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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 스크랩 조나단 에드워즈의 일기
한산 추천 0 조회 54 12.01.11 08: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나단 에드워즈의 일기



1722년 12월 18일, 에드워즈는 결심문 35번(결심문 70번의 절반을 완성한 시점)을 완성하던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일기 쓰기를 시작한 것은 삶의 회상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가 결심문대로 잘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알아보기 위한 깊은 자기 성찰의 한 방편이었다. 그의 일기의 견본들을 보면, 한 젊은 목사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수양을 하면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며 기쁘게 하기 위해 얼마나 굳게 결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일기를 한번 일별하는 것을 통해서 독립전쟁 초기에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 수는 없다. 대신 한 기독교인이 어떻게 죄와 싸웠는지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목차)


드위트의 서문-1829년

첫 번째 목회자 시절-1722년

집으로 돌아옴- 1723년

석사 학사를 받은 후-1723년

예일대 강사시절- 1724년

노스햄턴의 목회자 시절-1726년



조다난 에드워즈 일기의 서문


세레노 드와이트(Sereno Dwight), 1829


에드워드의 일기는 1722년 12월 18일 시작되었는데, 그때는 그가 19살 되던 때였다. 1월 15까지는 낱장의 두장의 종이에 쓰여 졌고, 나머지는 책에 기록되었다. [그는 1월 14일에 책을 만들어, 거기에 낱장의 종이를 붙였다.] 이 일기는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는데, 그 종이의 겉장에 가까울수록, 그것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처음에 그가 일기를 썼던 때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반추해본다면, 적어도 그가 일기를 쓰던 때는 목회사역의 준비기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보면 알겠지만, 이 일기는 에드워즈 자신이 배타적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 같고, 그것은 인생의 말년에 없애버리려고 한 것 같다. 저자가 쓴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저자의 실제 명성에 완벽히 부합하게 훌륭한 작품은 무엇이든지 출판되어 저자를 영예롭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완전히 옳다는 생각과 의견과 감정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심오하고 신중한 사람은 이런 성품을 우연하게 도달하는 곳에 놓아두지 않으려고 주의할 것이다. 에드워즈는 그 자신의 눈 이외에 모든 눈으로부터 감추려는 의도에서 일기를 간단히 적었다. 어떤 경우에는 그는 큰 글씨로 쓴 후에 익숙한 필체로 이런 말을 추가했다. “잠언 12장 13절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을 기억하라. ‘신중한 사람은 지식을 숨긴다.’ ”

내 생각에 독자들은 그의 다양한 부분의 일기를 ?아가면서, 그것을 만날 것이고, 다음과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즉 그의 일기는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나 반성의 진부한 표현 또는 훈계가 아니라 견고한 사고, 깊은 신앙의 감정에 의한 쓰여 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이 일기는 일반 사람들이나 그의 친구들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배타적으로 자기만 보기 위해 쓰여 진 것이다. 이 일기는 단순한 생각, 감정, 인간의 행동을 표출하는데, 그는 그 스스로와 하나님에게만 제외하고 그가 어떻게 세상에 나타나는지 의식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겸손히 비추어 겸손해지기를 바란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이 크리스천으로 순수하고 거룩하고 신실한가에 대해, 하늘의 강력하고 깨끗한 빛 아래에서 그 영혼의 비밀스러운 움직임들을 모두 대상으로 하여, 그 스스로 겸손해지고 더 나은 자기가 되기 위하여, 회개한 마음과 정직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조사하고 있다고 추정한다면, 이 일기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 쓴 그런 글이다.

그런 면에서, 단지 여기저기에 있는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이 일기는 완전히 현대의 일기와는 다르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있는 예외적인 그런 부분들은, 지금까지 출판되어 왔던 현대의 일기와 일치 되는 유일한 부분들이다.



1722년 12월-일기


뉴욕에서의 목회자시절


1722년 12월 18일

결심문 35번을 만들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에 대해 내가 관심과 의문을 갖는 이유는 최소한 다음과 같다.

1. 신성을 말하는 것에 관한 예비적 일에 대한 나의 경험을 완전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내가 중생할 때 정확한 단계를 경험하여, 그것에 관해 신성이 점진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고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3. 나는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은혜를 민감하게 느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며. 특히 믿음에 대해서는 그랬다. 나는 그들이 단지 위선적으로 겉으로만 영향을 받고, 사악한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진지해 보이지 않았고, 나 역시, 원한다면, 본성상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4. 때때로 나는 죄에 대해서 내가 빠뜨리거나, 다른 것에 위임에 버렸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최근에는 사악한 말에 대해서 내가 벗어났는지 의심이 들었다. 오늘 나는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일기 감상-----

* 1722년 12월 18일(19세), 에드워즈 목사님은 결심문 35번(결심문 70번의 절반을 완성한 시점)을 완성하던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목사님이 일기 쓰기를 시작한 것은 삶의 회상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결심문대로 잘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알아보기 위한 깊은 자기 성찰의 한 방편이었다

* 결심문 35

내가 지킨 의무에 대해서 의심이 많이 생길 때마다 그 일로 내 마음의 고요함과 평안함이 깨어지면 의문 사항들을 기록하고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자

* 19살에 나는 무엇을 했나? 우리 교회 어린 학생들이 에드워즈 목사님처럼 빨리 은혜를 받고, 귀한 일꾼이 다 되었으면 좋겠다.


12월 19일

오늘 결심문 36번을 완성했다. 최근에, 나는 천국에서 영화롭게 되는 데도 등급이 다르다는 교리에 대해서 매우 혼란스러워서, 의문이 일어났다. 그러나 지금 그 어려움이 거의 해결됐다.


---일기 감상-----

결심문 36

다른 사람을 평가 절하하는 것에 대하여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나쁘게 말하지 말자. 단 그렇게 하는 것이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경우는 예외다.


12월 20일

어제 그리고 오늘 아침에 내가 너무 게으르지 않았는지 다소 의문이 났다. 그러나 이제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다.


12월 21, 금요일

오늘, 그리고 어제, 매우 무미건조한 하루를 지냈다.


12월 22일, 토요일

오늘 성령님께서 소생시켜 주셨다. 가장 고귀한 거룩한 정서에 의해 특별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마음에 불타올랐다. 또한 죄에 대한 회개의 감정에 민감해 졌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대항하기 때문이다. 오늘 밤 결심문 37번을 썼다.


12월 23일 주일 밤

결심문 38번을 완성했다


12월 24일 월요일,

평소보다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완전함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매월 말 결심문의 위반수를 관찰하기로 했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매주, 매월, 매년마다 위반수가 증가되는지 감소되는지 세어 보기로 했다.


---일기 감상-----

* 그리스도와 그 나라의 완전에 대해서 묵상할수록 그 사람은 더욱더 완전으로 나아갈 것이다. 2008년에는 이에 관해서 틈나는 대로 묵상해야겠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12월 26일 수요일

어제 이른 아침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렸다. 결심문 37번에, 매주, 매달, 매년에 관한 항목을 추가했다. 결심문 33번을 마저 완성했다.


12월 29일. 토요일, 해질녘 즈음

무미건조했다.


1723년, 1월 1일, 화요일

며칠동안 단조롭게 지냈다. 오늘 태만의 죄를 짓는지 짓지 않는지 조사했다. 게으르게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


1월 2일 수요일

단조로웠다. 경험에 의해 성령님의 임재 없이 내가 결심문을 만들고 내 의지로 행하면, 많은 것들을 결심했을 지라도 행하지 못하고,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흐지부지 된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성령님께서 지난주처럼 나를 포기하신다면 내가 어떤 것들을 하려고 해도 열매가 없고, 생기가 없으며, 끔찍하게 될 것이다. 만약 성령님께서 나로부터 그의 영을 잠시라도 거두신다면, 나는 결심을 어기고, 옛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나를 의존해서는 안 된다. 우리 힘으로 결심하면, 하루는 최고로 보낼 수 있을지 모르나, 곧 다음 날이 되면, 우리는 끔직한 상태로 빠져, 그렇게 결심했던 똑같은 사람과 전혀 같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에 기대는 것 외에 어떤 목표도 없다. 만약 그의 순전한 은혜가 없다면, 그 사람은 하루는 매우 선한 사람이 되었다가도, 다음 날이면 매우 악해져 있을 것이다.

경험상 나는 그에 관해서 특히 나에게는 주님의 섭리의 한계가 있다고 추측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바로 잡는 고통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들을 경험하기를 원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잘못한 것에 대해서 그것을 되돌아보기를 원하신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해도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


---일기 감상-----

" 에드워드 목사님의 1722년도 일기 중 한 부분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 일희일비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서, 주님과 동행할 때는 세상의 천박한 일희일비 상태에서 벗어나 영원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  이 일기에 대한 당시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은 비슷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모함은 더 간절해진 것 같다. 지난 4년간의 경험상 은혜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을 더 체감했기 때문이다.

* 크리스천이 은혜 없이 행하는 것은 매우 미련한(foolish) 짓이다.

 

1월 5일, 토요일 저녁,

성경을 묵상함으로 길고 지리한 단조로움에서 약간 벗어났다. 이번 주는 계속해서 우울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관심과, 태만 때문이다. 계속해서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그로인해 죄가 발견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에게 남아 있는 죄는 거의 없으나, 죄에 대한 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면, 죄는 어디로 나를 데려갈까? 죄는 억제하기가 쉽지 않다. 성령의 영향이 없다면 옛 뱀은 꽁꽁 언 상태에서 풀려나 다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의무와 신앙의 묵상, 이 두 가지에 대해서 태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일기감상-----

* 19세의 소년 에드워즈 목사님의 고민(?)이 참 재미있다.

* 의무와 신앙의 묵상을 게을리 하면 무관심과 태만이 발생하여 우울해지며, 그 결과 죄에 빠지게 된다.

* 마가복음을 1독했다. 말씀이 권능이 되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제압하고, 택자들의 골수를 쪼개는 것을 보는 것은 아주 큰 행복이다.

* 요즘은 성경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문제해결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함정을 파놓은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질문의 문제점을 간파하시고, 그것이 질문으로서 성립되지 않은 이유를 제시하신다. 그 후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이 잘못생각하고 있는 부분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아무리 구약에 통달했다고 하나, 예수님보다는 못하다는 사실이다. 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승산없는 싸움을 걸어온 것이다. 예수님=말씀이신데, 말씀으로 공격하면, 그들은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즉, 상대방을 공격할 때는 상대방이 약한 것을 찾아서 공격해야 승산이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공격에 실패하자 그들은 폭력을 사용했다. 폭력은 예수님이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시적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러나 폭력은 사랑으로 극복되었다.

* 또한 예수님은 은혜의 시대 이후, 심판의 시대 때는 양날이 선 검을 가지고 가차없이 죄인을 심판하신다. 즉, 예수님에게 대항하는 것은 가시채에 뒷발질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성경을 묵상하다보면 뇌에서 폭풍이 일어난다.


1월 6일, 주일 밤

지난 시간 동안 개선 된 것에 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런 금욕적인 삶을 사는데, 설사 그로 인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힘들고 지칠지라도 멈추지 않기로 결심했다. 또한 세상적인 위로와 편리를 쫓지 않기로 했다.


1월 7일, 월요일

밤에, 결심문 40번을 썼다.


1월 8일, 화요일

아침에, 평소보다, 그리스도의 탁월함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로인해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회개의 감정을 느꼈다.


1월 9일 수요일, 밤. 지친다.

