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보자기가 발달하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는 위도상으로 추운 나라에 속하며 국토는 좁고 인구밀도는 높으며 천연자원이 적은 나라이다. 그러므로 주거공간이 낮고 좁은 것이 주생활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렇게 주거공간이 매우 협소했으므로 사용치 않을 때는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물건이 가재도구로서 바람직했다. 보자기는 개패에 따라 용적의 신축이 자유로와 보관 혹은 운반 용구로 사용할 때는 용적을 최대한 이용하다가 사용하지 않을 때는 작게 접어둘 수 있으므로 그런 가재도구로서 적격이었다. 이런 편의 때문에 자연히 보자기가 널리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자기의 발달 이면에는 일종의 기복신앙적 요인의 작용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대상에 공을 많이 들이는 것은 일종의 치성을 들이는 행위로 볼 수 있으며 치성을 들인 대상은 초복(招福)의 매체가 된다고 믿는 것이 재래의 속신(俗信)이었다. 수를 놓거나 조각천들을 하나하나 이어붙이는 등 보자기를 공들여 만든 것은 복을 비는 마음과 정성의 한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성들여 만든 보자기에 물건을 싸두는 것은 복을 싸둔다는 뜻으로 통하기도 했으며 특히 각종 예물을 싸던 혼례용 보자기는 이러한 의미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하겠다. 보자기의 발달은 의례적인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보자기는 물건을 주고 받을 때 그 물건을 싸거나 덮어 보호하면서 한편으로 아름답게 장식하는 데 쓰였으나 사람들 사이에 오고가는 물건이 깍뜻한 예의를 다한 마음의 표현으로 전달될 수 있게 했다. 보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보호와 치장의 의미는 곧 옷의 의미와도 통한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보자기 유물로 알려진 선암사의 탁사보는 고려 중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이 탁의(卓衣)라는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궁보(宮褓)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아청운문단궁보(鴉靑雲紋緞宮褓)는 현종(1659~1674년 재위)의 따님 명안공주(明安公主)가 혼례에 사용했던 것을 알려져 있다. 보자기는 사용계층에 따라 궁보와 민보(民褓)로 대별된다. 민보는 제작 방법에 따라 조각보, 수보, 식지보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보자기를 그 꾸밈새에 따라 홑보, 겹보, 솜보, 누비보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홑보는 말 그대로 홑겹으로 꾸민 보자기를 말하며 겹보는 안감을 대어 이중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솜보는 안에다 솜을 두고 겹으로 만든 보자기로서 깨지거나 다치기 쉬운 물건을 보관하는데 사용했다. 누비보는 솜을 두어 누빈 것을 말한다. 문양을 만든는 방법에 의해 분류하면 당채로 그린 당채보, 금분(金粉)으로 찍은 금박보 보판에 물감을 묻혀 찍어낸 판보 등을 들 수 있으며 재료로 사용된 직물을 기준으로 명주보(明紬褓), 사보(紗褓), 단보(緞褓), 모시보, 무명보, 베보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색상도 하나의 분류기준이 될 수 있다. 조각보는 원래는 폐물활용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조각천들의 면과 색의 구성이 이루는 미적 조화는 현대의 추상회회나 공예어세 볼 수 있는 세련된 콤포지션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조각천들이 결합되어 있는 양상은 매우 다양하지만 거기서 몇가지 패턴을 찾아볼 수 있으니 다음과 같다.
① 조각천 자체의 모양이 정사각형이거나, 이등변 삼각형의 조각이 두개 혹은 네 개 모여 정사각형 모양을 이룬 것이 질서정연하게 결합되어 있는 패턴이 있다. 이 경우 동색의 조각들이 사선을 이루도록 배치하는 미적인 배려를 볼 수 있다.
