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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모두 26개의 속주(파샬리크)로 구성되어 있었다. 세르비아는 발칸 반도에 설치된 5개의 속주 중 베오그라드 속주에 소속되어 있었다. 당시 세르비아 인은 농업과 함께 돼지 사육을 주업으로 하고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도시와 거의 격리된 채 농업을 위주로 시골에 살고 있던 농민들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크네제스(Knezes)라고 하는 자치 조직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 크네제스는 물론 세르비아 정교회라는 조직과는 별개의 것으로 농사를 보다 잘 짓기 위한 일종의 영농 조직이었다.
크네제스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던 사람들을 크네즈(Knez)라고 불렀다. 한때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대변자이자 사실상 세속 국가의 역할을 해왔던 세르비아 정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오스만 투르크라는 현실에 안주하는 명백한 한계를 보였다. 게다가 정교회는 18세기에 접어들어 세속의 이익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점점 타락해 갔고 자연히 오스만 투르크 통치자들의 바람막이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세르비아 정교회가 담당해 왔던 민족주의 보존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크네제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소속된 속주에는 다양한 조직이 포진해 있었다. 물론 속주의 수장은 술탄이 직접 임명, 파견한 총독인 파샤(Pasha)가 행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파샤를 무력으로 뒷받침해 준 군대가 바로 예니체리였다. 이들과는 별도로 술탄으로부터 땅을 넘겨 받아 경작지를 관리하던 봉건 기사 계급인 시파히(Sipahi)도 통상 9백 명 정도 있었다. 본래 시파히라는 말은 페르시아 어로 군인이라는 뜻이었는데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 넘어와서는 용병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시파히는 전리품으로 현금을 받지 않고 땅을 받았기 때문에 일종의 봉건 기사 계급이라고 볼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시파히 기병. 시파히는 봉토를 받고 거기서 나오는 자원으로 무장하여 참전하는 봉건제도 하의 기병이다.
문제는 이 속주 안에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계급 간의 갈등이 후기로 갈수록 빈발했다는 점이다. 특히 무력을 보유한 예니체리들은 아예 파샤의 권위에 정면 도전하는 일도 많은 데다 일종의 봉건 귀족인 시파히의 땅을 무력을 동원해 빼앗는 일도 적지 않았다.
물론 이 같은 문제가 빈발할수록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사람은 바로 세르비아 농민이었다. 그나마 시파히 계급은 자신이 받은 땅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겠다는 입장이어서 농민들에 대한 착취도 일정한 수준을 넘어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예니체리는 시파히의 땅을 빼앗아 모두 자기 것으로 하였다. 이른바 이 농토를 사유지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서는 불법으로 사유지화된 농토를 ‘치플리크’라고 하는데, 이 치플리크의 증가가 바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 몰락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 발칸에서는 몰락해 가는 오스만 투르크와 떠오르는 별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전투가 나날이 치열해져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오그라드 농민들은 1791년 예니체리들을 베오그라드에서 내쫓은 적도 있었다. 이때 술탄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의식하여 세르비아 인을 회유하는 방안으로 예니체리들을 베오그라드에서 내쫓고 시위를 하다 잡힌 세르비아 농민들을 사면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권력의 엄청난 맛을 본 예니체리들은 그들이 가진 최후의 보루인 무력을 통해 베오그라드로 돌아왔다. 이들은 전례 없는 쿠데타로 파샤를 뒤집어엎은 뒤 개혁 주도 세력을 자처하며 폭정을 펴기 시작했다. 이때가 1801년이다.
이제 예니체리가 중심이 된 무인 정권이 권력을 본격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모든 정보 기관을 동원해 농민들을 감시했다. 예니체리는 네 명의 최고위급 군인들을 지도부로 삼았다. 이들을 ‘다이스(Dayis)'라고 불렀다. 4인의 다이스는 세르비아 인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는 정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대책을 마련했다.
