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가 김구정
조선 천주교회를 창립한 주역인 이 벽 세례자 요한은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고, 천진암 강학회에 모인 선비들과 더둘어 실학 강학회를 천주학 강학회로 돌려놓고 다시 천주교 신앙 공동체로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서울 수표교와 명례방에서 성사 집행 등으로 한양 선비들과 각지의 덕망있는 선비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조선 천주교회의 기틀을 다져 놓았습니다. 그 후 문중박해가 닥쳐 아버지 이부만공과의 불화가 심해지자 그는 다시 포천 집에 감금되는 신세가 되었고, 배교를 강요당하자 곡기를 끊어 자진하였습니다. 그때 조성된 원 묘소가 역시 포천 생가터 부근에 있습니다. 이 원묘소를 참배하러 갔더니, 경기도 천진암으로 이장하는 작업을 도맡아 하던 이장준비위원회의 위원 명단 속에 김구정 선생의 이름도 묘비 뒤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삼일운동 당시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에 다니던 신학생이었는데, 뮈텔 주교의 엄명에 따라 삼일만세운동 참가 금지령을 받았지만,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퇴교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교회사가로 활약하면서 전주교구 호남교회사연구에 큰 족적을 남긴 김진소 신부 집안을 개종시켰고, 손자가 한국외방선교회의 선교사로서 활동하고 있는 김명동 신부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소에 있어서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으신다는 속담도 떠올렸지만, 시대의 징표에 눈먼 교회 권력에 성소를 빼앗겼어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더 꿋꿋하게 활약한 김구정 선생의 삶에 경의를 표하며 참고 자료를 올립니다.
김진소 신부와의 인연
김구정은 ‘입이 푸짐하고 그가 100명에게 말을 하면 101명이 다 빨려 들어간다’는 평을 들었다. 이 시절 김구정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사례가 김진소 신부 집안을 개종시킨 일이다. 김진소 신부 집안은 원래 가톨릭이 아니었다. 충청도의 부유한 양반 집안이었고, 김 신부의 할아버지는 유학자였다. 그런데 김 신부의 아버지 김용규는 1920년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면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독실한 개신교 장로였다. 김용규는 개신교 교회를 세우거나 목사를 양성하는 일에 적극적이었고 시골 교회의 가난한 목사나 전도사들의 생활비를 대줬다. 또 서천 서면 등 여러 곳에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김진소 가족은 해방 후 군산으로 내려와 둔율동에 정착했다. 그들은 군산성당 앞을 지나 개복동 교회를 다녔다. 1946년 김구정은 일제 초기 군산 부윤이 살던 집으로 이사 왔는데 수도 사정이 좋지 않아 김진소네 집으로 물을 길러 다녔다. 그러면서 자연히 집주인 김용규와 교류하게 됐다. 김구정은 설득력이 있었다. 개신교 장로 김용규는 그의 말을 듣고 바로 개종을 결심했다.
1947년 9월 25일 김용규는 온 가족과 함께 개종했다. 김진소 가족은 당시 주임인 김후상 신부에게서 교리를 배웠으나 영세는 1947년에 새로 부임한 박성운 신부에게 받았다. 온 집안이 한꺼번에 영세해 김구정의 가족이 대부대모가 됐다. 김구정은 김용규의 대부가 되고, 김구정의 부인 채 요안나는 김 신부 모친 한영수의 대모가, 김구정의 아들 김영일은 김진소의 대부가 되는 등 서로 대부대모 관계로 엮였다.
김용규 장로가 개종한 후 몇 달 동안은 개신교 신자들이 김진소 집에 와서 통성기도를 했다. ‘마귀 들린’ 장로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김용규는 개신교에 열성이던 그 신앙을 그대로 실행했다.
이러한 부모의 신앙과 순교자의 일화가 결국 김진소를 신부의 길로 이끌고 또 살게 했다. 김진소는 1972년 7월 5일 중앙주교좌성당에서 한공렬 대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부친 김용규는 김 신부가 사제품을 받기 열 달 전 하느님 품에 안겼다. 김구정은 김 신부 서품 때 자신이 아버지 노릇을 대신하겠다고 했다. 김 신부는 평생 교회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교회사연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聖殿)을 짓는 작업이다. 성전은 내가 쌓지만 남이 사용하는 ‘봉헌’이다. 복음서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담은 책이라면 교회사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생활과 증거를 수록한 책이다. 가톨릭의 가르침은 성경과 성전(聖傳)을 두 개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 우리 교회의 박해 시대 순교자들이 드러냈던 삶의 기록은 우리의 성전이다. 김구정은 우리의 성전(聖傳)을 존중했고 이를 성전(聖殿)으로 되살려 내고자 노력했던 한 시대의 인물이었다. 실제로 한국 교회가 설립된 이후 교회사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까지 적지 않은 공백이 있었다. 김구정은 이 공백을 메꿔준 유능한 연구자였다.
1984년 5월 1일 김구정은 머리카락 수도 세신다는 하느님께 86년간 받은 생의 몫을 올리고 글로 남았다. 그가 더하고 싶었던 말은 주께서 조합하시리라. 그리고 오늘은 김효동(성물조각가)과 김명동(한국외방전교회) 신부 등 손자들이 조부의 체온과 소망을 전하고 있다. 김구정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통해서 또 다른 김구정이 조명되기를 빈다. <끝>
[평화신문, 2016년 10월 16일,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이기우 신부님 글을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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