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英祖朝(1724~1776) , 正祖朝(1776~1800)에 이르러서는 가곡, 판소리, 기악 독주곡 등 다양한 음악문화가 창출되던 시기이다. 조선후기의 琴譜가 상당수 전하는데 특히 18세기 영정조 연간의 琴譜도 상당수 전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조선후기 사대부들의 풍류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영정조대는 국책 음악 정비 사업 역시 뚜렷한 전기를 이루는 시기이다.영조조 국가 기관을 중심으로 한 음악 관련 사업으로는 영조 19년(1743년)에는 악학궤범 재간, 영조 20년((1744년)에는 악기조성청 마련, 국조속오례의·국조속오례의서례 발간, 영조27년(1751년)에는 국조속오례의보·국조속오례의보서례 등을 통해 궁중의례와 음악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영조조 편찬된 궁중 연향 의궤로는 {갑자년 진작의궤}(영조20, 1744)와 {을유년 수작의궤}(영조41, 1965)가 전한다. 특히 갑자년 진연의궤는 당시의 음악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당시 관찬 악보로는 <속악원보>(1750년대 추정)·<大樂後譜>(영조35: 1759)가 전하며 민간 악보로는 <백운암금보>(1724-1791) 등이 전한다.
또한 정조조에는 <春官通考>·<詩樂和聲>(정조2년, 1788)·<樂通> 등이 발간되며, <신작금보>(?), <한금신보>(1724), <고대금보>(1791이후), <낭옹신보>(1728), <어은보>(1779?),<拙庄漫錄>(1786), <협률대성>(1786이후), <고대금보 A>(1791) 등의 당시의 민간 악보가 상당수 전하고 있다.
이재 黃胤錫(1729-1791)은 박학다식하여 그의 일기 <이재난고>를 통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상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의 관직 생활동안 예악에 대한 관심과 琴士들과의 교류를 통해 음악과 관련되는 기사도 상당수 전한다. 이재가 宗簿寺 직장(1770), 棒組官으로 근무하는 시기와 思陵·祭祈晴·翼陵(1771.1)의 제관으로 재직 당시에는 宗廟祭禮의 절차, 악곡명 등에 대한 기록이 많다. 이때 당시 그는 掌樂院에서 근무하는 金丈과 빈번한 서신, 왕래 등을 통해 교우하며 김장이 소지한 琴譜를 상당수 빌려 필사하고, 음악이론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다. 이재(당시 50세)가 한성부 동부 도사로 재직하다가 長陵 令으로 좌천(1778. 12: 정조12)되는 시기에도 琴譜를 필사하며 도목정을 기다리며, 樂論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 이와같이, <이재난고>를 통해 宗廟, 琴 뿐만 아니라, 기생들과의 교류, 府君堂 등 무속, 산대놀이 등 18세기 당시의 음악문화를 보다 잘 알 수 있다. 본글에서는 이재 黃胤錫(1729-1791)의 일기 <이재난고>를 중심으로 18세기 영조, 정조조의 宗廟祭禮樂, 사대부의 풍류생활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18세기 宗廟祭禮樂
종묘제례악이란 조선시대 종묘에 제사드릴 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를 총칭하여 종묘제례악이라고 한다. 종묘라고 하면 정전(正殿)을 지칭하는 것이나 사실은 그 서편에 조묘인 영녕전(永寧殿)이 있어 두 사당으로 이루어졌다. 18세기 영조·정조 당시의 종묘제례와 관련된 원전 자료로는 국조속오례의(영조 20년, 1744), 국조속오례의보(영조 27년, 1751), 辛酉 종묘의궤 속록(영조 17년, 1741년), 庚寅 종묘의궤 속록(영조46년, 1770년) 등이 있다. 이외에도 영조·정조실록, 국조오례의(성종5년, 1474), 춘관통고(정조) 등 前後代에 편찬된 자료를 통해 당시 제례악에 대한 실상을 알 수 있다. 이재 40세 때 의영고 奉事로 있을 때 정지순을 방문하여 율려를 토론하기도 하고, 당시 掌樂正 金丈과의 긴밀한 교류는 그의 음악적 식견을 짐작할 수 있다. 이재가 42세 되던 해 3월(영조46년, 1770년)에 思陵의 제관으로 차출되고, 이후 祭祈晴, 崇陵, 獻陵, 翼陵에 제관으로 차출되면서 祭禮의 절차와 樂에 기술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러나 제례의 절차와 역사 등에 대한 기술이 많고 제례악에 대한 실증적인 언급은 기대만큼 많지는 않다. 다만 몇 가지 기록을 통해 영정조 당시의 구체적인 실체를 접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한국 음악사 기술에 중요한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먼저 이재가 기록한 악현, 佾舞, 악기, 궁중 宴樂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1. 樂縣
