막 뛰어왔소."
봉순이는 쇠된 소리를 질렀다. 강청댁이 눈을 희뜨고 아이들을 본다. 설빔을 입은 아이들은 낮은 마루 끝에 정강이를 바싹 붙이고 몸을 내어밀며 입이 찢어져라고 웃었다. 봉순이는 노랑 명주저고리에 남치마, 빨간 염낭을 찼으며 어미의 명주수건인 듯 눈이 불거질 만큼 턱을 감싸서 머리 꼭대기 쪽에 질끈 동여맨 모습이었다. 길상이는 무명바지저고리를 입고, 차고 있는 염낭은 수박색인데 연두색과 노랑색의 수술 두 개가 달린 염낭끈이 그의 인물을 돋보이게 했으며 검정 갑사댕기를 드린 머리결이 부드러워 보였다. 아이들의 저고리는 다같이 햇솜을 두어 푹신푹신하게 했다.
"어서 가입시다."
봉순이 팔짝 뛰며 말했다.
"그러자."
용이 말과 거의 동시에
"숨이 껄떡 넘어가는구나."
강청댁이 내뱉았다. 용이 허리를 꾸부리고 방에서 나가며
"안 춥나?"
"안 춥소."
길상이 대꾸했다.
"그러믄 갔다오겄는데..."
강청댁을 돌아본다.
"사또 덕에 나발 부누만."
성미를 못 이긴 강청댁의 눈까풀이 파들파들 떤다.
"가자 . 날씨가 과히 차지는 않네."
용이는 성큼성큼 발을 떼놓는다. 아이들은 강청댁 눈길에 쫓겨 미처 인사도 못하고 달음질치듯 용이 뒤를 쫓는다. 색동같이 울긋불긋 물을 들인 봉순이 꽃신이 삽짝 밖으로 사라진다.
"구정이 있는데, 도투마리 잘라서 넉가래 만들기보다 쉬운 일 아니가. 돌아올 때 다리나 댕강 부러져라! 앉은뱅이가 돼서 다시는 못 가게."
강청댁은 반짇고릴 냅다 던진다.
"아제요, 우리 읍에서 자고 올 기지요."
봉순이 물었다.
"음."
아이들의 걸음을 가늠하지 못하는가, 용이는 보조를 늦추지 않고 여전히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아이들은, 특히 봉순이는 뛰다시피하며따라간다. 마을 길에는 자갈이 많았다. 말라서 딱딱해진 쇠똥도 여기저기 굴러 있었다. 길상이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가을하늘같이 푸를 수는 없지만 맑았다. 겨울에 비가 오실 리도 없다.
"아제요. 나릿선 타고 갈 기지요."
숨을 할딱이며 봉순이 또 물었다.
"음."
술병을 들고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임이네와 마주친다.
"읍내 가시오?"
"야."
자줏빛 옷고름과 끝동을 물린 흰 무명저고리의 옷섶 앞이 벌어져 있었다. 검정치마도 불룩하게 솟아 있었고 몸 풀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을 것 같은데 임이네 얼굴은 좋았다. 뭣인지 불사조 같은, 물가의 잡초같은 끈질긴 것을 느끼게 하는 이 여자는 어떤 경우에도 건강하고 생명이 넘쳐 있는 것 같다.
"임이오매, 우리 오광대 구겡가요."
자랑하는 봉순이 옆에서 바로 그렇다는 듯 길상이 우쭐댔다.
"좋겄구나."
건성으로 말해놓고 임이네는 용이에게 웃는 낯을 돌렸다.
"설 지난 지가 벌서 이레나 되는데 무신 술이 있을 기라고...사람을 오복같이 쪼우는 바람에 술 받아오누마요."
"지 발로 걸어가지 머할라고 아지마씨가 받아오요."
"우짤 깁니까. 사램이 다른데."
여자는 염치불고하고 용이의 눈을 더듬어본다. 풍만한 정기를 풀어서 용이 얼굴에다 설설 뿌리는 것 같은 웃음을 머금고, 그는 임신한 여자였을 뿐 어미가 아니었다. 음탕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이었다.
"꼭 새신랑 같십니다."
"어서 가보이소."
용이는 노기를 띠고 말한 뒤 발길을 옮긴다. 아이들은 또 뛰었다. 뛰면서 길상이 뒤돌아본다. 임이네는 술병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보리밭에 기름 내나?"
