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한(漢)하면『바람의 나라』이미지 때문에라도 매우 강력한 나라로만(물론 실제로 허약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알기 쉽지만 늘상 그랬던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최소한 한 무제 이전 시기에는 수모를 당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지요.
이번 글에 소개할 내용은 바로 오만한 한(漢)에 대한 북 아시아 제국 사람의 질타입니다.
이번에 소개할 스토리는 중국 한(漢)나라의 역사가 사마천이 쓴 ‘『사기』중「흉노 열전 (匈奴列傳)」’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초한지의 영웅이라는 한 고조가 흉노 제 2대 선우 모돈에게 패한 후 서한은 항상 유씨의 여성 하나를 흉노로 보내어, 황제의 딸이라 속이고 선우의 아내로 삼게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지요.
그리고 환관인 연(북경) 지역 출신 중항열로 하여금 공주의 부(博 : 보호관)로 삼았습니다.
중항열은 가고 싶지 않았으나 (서)한 나라 조정에서 억지로 그를 딸려 보내려 하자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한나라의 화근이 될 것이다. 두고보라!"
중항 열은 흉노에 오자마자 선우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선우는 중항열을 매우 총애했습니다.
중항열은 흉노 생활을 체험한 후 다음과 같이 선우에게 조언합니다.
"한나라의 먹거리를 얻게 되면 모두 버리셔서 그것들이 젖과 유제품의 편리함과 맛만 못하다는 것을 보이십시오."
그리고 나서 중항열은 선우의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숫자를 기록하는 방법을 가르쳐 인구와 가축의 수를 헤아려 기록하도록 했습니다.
(서)한(漢)나라의 사신이 조공을 바치러 흉노 황제[선우]의 천막에 오자 (대)선우는 서한에서 망명해 온 측근 중항 열로 하여금 서한의 사신을 접대하도록 합니다.
서한의 사신은 중항 열을 만나자 흉노에 대해 비웃음을 던집니다.
“흉노족은 노인을 천대 하는군요.”
서한 출신의 흉노의 대신인 중항 열(中行說)이 사신의 말을 꾸짖습니다.
“한의 풍속에도 전쟁 가는 아들에게 따뜻한 음식과 두꺼운 옷을 주지 않는가. 우리 나라는 청년 전사(戰士)들의 나라이오. 노인들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오.”
이렇게 야멸차도록 쏘아붙입니다.
다시 한나라 사신이 흉노를 비웃습니다.
“흉노족은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으니 이 무슨 해괴한 짓이요? 예의나 범절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나라군요”
중항 열이 즉각 반발합니다.
“형수를 취하는 것은 우리가 유목민이니 가계가 단절되는 것을 막고 같은 성씨(姓氏)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오(사실 이것은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서한 사신이 다시 말합니다.
"흉노는 의관정제도 안하고 조정에서의 의식과 예절도 없소."
중항 열이 대꾸합니다.
"흉노의 풍습에 사람은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젖을 마시며 그 털가죽으로 옷을 해입는다 했소.
그것이 흉노에 맞는 의복이오.
달리 무슨 의관정제가 필요하겠소?
또한 흉노의 약속은 간편하여 실행하기가 쉽고 임금과 신하의 관계도 간단하고 쉬워서 나라의 정치는 흡사 한 집안의 일과 같소.
그런데 한은 입만 뻥끗하면 예의, 예의하는데 그 예의 때문에 항상 상하(上下)가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쓸데없이 명품 옷이니 하여 극도의 사치를 부추기지 않소?
또 성곽을 쌓아서 백성들을 늘 피로하게 하지.”
[사실 이러한 폐단들은 서한 동한 뿐만이 아니라 인조 쿠데타 이후 주자학이 더욱 강화되어 중국을 닮고자 했던 조선에서 고스란히 부활합니다.]
이후부터 (서)한나라 사신이 변론을 하려고 하면 중항 열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한나라 사신아, 쓸 데 없는 소리는 하지 말아라.
(서)한 나라가 우리 나라(흉노)에 보내게 되어있는 비단이나 솜, 쌀과 누룩 들은 정해진 수량대로만 보내고 품질이 좋으면 된다. 무슨 군소리를 하는가!
그러나 수량이 모자란다든지 조잡한 물건들을 보냈다든지 한다면 너희들이 추수할 때쯤에 가서 말을 몰아 작물들을 다 밟아 버릴 것이니 그리 알아라.”
한의 사신이 끽소리 한 번 못했음은 자명한 노릇입니다.
전반적으로 동-북 아시아의 평화는 중국 왕조들이 약화되거나 약했었을 때 상대적으로 더 유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중화주의의 해독은 여전하고 이것은『삼국지』같은 소설 및 게임과 각종 무협소설들에 의해 여전히 미화되는 경향을 지닙니다.
『삼국지』전문가인 김운회 교수의 이야기 한 토막 인용합니다.
“한국 무속신앙 중 해외에서 수입된 신령은 관우와 유비는 물론 오호대장, 감부인, 미부인, 손부인까지 전부 삼국지의 인물들뿐입니다.
또 중국의 영웅을 우리 영웅으로 동일시하고 중국을 친근하게 여기면서, 우리와 같은 처지인 몽골 여진 거란을 오랑캐라 멀리하게 만들죠.
『삼국지』야말로 1500년 된 동북공정이고, 요즘 ‘한류(韓流)’ 뺨치게 흥행에 성공한 ‘한류(漢流)’라는 점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출처: [동아일보 2004-12-10 17:26]
특정한 시대를 제외하고 나면 한족이 큰 소리 쳤던 시기는 의외로 적었던 셈입니다.
'사기'「흉노열전(匈奴列傳)」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한(漢), 흉노에 글을 보내어 가라사대, '황제 경문(敬問)하노니(공경하여(혹은 삼가) 묻사오니) 흉노의 대선우(大單于), 무양[(無恙) [명사] [하다형 형용사] 몸에 탈이 없음.]하신지.' "
기록상 오만한 경우가 왕왕 있는 중국의 경우를 감안할 때 양국의 관계를 단적으로 반영해주는 글이라 하겠습니다.
회원 적곡 마로가 올렸습니다.
첫댓글 서울에 관우를 모신 사당이 여러 곳 있고, 유비·장비나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도 있다고 들었는데 감부인·미부인·손부인은 잘 모르겠군요. 『삼국지통속연의』는 명대의 것으로 알고 있으니 600년 정도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