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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학>, 2006년 겨울호.
<서정시학 집중 조명 대담 원고>
접대의 기술 외 4편
휘민
회식은 시작됐다,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지글거리는 불판 위에서 허옇게 뒤집히는 살점들
안주 집을 새도 없이 바삐 돌아가는 술잔
안주가 떨어지자 하나 둘 가면을 벗기 시작한다
꾸벅꾸벅 졸음을 삼키며 묵언수행 중인 정 과장
쉴 새 없이 문자를 날리던 방 주임은 삼십육계 줄행랑
눈치 없는 허 대리만 물 만난 고기처럼 주유천하
술고래 사장은 직원들 낯빛 살피며 독야청청
절반은 남았고 절반은 빈 자리다
이제 영원한 구원투수 김 차장이 나설 때
징징거리는 아내의 목소리 따윈 과감히 꺼버렸다
곧바로 사장 앞에 무릎을 낮춰 파테르 자세 들어간다
빈정거리는 사장의 태클을 요령 있게 차단하는 센스
아랫사람들의 투정을 가볍게 원샷으로 틀어막는 막강 입심
자기 집 전화번호야 잊든 말든 사장을 위해
콜택시 호출번호를 줄줄 꿰고 있는 신통방통 기억력
접대부 뺨치는 저 흥행보증수표를 믿어볼 일이다
3분 30초
골든타임에 뉴스를 진행하는 그가
나에게 3분 30초를 배당해 주었다
내 눈은 원고와 녹음실 밖 전자시계를 갈마든다
그래, 이쯤에서 1분이 지나고
여기를 읽을 땐 2분 30초,
저런, 길어지겠는 걸
그때부터 내 목소리는 조금 빨라진다
그러나 누구도 눈치 채선 안 되지
3분 30초, 31초, 32초… 36초.
데스크는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건네면 그뿐
그러나 이 짧은 시간을 위해 나는 일주일을 바쳤다
주말이면 일간지 북 섹션을 훑고 서점에 나가 책을 골랐다
환승역을 놓친 것도 모른 채 책장을 넘겼고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밤새 원고를 썼다
원고를 쓰면서 몇 번이나 분량을 확인했다
모자라거나 넘치면 안 돼
가끔 욕심을 내서 원고가 길어지면
내 목소리는 여지없이 잘려나갔다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야금야금 늘어가는
15초짜리 상업광고였다
기차 소리를 듣던 밤
나는 물 속 같은 잠에서 깨어나
첨벙첨벙 세상으로 걸어나왔네
그날따라 별들은 앞다투어 담을 넘어왔고
처마 끝에 고여 있던 달빛은 빈 마당에 흩어져
내 방을 기웃거리는 별들과
밤이 깊도록 수런거렸네
창문을 열자 미끄러지듯 뒷걸음치는 어둠
잠들었던 역마살을 깨우며 밤을 건너는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 들렸네
창 틈으로 밀려드는 오월,
그 어느 수상한 새벽의 바람 소리
나 살금살금 문지방을 넘어섰네
그때, 안방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갈라진 기침 소리
돌아보니 내 치마 한 자락
문설주에 끼어 있었네
병상에서 본 별자리
병상의 하루가 간이침대에서 갈무리될 무렵
잠들지 않는 도시의 불빛 아래 촛불 하나 밝힌다
차가운 바닥에 무릎 꿇고 난생처음 두 손을 모은다
흐려지는 불빛 사이로 맑은 수액처럼 떨어지는 링거액
별도 아닌 네온 빛 덩어리들 피어올라
도시의 별자리 더욱 아득하게 멀었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는 밤만 되면 소란스러웠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나 잡히는 기억 한 자락이
매일 밤 아버지의 잠꼬대에 끌려 나왔다
열여섯에 집 나가 소식 끊어진 큰아버지를 부르고
베갯맡에 침 고이는 줄도 모르고 음식을 드셨다
재 너머 따비밭에서 놓쳐버린 소를 찾아
신새벽까지 비탈에 서 계셨다
고삐 풀고 달아난 소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 있을까
함초롬히 이슬 맞고 그 커다란 눈에 어리는
새벽별 질근질근 되새김질하고 있을까
아버지가 이랑 깊은 봄의 별자리를
녹슨 보습으로 갈아엎는 밤
