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플라스틱 45년 회상(5)
1972.5.15일 PVC5개사 합병 작업 일부터 이 회사를 그만 둔 1978. 6.30일까지 한국프라스틱에서 일했다.
잠시 1974년4월 한국산업은행에 복귀하여 증권부 증권과에서 일하였으나 6개월 만에 은행을 그만두고 다시 이회사로 돌아 와 본격적으로 프라스틱과 관계를 맺었다. 은행 6개월 간 재직 중 당시 대한석유공사(현 SK)에 투자한 Gulf의 자본을 인수, 경영에서 손을 때는 작업을 하였다.
-외국자본의 국내 석유화학 철수-
정부는 울산대한석유공사에 대한 사장 임용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원유 공급 등 불평등 협약으로 외국 주주와의 마찰이 심해지면서 우리 정부는 이별을 결심하고 그 실무 작업을 맡았다. 이 기초 작업은 초기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끝내지 못하고 은행을 그만두게 된다.(이후 오랜 진통 끝에 유공 설립 이후 오랜 기간 최대주주로 경영에 참여했던 미국 걸프는 9300만 달러에 유공의 지분 50%를 양도하기로 합의, 1980년 8월 19일 전면 철수했다)
당시 은행 상황은 젊은이에게는 비전이 없어 보이는 무기력한 직장이었다. 반면에 삼성, 대우, 현대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종합상사들의 비전은 젊은이에게는 도전하기에는 매력적인 직장이었다. 세계를 향해서 열심히 일하는 곳으로 엘리트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산업은행에서도 수십 명이 대회사로 옮겨 회사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었다.
내가 한국프라스틱을 떠난 후 이 회사는 합병회사의 고질병인 파벌 싸움으로 경영진이 골치를 썩고 있었다. 나를 인정하고 인사관리를 맡겼던 홍규희 사장을 뵈니 나를 필요로 하는 그 분의 눈을 보고 은행을 떠나 이 회사로 옮기기로 내 마음에 결심을 굳혔다. 20세기 주요 산업 중 하나인 프라스틱 분야에서 나의 인생의 길을 가기로 하였다. 2년 여 한국프라스틱 인사관리를 하면서 공부하고 경험한 Plastic산업은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일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지 않은가? 가장 젊은 시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정적으로 일을 하며 보냈기에 은행을 떠난 나의 결정에 후회를 해 본적이 없다. 그리고 3년 후 한국프라스틱을 떠나 진양그룹으로 옮겼다. 한국프라스틱과 그 당시 진양과는 어떤 관계였나를 밝히기 위해 이 회사의 합병과정을 다시 리뷰해 보기로 한다.
한국프라스틱은 정치적 부산물로 탄생된 회사이다.
원래 PVC5개사의 주주인 최성모(대한프라스틱, 공영화학), 김종희(한국화성), 김진만, 김영구(우풍화학)와 이회림(동양화학)은 당시 정치권을 움직일 수 있던 대회사 사장이거나 정치인이었다.
5개사 합병 작업을 할 때 모두들의 관심은 주식 배분율과 누가 제1의 주주가 되느냐였다. 이들 주주 중에는 합병회사의 주도권을 잡아 궁극적으로는 자기 회사로 만들고 싶었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6개월간의 합병 작업 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주식 배분율이었다. 공정하고 누구나 수궁할 수 있는 지분율어야 만 주주들이 Accept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합병추진위원회에서 모두가 의견을 내었으나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의견을 낸 사람이 없었다. 결국 내가 제안한 의견이 채택되었다. ‘자산의 정비례, 부채의 역비례’로 지분율로 정하자는 내용이다. 5개사는 모두 적자의 연속으로 부채가 과다한 상태이다. 자산이 많은 회사라도 자기자본을 다 소진하고 외부차입에 의존함에 따라 정상적인 합병 절차를 취할 수 없었다. 나의 의견대로 지분율이 확정되었다. 그 결과 최성모(대한, 공영) 30.8%, 김진만, 김영구(우풍) 27.4%, 김종희(한국화성) 25.4%, 이회림(동양)16.4%의 지분율이 나왔다.