밤, 지친다. 때때로 실제로 가진 것보다. 더 큰 거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과거나 지금이나 나는 끔직한 부패를 발견했는데. 이는 책에서 읽은 저명한 크리스천들과 직접적으로 반대되었다. 나는 시간을 개선하고, 모든 일을 가능한 한 신속히 처리하는 일을 반도 못한 것 같으며, 게다가 어제나 그제처럼, 실제로 1년 전처럼 신앙에 관해 생각하지도 못한 것 같다. 그에 관해서 나의 결심문을 그때부터 항상 지키고 깨어 있었다면, 나는 지금보다 얼마나 많이 발전되어 있었을까?! 내 마음은 얼마나 속기 쉬운가! 강력한 결심은 했지만, 그것은 곧 사라진다.


---일기 감상-----

* 에드워즈 목사님은, 젊었을 적부터 게으름에 대해 매우 민감하셨던 같다. 목사님의 결심문을 보면, 하나님 존전에 나가 후회할 일은 지금부터 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애쓴 흔적이 보인다.

* 부지런함이란, 지금 닥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존전에 나가 후회할 일을 지금부터 안하는 것이 부지런함이다.

* 그렇다면, 부지런함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지금부터  하는 것이다. 

* 에드워즈 목사님께서 위인이셨던 것은 젊었을 때부터 늘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부지런히 하셨던 것에 있다.

* 에드워즈의 결심문 중에서..

7.만일 내 생애의 최후 순간이라고 가정했을 때, 하기가 꺼려지는 것이면 절대로 하지 말자.

17.내가 죽게 되었을 때, '그 일을 했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살자.

19.마지막 나팔 소리를 듣기 전, 최후의 한 시간도 남지 않았을 때라고 가정하고 그 때 하기가 꺼려지는 것은 절대로 하지말자.

50.내가 내세에 들어갔을 때, 그렇게 한 것이 최선이었고, 가장 지혜로운 것이었다고 판단하게 될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도록 하자.

51.죽을 때 내가 뒤를 돌아보면서 '이런 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면에서 그렇게 하자.

52.나는 종종 노인들이 자기가 인생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 살겠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노인이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그때 가서 '내가 이런 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생각되는 바로 그런 일들을 하자. 


1월 10일 정오.

회복했음.

정오 : 세상적인 지위와 조건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은 나에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께 누를 끼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부자가 되는 것을 보고, 그 모든 것들을 그들이 쉽게 얻고, 세상이 그들을 부드럽게 대하며, 그들이 여러 면에서 매우 행복해 하고, 매우 번성하고 명성을 얻는 것을 볼 때 그들을 시기하고 그들의 부를 부러워하며, 또는 적어도 그것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고 나 역시 똑같은 부를 바라며,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주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항상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뻐하며, 스스로 다른 사람의 부를 기대하는 척도 하지 말고, 그런 상태에 대해 행복해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고난 받을 것을 기대하며,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기로 마음먹었다. 먹고 마시고, 자는 것에 대한 절제하기로 마음먹은 후 심신이 더욱 건강해 지는 것을 체험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하루 일과, 오늘 하루 어떤 죄의 유혹이 올 것이며 어떤 죄에 노출될지를 생각하며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개선점을 찾아, 그것을 피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매주 첫째일과 매달 첫째일의 죄를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에 나는 그것에 관해 주의하지 않았고, 그런 대비책을 세우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런 죄를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기뻐하지도 않았으며, 계속해서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밤에 결심문 41번을 썼다.


교회 성찬식에 참석해서, 나는 오늘 엄숙하게 세례 언약을 새롭게 하고, 스스로 주님에 대한 헌신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나는 하나님께,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드려 왔으며, 어떤 면에 있어서도 내 것을 주장하지 않았다. 이것에 대해서 나는 내 안에 있는 이해, 의지, 사랑에 대해 전혀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신체, 그 각 지체에 대해 나의 권리가 없으며, 혀, 손, 발, 그리고 맛보고, 볼 수 있는 감각에 대해서 나의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의 모든 것을 버렸으며, 내가 소유한 것은 전혀 없다. 세례 받는 동안 나는 하나님께 나를 바쳤으며 그리고 오늘 그분께 나 자신을 다 바치기로 한다고 말했다. 그분께 모든 힘을 바치기로 했기에 미래에도 나는 어떠한 면에서도 나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의지로가 아니고 주님의 은혜로 인해 권능의 하나님께 약속했다. 오늘 아침 말하자면 나는 내 모든 것과, 내 기쁨을 주님께 드렸으며, 나의 행복을 조금도 구하거나 행동하지 않을 것을 다음과 같이 약속 드렸다. 그의 율법을 나의 의무로 알고 지킬 것이며,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이 세상 끝 날까지 싸울 것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신 권위자로서 믿으며 따를 것이다. 어떤 위협과 어려움이 와도 변치 않고 고백한대로 이행 할 것이다. 나는 주님의 축복의 성령을 나의 주, 구원자, 위로자로 받았으며, 나에게 조명하시며, 깨끗하게 하시며, 확신과 위로, 도움을 주시는 주님의 모든 행사를 귀히 여길 것이다. 이일을 행하며, 나는 주님께 기도하며 그리스도께서 나의 헌신을 받으시고, 모든 면에서 그분께서 나에게 고통을 주시든, 번성을 주시든 무슨 기쁜 일을 허락하시든 나를 완전히 받으시기를 기도했다.


이제부터 나 자신은 어떤 면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거나, 그를 영화롭게 하지 않거나, 나의 일을 구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내 힘을 사용하면, 나를 의지해서 행동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내가 고통에 조금이라도 불평하거나, 남의 번영을 가슴 아파하거나, 무자비하거나, 상처에 화를 내거나, 복수하거나, 어떤 일에 스스로를 만족하거나 내 자신의 편리를 위해 어떤 일을 피하거나, 자기부정이 크다고 어떤 일을 생략하거나, 스스로를 신뢰하거나, 내가 한 일이든지,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한 일이든지 그에 관해 스스로 만족하거나 자만감을 가지면, 그것은 나를 주장하는 것이다. 오늘 결심문 42번과 43번을 완성했다. 신앙과 조금만 관계된 것이라면 나는 어떤 목적이나 환경에라도 행동을 할 것이며 그것이 아니라면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고로 나는 44번 결심문을 작성했다.


의문: 신앙 외에 다른 목적으로 기쁨이나 만족을 느끼는 것이 허락되어질 수 있는가? 오후에 나는 일단 예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만약에 신앙적이 목적이 아니어서 즐거운 느낌이 드는 것에 고통을 느낀다면 우리는 친구를 보았을 때도 즐거움을 느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음식을 보고 즐거워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렇게 생리적인 활동을 제거한다면 우리는 소화도 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정확한 답은 이렇다. 우리는 신앙적인 도움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의도적으로 기뻐하거나 슬퍼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45번 결심문을 작성했다.


내가 계속적으로 무기력하고 해야 할 일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스스로 고통 받는 것을 멈추려고 하고 편히 쉬기 위해서였고 그래서 그런 것을 기대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고로 내가 스스로 오랫동안 그것을 위해 노력해 왔다는 것이 생각나서 이제는 멈추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제 나의 예정된 시간이 끝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스스로 내가 정말 지치고 녹초가 되었다고 속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스스로, 최선을 다하여 일을 해결한 후에 쉴 수 있다고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쉼 없이 계속 지금과 같은 맹렬한 열심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 하려고 했을 것이다.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나는 내 마음에 울리는 설교 말씀과 그와 같은 은혜의 수단으로서 내 문제의 해결방안을 깨달았다.


밤: 이번 주에는 평소보다는 결심문에 적용하여 지킨 것들이 더 많았다. 또한 지속적으로 삶에서 절제를 하고 신앙을 삶 속에 적용하였다. 아마 그것이 건강상에 해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이유로 결심문을 적용한 숫자 세는 것을 멈추기 전에 나는 삶 속에서 신앙을 적용한 경우가 늘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경험했다. 내 건강이 완전히 상하지 않는 한 내가 지치고 녹초가 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기 감상-----

* 에드워즈 결심문

41. 매일, 매주, 매달, 매해의 마지막에 어떤 면에서 더 낫게 행동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자문해 보자.

42. 세례 받을 때 하였고, 성찬식 할 때 진지하게 하였던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종종 새롭게 하자. 그리고 오늘 1월 12일 나는 진지하게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새롭게 하였다.

43. 오늘부터 죽을 때까지 내 인생이 나의 것인 양 행동하지 말고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의 것인 양 행동하자. 토요일에 깨달은 것과 일치하게 행동하자.

44. 다른 어떤 목적도 아닌 신앙만이 나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자.

신앙적인 목적이 아니라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행동하지 말자.

45. 신앙에 도움 되는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에도 절대로 쾌락이나 고통, 기쁨이나 슬픔 등을 느끼지 말자. 어떤 감정도, 조금의 감정도 품지 말자. 그리고 그런 것과 관련된 어떤 환경도 만들지 말자.


1월 13일 주일

만약 지난주부터 지금까지와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나는 은혜 안에서 계속 자랄 것이 분명하다. 점심모임 후 결심문 45번을 보충해서 추가했다. 정오.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구별 없이 한 지체로 나의 기쁨이나 유익을 위해서 구별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생각한 것을 기억했다. 밤, 고린도전서 7장 29절에서 32절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고 적용하여 살기로 결심했다.


1월 14일 월요일

아침 10시 경에 이 일기책을 만들어 낱장으로 된 일기들을 그 안에 묶었다 [그가 쓴 일기의 첫 부분을 참조해 보면 적어도 1월 15일 저녁에 그렇게 했다.] 지난 토요일 하나님께 헌신한 것이 나에게 매우 유익했다. 전에 로마서 8장을 읽었을 때보다 그 말씀에 대해서 내가 영적으로 더 통찰력이 깊어졌다고 생각했다. 밤. 매우 어려워 보이는 금욕적인 삶의 예들은 죄인들의 삶이므로 우리는 그와 대응해서 발걸음을 확고히 해야 한다. 그는 늘 더 약한 사람이어서 다음에 그런 사람과 함께 일할 때는 그의 일을 쉽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는 소심하게 성장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충분히 그의 일을 해낼 때까지 그의 길을 평탄케 해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는 그의 안락을 버릴 것이다. 우리가 자기부정과 매우 어려워 보이는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옛사람으로밖에 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고집이 세고 완고해서, 조그만 공격에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심 없이 이것이 대부분의 크리스천이 은혜 안에서 현저하게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가장 어려운 금욕 후에 항상 나는 가장 큰 안락을 누렸다. 결심문 63번을 썼다. 보통의 크리스천이 하는 그런 금욕은 은혜의 성장을 증거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더 큰 일들을 해야 한다. 이제 내가 전에 했었던 좋은 활동과 행동을 잃어 버렸다는 것을 발견할 때 만약 그것들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을 주목하는 것이 다시 영적인 삶을 회복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1월 15일, 화요일

2시에서 3시 사이. 계속해서 침체되고 있다.

