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문학세미나에 다녀와서
허소미
가로수도 축축 늘어져 지친 숨 내쉬는 7월 12일 문학 세미나를 다녀왔다 문학춘추 박형철 발행인과 문학춘추 주간인 이명재 교수, 손광은 교수, 등 50여명의 문학춘추작가회의 회원들이 참석하였다. 노남진 회장님과 임원진이 나눠준 알뜰한 자료집과 간식을 받고 광주문화전당역 남쪽 버스 승강장에서 오전 8시에 천사 관광 버스를 타고 문학 세미나에 나섰다가 오후 4시에 도착했다.
이번 문학기행의 취지는 언어라는 도구로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담아내는 작가로서, 작가적 역량을 함양하는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학인에게는 언어를 갈고 닦아 언어생활의 질적인 수준을 높이는 짐이 지워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셰익스피어는 2000개의 영어 단어를 변형 조합 새로 만들고 하여 영국인들의 언어생활의 질적 수준을 높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런 자부심에서 영국 비평가 토마스 칼라일이 '식민지인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꾸지 않겠다!'고 했을 것이다.
무궁화가 피는 바깥을 내다보다 간간이 벼논 가운데 제초작업을 하는 농부처럼 백로가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때쯤, 버스는 초의선사 탄생지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의 다도를 정립하신 분이다. 그는 추사 김정희와 공동제자인 시, 서, 화 삼절인 소치 허련을 두었다. -소치에게 추사는 압록강 아래에 이런 인물이 없다 즉 조선에서는 소치를 따를 만 한 자가 없다는 말을 하였다 .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전직 교수이며 사진작가이기도 한 박종길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탐방을 시작했다. '크게 깨닫고 가기를 바란다.'는 뜻의 대각문에 들어서니 입구 양쪽으로 차밭이 보이고 비문들이 보였다. 맨 처음 맞은 비문을 " 정좌처다반향초: 고요히 앉은 곳에 차는 반쯤 마셨는데 향기는 처음과 같고, 모용사수류화개: 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여라"라고 해석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 글은 평생 친구인 추사체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가-반역죄인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제주도에 유배를 갔을 때, 찾아간 초의선사를 붙들어 여섯 달 이상을 그곳에서 같이 지내다가 작별할 때 준 글이라고 한다. 이말을 해설사는 시작과 처음은 같아야 한다. 역행하지 말고 순리대로 살라는 격언으로 풀이하면서, 두 번째 비문을 "고불미생전: 옛 부처님이 나시기 전에, 응연일상원: 의젓한 동그라미 하나, 석가유미희: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가섭기능전:어찌 가섭이 전하리"으로 해석하면서 부처도 나기 전에 모르는데, 가섭이 어찌 부처님이 연꽃을 손에 든 뜻을 알 것이냐고, 쉽게 풀이해주었다. 이 풀이 앞에서 당시의 불교계가 전(專)선(禪)일변도로 흐르고 있는 사조에 지관의 겸수- 마음을 가라앉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보는 힘-로 현실적이고도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진리를 구하려 한 초사의 뜻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세 번째 비문인 "茗禪:은 차와 선은 같다. 인데 차는 몸을 깨끗하게 하여 주고, 선은 마음을 다스린다."라는 해설을 들으며, 안내된 곳은 그가 40여년을 묵으면서 <다신전>과 <동다송>을 짓고 수도한 일지암이었다.
다산 정약용과 백련사의 혜장스님과 교류하여 도교와 유교에도 조애가 깊은 초의 선사. 다산 정약용의 흔적이라고 해야 옳을까. 일지암의 현판은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의 글씨라고 한다.- ‘아버지인 내가 유배되어 있어, 벼슬을 하지 못하더라도, 수도권은 벗어나지 말고 공부에 힘쓰고, 선비들과 사귀기를 권하며, 살아갈 일을 찾아 부지런히 몸을 놀려야 한다’는 비슷한 요지의 편지를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적이 있다.