영조 44년(戊子 1768) 三更 4시에 社稷에 大享을 행한 후 齋郞과 直長 金致誠과 더불어 예를 올린 후 서문으로 나오면서 社稷 악기를 대강 본 것을 기록하였다. 사직에는 2개의 단이 있는데 神位는 동향과 나란하며 서문은 남방이다. 그가 대략 본 樂院의 악기는 登歌는 단의 중문 안에 존재하고, 編鐘·編磬 각 1대, 琴과 瑟은 각각 2대, 그리고 笙簧 1대가 있어(琴은 줄이 일곱이다), 五禮儀制度와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한 五禮儀가 성종 5년(1474년)에 편찬된 <국조오례의서례>의 제도와 다르다. <국조오례의서례>의 琴과 瑟이 각각 6 대이나, 이재가 본 금슬은 정조조 <춘관통고>의 登歌 琴瑟의 수와 같다. 따라서 당시 琴瑟의 숫자로 미루어 정조조 登歌는 영조 44년(1768년)에 이미 시행되고 있던 악현임을 확인할 수 있다.
2. 樂器
1) 編磬과 編鐘
아악의 부흥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영조(1725∼1776)에 의해 영조 19년(1753년)에 <樂學軌範>이 복간되었다. 그리고 영조의 명을 받아 서명응이 세종과 세조 때의 음악을 모아서 영조 35년(1759년)에 관찬악보인 ,대악전보>와 <대악후보>를 편찬했다. 아악기의 제조는 주로 임시관청이었던 악기도감과 악기조성청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규모는 조선전기에 비하여 아주 초라하였다. 영조 20년(1744년)에 편종·편경 2틀씩, 정조1년(1766년)에 경모궁 악기조성청에서 편종·편경 각 2틀씩 제조되었고, 순조3년(1803년) 사직고의 화재로 편종 8매, 편경 17매만이 제작되었다. 이재는 義盈庫 奉事로 재직하면서 음악 역사와 宗廟 악기에 관련된 내용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숙종 8년(壬戌 1682)에 영녕전과 종묘의 훈과 어가 없어 악원에서 제향악기를 보충했던 사실을 다시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영조 당시 편종·편경이 오래되어 훼손된 점에 대한 배경과 상황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史料 1】 숙종 壬戌에 永寧殿 종묘 堂上·堂下樂을 나란히 塤과 의 악기가 없어 樂院에 명하여 塤 2部와 3부를 만들어 祭享악기를 채우도록 하였다. 영조 17년(辛酉, 1741)에 새로 皇壇악기를 만들었다. 일찍이 매번 제사에 南北諸壇의 악기를 옮겨 사용하였다가 이에 이르러 새로 만들도록 명하였다. 이때 묘사, 산천, 창덕궁, 창경궁에 편경과 편종은 '癸丑'이라고 새겨놓은 것이 많았다. 세종 계축년에 만든 것이다. 또한 社稷樂器庫의 먼지 속과 備邊司 우물 속에서 석경 24매를 얻었는데 그 중에서 '癸丑'이라고 새겨놓은 것은 15개로, 樂院 누각 위에 보관하였다. 이때 남양에서 옥을 채집한 이래 돌의 거칠고 트임을 다스려 사용하기 못하는 것이 많았다. 이에 누각에서 '癸丑'이라고 새겨진 것을 거두어 두드려보았다. 또한 떨어져 나가 훼손된 지 오래된 것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오직 淸黃鐘·淸夾鐘·淸大呂·應鐘·南呂·林鐘이 律林과 鐘石에 부합되고 누락됨이 없이 소리가 났다. 또한 淸越과 그 나머지 10매는 새로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악학궤범 特鐘에 註하여 말하기를 營造尺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營造尺에 근거하여 종을 주조하였으나, 옛 종과 비교하여 약간 길었다. 임금이 명하여 모두 폐기하도록 하고, 옛 종의 주조법에 근거하게 하였다. 임금이 또한 새로 악학궤범 서문을 짓고, 궤범을 중간하고, 李延德을 掌樂의 正으로 삼고 掌樂의 일을 맡도록 하였다.
