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완서씨의 처녀작 (나목)에선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예술가'로 사는 박수근이 등장한다. 지금 신세계백화점 건물에 있던 미8군 피엑스에서 미군들이 의뢰하는 초상화를 스카프에 그려주는 걸로 생계를 유지하는 '환쟁이' 옥희도씨.
옥씨는 일자리가 귀하던 당시로선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라도 얻은 것이 그나마 다행인데도 늘 상심에 젖어 있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맘껏 그리지 못해서다.
실제 박수근은 일년 남짓 이곳에서 일해 35만환을 모아 창신동에 조그마한 판잣집을 마련하고 작품 제작에 몰두하게 된다. 하지만 전업작가의 길은 너무나 고달팠다. 전쟁 뒤 반도화랑을 매개로 외국인 고객들에게 조금씩 그림이 팔렸지만 극심한 생활고를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63년에는 수술비용이 없어 백내장으로 왼쪽 시력을 잃기까지 했다. 결국 국전에서 연이은 낙선에 실망한 그는 과음으로 간질환을 얻고 짧은 일생을 마감한다. 생전에는 한번도 개인전을 열어보지 못한 박수근. 하지만 화가로 살고자 했던 그의 정신만은 꺾여본 적이 없었다.
박수근전 16일부터 이중섭과 대조적 행보 질박한 화풍 큰울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국민화가'는 둘이다. 이중섭(1919~56년)과 박수근(1914~65년). 일제시대의 암울함, 어수선한 해방공간,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피폐함 속에서도 끝내 붓을 꺾지 않고 화가의 길을 걸었다는 데서 이들은 서로 닮았다. 하지만 삶에 대한 태도는 달랐다. 이중섭이 말년에 처절한 외로움에 대항하며 주체할 수 없는 광기로 자신을 내몰아갔다면 박수근은 따뜻한 인간성과 부드러움을 끝까지 잃지 않고 운명을 견뎌 나갔다.
차이점은 그림공부에도 있다. 이중섭은 본디 지주의 아들로 도쿄에서 유학까지 했지만, 박수근은 어려서부터 집안이 몰락해 보통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는 순전히 독학으로 자신만의 그림세계를 찾아나갔다. 그는 "불행이 클수록 사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를" 알았던, 가난을 뼛속까지 알았기에 오히려 가난을 정겹게 그렸던 사람이었다.
올해 봄 성황리에 막을 내렸던 '이중섭 전'에 이어 박수근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대규모 전시가 열린다. 16일~9월19일 서울 중구 순화동 호암갤러리에서 열리는 '우리의 화가 박수근전'. 40~60년대 그렸던 유화 82점을 비롯해 수채화 8점, 스케치 35점 등 모두 125점이 선보인다.
이밖에 화장품 회사들이 모여서 만든 사보 (장업계)에 그렸던 삽화를 비롯해 어린 아들과 딸에게 그려준 자필 동화책, 독학으로 하는 그림공부를 위해 손수 스크랩해둔 신문자료, 사진 등도 나온다. '
우리의 화가'라는 직설적인 전시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스타 화가 박수근'과 대중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전략이 총동원됐다. 같은 날에만 가면 관람권 한장으로 로댕미술관의 '사랑과 열정의 서사시-로댕과 지옥의 문'과 '.박수근전'을 함께 볼 수 있다.
