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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공부방 스크랩 삼천포가 낳은 서정 시인 박재삼과 노산공원 문학관
운영자 추천 0 조회 104 10.09.01 11: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삼천포가 낳은 서정 시인 박재삼과 노산공원 박재삼문학관

 

 경남 사천(삼천포)시는  대표적 서정시인 박재삼(1933~1997)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문학관을 그의 고향인 경남 사천시 노산공원에 21일 문 열었다. 지상 3층 규모의 문학관이 건립된 노상공원은 삼천포에서 태어나 자란 박 시인의 주요 작품 배경이 된 곳이다. 문학관은 전시실·문예창작실·다목적실실 등을 갖췄다.1층 전시실은 박재삼 시인의 삶과 문학을 살펴보고 문학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사천시는 문학관 개관에 맞춰 21,22일 제11회 박재삼 문학제를 한다.

<서울신문 2008년11.22일 기사>

 

<바다가 있는 시/서정시인 박재삼 /박물관/촬영/글돋선생/2010.8.6 오후6시30분경> 

 

2010년 8월6일 오후 부산에서 삼천포 행 버스에 올랐다. 전어축제가 팔포 매립지가 있는 횟집을 중심으로 열리고 있었다. 몇년 전 부터 오픈된 축제이다. 팔포 횟집 연합을 중심으로해서 시청 수산과 행정 지원으로  진주,남해,고성 등 인근 도시 사람들이 자주 찾곤 하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삼천포항구는 바닷길 교통요지로 50~70년대를 풍미한 시절이 있었다. 70년대 남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육로길이 열리면서 뱃길이 퇴락되었지만

풍부한 해산물과 어장으로 한 때 쥐치 잡이 트롤선이 입항하여 전국 쥐치포의 최고의 생산지로 날리던 시절이 70년대였다.

 

그 시절 도시가 취치가공으로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던 시절도 있었다. 옛 부터 갯가 사람을 '생개기(생고기) 배따 먹는 곳'이라 하여 삼천포 사는 사람을 

산청,함양, 진주,유림들이 은근히 멸시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육이오 사변이후 서울 피난민 중 지식인들이 학교 등에 교편을 잡으면서 50년대 후반까지 문학, 그림, 연극 분야에 큰 발전을 낳게 하였다.

향토문화재가 50년 중반에 열렸고, 시화전과 연극 공연들이 극장 무대까지 올려지는 분위기가 만연하였다. 해안 도시에 새로운 르네상스가 피어났다.

 

필자도 초등학교 시절에 그런 분위기를 많이 느꼈다. 그 유명한 이중섭화가도 삼천포 유명한 황혼다방과 해변가 은파다방에서 피난 문인들과 연극인들과 만남이 잣은 곳이기도 하다. 유명한 통영출신 시조시인 김상옥도 피난시절 삼천포 중앙시장에서 군밤장사를 하면서 글을 썼던 시절이기도 하다.

 

삼천포 출신 소설가(作家동인)金仁培

 

그 김상옥에게 발탁된 학생이 바로 박재삼이다. 육이오 피난시절의  걸출한 시인 선생아래  탄생된 시인이 바로 오늘의 박재삼이었다.

삼천포 해변을 감싸고 있는 와룡산, 그 머리 뿔에 해당하는 각산의 정기, 와룡산이 문필봉 처럼 생겨서 삼천포 시인이 탄생하였다고 얘기도 하고 있다.

시인은 박재삼, 소설가로서는 75년도 '문학과 지성' 지에서 '방울뱀"이란 중편으로 등단한  김인배씨도 이곳 삼천포 태생이며 박재삼씨 팔포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않은 해변동네에 살았다. 김인배씨도 '물목' '문신''하늘궁전' '후박나무및의 사랑' '어머니의 화단' '비형랑의 낮과밤' '섬에서' '환상의 배' '칼잡이' '앵화장'과 같이 삼천포 바다를 중심으로 이뤄진 주제를 많이 다룬 중편소설이 많다. 지난 80년대 초 젊은 소설가들의 모임 '작가'동인에 참가하여 좋은 활동을 하였다. 한국 소설가동인모임은 "作家"(회원, 이문열,김원우,윤후명,황충상,강석경,김인배,유익서,외2명) 왕성한 집필을 통해서 80년대의 소설 동인지 동시에 한국 아마 유일의 소설동인모임이 중요하다. 지금도 왕성한 창작의욕을 불태우고 중앙지면에 발표를 거듭하고 있는 편이다. 경남 창신대학교 문예창작가 교수로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고 있다. 김인 배 이후 소설가 및  정삼조 ,최송량 시인 등과 같은 지역 문인들을계속 배출하고 있다. 박재삼씨가 그들에게 촉진제가 되었을 것이다.

