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칸트의 미적 관념과 수필의 자유로운 유희
박양근
일체의 관심에서 벗어나, 미美 앞에서 오로지 자유로워라!
문학은 감동의 통로이다. 문학이 추구하는 효용 중의 하나가 심미적 인식이라고 할지라도 문학의 본성은 아름다움 앞에서 감동하고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그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서 제초제 같은 여타 관점을 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직 아름다움으로만 아름답고 싶다는 심미적 자유를 누려야 한다. 이것은 사물의 본질을 해석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미적인 아름다움을 즐기고 말하고 표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그러한 반응을 미적 관점, 즉 심미적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미적 관념이라는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사물을 자유롭게 음미할 필요가 있다. 사물의 효용을 찾기에 앞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예술과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러면 수필과 심미적 아름다움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에세이로서 수필이 사회와 인간에 대한 논리적 토의를 펼치는 역할을 멀리할 수 없고, 수필이 시처럼 사물을 감미롭게 표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난 사유를 발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꽃을 꽃이라 부르지 않고 봄날의 얼굴이며 자연의 보조개라고 말하면서 즐겨야 한다는 뜻이다.
칸트는 사물에 대한 판단을 미적인 관념과 확정적인 관념으로 구분한다. 두 개념은 근본적으로 이율배반적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의 서문에서 미적 인식과 논리적 인식은 상호 대립한다고 주장한다. 미적 취미는 이성과 달리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다양하게 풀이하는 상상력의 일부이다. 미적 취미에 따르면 어떤 개념도 하나의 언어로 기술될 수 없고, 이해력을 독점할 수 없다. 이성 개념이 단순하다면 미적 개념은 다채롭다. 이성적 논증이 하나의 공식으로 무엇인가를 증명한다면 상상력의 표상은 색채놀이처럼 다양하고 때로는 모순마저 통합해 나간다.
사물을 그려내는 것을 색채놀이라고 생각해보라. 하늘이 푸르고 땅이 누렇다는 논리는 이내 사라진다. 하늘은 붉고 어둡고 희며, 땅은 푸르고 핑크 빛이 될 수 있다. 언어로 이루어지는 색채놀이는 모든 만물에 새로운 관념을 덧붙인다. 새로운 미적 관념이 이어질수록, 미적 관념이 드러날수록 인간의 정신적 삶은 풍요로워진다.
미적 관점은 자유롭고 분방한 묘사에 의하여 달성된다. 다양한 상상력으로 사물에 담겨 있는 수많은 “친족들의 표상들”을 가로 세로로 잇고 상하로 엮어 내는 것이 미적 관점이다. 그 점에서 미적 관점은 복합적이고 다원적이다. 칸트는 이런 수용력이 확정적 개념보다 더 많은 이미지를 생산한다고 ≪판단력 비판≫에 덧붙인다. 현대의 기호학도 예술적 묘사는 외시의적 성격이 아니라 공시의적 성격을 지닌다고 말하고 있다. 칸트의 미적 관념과 기호학을 합쳐 사물과 현상을 설명하면 개념은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다. 주제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것과 관계없이 미적 가치는 자연미에 연결된다. 수필에 있어서 일물일어설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친족적 표상”을 다양하게 응용하면 사물의 본성을 보다 심층적으로 밝힐 수 있다. 이것이 칸트가 말한 미적 개념의 목표이고 개인의 체험을 극대화하는 첩경이라 하겠다.
이번 문제작 평에서는 미美를 최대한 자유롭게 추구한 수필을 대상으로 삼는다. 선정한 최민자의 <꽃불>과 심선경의 <겨울, 자작나무 숲에 들다>는 다원적 상상과 언어의 다변성을 통섭한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문학적 언어뿐만 아니라 일상어와 전문어를 병합하여 칸트의 미적 관념을 수필에 응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여준다. 그러므로 언어에 의한 유희로서 미적 관념이 구현되는 경로를 두 작품에서 밝혀 보려 한다.
