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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한국 | 북한 | ||
관계수립 | 修交日 :1962-07-26 | 修交日 :1974-07-05 | ||
공관개설 | 駐 요르단 | 駐 韓 | 駐 요르단 | 駐 북한 |
상주:1975.3.31 | 겸임: | 겸임: | 겸임:1994.7.1 | |
공관장 | 신연성(2005-03) | 사미르 나우리(2002-01-16) | 김병남(2004-02) | 라잡 수카이리(1999-09-09) |
겸임국 | 일본 | 시리아 | 중국 | |
주요협정체결 | -무역협정(72.11) -문화협정(77.10) -경제·기술협력협정(77.10) -항공협정(78.5) -투자보호협정(04.7) -이중과세방지협정(04.7) |
-문화협정(78.6) -방송TV 상호협력협정(80.2) -노동당-아랍이슬람운동당간 협력협정(94.9) -항공운수협정(94.11) -95~97 문화협정(94.12) -노동당-인민통일당간 협력 합의서(95.2) | ||
對남북한 통상 | 通商 (2003) - 수출: 1,511만불(인산칼륨, 염화칼륨) - 수입: 32,121만불(섬유류,철강제품,자동차) |
通商 (2003) - 수출: 0 - 수입: 52만불(섬유) | ||
남북한의 주요진출 | -KOTRA -현대,LG,대우,삼성 등 11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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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민수 | 僑 民 : 0名 滯留者 : 183名 |
僑 民 : 0名 滯留者 : 0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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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개관
아라비아 반도 북서쪽에 위치하는 왕국. 시리아·이라크·사우디 아라비아·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며 아카바만에서 홍해에 접하고 있다. 기독교의 성지인 동시에 이슬람교의 성지인 예루살렘 구시가가 있으나, 현재 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은 이스라엘에 점령되어 있다.
Ⅱ. 약사
나바티아인이 세운 페트라가 번성을 누리며 로마의 침략도 받았으나, 7세기 이후 이슬람 왕조들이 지배했다. 16세기 말에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하여 제1차 세계대전 말까지 투르크의 속주였다. 1918년에 투르크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 암만이 해방되었으나 국제연맹에 의해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1923년 5월에 영국 보호령인 트란스 요르단 왕국(동 요르단)을 성립했다. 45년에 아랍연맹에 가입했으며 46년 5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48년의 제1차 중동전쟁에서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병합했고 49년 6월 트란스 요르단 왕국에서 현재의 국명인 요르단으로 개칭했다. 51년 7월 동예루살렘의 알악사 사원에서 압둘라 국왕이 팔레스타인 이슬람과격파에 의해 암살당했다. 왕위를 계승했던 장자 탈랄이 병으로 약해져서 퇴위하자 53년 5월 탈랄의 장자 후세인 전 국왕이 즉위했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요르단강 서안과 예루살렘 구시가를 이스라엘에 점령당해 대량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유입되었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는 국내에서 큰 세력이 되어 요르단을 기지로 대이스라엘 공격을 강화했기 때문에 70년 2월 정부는 게릴라와의 내전상태([검은 9월단] 사건)를 겪은 후 71년 7월 게릴라들을 국외로 추방했다. 이로 인해 요르단은 아랍 여러 나라로부터 단교당하기도 했었다. 국왕은 72년 3월 요르단강 서안에서 수립된 팔레스타인 자치국과의 [아랍연합왕국 구상]을 발표했다. 73년 전쟁에서 골란고원 일부를 이스라엘에 점령당했으며, 74년 아랍 수뇌회의에서 요르단강 서안의 주권을 사실상 포기하여 아랍 여러 나라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의 관계는 개선되었다. 85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공동행동을 취하는 데(암만합의)에 합의했으나, 86년에 파기했다. 요르단강 서안에서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유입이 항상 문제가 되어 88년 7월에는 요르단강 서안의 통치권을 방기했다.
