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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묵송리 메기울」를 그리워하며
글 : 청교면민회 부회장 / 박덕승 청교면 묵송리 묵지동 마을 전경( 윤촌마을 ,박촌마을 , 홍촌마을)
내 고향 「묵송리 메기울」를 그리워하며
나의 고향은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메기울 이라 하는 곳입니다. 내가 어린 시절 부모형제 친척들과 함께 살았었던 곳, 나의 죽마고우(竹馬故友)들과 함께 뛰놀며 추억이 남아 있는 곳, 갈 수 없어서 오래도록 바라만 보며 마음으로만 그리워하였던 곳입니다.
나의 고향 묵송리 메기울은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윗 마을은 윤촌 마을, 아랫마을은 박촌 마을이라고 불렀는데 박촌 마을은 홍촌 마을 권촌 마을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리 마을 한가운데 서서보면 남쪽은 이름 모를 돌로 된 산이라 이름 붙여진 괴석 산이 있고, 북쪽은 옥련수리조합(저수지)이 걸쳐 있고 남면 고산골 마을이 인접해 있습니다. 서쪽은 낮은 산지로 용산 펄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들판 끝자락에 광덕면 냉전마을이 있습니다. 동쪽은 잘 보존 되어 온 “영원정”이라는 누각과 약수터가 있는 아름다운 고향이라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영원정 누각의 유래는 기억할 수 없지만 약 20평정도로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며 고상하고 우아하게 잘 지어져 있고, 잘 보존 되어 있습니다. 누각 주변으로 토사가 나지 않도록 동서북쪽 면으로 돌 축대를 쌓았고, 그 돌담 안에는 느티나무가 가득하여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누각 앞쪽에는 유명한 약수터가 있는데 마치 석공이 돌을 다듬어 만든 것처럼 “ㅁ”자 모양이고, 깊이가 약 1m 50cm 정도 하는 곳에서 물이 사시사철 넘쳐 솟아 나왔으며, 옥련수리조합에 물이 말랐을 정도로 심한 가뭄이 있었을 때에도 동네논에 물을 댈 정도로 풍부한 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옛날에는 이 약수를 신성시 하여 일전, 십전짜리 동전을 우물 안으로 던져 넣어 정성을 드리기도 했으며, 영하 25도 보다 더 추운 겨울에는 물이 따뜻해서 손빨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이 약수는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전해져 내려와 많은 사람들이 목욕하기도 했는데 효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동네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습니다. 느티나무의 년 수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왔다고 하는데 우리 조상이 정착한지 500~600년쯤 된다고 보면 굉장히 오래된 느티나무입니다. 이 느티나무의 둘레는 약 10미터 가량 될 것이라 여겨지는데 어른 7,8명이 손을 잡고 둘러섰던 기억이 납니다. 이 느티나무의 뿌리는 지면 위로 올라온 곳도 있는데 그 높이가 2미터정도 되는 것도 있으며, 그 생김새가 말 엉덩이 같이 굽은 것도 있어 동네꼬마들이 함께 말 타기를 하며 즐거운 추억이 있는 놀이터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고향마을은 넓은 옥토와 풍부한 물, 농사짓기 알맞은 기후로 논농사 밭농사하기에 아주 좋은 곳입니다. 특히 논농사가 많은 곳인데, 농사가 시작하면서 힘든 노동을 잊기 위해 우리 마을에서는 풍악놀이를 했습니다. 인삼 재배 등 농사일이 많은 터라 정월대보름 때에는 아침 일찍부터 해질 때까지 아홉 그릇을 먹고 아홉 나무 짐을 해야 한다는 유래가 있었는데 아마도 부지런해야 한다는 뜻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내기를 끝내면 김매기로 들어갈 때에 각 부락별로 남자들은 농기와 깃발을 만듭니다. 깃발 맨 끝은 꿩 꼬리털로 여러 개로 보기 좋게 매달고 깃발을 길게 해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크게 쓰고 오색 깃발을 만들어 날짜를 기록합니다. 농기와 깃발이 완성되면 힘이 가장 센 사람이 깃대를 들고 사방 줄을 길게 매어서 깃대가 넘어지지 않게 서로 줄로 조절하고 꽹과리, 징, 북, 장구, 소고 그리고 호적이라고 하는 태평소로 풍악을 울립니다. 들로 나갈 때는 꽹과리를 치는 상쇠 가락에 맞춰서 연주하고 나머지 사람은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신나게 나가는 모습이 굉장히 흥겹고 보기 좋았습니다. 부락마다 들판에 나가서 서로 마주치게 되는데 이때는 먼저 구성된 날짜로 선임자를 가리는데 후임자가 선임자를 향해 길게 늘어서서 깃발을 숙여 인사를 하고 한바탕 태평소를 불고 춤을 추다가 일터로 나갑니다. 간혹 자기 마을을 과시하기 위해 날짜를 속이는 일이 있어 옥신각신 싸움도 벌어져 재미를 더하기도 합니다. 또한 목 무등을 4층까지로 올려 세워서 춤을 추며 한바탕 놀이마당이 이루어지면 아슬아슬한 장면이 연출되며 모두들 신기해서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잔치를 베풀고 환호하며 흥겹게 놀면서 힘든 농사일의 피로를 풀고, 풍년이 되기를 바라며 끝을 냅니다.
