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존호고(孔子尊號考)
공자에게 어떠한 시호가 봉해젔는가
德田 張俸赫
1. 공자는 역사적으로 어떠한 평가를 받아 왔는가?
[하늘이 공자를 내지 않았다면, 만고의 세월이 칠흑의 밤과 같이 어두웠을 것이다.(天不生仲尼, 萬古長如夜)]는 표현은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 공자를 비하하는 표현으로는 장자서(莊子書)의 도척편(盜 篇)에 도구(盜丘)라 하였는데, 도척(盜척)은 춘추시대의 큰 도적으로서 그 부하가 수천명이나 되었으며, 천하를 횡행하며 포학한 짓을 다하여 악명 높은 존재의 대명사로서, 공구(孔丘)의 성을 갈아 도척의 [도]를 따다가 도구라고 하였으니 그 폄하의 정도를 알 수있다. 근세에 이르러 5 4운동의 주역중에 한 사람이였던 오우(吳虞 1872~1949)는 [도척의 피해는 일시에 그쳤으나, 도구의 끼친 화는 만세에 미친다.(盜 之爲害在一時, 盜丘之遺禍及萬世)]고 하여 공자의 인격과 학문과 사상에 대하여 비평하는 자세를 떠나서 배척하는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을 신봉하였던 모택동(毛澤東:1893~1976)은 그의 나이 41세 되던 1938년의 중국공산당 육중전당(六中全黨)대회에 제출한 문서에 [孔夫子의 뒤를 밟아 따르고, 孫中山의 愛民사상에 이르도록 우리들은 당연히 총단결하여 저 빛나는 진귀한 유산을 계승하여야 할것이다.(從孔夫子到孫中山, 我們應當給以總結, 承繼這一 珍貴遺産)]고 하였다. 유심사상계(惟心思想界)에서 존경과 숭배의 마음을 표현하는 존공(尊孔)과, 비평과 비하의 마음을 표현하는 비공(批孔)과, 반대와 타도의 마음을 표현하는 반공(反孔)이 있었는가 하면, 유물주의를 신봉하는 사상계(思想界)에서도 정도는 다르지만 거의 똑같은 일들이 반복되어 왔었던 것이다.
사상적으로 존경과 배척이 있었는가 하면, 시대적으로도 공자의 인물됨과 업덕에 대하여 선진(先秦)시대의 평가와 진한(秦漢)시대의 평가가 달랐다. 한나라의 무제(武帝)년간에 동중서(董仲舒:179~104 B.C.)에 의하여 유교(儒敎)가 국교로 정해진 이후에도 존경과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평가 보다도, 공자의 학술사상에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여 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왕조시대가 이어지는 동안 청나라 말기까지 존경의 뜻으로 올린 존호(尊號)와 시호(諡號)가 시대적으로 여러차례 가봉(加封)되었으니, 그 내용을 중심으로 공자는 역사적으로 과연 어떻게 예의를 다하여 정중한 대우를 받아 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학역동인(學易同人)으로서 조금은 관심사인 것이다.
2. 공자의 선대에 올려진 봉호
중국의 마지막 왕조였던 청나라를 세운것은 여진족이다. 문약(文弱)하고 물빈(物貧)하였던 한족(漢族)을 몰아내고, 역사적으로 가장 넓었던 영토를 확장하였던 청왕조가 한족을 억압으로만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청나라가 건국된 뒤 몇십년 후였다.
청왕조의 제4대 제왕이였던 세종(世宗:재위기간 1723~1735)은 년호를 옹정(雍正)이라 하였는데, 즉위한 첫해인 옹정원년(1723)에 한족의 전통적 종교인 유교를 존숭함으로써 한족을 포용하고자, 공자의 오대조에 이르는 선조 다섯분에게 봉호(封號)를 올렸다. 그 결과 한족들은 여진족이 지배하는 청왕조에 적극 협력하고 충성을 바침으로서, 요순(堯舜)간의 선양(禪讓)이래 많은 태평세월 중에서도 가장 넓은 영토에 가장 조용했던 청대성세(淸代盛世)를 맞이 하였다. 옹정제(雍正帝)로부터 건융제(乾隆帝)에 이르는(1723년부터 1795년까지 72년) 동안은 아무런 반란이 없어서, 문화적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실학사상과 고증학이 성행하였으며, 중국 최대의 총서인 사고전서(四庫全書) 10,223부 172,626권을 경 사 자 집으로 나누어 간행하고, 일곱번을 등본하여 일곱곳에 보관하고도 국고가 충분하였다.
