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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움을 빛추는 빛(마1:18-25)
여기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습니다. 둘은 서로 깊이 사랑하여 혼자 사는 것은, 의미가 없음을 알고 결혼을 약속하고 먼저 약혼을 하였습니다. 약혼이란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결혼을 할 것입니다”. 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 공포하는 의식입니다. 또한 결혼에 대한 법적동의를 수반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약혼한 당사자들은 서로에 대한 의무도, 책임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은 결혼을 기다리며 행복해 하였습니다. 행복한 미래를 그리며 꿈같은 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남자의 귀에 사랑하는 약혼자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둘은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기에 그 아이는 자기의 아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이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이야기입니까? 아니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어찌 그 같은 일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행복한, 단꿈을 꾸며 결혼을 기다렸는데, 알콩, 달콩 재미있게 살아갈 꿈을 꾸었는데, 그렇게 미래를 설계했더랬는데, 그런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임신소식은 차라리 현실을 부인하고픈 사건이었습니다. 어떻게 나를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의 배 속에, 내 아이가 아닌 남의 아이가 있다는 말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지금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일어났습니다. 부인하고 싶습니다. 아니라고 절규하고 싶습니다. 거짓말일거라고, 그럴 수는 없다고,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그럴 리가 없다고 외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만약 이 사실이 온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눈앞을 스쳐갑니다. 만약 결혼 전에, 즉 약혼기간중에 여성의 임신은 이를 간통으로 보고, 이혼의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그 당사자는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에도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2.000년전 에는 당연한 일이었기에 더욱 요셉은 걱정스러웠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의 사랑을 배반한, 부정한 여인인 마리아에게, 그냥 파혼을 하고,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도록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랑이 깊을수록 배반의 상처, 또한 깊은 법입니다. 자신이 생명처럼 사랑한 여인이, 내 아이가 아닌 다른이의 아이를 가졌다면, 그 배반감, 상처, 역시 사랑한 만큼 클 것입니다. 배반한 사랑을, 죽임으로 되갚는 일이 없지 않기에 더욱 그럴 수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처럼 쿨(cool)하게 “그래 나 싫다면 할 수 없지 뭐!,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하며 보내주겠지만 지금 상황은 2.000년 전의 상황입니다. 지금 요셉은 위기 상황입니다. 어떻게 이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온통 그의 머리를 헤집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막다른 골목, 차라리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합니다. 어찌 보면 요셉은 원통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니고, 상대방이 잘못한 것으로 자신의 인생에도 떼어 낼 수 없는 꼬리표를 달고 다닐 것을 생각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도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19절)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자신의 사랑을 배반한 여인을 돌에 맞아 죽게 할 수도 있겠지만, 요셉은 오히려 마리아를 걱정하며 염려하는 마음으로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그 방법은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끊고자 하는 방법이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가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일도 없을 것이며, 자신도 부정한 여인과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가 안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 결정은 파혼결정입니다. 배가 하루가 다르게 점점 불러 오기에 시간을 마냥 보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문제만을 안고 살기에 자신의 삶이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그는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그의 결정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사실 생각해보면, 합당하고, 의로운 결정인 것 같습니다. 분명 그러해 보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마리아를 돌에 맞아 죽게 한 결정도 아니고, 자신도 조용히 끊고자 하여 모두에게 유익한 결정인 것 같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의로운 결정인고로 합리적인 선택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결정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모습 속에서, 자신이 내린 결정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생기게 되면 심사숙고하여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결정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확신을 합니다. 자신이 결정이 최선의 결정이며, 그 결정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며 결정을 내립니다.
