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 경일대학교 우측에 있는 일우 허병률의사 기념비를 유족과 함께 다녀오다.
비문이 구어체라 지나가는 길손들이 알아 볼 수 있도록 한글 안내판이 필요한 현충시설이다.
경북 경산(慶山) 사람이다. 1917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들이 제휴하여 결성한 혁명단체였다. 동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혁명계획은 군자금 수합·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의협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 계획 및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그는 군자금 수합활동을 펴다가 1918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노출되어 동지들이 피체되자 몸을 숨기고 있던 중 1919년 음력 9월경 양한위(梁漢緯)·권태일(權泰鎰)로부터 독립신문, 경고문등의 문서를
교부받아 자산가와 관공리들에게 우송하며 민족의식을 촉구하였다. 또한 군자금 모집에 힘써 1920년에는 모금한 8천여원을 소지하고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후 허병률(許秉律)·조한명(趙漢明)·이동찬(李東燦) 등의 동지와 함께 권총을 소지하고 군자금
수합활동을 계속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어 1921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