왜 '일지암'이라는 한자에, 뚜껑 '암'자를 쓴 연유가 무엇일까. 혹시 몸을 붓으로 비유하여 쓰지 않을 때 닫아두는 붓뚜껍이라는 뜻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마저 끊고 휴식에 드는 곳이라는 뜻일까, 머릿속에서 굴리는데, 일지암이란 말은 ‘뱁새는 깊은 산속에 살지만 가지 하나면 족하다. 분수에 맞게 살라는 뜻풀이를 해주는 해설사였다. 분수에 맞게 살고, 순리대로 살라는 가르침을 안고 초의선사 기념관에 들어섰다.
해설사는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초당도> 앞으로 우리 일행을 이끈다. 다산초당은 말 그대로 초당이었다. 기와로 복원되어 있는 다산 초당에 대해 말하며, 우리나라의 현재 문화재 복원에 관한 태도에 일침을 가했다. 이어서 해설사는 <다산초당도> 그림 하단을 가리키며 옳고 그름이 분명한 다산은 능수버들을 심어 마음을 다스렸다고 한다. 햇빛을 피해 한 여름 한낮을 쉬어가도 좋을 정도로 그늘이 지고 생동감이 있는 남종화이다. -남종화는 중국 당나라 시대의 왕유로부터 시작된 수묵산수화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문인들 사이에서 유행되었다.
초의선사 탄생지는 그의 생전 이력에 의미를 두어 일지암에 15살에 출가한 뜻을 기려 15 그루의 매화를 심고. 초의선원은 참선과 다도를 전문으로 하기 위해 지은 건물인데, 초의선사의 나이에 맞춰 81평 땅에, 바깥 기둥은 출가의 나이에 맞춰 15자이고 안 기둥은 월출산에서 깨달음을 얻은 해의 19자이다 도리까지의 높이는 다산 선생을 만나 유학을 공부한 24자이고 출입문은 승려나이인 65짝으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승유억불정책으로 스님들은 한양 4대문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백정같은 천한 신분으로 취급되었다. 그런 중에도 헌종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 라는 사호를 받은 초의선사의 본명은 장의순이고 초의는 법명이다. '낮엔 구름을, 밤엔 달빛을 벗 삼아 마시면, 차의 덕성을 훨씬 잘 깨우칠 수 있다면서,차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혼자 마셔야 한다고 했다. 혼자 마시는 경지가 최고의 경지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는 초의선사의 말씀 소개에 이어, 세상에서 아름다운 모습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고, 책을 읽는 모습이고, 남을 위해 배려하는 모습'이라는 말로 해설의 마무리를 하면서 초의선사가 생가에 돌아와 쓴 <귀고향>이라는 시를 들려준다.
귀고향
고향을 멀리 떠난 지 사십 년인데
돌아와 보니 머리 하얗게 센 줄도 몰랐었네
집터가 잡초에 묻혔으니 살던 집 어찌 있으며,
조상들 산소 이끼로 거칠어 걸음마다 시름일세.
고향 그리던 마음 다했으니 한스러움이 어디서 생기리.
피눈물도 말라서 흘러내리지 않는구나
막대 짚고 외로이 구름 따라 다시 떠나니.
고향 그리던 이 인생이 정말 무색하구나.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와의 교류를 통해 도교, 논어, 주역 유교까지 섭렵하고 시,서, 화, 경에 능통하여 당대 문인들에 우뚝 선 초의선사의 사상은 다선일미(茶禪一味)로,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고 시(詩)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詩)와 선(禪)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의선사에 대한 정보로 가득찬 배를 안고 버스를 타고 조금 내려갔다.
무안군 오승우미술관이었다. 미술관 앞 조각인 <천축국 가는길> 앞에서 잠시 멈춰본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여인의 얼굴을 그리면서 옆모습도 아래로 수그린 모습을 겹쳐 그리는 입체파의 피카소의 <성스러운 어릿광대>의 그림을 떠올랐다.
