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의 잃은 것과 얻은 것
룻기 1:1-5
본서는 룻기서라고 하기 보다는 나오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룻은 이방인으로 모압 여인으로 본서의 후반에 소개되어 있지만 나오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상 본서의 주인공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서라고 하지 않고 룻기서라고 합니다. 성경은 인간사적인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고 구속사적인 목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서라고 한다면 인간사적인 목적으로 유대인의 한 가족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성경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속사적인 목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한 가정에 있었던 이야기지만 성경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방 여인 룻이지만 다윗 왕가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메시야의 왕권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는 모압 여인 룻을 찾기까지의 한 여인의 시련과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 가운데 파묻혀 하나님과의 전혀 관계없이 살던 룻을 찾기까지 나오미의 한 맺힌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내듯이 룻을 모압에서 불러내신 것이 아니라 나오미의 말 할 수 없는 희생과 수고를 통해서 룻을 불러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오미의 시련과 희생을 통해서 이방 여인 룻을 불러내어 구속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살펴봅시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으로 기름진 땅에 푸른 초원에 양들이 언덕을 덮을 정도로 풍족하게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어 먹고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흉년이 들게 된 원인은 자연 재해로 볼 수 있지만 특별히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고 말씀한 것은 하나님의 징계로 흉년이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이후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치리했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사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사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락과 향락에 빠졌으며 이방 신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불레셋으로부터 침략을 당하여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흉년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벌이였습니다. 위정자들이 정치를 잘 못할 때 백성은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는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베들레헴에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가 두 아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흉년으로 배고픔을 견딜 수 없어 이방인의 땅 모압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대부분 이사를 하는 것은 살기가 더 나은 곳으로 합니다. ‘엘리멜렉’은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뜻으로 깊은 종교적 고백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이로보아 그의 부모가 신앙이 좋고 그 아들에게도 하나님을 왕처럼 받들어 섬기도록 가르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좋아도 흉년으로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사를 한 것입니다. 정든 곳을 떠나 외지로 이사를 한다는 것은 모험입니다. 더구나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낯선 곳으로 이사를 하는 것은 상당한 위기입니다. 모압으로 이사를 했지만 생각대로 먹고 사는 것이 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남편 엘리멜렉의 죽음은 나오미로서는 상당한 시련과 고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남편이 죽었을 때의 괴로움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쓰라린 고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괴로움을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결혼시킴으로 달래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모압 여인 오르바와 룻을 며느리로 맞아 드렸습니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 두 아들 마져 죽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 죽고 두 아들도 죽었을 때 나오미는 심히 괴로웠습니다.
베들레헴을 떠나 10여년을 나오미에게는 너무나도 큰 시련과 고통으로 보냈습니다.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3)는 말씀은 나오미의 기구한 운명을 잘 말해줍니다. 남편 죽고 두 아들이 앞서 죽었을 때 나오미는 살아 있다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살았다는 것이 저주입니다. 죽을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죽었겠지만 죽지 못해 사는 괴로움인 것입니다. 나오미의 생명은 참으로 모진 것입니다.
지금 세계적인 불황으로 경제가 매우 어렵습니다. 국내 많은 중소기업들이 문을 닫고 일자리가 없어 노동자들이 상당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농촌은 농사지은 것으로 먹고 사는 것은 별로 어려움을 모르고 있지만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들은 심각한 어려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철없는 자녀들은 배고프다고 칭얼대지만 부모로서 어떻게 할 수 없어 아예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길거리를 방황하며 노숙하는 사람들이 부지기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보육 시설로 보내져 고아 아닌 고아로 버려지기도 합니다.
