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녹번 1314-로버트 브루스의 위대한 승리
전투의 기원
1286년의 천둥 치는 밤, 스코틀랜드의 왕 알렉산더 3세는 그의 아름다운 아내, 욜랑드와 함께 하기 위해 그의 킹호른에 있는 영지를 향해 출발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말은 낭떠러지 길을 가다가 발을 헛디뎠고, 다음날 새벽에 왕은 낭떠러지 기슭에서 목이 부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왕을 잃었고, 알렉산더 왕 치세에서 누렸던 스코틀랜드의 황금시대와 평화는 종말을 고했다. 알렉산더의 첫 번째 왕비이자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딸인 마가렛은 1275년에 세 아이를 남겨놓고 죽었다. 그녀의 아이들은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이었지만 역시 모두 1284년에 죽어 왕위 계승을 위태롭게 했다. 따라서 알렉산더 3세와 젊은 프랑스 여자의 결혼은 이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도록 아들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후계자 자리는 그의 병약한 세 살짜리 손녀 마가렛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어머니인 노르웨이 여왕 에릭 2세는 1283년에 마가렛을 낳고 죽었다. 그녀는 이제 캔모어 왕가의 마지막 혈통이었다. 6명의 ‘조국의 수호자’들로 구성된 섭정 회의는 멀리 노르웨이에 있는 어린 여왕 마가렛의 이름으로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다.
이때 잉글랜드 왕은 에드워드 1세로 이제껏 스코틀랜드의 강대한 남쪽 이웃 나라를 통치했던 그 어떤 왕보다도 유능하고 강력한 왕이었다. 에드워드 1세는 그의 매부 알렉산더 3세의 죽음이 가진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그가 웨일스와 아일랜드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스코틀랜드까지 통치하여 전 브리튼 섬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을 깨달았다. 그는 노르웨이의 여왕과 자신이 2살짜리 아들, 카나번의 에드워드와의 결혼을 제안했다. 스코틀랜드는 조심스럽게 동의했지만 버그햄 조약을 통해, 두 왕가의 결합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 왕국은 완전히 독립된 왕국으로 남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노르웨이의 여왕은 스코틀랜드로 오기 시작했지만 항해 중에 병을 얻어 오크니의 상륙한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문제는 다시 위기에 빠졌다.
물론 왕위를 주장할 사람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들 중 둘, 존 발리올과 애난데일의 5대 영주이자 ‘경쟁자’로 알려진 로버트 브루스는 모두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1세의 손자인 헌팅던 백작 데이비드의 후손이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에드워드 1세에게 왕좌를 차지하려는 14명의 경쟁자들을 중재해줄 것을 부탁했다. 1292년 11월, 베릭에서 에드워드 1세는 존 발리올의 손을 들어주었다. 발리올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인 코민 가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브루스에게는 최대의 라이벌이었다. 존 왕은 이에 대한 답례로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 이후 에드워드가 계속해서 스코틀랜드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강조하자 존 왕은 굴욕감을 느끼게 되었다. 1295년, 격분한 스코틀랜드 영주들은 발리올을 설득해서 잉글랜드 왕과의 관계를 끊고 프랑스와의 옛 동맹을 다시 시작하는 문서에 서명하게 했다. 당연히 에드워드는 이듬해 스코틀랜드를 침공했고, 던바 전투에서 어설픈 지휘 하의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했다. 존 발리올은 그의 왕국을 내주고 포로 신세가 되어 런던탑으로 끌려가야 했다. 에드워드는 최후의 모욕으로 그의 서코트(surcoat)에서 왕실 문장을 잡아뜯어버렸다. 이후 불행한 발리올은 ‘빈 코트’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월레스의 반란
1296년 말 에드워드는 남부로 돌아왔다. 그는 스코틀랜드인의 손에서 운명의 돌을 빼앗아 웨스트민스터로 가지고 갔으며 수비대를 적절히 배치한 북부 점령지는 서리 백작의 손에 맡겼다. 그러나 곧 소요사태가 돌발했다. 그리고 1297년 윌리엄 월레스는 래날크의 잉글랜드 주 장관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윌리엄 월레스를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갑자기 주목받는 존재로 만들었으며,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9월, 스털링 브리지에서 월레스는 서리 백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는 스코틀랜드 반란의 불꽃을 더욱 부채질했다. 승리로 인해 월레스는 ‘조국의 수호자’ 칭호를 받았으며 백성들의 지지와 교회의 동의에 힘입어 사실상 스코틀랜드의 지도자가 되었다. 1298년, 복수심에 불타는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그의 강력한 군대로 스코틀랜드를 맹렬히 공격했다. 그리고 폴커크 전투에서 월레스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월레스는 ‘조국의 수호자’직을 사임하고 1305년까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1305년에 그는 배신당하고 사로잡혔다. 런던에서의 공개재판 이후 그는 반역죄를 선고받고 스미스필드의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그는 공개적으로 목이 매달리고 내장을 끄집어내는 형벌을 받은 뒤 사지가 찢겼다.
