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남 은(南 誾)-강무공파(剛武公派)
검교시중(檢校侍中) 을번(乙蕃)의 아들이며 영의정 재(在)의 동생이다. 시호는 강무(剛武)이고 천성(天性)이 호탕하고 비범하여 구속됨이 없었으며 어릴 때부터 기이(奇異)한 계략(計略)을 좋아하였다.
여말 선초의 문신으로 1374(공민왕 23)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하여 1380년(우왕 6) 사직단직(社稷壇直)으로 있다가 1384년 삼척지군사로 왜구를 격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때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동조하였고 응양군 상호군 겸 군부전서(應楊軍 上護軍 兼 軍簿典書)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1391년 모함에 걸려 투옥된 정도전(鄭道傳)을 구하려다 멀리 귀양갔다가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곧 풀려나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조선 건국 뒤 이성계(李成桂)가 왕위에 오르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고 순충분의좌명공신(純忠奮義佐命攻臣)의 칭호를 받았고 여러 번 자리를 바꾸어 판상서사 겸 의흥삼군부도총제(判尙書事 兼 義興三軍府都摠制)에 이르렀다.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1397년(태조 6) 의성군(宜城君)에 봉해졌다.
1393년(태조 2) 경상도에 파견되어 왜구를 방비하고 군적을 새로이 작성하였으며 지문하부사가 되었다.
1394년 한양으로 도읍이 정해지자 한양성 및 경복궁 창건의 총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참찬문하부사를 거쳐 삼사 좌복야가 되어 새로운 도읍지인 한양의 종묘와 궁궐터 등을 정하였다.
1396년 참찬문하부사 겸 판상서원사에 이르렀다.
태조를 도와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적극 간여하였다가 1398년(태조 7) 제 1차 왕자의 난 때 종로구 송현동에서 정도전·심효생(沈孝生)·아우 남지와 함께 이방원(李芳遠 : 후의 태종)에게 살해되었다.
세종때 남은(南誾), 이제(李濟)는 비록 죄는 있으나 대공을 져버릴 수 없다 하여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고 강무(剛武)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태조(太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묘소는 용인군 남사면 화곡리에 사당(祠堂)은 청주시 봉명동(淸酒市 鳳鳴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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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남 은(南 誾)-강무공파(剛武公派)
남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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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28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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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대하신 우리의 선조 할아버지 저는 충경공 파 23세 진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