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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성공회 스크랩 서울교구 인천) 전통 한옥과 서양식 기법을 도입한 강화 최초의 성당, 성공회 강화성당!
심규용(안토니오) 추천 0 조회 257 13.07.09 17: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젊은 나이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한 철종의 잠저인 용흥궁을 둘러보고 간곳은 바로 뒷편에 있는 성공회강화성당.

강화나들길의 14코스인 강화도령 첫사랑길이 시작되는 용흥궁공원 뒤쪽 높은 언덕에 있기에 한눈에 보인다.

성당 주변에는 키 큰 회화나무와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마치 이 집의 내력을 알려주듯이 빡빡하게 감싸고 있다.

 

강화도에는 유독 성공회의 성당들이 많이 있다. 대한성공회는 전국에 120여곳의 성당이 있고,

자치단체 한곳에 보통 하나의 성당이 있는 반면 섬지역인 작은 고장 강화에는 십여개가 넘는 성공회의 성당들이 있다.

 

그 이유는 영국에 본부가 있는 성공회가 처음 우리나라에서 포교를 시작하고 성당을 지었던 곳이 강화도였기 때문이란다.

1893년 영국인 왕란도 신부가 강화 갑곶리에서 성공회의 예배당 겸 사제관을 짓고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강화에서 점차 포교활동을 하면서 자리를 잡은 성공회는 1900년에 지금의 자리에 강화성당을 짓는다.

 

성공회는 가끔 들어보긴 했지만 그렇게 일반사람들에겐 익숙한 종교의 느낌은 아니다.

천주교나 교회의 건물들이야 전국 곳곳에 있고 일반인들과 친숙한 이미지가 강한데 말이다.

성공회는 1534년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해 나간 영국 국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따르는 교회이다.

성공회란 이름은 거룩하고(聖), 공번된(catolic,公) 교회라는 의미를 담은 한자이름이다.

 

기존 로마 가톨릭의 전통과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구교와 신교의 장점을 포용하고,

동서교회(로마가톨릭과 정교회)가 분열하기 이전에 초기 교회의 신앙과 교리를 따르고 있다.

영국이 지금도 유로와는 좀 거리를 두고 파운드화를 사용하는 등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지키고 있는 것도 종교색과 무관하지 않다.

 

한옥의 외관과 바실리카양식의 내관을 절충한 형식의 동서 10칸, 남북 4칸의 한식 중층건물은 독특하면서도 이색적이다.

전체적인 성당의 모습은 방주를 모체로 해서 디자인되었고 추녀마루 위에 솟아있는 용두들은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주는 배인

반야용선을 연상하게 한다. 성당의 외관에도 방주와 반야용선이라는 서양의 교회와 동양의 불교가 녹아들었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서울 정동에 있는 서울대교구 소속의 성당인데, 강화읍에 있기 때문에 강화읍성당이라고도 불린다.

한국에서 최초로 지어진 한옥 성당인데, 길상면 온수리 성당과 함께 한옥의 외관을 하고 있는 성당 건물로 유명하다.

물론 강화도에서 최초로 세워진 성당이기도 하다. 현재는 그 독특한 외형과 의미가 문화재로 인정되어 성공회 강화성당은

사적 424호로 지정 되었다. 대부분의 성공회 성당 건물들이 유럽의 수도원과 같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스타일인것에 비해,

강화성당은 2층의 한옥과 서양의 바실리카풍인 삼랑식 공법을 함께 접목했는데, 이것은 아마 전교 초기에 서양의 딱딱한

성당의 모습으로 건축하기엔 심리적인 저항도 있을 것이고 주민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익숙한 형태를 취해야 했기 때문이겠다.

 

 

 

 

 

 

 

성당은 고목들이 둘러싸고 있어 조금 어둡게 느껴지는데, 외각에는 궁궐이나 성처럼 돌을 촘촘히 쌓아올린 길다랗고 높은 담장이 있다.

붉은 대문에 원형의 태극문양과 높은 솟을대문, 그리고 문 양 옆의 창살의 태극무늬도 성당보다는 사당이나 서원, 양반댁을 떠올리게 한다.

여름의 한가운데 흘러내리던 땀방울도 나무그늘과 낮은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분위기에 급 시원해진다.

다만, 나무위에서 맴 매엠 맴맴맴하면서 길게 울어대는 매미소리만이 뜨거운 여름임을 알려준다.

성당이란 이국적이고 서구적인 모습보다는 산속에 있는 작은 암자를 만난 친근함이 다가왔다.