최민자의 <꽃불>
최민자의 <꽃불>은 10매 내외의 짧은 수필이다. 그렇지만 작품이 지닌 심미적 파장은 혁명의 불꽃만큼 강력하고 강렬하다. 펼쳐지는 인식과 언어의 표상은 끊임없이 고정관념의 벽을 부수고 선입관의 골을 메워나간다. 심미적 효과는 사물이 지닌 질료가 아니라 대상에 반응하는 작가의 지적 정서적 능력에 좌우된다는 점에서 해석력은 충격적인 효과를 발휘하고도 남음이 있다. 달리 말하면 작가의 미적 충동은 작품의 질량이 아니라 수필시학을 바탕으로 한 직관에 있음을 예증하고 있다.
최민자는 첫머리에서 봄철 개화에서 느낀 ‘그 무엇을’ 신의 조화造化로 기표한다.
하느님은 방화범. 그것도 상습적인 연쇄방화범이시다.
설악산, 오대산, 내장산 골골을 단풍나무 환한 불로 태우시더니 불장난에 맛을 들이셨는가. 이 봄에 또 불을 놓으신다.
최민자는 사건의 배경이나 복선을 장치하는 서두를 생략해버린다. 도전적일 정도로 “하나님은 방화범”이라는 명제가 즉석에서, 명쾌하게 내세워지고 있다. 이 낯선 명제는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지만 작가 특유의 미적 세계로 유인하는 효과를 동시에 발휘한다.
하느님과 방화범은 신분에서 나란히 할 수 없다. 하느님은 선한 창조주이고 방화범은 파괴적 범죄자이다. 하느님을 범죄자로 단죄하는 것은 절대적 신성에 위배된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방화, 파괴와 같은 부정적 언어로 규정할 수 없다. 그런데 최민자는 처음부터 종교의 고정관념과 편견에 반기의 깃발을 세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칸트는 미적 관념과 확정적 관념을 구분한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미美라는 개념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과 감수성을 바탕으로 사물을 풀이하는 상상에 가깝다. 하느님의 전능인 창조를 파괴에 일치시킴으로써 봄에 피는 꽃과 가을에 떨어지는 단풍을 꽃불이라는 매체로 결속한다. 하느님이 봄꽃과 가을 단풍이라는 상이한 자연현상에 불을 놓는다는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봄꽃을 “투척한 별똥별, 실성한 불길, 널름거리는 혓바닥” 등으로 은유하고 꽃기운을 “사납게 짖으며 등성이를 왈왈 기어오른다.”라는 활어법으로 묘사하여 신의 불꽃에 장난기를 부여한다. 그 결과 “하느님은 방화범”이라는 명제가 타당성을 얻는다. 방화 행위가 이끌어낸 결론은 “이 도시가, 봄이 위험하다.”이다.
최민자는 가을처럼 봄이 위험한 계절임을 직감하고 있다. 왜 봄이 위험한가. 봄이 위험한 이유는 개화가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봄철이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작가는 아름다운 벚꽃축제를 응시하는 홍채를 최대한 확장하여 심안을 해방시켜 새로운 인식에 다다르고 영성의 힘을 빌려 낯선 언어를 계속 발굴해나간다. 마치 관념의 갱도를 뚫고 들어가 전혀 다른 두 언어라는 금속을 동시에 채굴하는 것과 같다. “하느님”과 “방화범”이라는 이질적인 언어에서 찾아낸 것은 꽃과 불이 합친 “꽃불”이라는 낯선 언어이다. “봄”과 “위험”이라는 구체어와 추상어도 하나로 합쳐지면서 새로운 미적 개념을 만들어낸다. 봄은 인간을 유혹하는 꽃놀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의 미적 관념이다.
왜 자꾸 불을 지르시는가. 오줌싸개 소년도 네로 황제도 아닌데 당신의 불장난으로 환해지는 세상에 무량한 희열을 느끼시는가. 불심과 탐욕으로 얼룩진 세상, 황홀한 불길로 전소해버리고 싶으신 건가.
최민자는 만개한 벚꽃을 신의 불장난으로 간주한다. 꽃 풍경이 신의 불장난으로 관념화됨으로써 자연 현상은 역사적 종교적 우화마저 합친다. 그 결과 네로의 로마 방화는 “얼룩진 세상을 전소”시킨다는 종말론까지 다다른다.