89년 11월 하원선거가 22년만에 실시되어 이슬람 복고를 주장하는 원리주의자 34명이 당선되었다. 국왕은 다음 달인 12월 바드란 전 수상을 수상 겸 국방장관으로 임명하는 새 내각을 발족시켰다. 93년 5월 성립된 마쟈리 정권 하에서 11월 복수정당제에 의한 하원선거가 56년이래 처음으로 실시되어 팔레스타인 잠정자치추진파가 정수 80의석 중 50의석 이상을 획득했다. 후세인 국왕은 94년 7월 25일 미국에서 라빈 이스라엘 수상과 [워싱턴 선언]에 조인한 후, 10월 26일 아카바에서 평화조약에 조인했다. 대이스라엘 평화조약은 아랍국가들 중에서 이집트에 이어 두 번째였다. 후세인 곡왕은 96년 10월 15일 제3차 중동전쟁 이후 29년만에 처음으로 요르단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자치구 예리코를 방문했다.
후세인 국왕은 99년 1월 25일 후계자로 예정되어 있던 친동생 핫산 황태자를 해임하고 그의 장남 압둘라 왕자를 새 황태자로 임명했다. 미국에서 암치료를 받고 있던 국왕은 2월 7일 암만의 군병원에서 서거하여 압둘라 황태자가 같은 날 새로운 국왕에 즉위했다. 황태자에는 이복동생인 함자 왕자를 임명했다.
Ⅲ. 지형·기후
국토의 80% 가까이가 사막 또는 반사막이다. 요르단강 서쪽에 요르단 지구대가 있으며 요르단강·사해·와디가 이어져 저지대를 형성한다. 또한 사해가 있는 곳에서 표고 미달 396m라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형을 이룬다. 저지대의 서쪽은 사마리아 고지·유대고원 등으로 동쪽은 북부가 시리아 사막에 이어진다. 남쪽은 표고 1700m에 이르는 고지이다. 기후는 요르단강 서쪽이 지중해성이나 국토의 대부분은 건조한 사막기후이다. 바다로의 유일한 출구는 아카바만이다.
Ⅳ. 정치
【국왕의 건강이 불안】 후세인 국왕은 92년 8월 20일, 미 미네소타주의 메이요 재단병원에 콩팥과 요도의 악성종양으로 인한 적출수술을 받고 29일 퇴원했다. 요도의 종양은 암성으로 메이요 병원의 스폭스만은 암성의 조직은 완전히 제거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재발의 가능성도 남아있어서 국민들 사이에는 국왕의 건강에 대한 불안이 높아지고 있다.
【親이라크 자세를 전환】 후세인 국왕은 92년 7월에 이라크에서의 석유수입을 대폭적으로 줄일 것을 지시했다. 11월 국왕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과의 우호관계를 직시하고 이라크 국내의 민주세력과의 협력관계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방침을 표명했다. 국왕은 2년이상에 이르는 UN의 對이라크 경제제재로 이라크 국민의 내핍생활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현황을 인식하고 [이러한 상황이 한시라도 빨리 종지부를 찍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간접적인 표현은 후세인 이라크 정부를 타도하고, 반정부세력이 이라크에 새 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발언인 것이다. 또한, 국왕은 걸프전쟁 이후의 [사담 옹호]의 정책을 앞으로는 전면적으로 전환하겠다는 자세를 분명히 했다.
【무기를 밀수한 국회의원 체포】 치안당국은 9월 이스라엘 점령지역에 무기를 보내던 국회의원 2명을 포함한 원리주의 집단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이슬람 청년의 전위]라고 이름을 밝힌 조직이 레바논지 알하야트지에 성명을 내고 이 사실을 인정했다. 치안당국은 중동평화 움직임에 반대하는 점령지의 원리주의조직인 [하마스]에 무기를 공급하지 말것을 명했다. 11월 10일 2명의 국회의원은 징역 20년의 실형판결을 받았다.
【정당법 성립】 57년이래, 정당의 결성을 금지해오다가 상하의원은 92년 8월 20일에 위원 중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정당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가결시켰다. 이 법에서 제시한 정당설립의 기준은 ①50명 이상의 당원 ②외국으로의 자금제공 금지 ③섹트주의 금지--등이다. 그 결과, 93년 11월에 복수정당제에 의한 하원선거가 행해졌다.
【정치범의 사면】 국왕은 11월 12일, 정치범 중 120명에 대해 사면할 것임을 발표했다. 그 중에는 무기밀수 사건으로 실형판결을 받은 국회의원 2명이 포함돼 있었다. 요르단에서 최고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원리주의조직인 [이슬람동포단]이 국회의원의 실형판결을 동포단에 대한 탄압으로 파악하고 대결자세를 표명하여 분위기는 혼란스러웠다.