첫 단계는 포고령을 내려 모든 세르비아 인이 자진해서 불법 무기를 신고할 것을 명령했다. 물론 그들의 포고령 속에는 무기로 변질될 수 있는 농기구까지 포함돼 있었다. 이 같은 예비 단속을 거친 뒤 아예 세르비아 인의 기를 꺾기 위한 음모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우선 4인의 다이스는 휘하의 예니체리 부대에 24시간 출동 태세를 발동했다. 그리고 평소 반체제 발언을 했거나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크네즈들을 무조건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체포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체포 즉시 죽여 버리는 방법을 썼다. 그야말로 세르비아 지역에서 피의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4인의 다이스는 세르비아 인의 반란 의지를 발본색원하기 위해서 시범 케이스를 선정하였는데, 그곳은 당시 농민의 반발이 극심한 지역 중의 하나인 발예보라는 지역이었다. 이곳에는 당시 다이스의 최고 지도자였던 네메드 포차오글르(Nehmed Focaoglu)까지 내려가 현장 지휘에 나섰다. 이때가 1804년 2월 4일이었다.
이 마을을 관통하는 개울의 다리 위에 처형장을 마련한 예니체리들은 크네즈인 알레그카 네나도비치와 일리야 비르치아닌을 끌어내어 전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목을 베었다. 예니체리들의 이 같은 보복은 바로 세르비아 인을 반란으로 몰아넣는 촉매제가 되었다.
참수당한 네나도비치의 아들인 데안 마티아 네나도비치는 아버지의 죽음과 그 이후의 상황을 회고록으로 자세히 남겼다. 이 기록에 따르면 네메드는 네나도비치의 머리를 창고에 보관토록 지시했으나, 하인 중의 하나가 그것을 훔쳐 가족들에게 전달함으로써 그의 몸과 함께 안장했다고 한다. 도한 네메드가 이들뿐만 아니라 정교회의 성직자들도 성문 밖에서 직접 처형토록 지시했다고 쓰여 있다.
예니체리가 세르비아의 귀족들을 대거 학살한 사건은 '크네즈의 학살' 이라고 불리는데, 이때 살해된 세르비아 귀족이 70명이 넘는다.
이제 세르비아 인은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느냐, 아니면 예니체리에 대항하느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 어로 강도나 도둑을 하우두트(Haudut) 혹은 하우드드(Haudud)이라 부르는데, 이 말이 슬라브 어로 수출되면서 하우두크(Hauduk)로 변질되었는데 그 뜻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반대하는 반체제 세력을 의미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르비아 인은 하우두크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모고한 사람의 생명을 무차별하게 앗아 가는 예니체리에 대해 감정적으로만 반발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인은 독립을 원하기보다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이 왜 저들을 징벌하지 않고 내버려 두느냐는 점에 더 유념했던 것이다.
기득권 세력은 항상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만약 혁명이나 반란이 일어나면 오랫동안 공들여 쌓아 온 기득권이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니체리의 크네즈 학살 사건은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러면서도 이 체제에 안주하고 있던 기득권 세력은 신중론을 제시하고 나섰다. 우선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만 기다려 보자고 농민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런데 이율배반적으로 크네즈 학살 사건의 최대 피해자였던 크네즈들이 오히려 이 주장을 폈다. 어차피 도망해봐야 갈 데도 없었고,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들 외에 부유한 상인들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더욱이 한때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보고였던 성직자들까지도 그저 참아야 한다는 입장 표명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농민들의 입장은 달랐다. 예니체리의 학정 때문에 굶어 죽거나 싸우다 죽거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맨몸으로 예니체리와의 싸움에 나섰다.
세르비아 반란군의 모습
물론 세르비아의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주업으로 돼지를 먹이고 있었다. 한 번도 싸움다운 싸움을 해본 적이 없는 세르비아 농민들은 같이 돼지를 치고 있지만 과거에 전쟁을 구경이라도 해본 사람을 주변에서 찾았다. 이때 자연스럽게 지도자로 떠오른 사람이 바로 페트로비치 카라조르지예비치(Petrovic Karadjordjevic)였다. 세르비아 어로 카라(Kara)는 검다는 뜻이고 조르지예는 영어의 조지(George)의 세르비아식 표현이다. 이 때문에 그를 블랙 조지(Black George)라고 부른다.