'King Hobbe'
로버트 브루스의 조상은 정복왕 윌리엄과 함께 잉글랜드에 온, 10세기 오크니의 노르웨이인 백작 애덤 브루스의 윗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애덤의 장남은 첫 번째로 로버트 브루스라는 이름을 받았고, 그는 요크셔의 넓은 영지를 기반으로 하여 북부 잉글랜드에서 가장 유력한 귀족 중 하나가 되었다. 1124년, 잉글랜드에서 그의 봉건군주인 데이비드 1세는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계승했다. 데이비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뒤떨어진 켈트족 사회에서 근대화된 유럽 국가로 변모시키기를 원했고, 앵글로-노르만 정착지들이 국경 북쪽에 세워지는 것을 장려했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그는 봉신 로버트 브루스에게 애난데일의 영주 자리와 함께 광대한 영지를 수여했다. 이리하여 브루스 가문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로버트 브루스의 충성과 헌신은 1306년까지 다른 많은 스코틀랜드인들과 마찬가지로 흔들렸다. 1296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는 에드워드 1세를 지지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부분적으로는 에드워드 1세에 대항한 애국적인 저항이 그의 주요 라이벌인 코민 가문에 의해서 이끌어졌기 때문이었다. 브루스는 에드워드가 당연히 그의 것이 되어야 할 스코틀랜드의 왕권을 그에게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1298년, 브루스는 폴커크 전투의 재앙으로 인해 월레스가 사임한 이후 존 ‘붉은’ 코민과 함께 ‘스코틀랜드의 수호자’가 되었다. 물론 전적으로 애국적인 동기에 의해서는 아니었다. 1302년 초 코민과의 격렬한 다툼 이후 브루스는 다시 잉글랜드에 충성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왕의 용서를 받았다.
1306년 2월 10일, 브루스는 덤프리의 그레이프라이어 교회에서 코민과의 모임을 가졌다. 의논의 와중에 다툼이 벌어졌고, 그것은 급기야 폭력사태로 번졌다. 브루스는 그의 경쟁자를 칼로 찔렀고, 피를 흘리는 코민을 자신의 종자들이 완전히 처리하도록 제단 곁에 버려둔 채 그 자리를 떠났다. 이 불경스러운 살인은 브루스에게서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에드워드 1세에게 범죄자로 선고되고 교황에 의해 파문되든지, 데이비드 1세의 자손으로서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주장하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일부 스코틀랜드 교회와 귀족의 지지에 힘입어 브루스는 스쿤에서 3월 25일에, 운명의 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올랐다.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그를 반대했다. 코민 가문과 그들의 동맹들은 복수를 외쳤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그의 지배로 돌려놓겠다고 맹세했다. 1306년 6월 그의 대리인 에이머 드 발렌스는 퍼스(옛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 인근의 메스번에서 기습공격을 가해 브루스의 군대를 흩어버렸다. 브루스의 여동생들과 딸과 왕비인 엘리자베스는 포로가 되어 에드워드 1세의 손에 떨어졌다. 브루스의 형제인 닐은 킬드러미 성의 함락과 함께 체포되어 베릭에서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6월 말까지 브루스의 위치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의 추종자들은 흩어졌고, 잉글랜드 인들이 조롱하듯이 부른 ‘절름발이 왕’은 저주받은 도망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추격에서 벗어나서 얼스터 해안의 래슬린 섬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그는 한숨 돌리고 그의 자원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1307년 초, 브루스와 소수의 추종자들은 대담하게도 본토로 돌아왔다. 그들은 에어셔의 턴베리 성 부근에 상륙하여 캐릭의 거친 고원지대와 황무지로 사라졌다. 그의 두 동생, 토머스와 알렉산더는 동시에 원정대를 이끌고 갤로웨이로 항해했다. 그들의 목적은 칼라일에서 에어셔를 잇는 잉글랜드의 수송로를 약탈하여 브루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비참하게 잘못되어 갔다. 스코틀랜드인이 라이언 호숫가에 상륙했을 때 매복하고 있던 브루스의 적, 갤로웨이의 맥도월의 공격을 받아 유혈의 혼란 속에서 패주했다. 이미 중상을 입어 반죽음이 된 토머스와 알렉산더 브루스는 칼라일로 옮겨진 뒤 에드워드 1세에 의해 목이 매달렸다. 그들의 목은 도시의 입구에 내걸렸다. 에드워드는 군대를 남부 스코틀랜드로 파견했다. 그러나 브루스의 지지자들은 글렌 트룰과 러든 힐에서 모여 싸웠다. 그리고 로버트 왕은 잉글랜드에 맞서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다. 1307년 7월 7일, ‘스코틀랜드의 망치’ 에드워드 1세는 솔웨이에서 사망했고, 그와 함께 스코틀랜드를 압박하던 강철 손은 약간 느슨해졌다.