바로 죠지 뮬러가 그러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 죠지뮬러가 고아원을 설립하려고 할 때의 일입니다. 그가 살고 있던 브리스톨의 여기 저기에서는 “엄마“ ”엄마“를 찾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콜레라가 휩쓸고 간 거리엔 엄마대신 남겨진 아이들이 엄마를 찾는 울음소리와 신음과 고통이 대신 채우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엄마는 콜레라로 죽고, 아이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보았던 뮬러는 고아원을 세워 아이들을 보살펴야겠다는 열망과 갈망이 힘차게 솟구쳐 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생각보다 빨리 절망으로 다가왔습니다. 고아원설립을 위해서는 1천파운드가 필요한데 뮬러에겐 그런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그에게 말합니다.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는 생각은 오히려 하나님을 놀리는 일입니다. 현실을 보고 언제나 가능한 것만 시도하세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지요“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선택한 결정이 비록 합당하고 의로운 결정이라고 할지라도 그 결정이 최고의 결정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내린 결정이 최고의 결정이고, 최선의 결정이라고 단정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한다는 사실입니다. 고아원을 세우고자 하는 뮬러의 결정도 합당하고, 의로운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결정대로 될 수 있다는 인간의 교만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그런 결정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겐 최선의 결정이고,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에겐 최악의 결정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내린 최선의 결정이, 하나님에게 최악의 결정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지시에 니느웨로 가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스로 가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에게 그의 결정은 합당하고, 온전한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는 니느웨는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것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에겐 최선의 결정이 아니라 최악의 결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배 밖으로 던져지고,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 지내고,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니느웨로 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자신에게는 최선의 결정일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최악의 결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을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묻고,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결정을 내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요셉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합니다. 파혼이라는 해답을 찾은 요셉에게 하나님은 꿈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시길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20절 말씀)고 말씀하시며 너의 뜻을 철회하여, 파혼하지 말고 마리아를 데려와라“. 하십니다. 그리고 이름까지 지어주십니다. ”그가 백성을 구원할 자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사자의 음성을 듣고 비로소, 요셉은 생각하는 것조차 싫었던 그 아이가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 아이가 그렇게 이사야시대 때부터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야, 임마누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메시야가 그 아이라니! 그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로소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했던, 무지와 마리아와 파혼하려는 어리석음의 잠에서 그는 깨어나게 됩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가득했던 파혼의 결정을 뒤엎고, 마리아를 향해서 힘차게 달려갑니다. 비로소 그에게 밝은 해답이 주어졌습니다. 자신의 가슴을 바위처럼 억눌렸던, 무엇인가 깨끗하게 해결되지 않은 묵은 것이 명쾌하게 설명되었습니다. 그래서 달려갑니다.
이것이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해답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달려갑니다. 지금 마리아를 향해서 달려가는 이 발걸음은 주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순종과 헌신의 발걸음입니다. 나의 결정은 틀렸고 하나님의 결정이 맞습니다. 그 결정에 따르겠으며, 그 말씀대로 헌신하겠습니다“라는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주신 말씀을 듣자, 마자 그가 마리아를 향해서 달려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만약 그가 순종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하더라도 의심하고, 한번쯤은 깊이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쉽게 믿어지는 일이 아니기에, 믿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그럴 수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서울노회에 소속된 교회 중에는 예능교회가 있습니다. 북악 스카이웨이에서 서쪽으로 내려다보면 평창동이 있는데 거기에 예능교회가 있는데, 원래는 연예인교회였는데, 연예인들이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발전하여 연예인교회가 되었고, 나중에 예능교회가 된 것입니다. 연예인들이 성경공부를 처음 시작 할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연예인들이 모여서 마태복음 1장에 있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내용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연예인중에 한 젊은 청년이 성경공부를 시키는 목사님에게 자꾸만 딴 지를 걸었습니다.