페트로비치 카라조르지예비치, 이른바 블랙 조지
블랙 조지는 1788년부터 1791년까지 계속된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투르크 간의 전쟁에서 합스부르크측 자유 부대의 일원으로 참전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농민들이 지도자로 블랙 조지를 추대했던 1804년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6세였다. 블랙 조지를 중심으로 뭉친 세르비아 농민군은 그 동안의 분노를 마음껏 풀어 놓았으며, 그 기세는 마침내 예니체리를 넘어뜨리기 시작했다. 1804년 8월 블랙 조지가 이끄는 세르비아 농민군은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었고 예니체리 최고 지도자인 다이스들은 정처 없는 망명길에 올랐다.
세르비아 반란군과 오스만 투르크군의 전투 가운데 하나인 미사르 전투
운명의 1804년 8월 5일에서 6일 밤에 블랙 조지의 측근인 밀렌코 스토이코비치(Milenko Stojkovic)는 알라 칼레 섬에 피신해 있던 다이스 네 명중 세 명의 목을 베었다. 다른 한 명의 다이스는 다뉴브 전투에서 이미 실종된 상태였다.
밀렌코 스토이코비치
다이스들을 모두 괴멸시킨 블랙 조지는 우선 술탄에게 예니체리를 근원적으로 없애버릴 것을 요구했다. 이 같은 요구에 대해 오스만 투르크 황제 술탄이 격노한 것은 물론이다. 예니체리를 한때 베오그라드에서 쫓아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세르비아가 무장군을 만들어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대항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국내 정국이 전례없이 권력 공백 상태로 치닫게 되면서 드디어 주변 열강이 발칸 반도로 영향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러시아와 영국은 손에 손을 맞잡고 종이 호랑이 오스만 투르크를 코너로 몰아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침 러시아의 황제(짜르)는 발칸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대한 협공을 펴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러시아측에서는 세르비아의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른 블랙 조지를 자국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세르비아를 지원했다. 농민 군대에 당장 필요한 군수 물자도 공급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나라를 잘 다스리는’ 통치기술까지 전수해 주었다.
러시아의 이 같은 지원에 혹한 블랙 조지는 예니체리만을 제거하겠다는 당초의 목적을 수정하고 오스만 투르크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장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블랙 조지가 다루기에는 러시아가 너무나 노회(老獪)했다. 졸지에 러시아가 블랙 조지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러시아-영국 동맹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상대로 치른 전쟁이 1807년 휴전에 들어가자 러시아는 세르비아에 주둔시켰던 군대를 철수해 버렸다.
그나마 러시아를 믿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도전장을 냈던 블랙 조지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대로 훈련된 군대도 보유하지 못했던 세르비아는 완전히 사면초가에 빠져 버렸다.
세르비아 농민군들에게 쫓겨 갔던 예니체리 잔당도 그 동안 전열을 가다듬은 채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 같은 절호의 기회를 예니체리들이 놓칠 리 없었다. 예니체리는 러시아 군대가 철수하자마자 다뉴브 강을 건너 베오그라드를 재점령했다. 블랙 조지는 목숨만을 부지한 채 줄행랑을 쳤고 세르비아 독립의 염원도 물거품이 돼버렸다. 카라조르지예비치에게는 지극히도 운이 없었던 1813년의 일이었다.
세르비아를 다시 점령한 예니체리의 칼이 번득이자 또다시 반란이 시작됐다. 특히 1814년에 접어들면서 망명한 블랙 조지를 대신하는 신예 지도자가 나왔다. 세르비아 농민들은 같은 농민 출신인 밀로시 오브레노비치(Milos Obrenovic)를 새 지도자로 뽑았다.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그런데 밀로시라는 사람은 블랙 조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외교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가능하다면 피를 흘리는 전투 대신 외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밀로시는 운도 좋았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의 일전을 앞두고 있던 1815년 엘바 섬을 탈출해 재기를 노리던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러시아가 또다시 발칸 반도에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에 당황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발칸에서 세르비아 농민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던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밀로시측에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오스만 투르크측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세르비아에 자치권을 주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밀로시가 오스만 투르크에게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의 요구를 해대는 바람에 양측은 타협과 대결의 위기를 넘나들다 결국 전쟁을 벌이고 말았다. 곪을 대로 곪은 늙은 제국 오스만 투르크는 그로기 상태에 빠진 데다 열강들이 훈수를 두는 바람에 이 전쟁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패배로 끝났다. 이때가 1829년이다. 결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세르비아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고 밀로시를 왕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 참가했던 농민들은 이제 다시 자신의 직분으로 돌아갔지만 한때 같은 동료였던 밀로시는 그들이 쳐다보기도 힘든 왕이 되었다.