이번에는 용이 쪽에서 소리를 질렀다. 저쪽 밭둑길을, 거름장군을 진 양팔이 앞서가고 있었다.
"읍내 가는가배. 니 갈 줄 알았이믄 나도 따라붙이는 건데."
장군을 진 채 얼굴이 무같이 길쭉한 영팔이는 멈추어 섰다. 반쯤 헤벌린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나온다.
"섣달 그믐날가. 멀 그리 서두노."
"농사꾼이 일 안 하고 우찌 사노. 그새 편했던가 몇 짐 져본께 등이 뻐근하구마."
"일 다해놓고 죽을라 카믄 죽을 날이 없다네. 산 입에 거미줄 치까."
"말이사 숩지. 사는 기이 어디 그렇나. 어서 가봐라. 저기 나릿선 온다."
강가에 이르는 길이 왼편으로 꾸부러졌다. 영팔이 가는 밭둑길은 오른편으로 꾸부러지고 그들의 거리는 멀어졌다. 나루터에는 낯선 나그네 한 사람만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놀기 좋아하는 마을 젊은이들은 모두 육로로 벌써 떠나버린 것이다. 용이는 화개 쪽에서 내려오는 나룻배가 하얗게 얼음이 언 물 가장자리, 모래 위에 신판을 걸자 봉순이를 안고 배에 오른다. 길상이 따라 오르고 나그네도 올랐다. 사공은 모래밭을 떠밀어내며 강심 쪽으로 배를 뒷걸음질시켜 방향을 잡은 뒤 노를 젓기 시작했다. 방향을 잡을 때까지 조용했던 나룻배 손님들이 제가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는 네댓뼘이나 남아 있었으며 최참판댁의 둥실 솟은 기와 지붕 뒤 대숲은 석양을 받아 서릿빛을 띠고 있었다. 봉순이는 들고 온 보자기 속에서 깎은 날밤을 꺼내어 오독오독 씹는다.
"길상아, 주까?"
"응."
길상이 날밤을 오독오독 씹는다.
"아제요, 문어다리 드릴 기요?"
용이도 문어다리를 받아 질겅질겅 씹는다. 산 그림자에 가려진 강물은 암록색, 짙은 비취 빛깔이었다. 노젓는 소리에 따라 마을 모습은 구부러져가는 뭍에 가려 차츰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이들과 용이 주막에 당도했을 때 서편 산기슭에는 놀이 조금 남아 있어서 용이 잔등을 비쳐주었다.
"우리 강아지가 왔고나. 손이 꽁꽁 얼었네."
봉순이의 두 손을 감싸쥐는 월선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돌았다. 옥색 명주저고리를 입은 그의 얼굴은 파아란 것같이 보였다.
"엇 들어가자, 길상아."
월선이 아이들의 등을 밀고, 아이들을 따라 용이 미투리를 벗는다.
"가게문을 와 닫았일고?"
"아이들이 온다 캐서."
말끝을 맺지 않은 채 월선이는 아랫목에 깔아놓은 자리이불을 걷고 봉순이를 담싹 안아 앉힌다. 봉순이는 서희애기씨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던지 여간 우쭐해진게 아니었다. 윗목에 무릎을 꿇고 앉은 길상이에게, 그럼 내가 때려주지 이놈! 종아리 걷어, 하고 서희 투를 흉내내어 꾸짖기라도 한번 해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아아들은 아아들이고 장사는 장산데."
용이 중얼거렸다.
"하루 더 벌어서 머. 길상아, 거기 찹다. 이리 내리오너라. 그래 마님께서는 안녕하시나."
"야."
"애기씨도."
"애기씨는... 늘 우시오."
"우시여? ... 어서 떡국 끓이올 기니."
월선이 일어섰다.
"폐스럽게 떡국은 무신."
그 말에 월선은 처음으로 용이를 쳐다본다. 홀로 사는 계수집에 아이들을 앞장세워 들러보러 온 시아주버니같이 서로 내외하며, 민망해하며 눈길을 피하더니 마주친 것이다. 월선이 행주치마를 두르고 나갔다. 미리 마련해 놨던지 별 지체없이 김이 나는 떡국을 들고 월선이 들어왔다.
"불을 키야겄소."
"내가 하지."