오승우는 전라남도 화순군 동북면 사람으로 서양화가 원로이자 대한민국 인상주의 화풍을 개척한 오지호 화백의 아들이다. 그가 기증한 178점과 미술관련 서적 500여 부, 미술관련 자료 300여점으로 오승우미술관은 건립되었다. 들어서자마자 맞이하는 일층 전시실의 그림은 해외 여행 중에 스케치한 소품이었다. 활활 타오르던 불꽃을 연상케 하던 오지오 화백의 그림과는 다른 차분한 면모가 있었다. 창밖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과도 같은 그림인 르네상스시대의 그림이라고 할까. 그러나 정주하고 있는 해설사는 년도에 따라 오승우 화백의 화풍과 소재가 달라진다고 하였다. 그 해설사의 말을 옮겨 적어본다.
‘50년대에는 강렬하고 선명한 색채 대비를 통해 한국의 고적과 민속을 그렸고. 60년대에는 부드러운 색조를 사용하여 다채로운 식물과 동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환상적인 세계의 꽃과 소녀를, 80년대에는 산 속에 들어가 그것의 속살을 담아내는 식으로, 표현한 기법의 자신의 마음속에 자생하는 산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의 백산을, 90년대에는 타오르는 불길처럼 녹아 흐르는 색채의 기운에 의해 물결을 이루는 사원과 궁전이 중심이 된 동양의 원형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오랜 세월을 통해 구현된 동양인의 유토피아적 관념의 산물인 십장생도에 내장된 가치 체계를 오늘에 되살리는 작업이야말로 올바른 전통의 계승으로 이어 가고 있다는 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그, 지역출신 화가가 아닌데도 미술관이 건립되게 된 연유는 전라남도 도청 소재지가 무안 목포여서 무안군에서 유치하게 된 거라는 말을 들었다. 짧지만 긴 관람을 끝내고 바로 옆에 세미나실로 향했다.
이번 여정의 목적인 문학세미나의 시간이 된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이슈는 역시 글을 쓰는 문학인으로서의 역량 함량을 위한 문학 세미나가 아닐까 한다. 거기에 국립국어원 지원으로 국어에 대한 공부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기대로 충전되어 세미나실에 들어갔다. 간단한 개회사가 있고 많은 말씀들이 있었는데, 그 중 이명재 문학춘추 주간의 말씀을 요약하면 "500 겁이라는 세월에 이루어진 인연인데, 같은 동시대의 문학춘추작가로 만난 인연을 생각하면 몇 천 겁의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는 제국주의 시대였고, 20세기는 전쟁의 시대였다. 21세기는 문화로 겨루는 시대다. 그 중에서도 문학은 모든 예술을 아우르는 종가집이다. 좀 더 글쓰기에 힘써야 한다."이다. 이 말을 들으며 다시금 문학인으로서의 자세를 환기를 하고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작가로서의 자질 함양을 할 수 있는 세미나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국립국어원의 지원을 받고 나온 서상준 전남대 교수는 <제1강 우리말 다듬기>라는 제목 하에 먼저 한글은 누가 창제했느냐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김종서와 윤관을 시켜, 육진을 개척했을 때에도 ‘세종대왕이 명하사’ 장려실의 측우기를 만들 때도 ‘세종대왕이 명하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만약 한글을 집현전이나 다른 이가 만들었다면 ‘세종대왕이 명하사'라는 말이 반드시 따라붙었을 것이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의 하루하루의 거동이 적혀 있는데,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세종인 자신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글귀가 있다면서 세종이 만들었다는 말에 강조점을 찍었다.- 한글 창제 당시 집현전 부제학인 최만리 등의 저항에도 당당히 맞섰던 세종의 모습이 언뜻 그려질 듯도 하였다.