문화사적인 시각으로 살펴볼때에, 청대성세의 72년간은 공자의 오대에 이르는 선대조에게 봉호(封號)를 올림으로서, 한족들의 협조와 충성에는 성공하였으나, 기실은 공자의 조부로부터 증조부 고조부 오대조의 사조(四祖)에 대하여는 오늘날까지도 생몰년은 물론, 평생동안의 사적에 대하여 알려진바 없이, 오직 그 성명만이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그 이유중의 하나가 공자의 선대는 송나라의 왕족이었는데, 공자의 육대조 할머니가 당대의 절세가인으로서, 송나라의 태제였던 화보독(華父督)이 눈독을 들여 빼앗으려고 육대조부(六代祖父)인 공보가(孔父嘉)를 살해하고 그 후손마져 죽이려 하자, 노나라로 피신하여 숨어 살았기 때문에 사조(四祖)의 평생 사적을 알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청나라의 옹정제가 공자의 오대조에게 올린 봉호는 다음과 같다.
六代祖(孔父嘉) → 五代祖(목금보 木金父)에게는 肇聖王 → 高祖(기보 祁父)에게는 裕聖王 → 曾祖(방숙 防叔)에게는 聖王 → 조부(백하 伯夏)에게는 昌聖王 → 부친(숙량흘 叔梁紇)에게는 계성왕(啓聖王)이라고 추봉(追封)하고, 곡부(曲阜)에 있는 공묘(孔廟)의 숭성사(崇聖祠)에 신위를 모시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를 모셨다.
3. 공자에게 추봉된 시호들
역사적으로 공자에게 올려진 존호(尊號)가 여러차례 있었으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왕(帝王)들로부터 올려진 존호는 대략 13회가 되는데, 그 내용을 시대순으로 열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이부(尼父) 공자의 명(名)은 구(丘),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노나라의 애공(哀公) 16연(B.C.479) 4월 을축(乙丑) 11일 서거 하심에, 애공이 조문할때에 [오호 슬프도다 이부여!]라고 하였는데 이부에 대하여 경학자(經學者)인 정현(鄭玄)은 시호(諡號)라고 한 반면, 근세의 사학가인 양백준(楊伯峻)은 춘추좌전주(春秋左傳注)에서 말하기를 [당시 애공의 나이가 유소(幼小)하여 70이 넘는 노웅에게 부(父)의 칭호를 베풀었다]고 하여 두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 한서(漢書)의 평제기(平帝紀)를 살펴보면 서한(西漢)의 11대 제왕인 평제(平帝) 원시원년(元始元年:AD1년)에 [공자를 포성선니공으로 시호를 추증하였다(追諡孔子爲褒成宣尼公)]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이 공자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시호(諡號)를 봉한 첫 기록이다. 포(褒)는 못잊어 기린다는 뜻이고, 성(成)은 집대성(集大成), 선(宣)은 문선(文宣)의 뜻으로 보인다.
㉢ 문성니부(文聖尼父) 공자에게 두번째로 추봉(追封)된 공식적인 시호로서,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16연(AD.492)에 [문성니보라 고쳐서 시호를 올리고, 공묘(孔廟)에 고하였다(改諡文聖尼父, 告諡孔廟)]라는 기록이 위서(魏書)의 고문기(考文紀)에 보인다.