어제, 그제, 그리고 토요일, 나는 계속 같은 해결책을 고수하며 회복하려고 하고 있다. 오, 얼마나 나약한가! 나 스스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구나! 나란, 얼마나 모순 된 존재인가! 성령의 영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서있는 동안 나는 내 다리의 힘으로 스스로 서려고 준비했다. 나는 나의 영적인 적을 이기려고 준비했다. 마치 내가 그들을 ?아버리듯이. 이런! 나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아주시는 불쌍한 아이 일 뿐이다. 그가 나를 잡으시고 나에게 웃을 자유를 허락하시고, 그가 내 앞에서 적을 ?아 낼 때 그것을 보게 하셨다. 비록 나는 그럴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적을 물리쳐 주심으로 나는 웃는다. 지금 주님은 스스로 매우 약하게 남겨진 나를 돌보고 계셨다. 오. 이것이 나 스스로를 덜 신뢰하게 하고, 더 겸손하게 하고, 반면에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찬양하게 하는 구나! 사람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속기 쉽고, 지독하게 악한 것을 누가 알고 있는가! 내가 침체된 원인은 약간의 우울증 때문이다. 내 영이 침체에 빠진 것은 지난밤에 몇몇 친구들과의 우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나의 해결책이 친구들의 힘을 빠지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그것들에 관해서 어제와는 달랐다. 나는 오늘 힘이 반이 소진되었으나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나의 결심문이 어제처럼 다시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어제의 반만큼도 활기차지 못했으며, 모든 일에 열심이 반으로 줄어버렸다, 계속해서 그런 상태에 빠졌으나 지금 한동안 신앙에 관해 생각했더니, 조금씩 만족스러웠다. 나는 하나의 일에서 다른 일로 전환하는데 조심스럽게 하지 못했다. 해질녘에 수치심을 느꼈다. 내가 주님의 선한 은혜 안에서 해야 하는 것은 크리스천과 대화를 하며 의견을 나누는 것이다. 다음에는 이렇게 무기력한 상태에서 빠르게 벗어나려면, 열심히 그렇게 하고 맹렬히 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내 마음을 접고 신앙적인 것을 생각하며, 이런 상태에서 전환할 수 있는 것은 여행을 통해서, 내가 거처하는 장소, 일, 공부, 나를 우울하게 하고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1월 17일 목요일

3시경에 과도하게 우울한 감정에 빠졌다.


1월 18일 금요일, 밤

죽음으로부터 회복하려고 노력을 시작한지가 며칠이 지났다.


1월 20일 주일, 밤

지난주는 매우 침체되었는데, 회복하기 전에 그 기간이 오래 지속 될까봐 두렵다. 지난 주 내낸 과도하게 침체되었다. 나는 내 마음이 너무 속아 와서 어떤 나은 결심문을 쓰는데 거의 용기를 잃어 버렸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난주에 내가 어떤 점에서 태만했을까? 나를 가라앉게 했던 그런 끔찍하게 침울한 상태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1월 21일 월요일

해뜨기 전에 전술한 의문들에 이렇게 답을 했다. 나의 죄에 대해 찬송으로 참회의 시간을 보내자. 특별히 통회의 송가나 찬송을 드리자. 그런 의무가 내 상태에 가장 알맞다. 기독교의 은혜로움에 대해 스스로 영향받기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매달마다 계수하는 결심문의 지키는 수가 약간 떨어졌다. 그것은 내게 신앙의 즐거움에 대해 전에 느끼던 감각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게 했다.


2월 5일 화요일. 밤.

이런 상태가 매우 염려스럽고, 특별히 걱정이 되어, 항상 억지로 신앙에 관해 생각하려고 한 것이, 나의 마음을 산만하게 하였고,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그밖에 다른 생각도 하지 못하게 했다.

나는 이것이 1월 15일에 겪은 끔찍한 상태로부터 야기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더 이상 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비록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다른 세상에 대해 준비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도들이 자주 말했던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싸우며 씨름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사도들 자신이 말한 고행대로 아주 지속적으로 자아를 절제하고 부정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럼, 어디에로부터 더욱 이 길로 들어오게 되었을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먹는 것, 마시는 것, 잠자는 것에 다시 열심히 주의하지 않았고, 사악한 말에 관해 충분히 조심하지 않았다. 


---일기 감상-----

* 에드워즈 목사님은 철저히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감찰하고 있었던 같다. 그리고는 의외로 먹는 것, 마시는 것, 잠자는 것에 주의를 하지 않은 점에서 마음의 침체의 원인을 찾아냈다. 또한 사악한 말을 듣는 것에도!

* '감각의 잡음 - 마음의 산란 - 영적 침체'의 패턴을 읽을 수 있다.

* 1월 15일 일기를 보면 에드워즈 목사님은 신앙문제로 친한 친구들과 우정이 깨지게 되었다. 아마, 그 문제로 인해, 감각의 잡음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 같다.

* 그렇다면, '스트레스- 감각의 잡음 - 마음의 산란 - 영적 침체'로 이어진 것 으로 보인다. 에드워즈 목사님은 자신을 돌아보던 중에 이와 같은 영적 침체의 패턴을 깨달은 것 같다.


2월 16일 토요일

나는 확실히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을 사랑하는 것에 관하여 안다. 밤. 과거에 나는 게으르고,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데 태만하고, 혼자 그리고 친구들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게을리 하였다. 나는 지난 달 세 가지 면에서 태만했다. 먼저 먹고 마시는 일에 충분히 주의하지 못했고, 아침에 너무 늦게 일어났고, 골방 기도의 의무를 충분히 이행하지 못했다.


2월 17일 주일, 해질녘,

하나님께 나의 전 영역을 다 드리고, 나를 부정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다 할 것을, 다시 새롭게 하나님과 언약했다. 어떤 이유로도 다른 사람이 번창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불평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나를 부정할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최근까지 반대로 행동했다.


2월 21일 화요일,

나는 세상을 포기하는 것과,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는 것과,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몫을 갖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 삶을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두며 우리의 전 영역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에 대해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전반적으로 이 땅에 내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 그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야 할 텐데.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명성과 권위를 다 갖고 있으면서도,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택하고, 나를 포기하고 그에게 전적으로 나를 맡기기로 약속했던 것에 대해 스스로 고백했던 것이 나를 만족스럽지 못하게 하고 불편하게 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2월 23일 주일,

나는 끔찍하게 게을러서, 만약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을 완성하려면 두 배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문제 대해 내가 빨리 생각했더라면, 지금의 상태와는 많이 달라졌을 것인데,  나는 한동안 끔찍한 게으름에 빠져서, 그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지금 다른 때보다도 7배는 더 잘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나의 능력이 더 나아져서 아니라. 내 속에 타고 있는 열심의 불(fire)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항상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내가 당한 문제의 4분의 1은 만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의 경주를 더욱 열심히 달려야 하고, 세속에서 벗어나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한다.


3월 2일 토요일

더 겸손한 자리에 마음을 두어야 할 때에,  내 안에서 작용하는 자만심이 있다는 것을 느낄 때 나는 얼마나 천하게 느껴지고 비참해지는가! 겸손이, 자만심보다 얼마나 사랑스럽고 훌륭한 기질인가! 나는 지금 그것을 분명히 깨닫고 그것을 실제로 느끼고 있다.

스스로 높게 생각하는 것보다 겸손에서 기쁨을 보는 것이 얼마나 훨씬 더 좋은 기쁜 일인가! 나 자신의 완전성에 대해 기쁘게 여길 때보다도 스스로 낮게 여길 때 그것이 얼마나 더 나를 기쁘게 하는가! 자만보다 겸손이 얼마나 더 기쁜 일인가.

오 주여, 저에게 모든 겸손으로 채우게 하시고, 모든 자만으로부터 저를 보호하소서. 이 세상에서 겸손의 기쁨들은 정말로 가장 순수하고 내적이며 훌륭한 기쁨들이다.

자만한 사람은 얼마나 미운가. 자만으로 인하여 스스로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벌레는 얼마나 미운가! 자만심이 작용할 때 나는 매우 바보 같고, 어리석고, 끔찍하며, 소경 같으며, 속는 자 같으며, 불쌍한 벌레 같은지 모르겠다.


밤. 최근에 나는 성경 읽기를 게을리 했다. 어쨌든 토요일에 쓴 나의 결심문을 밤에 보니까,

나는 성실하고 근면하게 그것을 수행하지 못해 왔었다는 것을 알았다.


3월 6일 수요일, 해질녘

선택 교리, 자유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과 거룩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작용이라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3월 7일 목요일

지금 내가 고통을 받는 것은 신앙에 대한 생각을 충만히 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3월 24일 토요일 밤

만약 내가 늘 이 세상에서 선한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그 수단과 연구 방법의 규칙을 세워 실천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사용하여 명문화 해놓는다면, 이것에 의해 나는 어떤 면에서도 선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월 31일 토요일 밤

이번 주에는 너무 먹는 것에 부주의했다.


4월 1일 월요일

나는 다른 사람의 어리석음, 결점, 실수를 비웃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최선임을 알았다.


4월 7일 토요일 밤

이번 주에 나는 도를 넘어서서, 내가 더 이상 회복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주의 자비가 내게 다시 임하시면 가라앉고 침체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오, 주님, 당신의 도움이 없으면 저는 수없이 반복해서 쓰러지고, 아무리 내가 결심을 해도, 얼마나 자주 실패를 반복할지 모르나이다.

 

4월 13일 토요일 밤.

나는 오늘밤 전보다 더 나의 적에 대한 용서를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할 수 있었다. 나는 하나의 기원에 대해 다소 지칠 때까지 자주 요청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방법으로도 해결 받지 못했다.



1723년 5월-일기


노스위쉬와 보스턴에서 여행하여 이스트 윈저(East Windsor)로 돌아온 후


5월 1일 오전, 지난 밤 집에 돌아 왔다.

노스위쉬와 보스턴에서 여행하여 이스트윈저로 돌아온 후 뉴욕을 떠나는 울적함을 뒤로하고, 어제 밤 집에 왔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의 모든 상황을 돌아보았을 때, 나는 지금의 문제와 어려움들이 앞서 예상했던 상황의 어려움과 문제들보다 더 컸다고 항상 생각해왔다. 스스로 개선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마음을 먹었을 때, 나는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게다가 지난번에 해결했다고 생각한 것들보다 상황은 더 어려워져 있었다.

주여, 전적으로 이 세상으로부터의 나의 생각, 감정, 욕망 그리고 기대를 철회하는 것을 배우고, 즐거움이 가득한, 위에 있는 하늘의 상태에 생각과 감정과 욕망과 기대를 늘 두게 하소서. 그곳은 섞인 것이 없는 하늘의, 달콤하고, 고요하고 그리고 즐거운 사랑이 지배합니다. 그곳은 가장 고귀한 사랑의 표현이 지속됩니다. 그곳은 전혀 부분적이 아닌 이 사랑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매우 사랑스럽게 보이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더 표현할 수 없이 사랑스러울 것이고, 우리를 사랑으로 가득 차게 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과 어린양의 찬양을 노래하는 것은 얼마나 달콤할까. 이 즐거움과, 이 달콤한 작용이 결코 멈추거나 끝나지 않고, 모두 영원히 지속될 것을 생각은 우리를 얼마나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할까. 여행, 이동, 삶을 개선하고 대전환한 후에, 내 영혼에 대해 최선의 방식으로 다루어왔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고찰하고 고심할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예견할 수 있다면, 그 개선에 앞서 어떻게 행동할지 결심하자.


5월 4일 토요일 밤

비록 내가 투덜대고 안달하는 성격을 고쳤지만 몇몇 부분에서 아직도 크리스천의 달콤한 성격의 대화와 어울리지 않는 어떤 성향을 발견했다. 너무 심각한 독단론, 이기주의, 나 자신을 싫어하고 눈에 띄게 냉소하는 성격, 순결하여 죄 없다는 것으로부터 오는 (오만한) 자유,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단점들, 그런 많은 것들... 오 주님께서는 내가 대화나 성격이나 행동의 결점이나 단점을 발견하게 도와 주셔서 그런 것을 고치는 어려운 일을 도와주실 것이다. 그는 나를 활력 있는 기독교인이 되게 하시고, 동의할 수 없는 불규칙적인 모든 것들을 제하여 주실 것이다. 그래서 이전과는 반대로 달콤함과 아름다움이 나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5월 5일 주일 아침

결심문 47번을 만들었다.


5월 6일 월요일, 아침

나는 하루에 보통 3번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단, 그것에 내가 매우 서툴렀을 때는 제외하고 말이다.