【국왕의 시리아 방문】 94년 5월 18일의 크리스토퍼 미 국방장관의 시리아 방문을 받은 후세인 국왕은 이튿날인 20일에 시리아를 방문하여 아사드 대통령과 회담했다. 현안이 되고 있는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골란고원의 시리아로의 반환문제를 놓고 아랍 당사국간의 의견조정을 꾀했다.
【이스라엘과 전쟁상태 종결】 중동평화의 움직임을 가속화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한 후세인 국왕은 6월 22일 클린턴 미대통령과 회담하며 이스라엘과의 전쟁상태 종결을 위한 준비협의를 가졌다. 이스라엘과의 현안으로 남아있는 수자원, 국경·영토문제 등의 교섭은 이미 사무적인 단계에 이를 정도로 협의가 진행되었다. 국왕은 7월 25일에 다시 미국을 방문하여 양국의 전쟁상태를 종결짓는 [워싱턴 선언]에 합의했다. 후세인 국왕은 8월 8일, 요르단을 처음으로 공식방문한 라빈 이스라엘수상과 회담했다. 이것에 앞서 7월 24일에는 파레스 이스라엘외무장관이 방문하여 마쟈리 수상과 회담했다. 무역, 관광, 금융 등 새로운 중동경제권을 구축하기 위해 앞으로도 양국이 계속해서 협의해 나갈 것을 확인했다.
【입국규제 완화】 정부는 9월 이스라엘 점령지의 요르단강 서안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의 입국시에 의무로 규정했던 조사증의 사전취득제를 폐지했다. 인구의 6할을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더 이상의 유입을 막기 위해 입국을 규제했었다. 11월 1일에 이스라엘과의 국경을 개방하고 이스라엘 여권을 가진 관광객이 처음으로 요르단을 방문했다. 3개월 간은 이스라엘인의 입국을 하루에 550명으로 제한했다. 후세인 국왕은 10월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에 반대하는 원리주의 정당인 이슬람행동전선(IAF)를 강하게 비난하고 대결자세를 밝혔다. 이에 대한 항의데모를 일으킨 IAF의 관계자 몇 명이 체포되었다. 하원의 5분의 1을 차지한 IAF에 대해서 마쟈리 수상은 11월, 정치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모스크의 사용을 금지했다.
【평화조약에 조인】 요르단은 10월 26일 국경에서 가까운 아라바에서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에 조인했다. 중개역이었던 클린턴 미대통령 등이 앞장서서 만났다.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은 이슬람의 성지인 예루살렘의 관리를 놓고 요르단의 특별한 역할을 인정하는 조항에 반발 조인식에는 초대되지 않았다. 요르단은 12월 11일 텔아비브의 호텔에 주이스라엘 대사관을 개설했다.
【새 내각 발족】 전 육군 사령관인 샤케르를 새로운 수상으로 95년 1월 8일 새내각을 발족했다. 카바리티 새 외무장관은 후세인 국왕의 측근으로 시리아 정부에 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쟐다네 재무장관은 은행가로 재정재건의 베테랑이었다. 이번 내각은 이스라엘과의 평화교섭 촉진, 경제개혁을 중시하는 실무형 내각이다. 샤케르의 수상 취임은 3번째이다.
【내각 개편】 압둘라 국왕은 2000년 6월 18일 라왑데 수상을 교체하고 전 통상장관으로 국왕의 경제자문위원을 역임한 알리 아부 알-라게브를 새로운 수상에 임명했다. 라왑데 전수상은 개혁 신중파로 국왕과 의견의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제 자유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내각은 다음날 19일에 발족했다.
【테러계획한 6명에 사형판결】 요르단의 국가치안재판소는 2000년 9월18일 공모해서 미국인 등을 저격한 테러를 계획한 혐의로 기소되어 있던 팔레스타인계 요르단인 28명 중 6명에게 사형판결을 언도했다. 16명은 징역 7년 6개월부터 종신형, 6명은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들은 밀레니엄(천년기)을 경축하며 요르단의 관광지를 방문하던 미국인과 유대인에게 테러공격을 공모하는 등의 죄목으로 99년 12월에 적발되었다.