즉 위의 글을 통해 영조20년(1744년)에 악기조성청이 마련되고, 진연의궤가 행해졌으나 영조 17년에 악기를 옮겨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불편을 개선하기 위해 새로 악기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묘사, 산천, 창덕궁, 창경궁의 편종과 편경에 글자 '癸丑'이 새겨져 있음은 세종 15년(1433, 癸丑)년 이후에 편종과 편경이 그대로 쓰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은 영조 20년에 악기조성청이 마련되는 필연적인 배경을 확인해 주고 있다.
2) 笙簧
생황은 삼국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악기이다. 생황은 세종(世宗 1418∼1450)때 제조되었고, 성종(成宗 1469∼1494)때에는 생황의 주요부품인 황엽(簧葉 reed)을 만드는 장인(簧葉匠)이 존재했다. 그러나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兩亂 이후에는 중국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조선시대에 생황의 국내 생산이 거의 없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增補文獻備考>의 기록으로 미루어 영조 19년(1743년)에 생황제조에 대한 기록이 있었음을 논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詩, 민화 등에서 생황이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생황의 제작과 연주는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황의 국내 생산이 영조 19년(증보문헌비고)으로 보는 것은 생황이 보편화되는 시점과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고증이 필요하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생황의 필요성과 생황의 유입되는 배경, 제례악에 생황이 정착되는 시기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史料 2】 황단의 아악기가 완성되었다. -중략- 이연덕이 말하기를, “지금은 관의 소리가 조금 종전보다 낫지만 음률(音律)은 오히려 합치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악(典樂)에게 명하여 생황을 불어보게 한 뒤 말하기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중국의 생황은 소리가 매우 크고 명랑한데, 이 생황의 소리는 매우 낮고 가느니 다시 개정(改正)할 수 없겠는가?” 하니, 최규태가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였다. 이연덕이 말하기를, “생황의 소리가 매우 가늘고 음률도 또한 틀린 것이 있으니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악에게 묻기를, “이연덕이 개연(慨然)히 개정할 뜻이 있으니 그대가 이연덕과 더불어 그 음률의 잘못된 것을 교정(校正)하도록 하라.” 하였다.
위 사료는 황단(皇壇)에 아악기가 완성되었지만, 악기의 음률이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후 동년(영조17년 丁卯) 11월에 생황 및 아악의 음률을 교정하는 일로서 악사 한 사람을 보냈는데 그가 음률이 통하지 못해 典樂을 바꿀 것을 冬至上使 이학이 주청하였다. 이에 樂院提調 민응수, 조관빈이 연명하여 처음에 청한 악인이 생황에 가장 정통하니 다시 입송하기를 상소한다. 이에 영조는 전악의 일로 환차(換差)하기를 서로 청한 것은 일에 손상됨이 있다 하여 사신(使臣) 및 제조(提調)를 모두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이것은 생황의 음률 맟추기에 능한 이가 드물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영조 17년 11월에 보낸 악사가 생황 만드는 법을 배워 왔다는 이재의 기록은 영조당시 생황제조법을 배워온 시기를 명확히 해 준다.