 

후배들이 박재삼 사후에 박재삼문학관을 세우기 위해 물심양면 노력한 결과가 2008년 11월21일날 나타났다. 박재삼 문학관 자리엔 60년대엔 활궁장 정자가 있었고, 70년도엔 판문점에 있는 형태의 콘크리트 팔각정이 들어서 있었다. 원래 조선시대 호연재가 있었던 장소였다.조선시대 영조때인 1770년에 건립 돼 실학 학문을 숭상하던 옛 삼천포지역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었다. 그 곳을 그 유명한 김삿갓 시인이 다녀갔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박재삼문학관이 세워진 의미가 남다른다. 명색이 '생괴기(생선) 배따먹는" 무식한 곳이 문화의 고장으로 탈바꿈하는 상징성의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문학도의 순례지 장소로 바꿔가고 있었다. 방명록에 의하면 전국 국문학과 학생들이 꼭 한번씩 들리는 곳으로 바뀌고 있었다. 문학관이 있는 노산공원 아래 거리 이름도 '박재삼거리'로 명명되어진 것은 오래전 일이다. 노산공원 아래가 팔포이다. 그곳이 박재삼이 바다를 보면서 꿈을 키었던 곳이다.

하지만 한가지 서운함이 있다. 시인 박재삼은 서울에서 죽을 때까지 활동을 하였다. 이곳 삼천포 고향의 문화재 행사 같은 곳에 잘 참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필자도 이곳에서 향토문화재 시,문학분야에 참석을 많이 했었다. 행사동안 얼굴을 뵌 적이 없었다. 물론 그의 시의 무대에 삼천포 바다가 숨어있었다.

하지만 신문지상 약력란에 일본태생이란 것을 자주 볼 수 있었고,

 

삼천포란 지명은 없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삼천포 고향에서 어렵사리 살았던 가난한 시절을 혹시 숨기고 싶었지않았나 그런 상상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삼천포는 그의 고향과 진배없다.  한편 이해도 되었지만 그 때의 심정은 동향인으로서 배신감마저 들었던 것은 굳이 감출 필요가 없기에,박재삼시인을 위해 고향사람들이 최상의 공원에 지은 박물관을 보면서 약간의 서운함이 있었다.  진심으로 박물관 개관을 늦었지만 축하하는 마음엔 변함이 없다. 삼천포 팔포 앞 목섬과 노산 비렁 해안에 넘실되는 바다가 박재삼시인의

가슴에 담겨 토해낸 시어들이 다시 노산 박물관에서 살아났었다.

 

삼천포가 시로 승격된 것도 1956년으로 시 승격은 전국 도시 중에서 깨 빠른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또한 제일 적은 인구의 시였기도 하다.

시로 승격되기 위해서 인구5만이 되어야 한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인구는 필자가 알고 있기에도 7만이 채 못되는 줄 안다.

이 처럼 이 지방은 해안 도시이기에 바다에 의존한 인구들이 태반이다.

 

연안어업의 사양길로 삼천포 도시 인구는 거의 자연증가를 멈췄다.

 

삼천포 토박이는 거의 객지로 나가고 지금 2세 3세 삼천포 태생은 거의 창선남해(창남해)사람들로 어업을 위주로 삼천포 사람이 되었다.

횟집이 많은 삼천포, 시내에서 5분 거리에 바닷가 항구가 펼쳐진다.

바다와 함께 생활하고 바다를 보고 자라는 곳이 삼천포 사람들이다.

 

싱싱한 활어가 넘쳤던 항구, 60,70년대까진 남해안 여안여객선의 중간항구 삼천포부둣가가 여객선 인구들로 북적였다.

여수, 삼천포. 충무. 그리고 부산으로 연결되는 여객선 교통로 가운데 항구였다.

 

70년 80년때까지 쥐치를 잡은 트롤선이 매일 새벽 드나들어, 한 때 삼천포 취치포가 전국 생산량에 70%이상 쉐어를 가졌던 고장이었다.

이젠 대전 ,진주  고속도로 개통으로 충청도 사람들이 생선회를 먹고 한려수도 유람선 타는 항구로 제 2의 번성기를 누리는 곳이기 하다.

 

삼천포항에 오는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노산공원이 있다. 원래 섬이었던 곳인데 일제시대에 개축을해서 이젠 육지가 되었던 공원이다.

노산공원에서 바라보는 아래 바닷가의 풍경은 감탄할 정도이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닷가에 졸고 있는 듯 뜨있는 섬들,한려수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 삿갓어른도 이 곳에 들렸다는 일화가 전해 지는 곳이다. 공원에 가면 꼭 눈에 들어오는 시비가 있다.