박수근 그림의 특징은 한국의 모래와 흙이 뒤범벅이 된 진흙탕 같은 단조로운 색채와 마치 화강암처럼 두터운 질감이 느껴지는 마티에르, 완전히 평면화된 구도 등으로 요약된다. 그는 이렇게 무겁게 가라앉은 화면 안에 아기를 보는 소녀, 짐을 이고 가는 아낙네, 절구질하는 새댁 등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그 운명의 무게에 질식하지 않는다. 봄을 기다리는 겨울나무의 의연함처럼 이들은 오늘의 일에 조용히 열중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그림이 전혀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화풍이 완성되기 시작한 50년대 초기의 작품과 말년의 작품에선 섬세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기름장수) (아기보는 소녀)(53년작) 등 50년대 초기의 작품에서는 검은 윤곽선이 굵게 자리잡고 그 안에 미묘한 떨림이 느껴지는 작은 점들이 들어차 있지만, 이후 이 점은 더욱 크기가 커지면서 면으로 등장한다. (농악) (소와 유동)(62년) 등에선 툭툭 화면에 발라진 물감의 느낌 대신 한층 건조해진 화면이 나타난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박수근은 자신의 예술관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는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그의 또 하나의 삶의 태도와 똑같이 지극히 평범한 견해다. 답답하고 보수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정겨움을 넘어서 그윽한 울림을 준다. 진실은 이렇게 소박한 것일까. (02)771-2381~2.
1997. 03. 13 - 한겨레신문
[문화시대] 예술혼 흐르는 상업미술
서울 용산구 삼각지 화랑가. 눈물과 애환이 서린 곳이다. 용산우체국에서 미8군 정문까지 도로 1km 양쪽에 형성돼 있는 이 곳 화랑거리에는 크고 작은 화랑, 화방, 화실 80여 개가 몰려 있고 그림을 생계수단으로 삼는 무명화가 3백여 명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묵묵히 그림을 그리는 곳이다.
인사동이 동양화와 고서, 골동품을 중심으로 유명작가들의 그림을, 청담동이 고가의 서양화를 주로 취급하는 데 비해 삼각지는 값싼 서양화 작품이 유통되는 곳이다. 한국의 몽마르트르 거리인 셈이다.
이곳엔 유명화가부터 신출내기 화가까지 다양한 층이 활동하고 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무명화가들이 많다. 때문에 이곳 화랑은 대부분이 5~10 평 정도로 인사동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만은 어느 곳 못지 않다. 미술작품과 액자의 종류가 다양한 것도 이곳의 특징이다.
몇 만원대의 상가 장식용 그림부터 수천만원대의 고급작품이 한자리에서 거래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개 호당 5천~2만원(비포장)으로 지방, 신도시 화랑가로 도매되는 종류의 그림이 대부분인데 중산층 애호가들 에게 잘 나가는 30호 정도라면 이곳에선 30만~60만원선에 장만할 수 있다(1호가 대략 엽서 한장 크기이므로 10호 그림이면 엽서 10장을 붙인 크기다). 인사동, 압구정동에서 호당 5만~6만원에 팔리는 것들도 대부분 이곳에서 그린 것이 많다.
박수근도 삼각지 거쳐갔다
이곳에 화랑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6.25 직후 용산에 미8군이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다.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기 시작하면서 하나 둘씩 문을 연 화실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파리화실의 박용길(60)씨도 그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35년 전 이곳에 들어온 이래 지금까지 초상화만을 그리고 있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회화부문으로 옮긴 데 반해 그는 초상화만을 고집하고 있다. 이 노화가는 "비록 초상화 작가지만 장인정신을 잃은 적은 없다"면서 "데생에 중점을 두고 몇 년간 기초에만 충실했던 옛날과는 달리 요즘엔 붓을 채 들기도 전에 돈벌이에 나서려는 젊은 화가들이 너무 많아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50년대 말 이후 가난했던 무명화가들이 이곳 삼각지를 채워 나갔다. 개중 에 드물게는 유명화가로 올라서는 일도 가끔 있었다. 가장 서민적인 한국인상을 화폭에 담아온 작가로 이중섭 화백과 함께 짧은 한국현대미술사 속에서 전설이 된 박수근(1914~65) 화백도 중학교 진학도 포기할 정도의 가난한 집안형편 탓에 이 곳에서 미군 초상화를 그리던 시절이 있었다.
삼각지 화랑의 전성시기는 60~70년대였다. 60년대 말 수출그림, 이른바 이발소 그림, 키치미술이 나타나던 시기였다(키치란 1860년 독일 남부에 서 파생된 말로 "아무렇게 주워 모으다" "진품이 아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딘가 촌스럽고 색채가 한눈에 확 들어오는 현란한 저급한 그림들을 "키치미술"이라고 부른다).