그러나 아녀자들이나 쓰는 언문으로 폄훼되다가 1894년 갑오경장에 이르러서야 국한문혼용의 정부문서 언어로 공식 인정되었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 시절을 지나 우리가 마음 놓고 한글인 일상어로 글을 쓰게 된 지는 백 년을 좀 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국어인 한글에 대해 새로운 환기를 하며 잠깐 대화의 시간이라는 이름의 간식 시간이 있었다. 그 사이 노남진 회장님과 임원진 여러분이 차린 족발, 홍어회, 김치, 당근 오이, 맥주와 소주 등이 푸짐하게 차려있었다. 다시 들어간 강의는 이정석 문학평론가의 <제2강 문학창작론>이 있었다. 시에 있어 일례를 들어가며 시는 시적인 것과 시의 형식만을 빌은 시, 비슷한 것이 있다는 말로 시 언어는 에둘러 말하기에 있으며, 결미 부분에서는 항상 여운을 두어야 한다는 요지의 강의를 했다. 그 중 한 작품을 여기에 옮겨본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 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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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대는 꽃이며 그 꽃을 피는 것을 보고 화자는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대는 꽃이지만 각고의 끝에 결실을 맺기 위하여 피우는 어떤 바람일 수도 있다.
그런 바람. 꽃을 피면서 내 자신의 일처럼 떨리는데 이런 감응을 하게 만드는 내 몸속에 잠든 이는 누구신가. 2연에서도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 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여기서 평론가는 남녀합궁의 뜻으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시언어에서 여러가지로 뜻을 해석할 수 있는 다의어를 보여주는 실예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을 향하여 피어나고 그 무엇을 향하여 결실을 이뤄가는 모습, 이 시는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라는 마지막 행이 결미를 이루면서 그러나 여전히 무엇을 향해 몸을 열고 있는 꽃을 향하여 화자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인으로 언어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창작에 힘쓸 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며 버스에 승차하여 금방 도착한 식당에서 닭백숙을 점심으로 먹으며 옆에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 나주의 백호문학관에 들렸다. 나주 출신인 임제는 선조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 받고 평양으로 가다가 황진이 묘소에서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제를 지내고 추모하며 읖은 시조를 읊었다. 그 시조를 여기에 옮겨적어본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을 어디두고 백골만 남았는고/ 잔잡고 권할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황진이의 무덤 앞에서 시조를 읊고 제를 지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임제가 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다른 절도사를 보내버렸다. 문학이론 시간에 거론되곤하는 임제의 시로 <한우가>가 있다. '찬비'라는 시어에는 이중의 뜻이 있는데, 그 하나는 실제로 내리는 가을날의 찬비를 이야기하고, 다른 하나는 찬비라는 기생의 이름을 뜻하는 시어의 애매성을 알게 하는 임제의 <한우가>를 옮겨본다.
북천이 맑다커늘 우장없씨 길을 난이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맛잣시니 얼어잘까 하노라
그러나 임제의 성격을 말해주는 유언으로 남긴 글이 있다. 중국과 다른 여러 나라들은 황제가 있는데 우리나라만 중국의 속국으로 산다.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말라'는 유언이 있다. 중국의 속국을 벗어던지고 우리 나라의 백성으로 우리나라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에 살고 싶다는 임제의 바람이 피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사이 광주였고 문학세미나의 여정은 끝이 났다.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서 내렸다. 오늘의 문학 세미나는 언어에 대한 중요성 그리고 문학인으로서 긍지를 갖고 우리나라 언어를 갈고 다듬어야 하는 의무를 걸머진 문학인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글쓰기에 임하는 자세는 다른 때와는 아무래도 다르지 않을까 한다. 알지만 다시금 깨닫는 문학인으로서의 자질 함양에 좋은 시간이 되었다고 본다.
첫댓글 고생하셨어요 허소미작가님. 늘 온화한 미소로 보는 사람까지 따뜻하게 만드시는 고마우신 분, 이렇게 멋진 기행기까지... 존경스럽습니다.
선생님! 무더운 날씨에 기행 정리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생생한 마음 가득합니다. 늘 강건하소서. . . . .
이사짐을 대강 정리하고 우리들의 문학방을 두드렸네요, 세미나 진행과정을 이토록 소상히 올려주시다니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흑 흑. 정말 풍부한 우리언어를 사랑하게 한 세미나였음이 아주 가까이 전해져옵니다. 수고하셨어요. 고맙기 그지 없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