용이는 등잔에 불을 켰다. 불꽃은 한번 자지러졌다가 밝아왔다. 광대놀이가 벌어질 장터 쪽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들은 마음이 달떠서 떡국은 먹는 둥 마는 둥. 엉거주춤한 꼴이 되어 앉아 있던 길상이 말했다.
"구겡... 저 자릴 못 잡으믄."
"걱정 마라. 광대패에 아는 사램이 있어서 자리잡아 달라고 부탁했인께."
"맨 앞자리, 우리 키가 작은께요."
다짐 두듯 길상이 다시 말했다.
"하모, 앞자리지. 걱정 말고 마저 묵어라."
말하는 월선이 입매를 쳐다보고 있던 봉순이 꾸짖듯 길상에게 눈을 흘긴다. '울 옴마하고 친한 아지맨데 어련할까 봐서?' 용이는 남기지 않고 떡국 한 그릇을 다 먹고 상을 물리었다. 놀음마당에서 꽹과리 장구 소리가 들려온다.
"아지매, 이자 가입시다."
이번에는 점잔을 빼던 봉순이 졸랐다.
"아직 멀었다. 이자부터 막을 치고 장작불을 피우고 할 긴데 미리 가서 떨라고?"
"아지매오 갈 기지요."
"너거들 데려다주고..."
"아지매는 구겡 안 할 기요?"
"옛적에 많이 봤다."
용이의 눈과 월선의 눈이 지남철에 끌리듯이 합쳐진다. 월선은 울상을 지었다.
'우찌 니는 나한테 원망이 없노.'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용이 눈을 내리깐다. 남들은 식구끼리 모여앉아 인절미를 빚던 섣달 그믐날 밤, 어느 절간에 혼자 가서 죽은 어미의 명복을 빌었을 월선이, 뼈에 스며드는 법당의 냉기보다 더 사무치는 설움에 울었던 여자, 어릴 때도 겁이 많고 눈물이 많아서 누가 큰소리만 질러도 울었고 망태영감이 온다고 해도 울었다. 치수도련님이 그런 말을 할 때는 더욱더 질겁을 하며 울었다. 아이들은 장터 쪽의 소리에만 정신이 팔려 무시로 몸을 옴지락 거린다.
"그라믄 가자."
몸을 옴지락거리는 아이들을 보고 웃으며 월선이 일어섰다. 행주치마를 풀어놓고 명주수건을 찾아 얼굴을 싼다. 아이들은 먼저 뛰어나갔다. 밤기운은 맵고 사방은 캄캄했으며, 연방 장터를 향해 사람들이 줄지어 가고 있었다.
"용이형님도 오싰습니까?"
저만큼 오던 마을 젊은치들이 물었다. 그들은 어디서 한잔들 한모양으로 길을 헤갈며 걸어온다. 용이는 아이들과 월선이 곁에서 비켜섰다.
"대낮부터 무신 술고."
"야 한잔 했심다. 이런 날 아니믄 언제 술 먹겄소. 제에기, 어음..."
그들은 주기 이상으로 거친 분위기를 뿜으며 야비한 시선을 월선에게 보냈다. 용이 옆을 스쳐서 지나간 젊은 치들은 저희끼리 무슨 말을 했는지 킬킬 웃더니 주먹으로 서로의 옆구리를 쥐어 고개를 떨구며 걷고 있었다. 흰 명주수건이 조금 나부꼈다. '요새 젊은놈들은 염치가 없어서, 망하는 세월 탓인가...' 걷잡을 수 없이 울적했다. 마을 젊은애들에게보다 용이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노여움을 느낀다.
"월선아."
"야."
"나는 아무데서나 구겡할 것이니 아아들 자리 자네가 잡아주고."
자네라는 말에 월선이 놀란다. 그러나 용이의 난처한 심중을 헤아렸던지
"야."
하고 대답만 했다. 용이는 이내 사람들 속에 묻히고 말았다. 아이들을 앞세운 월선이는 말뚝에다 낡은 포장을 이리저리 둘러친 개복청으로 가서 황노인을 찾는다.
"꺼적대기 깔아서 자리잡아 놨인께."
장고잡이 황노인은 이가 몽땅 빠져서 합죽이가 된 입을 벌리고 사람 좋게 웃었다.
"이놈들을 앉힐라꼬? 이 이건 누구 딸네민고? 이건 또 누구 아들네민고?거 인물 좋다."