㉣ 추국공(鄒國公) 주서(周書)의 선제기(宣帝紀)와, 북사(北史)의 주선제기((周宣帝紀)에 기록되기를 대상이년(大象二年:AD.580)삼월 정해(丁亥)에, 공자를 추국공으로 진봉하였다(詔進封 孔子爲鄒國公)]고 하였는데, 청나라의 이름난 사가였던 양옥승(梁玉繩)은 [人表考]주에서 공자의 출생지와 무관한데 추국공에 봉한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였다. 추국공이라는 봉호(封號)는, 맹자에게도 송(宋)나라 원풍(元豊) 6년(1083)에 추봉된바 있다고 곡부현지(曲阜縣志)에 기록되어 있다.
㉤ 태사(太師) 공자에게 올려진 봉호(封號)의 한가지로서, 구당서(舊唐書)의 고종기(高宗紀)와 예의지(禮儀志)에 기록되기를, 당나라 고종 건봉원년(乾封元年:666) 1월에 공자묘를 넓혀서 사우(祠宇)를 개수(改修)하고 태사의 봉호를 추증하였다고 하였다.
㉥ 문선왕(文宣王) 공자에게 올려진 시호(諡號)의 한 가지로서,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27년(739) 8월 갑신에 공선부(孔宣父)를 문선왕(文宣王)으로 추증하였다고 구당서(舊唐書)의 현종기(玄宗紀)에 기록이 있다. 문선(文宣)이란 뜻은 귀족계급의 전유물이였던 글을 만천하 아랫백성들에게 베풀어 보급하였다는 뜻으로, 이후에도 문선(文宣)이라는 어휘를 끼워서 시호가 진봉(進封)되는 일이 거듭되었다. 여기에서 공선부(孔宣父)라는 말은, 공자에 대한 존칭으로 당나라 태종년간에 부르기 시작한 존호(尊號)이다.
㉦ 현성문선왕(玄聖文宣王) 공자에게 올려진 시호의 한가지.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원년(大中祥符元年:1008) 10월 무오(戊午)에, 공자에게 제왕(帝王)이라는 시호를 추봉하고자 하나, 혹자가 말하기를 제호(帝號)는 부당하다고 하니, 드디어 현성문선왕이라고 시호를 올렸다고 송사(宋史), 진종기(眞宗紀)에 보이고 있다. 현성(玄聖)이라고 하는 것은, 공자의 어머니가 흑제(黑帝)를 몽감(夢感)하여 공자를 나으셨으므로 현성이라 한다는 구절이 춘추위(春秋緯)의 연공도(演孔圖)에 있다. 후한서의 중장통전(中長統傳)에도 공자를 현성으로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장자서(莊子書)의 천도(天道)편에서도 현성이라는 어휘가 보인다.
㉧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 지성(至聖)이라는 뜻은 지극한 성인 또는 최고의 성인으로, 사기의 공자세가(孔子世家) 끝부분에 사마천(司馬遷:145-86B.C.)이 공자의 업적을 논하는 글가운데 [천자 왕후로부터 나라안의 육예(六藝)를 담론하는 모든사람에 이르기까지, 공자의 말씀을 판단기준으로 삼으니, 그는 참으로 최고의 성인(至聖) 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自天子王侯, 中國言六藝者, 折中于夫子, 可謂至聖矣!)]고 하여, 처음으로 공자를 지성(至聖)이라 호칭하였다. 현성문선왕이라 시호를 올린지 4년 후인 1012년 12월 임신(壬申)에 개시(改諡)하여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라 하였다고, 송사(宋史) 진종기(眞宗紀)에 나타나 보이고 있다.
㉨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에게 올릴 수 있는 가장 의미가 깊은 시호. 최고의 예우와 정중한 예의를 다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원나라 7대 제왕이었던 무종(武宗), 대덕(大德) 11년(1307)7월 신사에,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을 대성지성문선왕으로 가봉(加封)한 것이라고 원사(元史)의 무종기(武宗紀)에 보이고 있다.