한국 문단에서 일관적으로 고향 바다의 비린내가 묻어나는 서정과 비극적 사랑,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등을 노래했던 시인 박재삼 시비가 서있다.

 시비가 내려보는 바다 한가운데 홀로 선 섬이 보인다. 이름하여 이곳 사람들은 '목섬'이라 불렀다.

목섬은 진도 모세의 기적처럼 한달에 한 두번 사리물때(썰물이 심할 때) 갯가에 물이 열린다. 그 곳을 따라 난 자갈길로 걸어 갈 수 있다.

물론 다른 곳은 수심30미터 넘는 깊은 물길이다.

<사진:삼천포 jc회원들이 약20년전에 건립한 노산공원에 있는 시비>  

이 갯가의 끝이 강이 맞댄 곳이다. 삼천포 시내를 가로 지르는 한내 강 하구이다. 이 하구의 갯가에 60년초까지는 모래톱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여름철 

수영하던 곳이다. 이름 하여 "팔장개"라 불렀다. 나중엔 "팔포"라고 부리는 갯가였다. 팔장이란 단어는

뒷산 와룡산은 천추태후 드라마에 나오는 대량원군(후일 고려 현종)이 유배되었던 절이 있었다.

와룡산 정기로 인해 文千과 武萬(문인천명과 무인만명)이 나온다는

와룡산 일대의 전설이 서린 곳이다. 팔장이란 이 곳에서 여덟의 장군이 나올 바닷가란 전설이 서린 곳이다.

박재삼은 이 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항시 그 바닷가는 어머님 품안 같았다. 

가난하여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수업종치고 일거드는 지금 알바학생으로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고려대학 국문과로 진학하는 수재였다.

고려대학 시절 <현대문학>에 등단한다. 당시 서정주와 유치환이 서로 추천할려고 탐을 낸 시인이었다.

 

 

그의 시 모티브 중에 바다가 많이 나온다. 그가 쓴 "무더위의 시"와 "봄바다에서'란 시에도 바다가 나온다. "특히 울음이 타는 가을강"에서는

가을강에 해당되는 "한내"와 그 끝자락에온 바다가 바로 팔장개 앞바다이다.

그 바다가 바로 그가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항상 바다 앞에서 놀고 위안 받았던 삼천포 팔포 앞 바다이다.

 

그 바닷가 옆 거리가 "박재삼 거리"로 명명되어 그를 기리고 있다.

내가 찾아간 그 바닷가는 이제 매립되고 방파제가 서고 변형되고 있었다.

아직 그대로 서 있는 정도는 박재삼씨가 썰물 때 조개 및 해삼 멍게 잡아 먹었던 목섬일 것 같다.

<사진:노산공원과 팔포 앞바다, 목섬이 있는 풍경> 

등대가 들어서고 다리가 놓아지고 팔포 옆이 매립되어 그 곳에 들어선 횟집들은 박재삼 시인이 살아보았다면 알 수 없을 정도로 변해있었다.

필자의 고향도 이 곳이다. 여객선 항구쪽으로 가던 길, 삼천포극장 거리에 있었던 집.

동리다리에 밀물시절 바닷물에 밀려들어오는 문조리를 낚시하던 시절.

노산아래 등대가 보이던 바닷가 고향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기억들, 노산 비렁바닷가, 

팔도 축강에서 어릴적 멱감을 시절과 비교 해 보니 너무 많이 변해있었다.

바닷물도 많이 오염된 것같고 뭔가 잃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팔포하면 50년부터 있었던

유일한 생선횟집 "미찌(道)집"이 수없이 많은 생선횟집을 보면서 불현듯 생각났다. 

고향이란 곳은 추억이 있는 곳이다. 산천,바다와 같은 자연들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고향의 맛과 향기를 말이다.

하지만

고향에 와서도 모르는 사람들과 개발되어 변형된 환경들로 인해 낯선 곳으로 온 느낌이었다.

 마치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다. 옛 향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목섬 너 마져 없었다면 아마 박재삼 시인도 그 바다를 잊어버릴지 모를 정도였으니 말이다.(글돋)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江)을 처음 보겄네

 

무더위의 시

 

박재삼

 

너는 시원한 바다를 보고

어찌 풍덩 뛰어들 생각만 하고 있느냐.

 

네가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아름답고 자유로이

바다 속을 누비고 놀던

천하태평인 고기들에게

원자폭탄과도 같은

으시시한 공포를 주고

다시 말하면 목숨을 단축케 하고

그것들은 다시

영원을 향한

더할 나위없는 순수한 리듬을

뒤흔들며 깨뜨리고 있는 줄을

깜빡 잊고 있느냐.