5월 11일 토요일 밤

지난달에 나의 성격을 고쳐서 더 나은 삶을 살도록 개선하지 못한 것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47번 결심문에 대해 우물쭈물 해왔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연합하여 기도할 때 내 생각을 유지하지 못하고 태만하였다.


5월 12일 주일 아침

나는 성경과 5, 6개월 전에 구입한 다른 유익한 책들에 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내 성격의 단점을 발견했을 대, 좋은 성격으로 고치기 위해 나는 선하다고 느끼는 것을 최선을 다해 이행하기로 결심했다. 오후. 뉴욕에서 돌아 올 때 웨스체스터의 과수원과 떡갈나무 아래에서 묵상한 것들을 기억하여 지키자. 오늘, 그리고 어제 저녁, 그런 것에 대해서 검토하고 반성하면서 내게 매우 유익한 것들을 발견했다. 오후 모임 후. 나는 내 마음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기쁨들을 발견하고 기뻤다. 그 기쁨들은 영원히 영적이고 거룩한 기쁨 안에서 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 넘쳐 나며, 거룩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이 붙어 살 수 있다는 데에 있다.


5월 18일 토요일 밤

이번 주는 노르위치와 그 주변 마을을 여행 하면서 보냈다. 오늘 집에 돌아오니 나의 귀한 친구 존 스미스 씨로부터 편지가 와 있었다. - 지난 수요일, 한 주 동안 악한 말을 하는 모든 방식을 삼가 하기로 하고 그것을 시도하여,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만약 스스로 적법하며, 그것에 관해 만들었던 결심문에 일치한다고 스스로 허용해왔던, 그 악한 말이 적법하지 않거나, 최선이 아니라면, 나는 여기에서 그것을 발견해서, 그것의 유혹의 이점으로 인해 속은 것에서 벗어나, 이 문제에 대해서, 나의 의무를 엄격하게 고수하기를 희망한다; - 그러면, 나의 온 힘을 다해도, 정복할 수 없는, 그 타락은, 전략에 의해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의 효과가 이미 있다는 것과, 이번 주에 결심했던 것은 평생 지켜야 할 의무인 것을 당연히 받아 들여 나에게 익숙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지금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을 하는 것이 중요한 의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한다. 부모님의 조언과 가르침이 당시에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을 지라도. 나를 성장시켜 왔다는 것을 믿을 만한 중요한 이유가 있다. 여러 면에서, 나를 위한 부모님의 기도가 매우 강력하고 효력이 있어, 나를 위한 부모님의 기도의 응답으로, 여러 면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그의 돌보심과 보호아래 두시고, 준비해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질 중요한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나는 그것에 관해 결코 그렇게 민감하지 못했다. 

나는 선하게 되기를 구하는 것과,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것보다는, 어떤 다른 방식으로, 영예를 구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으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극한의 힘을 다해, 하나님의 지식과, 신앙과, 영광을 추구할 것이며, 그리고 인류의 선을 추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영예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처럼, 그것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린다; 비록 내가, 그 영예를 소유하지 않는다고 하여, 내가 더 큰 선을 행할 기회를 갖는 것은 아니다.


메모- 지난 날, 지난 주, 지난 달, 또는 지난해에 내가 태만하거나, 잘못을 했던, 어떤 점에서, 우물쭈물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할 것.


5월 19일 주일

아침

지난주에 갔던 여행을 생각해볼 때, 나는 하루에 세 번, 하나님께 나아가 경건한 시간을 갖는데 있어서 주위 깊게 잘 지키지 못했다. 지난 주, 수요일에 결심문을 완성했을 때, 집에 다시 갈 때까지 그것을 생략하기로 했는데, 왜냐하면 집에 가면 더 나은 기회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변명거리를 준비해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신앙생활이 점점 느슨해지고 있다.


시간의 사용에 관해서 다음과 관한 사항을 더 추가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하루를 시작할 때, 또는 그 시간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하루를 마칠 때,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했나?

 

5월 21일 화요일 아침

나의 양심은 지난 수요일 결심한 이래 그 어느 보다 더, 확실히 매우 고요하다.


5월 22일 수요일 아침,

메모

다음의 것들을 특별히 조심하자. 사악한 말, 초조함, 먹는 것, 마시고 자는 것, 단지 진실만 말할 것, 기도에 참가하기, 골방기도를 얕보는 것, 냉담과 게으름, 죄를 즐기는 생각.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데 내가 지금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지금까지 그러한 때에 성경을 아주 많이 읽으면, 항상 활력이 넘쳐서 최상의 상태가 되었다.

 

---일기 감상-----

* 심신이 지쳤을 때에 성경을 읽으면 정신이 맑아지고 몸이 상쾌해진다. 왜 그럴까? 아마 자아가 조금도 방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5월 25일 토요일 아침,

오늘 아침 일어나서 결심문 17번을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지금 죽으면, 내가 가장 기도하고 싶은 것은 내 상태가 선한지, 악한지 알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에 관해서 샅샅이 조사하고 조심하기를 바라야겠다. 고로 메모했다. 앞으로는, 더욱 꼼꼼하고 열심히 대화에 관해서, 우리의 옛 신학자들의 의견을 조사하자. 오늘 아침 결심문 48번을 만들었다.


5월 27일 월요일 오후

메모. 가능한 한 대화나 담소 중에 혐오, 초조, 화가 나는 분위기를 멀리하고, 최대한 사랑과, 활기참과, 인자함과 선한 은혜의 모습으로 나아가자. 결심문 47번을 더 잘 준수하기 위해 특별히 다음의 것들을 조심하자. 불신, 불만족, 초조해함. 일시적인 불평, 독단적 의견, 자기 확신, 우울, 침울, 약간 혐오하는 것, 개인 비밀, 게으름, 결심의 부족 - 대화나 담소하는 중에 이런 기미가 보이면 이것들에 대해서 조심하자.


6월 8일 토요일 밤

보스톤에서. 내 마음이 무뎌죠서, 활기가 없어졌을 때는 신앙서적과, 나의 결심문, 메모, 반성문, 등을 읽어도 별로 감동받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독서를 통해 내게 가장 유익인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책을 읽었을 때 마음속에 유익한 것에 대한 이미지나 그림이 그려져서, 대화 중에 그런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6월 9일. 주일 아침 모임 후,

메모. 불운을 두려워할 때 내가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지 없는지 조사하려 한다. 그것을 하기로 결심하니 그 동시에 나의 의무와 죄 외에는 어떤 것도 걱정 되지 않았다.


6월 15일, 토요일 아침.

윈저에서. 이번 여행은 먹고, 마시고, 자는 문제에 관해 엄격하게 절제하는 것과, 매우 사소한 문제가 나의 익숙한 신앙 활동에 방해하여 고통을 받은 것에 관하여 비난받아야 한다. 수요 결심문을 삶의 끝 날까지 연장하기로 결론 내렸다.


6월 18일 화요일 아침.

메모. 다른 일을 하면서, 정해진 경건의 연습인 자기 점검, 결심 등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쉽게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면 보다 적은 시간 안에 나머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6월 21일 금요일 오후

오 자비로운 나의 아버지. 저는 당신을 열렬히, 크게 사랑할 풍부한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당신을 축복하고, 찬양합니다. 당신은 나의 정직한 요구를 들으셨고, 나의 기도에 자비로 응답하시고, 부패함과 나약함으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오, 은혜로우신 주님, 당신의 선만이, 계속 저의 죄성으로 인한 고통을 계속해서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오, 나의 귀한 구원자시여, 저의 기도와 감사를 주님의 손으로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6월 22일 토요일 아침.

결심문 36번을 보충하며, 수요 결심문과 똑같이 만들었다. 만약 내가 좀 더 조심하여, 매일 좀더 성화하거나, 가능한 한 거의 뒤로 물러나지 않고, 전날보다 뒤로 물러나거나 가라 앉지 않는다면, 그것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그런 결심들은 처음 그것을 결심했을 때는 그것을 발견했을 때보다도 더 나에게 유익한 것처럼 다가왔다.


6월 25일, 화요일 아침

보스턴에서 마지막 주일에 에베소서 6장 6-8절을 읽으면서, 그것이 내게 매우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떤 위험이나,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지라도 몹시 주의를 하고 나의 의무 외에 어떤 것도 하지 않으면, 기꺼이 즐겁게, 활기차게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사람에게나 내에게가 아니라, 주님께 그것을 하면, 어떤 사람이 어떤 선할 일들을 하더라도, 똑같이 주께서 받으실 줄 알기 때문이다.


6월 29일 토요일 아침

내가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것을 기도하지 않도록 하자. 그런 기도는 덜 진지하게 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고, 내게도 별 쓸모가 없다.


7월 1일 월요일 정오

나는 주일에 신앙적인 것 외에 모든 생각을 제쳐두는 데 있어서 충분히 조심하지 않은 것 같다. 아주 사소한 근심이라도 생기면 결심문 43번을 보자.


----일기 감상----

* 결심문 43

오늘부터 죽을 때까지 내 인생이 나의 것인 양 행동하지 말고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의 것인 양 행동하자. 토요일에 깨달은 것과 일치하게 행동하자.


7월 3일 수요일 밤,

선을 행하는 사소한 기회를 개선하는 면에서 나는 너무 태만하다. 그 선은 매우 작고, 하찮아서, 노력해 볼 가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잘못 되었고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함으로, 개선하기로 결심했다. 몸과 마음의 양쪽에서 엄격하게 절제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경험에 의해, 다시 확신했다.


7월 4일 화요일 아침,

아침, 지난 밤, 잠자리에서 죽음을 생각할 때, 만약 이제 죽는다면, 나를 죽게 하는 그것이, 조금이라도 두렵다면, 그것은 분명하고 뚜렷하게 성직자들이 말해왔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에게 그렇게 특별히 과감하고 완전하게 내 영혼을 맡겨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지옥의 공포와, 주님의 두려움을 느낀 후에,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하심과 약속,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초대하심으로 인해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구원을 완전히 확신한 채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속해있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그가, 그의 말씀으로, 그의 보호 아래서, 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밤. 언제든지 어떤 것들이 조금도 무질서하게 보이지 않기 시작해도. 그것들이 내면적으로 편한 느낌이 들지 않거나, 외부적으로 불규칙할 때, 나 스스로 그것을 철저하게 조사하자. 나는 결심한다. 앞으로, 논쟁 중에, 더욱더 부드럽고, 절제하고 침착함을 준수할 것을.

7월 5일 금요일 아침

지난 밤. 만약 내가 이제 죽는다고 생각할 때면, 내가 해오지 않았던 것을 해왔어야 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희망했다. 나는 내가 하나님을 더욱 붙잡아야겠다가 바랬다. 죽음에서 나를 살리시고,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며, 내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내가 속지 않도록 해달라고 주님께 더욱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후에 결심문 50번을 썼다.


7월 11일 목요일 밤

오늘 교회 모임은 매우 참을 수 없었다. 덫과 가시가 오늘 우후 내내 나의 길에 놓여 있었다. 다른 때에는 경솔할지라도, 그러한 때는 부주의할지라도 선한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좋다.


7월 13일 토요일 아침

6월 9일 내린 결론은 결심문 57번과 연결되고, 5월 27일 결론은 결심문 58번. 5월 12일과 7월 11일은 결심문은 59번, 7월 4일의 밤의 것은 결심문 60번. 5월 24일의 것은 결심문 61번. 6월 25일은 결심문 62번. 1월 14일 정오의 결심은 결심문 63번과 연결된다. 인간들의 마음의 판단과 그들의 행동들로부터 지난 세월동안, 나는 너무 자유로웠다.