지성(至聖)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최고의 성인, 문선왕은 제왕과 권문세족들의 전유물인 글의 이치를 아랫백성들에게까지 끌어내려 베풀어준 왕이라는 뜻이 있다. 여기에 대성(大成)의 의미를 가봉하였는데, 맹자서의 만장하(萬章下)에 나오는 집대성에서 연유된 어휘이다. 맹자는 공자의 인물됨을 백이(伯夷) 이윤(伊尹)과 유하혜(柳下惠)와 견주어 표현하면서, 공자는 성지시자(聖之時者)인데 아울러 집대성하신 분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집대성(集大成)이란 악기연주를 비유한 말로서, 한가지의 악기로 연주하는 소성(小成)도 아니요, 악기연주의 일변(一變)으로 끝나는 일성(一成)도 아니며, 여러가지 악기, 즉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토(土) 초(草) 목(木) 포(匏)로 연주하되, 일변일성(一變一成)이 아닌 구변(九變)의 종성을 집대성이라 하는 것이다. 백이(伯夷) 이윤(伊尹) 유하혜(柳下惠)와 같은 인물의 일을 모아서 대성인(大聖人)의 일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공자는 지(知)에 다하지 않은것이 없고, 덕(德)에 온전하지 않는게 없다는 의미의 대성(大成)인 것이다.
그래서 경학(經學)을 연구하는 사가(史家)들도 공자에게 올려진 시호중에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란 시호가 가장 적절하고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경학사(經學史)를 서술하면서 공자의 시호를 이것으로 기술하여 놓고 있다.
이 시호는 공자의 인물됨과, 학문의 업적, 다함이 없는 지(知)와, 온전한 덕을 조화있게 표현하여 올려진 시호로 여겨진다.
원나라 무종(武宗)은 시호를 올린 두달후인 9월에 [孔子에게 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시호를 加封한 것을 백성에게 알리는 碑文(加封孔子 大成至聖文宣王 詔書碑)]을 새겨 세웠다. 이 글에 [공자가 아니면 공자이전의 성인이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고, 공자가 아니면 공자 이후의 성인이 본받지 못할 것이니, 이른바 요순(堯舜)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시고 문왕과 무왕의 법도를 밝히시어서, 백왕의 모범이 되었으니 만세의 사표가 되었도다(蓋聞 先孔子而聖者 非孔子無以明 後孔子而聖者 非孔子無以法 所謂祖述堯舜 憲章文武 儀範百王 萬世師表者也)]고 하였으며, 이어지는 비문에
[짐은 으뜸이 되는 실마리를 이어받고자 아름다운 풍속을 우러러 존경하며, 옛규범에 따라 다스리며, 봉호를 올림에 성대하게 거행하고, 대성지성문선왕이라 호를 추가하며, 큰 소를 잡아 제사를 모신다(朕纘承丕緖 敬仰休風 循治古之良規 擧追封之盛典 加號大成至聖文宣王 祀以太牢)]고 하여, 지극한 정성을 보이는 문장을 사용하였다.
㉩ 지성선사(至聖先師) 명나라 11대 제왕이었던 세종(世宗:嘉靖) 9년(1530) 11월 신축(辛丑)에 [孔廟의 제사의식을 고쳐서 바르게 하고, 공자의 시호를 지성선사로 정하였다.(更定孔廟祀典 定孔子諡號曰至聖先師)]고, 명사(明史)의 세종기(世宗紀)에 보이고 있다. 선사에 관한 의미를 살펴보면, 맹자는 아성(亞聖), 자사는 술성(述聖), 증자는 종성(宗聖), 안자는 복성(復聖)이라하고, 공문(孔門)제자들을 일컬어 선현(先賢)이라 하므로, 가장 존숭(尊崇)하여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사성(四聖), 십철(十哲), 선현(先賢)의 선사(先師)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곡부현지(曲阜縣志)에 보인다.
㉪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聖文宣先師) 공자에게 추존한 시호의 한가지, 청나라 세조(世祖:순치) 2년(1645) 정월 정미(丁未)에 [공자의 神位를 大成至聖文宣先師로 하였다.]는 기록이 청사교(淸史 )의 세조기(世祖紀)와 예지(禮志)에 보인다.