Ⅴ. 정치조직
【원 수】 국왕. 헌법상 내각의 협력을 얻어 행정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의회를 일방적으로 해산시킬 수 있는 등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의 회】 92년 8월 정당법에 의해 상하 양원이 성립되고 정당이 합법화되었다. 하원의 정족수는 80석. 중도무소속이 68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상원은 40석으로 국왕이 지명하며 각료, 대사 경험자와 학자 등으로 구성되어 명예적인 색채가 강한 명목적 존재이다.
【내 각】 수상은 국왕이 임명. 하원에 책임을 진다.
【사 법】 최고재판소, 고등재판소 2개, 지역재판소 7개, 종교재판소 2개 등으로 구성되었다. 최고형은 사형으로 국왕의 승인에 의해 집행된다.
【지방행정】 암만, 바르카, 카라크등 8개 행정구로 나뉜다.
Ⅵ. 외교
압둘라 국왕은 즉위 후, 주변 아랍국가 등 수뇌들과 회담을 중시하여 후세인 전국왕의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과시하는 것과 함께 시리아와 레바논, 쿠웨이트, 이란 등 관계가 냉각되어 있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동평화교섭에서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아라파트 의장을 지원하는 입장을 분명히하고 있다.
【중동 국가들과의 화해를 위한 노력】 걸프전쟁 이후, 악화된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관계회복을 위해 후세인 국왕은 8월 미국을 방문하면서 사우디의 반탈 駐미대사를 통해서 파하드 국왕에게 친서를 보내 관계회복을 꾀했다. 그러나, 파하드 국왕은 걸프전쟁 당시 요르단이 이라크를 지지한 점에 대해서 공식적인 사죄를 요구했고, 후세인 국왕은 이를 거부했다. 또한 같은 달, 쿠웨이트에서 요르단 사람을 차별대우한다고 요르단의 한 신문이 이를 비난했고, 이 보도에 대해 쿠웨이트 정부가 반발하여 양국간의 화해 분위기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그러나 관계가 악화된 요르단과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는 개선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요르단 외무부의 고위관리가 94년 9월, 90년부터 폐쇄중인 주쿠웨이트 대사관 재개를 위해 방문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관해서도 외무성이 같은 달 대리대사 레베르에 대신할 새 대사를 임명하고 대사관원의 증원을 발표했다. 걸프전쟁 종결 후 요르단의 외교과제로 남아있는 고립에서의 탈출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對이라크 관계】 사브리 에너지-광물자원장관은 2000년 1월 이라크를 방문하고 라쉬드 석유장관과의 사이에서 이라크가 전년과 마찬가지로 연간 480만톤의 원유, 석유제품을 요르단에 공급하는 협정에 조인했다. 공급량의 반(3억달러 상당으로 추정)은 전년과 같이 무상공여이다. 이러한 무상공여 조치는 걸프전 당시 주변국과의 관계악화를 감수하고 자신들을 지지해준 요르단 정부에 대한 성의 표시로 보여진다. 하라이카 산업무역장관과 이라크의 살레 무역장관도 같은 날 요르단이 연간 3억달러 상당의 식료 등을 이라크에 수출하는 무역협적에 조인했다. 이라크와 요르단의 무역은 유엔의 경제제재 대상 밖의 사안이다.
▼ 제재를 무시한 항공기 … 요르단의 각료와 국회의원, 의사 등 약 100명을 태우고 의약, 의료품을 실은 여객기가 9월 27일 바그다드에 도착했다. 바그다드에서는 이것이 이지기 수주 전에 러시아와 프랑스로부터 여객기가 도착하여 대이라크 제재를 해제시키기 위한 노력에 들어갔다. 그러나 반이라크 정서가 강한 미국와 영국에 의해 쉽게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 수상도 방문 … 라게브 수상은 11월 1일 요르단 수상으로서는 걸프전쟁 후 처음으로 바그다드를 방문했다. 2일 후세인 대통령과 회담하고 압둘라 국왕의 친서를 전달해 주었다. 걸프전쟁 후 아랍국가들 수뇌부가 후세인 대통령과 회담했던 것은 처음이었다.
【시리아 방문】 국왕은 7월 16일 샤케르 수상과 쟈벨 외무부장관을 대동하고 다마스커스를 방문하여 아사드 시리아대통령과 회담하며 중동평화 움직임에 대한 공동전략을 논의했다.