【史料 3】 영조 17년 신유년....... 생황 만드는 법을 몰라 매년 중국에서 사들여와서 그 비용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악사 1인을 하지사(賀至使; 동지를 하례하는 사신) 일행에에 딸려 보내어 생황 만드는 법을 전수받게 하였으며 영조조까지도 생황의 쇠청(金葉)이 떨어지면 버리고 사용하지 않았다. 그 제작법은 백동(白銅)과 유철(鍮鐵)로서 두드려 엷은 청(葉)을 만들고, 그 백동엽(白銅葉; 백동청)은 十二律管에 붙였다. 유엽(鍮葉; 놋쇠청)은 四淸聲 율관에 붙인다. 닭부리와 녹각을 태우되 성질을 보존시키고, 황랍(黃蠟), 솔가지(松肪), 백랍(白蠟) 등의 5가지를 섞어 삶아서 아교를 만들어 쇠청(金葉)을 붙인다. 대나무에 구멍은 오금석(烏金石)을 갈아 가루를 내었기 때문에 金葉에 찌꺼기가 생기면 소리의 탁함을 조절하지 못하여, 다시 새롭게 전수하게 됨에 따라 매년 사오던 폐단이 드디어 없어졌다. 그러나 끝내 찰지고 단단한 중국의 것처럼 만들지는 못하였다. 또 <악학궤범>에는 和·우·簫의 3가지 악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이때 처음으로 簫를 사들인 이래로 社稷·太學·山川·祭祀의 쓰이는 네 가지 淸이 갖추어졌다. (黃鐘 大呂 大簇 夾鐘은 각각 淸聲이다.)
【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영조 19년(1743년)에 연경에서 생황제조법을 배워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재의 기록으로 미루어 영조 17년(1741년)에 생황제조법을 처음으로 배워온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더욱 확인시켜주는 史料로 영조 18년(1742년) 기록에서 지나간 해에 생황을 배워왔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史料 4】영조18년 (壬戌 1742) 8월 2일
악원 제조(樂院提調) 민응수(閔應洙)가 말하기를, “임진년 이후로 악기(樂器)가 망가지고 없어져 지금의 성률(聲律)은 거의 다 훼손되어 남은 것이 없습니다. 지나간 해에 악공(樂工) 황세대(黃世大)가 북경(北京)에 들어가 생황(笙簧)을 배워 가지고 왔으니, 이번의 사행(使行)에도 또한 들여보내어 배워 오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조 17년에 생황 제조법이 전래된 이후 국내 생산과 생황 부는 법 등이 정착되는 데에는 다시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한다. 영조 18년 영조는 우리나라의 음악은 음절이 대단히 촉박한 것 같다고 여기며 掌樂正 이연덕(李延德)이 생황(笙簧)과 석경(石磬)을 연경에서 새로 무역해온 것이 오면 음률을 다시 고칠 것을 논한다. 이미 생황제조법을 익혀 왔지만 중국의 생황 수입은 일정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이연덕이 연경에서 영조 18년 7월에도 생황과 소의 부는 방법이 아직 미비하며 겨우 실마리를 찾았을 뿐이라고 하였다. 20년 넘게 지난 시기에도 생황 소리를 내는 법은 정착되지 못했다. 영조 41년 당금(唐琴)·생황(笙簧)이 소리를 잘 이루지 못한다 하여 악공(樂工)으로서 연행(燕行)에 수행하는 자에게 그 음(音)을 배워 오도록 명하였다. 이후 5년 뒤의 기록에서야 생황 소리에 대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史料 5】영조 46년 (庚寅 1770) 7월 8일