그 청년연예인이 딴 지를 건 것은...“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 이런 허무맹랑한 것을 믿으라고 하느냐? 나는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우겼습니다. 그래서 성경공부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목사님도 입장이 난처했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구봉서 장로님이, 그 때는 장로님이 아닌 새 신자나 다를 바가 없는 구봉서 장로님이 그 젊은 연예인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 임~마! 지 남편 요셉도 믿는다는데 니가 뭔데 못 믿는다고 지랄이야! 지랄이?” 라고 하면서 그 청년을 나무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탄때가 될 때마다 여러분을 가장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 입니까? 무엇이 제일 안 믿어집니까?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아기 예수님을 낳았다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까? 마리아 본인도 믿고, 지 남편인 요셉도 믿었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가 믿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요셉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순종하고 마리아를 데리려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날아드는 돌무더기는 이제 더 이상 무섭지가 않습니다. 신경도 쓰이지 않습니다. 이제 그 어두웠던 장막이 걷히고 빛이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문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만을 믿을 뿐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그가 성령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기에 가능했습니다.
성령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도 성령의 인도함과 말씀에 순종함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알 수 없는 인생길을 걸을 때 더욱 그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은 우리 인생의 네비게이션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인생의 네비게이션입니다. 모르는길을 갈 때, 알 수 없는 길을 가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네비게이션입니다. 네비게이션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서 우리 인생의 네비게이션이 되시는 성령을 따라가게 되면 다른길로 가지않고, 정확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인도하는데로만 따라 가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네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음성에 순종하면 우리의 인생은 승리의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직진하라고 하면 직진하고 좌회전하라고 하면 좌회전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내면에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때로는 감동으로, 때로는 생각으로, 때로는 부담감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가 받는 감동이나 생각이나 부담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아닌지는 성경 말씀으로 분별하면 됩니다. 성경 말씀으로 분별하기 어려운 부분은 양심이 가르쳐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는 주로 양심이 평안으로 반응합니다. 하나님이 뜻이 아닌데 행하려고 하면 우리의 양심이 불안감이나 답답함 죄책감 등으로 반응합니다. 오늘 요셉이 음성을 듣고 마리아를 데려온것처럼, 우리도 성령의 음성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분명 여러분들은 승리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신앙생활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순종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순종함으로 큰 역사를 이룬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만장군은 몸에 난 문둥병을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씀에 순종할 때, 문둥병이 끼끗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던 것도, 성 주위를 일곱 번 돌고 함성을 지르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렇게 할 때 성은 무너지고 함락시킬 수 있었습니다.
미국 시골 통나무집에 병약한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문 앞에는 큰 바위가 있어서 출입하는데 매우 불편했습니다. 기도 중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집 앞의 바위를 매일 밀어라.” 그 후 8개월 동안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바위를 힘껏 밀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위가 조금도 옮겨진 것 같지 않아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측량해 보니 바위는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원망 섞인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동안 헛수고를 했습니다. 바위가 전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그랬더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기를 “나는 너에게 바위를 옮기라고 한 적이 없다. 그냥 밀라고 했다. 거울을 한번 보거라.” 청년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는 거울을 본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8개월 동안 그는 몰라보게 건강해졌고 근육도 생기고, 달고 살던 기침도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위가 옮겨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르더라도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믿어지지 않더라도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순종하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하나님의 위대한 뜻”이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면 이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해되는 것만 믿는 것, 역시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이성을 초월합니다. 우리의 사고를 초월합니다. 그것이 믿음이요, 그것을 믿는 것이 순종입니다.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순종으로 그는 예수님의 가문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친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파혼하지 않고, 성령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결과입니다. 순종은 우리가 모르는 축복을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요셉의 순종과 헌신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주의 사자의 음성에 순종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순종이 예수님의 탄생을 가능케하였습니다. 자신이 결정한 해답을 뒤로하고, 하나님이 주신 해답을 따르는 요셉의 얼굴에 드디어 미소가 깃들여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해답을 제시하며, 문제를 풀 답을 제시하며, 결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해결을 가져다 주지는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럴 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해답을 제시해줍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해답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할 때, 인간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에 순종할 때, 비로소 해결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대림절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바로 그 때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대림절은 바로 그 하나님을 묵상하며 우리의 일상가운데, 이미 임하신 하나님을 고대하는 절기입니다. 주님의 부름심에 순종하는 그 순간, 우리 앞에 있는 어려움의 문제는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여러분도 모르는 축복과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