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사건의 피해자 현경대
18대 총선 제주갑 선거구에 출마한 무소속 현경대는 1947년 제주에서 발생한 43사건의 피해자이다. 4.3사건은 6.25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빚어진 희생자 수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4.3사건 희생자추정 30,000명)를 낸 사건 중에 하나이다.
이러한 4.3사건에 현경대의 부모님과 할머니는 희생되어 홀홀 단신 고아로 남게 되었다. 현경대가 고아가 된 나이는 불과 10살에 불과했으며, 졸지에 고아가 된 현경대는 이모 밑에서 성장하게 된다.
* 가난한 천재소년 현경대
4,3사건으로 고아가 된 현경대는 이모집에서 이종사촌들과 함께 지내야 했다. 고아인 현경대를 키우는 이모의 생활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총명한 현경대를 자기 자식 이상으로 돌봐주었다. 누구나가 갖고 있을 법한 유년시절의 사진을 현경대는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가난하고 외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는지 짐작 할 수 있다. 이후 현경대는 당시 제주은행장이셨던 김인묵행장님 댁에서 양아들 겸, 김행장의 장남(김영호.대한항공사장)의 과외선생님으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게 된다. 김행장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이 그의 어린 시절 사진이 전부이다.
* 법학도 현경대
현경대는 제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법학도의 꿈을 키워가게 되었으며, 이때 현경대의 스승인 김치선박사(전 서울대 법학대학학과장,전 숭실대총장 역임)를 만나게 된다. 평소 현경대를 아들처럼 지켜봐왔던 김치선박사는 그를 사위로 맞이하여 스승과 제자사이에서 장인과 사위로 인연을 맺게 된다.
* 인간 현경대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로 자란 현경대는 스스로를 ‘제주의 아들’이라 말하곤 한다. 가족의 사랑과 인연을 중요시하는 그는 아직도 그의 스승의 사모님이자 장모님 되시는 분과 함께 생활하고 계신다. 또한 그는 어릴적 고생하던 유년시절을 생각하여 소년소녀가장 돕기에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으며, 지금은 고인이 된 부인 명의의 장학회를 설립(김성애권사장학회)하여 어렵게 공부하는 젊은이들을 돕고 있다.
* 현경대의 제주사랑과 8전6기 도전
1965년 제5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현경대는 1980년 서울지방검찰청특수부검사를 끝으로 1981년 제주도로 내려와 변호사사무실을 개업하였으며, 같은 해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후 제12, 14, 15, 16대 국회의원에 선출되는 그의 저력과 제주의 힘을 과시하게 된다. 흔히들 탄핵총선이라 일컫는 2004년 총선에서는 현경대의 정치제자 격인 강창일의원(열린우리당)과 겨뤄 4,200여표 차이로 패하고 말았다. 강창일의원을 정치제자라 말하는 것은 강창일의원은 80년 초 현경대의 비서관을 지낸 경력 때문에 주위에서 회자되는 말이기도 하다. 비록 한나라당의 공천에서 탈락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지만 스스로가 말하듯 ‘국회의원의 시작도 무소속이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 금번 총선도 제주도민당으로 마무리 하겠다’ 한다.
* 내가 들은 현경대
내가 현경대 전 의원을 알게 된 것도 얼마 안된다.
현경대 전 의원은 내가 누군지 모를 수도 있다.
내가 이 글을 쓴 것도 그를 잘 아는 지인으로 부터 전해들은 이후이다.
난 단지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이다.
난 현경대 전의원의 화려한 경력과 사회적 위치 때문에 그의 성장과정이나 배경도 그러할 줄 알았다.
현경대 전의원의 지난 시절 얘기를 듣는 순간 ‘우리 아이한테도 예기해줄만하구나’ 하는 생각과 다른이에게도 들려주고파 전하는 것 뿐 이다.
첫댓글 힘내시고 화이팅 하십시요.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면 승리는 현경대 후보님 이라고 믿습니다.
힘 내시고 건강 하십시요 다음이라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 되시면 현 의원님은 무엇보다 더 큰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