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은 우리 나라가 개국과 봉건적 쇄국의 갈림길에 처했던 1882년 12월 24일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 7세에서 15세까지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이후에는 부친의 유업을 물려받아 평양에서 상점을 경영하였다. 당시 극동의 풍운은 더욱 긴박해져 나라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조만식은 비분강개하여 상점의 문을 닫고, 2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학문을 수학하기 위해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숭실학교의 투철한 기독교 교육을 통해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에 깊이 감동한 그는 기독교에 입교,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당시는 일제가 을사보호조약의 체결로 한국을 그들의 보호국으로 삼아 주권을 근본적으로 침해하던 치욕적인 때였으며, 이 준, 이위종, 이상설 등의 헤이그 밀사사건, 고종 퇴위, 군대 해산 등으로 우리 나라의 정세가 급격히 기울던 비통한 상황이었다.
1908년(5회) 격동의 시대에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조만식은, 일제를 비롯한 열강들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더욱 실력을 길러야겠다는 굳은 결심 아래,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정칙영어학교에 입학하여 3년동안 영어를 전공하였다. 이때, 그가 우연히 읽기 시작한 것이 인도의 성웅 간디의 자서전이었다. 간디의 민족주의와 비폭력 무저항주의에 그는 크게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사상과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29세 되던 해에 정칙영어학교를 졸업하였는데 그해가 바로 일본이 한일합방으로 한국을 완전히 삼키고 말았던 해이다. 조만식은 조국의 상황에 대해 통분하면서도 미래를 내다보면서 더욱 큰 힘을 기르기 위해 명치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재학중에는 동경에서 김정식, 백남훈과 함께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의 조선인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방학이 되어 향리에 귀향할 때면 연락선이 부산에 닿는 즉시로 구두와 모자를 벗어 팽개치고, 한복에 갓, 감투를 쓰고 평양으로 향하였다. 우리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된 후, 점차 황폐해가는 경부선 주위의 빈한한 농촌 풍경을 기차에서 바라다보며 그의 가슴은 미어질 듯하였다. 모든 기본권과 자유를 압제 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최소한의 물질적 생활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는 동포에 대한 간절한 애정 때문이었다.
1913년, 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하는 즉시 귀국한 그는 식민지 조국의 교육 현장에서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늙은 부모와 어린 처자를 평양에 남겨두고 단신으로 평북 정주로 가서, 민족교육의 선각자이며 동지인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의 교사로 취임하였던 것이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진실한 애정과 광복에의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 조만식의 웅변은 학생들의 폐부와 심장을 꿰뚫었다. 이때, 그의 교육을 받은 이들로서는 내과의사 백인제 박사, 주기용, 주기철 목사, 김홍일 장군, 김승엽 박사, 음악인 박경호, 변호사 정재윤, 그리고 시인으로서 우리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소월 김정식 등이 있다.
조만식은 1915년 교장에 취임하여 월급을 한푼도 받지 않는 무보수 교장으로서 후진 양성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919년 3 1운동을 일선에서 지도하기 위하여 교장직을 사직하고 기미독립운동을 지휘하다가 평양 감옥에서 1년 반을 복역한 후 다시 오산학교의 교장에 복직하였다.
1921년에 평양 YMCA의 총무로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의 장로로 취임하면서 평생의 심우(心友)인 오윤선 장로, 김동원 장로와 함께 민족의 경제적 실력배양을 위해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러한 조만식의 자급자족, 국산품 장려, 소비 절약, 금주, 금연 등의 실천 요강은 민족 경제 수호에 앞장섰으며, 청년회, 소년단, 기생조합에서도 적극 지지 호응하여 민족운동으로 성장하였다. 이 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휘말려 민족 경제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하다가 1940년대에 재개되었다. 또, 청년시절부터김성수, 송진우 등과 연정회를 발기,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및 문화운동을 전개해오던 선배님은, 1923년에는 이들과 함께 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여 민족대학의 설립을 위해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가 이에 대응하여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고, 이 운동을 물리적인 간섭과 탄압으로 방해하여 결실을 맺지는 못하였다.