신처럼 인간도 불장난을 저지르고 싶어 한다. 대물림된 불장난에는 황홀한 충동성이 담겨있다. 아이나 어른이나 불의 충동성이라는 신이 물려준 유전자를 억제하지 못한다. 실제로 신의 불에서 축복과 저주가 함께 인식되어 인간의 불이 자연스럽게 끌려나온다. 그 미적 유희가 친족적 표상을 모두 모아 봄철 꽃을 “소통의 도구이고 욕망의 심부름꾼”으로 만들어버린다. 나아가 가슴에 불이 당겨진다.
이제 알겠다. 하느님이 불을 놓은 진짜 이유 말이다. 화목火木으로 구들을 덥히듯, 사람 사람의 가슴 안쪽 쇳덩이 같은 내연기관에 불기운을 옮겨 붙이고 싶으신 거다.
꽃불 이야기는 변증법을 통하여 신의 신분을 바꾼다. 자연의 방화범인 하느님이 차디찬 인간의 가슴에 불기운을 옮기는 화부火夫라는 것이다. 고마우면서도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인간은 자체의 내연기관이 아니라 신이 내리는 불기운으로만 마음을 덥힐 수 있다는 것, 이 점에서 작가는 인간에 대하여 염세주의자이다. 자연의 모든 풀을 불쏘시개로 삼아 인간의 몸뚱어리를 뜨겁게 달구려는 신의 행위를 “인간이란 특이동물을 지구상에서 멸종시키고 싶지 않다.”라는 연민의 증거로 해석하듯 신에 대한 경배는 지극히 순종적이다.
벚꽃축제를 지켜보는 최민자는 신의 자비를 잊어버린 인간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지켜본다. 그 자태는 신의 대행자를 연상시켜준다. 자신에게 부여된 미적 관념을 빌려 식어버린 인간의 몸뚱이가 새롭게 달아오르기를 소망하기도 한다. 그 점에서 작가는 염세주의적 휴머니스트이기도 하다.
최민자의 <꽃불>은 봄꽃 풍경을 강렬하면서도 심미감이 충만한 언어로 묘사한 작품이다. 상호 충돌하는 창조와 파괴를 아름다움으로 조합하여 소생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생성하였다. 이렇듯 <꽃불>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옹호하는 칸트의 미적 관념을 수필로 구현하고 있다.
심선경의 <겨울, 자작나무 숲에 들다>
신은 자연을 아름답게 창조하셨다. 인간을 그 속에서 살며 생각하도록 허락하셨다. 자연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개념에는 자연과 인간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자연을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고 믿는 것이다. 반대로 자연을 아름답다고 여김으로써 인간은 신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 선후관계가 어떠하든 인간은 자연 속에 들어가면 무엇인가 실현되리라는 꿈을 꾼다. 꿈은 자연이 숭고하다는 미적 관조를 낳는다. 이때가 되면 인간은 자연과 자연스럽게 융합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기 시작한다.
심선경의 <겨울, 자작나무 숲에 들다>는 앞서 다룬 최민자의 <꽃불>이 품고 있는 미적 이미지인 “봄, 벚꽃 불놀이를 지켜보다”와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미시령 오르막길 바람이 차다. 살갗에 닿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칼날 같다. 감각이 무뎌진 다리를 끌며 얼마를 걷고 또 걸었을까. 어느 순간, 홀연히 눈앞에 나타난 자작나무 숲을 만난다.
두 작품은 외적 구조에서 상이하다. 계절이 다르고 꽃과 나무라는 대상이 다르다. 군중과 개인이 등장하는 차이도 발견된다. 하지만 대상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두 작가는 자신이 지닌 모든 미적 경험과 에너지를 각각의 미적 관점에 집중시킨다. 벚꽃처럼 심선경의 자작나무에도 모든 친족적 표상들이 모여든다. “홀로 빛남, 터진 수피, 옹골찬 나무, 시간의 겹, 혁명의 냄새, 귀족적 자태”라는 의미소가 자작나무에게 바치는 작가의 연서를 완성해나간다. 자유로운 언어를 구사하는 심선경의 미적 활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칸트가 말한 미적 개념에 접근한다. 이러한 경로를 따른 겨울 자작나무는 “백색으로 꼿꼿하게 선 집단 속의 초연한 품격”을 당연히 지닌다. 미시령 칼날 같은 겨울바람 속에서도 “영혼의 흰 뼈”를 발라낸 듯 귀족적 기립상을 보여주는 자작나무의 모습은 어떠한가.