7월 18일 목요일 해질녘

사도 야고보가 완전한 사람에 대해 준 가르침을 확신하기로 결심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 2)


7월 19일 금요일 오후

베드로 전서 2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따라서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님을 존경해야 한다. 이 구절과 함께 다음 구절을 또 보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 19, 20)


7월 20일 토요일

맨톤 박사의 시편 119편 설교말씀 중 140-141페이지에 보면, “사악한 말”을 두 번 사용한 것이 나온다. 그 말들은 꾸지람을 받거나 꾸지람을 야기시켰다. 둘 다 매우 큰 죄이다. 위선자와 스스로 종교적인 색채가 나는 옷을 입은 사람들은 모두 저주를 받을 자들이고, 그 길에서 큰 자유를 빼앗길 자들이다. 그들은 무심코 자신의 부패를 들추어 낸다. 이런!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우리는 가장 사악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들 스스로 가장 낮은 자이고 가장 사악한 죄인이라고 한다. “인간 중에 가장 야만적이고”,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사도 바울도 고백했다. 너희들은 가장 중요한 보물을 도둑질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강탈한 그는 가장 악독한 도둑이다. 잠언 22편 1절에는 이런 말이 나와 있다. “좋은 이름은 부자로 선택받은 것보다 낫다."


반론-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에게 싫은 말을 해서는 안 되는가? 또는 다른 사람의 죄를 어떤 경우에도 말하면 안 되는가? 해결 1. 죄를 짓지 않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이런 저런 경우에 우리는 그 명령을 충돌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냥 나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실패를 말해줘야 한다면, 부드러움과 안타까움으로 해야 한다.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사악하여 우리에게 영향을 주거나,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야 될 때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충고자에 대해 비방을 한다. 그런데 그 비방자는 그의 나쁜 행적을 스스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지함으로써. 그의 이웃의 신뢰를 깨뜨리게 된다.


7월 22일 월요일

나는 많은 경우에 내 의무가 그것을 요구하지 않을 때를 제외하고는 모든 친구들과 더불어 말하고 행동하는 데 밝은 면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특별한 일에 대하여 내 힘으로 내가 지금 내 손으로 할 일을 무엇이든 찾지 않고 있는 것이 두렵다. 어떻게 할지를 알아보고 관찰한 것을 기억하자. 8월 31일 일기를 보라. 나는 친구들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못살게 구는 것처럼 보일까 하는 두려움과 같은 유혹의 힘에 내 자신이 넘어가는 것이 위험한 것임을 알았다. 그것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나는 완전한 확실성이 없어도 스스로를 도우며 상처받지 않으며 더 큰 모험심을 가지고 하나의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이행해 나갈 것이다.


7월 23일 화요일 오후

사도들이 말한 것처럼, 내가 입 밖에도 낼 수 없는 그런 고통과,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 119:20)], 그것을 구하기 위해 영혼이 상하는 그러한 고통을 발견할 때, 전력을 다해서, 그것을 사모하고 증진하고, 나의 욕망을 배출하는 진실한 노력과, 그러한 열심을 반복하는 것에 싫증을 내지 않도록 결심하자.

극도의 자기 부인을 할 경우가 생길 때, 그것을 아주 기뻐하자. 왜냐하면 그때, 나는 죄악의 몸에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얻고, 새로운 창조물을 아주 확고하게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죄를 극복하고, 거룩함을 증진시키기를 구한다. 1월 14일 일기에 그 최선의 기회들이 있다.

모든 종류의 고통들, 그런 고난들이 매우 나를 좌절시키고, 나의 마음을 꺾고, 무력하게 해도, 크리스천의 삶에서, 강력히 간직해야 할 축복된 기회로 삼자.

또한, *57번 결심문에 따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기회로서, 그렇게 하는 것을 습관으로 삼자. 1월 10일 일기와 **43번, ***45번 결심문에 따라, 나의 마음을 세상에서 떼어내 하늘에만 고정시키는 기회로 삼자. 그리고 1월 12일, 2월 17일, 그리고 2월 21일, 5월 1일 일기에 따라 그렇게 하자.

그 고난을 활용하여, 회개하고, 나의 죄를 슬퍼하고, 회개할 기회로 삼고, 인내로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마음을 그 역경으로 돌려, 경건의 연습에 고정시키자.

또한, 그 마음을 더 낫게 여기는 것이, 바로 그것이 고난의 성질이라며, 스스로 위로하자. 그리고 만약 내가 그것들에 의해 더 개선되면, 아무리 그것이 현재 나에게 괴로워보일지라도, 내가 더 관심이 필요한 것이다.


---일기 감상-----

* 57번 결심문

불행과 불운에 대한 염려가 생길 때, 내 의무를 다했는가를 돌아보고 의무를 다 하도록 결심하자. 그리고 그런 사건들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자. 할 수 있는 한 나는 내 의무와 내 죄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자.

** 43번 결심문

오늘부터 죽을 때까지 내 인생이 나의 것인 양 행동하지 말고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의 것인 양 행동하자. 토요일에 깨달은 것과 일치하게 행동하자.

*** 45번 결심문

신앙에 도움 되는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에도 절대로 쾌락이나 고통, 기쁨이나 슬픔 등을 느끼지 말자. 어떤 감정도, 조금의 감정도 품지 말자. 그리고 그런 것과 관련된 어떤 환경도 만들지 말자


7월 24일 수요일 저녁

나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과 연합하려고 애쓰고 있다. 조만간 이제 그것이 용이하고 기쁘게 될 것 같다. 따라서 연합하기를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노력하며 그것을 배가하도록 더욱 힘쓰자.

 

---일기 감상----

*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서 공부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먼저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연합'되며, 거듭날 때 실질적으로 연합을 체험하게 된다. 연합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또한 성도와 연합한다.

* 이 일기에서 에드워즈 목사님은 성도와의 연합을 위해 힘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원의 서정을 직접 신앙의 위인과 우리의 경험 속에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것 같다.

 

7월 25일 목요일 아침

* 결심문 8번을 대체해서 보완했다. 또한 4월 1일에 쓴 결심문을 확고히 했다.

메모. 편리한 시간에, 결심문과 주의문을 알파벳 순서로 만들자. 그러면 해야 할 의무와 컨디션에 알맞게 적당한 경우에 맞추어 그것들을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일기 감상-----

* 8번 결심문

모든 면에서, 즉 말과 행동에 있어서 아무도 나처럼 그렇게 악하지는 않는 것처럼, 또한 내가 다른 사람과 똑같은 죄를 범하고, 똑같은 잘못과 실수를 범한 것처럼 행동하자. 다른 사람의 실패를 나 자신의 잘못을 살피는 계기로 삼

고, 나의 죄와 비참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기회로만 삼자.


7월 26일 금요일 오후

결심문 57번에 따라서 모든 상태에서 전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고, 믿고 신뢰하는 것을 특별히 거룩하게 지키도록 하자. 이것에 대해 나는 놀라운 유익이 있는 것을 발견해 왔다. 밤. 내 평생 동안 이렇게 살도록 결심했다. 나는 내 영혼을 완전히 하나님께 열어놓고 내 길을 주님께 맡기기로 선언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 놓을 것이다. 내 모든 죄, 유혹, 어려움, 슬픔, 공포, 희망들. 욕망들, 그런 모든 것들, 모든 환경을 맨톤 박사의 시편 119편에 대한 27번째 설교에 따라서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다.


7월 27일 토요일 오전

내가 유혹에 격렬히 포위되었거나, 악한 생각을 통제할 수 없을 때 대수학, 기하학 또는 다른 공부를 하자. 그것은 반드시 내 생각을 통제하여 그런 방황으로부터 나를 지켜 줄 것이다.


7월 29일 월요일 오후

내가 어떻게 하면 어떤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할까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면, 그것이 나에게 명확해지도록 주의하며, 의무를 행하며, 그 문제를 신중히 생각하자. 때때로 스스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그 문제가 불명확할 때도 매우 쉬어 보인다. 그러나 내가 미리 확신하고 있으면 그 사건이 뒤집혀 버려 그 문제가 매우 어려워지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1. 그 일이 내게 불리한 점보다도 유익이 더 많은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2. 잃어버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그 선의 전정한 예정된 생각이 부족해서 이고, 3. 양자의 영이 부족해서 이다.


7월 30일 화요일 밤

내가 나의 의무들을 실행하지 않는 모든 실질적인 이유들을 찾고 추적하여 나의 의무를 다하도록 노력하기로 결정하고, 그리고 나의 생각의 미묘한 속임수를 철저히 찾아서, 최선을 다해 그에 대한 답을 하기로 결정했다면, 나는 먼저 나의 결점의 바로 그 첫 원인이, 회개의 부족, 하나님에 대한 사랑, 자기혐오에 관한 것인지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 때때로 이것을 설교로 하자. *결심문 8을 보라.

특별히, 그로부터, 내가 지은 그런 죄와, 그것과 동류의 그런 죄들을 혐오하는 기회로 삼자.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있는 자만심으로부터 나의 자만심을 혐오하는 기회로 삼자. 그들의 사악함으로부터 나 자신에게 있는 사악함을 혐오하는 기회로 삼자, 내가 사악한 말을 들을 때 나의 사악한 말을 혐오하는 기회로 삼자. 그리고 다른 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메모. 중상과 비난을 받을 때 이렇게 하는 은혜로운 기회로 삼자.


---일기 감상-----

* 8번 결심문

다른 사람의 실패를 보았을 때-모든 면에서, 즉 말과 행동에 있어서 아무도 나처럼 그렇게 악하지는 않은 것처럼, 또한 내가 다른 사람과 똑같은 죄를 범하고, 똑 같은 잘못과 실수를 범한 것처럼 행동하자. 다른 사람의 실패를 나 자신의 잘못을 살피는 계기로 삼고, 나의 죄와 비참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기회로만 삼자. 


7월 31일 수요일 오후

그들을 위하여 내가 무엇으로 더 잘해 줘야 할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선한 것은 무엇인지,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를 구하는 힘든 시간을 보낸 후. 적어도, 결코, 다른 사람의 결점의 신랄한 관계를 들으려고 구하지 말자. 그에 대해 분명한 이유가 있기 전까지는 결코 다른 사람에 대해여 대항하는 어떤 것도 신뢰하지 말자. 그것에 관해 어떤 다른 관점으로 행동하지 말자.


8월 4일 주일 아침

최상의 기분이 되어 있을 때는, 시간을 얻자마자 마음의 욕심 내려놓기로 마침내 결심했다.


8월 6일 화요일 오후

마음에 특별한 거짓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한 경우에는 마음의 극단적인 애정 또는 정욕에 눈을 감아 버리고, 그것을 결박하여 완전히 복종시키자. 만약 내가 뉴욕으로부터 처음 왔을 때처럼 그런 애정을 갖고 있다면 나는 실제로 내 의무로서 해야할 일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것에 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욕이 이성에 손을 뻗치면 그 두 가지는 함께 끝장이 난다.


8월 7일 수요일 오후

신앙의 의무들이 어려워도, 때때로 의무적으로 많은 어려움들을 견디는 것은 상당한 이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노력을 해서 얻는 것은 훨씬 더 귀하며, 신앙이 더 달콤한데, 마치 산고 끝에 아기를 낳은 여자가 자녀를 더 사랑하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그리스도 예수 자신도, 그의 중보자의 영광과 그의 승리와 환희는, 그러한 고난에 의해 그것을 달성했기에, 그가 얻은 천국은 얼마나 더 은혜롭고, 얼마나 더 훌륭하고 귀한가.


8월 9일 금요일 오후

지금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에 관하여 결심하자.(아마도 에드워즈가 학위를 받을 때 대학 졸업식을 위한 공공 과제를 준비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의무라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 그 문제에 대해서 신중하고 부지런히 하고, 허식을 피하자. 만약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아무리 내가 많은 실망을 만나더라도 쉽게 생각하자. 그리면 나의 가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실제로 실패를 하고 기대한 것처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 스스로 고통 받지 말고, 결심문 57번에 따라 행동하자. 밤. 방학동안 나에게 유익하게 생각하는 것을 도왔던 것 중의 하나는, 내 마음을 고정시켜 가능하면 이익이 되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졸업할 때가 되니 보편적인 자비와 좋은 성품이 공격받아 의무의 초점과 신중함을 잃어버렸다.