편집 당상 서명응(徐命膺)에게 입시를 명하니, 서명응이 말하기를, “전번에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따라 생황(笙簧)을 진열하는 전교를 내리셨습니다만, 지금에 와서는 생황과 민악(民樂)이 모두 조화를 잘 이루고 있습니다. 청컨대 전정(殿庭)의 헌가(軒架)에 진열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즉 영조 46년(庚寅 1770)에 생황의 음이 조화를 이룸을 편집 당상 서명응이 간하며 전정의 헌가에 진열하도록 임금께 청하였고, 영조는 이를 허락하였다. 이것은 당시까지 악기가 없어 헌가에는 생황을 진열하지 못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위의 내용으로 미루어 종묘제례악에 쓰이는 악기가 16세기말과 17세기 초에 걸친 兩亂을 겪은 이후,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편종, 편경의 제작, 생황의 수입, 생황의 부는 법 익히기(영조17년, 1741, 辛酉), 생황제조법을 익히는 등 아악기를 구비하는 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영조 46년(1770, 庚寅)에 이르러서야 생황의 음률이 조화롭게 되었다.
Ⅲ. 18세기 士大夫의 風流
1. 風流와 琴道
조선시대 사대부는 禮와 더불어 樂을 修身의 학문으로 여기고 琴(거문고)를 즐겨 연주하였다. 이것은 조선후기에 전하는 고악보와 詩·書·畵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상징적인 그림, 짧은 글을 통해서만 당시의 음악 문화를 짐작할 수 있을 뿐 일상 생활에서의 구체적인 면모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조선후기 사대부들이 琴道, 선비정신, 正人心 등 상징적인 음악문화로 생각하게 된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재난고>를 통해 사대부들의 음악 상황을 보면 수신의 방편으로써 琴을 연주함과 동시에 실제 생활에서 폭넓은 방편으로 애호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즉 괴로울 때는 괴로움의 위안으로, 즐거울 때는 기생들과 더불어 즐거움의 수단으로, 그리고 知人들과의 교류의 수단 등으로 상징적인 정신에 국한하지 않고, 생활과 밀접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1) 詩情속의 風流
이재는 交友하는 詩會나 일상생활 속에서 거문고(琴), 노래, 술, 바둑, 투호를 즐겨한다. 특히 거문고와 바둑을 하는 모임을 통해 벗들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 이재와 더불어 士大夫들의 일상적인 풍류생활로 보인다.
듣자하니 그대의 누추한 집이 아름다운 흰 구름 사이에 있네. 서로 마주하고 호수와 산을 지나고, 그 나뉨은 반나절이네. 술로 잔을 치며 못 가에서 거문고를 가로 누이고, 꽃을 심고 약초를 계곡사이에 옮겨 심네. 바로 백년이 맑은 복이며,구름사이의 사람 또한 유유하네. 글로써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어 분분히 들어서 발길질을 해본다네. 아름다움을 머금고 빛남을 숨기며, 스스로 시기하고 비방함을 면하고자 한다네.
龍門의 아름다운 수목은 지나치다 멈추게 하고, 金井은 평소에 파아란 하늘을 머금었다. 바로 맑은 밤과 달이 서로 호흡하고, 달밤에 거문고 소리 마음속까지 듣는구나.
이재는 꿈속에서 광한루로 보이는 곳에 도착하여 어느 노인과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시를 적었는데, 이때도 꿈에 본 풍류노인에 대한 시상은 거문고가 빠지지 않는다.
달이 지고 밥짓는 연기도 사라지고 작은 집은 추워지고 쇠와 옥으로 된 난간의 봄기운을 견디지 못하는구나. 풍류노인은 능히 뜻하지 않고 높은 현을 타기를 시험하여 한 곡 타기를 허락하네.