기저귀에 젖어든 아버지의 고단한 하루는
달무리 진 하늘 아래서 밤새 뒤척였다
가로등이 꺼지는 새벽녘에야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별이 떠오를까 두려웠다
부레를 가진 사람
설익은 추억의 두물머리 헤매다
새벽까지 잠을 놓치는 날
그런 밤이면 세월을 물질하며 강을
거슬러 오르는 당신이 보여요
이마에 맺힌 땀방울로 하루해를 닦아도
문갑 속엔 입술연지 감춰둔 마디 굵은 손
자식들 생일날이라야 고등어 푸른 등
쓰다듬던 그 야윈 손
나는 지금 자반고등어 한 토막 앞에 놓고
노릇노릇 구워진 등줄기 걷어내요
하얀 속살처럼 떨어져 나온 당신의 비밀
주둥이 긴 염소처럼 되새김질해요
뾰족해진 입으로 풍선을 불어볼까
새들의 푸른 입김 사려 넣어
둥둥 하늘로 떠오르고 싶어
그런데 말랑말랑한 살점 속에서
울컥 울컥 핏물이 배어나네요
내 안에 살아 있는
슬픈 어족
당신이 던진 서늘한 작살
내 푸른 등줄기에 꽂혔어요
휘민
본명 박옥순. 1974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청주과학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에 재학 중이다.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개신고물상」이 당선되었다.
<집중 조명 대담>
맹문재 : 잘 지내지요. 아직 만나본 적은 없지만 휘민 시인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인지 친숙하게 여겨지네요.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요.
휘민 : 안녕하세요. 저도 선생님을 뵙고 싶었는데 마땅한 기회가 없었네요. 이렇게 귀한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즘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아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회사 일도 바빠서 야근이 부쩍 잦아졌고요, 집에 돌아오면 사이버대학 수업을 듣습니다. 회사에서의 주요 업무가 문화․예술 잡지를 편집하는 일이라 그 분야에 대한 식견을 넓히고자 지난해부터 공부를 하고 있는데, 회사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네요. 첫 시집을 내기 위해 막바지 정리도 하고 있습니다.
맹문재 :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온 뒤 나름대로 시를 열심히 써서 이번에 『서정시학』에서 시집을 출간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휘민 시인과 같이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서정시학 시선>에 들어오게 되어 저는 매우 고맙고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 시집에 대한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은데 좀 들려주시지요.
휘민 : 등단을 2001년에 했으니 첫 시집이 좀 늦은 감이 있습니다. 그동안 동인 활동도 안 하고 혼자서 고군분투하듯 시를 써온 지라 시집에 대한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었는데, 드디어 첫 시집을 묶게 돼서 너무 기쁩니다. 훌륭하고 쟁쟁하신 선생님들과 같은 시선집에 이름을 올리게 돼서 더욱 기쁩니다. 제 시를 읽어주시고 <서정시학>에서 시집을 출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맹문재 : 이번 시집에 수록된 원고들을 보니까 방송국에서 일한 적이 있네요. 「평화방송」 「라디오 스튜디오」 「3분 30초」 「이력 한 줄」 「소리들」 등이 방송국에서 한 일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일들을 계속하는지요? 일하면서 느꼈던 보람이나 애로사항 같은 것이 듣고 싶네요.