그러나 밀로시가 다스리게 된 세르비아도 점차 정국이 혼미해져 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4백여 년간 피폐한 농촌에서 격리되어 생활하여 온 세르비아의 정치 토양 속에서 서구의 합리주의라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할 틈도 없었다. 자연히 왕권을 잡은 밀로시가 전권을 행사하는 독재 체제로 흘러가게 되었다.
밀로시 자신 역시 서유럽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고 오직 오스만 투르크의 속주 지배 체제만이 그의 통치를 뒷받침하는 교과서가 되었다.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지배층이 오스만 투르크 인에서 밀로시 추종 세력인 세르비아 인으로 바뀌었을 뿐 농민들이 먹고살기 힘든 것은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밀로시 정권에 대한 불만을 조금만 토로해도 잡아다 처벌하는 바람에 과거 예니체리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강대국의 야욕이 교차하고 있었던 발칸에서 세르비아의 정국 혼란은 강대국이 개입할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이다. 세르비아에 대해 전통적인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 온 러시아는 미로시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국내 정국이 혼란스럽긴 하지만 그의 외교력 또한 탁월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집권 권력과 일반 농민의 갈등이 극에 달한 시점을 이용하여 세르비아에 대해 본격적으로 내정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정치를 보다 합리적으로 하라는 논리였다. 사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짜르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가 감히 세르비아 측에 할말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밀로시에게 일격을 당한 오스만 투르크의 입장에서도 밀로시를 권좌에서 밀어낼 기회만 호시탐참 노리고 있었다.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밀로시를 제거하자는 데에 일차적으로 의기투합했다. 이 두 나라는 밀로시 측근들을 포섭, 밀로시의 무한 권력을 어느 정도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 작품이 바로 17명으로 구성된 17인 위원회였다. 왕권을 견제하는 일종의 국회였던 17인 위원회는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등에 업고 사사건건 밀로시와 불화를 벌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밀로시는 1838년 망명해 버렸다. 이때부터 이 17인 위원회가 세르비아를 사실상 통치하게 되었다.
이 위원회가 처음으로 한 일은 우선 밀로시를 이을 왕을 스카웃하는 일이었다. 당시의 수준으로서는 공화제 등을 운영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7인 위원회는 밀로시 왕을 추방했다는 유럽 각국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일단 밀로시의 첫째 아들 밀란을 왕으로 옹립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밀란이 마음에 들지 않자 밀로시의 동생인 미하일을 다시 허수아비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밀로시에게 철저히 배신당한 17인 위원회 강경파는 밀로시 가계에서는 결코 왕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 미하일마저 왕위를 내놓게 되었다.
밀란 오브레노비치 미하일 3세 오브레노비치
사태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자 17인 위원회는 결국 1804년 제1차 세르비아 반란을 주도했던 블랙 조지 카라조르지예비치 가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블랙 조지의 아들인 알렉산더 카라조르지예비치를 다시 왕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 때문에 향후 세르비아는 블랙 조지의 카라조르지예비치 가문과 밀로시의 오브레노비치 가문이 왕권을 놓고 처절한 투쟁을 벌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됐다.
알렉산더 카라조르지예비치
블랙 조지의 아들 알렉산더는 1842년부터 16년간 왕으로 재임했지만 타이틀만 왕이었지 왕다운 노릇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17인 위원회가 전권을 행사하면서 알렉산더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후 1858년 알렉산더의 치세에 불만을 품은 민중 봉기가 일어나면서 알렉산더는 다시 퇴위당하고 만다. 알렉산더의 후임은 정말 역사의 코미디였다.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은 바로 17인 위원회에 의해 쫓겨났던 장본인인 밀로시 오브레노비치였다. 그 뒤 그의 자손들이 계속 왕이 됨으로써 세르비아는 완전히 오브레노비치 가의 세상이 되었고 블랙 조지의 후손들은 불우한 망명 생활을 하며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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