칼바람에 생채기가 났는지 마른 나무껍질은 쩍쩍 소리라도 낼 듯 등짝이 거칠게 갈라져 있다. 터진 수피 속으로는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지난 계절의 묵은 때를 모두 벗겨내기라도 하려는지 차곡차곡 겹쳐놓았던 종잇장이 들뜬 것처럼 나무껍질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자작나무 껍질이 거칠고 갈라지고 터져있다. 단적으로 아름답지 않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정관념은 추醜함은 미적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심선경이 만난 그 나무는 “홀로 빛난다.” 홀로 빛남으로 거룩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이것은 작가의 미적 활동으로 이루어진 결과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아름다움을 다루는 미적 관념은 과학적 인식과 다르다. 작가는 식물학이 아니라 미학으로 나무를 바라봄으로써 자작나무 본연의 아름다움에 접근한다. “터진 수피 속으로의 맨살”에서 느낀 것은 남루한 껍질을 벗어버릴 때 여린 속살은 더욱 여문다는 미의식이다. 자연의 품에서 자연을 거역하는 기개를 표현해주는 것은 고독, 고요, 견인, 인내, 초연이라는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은 자작나무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친족적 표상이다. 더불어 자작나무 숲에 사색의 공간이 마련된다.
도심 한가운데를 지나면서 나도 몰래 종종 멈춰 서게 되는 때가 있었다. 그곳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내 모습은 의지할 곳 없는 빈약한 나무 한 그루였다. 하늘을 찌를 듯한 빌딩이 즐비한 거리에서 왜 나는 숲의 배후로 버티고 서 있는 이 산이 그토록 그리웠을까. 삶은 내게 쉬지 말고 길을 가라고 재촉하지만 내겐 멈춰 쉬는 시간이 필요했다.
자작나무 숲에 선 심선경과 도심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심선경이 겹치면서 새로운 자아를 생성한다. 그것은 미적 개념을 추종하는 도제로서의 화자이다. 인간은 어쩌면 활보할 때가 아니라 걸음을 멈추고 생각할 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지도 모른다. 쉼 없이 달려온 인간은 홀로 솟아 있는 자작나무 앞에서 빈약한 자아를 자각할 수밖에 없다. 반성과 반추를 통하여 과거의 껍질을 종잇장처럼 벗고 자작나무의 순연한 껍질로 재무장하기를 원한다. 그때만이 고독은 화합과, 초연은 공존과, 견인은 타협이라는 개념과 합쳐질 수 있다.
합일은 누가 이루어낼 수 있는가. 자연을 창조한 하느님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미적 관념을 실천하는 것이다. 겨울 자작나무처럼 거듭 껍질을 벗겨 낼지라도 인간의 아름다움은 목질에 있으므로 정신적 허물벗기로 나타나야 한다.
그 변신은 험난하다. 작가가 “자작나무에서는 혁명의 냄새가 난다.”라고 말하고, 인디언들이 “서 있는 키 큰 형제들”이라고 한 말을 빌리는 동기도 다름 아닌 뼈를 드러내는 변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흰 가슴으로 하늘바라기하며 마냥 서 있는 자작나무”와 동일시 할 수 있다.
앞서 다룬 <꽃불>이 신의 방화와 창조를 종교적 경건함으로 유도하였다. 심선경도 자작나무에 대한 경이감을 종교적 신성에 일치시킨다.
저녁 어스름에 상록수림을 배경으로 빛나는 자작나무 숲의 광휘, 숨이 막혀 버릴 듯 거대한 존재감으로 나를 압도한다. 지금은 헐벗은 숲이지만, 지난 가을에 만난 자작나무 숲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 빛을 받아 지극히 섬세하고 고운 올로 새긴 잎사귀의 반짝임은 태양을 향한 자작나무의 연서戀書였다.