휘민 : 방송일을 조금 했습니다. 서평 전문지 『출판저널』 기자로 일할 때인데요, 평화방송 라디오와 인연이 닿아서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책 소개 코너를 진행했었습니다. 그 즈음엔 이상하게 그런 제의가 많아서 청주방송 라디오에서도 비슷한 코너를 맡았습니다. 아무래도 『출판저널』 기자라는 ‘간판’ 덕분이었나 봅니다. 『출판저널』을 떠나면서 청주방송은 다른 분에게 바통을 넘겼고, 평화방송은 다른 일을 하면서도 만 2년 동안 진행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했던 건 참 색다른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비록 텔레비전처럼 영향력이 큰 매체는 아니었지만 라디오 방송국을 드나들면서 방송의 생리라고 해야 할까요, 눈에 보이진 않지만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거부할 수 없는 매스 미디어의 위력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그때의 경험들이 ‘방송국’과 ‘소리’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주목하게 만들었지요.
마이너 방송국에서 도서칼럼니스트로 일했던 체험들은 ‘주류’의 폭력과도 같은 비정한 이 세계의 생존 문법에 눈을 뜨게 해줬습니다. 생방송으로 MC와 대담형식으로 진행했던 청주방송과 달리 평화방송은 제가 원고를 준비해서 녹음을 하는 방식이었거든요. 그런데 녹음방송이라는 게 그냥 준비한 원고만 읽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말 한마디 토씨 하나 틀려도 안 되고, 어쩌다가 잡음이 들어가면 금세 데스크가 컷을 외치거든요. 그러면 몇 번이고 다시 녹음을 해야 합니다. 처음엔 제게 할당된 시간이 5분 정도였는데 광고가 늘면서 차츰차츰 줄어들었습니다. 데스크는 덕분에 광고가 늘었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 시간들이 결국 저의 방송시간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던 것이죠. 그 시절만큼 1분, 아니 1, 2초의 촌각이 그토록 위압적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습니다.
맹문재 :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출판사에 근무한 적도 있는 것 같네요. 그동안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요? 「접대의 기술」 같은 작품에서는 샐러리맨들의 일상의 한 단면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네요.
휘민 : 출판사는 아니고 『출판저널』을 나온 후 줄곧 편집디자인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주로 기업의 사보나 사외보를 기획하고 편집하는데 워낙 일이 잡다하고 많아서 밤샘이나 야근이 많은 편입니다. 동료들 사이에선 3D업종이라고 하지요. (웃음)
제가 좀 예민하게 받아들여서 그런지 샐러리맨의 비애는 늘 안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인간관계에서 빚어진 어려움이라기보다는, 제 경우엔 결국 시간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아요. 회사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잖아요. 특히, 자정 넘어 총알택시를 타고 돌아와 아무도 없는 빈 집에 들어설 때가 그래요. 그럴 땐 ‘지금 내가 뭘 하는 건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하는 의문들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제 경우가 조금 특별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게 다 사회나 조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누구나 겪는 일인 걸요. 「접대의 기술」도 그런 맥락과 닿아 있습니다. 저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모든 직장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샐러리맨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했을 테고, 또 공감할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맹문재 : 이번 시집에서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특히 아버지와 관계된 작품들이 많은데, 「불알」「병상에서 본 별자리」「중환자실이 있는 복도」 연작시 등이 감동을 줍니다. 휘민 시인의 가족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휘민 : 저희 집은 아주 다복한 편입니다. 제가 칠남매 중 막내지요. 아버지는 제게 아주 특별한 영감을 주시는 분입니다. 제가 늦둥이라서 아버지와 저 사이에는 마흔아홉 해라는 거대한 시간이 가로놓여있는데, 어린 시절에는 그 간극을 감당하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너무 일찍 늙어버리신 아버지와 너무 어린 딸아이가 겪는 소통의 단절감도 깊었고, 그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보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적이 더 많았으니까요.