황노인은 아이들에게도 이빠진 잇몸을 드러내고 웃었다. 월선의 모친이 살아 있을 때 서로 허물없이 지내던 황노인은 지난날 다소 이름이 알려진 장고잡이였다. 열 살 적부터 북채를 잡은 그, 이 길을 터득하여 명창들의 소리를 빛내준 장년 시절은 그에게 황금기였다. '수 고수 암 명창'이라는 말이 있듯이 장고잡이가 시원찮거나 혹은 심통이라도 부리면 아무리 명창일지라도 소리는 죽게 마련이다. 광대장단으로는 평타령, 중머리, 진양조, 엇머리, 휘모리는 물론 춤장단에도 능했던 그는 매우 자부심이 강하여, 그 자부심 때문에 한번 비위장이 틀어지면 명창 광대의 소리를 망쳐놓거나 북채를 집어던지는 행패를 부려 이 길에서 내리막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성미를 달래느라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여 그는 내리막길을 더욱더 재촉했다. 지금은 오광대의 일개 장고잡이로 늙어버렸으나 세월은 그를 온화한 인품으로 닦아주었다. 그러나 개복청 안을 비춰주는 관솔불 아래 주름진 얼굴에는 돌아갈 집도 자식도 없이 북채 하나만 믿고 살아온 서러운 이력이 물결치듯 일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애들을 보며 연신 벙긋벙긋 웃고 있는 합죽이 황노인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던 월선이가
"아제씨, 옷이 엷소."
했다. 황노인은 고개를 돌리며
"머 치불 것 없다. 이력이 나서."
"그래도 나이가 나인데."
순간 황노인의 얼굴에서 그 유한 표정이 싹 가셔졌다.
"월선아!"
"...?"
"니 참말로 니 에밀 닮았고나. 꼭 옛적 월선네가 내 앞에 서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 놀랬구마."
죽어 없어진 것으로만 생각했던 삼십 년 가까운 지나간 세월이 벌떡 몸을 일으켜 눈앞에 다가오기라도 하듯 황노인은 월선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낮에 볼 때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아제씨도... 어매자식, 어매 안 닮고 뉘 닮겄소."
"허허, 그렇긴 그렇겄다. 우찌 세월이 그리 빠른구. 어제 청춘이 오늘 백발이라 하기는 하더라마는... 월선네는 저승에서도 삼지창 들고 살풀이를 하는가 몰라."
"그런 말심 마시오. 이승서 받은 천대를 저승까지 가서 받겄소."
월선이 눈에 눈물이 핑 돈다. 황노인은 꿈을 깬 듯 헤설프게 웃었다.
"그러기... 섭하게 생각지 마라. 그보다 낼 아침에 따끈따끈한 해장국이나 부탁하자."
"야."
그들이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아이들은 개복청 안을 살펴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쌓인 의상이랑 탈바가지랑 갖가지 악기, 그리고 무시로 들락거리며 떠들어대는 광대들, 이 신기하고도 도깨비 나라 같은 분위기에 아이들은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끌리는 모양이었다. 맨 앞자리에 거적을 깔아놓고, 광대 일행 중 심부름꾼인 머슴아이가 지키고 있는 곳으로 월선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여기 가만히 앉았거라. 나 가서 화닥불 가지고 올 기니."
하고 간 월선이는 숯불을 묻은 질화로를 안고 이내 돌아왔다.
"구겡하다가 잠 오거든 오고."
월선이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쥐여주고 제 머리에서 수건을 끌러 이미 수건을 쓰고 있었는데 봉순의 목에 한 겹 더 감아주고 일어섰다. 굿마당에는 이제 구경꾼들이 꼭 들어차서 소란을 피우고 놀음판 가까운 곳에서는 장작불이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시커먼 밤을 삼킬 듯이불글은 늘럼늘럼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이윽고 타령장단이 울리었다.
동방청제장군이 푸른 탈을 쓰고 나타났다. 서방백제장군이 흰 탈을 쓰고 나타났다. 북방흑제장군이 검은 탈을 쓰고 나타났다. 남방적제장군이 붉은 탈을 쓰고 나타났다. 중앙황제 장군이 노랑 탈을 쓰고 나타났다. 이들은 각자 제 탈바가지 빛깔에 따라 철릭을 입었는데 위괴한 모습은 눈부시었다. 굿거리로 넘어간 음악에 따라 오신장이 춤을 춘다. 신나게 춤을 춘다. 청포 황포를 입은 악공은 북, 장고, 해금, 피리, 필률을 치고 불었다. 다섯 신장은 서로 자리를 엇바꾸어가며 본령산에서 타령조로 가락이 빨라짐에 따라 춤은 더욱 화려해져갔다.
