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 잃은 거지소년이 이룬 60년 꿈… 실로암안과병원장 김선태 목사
최근 첨단 병원으로 재건축… 개안수술·무료 진료 도우며
주일엔 전국순회 지원 호소 "金보다 귀한 헌금 덕분"
"너는 커서 꼭 목사가 돼서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약속하렴. 내가 이 땅에 사는 날까지 널 위해 기도할게."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 온몸에 옻이 오른 데다 시력을 잃은 거지 소년을 씻겨주며 한 할머니는 이렇게 다짐을 받았다. 소년은 약속을 지켜 목사가 됐고, 자신처럼 시력을 잃은 이들을 도왔다. 실로암안과병원장 김선태(68) 목사의 이야기이다. 당시 거지소년의 60년 꿈이 영글어가고 있다.
김 목사는 최근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지상 8층, 지하 4층 규모의 '실로암아이센터'를 새로 지어 10월 말부터 진료를 시작했다. 지난 1986년 같은 자리에 세웠던 병원 건물을 재건축한 것이다. 지금까지 백내장 등으로 시력을 잃어가던 3만3000여명이 개안(開眼) 수술을 받았고, 무료 안과진료를 받은 사람도 45만명에 이른다. 수술비용은 30만원이지만 형편이 어려운 환자는 후원자와 연결해 무료로 수술해줬다. 이제 김 목사는 입원실까지 갖춘 새 병원을 기반으로 국내뿐 아니라 북한을 비롯한 아시아·아프리카 각국의 어려운 시각장애인들의 개안 수술을 도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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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로암안과병원장 김선태 목사가 수술환자들의 손을 잡고 쾌유를 비는 기도를 하고 있다. 김 목사는 매일 이같이‘회진’을 돈다./김한수 기자 hansu@chosun.com
10일 병원에서 만난 김 목사는 "이 병원은 한국 교회의 기도와 사랑의 결실"이라고 했다. 최첨단 장비와 시설을 갖춘 '럭셔리 병원'을 세우기까지는 김 목사의 뜻에 공감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는 "금(金)보다 귀한 헌금을 보내주신 분들 덕분에 최첨단 병원을 지을 수 있었다"고 했다. 김 목사는 매년 1~2차례 미국 등의 교포교회를 방문했고, 매 주일에는 전국의 교회를 순회하며 지원을 호소했다.
호응은 뜨거웠다. 하루에 1달러씩 1년에 365달러를 모아 보내주는 재미교포, 미화원으로 일하면서 근무시간 외에 폐품을 모아 20년 동안 170명의 개안수술 비용을 헌금한 분, 29년째 바자회를 열어 성금을 보내주는 교회 등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또 김 목사의 중·고교 시절 은사인 조약연 선생님은 자녀에게 받은 용돈을 모아 임종하면서 500만원을 기증했다. 그 외에도 '벽돌 한 장(1000원)' '한 평(450만원)' '한 실(室·2500만원)' '한 층(4억5000만~5억원)' 등을 기증한 분들의 도움이 모였다.
김선태 목사의 삶은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6·25 전쟁 때 부모를 잃었다. 이어 폭발사고로 시력을 잃었고, 전국을 떠돌며 구걸했다. 삶을 포기하려던 적도 있었지만 "낙심하지 말라, 희망을 가져라"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여러 목사와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숭실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거쳐 미국 매코믹신학대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그는 신앙을 굳건히 했고, "믿음으로 충성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목사가 된 그는 1972년 맹인교회를 개척, 점자성경과 찬송가를 무료보급하던 중 고(故) 한경직 목사의 후원으로 실로암안과병원을 열었다. 그는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서울노회장(2007년)을 역임했고, 막사이사이상(賞)도 받았다. 김 목사는 "수상을 위해 필리핀에 가보니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이 떠올랐다"며 "새 병원을 발판으로 세계로 다니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고 했다.
실로암안과병원은 26일 오후 4시 건축감사예배를 드린다. (02) 2650-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