삼각지 미술은 이러한 키치미술로부터 시작했다. 미국에 수출하는 값싼 서양화들이었는데 초창기엔 붓으로 물감을 캔버스에 찍어 그린다는 뜻에서 "쫑쫑이" 그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산과 들이 넓게 펼쳐지고 그 가운데로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전원풍경, 그리스신화의 요정같이 두 볼에 홍조를 띠고 곱슬곱슬한 금발머리에 통통하고 예쁜 서양아이들, 때론 눈을 이고 있는 고즈넉한 초가집 등이 이곳 그림의 단골소재였다. 그리고 밀레의 <만종> 같은 유명작품을 그대 로 복사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화가들은 회사에 소속되어 주문에 따라 하루에 수십장씩 그림을 그렸다. 10m 가량의 받침대에 캔버스를 죽 이어놓고 자리를 옮겨가며 페인트로 똑같은 그림을 10여장씩 그렸던 것이다. 솜씨가 뛰어났던 이들의 그림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누렸고 컨테이너 박스에 실려 수출될 만큼 수량도 어마어마했다.
미국 현지에선 한국그림이 부려지는 날이면 화상들이 몰려와 그림도 보지 않고 박스째 사재기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큰 수출그림 회사로는 미국 뉴저지에 지사를 둔 "대륭", "영풍", LA에 지사를 둔 "아메리아" 등이 유명했다. 한 회사가 매월 5만~10만달러씩의 그림 을 수출하던 최고의 호황기였다. 그러나 80년대로 접어들면서 화가들의 인건비가 올라가 수출그림의 가격도 함께 오르면서 이들 회사들은 임금이 싼 중국, 동남아 등지로 옮겨갔고 국내에선 거의 자취를 감췄다.
"빵"을 위한 그림에 장인정신 심는다
삼각지 그림들도 시대변화에 따라 변모했다. 경제수준이 향상되면서 국내가정집이나 가게 등에서 그림수요가 늘어나 내수용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경향도 "쫑쫑이"라는 자조적 표현으로 불렸던 조악한 그림들이 자취를 감췄고, 판에 박은 풍경화 일색이었던 수출그림과는 달리 소재나 주제가 다양한 형태로 거듭났다. 현재 삼각지에서 유통되는 다양한 그림 을 이곳 화가들은 "상업미술" 또는 "생활미술"이라고 부른다.
삼각지의 화가들은 "수출그림" "키치미술"이라는 표현을 싫어한다. 현재 삼각지에 있는 이들의 상당수는 수출그림, 키치미술을 그렸던 이들 이 많다. 하지만 이들에게 그러한 과거는 숨기고 싶은 이야기이다. 어려 운 시절 어쩔 수 없이 "빵"을 해결하기 위해(이곳 화가들은 이 표현을 자주 쓴다) 창작정신을 접어두고 일반인들의 기호에만 충실했던 생명력 없는 그림을 그렸던 시절은 이들에겐 아픈 상처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현재 자신이 삼각지에 있다는 사실마저도 감추고 싶어한다.
사진촬영과 이름 밝히기를 원치 않은 김영호(50.가명)씨도 그러한 과거를 보냈다. 그는 그룹전을 몇 차례 개최했고 지방 화랑가에서 꽤 인기를 얻으면서 더 이상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삼각지에 화랑을 내기전인 2년 전만 해도 키치미술을 그려왔다. 미술계의 밑바닥에서부터 지금까지 30년에 이르는 그의 미술인생은 67년부 터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고교 졸업 뒤 곧바로 마장동에 있던 수출미술 회사에 들어갔다.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오로지 그림만 그리던 하루일과였다. 하지만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 왔던 그는 일이 끝나고 나면 자취방에서 주문그림이 아닌 자신만의 진짜(?) 그림을 또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수입은 일반 회사원의 3배 가량이었다.