 

더위를 참고 견딜 수 있는

아, 조금은 땀을 흘리는 일이

지금 너에게 주어진 제일 큰

시를 살리는 길에 직결되는지고.

 

박재삼 시집 『사랑이여 』,[실천문학사]에서

 

 

   봄 바다에서

 

                                   박재삼

    화안한 꽃밭 같네 참.

  눈이 부시어, 저것은 꽃핀 것가 꽃진 것가 여겼더니 피는 것 지는 것을 같이한 그러한 꽃밭의

  저것은 저승살이가 아닌 것가 참, 실로 언짢달 것가. 기쁘달 것가.

 

  거기 정신없이 앉았는 섬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살았닥 해도 그 많은 때는 죽은사람과 산사람이 숨소리를 나누고  있는 반짝이는

  봄바다와도 같은 저승 어디쯤에 호젓이 밀린 섬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가.

 

  우리가 소시적에, 우리까지를 사랑한 남평문씨 부인은,

  그러나 사랑하는 아무도 없어 한낮의 꽃밭 속에 치마를 쓰고 찬란한 목숨을 풀어 헤쳤더란다.

  확실히 그때로부터였던가, 그 둘러쌌던 비단 치마를 새로 풀며 우리에게 까지도 설레는 물결이라면

  우리는 차마 안자락으로 코 훔쳐 주던 때의 머언 향내 속으로 살 달아 마음 달아 젖는단 것가.

 

 고 박재삼시인에 관해서

김소월에게서 발원해 김영랑·서정주로 이어지는 한국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은 시인이었다.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삼천포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수학했고,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그의 시는 당시 서정주와 유치환이 서로 반해 추천을 다툴 만큼 출중했다. 시 작품의 탁월함은 무엇보다도 가락에서 두드러졌다. 우리말을 의미·개념에만 맞추어 쓰는 것이 아니라 운율에 맞추어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리듬의 중요성을 태생적으로 알아차린 시인이었다.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과 서민생활의 고단함을 실은 시세계를 구축했으며, '한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시인', '슬픔의 연금술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때로 그의 시들은 '퇴영적인 한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절창(絶唱) 〈울음이 타는 가을강〉 등에서 드러나듯 '생활과 직결된 눈물을 재료로 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박재삼은 모더니즘·민중주의 등과 같은 경향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대에도 어떤 계파에 몸을 두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지켰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향 바다의 비린내가 묻어나는 서정과 비극적 사랑,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등을 노래했다. 슬픔을 아는 시인이었으며 평생을 가난하고 고달프게 살았다. 1955년부터 〈현대문학〉 등에 근무하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가 된 이후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았으며 위장병과 당뇨병 등 병치레를 하기도 했다. 시작(詩作)과 함께 약 25년간 요석자(樂石子)라는 필명으로 바둑 관전평을 집필해 생계를 해결했으며 바둑계에선 '박국수'(朴國手)로 불렸다. 처녀시집 〈춘향이 마음〉 이후 〈뜨거운 달〉·〈찬란한 미지수〉·〈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비 듣는 가을나무〉·〈해와 달의 궤적〉·〈다시 그리움으로〉에 이르기까지 시집 15권과 수필집 〈차 한잔의 팡세〉를 냈으며, 현대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노산문학상·인촌상·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자료:백과사전>

 

 

 

 

 

호연재는 조선시대 영조때인 1770년에 건립 돼 실학 학문을 숭상하던 옛 삼천포지역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당시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는 수많은 문객들이 이곳에서 망국의 비분을 표현하고 실학사상을 숭상하자 일제가 불온사상의 소굴이라며 강제로 철거, 1901년 보흥의숙, 1905년 광명의숙, 1917년 삼천포공립보통학교로 설립, 발전해 지금의 삼천포초등학교에 이르렀다.
 이후 호연재의 옛 터전인 노산공원에는 팔각정(승공관)이 들어섰고, 이 팔각정이 노후화 돼 안전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에 따라 허물게 되면서 지난 2005년 7월 지역의 원로 17명이 연대 서명으로 “‘노산 호연재’의 역사적 가치성과 이에 깃든 호연지기의 정신은 후세에 영원토록 계승 발전돼야 한다”며 ‘원형 복원건립’을 주장했다.(경남신문2008년10월 기사일부)

 

 

 

 

 

 

가운데 김동리선생,왼편 박재삼 

 

고은시인과 박재삼 

 

 

 

 친필 원고

 

 

 

 

 

 

 

노산공원 계단 

 

박재삼거리 

 노산공원,노산호연재,문학관

 

V.A. - 삼천포아가씨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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