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魂)으로 부르는 노래
김형도
용문산(龍門山) 자락에 있는 상원사는 복원불사(復元佛事)의 회향(回向)을 기념하여 대웅전 낙성식을 9월 13일 3시에 거행하고 저녁 7시부터 산사(山寺)음악회를 가졌다. 장사익, 한영애, 이종만, 솔리스트, 아카펠라 등 국내 최고의 음악인들이 참석하여 뜨겁게 무대를 달구었다.
상원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선원으로 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태고 보우스님이 수행하고 무학대사, 효령대군이 머무른 절로서, 1907년 의병 봉기 때와 6·25 용문산 전투에서 불타 버렸다. 현 호산스님이 주지로 부임해서 육년에 걸친 대 복원불사 끝에 대웅전을 복원하여 용문선원의 면모를 갖추었다.
산사를 가득히 메운 음악회는 한국에 공연차 온 아프리카 원주민 민속춤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율동의 섬세하고 부드럽고 유연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랄한 몸매를 격렬하게 움직이는 율동적인 모습은 과연 아프리카 춤이라고 느껴졌다.
한영애의 공연은 그녀의 몸짓과 손짓에 따라 가수와 관객이 한마음으로 어울려 노래하는 축제마당이었다. 가냘픈 여인이 청중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마력이 대단했다.
많은 청중들의 갈채를 받으면서 무대에 오른 장사익의 공연은 온 관람객을 사로잡는 신(神)의 목소리이었다.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모든 청중이 그 속에 빨려 들어갔다. 가수라고 할까, 소리꾼이라고 할까, 아니면 음유시인이라 할까. 살다 보면 일상의 짓눌림 속에서 자신이 처한 상태가 어떤 어려움인지 자각도 못 하고 마냥 힘든 경우가 있다. 이런 가슴의 응어리를 이른 봄날 얼어붙은 강물 녹이듯 확 풀어 주는 그의 목소리에 모두 넋을 잃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묵은 한이 풀린다. 도대체 그의 목엔 어떤 장치가 되어있는 것일까? 공연장에는 요란한 조명도 코러스도 없다. 때로는 단출한 장구 하나, 기타 하나, 깔끔한 피아노가 따라 나오지만, 오늘은 아카펠라가 배경으로 중간마다 합연하여 우렁차고 장엄함을 보였다. 하지만 특유한 그의 목소리가 구성진 가락으로 고․저 음을 타고 넘어갈 때는 모두가 탄성을 지른다.
시를 읊는가 하면 어느새 판소리인 것 같기도 하다. 판소리가 현대적으로 발달한 장르…? 로 촌부의 부드러운 몸짓까지 곁들여 한에 맺혀 넘어가는 가슴을 울리는 소리는, 바로 혼(魂)으로 부르는 소리로 그 속에 빠져들고 만다.
자작곡 노래를 빚어내는 ‘흥얼거림’ 은 음악의 틀을 뛰어넘은 자유로움으로 표현되고, 생명력을 갖는 하나의 노래가 된다. 뛰어난 즉흥성과 매이지 않아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가진다. 그것이 노래를 듣는 이에게 마력으로 작용한다.