2) 琴士
이재는 琴士로서 詩情속에 그의 마음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知人들과 더불어 교우하며 늦게까지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고 담소하다가 밤 삼경을 지나는 경우도 많았다. 이재는 38세에 처음으로 관직 장릉참봉을 제수받았다. 그는 관직생활을 하면서 장악원의 樂正 김장과의 교우는 그의 음악이론과 악기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게 한다. 관직생활 이전31세 때의 기록에도 밤늦게까지 知人과 더불어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담소를 나누다 이날 밤 삼경이나 되어서 나오기도 하였다. 때로는 종일토록 동헌에 나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또 토론하고, 투호놀이를 하고 거문고를 타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재가 莊陵참봉으로 재직시 본관 사또와 그의 두 아들과 더불어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면서 배를 타고 금강(錦江)을 거슬러 올라가서 자연암(紫烟巖)에 이르렀다. 금강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이르게 되는 자연암은 일명 재인암(才人巖)이라고 하며 바위 모양이 창부(倡夫)를 닮아 속칭 재인(才人)이라고 한다.
이재와 交流하는 음악인으로는 주영창, 樂正 金丈, 譯官 趙明會, 김창원 등이 있다. 이들을 통해 18세기 당시 음악인들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樂正 김장은 오랜 동안의 이재와 서신, 방문, 음악적 교류가 매우 많다. 泮人 주영창은 시, 문예, 서예, 노래, 거문고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다재다능하였다. 직접 노래를 짓기도 하고, 이재를 방문하면 항상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재가 아팠을 때 밤에 방문하여 거문고를 타고 노래 부르며 위로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지나가던 伽倻琴士를 만났다고도 하였다. 한양 뿐만 아니라 당시 가야금을 잘 하는 사람, 樂에 능한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풍류를 즐기는 士大夫들끼리 특별한 교류를 하였다.
2. 風流 樂器
조선 후기 士大夫가 즐겨 사용하던 악기는 거문고, 가야금, 양금, 생황 등을 들 수 있다. 이재의 기록을 통해 18세기 당시의 풍류 악기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향악기(거문고, 가야금, 해금)
거문고는 무릎 위에 길게 뉘어 놓고 연주하는 현악기로, 궁중음악과 선비들의 풍류방 음악의 악기로 그리고 전문 연주가의 독주악기로 전승되었다. 조선후기 김홍도, 이경윤, 강세황 등의 풍속화에도 거문고는 빠지지 않는 소재 중의 하나이다. 현재 전승되는 조선후기 古樂譜의 대부분이 거문고 악보임은 당시 士大夫들이 가장 즐겨 연주하던 악기임을 알 수 있다. 거문고와 관련된 이재 당시의 흥미로운 사건이 있다. 이재가 한성부 동부도사로 재직시에 泮 주인 이수득이 魚참판 錫定으로부터 좋은 거문고를 아홉 兩에 구입하였다. 시, 서예, 노래, 거문고 등에 능한 이웃사람 주영창을 초대하여 연주하게 하고 즐겼다. 수득은 이미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掌樂院에 출입하는 千氏가 부모를 안다고 하며 거문고를 빌려갔으나 오랫동안 돌려주지 않아 거문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또한 천씨의 소재지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재는 수득의 거문고가 염려되어 하인에게 거문고의 행방을 알아보게 하여 결국 그 단서를 찾았다. 東部에 송사를 할려고 邊僚에게 부탁하였고 결국 거문고는 수득에게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미루어 당시의 거문고 가격이 일반 서민이 소장하기에는 매우 비싼 가격임은 지금과 마찬가지이다. 이재 당시 한성 소재 작은 집 한 채의 가격이 30 兩 정도라고 한다. 거문고의 가격이 9 兩이라면 매우 비싼 편이다. 좋은 거문고는 소문을 듣고 구입하기도 하는 등 琴士인 士大夫들에게 거문고는 매우 큰 관심사임을 알 수 있다. 본글 Ⅱ장에서 언급한 사대부들의 대부분의 詩에도 거문고(琴)를 통해 마음을 다스름을 알 수 있고, 유명한 악인들도 대개는 거문고에 능함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가야금은 무릎 위에 길게 뉘어 놓고 손가락으로 줄을 퉁겨 연주하는 현악기이다. 5-6세기의 토우장식 항아리에 걸터앉아 있는 만삭 여인은 가야금을 타고 있다. 조선후기의 가야금은 거문고와 마찬가지로 士大夫가 즐기던 악기의 하나로 김희겸, 신윤복 등의 그림에 보인다. 가야금이 신라 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우리 나라 고유의 악기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거문고 연주가 보다 많다. 그러나 가야금과 관련된 18세기 이재의 기록에 가야금을 들고 행걸하는 과객이나 伽倻琴師에 대한 기록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당시 12 현 가야금도 널리 애용되던 악기임에는 틀림없다.
