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가문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명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보호자로서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 굴지의 금융업자로서, 또 피렌체공화국과 토스카나공국(公國)의 지배자로서 유명하다. 원래 피렌체 동북의 무젤로 지방 출신인 메디치가는 상업으로 성공하여 14세기부터 피렌체의 정치계에 등장하였다.
치옴피의 폭동(1378∼1382) 때, 이 가문의 한 사람인 살베스트로는 민중편에 가담하여 지배층에 대한 공격에 앞장섰기 때문에 중망(衆望)을 얻었다. 얼마 후 조반니 디 비치(1360∼1429)는 상업과 교황청(敎皇廳)의 은행가로서 거금을 모으자, 이를 발판으로 정치계에 투신하여 활약하였다. 그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일명 코시모 일 베키오)는 구(舊)지배층과 대립하여 수년 동안 추방을 당한 후, 민중의 지지와 상업자본에 힘입어 정권을 장악하고 피렌체 공화국의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국부(國父)’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유럽의 16개 도시에 은행을 세우는 한편, 교황청의 재정을 장악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으며, 사재(私財)를 시정(市政)에 투입하고 학예(學藝)를 보호 ·장려하였다. 그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일명 로렌초 일 마그니피코) 때에 피렌체와 메디치가의 번영은 정점에 달하고, 그의 뛰어난 외교수완으로 피렌체가 이탈리아 정치의 중추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피렌체의 르네상스문화가 최고조에 이른 것도 이 때인데, 인문주의적 교양을 폭넓게 지녔던 그는 학예, 특히 철학 연구를 장려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피에로(1471∼1503)는 무능하여 프랑스왕 샤를 8세의 침입을 받자 이에 굴복하여, 시민들의 반발을 사서 추방되었다(1494).
메디치가는 1512년 피렌체로 복귀하여 교황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를 배출하였다. 독일의 황제 카를 5세가 남하(南下)했을 때(로마의 약탈), 잠시 피렌체를 쫓겨난 메디치가는 얼마 후 황제의 힘을 빌려 복귀하였으며, 가문을 이은 먼 친척인 코시모 1세(1569∼1574)가 1569년 토스카나 대공(大公)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1541~1587)는 과중한 세금을 거둬들여 경제를 거의 파탄지경에 몰고 갔으나 예술과 과학의 후원자로서는 존경을 받을 만하다. 그의 딸 마리아 데 메디치는 프랑스왕 앙리 4세의 왕비가 되어 역사상 ‘마리 드 메디시스’로 알려져 있다. 메디치가는 그 후 유럽의 군주들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 후 차차 세력이 쇠퇴하여 1737년 7대째의 대공(大公) 잔 가스토네의 죽음으로 가계가 단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