한국화약이 모회사이며 당시 유력권력층과사돈을 맺고 있는 김종희는 당장 이의를 제기하였다. 1만5천톤의 PVC 레진 공장과 연.경질 가공시설을 갖춘 진해의 한국화성은 자산이 큰 대신 부채가 이에 상응하여 제일 많았기에 적자 폭도 제일 컸다. 그러나 그는 이 합병회사를 자기의 회사로 만들겠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았다. 이에 비하여 우풍화학은 부채가 가장 적어 단일공장으로 27.4%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정치적인 big deal이 이루어진다.
생각보다 많이 배정받았다고 생각한 이회림측이 한국화약의 김종희측에게 6.4%를 양보하고 대신 동양에 대한 모든 대출금 전액을 저리(低利)로 대환하였다. 당시 정부의 긴급경제명령인 8.3조치는 대출금 60%까지 저리로 대환이 가능하였기에 가장 실속을 챙긴 쪽은 이회림 측이다.
이래서 김종희 측은 31.8%로 제1주주, 최성모측은 30.8%로 제2주주, 김진만, 김영구측은 27.4%, 이회림측은 10%의 지분으로 신회사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경영진 구성은 주주들의 간섭을 배제하기위해 상공부장관이 산업은행총재와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사장으로는 청렴결백하다고 정평이 나있던 홍규희 전 산은 이사, 전무이사에 산은 조남온 현직 업무부장, 이사에는 각 주주(동양제외)측 1명 그리고 감사는 동양화학 측에서 파견하였다. 초기 2년 간 각 주주는 신 회사의 지분을 주장하며 직원들의 인사에 관여하고 특히 김종희 측 직원은 무소불위의 생각으로 질서를 해치는 행위를 하였지만 나는 각 주주들의 이해를 조정하기위하여 노심초사하였다.
직원의 투서사건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났다. 제 1기 홍규희 사장체제는 부정과 사심이 없이 공정하게 운영함에 따라 신회사의 체제를 확고히 하였고 경영 성적도 매우 좋은 결과를 얻었으나 1975년 3월 당시 우용해 경제기획원 차관보를 제2대 사장으로 오게 되면서 물러났다. 우사장이 오면서 각 주주의 직원 인사에 입김을 불어 넣었으나 2년 간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인사체제로 신임 우 사장도 이를 변경하기에는 직원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나의 관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프라스틱 공개와 (주)진양의 경영참여 실패-
1976년 말 자본시장육성법의 일환으로 회사의 주식을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주식을 공개함으로서 이 회사를 인수하고자하는 작업이 물밑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1977년 1월 어느 날 진양그룹의 조성일 비서실장이 나를 만나러 왔다. 진양은 이 회사의 Big Buyer로 독점판매에 반발하고 PVC공장 건설을 추진하였으나 상공부에서 허가를 하지 않자 한국 프라스틱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조실장은 나에게 우리가 이미 51%(?)의 주식을 확보했으니 다음 주주총회(1977.2.28)에서 진양이 한국프라스틱에 진출할 것이므로 협조를 부탁한다.
주식회사는 주식 지분에 의하여 경영 지배구조가 이루어짐으로 나는 상법상 일반원칙이 적용되는 논리에 따르기로 하였다. 그리고 양규모 사장이나 조성일 비서실장은 고등학교 2년 후배라 평소에도 내가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기업인이었다.
나는 그에게 한국프라스틱은 단순히 상법상 논리로 생각하면 어려움이 있을 터이니 시간을 갖고 차근하게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을 하였다. 주주 중 일부가 진양에 양도하고 공개된 주식을 주식시장에서 매집한 것 같았다. 주주총회가 가까워지지만 진양이 생각한대로 경영권 확보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초조한 진양은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진출방안을 강구하였다. 그 과정에 우사장과의 마찰뿐 만아니라 김종희 측의 반발로 회사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직원들도 동요하였다. 일부 주주의 반발로 혼란이 가중되자 정부는 경영의 안정을 구실로 진양측의 경영진 파견도 불허하고 전원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2007년 2월에 열린 주주총회에서 진양은 한국 한국프라스틱에 한사람의 경영자도 진출시키지 못했다.
농림부차관을 역임한 진봉현 씨가 3대 사장으로 주주총회에서 선임되었다.
-다음에는 진양의 한국프라스틱 입성과 철수 이야기가 전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