해금(瑞琴: 奚琴: 胡琴) 두 줄로 된 찰현악기로 고려 문종 30년대의 대악관현방, 예종 9년에 들어 온 송의 신악기에도 빠져 있고, <악학궤범>에는 당악기 속에 넣었으나, 운지법으로 평조와 계면조만 소개한 후 "다만 향악에만 쓴다." 라고 하였다. 6세기경 중국의 해(奚) 부족 문화권에서 유래한 해금이【고려사】樂志에는 외래악기인 해금을 향악편에 소개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미 향악을 연주하는데 중요한 악기로 정착했음을 말해 준다. 조선시대에는 삼현육각의 하나로 민간에 널리 쓰였으며, 사대부의 풍류악으로도 널리 쓰였다.
2) 외래악기의 수용(양금, 생황)
洋琴은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 등지에서 널리 애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청나라로부터 소개되었다. 양금은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유입된 것이 아니므로 정확한 유입시기는 알수 없으나 1750년 경에 들어왔다가 정조조 장악원 전악 박보안이 연경에서 배웠다고 한다. 영조45년(1769년), 이재는 홍대용과 교분이 두터운 이광하와 몇 번 만나게 되었다. 홍대용은 辛亥生으로 일찌기 季父를 다라 연경에 가서 항주인 9 명과 교유하였다. 그들이 수년동안 서로 교유하며 쓴 편지가 수십권이라고 하는데 홍대용은 자명종, 양금(서양철사금)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영조 46년(1770년), 이재가 청주에서 목천현으로 가는 여정 중에 홍대용이 사는 마을을 지나면서 홍대용이 양금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된다. 홍대용의 양금에 대한 이야기는 박지원에 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먼저 연암 박지원의 음악적 환경을 살펴보면, 그는 생황과 거문고 등의 악기를 잘 다루었다. 그리고 동료 지식인 중에서 노래에 능한 김용겸, 이곡옹, 유성습과 거문고에 능한 홍성학, 퉁소에 능한 이경산과 유득공의 숙부로 해금에 능한 유연옥(柳連玉, 1741-1788)과 교유하였고 한다. 연암은 자기 집에 생황, 거문고 등 각종 악기를 두고 동료들이 찾아오면 風舞 등 악기를 함께 다루었다. 어릴 때 홍대용의 집을 방문(壬辰年, 1772년)해서 그의 연주를 처음 들었고, 이후 8-9년 후 여러 음악인들이 이 방법으로 연주하지 못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박지원은 양금이 우리식으로 연주되기 시작한 것은 홍대용으로 기록하고 있다. 홍대용이 양금을 가져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769년 이전에 중국에서 유입해 1780년 정조조에는 보편화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1750년에 박보안이 처음 양금을 유입하였다면 홍대용은 양금을 대중화한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조선후기 洋琴譜도 다수 전하고 있다.