【중동평화교섭】 압둘라 국왕은 2000년 4월 23일 즉위 후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남부의 휴양지 에이라트에서 바라크 이스라엘 수상과 중동평화문제를 중심으로 협의했다. 6월에는 미국을 방문하고 백악관에서 6일 클린턴 대통령과 회담했다. 국왕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교섭추진을 지원하기로 하였으나, 9월말부터 격화된 자치구에서의 유혈사태로 인해 상황은 돌변하였다. 국내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대이스라엘 항의행동을 강화했게 때문에 10월 8일 신임 주이스라엘 대사를 당분간 부임시키지 않기로 결정하는 등 이스라엘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 외교관 피격 … 요르단 주둔의 이스라엘 외교관(부영사)가 11월 19일 암만의 자택 근처에서 총격당해 경상을 입었다. 12월 5일에도 암만 시내에서 이스라엘 대사관원이 총격을 당해 부상을 입었다.
【카다피 대령이 방문】 리비아의 최고 지도자 카다피 대령이 2000년 10월 4일 17년만에 요르단을 방문하고 남부 아카파의 궁전에서 압둘라 국왕과 회담을 가졌다. 여기에서 양국관계의 확대와 팔레스타인 정세에 관해 논의했다.
【국왕의 미국방문】 후세인 국왕은 92년 4월 12일 워싱턴을 방문하여 부시 대통령과 회담했다. 걸프전쟁으로 악화된 對미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양국의 우호관계확대를 원했다. 또한, 두 수뇌는 중동평화를 위해서 개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데에 생각을 같이했다.
【對미관계】 평화조약조인 당일인 10월 26일, 클린턴 미대통령은 암만에 들어와 요르단 국회에서 연설했다. 이슬람을 존중하는 자세를 표시하며 다른 종교인들과 문명의 [충돌]을 용인하지 말고 오히려 협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르단의 對미채무를 줄여줄 것이라는 것도 다시한번 약속했다.
【로마 교황의 방문】 바티칸의 교황 요한 바울로 2세는 2000년 3월 20일 중동의 기독교 성지순례를 위해 암만을 방문했다. 로마 교황의 요르단 방문도 처음잇는 일이었다.
Ⅶ. 경제
【재 정】 95년도 예산은 세출 16억 7000만디나르(전년도 당초예산에 12.5% 증가). 재정은 경제개발, 국방, 채무상환 등에 의한 세출이 증가되어 적자기조를 보이고 있다. 평화의 움직임을 실마리로 외국자본의 직접투자가 증가될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93년말의 대외누적채무는 65억달러로 높은 수준이어서 계속되는 채무상환 연기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94년 7월의 워싱턴 선언 이후에 요르단은 對미 7억달러, 對영 9000만달러 등 총액 9억달러 나머지의 채무를 감소시켰다.
대외채무는 72억달러(99년), 실업률은 정부발표에 의하면 15%, 국민의 30%가 빈곤층으로 경제대책이 과제지만 국민총생산(GDP)의 성장률은 97년 0.1%, 98년 1%, 99년 1.5%로 극히 낮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2000년 예산은 세입 28억달러, 세출은 31억달러.
【경 제】 요르단의 산업구조는 제3차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 구조적인 수입초과에 괴로움을 겪고 있다. 무역수지의 적자를 해외송금, 사우디아라비아를 시작으로 하는 걸프제국에서의 재정원조 등으로 보충하고 있다. 그러나 걸프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지한 것으로 인해 쿠웨이트를 시작으로 하는 걸프시장을 상실했다. 30만명이나 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귀국자의 급증으로 해외송금이 감소하고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현재 국제통화기금(IMF)의 지도하에 경제개선을 위한 계획을 짜는데 몰두하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에 의한 양국의 국경이 열리면서 물자의 유입, 관광 등이 활발해져 새로운 경제권이 움직일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사해 남부에 있는 아라바 계곡의 종합개발계획인 [평화의 계곡] 프로젝트이다. 이스라엘과 합동으로 경제, 에너지 개발을 행하는 것 외에도 고속도로, 운하 등도 건설, 사회자본을 정비하는 종합개발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교통·관광의 요지인 아카바의 합동개발도 진행할 계획이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94년 11월 아카바 공항을 양국 공통의 국제공항으로 사용하기 위한 조사를 개시하기로 합의했다. 실현되면 요르단 경제에 큰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요르단 정부는 2000년 1월 경제 자유화의 일환으로 국영전기통신회사인 요르단 텔레커뮤니케이션즈(JTC)의 주식 40%를 약 5억달러에 프랑스텔레콤 등에 매각하는 것을 결정했다. 요르단으로의 외국투자로서는 최대 규모다.