② 보자기 중앙부의 네모꼴을 중심으로 동심원이 퍼져나가듯, 조각천들이 결합되어 형서되는 네모꼴이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나가는 양상으로 구성된 조각보들이 많다. 이 때 보자기 중앙부가 울 井 자를 이루도록 조각천들이 색과 면을 안배하거나 바람개비 날개가 돌아가듯이 일정한 방향으로 회전하는 양상으로 조각천들을 배열함으로써 변화를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구성미가 특히 빼어난 조각보는 조각천들이 위와 같이 눈에 띄는 어떤 패턴을 형성하지 않고 자유롭게 결합되어 있는 것들 중에 오히려 더 많다. 크기와 모양과 색상이 각양각색인 수십 수백개의 천조각들이 규칙성을 배제하면서도 산만하다거나, 전체 속에 통합되지 못하고 유리되어 있다거나 하는 느낌을 전혀 주지않고 있는데 이것은 계산된 질서의 미(美)보다 한층 더 높은, 감추어진 수리의 미학 아래 조각천 전체가 통어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각보의 구성미를 말할 때 그 세련된 색상배치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엷은 파스텔조의 차분한 색상을 주로 사용한 사(紗) 조각보들은 색상의 뉘앙스를 잘 살림으로써 전체적으로 변화감과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있다. 모시 조각보의 경우는 단색조가 많은데 이것들은 조각천의 색상의 농담과 크기의 차이를 살려 하나의 조형작품으로서의 격조를 빚어내고 있다. 특출한 색상 배합이 만들어낸 또다른 작품으로 청홍(靑紅)을 주주로 한 모시 조각보를 들 수 있는데 빨강, 파랑의 원색을 주조색으로 택한 대담성과 색면 분할의 세련미 그리고 전체적인 조화는 추상 화가 몬드리안과 끌레의 작품에 비견할 만하다. 수보는 조각보와 함께 유품이 많이 전해지는 대표적인 보자기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수보는 대개가 강릉을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에서 나온 것으로, 현재로서는 이 수보들을 관동 지방의 토착적인 자생문화의 산물로 보고 있다. 수보는 주로 혼례 등의 길사(吉事)에만 쓰였다. 수보의 바탕천은 면직물이고 안감은 명주를 많이 썼는데 이것은 주로 견직물과 견사로 제작된 여타 자수품과 수보의 다른 점이다. 수보의 문양으로는 나무, 꽃 문양이 가장 많고 이에 곁들여 학, 봉황, 공작 등의 서조와 나비, 풀벌레, 각종 잡새들이 시문(施紋)되어 있다. 수보 문양 가운데 가장 빈번히 사용된 것은 나무인 바, 나무는 한국인에 있어서 특별히 신성시(神聖視)된 자연물 가운데 하나로서 길사에 쓰이는 보자기에 영험있다고 믿어지는 자연물이 대표적으로 많이 수놓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밖에 꽃은 복(福)을, 열매는 다산(多産) 특히 다남(多男)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전체적으로 보아 수보의 문양은 복락기원(福樂祈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壽」,「福」따위 문자문(文字紋)도 적지 않아 보자기 중심부나 가장자리에 다른 문양과 어울려 수놓여 있다.
다음으로 문양의 표현양상을 보면 대체로 비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수화문의 경우을 예로 들면 꽃송이를 각 색실로 된 동심원으로 표현하거나 몇 개의 색반(色班)을 병치시켜 나타내거나 하였다. 특히 나무줄기와 가지는 각 색실을 나란히 병렬시켜 줄기와 가지를 암시하는 정도로 도식화했다. 줄기나 가지 끝에 달린 꽃이나 새, 풀벌레 등도 그 형태가 뚜렷하지 않고 새로도 보일 수 있고 꽃으로도 보일 수 있도록 다중의 상(像)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시말해서 수보의 문양은 자연에서 도출된 것이나 일단 추상화 단계를 거쳐 세세한 부분을 사상(捨象)하고 그 자연물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요소만을 남겨 절약된 생물형태적인 선(線)을 가지고 전체적으로 풍요로와 보이도록 구사되어 있다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수보의 제작은 오랜 자수역사속에서 그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자수가 시작 된 시기는 청동기 시대 즉 기원전 1000년으로 보고 있으며 그후 많은 변천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감상용으로 제작하기보다는 실용자수의 전통이 이어져 온 것으로 다소 투박스러우나 수명이 긴 자수의 제작을 선호해 온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나라 자수역사의 실체를 삼국시대 이전으로 봄으로써 수보의 역사 또한 삼국시대 이전으로 보아야한다. 다만 보자기 일반의 역사는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의(衣). 식(食). 주(住) 생활전반에서 다양하게 쓰여진 보자기는 수요가 많으며 많을 수록 생산과정에서 우수한 작품이 제작되게 마련이다. 그 중 자수보자기는 관동지방에서, 비단조각보자기는 호남지방에서. 모시조각보는 강화지방에서 많이 발달 해 왔다. 이상 살펴본 바에 의해 조각보와 수보는 하나의 생활소품이면서 예술적 평가의 대상으로서도 부족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글쓴이: 허동화 한국사전자수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