성당을 둘러보면 이곳이 초기 성당의 원형을 간직한 한국적인 성당이란걸 단숨에 알게된다.

철종의 생가인 용흥궁이 바로 앞에 있으니, 이런 한국적인 양식으로 지었던 것일까.

 

 

 

 

 

용흥궁공원에서 언덕길을 따라 용흥궁의 담장을 보면서 걷다보면 성공회 강화성당의 입구에 닿는다.

돌계단에서 바라본 성당의 외삼문은 전통사찰의 일주문이나 양반댁의 솟을대문을 떠올리게 한다. 성당의 입구라고 보기에는 쌩뚱맞다.

성당에는 외측의 외삼문과 내측의 내삼문을 두었는데, 꼭 사찰의 사천왕상이 그 사이에 있을것처럼 보였다.

성당의 내부는 비교적 단촐하다. 높다란 회화나무 한그루와 성당의 본관, 한옥의 사제관 한동, 동종 하나가 전부이다.

전통적인 한옥과 불교, 서양의 성공회의 건축양식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1900년 구한말에 지어진 건물이니, 아마 그 당시에는 이런 건물도 강화에서는 꽤 큰 건축물이었을 것이다.

 

 

 

 

 

외삼문을 지나면 종각에 미사 시간을 알려주었던 자그마한 동종이 하나 걸려 있다. 성당에서 만난 동종은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보통의 교회나 성당에서 보던 금빛의 딸랑 딸랑하는 외국종이 아닌 한국색이 물씬 나는 동종이 걸려있다니.

일반적으로 타국에 가장 먼저 침투하는 것이 종교와 문화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중기부터 중국을 통해 유입된 천주교가 일반인들에게 서서히 받아들여졌다.

학자들에게는 종교가 아닌 문화적인 축면과 신학문이라는 점으로 서학이라고 알려지면서 전파되었다.

지금도 지방의 섬들을 여행하다보면 의외로 많이 눈에 띄는것이 바로 교회나 성당이다.

일반 대중에게는 고달픈 삶에 한줄기 희망과 믿음이 필요 했기에 평등과 사랑을 강조한 종교는 구세주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섬이었고 척박했던 외딴 지역 강화에는 서양의 신종교들이 민초들을 구원하는 밝은 빛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강화도가 서울로 들어오는 뱃길을 막고 있으니 먼저 강화도에서 시험해 본 후 수도인 한양에서 포교를 했을 것이다.

 

 

 

 

 

내삼문에는 범종이 하나 걸려있는데, 일반적으로 보던 종과 달리 십자가 문양과 교회 관련 장식이 새겨져 있다.

성당의 입구에서 이런 동종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색다른 경험인데, 그 소리가 사찰의 종소리와 비교해 어떨지 모르겠다.

은은하고 멀리 울려퍼지는 종소리야 무엇이 다를까. 듣는이의 상태와 마음가짐이 다르겠지.

 

 

 

 

 

한문으로 된 天主聖展이란 글자가 한옥건물과는 어울리지만 성당의 이미지와는 웬지 낯설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전통 사찰의 느낌을 주는것도 아니고 향교나 서원의 분위기가 나는것도 같다.

천주성전이란 현판 아래 본당 입구의 4칸 문 기둥에는 보통 사찰에서 볼 법한 세로로 쓴 글씨의 주련이 걸려 있다.

전통건축물이 보통 홀수칸인것에 비해 이곳 성당건물은 짝수칸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의 두칸은 본당, 양쪽의 한칸은 복도이다.

문 사이 주련에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두루 흘러 만물과 동포의 즐거움이요, 백성을 깨닫게 하니 영생을 가르치도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의 성당인 강화성당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안쪽을 보니 지금도 미사를 보는것처럼 집기와 책들이 놓여있고,

실내화도 있었는데, 아마 미사를 보는 주말의 예배시간이 아니면 관람객들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닫아놓은것 같다. 성스러운 공간이니.

이곳에 남아있는 건물의 문짝, 글귀, 유리 한장까지도 100년이 훌쩍 넘은 소중한 문화재이다.

 

 

 

 

 

강화성당은 독특한 외관이 눈길을 끌지만 그 건물에는 성공회가 갖고 있는 신앙과 정신을 담고 있다.

전통 한옥과 서양의 교회가 융합된 모습은 언뜻 보기엔 이질적이나 문화적 배경이 다른 외국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성공회의 원래 건축양식보다는 이런 현지의 문화와 접목한 형태의 건축물이 거부감을 덜 주기에 이런 이채로운 양식을 선택했다.