우리 박촌 마을에서는 음력 10월10일 산제사를 드리는데, 매년 연례적으로 드리는 산제사가 아니라 그 해 마을에 질병이나 사건 사고 등 마을에 우환이 없고 화평했을 때에만 산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산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모두 남자로 정하는데 사 주을 보고 일 년 신수가 좋은 사람을 선정해 순서대로 제사임무를 정합니다. 제일 좋은 사람은 제사 진행을 주관하는 주당이 되고, 다음은 제사지낼 재물을 사오는 사람 그리고 돼지를 사올 사람으로 정합니다. 돼지는 산체로 재물로 바쳐지는데 완전히 검은 털을 가진 것으로 제사 하루 전에 주인이 요구하는 금액을 지불하고 사와서 하룻밤 작은 움막집에 두게 되는데 신기한 것은 이 돼지가 도망을 안가고 얌전히 하룻밤을 지냅니다. 그리고 독특한 것은 돼지를 산채로 잡는 것인데 먼저 돼지털을 제거하고 산 밑 우물가의 작은 못에서 깔아놓은 널 틀에 돼지를 뉘어놓고 깨끗이 목욕시킨 후 뻘건 돼지가 제단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또 떡을 찔 땔감은 동네 입구 느티나무의 썩은 가지를 연장을 사용하지 않고 밧줄을 걸어 당겨 부러뜨려서 마련합니다. 떡은 시루에 넣고 밤을 꼬박 세워가며 지켜가며 찌는데 신기한 것은 떡에 호랑이 발자국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제사를 위한 여러 가지 과일과 부침 등을 갖추어지면 상을 차려 놓고 마을의 대표자를 중심으로 절을 하고 제사가 끝나면 각 집집마다 음식을 나누어 줍니다.
우리 동네 자랑거리인 청송학교강습소가 있었습니다. 학교 설립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안타깝지만, 학교는 정부가 세운 것이 아니라 마을사람들이 논과 땅 등으로 재정을 모아 설립하였습니다. 학교를 세운 목적은 아마도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마을 주민들의 뜻을 모아졌던 것 같습니다. 학교는 교문을 들어서면 교실이 있는 건물 한 동과 학교 선생님을 위한 사택도 2채가 나란히 지어져 있었습니다. 학교 운영 재정으로 논과 밭이 있었는데, 재학생 학부모가 자신의 농사일을 하기 전 새벽에 모여 공동으로 함께 (모내기, 풀매기, 추수 등) 농사일을 했다고 합니다.
학교 교장선생님은 홍일의 선생님이셨는데 졸업식이나 운동회 때 뵌 것 같습니다. 윤종옥 선생님과 여기항 선생님이 계셨는데 내가 2학년인가 3학년 때 윤종옥 선생님이 떠나시고 남면 고산 골 김성계 선생님이 부임하셨고 4학년 졸업할 때 김성계 선생님도 개성 시로 떠나시고 토성면에서 여자선생님이 부임하셨고, 해방 후에는 교장선생님이 자습 사감으로 하시다가 청송학교가 분교로 승인받아 묵송리에 사는 1학년에서 3학년 까지 학생들은 청송학교에서 수학을 했고 4학년이 되면 샛골 학교로 진학하여 다니는 제도로 학제가 바뀌었고 이때 백선생님과 진선생님께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6.25동란 이후에 모든 선생님들이 남하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김성계선생님은 종로구청에 근무하시다가 정년퇴직을 했다고 합니다.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내 몸속에서 뽑아 낼 수도 없는 내 고향 이야기의 한 부분이다. 고향은 지나간 날들과 함께 아늑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세계인 것이다. 영원한 나의 모토(母土)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은 신성한 것이며 지켜져야만 한다. 연어가 귀소본능으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찾아 돌아오듯 반드시 찾아 봐야하는 곳이기도 하다. 내 고향 청교면 묵송리 메기 울은 이곳 서울에서 승용차를 타고 한 시간여 남짓 걸리는 지척에 있는 곳이다. 세상천지 고향 없는 사람 어디 있겠는가마는 나는 강화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저 앞산 너머에 있는 내 고향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며 그래도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는 절절한 고향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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