길상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으나 봉순의 눈은 초롱초롱 빛이 났다.구경꾼들은 여전히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탈놀음은 두 번째 마당으로 접어들었다. 다섯 신장이 차례로 물러가고 대신 청, 백, 적, 흑, 황, 오색의 문둥이 탈을 쓴 광대가 들어섰다. 곰배팔에 절름발이 까치걸음으로 우쭐거리며 병신춤을 추는데 황황히 타는 장작불이 비쳐주는 이 기괴하고 익살스러우면서 슬프기까지 한 춤추는 괴물들, 구경꾼들은 웃고 재미나하다가 어느덧 춤속에 빨려들어 조용해지곤 했다. 이때 용이는 굿마당에서 빠져나왔다. 빠져나오는 순간 그는 칠흑같은 어둠이 안겨오는 것을 느낀다. 새까만 어둠, 헤쳐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어둠이었다. 용이는 장터에서 과히 멀지 않는 주막을 찾아 들어갔다.졸고 있던 주모는 인기척에 벌떡 일어섰다.
"탈놀음 끝났소?"
"이제 겨우 두 마당째 들어갔소."
도로 주질러앉은 주모는 몽롱한 채 머리를 긁적긁적 긁었다. 그 동안 명절이라 장사도 못했던 이들 주막에서는 오광대놀음 끝판에 한몫 보자고 쩔쩔 끓는 순대국에 막걸리도 몇 동이씩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는 판이었다.
"놀래라. 나는 놀음판이 끝난 줄 알았구마."
"끝은 안 나도 술손님은 왔인께 술이나 주소."
가겟방으로 올라간 용이는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켠 뒤 안주를 집을 생각은 않고 술잔만 내밀었다. 두 잔, 석 잔, 넉 잔을 마시고도 술사발을 내밀었다.
"천천히 잡소. 사례 들겄네. 안주도 안 묵고 맨술을,"
주모는 새삼스럽게 잘생긴 용이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다섯 잔을 들이켠 용이 얼굴은 붉기는커녕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눈이 가라앉은 얼굴은 무섭기까지 했다. 셈을 끝내고 매운 밤바람 속으로 나온 용이는 휘청휘청 걷는다. 이가 빠진것처럼 인가가 듬성듬성한 길을, 쓸쓸하고 매정한 것 같은, 아무도 없는 길을 걷다가 용이는 길켠에서 소변을 본다. 피리 소리 장고 소리가 무척 먼 곳에서 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흥, 살이 썩어서 뭉개진 문둥이도 양반은 양반이라 말이제? 천하일색 양귀비라도 무당은 무당이라 말이제? 흥."
바지말기를 치켜올리고 허리끈을 동인 뒤 용이는 휘청거리면서 월선의 주막 앞에까지 왔다.
"월선아!"
고랫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문 열어라!"
"술을."
너무 마시지 않았느냐고, 그러나 월선이는 그 말을 하지 못한다.
"술 마시믄 안 되나? 가난뱅이 농사꾼은 주색에 빠지믄 안 되제?"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용이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니는 내 목구멍에 걸린 까시다. 우찌 그리 못 살았노. 못 살고 와 돌아왔노."
하다가 용이는 울었다. 월선이는 비실비실 도망치려 했다. 매를 치켜든 아버지 앞에서 달아나려는 계집아이처럼. 울음을 죽이려고 이를 악무는 용이 이빨사이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월선의 손목을 끌고 방으로 들어온 용이는 갓을 벗어던지고 등잔불을 불어 껐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여자의 나머지 한 손을 꼭 잡고 방바닥에 주질러앉는다.
"어느 시 어느 때 니 생각 안 한 날이 없었다. 모두 다 내 죄다. 와 니는 원망이 없노!"
끌어안아 여자 얼굴에 얼굴을 비벼댄다. 남녀의 눈물이 한줄기가 되어 흘러내리고, 또한 그들의 몸도 하나가 되어 높이높이 떠올라가서영원히 풀어헤칠 수 없는처절한 사랑의 의식을 올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