여기에서의 대성은 집대성의 대성이 아니고, 옛날 공자께서 찬역(贊易)하여 말하되 "大哉라 乾元이여"라 하셨으니, 이르되 대성이요, "至哉라 坤元이여"라 하셨으니, 이르되 지성이니, 참으로 공자의 큰덕이 아니고서는 건과 곤을 마땅하게 짝맞추어 표현할 수가 없는 것처럼, 참으로 공자의 큰덕이 아니고서는 군왕(君王)과 선사(先師)를 겸하여 감당할 수가 없으므로 선사라 하였다고, 건융(乾隆)년간(1736-1795)에 진사가 되어 복주( 州)의 지주(知州)를 지낸 반상(潘相 생몰년 미상)이 저술한 곡부현지(曲阜縣志)에 설명되어있다.
㉫ 이상에서 살펴본 11가지의 존호이외에도 당나라 시대 AD637년에 선부(宣父)라는 시호가 추존되어, 모두 열세차례의 시호가 올려졌던 것이다.
4. 공자에 대한 존호와 폄칭
통치권을 지닌 제왕에 의하여 죽기전의 공적을 사정하여 베풀어지는 칭호가 시호이다. 앞에서 살펴본 결과, 왕조가 바뀔때 마다 공자의 시호에 대한 의미부여가 가중되었다. 중국의 마지막 왕조였던 청나라에서 [대성지성문선선사]로까지 의미가 증가하여 부여된 시호를 마지막으로 하여, 앞으로는 왕조시대가 부활하지 않는한 더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시호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공자를 높여 호칭하는 존호와, 내려서 호칭하는 폄칭(貶稱)이 있는데, 존호는 공자의 학술사상을 숭앙하는 쪽에서 시작되고, 폄칭은 불가나 도가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폄하하여 부른다 하여 그 학술의 사상적 가치와 설파한 이치의 무게가, 아직까지 낮아진 적은 없다고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자에 대한 존호와, 폄칭으로 표현되는 몇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존호의 예
㉠ 소왕(素王)
소왕이라는 의미는, 물병에 물이 가득 차듯이, 몸과 마음에 왕자지도(王者之道)를 갖추었으나, 왕노릇을 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학술사상가들의 저술에서 공자에 대하여 여러차례 소왕이라고 표현하여 오고 있다.
공자를 맨처음 소왕으로 표현한 학술사상 전적으로서는 회남자(淮南子)의 주술훈(主術訓) 끝부분에 나타나는데, 주술의 주는 군왕을 뜻하고, 술은 도(道)를 뜻하는 것으로서, 군왕의 자질적 도를 논술한 편목이다. 이 편목에서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文) 무(武)의 왕도를 논하고, 마지막으로 공자는 왕노릇을 하지 않았으나 자질적으로 왕도를 갖추었다하여, 소왕이라 할 수 있는 근거를 서술하여 놓고 있다. 아울러서 이 편목에서는 공자가 춘추를 쓰면서 52개의 나라가 망하고, 36군왕이 시해(弑害)를 당하는 원인을 밝혔으므로, 왕도를 논함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공자를 소왕이라 표현한 곳은, 명나라의 경학자로 이름난 손곡(孫穀)이, 위서(僞書)의 일문(佚文)을 모아 편술한 [고미서(古微書)]의 논어위에 [자하가 말하기를 중니를 소왕이라 하였다(子夏曰 仲尼爲素王)]고 하여, 이미 공자의 생존시에 이러한 표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왕충(王充 27-100)이 저술한 [논형]의 정현(定賢)에서 공자를 소왕이라 지칭하였는데, 왕충은 학술사상적으로 공자의 학문에 대하여 최초로 의문을 제기한 인물이기도 하다.
다음으로는 후한의 경학자였던 서간(徐幹 171-218)이 저술한 [중논(中論)]은, 경전에 의거하여 성현의 도의를 설명한 책이다. 이책의 귀험(貴驗)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공자를 소왕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뒤로부터 한나라 이후에 오늘날까지 학술사상가들은 공자를 소왕으로 존칭하여 표현하였다.