생황은 아악기, 당악, 향악 등에 편성되었고, 조선후기에는 풍류방에서 연주된 多管式 악기이다. 생황이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 연주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隨書】,【唐書】에 적혀 있고, 통일신라 시대 상원사 동조이나 불교조각품에 생황 연주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생황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궁중음악에 笙 전공자가 있었으나, 조선시대 초기에도 생황 만드는 어려움을 박연이 상소한 바 있다. 兩亂 이후 생황을 비롯한 많은 악기가 산실되고, 생황 만드는 법도 맥이 끊어진 후 조선후기 영조조에 이르러 생황제조법을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은 Ⅱ장에서 밝혔다. 생황이 우리나라에 오래전부터 있던 악기임에 반해 부는 법, 제조법 등이 정착되지 않았음은 제조법이 까다로운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신윤복, 김홍도 등의 풍속화에서 기생들이 생황을 연주하는 모습은 민간에서도 생황 연주가 상당히 보편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재는 동지사행으로 중국으로 갔던 역관 조명회가 行中에 생황으로 아악 12율과 속악을 대략 익히고 왔다고 하였다. 또 이재 스스로 생황을 구하기도 하였다.
Ⅴ. 맺음말
조선은 17세기 전후로 임진왜란(1592년), 병자호란(1636년) 등의 전란으로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되면서 조선시대 국가 의식 음악을 담당하던 장악원도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18세기에 접어들면 외래 문물의 유입과 冬至使行 사신 등으로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시기이다. 이재 黃胤錫(1729-1791)은 어려서부터 학문적 조예가 깊었으나 관운은 없었다. 다행히 그가 제관으로 차출되고 음악인과의 교류, 다수의 악보 필사 등을 통해 그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본 글에서는 그가 陵의 제관과 宗廟의 봉조관을 하면서 눈여겨 보았던 당시의 제례악의 상황과 당시 士大夫들의 풍류 음악 문화를 알아보았다.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먼저, 18세기 영조 당시에 종묘의 악현과 악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영조 전반기에는 영조 자신이 악공과 악생의 음악실력에 대해 계속 지적하기도 하였다. 음악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영조 17년(1741년) 중국에 冬至使行 사신들을 통한 악기의 유입과 제조법 등을 익히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을 통해 항상 악기 등의 미비한 점을 보완하는 창구로 활용하였다. 아악기 중에서도 생황은 제작도 어려웠고, 연주법도 쉽지 않아 당상의 논의에 자주 오르내렸다. 결국 영조 46년(庚寅 1770)에 이르러서야 서명응은 생황 연주가 조화롭다고 간하였다. 이와같이 이재와 실록 등의 기록을 통해 생황이 보편화되는 시점은 영조조이며 당시 新문화에 대한 사대부들의 적극적인 수용자세를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18세기 士大夫의 풍류 생활이다. 사대부들은 뜻있는 琴士들과 시회를 만들고, 악과 노래를 즐기며 풍류를 즐겼다. 본고에서 다루지는 못햇지만 각 지역마다 있는 기생들과 더불어 船遊하며 여흥을 즐겼다. 한편으로는 기층민중들이 피폐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바람직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마음을 닦는 도구로써 거문고를 연주하였음은 조선시대 후기 거문고보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거문고보에 전하는 대부분의 음악이 급박한 음악이 아니라 매우 느리고 아정한 곡의 특성을 지닌 가곡, 영산회상 등이 주류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애호하던 사대부들의 개방적인 자세는 18세기에 유입된 생황을 한국 음악사에 새로이 정착시키고, 歌曲 등 성악곡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독서와 자기 정진에 힘썼던 이재 역시도 음악에 대한 관심과 악보의 필사, 음악인들과의 교유를 통해 자신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하였는데, 이재 황윤석의 일기 {이재난고}를 통해 구체적으로 알져져 있지 않던 18세기 사대부들의 음악문화와 당시 제례악의 상황을 알 수 있다는 데 본 글의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