그러다가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돼요. 아버지가 병상에 드시면서부터입니다. 2004년 봄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를 이대로 보내드리면 안 된다. 지금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직장, 나의 미래, 서울생활, 방송…. 이런 것들이 감히 아버지와 견줄 만큼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었지요. 고민은 길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주변의 만류를 뿌리친 채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방송을 그만두게 된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때 아버지 곁에서 몇 달간 머물면서 아버지와 화해하고 아버지를 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불알」「병상에서 본 별자리」「중환자실이 있는 복도」 연작시도 아버지 곁에서 쓴 시들이고요. 아버지는 제가 시를 쓰도록 만든 분이고, 또 한동안 방황하며 시를 놓고 있을 때 다시 시를 붙잡도록 이끌어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힘들었지만 아버지 곁에 머물던 그 몇 달 동안이 아버지가 제게 준 마지막 선물이 아니었나 싶어요.
맹문재 : 아버지에 대한 정이 아주 깊으시군요. 그러면 시는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쓰게 되었나요? 습작기에 영향 받은 시인이나 상황이 있는지요? 들려주시면 고맙겠네요.
휘민 : 시를 쓰게 된 특별한 계기는 없었지만 늘 마음속에 글쓰기에 대한 열망 같은 걸 품고 살았습니다. 메모하는 걸 좋아했고, 나를 둘러싼 세상과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지요. 그 전에도 나름대로 습작을 했지만 본격적인 습작은 대학에 들어가서 했습니다. 스물여섯에 늦깎이 학생이 되었는데 뒤늦게 시작한 공부인 만큼 의욕도 아주 컸어요. 방학 때는 도서관에 들어박혀 손에 닿는 대로 시집을 읽고 좋은 시들을 대학노트 몇 권에 옮겨 적기도 했습니다. 출발이 늦었던 지라 좋은 시를 많이 읽는 것만큼 훌륭한 공부가 없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 시절, 도서관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시집 『어느 순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견하곤 쾌재를 불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절판된 시집이라 초판을 구할 수 없어 지금도 그때 도서관에서 복사해온 복사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송찬호 선생님과의 만남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송찬호 선생님의 시를 좋아해서 보은까지 불쑥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베풀어주신 따뜻한 호의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청주에서 찾아온 시인 지망생을 붙들고 선생님은 작은 읍의 허름한 다방에 앉아 두 시간 남짓 아주 특별한 시 창작 강의를 해주셨어요. 주로 선생님의 습작기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이성복 선생님의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 후 이성복 선생님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곱씹으며 현실을 바라보는 눈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시로 구성했을 때 어떻게 그것이 보편성을 갖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고민했습니다.
맹문재 : 휘민 시인의 작품들을 읽어보면 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삼아 시를 쓰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저는 그와 같은 시작 태도가 작품이 구체성을 띠는 데에 유리하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합니다. 휘민 시인은 시를 쓰는 데 어떤 습관 같은 것이 있는지요?
휘민 :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길어 올린 체험은 제 시의 중요한 모티프가 됩니다. 현란한 수사와 문법의 파괴처럼 형식적인 실험을 통해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현실을 외면한 채 공중에 떠 있을 때면 왠지 공허한 아름다움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시는 울림을 가진 시입니다. 시인이나 문학도, 평론가만 읽는 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시를 말합니다. 그것이 구체성을 가질 때 독자와의 공감대와 울림의 진폭이 큰 것은 당연한 이야기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머리로 읽는 시보다는 가슴으로 읽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시를 쓰는 데 특별한 습관 같은 건 없어요. 다만 순간순간 스쳐가는 생각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메모를 즐겨하는데 아주 작지만 그것들이 시를 만드는 최초의 씨앗이 됩니다. 요즘은 출근길이거나 어딘가로 이동할 때, 종이에 메모하기 힘들 때면, 종종 휴대폰의 메모장 기능을 활용하곤 합니다. 디지털문화의 영향으로 이제 시간과 장소에 따라 메모하는 방식도 달리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씨앗들이 있다고 해도 시 한 편을 완성하는 건 참 고행입니다. 쉽게 쓰지도 못할뿐더러 다작도 못 되거든요. 그래서 퇴고를 오랫동안 하는 편입니다.