8월 10일 토요일 아침

7월 23일에 했던 나의 결심을 결심문 64번으로 배치하고고, 7월 26일 것은 결심문 65번에 배치했다. 해질녘. 내적이고 부끄러운 위선에 대하여 나를 올바르게 도운 것들에 대해서, 나 자신이 발견한 모든 것을 거짓되게 고백하는 것은 사악한 짓이거나 또는 죄이다. 또한 그것이 신앙적인 것일 때, 겸손하고 정직하게 그에게 필요한 도움을 애원해야 할 때, 하나님께 고백하고 나의 상태를 전부를 다 열어 드리자.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부드럽게 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이 아니라, 나의 양심을 하나님께 모두 내어 놓아야 한다. 이런 수단에 의해, 나는 내 자신의 마음에 큰 지식에 도달할 것이다. 내 생각들에 도달하는 것들이 무질서하게 되고 헛되게 되어 신앙적인 주제로 묵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할 때,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나와서 이익이 되고 집중하도록 묵상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내 마음속으로 한 단서를 따라가면 지난 화요일에 결심한 것에 따라서 그 묵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8월 11일, 주일 오후

다른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볼 때 내가 했어야 하는 것이라고 바라는 것이라면, 내가 그것을 항상 하기로 결심한다. 예를 들어 선하고, 착하고, 참을성 있고, 용서하는 것은 나의 의무가 아니라고 내 속에서 논쟁이 붙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렇고 그런 결과를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행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나에게 활기 있게 보이면, 그리고 내가 저것을 했어야 하는 것이라고 바라자.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도 불편이 따를 것을 걱정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8월 12일 월요일 아침,

내가 선한 상태에 있는지에 대해 내가 의문을 갖는 주요한 이유는, 뉴잉글랜드의 사람들과, 그리고 옛 영국의 비국교도들이 경험했던 그런 특별한 단계로 내가 회심하지 않아서이다. 그러므로 바로 그 기초와 토대를 내가 만족스럽게 발견할 때까지 그런 특별한 단계를 거쳐 그들이 회심했었던 진실한 이유, 그것을 찾는 것을 결코 뒤로 남겨 놓지 않기로 지금 결심한다.


---일기 감상-----

* 이 일기는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구원의 형태론이 정해져 있는가? 회심의 과정을 볼 때 그는 뉴잉글랜드 청교도들과 영국의 비국교도의 일반적인 과정을 밟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를 에드워즈 목사님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이에 관련된 내용이 목사님의 박사논문에 있어 여기에 인용해 본다.


<인용문>

그러면, 에드워즈는 회심의 어떤 고정된 형태론을 주장하였는가? 소위 말하는 회심의 형태론(morphology)이란 말에서 morphology이라는 단어는 형식(form) 또는 양식(pattern)이란 말과 관련된다. 청교도들은 개인의 회심을 체험할 때에 어떤 반응이나 행동들을 기대하고 찾았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인간은 은혜를 받기 전에 본성과 성경에 기록된 거룩한 율법을 통하여 깨닫고 겸손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과정을 보편화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또는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시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떤 상태나 다른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방향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우리가 가장 주요하게 관계해야 하는 것은, 회심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혼 속에서 일으키셨던 효력의 본질이다. "성경은 성령의 열매들의 본질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려고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러나 그 열매를 내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서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라는 대목은 한 군데도 없다."176

에드워즈가 회심에 어떤 '고정된 형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으나, 일반적인 회심의 형태론은 아주 강조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고, 자기가 '곤고하고, 가련하며, 비참하고, 눈멀었으며 벌거벗었음'을 알아야 한다.177 자신이 지옥에 가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그 지옥에서 건져주시는 구세주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그리므로 자신의 죄책을 진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한 재물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178 사람들에게 긍휼과 사람을 베푸시기 전에 자기들의 비참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179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사람들을 감화시켜 자기들의 본래의 비참한 조건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며, 자기 스스로에게서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생각을 갖게 하거나, 아니면 육체의 힘을 통해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그런 후에 그들에게 나타나신다.180


하나님께서는 때로 총명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마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도록 하시어, 대번에 자기 자신들은 어쩔 수 없는 사람들임을 깨닫고 절망하게 만드신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그들 자신의 시련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자기 자신의 구원을 가져올 방도를 오랫동안 간구하도록 내버려두심으로써 급기야는 용기를 잃어버리게 만드신다.181 


그러나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도 자신들의 상태를 깨닫게 하실 수도 있다. 때때로 그렇게 하신다. 갑작스럽게 회심하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임에 틀림없다. 그런 경우가 그렇게 드물지는 않다."182


                                                 조나단 에드워즈의 중생론, 노병기 목사님 연세대 박사논문, pp.129-131.


* 주석(숫자가 주석의 번호이다)은 생략하고, 문단은 필자가 임의로 나누었다.


8월 13일 화요일 아침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죄를 지는 것인가? 오후. 나는 말씀에 전적으로 친숙하게 되는 것이 나에게 큰 유익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내가 교리서들 또는 논쟁에 관한 책을 읽고 있을 때, 나는 충분히 많은 조심을 하며 나아갈 수 있고, 내가 밟고 있는 토대와 발판이 무엇인지 볼 수 있다.


8월 17일 토요일 정오

모든 말에 있어서 항상 선행의 말만 하자.


8월 20일 화요일 저녁

선한 은혜를 가지고 기독교 이야기로 주제를 바꾸는 기회를 살피는 데 너무 조심하지는 말자. 이 거룩한 기술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내가 그 역할의 반을 차지하지 말고, 그것을 수행하겠다는 용기도 갖지 말자. 10월 2일 일기를 보라.


8월 24일 토요일 아침

만약 내가 복수에 관한 완전한 의를 실행하지 않았다면, 비록 내가 복수로부터 직접적인 어떤 것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여전히, 다른 무엇을 했어야 하거나 나의 환경을 그리고 행동의 환경과 방법을 교체하려는 것을, 복수에 대한 어떤 비밀스러운 것을 희망하며, 어떤 것들을 빼먹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악한 것이 나의 행동으로 인해 그들에게 일어난다면, 비록 그들이 그로인해 회개를 한다고 해도 조금도 만족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그의 잘못에 대한 것으로부터 회개했을 때 그들의 회개에 대해서는 만족은 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일어났던 사악 때문에 그들의 회개에 만족하는 것은 복수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나를 위해 더 잘 변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그것을 다루려고 했을 때 하나님의 손에서 그 문제를 취하는 것이다. 글쎄, 그러면 하나님은 나를 그것에서 실수하도록 나둘 것이다. 해질녘에 나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과 승리에 대해서 그를 바라는 것과, 그리고 그 문제의 처리에 대해서 그분의 은혜에 대해서 그에게 나의 눈을 고정시켜두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자연스럽거나, 우연하게 그것들이 성공을 볼 수도 있는 모든 사건들과 일 안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영향력에 대한 감각 부족과, 그 후에 따라올 수 있는 거대한 유익에 대한 감각부족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성공을 당연히 주시거나, 나의 유익에 더욱 반대로 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거나 또는 실패로부터 이익을 만들어 더욱 민감하고 유익해 질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는 그것은 덜 현재적이고 외부의 불이익을 만들 것이라거나 또는 어떤 수단이 되어 실패의 환경을 견딜 수 있거나. 또는 그러한 모든 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 의지의 부족은 7월 29일에 언급한 것들의 부족과 같다. 내가 마음속에서 기억해 낼 수 있는 것과, 모든 이야기를 조사해서 기억하자. 그것들이 정확히 진실한지 아닌지를 말이다.


8월 28일 수요일 저녁

좋은 책들을 가지고 있지 못했을 때, 그런데 책을 읽기를 원할 때, 원하지 않는 책을 읽는 데 시간을 보내지 말고 성경을 읽으며 결심문과 반성할 것들을 찾으면서 성경을 읽고, 성경의 문장을 써보자.

또 다른 것으로는 언어를 공부하고, 개인의 의무 안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자. 이 목표를 위한 시간이 부족할 때는 대신 이것을 하자. 할 수 있는 한 기억하고, 여행하는 동안 짧게 메모할 수 있는 석판 또는 그 무엇인가를 구하자.


8월 29일 화요일

지금 나에게 커다란 문제가 두 가지가 있다. 어떻게 내가 여행으 모든 시간을 유익하게 쓸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고통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개선할 것인가?


8월 31 토요일 밤

그 방해물은 나의 부패한 것들이 내 힘을 가지고 내 손으로 하려는 것은 무엇이 나를 방해하게 만드는 것인데, 이 방해물은 지속적인 억울함이다. 이 방해물이 결코 우세하게 하지 말자.


9월 1일 주일 아침

내가 극단적으로 세상적인 생각에 휩싸일 때, 구원조차도 죽음과, 죽음으로 인한 우울한 환경으로 생각된다.


9월 2일 월요일 오후

선한 은혜는 신앙적 이야기를 하도록 나를 돕는다. 내가 도덕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것에 관해 적용, 예증을 들면서 기독교로 전환한다. 8월 28일과 1월 15일 일기를 보라. 밤. 내가 옳다고 완전히 확실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적극적으로 반대할 때, 그것에 관하여 치열하게 또는 오랫동안 논쟁하는 것은 아주 바보짓이다.


9월 7일 토요일

내가 기대한 중요한 일로부터 약간은 유익이 되지만 그것이 미미한 런 것들로 인하여, 주제가 전환되거나, 중단된다고 하여 스스로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9월 8일 주일 아침

나는 여행 또는 그런 것이 지연되는 것에 대해 충분히 참지 못하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아주 비난받아왔다.


9월 22일 주일 저녁

내 마음으로 묵상한 구절과, 시편 노래의 구절로 주님을 찬양한다.


9월 23일 월요일

나는 옛날 사람이 거의, 새로운 발견에 대한 유익을 얻지 못했음을 발견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익숙했던 사고하는 방법 옆에서만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아무리 내가 또 다른 생각에 익숙해왔더라도, 나는 모든 외부적으로 보이는 발견에 대해 그 이유를 들어보고, 만약 합리적이면 그것을 발아 들이기로 결심한다. 내가 살아온 시간은 매우 짧아서, 나는 모든 것을 연구할 시간을 스스로 충분히 갖지 못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연구 외에는 스스로 하는 것은 빼놓거나 생략하기로 결심한다.




1723년 9월 일기


예일 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1723년 10월 4일 화요일 오전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내게 믿음으로 주신다고 약속한 것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만약 내가 그 문제에 관해 가장 신중하게 생각하며 나의 의무를 이행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나의 상태는 나의 유익과 영생의 측면에서 다른 어떤 상태보다도 나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 상태가 어떠하든지,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을 존중할 것이다. 내가 만약 이 문제에 대해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나는 하나님 전에서 불신앙을 고백할 것이다. 6월 9일 쓴 결심문 57번을 참조하라.


10월 7일 주일 밤

최근에 잘못한 것이 있다면, 충분한 대화 시간을 갖지 않은 것이다.


10월 12일 금요일 밤

나는 기독교의 완전과 심오함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 몇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에 대해 거의 모든 훌륭한 사람들이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선천적인 부패는 비밀스럽게 새어 들어 오는 구멍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거나, 그것이 해를 입힌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선의 이름으로 덮어 버린다. 그것이 빛을 극단적으로 어둡게 하고, 기독교의 사랑을 가린다. 누가 그의 잘못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오 저를 그런 은밀한 잘못들에서 지켜 주소서.