1920년대의 우리 나라는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의 대립으로 독립운동의 진로 모색에 어려움이 많았다. 3 1운동 이후 민족주의자들은 한때 독립투쟁을 강화하고자 사회주의자들과 연합하기도 하였다. 1927년에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대동 단결하여 신간회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이는 기회주의자들을 배격하고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통한 민족의 단결로 단일전선을 형성, 민족의 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조만식은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서 신간회 결성에 온갖 정력을 쏟았고, 신간회 중앙위원 겸 평양 지회장으로서 신간회의 조직과 확대 발전을 위하여 침식도 잊고 동분서주하였다. 숭실학교의 후배인 조병옥 박사도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본부 재정총무 겸 경성지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신간회는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을 지원하여 거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등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도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과 사회주의자들의 배신으로 1931년에 해산되고 말았다.
49세가 되던 1930년, 선배님은 관서체육회장에 취임하여 스포츠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와 지방민과 도시민의 화합에 힘을 썼고, 1932년에는 조병옥 박사와 함께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언론을 통한 민족운동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조선일보의 인수는 조만식과 조병옥 박사가 전국적으로 모금한 30만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장에 조만식, 전무 겸 영업국장에 조병옥, 편집국장에 주요한이 취임하여 우리 언론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1945년 8.15광복과 함께 북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은 조만식에게‘북조선 인민정치 위원회’의 위원장에 취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그가 이에 응하지 않자 무력으로 위협했다. 이때 그는 "너희들은 대소사에 권총을 꺼내가지고 야단이니 권총에 겁낼 내가 아니다. 대포를 갖다 대보라. 무서워하간 ! 너희들이 근본적으로 태도를 고치기 전에는 자리를 같이하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 당당히 맞섰다. 1945년 11월 3일, 조만식은 소련군의 감시와 적위대의 총검의 위협 밑에서도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어, 반공 노선을 분명히 견지하면서 반탁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창당 1개월도 못 되어 조선민주당의 조직이 전북한 지역에 확대되자, 소련군 당국은 지도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고, 특히,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한국신탁통치안을 조선민주당이 반대한 것을 빌미로 무차별 검색, 구금, 체포, 처형을 자행하였다. 1946년 1월 5일, 선배님은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의 좁은 방에 감금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전해지자 북한 전지역에서는 반탁 반공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조선민주당의 청년 당원들은 몇 차례에 걸쳐 고려호텔에 잠입, 선배님을 구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북한 동포를 두고 나 혼자 어디로 가겠는가?" 하는, 한결같은 답변뿐이었다. 조만식은 죽음을 각오하고 슬픔과 죽음의 땅에서 또 한번 지배자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의 저항을 무기한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6.25 한국전쟁 때 공산당에게 학살된 것으로 알려진 고당 조만식의 모습은 이 강산에서 사라졌지만, 그가 남기신 거룩하고 위대한 업적은 이땅의 민족적인 정신 풍토와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다. 고당 조만식은 실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진정한 숭실인이었으며 우리 민족운동에 있어서 만세 불후의 사표이시며, 한국의 '간디'이시다.
해방후 남북이 분단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가족들만 남하시킨 채 자신은 일천만 북한동포들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결단, 끝끝내 남하를 거부하였다. 민족의 별 '조만식 장로', 그가 가족들과 소식이 끊긴지 40년만인 1991년에 이르러서야 1950년 10월 18일 평양에서 학살되었다는 비보가 비로소 남한에 전해졌다. 선생의 유해는 지금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이제 조만식 장로는 국립묘지에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영변하게 된 것이다. 순국과 순교의 횃불을 든 그의 인생은 지팡이를 든 광야의 모세처럼 이 나라와 이 땅이 존속하는 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첫댓글 고당 선생님의 가계현황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부제학공의 다섯째인 변정(變正)공의 후손입니다. 창녕조문 일족분들이 매우 궁금해 하시는 것 같아 올려 봅니다.
松茂-俊-仁鐸-隨-益淸-信忠-尙治-變正-匡輔-若-美蔭-簡-鱉-汝信-八元-應發-廷漢-英萬-東老-重迪-德輝-◯玉-養福-景學
-晩植-七崇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