그 사이 가정도 이뤘고 국전에 나가 몇번 입상도 했지만 유명작가로의 꿈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자신의 작품만으론 생활이 어려워 그는 사이사이 카드, 달력 그림 등을 꾸준히 그렸다. 그러다 2년 전 이런 키치미술을 모두 청산했다. 삼각지로 들어와 조그마한 화랑을 차렸지만 그는 이젠 주문그림도, 고 객의 비위를 맞추는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
자신이 추구하는 그림만을 그릴 뿐이다. 그것이 팔리느냐 않느냐는 차후의 문제다. 그는 자신의 그림 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기성작가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림에 대한 그의 평가다. 그는 "과거 수출그림 경험이 때론 창작정신을 말살시키기도 했으나 당시의 부단한 습작이 지금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고 역설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기성작가가 되는 길은 아직 멀다. 비즈니스를 하고 수천만원이 드는 개인전을 열어야 한다. 그는 아직 한번도 개인전을 갖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유명해지는 건진 압니다. 기성작가로의 꿈은 버린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저 죽기 전에 화실에 재어둔 내 그림들을 내놓을 수 있는 전시관 하나 갖는 게 소원이죠"라는 그의 말엔 쓸쓸함이 배어 있다.
오늘도 그는 자신의 작은 화랑 한 귀퉁이에서 붓을 들고 캔버스를 대한다. "얼마나 신이 나서 그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누구도 이렇게 맑은 색을 내진 못해요"라고 말하는 그의 입가와 눈매에 웃음이 넘쳐났다.
루다화실의 이종열(46)씨는 자신의 그림을 "상화"(상업미술)라고 자처 한다. 그도 김씨만큼 결코 순탄치 않은 미술인생을 걸어왔다. 그의 미술 인생도 74년 수출그림에서부터 비롯됐다.
"아메리아"의 직원으로 89년 베이징에 지사를 설립했고 미국지사에서도 근무했었다. 그는 지난 몇년간그림을 중단하기도 했다. 보험회사 생활설계사, 목수 등의 일을 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지난 1월 삼각지에 자리를 잡았 다. "배운 게 이것뿐이라 어쩔 수 없더군요. 지금 내 그림은 싸구려 상 업미술입니다. 하지만 남의 그림을 베낀 것도 아니고, 언젠가 정말 내 그림을 그릴 때가 오겠죠. 또 5백년, 1천년 뒤에 이 그림들이 또 어떻게 평가받을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또 안 되면 어떻습니까?" 그의 말엔 달관의 냄새가 느껴진다.
"인사동" 넘보는 물감냄새 자욱하다
이곳 화가들이 기성 화단에 느끼는 감정은 하나의 애증이랄까? 끝없이 기성화단으로의 진입을 갈구하지만 때론 좌절하고 때론 자학하면서 하루하 루를 보내고 있다. "가만히 그림만 그려서는 절대 기성화단에 들어갈 수없습니다. 하지만 경제사정 탓에 개인전은 엄두도 못내고 세월만 보내죠.
상업미술을 그린다는 자체가 화가로선 하나의 비애인데 최근엔 불황 탓에그러한 상화마저도 다른 화가들과 가격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점이 또다른비애죠."
이곳 화랑가 번영회 조직을 추진했던 "박아틀리에" 박명복(49)씨의 말 이다. 그래서 어떤 화가들은 60%는 팔리는 상화를 그리고 나머지 40%는 자신의 온전한 창작물에 시간을 쏟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삼각지 상업미술을 그저 값싼 그림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빈약한 우리 미술계에 작품의 질과는 상관없이 작가의 이름이 가격을 좌우하 는, 마치 부동산 투기와도 같은 혼탁한 미술시장과는 별도로 미술을 생활의 하나로 자리잡게 만든 곳은 인사동이 아니라 바로 이 삼각지이기 때문이다.
삼각지엔 오늘도 해가 뜨고 그곳에선 무명화가들의 땀과 눈물에 젖은 물 감냄새가 항상 자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