서울 덕수궁 옆에 있는 성공회 서울대성당이 유럽풍의 서양양식에 우리나라의 색을 입혀 건축된 것이라면

성공회 강화성당은 한국적인 건축양식에 서양의 성당의 옷을 입혔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성베드로와 바울로 성당이라고도 불린다. 1897년 강화에서 처음 한국인인 강화도 사람 김희준에게

마가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한 것을 기화로 1900년 이곳 강화읍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언덕에 한국 최초의 성당을 세웠다.

성당을 건립한 이는 대한성공회 초대 주교인 한국명 고요한인 존 코프이다. 코프는 조선교구를 처음 만든이기도 하다.

정면의 4칸, 옆면의 10칸의 2층 건물로 나무로 기둥을 만들고 붉은색의 벽돌로 마감한 기와집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2층까지 뻥 뚫린 통층의 구조인데,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전체적인 성당 구조는 배 모양의 방주와 닮아있는데, 노아의 방주처럼 이 성당이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가 되라는 뜻이 들어있단다.

높은 언덕위에 둥둥 떠있으니 어쩌면 물 위에 배와 비견될 수도 있는데, 높은 회화나무는 돛이겠고 성당 입구의 외삼문은 뱃머리,

내삼문과 성당, 사제관은 배의 본체이겠다. 2층의 한옥건물 위에 걸려 있는 낡은 십자가가 이 건물이 성당임을 알려준다.

진짜 성공회강화성당이란 현판과 건물위에 작은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용흥궁의 부속건물이나 사찰로 오해할 수도 있을것 같다.

 

이 건물이 지어질 때가 한국에 서양 건축기술이 도입되던 때였고 많은 학교와 관공서 등도 서양의 고딕이나 로마네스크 풍으로 지어졌다.

성당이 세워진 1900년부터 일제가 강제로 합방한 1910년대까지 강화 지역 선교의 중심이 되었고

성공회 신학교인 성미가엘신학교 (현 성공회대학교)가 이곳에 설립된 이후 성공회 한국선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조용하고 아담한 성당안에는 가끔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만 들리고 이내 적막함과 고요함이 성당내에 잔잔히 흐른다.

 

 

 

 

 

성당의 내부는 대제대와 감실, 예복실, 회중석, 통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부분에 대제대가 있고, 회중석에는 작은 나무 의자들이 붙어 있으며 그 가운데 세례대가 있다.

대제대는 북쪽 한칸을 계단으로 높이고 제대를 놓은 후 정면에 성체를 봉안하는 성막을 안치했다.

천장까지 뚫려있는 내부는 중층 구조이고 한가운데 돌로 만들어진 성수대에는 중생지천이란 한자가 써있다.

실내는 외부와는 달리 고대 로마의 법정에서 사용하던 바실리카 양식이 사용되었는데, 중앙에 본당을 두고 측면에 복도를 만드는 기법이다.

제대 위에는 하나님을 뜻하는 ‘만유진원(萬有眞原, 만물의 참 근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현재는 100여 명이 매 주 이곳에서 예배를 드린다 한다. 요즘 많이 보는 도심의 교회들처럼 크고 멋들어진 건물은 아니지만,

이렇게 한적한 옛모습을 간직한 소박한 성당에서 기도를 드린다면 소원을 잘 들어주지 않을까.

 

 

 

 

 

성당의 본당 뒷편에는 한옥건물의 사제관이 있는데, 영락없는 한옥집의 모습이다.

강화도 성당을 관리하는 사제가 기거하는 건물인데, 입구에는 사제관이니 허락없이 출입을 금한다고 써있다.

붉은색의 작은 문에도 원안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지붕 한가운데에도 작은 십자가가 들어 있다.

 

 

 

 

 

경복궁 중건에 참여한 대목장인 도편수가 백두산에서 실어온 아름드리 적송을 다듬어 정성스럽게 건축한 성공회 강화성당.

높고 푸르른 회화나무가 전하는 싱그러운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성공회 강화성당 여행을 마친다.

종각 옆에는 초대주교이면서 강화성당을 건축한 존 코프 아니 고요한 기념비와 축성 100주년 기념비가 있다.

 

 

 

 

 

용흥궁 공원에서 바라본 성공회 강화성당. 높다란 회화나무와 2층의 본당건물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바다를 향해 스르륵 떠갈 것 같다.

멀리서 보면 사찰이나 궁터로 오해하기 딱 좋을듯한 건물이지만 엄연한 지금도 예배를 드리는 성당 건물이다. 그것도 100년이 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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