맹문재 : 휘민 시인의 등단작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개신고물상」입니다. 저도 이 작품을 학교나 시민강좌의 수업시간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작품의 창작 동기나 상황 등에 대해서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휘민 : 「개신고물상」은 대학교 1학년 때 썼는데 시의 모티프와 제목은 학교 옆에 있던 고물상에서 따왔습니다. 그 고물상은 학교 후문쯤에 있었는데 허름한 모습과는 달리 ‘개신’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개신’과 ‘고물상’에서 느껴지는 아이러니컬함에 마음이 갔는데, 며칠 동안 관찰을 하다 보니 전에 보이지 않던 새로움과 그곳에 깃들인 ‘개신(改新)’을 향한 희망 같은 게 엿보였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왜 ‘개신고물상’이라 이름 붙였는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주인을 만나 물어봤더니 고물상 주인은 별 싱거운 사람 다 보겠다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더니 시큰둥한 낯빛으로 그 동네가 개신동이라서 그렇게 지었다고 하더군요.
거기서 얻은 작품으로 등단까지 하고 나니 그 후 어떻게 됐는지 또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몇 년 후 다시 찾아갔는데 “한 자리에서 십여 년 넘게 버텨온 뚝심”도 세월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말았더군요. 고물상은 간데없고 그 자리에 빌딩이 서 있었습니다.
맹문재 : 「멍」에서는 나이에 대한 휘민 시인의 인식이 나타나 있습니다. 서른을 넘겼다는 사실이 휘민 시인에게는 큰 변화로 느껴졌는가 봅니다. 저 역시 세 번째 시집인 『책이 무거운 이유』에서 여러 번 표출했듯이 마흔을 넘겼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충격과 부담감을 가졌습니다. 휘민 시인에게는 서른 살의 나이가 어떻게 다가왔는지 궁금하네요.
휘민 : 어릴 때는 서른이 되면 진짜 어른이 돼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서른을 넘겼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건 아니지만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십대에 느꼈던 막연한 불안감은 수그러들었지만 또 다른 무게감이 다가오니까요. 십대가 까슬까슬한 밤송이 같다면, 이십대는 밤송이 속에 들어있는 밤 같아요. 그리고 삼십대는 밤 껍질을 벗겨낸 밤톨 같고요. 그런데 아직도 거기엔 잘 벗겨지지 않는 속껍질인 보늬가 남아 있지요. 밤이 어떤 맛인지 알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바흐만의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서른은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게 어색해”지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청년기와 성년기의 갈림길처럼 여겨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조급해지는 느낌도 있습니다. 무언가를 이룬 게 없다는 데서 오는 조바심이지요. 그래서일까요, 어느 날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니 여기저기 참 많이도 부딪치고 또 부대끼며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나한테만 멍이 됐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요. 상처를 주든 받든 그건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흔적인 거잖아요.
맹문재 : 「연봉생활자」 「하루살이」 등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휘민 시인의 시편들에는 삶의 힘듦에 대한 면들도 담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휘민 시인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겠지요. 너무 어려운 질문일 수도 있는데,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휘민 : 그 말씀을 들으니 언젠가 읽었던 로버트 라이시의 책 『부유한 노예』가 떠오릅니다. 그 책은 우리는 분명히 수십 년 전보다 더 잘살게 됐는데 왜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늘 쫓기듯 살고 있을까 하고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집니다. 기술의 진보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얻었지만 개인들의 삶, 특히 소시민들의 삶은 일찌감치 찰리 채플린이 간파했던 ‘Modern Times’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은 풍요로움을 향유하는 수요자이자 소비자이지만 엄청난 경쟁에 시달리면서 풍요로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공급자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구조적인 문제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수요자와 공급자가 결국 한 사람이라는 얘기는 수요자의 기대치가 높아질수록 공급자의 노역 또한 커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지요. 그것도 변화와 진보라는 커다란 화두를 껴안고서 말이지요. 그렇다면 기대치를 낮추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지만 모든 사람들이 소로우나 니어링 부부처럼 현실을 외면한 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기에는 인간이 너무나 사회적이고 또 너무나 욕망이 큰 동물이잖아요. 애석하게도 우리는 여전히 ‘부유한 노예’로 살아가야 할 것 같은 암울한 기분을 떨치기 힘듭니다.