베들레헴에 흉년 때문에 모압으로 이사했지만 나오미에게는 너무나도 잔혹한 10년이였습니다. 이때 들려오는 소식이 베들레헴에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두 자부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섰습니다. 두 자부와 함께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가다가 나오미는 두 자부에게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8)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자부는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오미는 자신과 함께 가도 소망이 없다고 하며 강권하여 오르바는 모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나오미를 성읍 사람들이 보고 “나오미가 아니냐”(19)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의 나오미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했을 것입니다. 남편 잃고 두 아들마져 잃고 이방 여인 하나와 함께 돌아오는 모습은 거지 중에 상거지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때 나오미는 성읍 사람들에게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20)고 했습니다. 나오미가 이러한 말을 한 것 자신의 그동안 당했던 괴로움을 한 마디로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나오미’란 ‘사랑스러운’, ‘우리의 즐거움’이란 뜻의 이름입니다. 이를 보아 나오미는 어려서 부모와 이웃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내려감으로 그의 일생은 완전히 실패와 낭패, 시련과 고통만으로 지내다 돌아왔을 때 더 이상 사랑스러움과 즐거움이 될 수 있는 나오미가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괴로움’, ‘쓰다’란 뜻으로 “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니라”(20),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21)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과 실패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겪은 지난날의 시련과 고통을 하나님께 그 원인을 돌리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나오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징벌’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 한 마디가 나오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록 먹고 살기 위해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인의 땅 모압에 들어가 살았지만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이 죽어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며느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룻이 모압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바로 나오미가 섬기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향해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6)라는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나오미의 10년간의 잃은 것은 남편과 두 아들입니다. 그리고 굶주림과 쓰라린 시련과 고통이였습니다. 나오미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이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무엇을 가지고 왔습니까? 이방 여인 룻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룻을 얻었습니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을 인간적인 면에서 비교해보면 천금을 잃고 동전 한 닢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지만 룻을 얻었습니다. 룻을 얻었다는 것은 단순한 모압 여자를 베들레헴으로 데리고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장차 룻을 통해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하도록 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인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시는 뜻을 이루는 것 이였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은 나오미에게 세상적인 사랑이요 소망이였습니다. 그러나 룻은 영적 사랑이요 소망입니다. 나오미는 세상적인 사랑과 소망을 잃었지만 영적인 사랑과 소망을 얻었습니다.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 여인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돌아오므로 베들레헴의 가장 유력자인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을 뿐 아니라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었고 예수님의 조상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룻은 단순한 모압의 한 여인으로, 시어머니를 잘 섬긴 며느리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룻은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시련과 고통으로 댓가를 치루고 얻은 것입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잃고 얻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많은 것을 잃고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은 불행 중에 불행입니다. 그러나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클 때 불행 중에 다행입니다.
값진 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잃어야 합니다. 많은 것을 잃지 않고는 값진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많은 것을 잃지 않고 값진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사기요 도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잃지 않고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잃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은 실패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구원을 위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세상적인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의 구원을 이룬 것입니다. 선교사들의 선교 사역은 많은 잃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얻습니까? 죄중에 버려진 생명들을 얻고 있습니다.
스무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버스 안에서 소매치기 한데 돈을 빼앗긴 적이 있습니다. 자리에 앉아 졸고 있을 때 소매치기가 옆자리에 앉아 맨도 칼로 속주머니를 그려 돈을 빼갔습니다. 만원짜리가 처음 나왔을 때 만원은 제법 큰 돈이였습니다. 그 돈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려고 계획을 세웠던 것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눈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차에 내려 목적 없이 그냥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잃은 것이 아니라 큰 것을 배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닐 때가 있을 것인데 그때 많은 돈을 잃지 않기 위해 배웠다고 생각하니까 상당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한번도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빼앗겨 본 일이 없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실패를 통해서 배운 것을 말합니다.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잃지 않고 좋은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잃었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얻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오래전에 소록도를 방문하였을 때 모 장로님댁에 대접을 받으면서 그 장로님께서 ‘나는 문둥병이 걸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되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문둥병에 걸리기 전에 잘 사는 집에서 자랐고 대학도 졸업하고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둥병에 걸리므로 부모와 형제들과 함께 살 수 없고 소록도에 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하며 구원받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부모도 형제도 재산도 학벌도 다 잃고 건강마져 잃고 구원을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잃은 것을 아깝게 여기다가 일평생 한으로 품고 고생하는 것을 봅니다. 잃은 것을 아깝게 여기는 것은 불행중에 불행입니다. 그러나 잃은 것을 통해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룻을 얻어야 합니다. 룻은 믿음입니다.
어떤 성도는 직장을 잃으니까 믿음도 잃습니다. 재산을 잃으니까 교회도 나오지 않습니다. 잃고 또 잃는 불행으로 달려가는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는 직장을 잃었을 때 안하던 새벽기도도 나오고 재산을 잃으니까 교회 봉사를 더 잘 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복 받겠습니까? 세상적인 것을 잃어도 구속사적인 것을 얻어야 합니다. 믿음이 더 성장하고 주의 뜻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