로버트 브루스가 왕국을 회복하다 1307-1314
에드워드 1세의 어리석은 아들이자 후계자, 에드워드 2세는 즉위 초 피에르 가베스통의 사건과 다루기 힘든 봉신들의 반발에 부딪쳐서 스코틀랜드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이것은 브루스에게 스코틀랜드 내부의 경쟁자를 처리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주었다. 그는 먼저 남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그의 적 맥도월에게 복수했다. 그런 다음 9월에는 갤로웨이의 복속을 위해 제임스 더글러스를 남겨놓고 자신은 그레이트 글렌(대협곡)을 통해 북쪽으로 향해 그의 숙적 코민과 맞섰다. 버컨에 있는 코민 가문의 영지는 애버딘에서 머레이 하구까지 뻗어 있었다. 1308년 코민은 패배하여 남부 잉글랜드로 도주하고 그의 영지는 로버트 왕의 자비에 맡겨졌다. 그리고 그는 무자비하게 코민과 그의 지지자들의 땅을 유린했다. 여름에 브루스는 애버딘을 점령했고, 북동부에서 그의 세력은 이제 확고부동했다. 1309년까지 브루스는 스코틀랜드 내의 모든 반대자들을 패배시켰고, 이제 그는 잉글랜드 인들을 그의 왕국에서 몰아내는 데에 관심을 돌렸다.
그때쯤 에드워드 2세는 봉신들과의 일시적인 화해를 통해 문제를 대충 수습하고 스코틀랜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1309년과 1310년에 각각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으나 스코틀랜드인들은 그의 눈앞에서 흩어져버렸다. 그리고는 전투를 피하면서 철저한 청야전법으로 일관했다. 결국 굶주리고 기세가 꺾인 잉글랜드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의 원정은 희생만 컸고 소득은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군대에게 지불할 돈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비타협적인 봉신들과 맞서야 했다. 1311년 의회의 결정에 의해 에드워드는 감독관에 의해 그의 모든 행동이 제한받는 법령을 받아들이고 그의 총신 가베스통을 플랑드르로 추방해야 했다. 그러나 가베스통은 추방 3달 만에 비밀리에 귀국했다. 영주들의 분노를 두려워한 그는 에드워드와 함께 서둘러 북부로 도망쳐 스카버러 성에 은신했다. 그러나 왕이 다른 곳에서 군대를 모으는 동안 가베스통은 펨브룩 백작에게 공격을 당했다. 그는 안전을 담보로 항복했고 남부에 있는 펨브룩의 성인 월링포드로 압송되었다. 그는 다시 워릭 백작에게 체포당했고, 랭커스터 백작의 명령으로 참수되었다.
로버트 브루스는 에드워드의 주위가 흩어진 틈을 타서, 그는 지나가는 모든 곳을 파괴하면서 1311년에 국경지방으로 침입했다. 이듬해 여름, 세력이 늘어남에 따라 한층 더 자신감이 붙은 그는 더럼의 왕실 영지까지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무방비한 북부 지방들은 에드워드 2세의 원군을 바랄수도 없는 상황에서 브루스와 1년의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비록 다음해까지 막대한 보호세를 지불했어도 약탈은 면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브루스의 빈곤한 재정 상황은 급격하게 개선되었다.
1309년에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안에 여전히 12개의 요새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요새들은 수많은 소규모 거점들과 합하여 스코틀랜드 내의 잉글랜드 지배를 유지하는 기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브루스의 전략은 이 성들을 파괴하여 적들이 사용할 수 없게 만들고 아군 수비병을 배치하여 조금씩 스코틀랜드 내의 잉글랜드 지배권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공성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책략이나 기습공격, 그리고 이런 것들이 실패할 경우 긴 포위작전에 의지해야 했다. 브루스는 베릭을 사다리 작전으로 기습공격하려고 시도했으나 개 짖는 소리가 수비병을 깨워 실패했다. 그러나 1313년 1월에는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전략적 요충지인 퍼스를 달밤에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점령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남동부, 또는 로디언이라고 불리는 곳은 수많은 앵글로-스콧 인들이 국경 양쪽에 걸쳐서 살고 있었다. 로디언은 명목상으로는 잉글랜드의 밑에 있었지만 이곳 주민들은 브루스에게 북부 잉글랜드와 마찬가지로 보호세를 낼 것을 강요당했다. 로디언의 많은 소규모 성채들은 이미 스코틀랜드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1314년 2월, 제임스 더글러스는 요충지인 록스버러 성을 기습 공격하여 탈취했다. 로디언의 잉글랜드 거점에 대한 공격의 절정은 다음 달에 찾아왔다. 비록 더글러스의 업적을 능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토머스 랜돌프가 한밤에 대담하게 성벽을 기어올라 에든버러 성을 점령한 것이었다.
계속....
첫댓글 수고하셨어요 ^^*
번역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윤덕희님 덕분에 귀한 외국문헌을 접하게 됩니다. 다음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재미있게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