10월 14일 주일 아침

바쁠 때는 일을 행하는 원칙을 주의 깊게 준수하자. 내가 바쁠 때, 그리고 다른 때는 가능한 한 일에 편견이 없이 최선을 다해서 행동하자.


10월 15일 월요일 아침

잘못을 하고, 악한 것을 했을 때에, 영적인 묵상을 깊이 하는 것에 나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공포들을 주지 마소서.


10월 18일 목요일

B씨의 예를 따르면, 비록 그가 여러 어려움을 만났지만, 그는 웃음을 잃지 않고 그 일을 수행했으며, 비록 그 일이 작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매우 작은 일이듯이 말했다.


11월 1일. 금요일 저녁

내가 다른 일에 알맞지 않을 때, 글쓰기로 자신을 완성하자.(그는 아마 속기쓰기를 언급한 것 같다. 1월 10일 금요일 일기를 보라.)


11월 22일 금요일 오후

골방기도가 무기력하게 될 때, 마치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나 자신을 상세하게 설명하자.


11월 26일 화요일 오전

고통에 관해 묵상하는 중에, 사악과 그에 의한 어두운 환경, 어둠에 오랫동안 거주하는 것에 관해서 고통을 악화시키는 것을 되새기는 것은 매우 사악하고 유해한 일이다. 그것은 고통을 두 배 세 배로 배가시킨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그에 관해 말할 때, 우리만큼 그들에게도 피해를 준다. 우리 상황을 웅변적으로 나타내면 그러는 동안 그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야기 시키고, 옛것으로 다시 우리 배를 채우게 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와 반대로 하면 우리의 고통은 감소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생각의 밝은 면에 거한다면, 우리는 가능한한 그런 것들을 경감 받게 되고, 그들에게 밝은 면의 말을 할 때는 고통은 어느새 크게 사라지게 된다.


11월 29일 금요일 저녁

사회를 위한 기도에 집중하도록 도와주려면, 간구와 고백이 시작되는 때, 특별하게 집중할 거리에 대해, 주의하게 하는 것이다.


12월 9일 월요일 아침

다음 주 동안 나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에 대해 내가 표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관찰하자.


12월 12일 화요일

어떤 때라도 내가 만약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느 정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면, 그렇지 않으면 계속 일어나는 그 분명한 악을 피하기 위해, 조금이나마, 초조하게 하고,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도록 그들에게 말하자 -1723년 8월 28일의 일기를 참고할 것.

내가 좋은 책을 읽기 원하거나 읽고 싶을 때, 그것이 없는 경우에는 수학을 공부하거나 옛날에 배웠던 다른 것들을 복습하자. 그리고 친구들을 방문하고, 목사로서의 개인적인 의무를 더 수행하며, 세상적인 일을 하는데 주의하며, 밖으로 나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자.


---일기 감상-----

* 읽고 싶은 좋은 책이 없을 때 수학공부를 한 에드워즈 목사님의 발상이 재미있다. 그 분의 논리적이고 명석한 문장력은 수학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것 같다.

* 글을 정말 잘 쓰는 사람은 사실, 수학을 잘 하는 사람이다. 글을 쓰는 것은 마치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론은 수학에서의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다. 본론은 수학에서 말하면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다. 이때 공식에 입각해서 풀이하는 순서가 중요하다. 순서가 엉키면 정확한 답을 유도하기 힘들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서론에 제기된 문제를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순서에 맞게 글을 써야 한다. 결론은 수학에서 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서론에서 문제를 잘 파악하여, 본론에서 그것을 논리적으로 순서에 맞게 서술했다면, 결론에서는 올바른 답을 제시할 수 있다.

* 에드워즈 목사님의 책을 보면 이와 같이 글을 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더불어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수학뿐만 아니라 미술도 잘 한다. 미술을 하는 사람은 구상력이 있기 때문에 머리 속에 미리 대략적으로 대상을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서 글을 쓸 때도 미리 머리 속에 대략적으로 글의 내용을 배치할 수 있다.


12월 27일 금요일

매달 말에, 특별히 인생의 규칙으로 삼을 수 있는, 신약성경의 몇몇 장에 따라서, 나의 행동을 엄격히 점검하자.

매년 말에, 신약 성경에 나온 일반적인 규칙에 따라, 나의 행동을 조사하기 위해, 신약 성경의 여러 장을 읽어보자. 한 해를 마무리 할 때 얼마 동안 시간을 내어, 이 목적을 위해, 잠언을 읽으면 또한 유익할 것이다.


---일기 감상-----

* 한 해를 마무리 할 때이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예수님께, 그리고 예수님의 몸된 교회에서 나는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살펴보자. 혹시 나는 군살이나 암덩이는 아니었는지...

* 32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33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잠 1:32, 33).


12월 31일 화요일 밤

감정이 상한다고 하여 고통에 빠지거나 화를 내지 말자. 단지 하나님의 영예를 위한 질투심이나, 나 스스로 낮아지고 고난 받는 것은 예외이다.


1724년 수요일 1월 1일

세상적인 일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생각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 그 자체의 긴급성과 중요성에 따라서 생각의 분량을 정해서 생각하자.


---일기 감상-----

*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 2008년이 시작되었다. 올 해는 세상일에 대해서도 그 자체의 긴급성과 중요성에 따라 생각의 분량도 정해서 해야겠다.

*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에 따라 능동적으로 행동하여 많은 열매를 맺어야 겠다.


1월 2일 화요일 밤,

이런 것들은 확실하다. - 중요한 것을 할 때에 얻은 시간과 덜 중요한 일을 할 때 얻은 시간은 같다. 혼란스럽거나, 대화 또는 여행 중에 얻는 1분은 조용하게 공부하는 중 얻는 1분만큼 선하다. 일반적으로 어떤 때에 얻는 1분은 다른 때에 얻는 1분만큼이나 선하다.


1월 3일 금요일 밤

세상 것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시간은 필요성, 유용성, 중요성에 따라 분배된다. 어떤 면에서 세상적인 것은 성공의 불확실성과 생계의 불확실성, 소유의 불확실성의 면에서 세상 것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나, 사랑스러운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살면 죄를 짓게 되거나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은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1월 10일 금요일

(에드워즈는 상당히 길이의 글을 쓴 후에, 그것을 줄이고, 종종 그러하듯이, 그는 그가 쓴 것을 효과적으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숨겼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여 놓았다.) 잠언 12장 23절에 따라서 행동할 것을 기억하자. 신중한 사람은 지혜를 숨긴다.


1월 20일, 월요일

나는 신앙과 미덕에 관해서 어떤 기쁨도 느끼지 못하는 듯한 사람들 앞에서, 나의 입장을

분명히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때, 그것에 관해 완전하고, 분명하며 명백하게 제시하지 못한 것에 대해 큰 비난을 받아왔다.

만약 그런 대화가 그들에게 동의되어질 것 같지 않으면, 나는 그들이 신앙에 동의하도록 나의 견해를 직접적으로 말하면서,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기 보다는, 그들과 맞서 올바르게 말하지 않고 그들이 기분 나쁘지 않게 하도록 하기 위해 다소 완곡하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긴장하여 우울하게 말하지 않고, 자신감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진리에 대한 확신과 그 탁월성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아주 담대한 사람이 되어야한다.


---일기 감상-----

*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에드워즈 목사님께서 "참된 미덕의 본질"을 쓰실 수 있었던 것 같다.

 

2월 3일 월요일

모든 것을 병상 위에서도 가질만한 가치가 있게 하자. 그리고 어떤 종류이든지 나의 목표를 추구하다가, 종종 이런 질문을 내 스스로에게 던지자. “얼마나 이것은 임종시에 아주 가치가 있을까?”


2월 5일 수요일

과거에 나는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영화로우심과, 그리스도의 왕국의 진보와, 교회와 선한 사람의 번영에 대해 충분히 강하게 기도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 기도를 드리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결정했다.

단지 한 사람의 눈에 띠지 않는 기도를 들으시고는, 전 세계를 크게 변화시키고, 왕국들과 나라를 전복시키지는 않는 것 은데, 즉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건들이 전교회의 연합된 기도에 대해 응답하신 것을 볼 때 그렇다. 그래서 만약 나의 기도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그러나 그것은 눈에 띄지 않거나 작았을 것이다.



2월 6일 목요일

자유로운 신앙적인 대화의 유용성에 대해 전보다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자연 철학에 관해 대화함으로써 더 빠르고 풍부히 지식을 얻는 것을 발견했고, 개인적으로 공부할 때보다 더 분명히 사물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와 같이 항상 신앙적인 대화를 할 수 있기 위해서 진지하게 그 기회를 구하자. 이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사람과 항상 유익하고 즐겁고 자유롭게 그런 대화를 하도록 하자.


---일기 감상-----

* 에드워즈 목사님은 자연 철학에 대해서 대화의 유용성을 상기하고, 신앙적인 대화도 유용할 수 있음을 유추해냈다

.* 신앙적인 대화의 유용성은 매우 크다. 단, 그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상호 진지하고 유익을 구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2월 7일 금요일

만약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 나를 도우신다면, 나는 실패하거나 역경을 격어도 어떤 이유로든 그것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신중히 생각하고 그 이상 더 나아기지 않고 다음 말씀에 따를 것이다. 빌립보서 4장 6절 말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베드로전서 5장 7절 말씀처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라,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그리고 또한 “내일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그리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너희 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2월 15일

나는 식사할 때, 비록 내가 2년 동안 그런 경험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당시에는 확실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만약 내가 더 먹으려고 한다면 나는 엄격한 절제의 경계선을 초과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자마자 3분 안에 나는 그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여전히, 다시 식사하려고 했을 때 그것을 기억하고, 식사하는 동안, 나는 완전히 적당한 분량 이상을 먹지 않아야 한다고 확신이 들면서, 또한 전에처럼 나의 식욕과 느낌이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그때 그만 두워야 할지 다소 희미하게 보였는데, 그러나 내가 그만두었을 때, 나는 다시 확신했고, 역시 때때로 확신이 됐다. --나의 흥미나 또는 다른 면에서 나의 성향에 따라 끌릴 때, 그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욱 실제로 사실인가를 관찰했다. 그래서 보니 내가 표현했던 말들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유익에 배치되는 경우에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의 차이가 나고 있었다. -- 비록 무례한 것이 없어 보이고, 그것이 신앙적인 대화 속에서 나누는 정서적인 것이고, 또한 친절한 행동에 관한 것일지라도, 이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2월 18일 화요일

결심문 47번에 따라서, 착하고 선한 행동을 하기로 결심했는데, 아프거나, 건강하거나, 편하거나, 고통당하거나, 졸릴 때나 깨어있을 때나, 내 마음을 심란하게 하여 신체의 심란함으로 고통 받을 때나 어떤 신체의 상태에서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2월 22일, 토요일

나는 몇몇 사악한 습관에 관해 관찰했는데, 그것은 몇몇 선한 사람들에게 조차도 나이가 들수록 더 늘어나고 강해졌다. 그것은 기독교의 아름다움을 매우 방해하는 습관들이고, 몇몇 것들은 자연적인 기질에 따른 것들이고, 몇몇 것들은 그들이 젊었을 때 극복되는 데, 그것을 막지 않으면, 마침내 그 습관은 성장하여 죽을 때까지 그 습관이 보통 일상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나이든 크리스천들은 보통 어떤 면에서 어린 사람들보다 더 비이성적이다.  나는 그런 습관에 물들까 두려운데, 특히 주는데 인색한 것과, 꾸물거리는 태도가 그렇다. 