공연 때마다 왜 첫 곡이 찔레꽃인가요? 라는 물음에 대하여, 1994년 6월, 마흔여섯 나이로 일정한 직업 없이 태평소를 불며 사물놀이 패를 따라다니던 시절, 잠실 5단지를 지나는데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아파트 담장의 장미꽃이겠거니 하고 냄새를 따라가 보니 장미에서는 전혀 냄새가 없었다. 잘 보이지 않는 한 구석에 하얀 찔레꽃이 피었는데 그렇게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을 보고 울컥했다. 야! 아무도 안 보는 보잘것없는 찔레꽃에서 이런 좋은 향기가 나다니, 출세해서 잘 살지 못하더라도 서민들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니겠나? 어렵고 한스러운 생활에서도 속으로 진한 향기(香氣)를 담고 각자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이 노래다. 갖은 고생 끝에 사십대 후반에 늦게 떴는데 불우한 시절 어렵게 보낸 자신의 이야기요 자신의 노래다. 숨이 넘어갈 듯 고음으로 절규하는 모습, 신들린 모습은 모든 청중을 압도하여 무아의 경지로 몰아넣는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여섯 개 스틱으로 드림을 치는 타악기 연주자 김대환이 장사익에게 “산토끼 노래 알지? 그 노래를 박자 없이 불러봐!”라고 했다. 가사를 따라 노래를 부르니 몇 번이고 노래를 세우고는 “너 속으로 박자를 세고 있잖아?”라고 호통을 치더란다. 그 뒤로부터 장사익은 박자를 잃어버렸고, 호흡이 되는 대로 기분이 내키는 대로 불렀다.
결국 노래도 호흡이다. 일 년 사계절이 24절기로 엄격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시간의 끊임없는 흐름이듯 우리의 노래도 굳이 박자로 나뉠 이유가 없는 우리 삶의 연장이고, 삶의 호흡이고, 기쁨과 슬픔의 자연스런 발로이기에 기쁠 때에는 소리를 지르고 슬플 때에는 느리게 부르면 된다는 것이다. 서양 음악처럼 박자를 맞출 필요 없이 된장 고추장을 즐겨 먹는 한국인의 심성이 담긴 음악으로, 마음속에 태어난 감성과 희로애락을 우리식으로 편하게 표현해 내면 우리 음악이 되는 것이다.
장사익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음악을 스스럼없이 표현하고 있다. 미국 공연이 끝나자 관계자들은 장사익의 공연포스터를 자기네 홀에 영구히 게시하겠다며 “노래의 뜻은 모르겠지만 당신 노래를 들으니 바로 한국인의 노래임을 알겠습니다.”이렇게 미국의 음악당 전문가들이 그의 노래를 한국의 노래임을 알아준 것이다.
그러기에 장사익은 지나간 옛날 가요도 곧잘 자기 식으로 부른다. 그는 오랜 유랑생활동안 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남보다 유난히 목청이 좋아서 구성진 가락을 뽑으면 중도에 멈출 수가 없는데, 동백아가씨를 아마 이미자보다도 더 많이 불렀을 것이라고 한다. 그 곡을 장사익의 노래로 들으면 원곡보다도 두 배쯤 더 시간이 걸린다. “헤일 수 없이~”라고 하는 첫 시작에서 뭔가를 세고 있는 듯 헤자(字) 하나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들어 있다. 사시장철 불렀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는 한 채의 초가에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를 간략하게 그린 작품인데, 마른 나무지만 모진 추위도 견디며 송백의 푸름을 유지하고서 다시 솟아나는 강인함을 보여주는 등 그 속은 엄청 꼭 차 있다. 우리 노래도 그런 것 같다며 빨리 부르면 뭔가 속이 비는 것이고, 느리게 부르는 가운데 속이 채워진다. 한국인의 심성이 담긴 가락은 아무렇게나 부를 수 없는 뼈를 깎는 노력이 들어가야 하기에 그가 부르는 가요는 원곡과는 다른 장사익의 노래이어서 더 마음을 끈다.
밤 10시가 넘었지만 청중들이 계속 부르짖는 앙코르에 그도 신이 나고 상기되어서 모든 것을 부처님께 드리듯 관객들에게 쏟았다. 깊은 산속의 쌀쌀함도 청중의 열기에 녹아들고 모두가 멀고 험한 길을 온 보람이 있다고 흐뭇한 표정들이다.
계곡을 내려오는 데는 인파로 한 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누구하나 불평 없이 음악회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밤 자정이 훨씬 넘어서 집에 도착했지만, 깊은 산중 산사에서 사뿐한 몸짓까지 곁들여 혼을 불어 넣는 모습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2007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