가을 저녁 자작나무 숲에 비친 어스름한 빛을 작가는 “정령이 뿜어낸 신비로운 기운”으로 느낀다. 나아가 그 기운을 “흔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라고 설명한다. “흔하지 않는 아름다움”은 지상의 존재들이 지니고 있지 않는 것, 곧 신이 지닌 아름다움을 뜻한다. 신과 자연과 자아가 일체를 이룰 때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이 완성된다. 그 미적 진리를 자작나무 숲에서 발견한 심선경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자리에 자신을 주저앉힌다.” 물상으로서 개체를 버리고 미적 개념으로서 자아를 새롭게 탄생시키는 것이다. 겨울 자작나무 숲의 미적 관념도 여기에서 완결한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찾으려면 제한 없는 연상과 상상과 언어의 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성적 굴레를 벗어난 자유로운 유희로서의 미적 확장이다. 미국의 초월주의자 에머슨도 <자연론>(1836년)이란 에세이에서 ‘자연은 신성의 현현’임이므로, 자연을 신성으로 예찬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동양의 전통 미학도 ‘자연의 경지’를 인간사보다 우위에 두었다. 그렇다면 자연을 신성시하는 미학주의자들이 찾아낸 자연은 “꽃은 절로 붉구나(花自紅).”라는 절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작가는 자연의 자연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심미주의의 길을 끊임없이 밟아나가야 한다. 고정관념과 선입견의 울타리를 넘을 때 자연은 문학의 언어에게 문을 활짝 열어준다.
“따르기 쉬운 고정관념의 길을 버려라.”
이것이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은유하고 있는 가르침이 아닐까 싶다.
<작품>
꽃불
최민자
하느님은 방화범, 그것도 상습적인 연쇄방화범이시다.
설악산 오대산 내장산 골골을 단풍나무 환한 불로 태우시더니 불장난에 맛을 들이셨는가. 이 봄에 또 불을 놓으신다. 밤새워 별똥별들을 투척하셨는지 목련나무 가지 위 하얀 촛대들을 잘팍잘팍 엎지르신 건지 뒷마당 박태기나무에, 재 넘어 복숭아 과수원에, 잡목 성성한 산기슭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실성한 불길은 사납게 짖으며 등성이를 왈왈 기어오른다. 겨우내 바싹 말라 화력 좋은 산들을 널름거리는 혓바닥으로 집어삼키더니 강 건너 도심에까지 파고들 기세다. 아파트 마당에도, 골목 안에도 불기운이 번져있다. 이 도시가, 봄이 위험하다.
왜 자꾸 불을 지르시는가. 오줌싸개 소년도 네로 황제도 아닌데 당신의 불장난으로 환해지는 세상에 무량한 희열을 느끼시는가. 불신과 탐욕으로 얼룩진 세상, 황홀한 불길로 전소해버리고 싶으신 건가.
머리에 꽃을 꽂은 아이가 유모차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짝퉁 가방과 파마머리도 인파 속으로 섞여든다. 벚꽃 축제에 모여든 사람들은 꽃이란 걸 생전 처음 보았다는 듯, 북새통 속에서도 호들갑을 떨며 탄성을 지르고 사진을 찍어댄다. 도시의 벚꽃이 노점상들을 한철 반짝 먹여 살린다.
키가 멀쑥한 청년 하나가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몇 걸음 앞서 여자와 걷고 있다. 교회 친구나 서클 선후배쯤 될까. 엊그제, 아니 조금 전에 처음 만난 사이일까. 주먹 하나쯤 떨어져 걷는 폼이 연인 사이는 아니다. 솔기 터진 스웨터처럼 비주룩이 웃음을 흘리는 청년도 흥성거리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꽃 같은 사랑 하나 제 청춘에 찔러 넣고 싶을 것이다. 삼십여 년 전, 남편이 처음으로 데이트를 신청한 것도 벚꽃축제에 함께 가자는 말이었다.
소통의 소도구이고 욕망의 심부름꾼이기도 한 꽃. 이제 알겠다. 하느님이 불을 놓는 진짜 이유 말이다. 화목火木으로 구들을 덥히듯, 사람 사람의 가슴 안쪽, 쇳덩이 같은 내연기관에 불기운을 옮겨 붙이고 싶으신 거다. 해묵은 가지와 갓 돋은 풀을 모조리 불쏘시개 삼아서라도 계산에 지치고 속도에 시달려 차갑게 식어버린 불연성不燃性 몸뚱어리들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려는 것이다. 심장에 꽃불이 일지 않고는 번식이 어려운 특이동물을 아직은 지구상에서 멸종시키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수필과비평≫, 139호.