2월 23일 주일

구별되는 특징이나 나에게 낯선 것이 있는 장소에서, 실제보다도 더 그것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아도 나는 만족하게 된다. 만약 이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으면, 어떤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욕망이 매우 뚜렷이 나타날 때, 나는 참 진리의 범위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 내가 만찬이나 식사 때, 그것이 매우 나의 입맛을 돋우면, 나는 보통의 식사 때보다 더 많이 일어나는 식욕에 대해서 주위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음식이 있을 때, 평소보다는 두 배는 먹어야, 나는 만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나의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그것들이 신앙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에 욕망을 두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에 대해 성경에 나오는 실제의 많은 증거에 따라, 이는 타락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그들은 신앙에 더 상처받기 쉽다는 결론을 내렸다.


3월 16일 월요일

때때로 날씨가 좋은 한 낮에, 진지하게 신앙을 공부하며 정진하여 자기 부정과 같은 것을 실행하기보다는, 특별히 세상의 영광에 관해 더 경도된 나를 발견한다.


5월 23일 토요일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데, 그런 상태를 알아챘을 때는 지금까지 나는 그러한 때 성경을 많이 읽으면, 항상 아주 활기차고 최상의 상태가 된다.



1724년 12월 일기


예일대 강사 시절


6월 6일 토요일 밤

이번 주는 낙담들, 공포들, 당혹함. 수많은 두려움. 그리고 마음의 혼란스러워 내게는 매우 특별했다. 내가 여기에서 뉴헤이븐으로 간 것은 대학 강사 자리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지금 나는 세상에 대한 고뇌와 문제에 많다고 확신하지만, 그것은 결코 또 다른 세상에서 그렇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갖는다.


7월 7일 화요일

내가 어떤 것에 관계가 있을 때, 그 문제 또는 그에 관해 말하는 방법에서 둘 다 너무 많이 바꾸는 것에 관해서 삼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만약에 모든 사람이 이후에도 많이 바꾼다면, 그것은 결국 완전히 그릇될 것이다.


9월 2일 화요일

먹는데 있어서 먹을 것을 가볍게 하면 소화가 쉽게 빠르게 되어, 나는 아마도 더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어, 시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내 수명이 길어질 것이고, 2. 식후 소화하는 시간이 짧아질 것이고, 3. 건강을 상하지 않고 공부하는 데 더 집중할 수 있고, 4. 잠자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5. 두통이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9월 12일 토요일 밤, 이번 주에 만난 고난들의 특징들이, 신앙의 모든 안락함 아래 완전히 나를 밀어 넣는다. 특별히 나는 그것들을 이제 그렇게 준비 없이 만나는 덧없는 그루터기가 더 이상 아니다. 나는 더 강하고 영원한 믿음, 소망, 사랑 이외에는 그것들을 우연히 만나지 않을 것이다.


9월 30일 수요일

내가 어떤 일을 실행하는 데 있어 때때로 잘 먹고 잘 마시는 것이 내게 해가 될 때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배적인 생각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내게 해를 줄 것이 나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과 동등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 생각에 지배받지 않도록 견디기로 결심했다. 지난 3주 동안, 그 공허한 생각을 돌리고, 빨리 결심한 것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나를 과도하게 가라앉히곤 했다.


10월 5일 월요일

유익하지 않은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을 때, 나를 부인하고 나의 생각들을 중단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계속함으로서, 그런 생각으로 인해 마음 내기치 않은 기분이 들도록 작용할 시간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독서를 하거나 공부할 마음을 잃을 때, 다시 마음이 생기도록 하기 위해, 신성에 관해서 내가 연구한 열매인, 나의 비평문을 읽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일기 감상-----

* 힘들 때 하나님의 신성을 묵상하면 머리가 맑아진다.


11월 6일 금요일

그리스도 안에서 신뢰와 확신에 관해 다소 민감하게 느꼈고, 그리고 내 영혼을 기쁨으로 주님께 의탁하였는데, 우리 신학자들이 그것과 그것에 관해 말씀해 온 것을 나는 과거에 다소 의심했었다.


11월 10일 화요일

대화 도중에 내가 말한 모든 것을 기록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의 선한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하고, 그리고 그것을 조사하자.


11월 15일 주일

기도하는 것이 내기지 않을 때는, 항상 무엇을 기도할지 미리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로 결심하자. 그리고 생각과 말이 계속해서 일치되지 않은 채 기도하기 보다는, 기도를 어느 정도 짧게 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11월 22일 주일

우리는 스스로 보지 못하고, 또는 적어도 완전히 민감하지 못한 것에 관해서, 항상 구경꾼들이 우리의 몇몇 잘못된 일들을 따라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우리의 많은 부패의 비밀스러운 작용들이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보지 못하나,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민감하다. 그럼으로, 만약 내가 어떤 편리한 수단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이 내 안에서 발견하는 어떤 잘못을 알게 되거나, 또는 그들이 내 안에서 보게 되는 어떤 것들을 알게 되면,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이 잘못된 가치이고 사랑스럽지 못하거나, 또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낼 것이라고 다짐한다.


1725년 2월 12일 금요일

만약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완전하심에 대한 더욱 분명하고 즉각적인 관점을 나에게 주신다면, 내가 지금 바로 원하는 것은, 내가 물질과 육에 관한 하나님의 작용하심을 아는 것만큼, 영혼과 정신에 관해 하나님 그 스스로 나타내시는 방법에 관한 지식을 명확하게 아는 것이다.

 

---일기 감상-----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던 것처럼, 에드워즈 목사님은 젊은 시절부터 신령한 젖을 사모하셨고, 그 결과 하나님의 깊은 것을 맛보셨던 같다.

* 하나님의 깊은 것을 빨리 깨닫게 되면 될수록, 그만큼 성도의 인생은 환희로 가득 찰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비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하찮은 것에 불과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고, 마귀에게 매력 없는 사람이다.


2월 16일 화요일

나의 행동을 빛나게 하고 아름답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게 아주 많이 필요한 미덕은 관대함이다. 만약 내가 좀 더 관대한 성향을 갖는다면, 나는 더욱 잘못을 고치기 쉬울 것이다.


---일기 감상-----

* 에드워즈 목사님은 젊었을 적부터 성품의 변화에 대해 매우 민감하였다. 왜냐하면 거듭난 후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성품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5월 21일 금요일

어떤 다른 분파에 대한 견해에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면: 결심하자,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고, 진정으로 기도하는 것과 병행하여, 내밀하게 이 지역의 가장 사려분별이 있는 몇몇 분으로부터 가능한 한 모든 도움을 바라며, 이와 함께 현명하고 거룩한 분들의 기도를 간구하자, 아무리 내가 옳다고, 강하게 설득력이 있어 보이더라도 말이다


5월 22일, 토요일

잘못을 꾸짖을 때, 어떤 식으로든지 상처를 줄 수 있으니, 그 사건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연기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올바르게 꾸짖기 위해서이며, 어떤 감정이나 흥분이 조금도 섞이지 않고, 적절하게 꾸짖고, 의심으로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일기 감상----

21일 일기와 22일 일기를 보면, 에드워즈 목사님이 편견이 없이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볼 수 있는 것 같다.


5월 28일 금요일

내가 지금 회심했든지, 하지 않았든지, 내가 있는 지금의 현재 상태에서 나는, 나의 삶을 현재 상태에서 계속 영위할 것 같다. 그래도, 내가 현 상태에 머문다고 해도, 여전히 나는 계속 기도할 것이고, 이것에 속아 고통 받지 않을 것이며, 또한 안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잠자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의문이 들 때 스스로 시도해보고, 우리의 나이 드신 목회자님께 도움을 구할 것이고, 만약 내가 온전히 한 마음이 된다면 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고, 성령님께서 나의 잘못을 보여주실 것이다.


6월 6일 토요일 밤

나는 때때로 나태하여, 시간을 이롭게 사용하는 방법으로, 대화를 하거나, 방문하거나, 놀거나, 다른 어떤 신체적 운동을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것들을 하면서 쉬기 전에 맨 먼저 나의 정신의 사역의 전 범주가 시련에 겪게 하는 것이 최선이 될 수도 있다.


11월 16일.

스틸러스 씨가 제한했을 때, 나는 그것이 특별이 나의 진정한 이익 면에서 내가 이 규칙을 지켜 공부하는 한 특별한 유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나절이나, 하루 대부분을 다른 것들을 공부한 했는데 이제는 신학을 그렇게 공부하자. 내가 사회적인 의무를 완수하는데 있어서 한 가지 실수한 것은, 친구에게 편지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친구와 친척을 방문하는데 태만한 것에 대해 그들과 헤어질 때 그들에게 주의 받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이 신앙으로부터 마음의 작용의 움직임을 전환하도록 하는 경향의 생각을 억제할 때 그것이 우울한 것이든지, 걱정스러운 것이든지, 또는 열정적인 것이든지, 그것은 내 마음으로부터 그 자체의 자유를 지키게 하는데 좋은 효과가 있다. 그러한 생각들은 처음에 중단되어지면, 그 흐름은 마음을 요동칠 것이다. 현재, 신앙의 묵상과 정서를 도와주기보다 방해하는 많은 큰 작용이 있는데, 그 이후에 얻을 열매는 현재 잃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클 것이다. 이로 인해서 그 마음이 현재에서 전환된다면, 그러나 이때 얻어지는 것은 평생에 유용할 것이다.



1726년 9월 일기와 그 이후


노스햄턴에서의 목회시절


1726년 9월 26일

‘생활 대부분이 무기력하고 가라앉고 끔찍하게 무감각하게 지내다가, 영적인 것에 익숙하게 변화된 시간이 이제 3년째 접어들었다.’ 3년 전 바로 이 주가 시작되기 직전에, 나는 영적인 것에 비로소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1728년 1월 1일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침 일찍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은, 우리들도 아침에 일찍 나라고 권면하시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1734년 1월 22일

나는 하나님을 묵상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 또는 신성한 주제에 대해서 연구할 때, 저녁식사 때문에 방해 받을 것이 아니라, 방해 받기 전에 식사를 먼저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735년 4월 4일

어떤 신성한 감각(sense)을 갖고 있을 때는, 어느 때라도, 나의 생각들은, 실재적인 진보(improvement)쪽으로 향한다. 예를 들어, 진실 된 신앙에 관한 몇몇 논증과, 미래 모습의 실제성, 그리고 그와 같은 것을 마음에 두고 있을 때면, 나는 스스로 미래의 선을 위해 얼마나 확실히 모든 것을 담대하게 처분할 수 있는 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때라도, 내가 다른 세상에 있는 영광스런 성인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감각보다 더  깊은 것을 느낀다. 그리고 자기 부정을 하고, 이 영광과, 그런 것들을 위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처분하는 것이 얼마나 나에게 가치 있는 일인지를 생각한다.


---일기 감상-----

* 에드워즈 목사님은 믿음을 'sense of heart'라고 했다. 이 일기에는 sense'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여기에서 에드워즈 목사님에게 감각되는 대상은 신성한 것, 이 세상에서 벗어나서 존재하는 영광(glory)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생각은 신성한 것을 감각하는 방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은 생각이상의 것에 존재한다. 그것은 생각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되어지는 것이다.

* 존 오엔 목사님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없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했다. 보는 것 역시 감각에 속한 것이다.


5월 18일

현재 내 마음은 결코 나의 생각과 묵상으로 인해 전혀 고통 받지 않는다.


7월 11일

특별한 주제에 대해 묵상할 날들을 따로 떼어 놓았다. 때때로 나의 죄의 크기에 관해서 고심하기 위한 하루를 떼어 놓았다. 어떤 때는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의 미래의 비참함의 확실성과 끔찍함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떤 때는 신앙의 확실성과 진리에 대해 생각하며 성경에서 약속하고 경고한 거대한 미래의 것들을 묵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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