【산업·무역】 요르단은 2000년 4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맹.
요르단은 걸프전쟁 후 유엔의 승인을 얻어 이라크에서 하루 9만 배럴의 원유를 육로로 수입하고, 이라크는 그 대금을 주로 아카바만을 경유해서 식료, 의약품의 수입과 13억달러(97년 1년)에 달하는 대요르단 채무를 상환하는 데 일부 사용하고 있다.
주요 수출품은 인횡석, 화학비료 등이다. 인횡석의 생산량은 세계 제4위이다. 수입품은 원유, 철강, 기계류 등이다. 주요 수출국은 이라크, 인도, 사우디 아라비아, 중국이며, 수입은 미국, 이라크, 독일 등이다. 對이라크 경제제재에 동참하라는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92년초에는 이라크와의 무역량이 감소되었다. 요르단 타임즈에 의하면 걸프전으로 일시 악화되었던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무역량이 걸프전쟁 전의 80%까지 회복되었다고 한다. 93년의 무역수지는 수출이 9억 1600만달러, 수입이 31억 9100만달러로 22억 7500만달러의 적자가 났다. 99년의 무역은 수출이 14억 2300만달러, 수입이 36억 8200만달러.
【교 통】 아카바에 유일한 항구가 있다. 항공회사는 요르단 항공으로 암만, 아카바에 공항이 있다. 육로는 암만-아카바 사이를 [데저트 하이웨이]로, 카락, 페트라 등 사해 동안의 산지를 관통하는 [후세인 국왕 하이웨이]가 중심도로이다. 암만-다마스커스 사이의 헤쟈스 철도가 92년 6월에 재개되었다. 주2회 왕복이다.
Ⅷ. 사회·문화
【사 회】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사이의 요르단강에 설치된 [알렌비 다리](킹 후세인 다리)의 확장 공사 기공식이 7월 13일에 있었다. 확장공사는 [중동평화의 상징적인 사실]로써 일본정부의 무상자금협력으로 실시된 것이다. 암만 남서쪽 약 60km에 있으며, 요르단과 요르단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자치구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현재의 다리는 1개 차선밖에 없지만, 확장이 끝나면 4차선이 된다.
【교 육】 의무교육은 6세부터 초등과정(6년), 중등과정(3년). 암만 등에 10개의 대학이 있다. 성인 식자율은 87%(95년)이다. 유엔팔레스타인 난민구제사업기관(UNRWA)가 팔레스타인 난민의 어린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매스컴】 신문은 알-라이, 앗-두스트르, 알-아크바르(이상 아랍어), 요르단 타임즈(영어)가 있다. 방송으로는 국영 요르단 통신(PETRA), 하심 요르단방송(라디오), 요르단 텔레비젼이 있다.
Ⅸ. 군사
2년간의 징병제이다. 총병력은 10만 4000명이고, 예비군은 3만 5000명이다. 유엔평화유지활동(PKO)에도 파견. 94년 국방예산은 4억 1110달러, 99년 국방에산은 4억 8800만달러로 소폭 상승했다.
【육 군】 9만명이다. 장갑사단 2, 기계화보병사단 2, 근위여단 1, 특별여단 1, 보병여단 1개가 있다. 전차로는 M47/48/60, 치프텐, 센츄리온 등 1,246대가 있다. 장갑차는 1,400대가 있다. 야포 95문, 자주포 242문, 對전차 미사일 330기, 대공포 408기, SA지대공 미사일 126기가 있다.
【해 군】 480명이 있으며, 아카바에 기지가 있다.
【공 군】 1만 3400명이 있다. 작전기 106기, 무장 헬리콥터 16기, F5 전투기 50기, F16 전투기 16기, 미라쥬 F1 전투기 40기가 있다. 호크 지대공미사일 80기 등.
【그 외】 치안부대 1만명. 민병조직인 [인민군]이 3만 5000명(남자 16~65세, 여자 16~45세)이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군(요르단군 지휘하의 PLO)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