<작품>
겨울, 자작나무 숲에 들다
심선경
미시령 오르막길 바람이 차다. 살갗에 닿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칼날 같다. 감각이 무뎌진 다리를 끌며 얼마를 걷고 또 걸었을까. 어느 순간, 홀연히 눈앞에 나타난 자작나무 숲을 만난다. 유독 다른 나무들보다 이른 시기에 잎을 떨어내고 저 멀리 흰 기둥과 흰 가지만으로 빛나는 자작나무는 영혼의 뼈를 발라낸 듯 하늘 높이 솟아 있다.
단 하나의 이파리까지 모두 지상에 내려놓은 빈 나무가 아름드리의 부피감 없이도 저리 빛날 수 있는 것은 자작나무의 어떤 힘 때문일까. 어둠과 빛이 한데 스며들어 그 경계조차 허물어진 산기슭에서 자작나무는 홀로 빛난다. 하지만 그 빛은 적막을 품어 눈부시지 않고 다만 고요할 뿐이다.
자작나무 숲에 하얀 겨울바람이 분다. 바람에 색깔이 있다면 이곳에 부는 바람은 분명 하얀 바람일 게다. 빽빽하게 무리지어 선 나무들이 서로의 가지를 붙들고 있다. 혼자서는 매서운 바람과 찬 서리를 견딜 수 없어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선 것일까. 칼바람에 생채기가 난 듯, 마른 나무껍질은 쩍쩍 소리라도 낼 듯 등짝이 거칠게 갈라져 있다. 터진 수피 속으로는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지난 계절의 묵은 때를 모두 벗겨내기라도 하려는지, 차곡차곡 겹쳐놓았던 종잇장이 들뜬 것처럼 나무껍질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저 많은 나무들이 함께 살아가는 숲에서 자작이 유독 빛날 수 있는 것은 한 계절 너끈히 견뎌준 남루한 껍질을 스스로 벗고 북풍한설에 여린 속살을 단단히 여물게 했기 때문일 게다. 흰 몸통의 군데군데는 저희들끼리 몸을 부딪쳐 가지치기한 자리인 양, 흉터처럼 남아있는 옹이가 유난히 크고 짙어 보인다. 거대한 자연의 품에 한 그루의 옹골찬 나무로 우뚝 서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든 듯하다.
숲으로 들어와, 인내의 상처를 화인火印처럼 몸통에 남긴 채 당당하게 서 있는 자작나무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중도에 산행을 포기했을지 모른다. 먼 곳에서 바라보았을 땐, 그저 신비롭고 아름답게만 보였던 자작나무 숲. 가까이 다가와 보니 알겠다. 저 빛나는 둥치를 갖기 위해 얼마나 혹독한 바람을 맨몸으로 맞섰을지, 부러진 가지가 스스로 낸 아린 상처 자국에 얼마나 숱한 시간의 겹을 덧입혔을지 이제야 비로소 나는 알겠다. 쓰러진 나무의 그루터기에 앉아 느슨해진 등산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맨다. 추위와 피로로 더 이상은 한 발짝도 옮길 수 없을 것 같았던 발걸음을 조심스레 내딛는다.
복잡한 도시 속, 출퇴근길의 행렬에 끼여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 계절이 어떻게 바뀌고 오늘 떠오른 해와 어제 떠올랐던 해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도 모른 채 살기 위한 집념으로 일의 노예가 되어 끌려 다녔다. 도심 한가운데를 지나면서 나도 몰래 종종 멈춰 서게 되는 때가 있었다. 그곳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내 모습은 의지할 곳 없는 빈약한 나무 한 그루였다. 하늘을 찌를 듯한 빌딩이 즐비한 거리에서 왜 나는 숲의 배후로 버티고 서 있는 이 산을 떠올렸을까. 삶은 내게 쉬지 말고 길을 가라고 재촉하지만 내겐 멈춰 쉬는 시간이 필요했다.