맹문재 : 휘민 시인의 박학다식한 면을 볼 수 있네요. 책을 많이 읽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쿠마리사원 앞에서」「고원에서 오줌 누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외국 여행의 경험도 있는 것 같은데 좀 들려주시지요.
휘민 : 『출판저널』에서 기자 생활했던 시간은 비록 일 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참 소중한 제 삶의 마디입니다. 박봉이고 힘들었지만 책이 좋고 사람이 좋아서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정리해고를 당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출판저널』의 발행처가 출판금고에서 출판협동조합으로 이관되면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게 된 것이지요. 그때 쓰리고 아픈 마음을 달래려 함께 일했던 기자들과 퇴직위로금을 털어서 네팔과 티베트로 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개인적으로 해외여행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요, 한 달 동안 오지를 돌아다니면서 뜻 깊은 경험들을 참 많이 했습니다. 고산병에 시달리며 평균고도가 4천여 미터에 달하는 티베트 고원을 돌아다녔고, 네팔에서는 산거머리와 싸우며 7박 8일 동안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트레킹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주로 시원성과 비움 그리고 회귀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카트만두에 있는 힌두사원 파슈파티나트에서 본 다비식과 힌두교의 처녀신이 살고 있는 쿠마리사원도 기억의 집에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겨주었죠.
맹문재 : 「그녀의 바닥」「폐경의 날들」 「강바닥」 같은 작품들에서는 휘민 시인의 여성 인식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성차(性差)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휘민 :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여성들보다 남성들의 목소리가 더 큰 남성우월주의 사회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틀림’과 ‘차별’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호주제 폐지를 둘러싼 오랜 공방은 여전히 불합리한 우리 사회의 구조를 여실히 보여주는 적절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데 머물러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평등은 다름과 차이를 찾고 그것을 인정해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머릿속에서 다름과 차이라는 인식을 지워나갈 때 비로소 성차를 넘어서는 진정한 평등사회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맹문재 : 요즘 생활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으면 들려주실 수 있나요? 재미있는 책이나 영화나 구경거리나 취미생활이나 등등 말입니다.
휘민 : 얼마 전 비보이 공연을 재미있게 봤습니다. 「The Code」라는 넌버벌 퍼포먼스인데요,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비보이들의 역동적인 춤과 클래식 춤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발레를 접목한 공연입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장르를 대사 한마디 없이 몸짓으로만 연결해 놓은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관객들을 무아지경으로 몰고 가는 프로 춤꾼들의 열정을 접할 수 있어 더욱 좋았습니다. 무언가 색다른 공연을 찾으시는 분들께 권하고 싶네요.
일상에서 찾는 소소한 즐거움으로는 사진 찍기를 들 수 있습니다. 카메라 메고 여기저기 쏘다니는 걸 좋아하는데요, 굳이 멀리까지 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주변에 재미있는 소재들이 많습니다. 한동안 벽을 찍어보기도 했고요, 은평 뉴타운 공사가 본격화하기 전에는 사람이 떠나간 빈 집들을 어슬렁거리기도 했습니다. 다음에는 사람을 찍어볼까 합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과 시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 시가 없었다면 시인들은 사진을 찍었을 거라는 어느 사진가의 말이 떠오르네요.
맹문재 : 언제 휘민 시인의 사진기 앞에서 모델로 한번 서고 싶네요.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는지요? 시인으로서의 계획도 물론입니다.
휘민 : 우선 올해는 첫 시집을 출간해야겠지요. 일상생활에서야 별다른 변화가 없겠지만 지금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도 열심히 써야겠지요.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문단 행사에도 자주 못 나갔는데 이제부터는 좀더 바지런히 움직일 예정입니다.
맹문재
시인, 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