오래된 흑백필름 영상처럼, 자작나무의 허물벗기는 지난했던 내 삶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어릴 적 맑고 초롱초롱했던 아이의 눈망울은 어디로 가고, 온갖 풍파와 세월의 더께를 뒤집어써서 이제는 본모습이 어떤 형상인지도 알 수 없는 내 껍질은 도대체 몇 겹으로 싸여 있는 걸까. 껍질을 얼마나 벗겨내야 그 속에 숨은 참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 늦지 않았다면 자작나무가 껍질을 벗듯 나를 감싸고 있는 겉껍데기를 하나씩 모두 벗겨내고 싶다. 내 삶의 궤적 가운데 내밀한 튼튼함은 더욱 단단히 자라게 하고, 씻지 못할 허물과 아픔은 모조리 밖으로 훌훌 털어내어 버리고 싶다. 돌아보면 한 뼘도 못 되는 길을 걸어오면서 상처 같지도 않은 상처를 들쑤시며 괴로워했다. 날마다 어깃장 놓는 삶이 두려워 맞서기보다는 달아나려고만 했던 못난 나를, 아늑해진 겨울 숲이 가만히 품어준다.
자작나무에선 혁명의 냄새가 난다. 러시아 혁명에서 빨치산들이 피로에 지쳐 돌아오던 아지트도 자작나무 숲이었고, 닥터 지바고가 달빛을 틈타 혁명군들을 등졌던 곳도 자작나무 숲이었다. 인디언들은 그 나무를 ‘서 있는 키 큰 형제들’이라 부른다. 나무의 직립성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하기도 힘들지 싶다. 오로지 태양을 향해 곧게 선 나무가 자작나무뿐일까만 그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면 저리도 흰 가슴으로 하늘바라기하며 마냥 서 있을까 싶다.
자작은 이름만큼이나 귀족적인 자태를 뽐내지만 결코 오만하거나 배타적이지는 않다. 또한 유아독존, 독야청청하지도 않다. 만약에 그렇다면 숲에서 멀리 떨어져 홀로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어야 옳다. 무리로부터 떨어져 혼자 서 있는 자작나무는 곧게 자라지 못한다. 그래서 서로 어깨 맞대어 함께 살아가는 것인가 보다. 가끔은 옆에 선 나무와 부딪치며 자연스럽게 가지를 정리한다. 저들끼리 경쟁하듯 하늘로 곧추서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자 바람막이다. 그러면서도 한 그루 한 그루가 독자적 자존으로 빛을 발한다.
숲에 군락을 이룬 자작나무는 하늘 높이 우뚝 솟아오르고도 내려보는 일이 없고, 앞에 서서도 뒤에 선 나무들의 배경이 될 줄을 안다. 서로 경쟁은 하지만 같이 살아가는, 그래서 더 충일한 존재감이 되는 나무. 함께 있어 아름다운 것들은 ‘나’를 버리지 않고도 ‘우리’가 된다는 것을 자작나무 숲이 내게 넌지시 일러주는 듯하다.
저녁 어스름에 상록수림을 배경으로 빛나는 자작나무 숲의 광휘, 숨이 막혀 버릴 듯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 빛을 받아 지극히 섬세하고 고운 올로 새긴 빗살무늬는 태양을 향한 자작나무의 연서다. 남들은 그 눈부신 광채를 햇살의 반사광이라 말하지만 나는 그 빛이 자작나무 숲의 정령이 뿜어낸 신비한 기운이라고 믿고 싶다. 산그늘에 스스로 돋을새김하는 자작나무의 빛살 사이로 슬쩍 끼어든 바람을 타고 잔가지들이 하느적거린다.
유난히 환하고 흰 빛의 공간. 저 시린 숲의 빛깔을 그냥 하얗다고 말해버리기엔 무언가 많이 부족하다. 여기에 있으면 나도, 자작나무도 현실과는 너무도 먼 거리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자작나무 숲이 만들어낸 그 흔하지 않은 아름다움은 지상의 다른 모든 존재들처럼 내가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우연하고 무상한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한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 있고 들리지 않아도 소리 내는 것이 있는 것처럼.
자작나무 숲을 돌아나오는데 누군가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목소리는 이 거대한 자연의 품에서 단지 하나의 사물로서 존재하는 내 이름을 나직이 불러주었고 그는 내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자리에다 나를 주저앉혔다. 어떠한 대상도 여기서는 고요히 서 있거나 앉아있는 하나의 물상에 지나지 않았다. 자작나무들의 들숨은 마침내 땅속의 먼 뿌리까지 닿고 그곳을 돌아나온 힘찬 날숨은 온 산맥을 굽이치며 함께 출렁인다.
-<2013년 한국의 좋은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