㉡ 선사니부(先師尼父)
수나라 조정에서 한동안 불교를 중요시하고, 유교를 업신여기는 중불경유(重佛輕儒)정책을 펴기 이전에, 문제(文帝)가 수조(隋朝)의 개황지초(開皇之初)에 공자를 존경하는 호칭으로 선사니보(先師尼父)라 불렀다.
㉢ 만세사표(萬世師表)
청나라의 제 3대 제왕이었던 강희황제(재위1662-1722)가 공묘(孔廟)의 대성전(大成殿)에 [만세사표(萬世師表)]라고 제목하여 현판을 걸었는데, 이는 공자를 칭송하는 표현인 것이다. 그 이전에 원나라의 무종(武宗)도 이러한 표현을 비문에서 사용하였다.
㉣ 공성인(孔聖人)
성인이란 학덕을 갖추고 신명불측(神明不測)하며, 인(仁)의 도를 구현하는 지상인(至上人)으로서, 하늘이 낳은 유덕자(有德者)를 말한다. 공자 스스로도 논어의 술이편에서 [성인은 만나볼 수 없다. 군자라도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聖人 吾不得而見之矣 得見君子者 斯可矣)]고 하여, 성인만나보기를 갈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공자의 생존시에 이미 성인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좌전(左傳)의 애공 12년조에, 노나라의 자공은 오나라의 태재(太宰)와 회담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그당시 공자의 나이 69세, 자공은 39세였다. 그때의 대담내용이 [논어]의 자한(子罕)에 나오고 있다. [오나라 태재가 자공에게, "공자께서는 참으로 성인이십니까? 정말로 다능하십니다."고 말하자, 자공은 "진실로 하늘이 높이 성인이 되게끔하고 있으며, 또한 다능하십니다.(太宰問於子貢曰 夫子聖者與 何其多能也 子貢曰 固天縱之將聖 又多能也)]고 하였다. 맹자는 공자를 [성지시자(聖之時者)]라고 표현하였고, 순자는 비십이자(非十二子)편에서 [孔子는 성인이였으나 득세하지 못했다(聖人之不得勢者)]고 하였다.
㉤ 공부자(孔夫子)
부자(夫子)는 고대에 있어서 남자에 대한 존칭이다. 논어의 글가운데에서 공자에 대한 존칭으로 이미 20여 차례 사용되였다. 자(子) 또한 남자에 대한 미칭(美稱)이나 존칭으로 쓰였으며, 논어에서도 자(子)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공자라는 표현은 존칭이므로 굳이 공자님이라 표현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경어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孔子께서]로 표현함이 타당 할것으로 여겨진다.
(2) 폄칭의 예
㉠ 공이선생(孔二先生) 공이(孔二)의 이(二)는 공자의 가족관계를 들추어내서, 비하시키려는 의도로 표현되는 호칭이다. 20세기 초반에 중국에서는 청나라가 망하고 민국정부가 세워진지 8년이 지났으나, 봉건적인 구시대의 제도와 구시대적 문화로부터 탈피하지 못하고 있음이 젊음이들 가슴에 울분으로 변하였다. 반봉건을 앞세워 민주주의와 과학정신을 표방한 신문화 운동이 1919년 5월 4일 북경에서 학생과 군경의 충돌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이름하여 오사문화혁명(五四文化革命)이다. 이때에 많은 지식인들이 앞다투어 반봉건적(反封建的) 글을 쓰면서 공이선생(孔二先生)이라 표현하였다. 공자에게는 맹피(孟皮)라는 이복형이 있었으나, 족병(足病)으로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세번째로 안씨(顔氏)에게 장가들어 중니(仲尼)를 낳았는데 중(仲)은 버금으로 두번째다는 뜻이다.
전현동(錢玄同)이 [중국금후지문자문제(中國今后之文字問題)]라는 논설문에서 공이선생이라 하였고, 오우(吳虞)가 쓴 [흘인여례교(吃人與禮敎)]라는 논설문에서 공이선생이라 표현하였는데, 吳虞는 孔子를 극단적 용어로서 비판을 가하고 비하하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 도구(盜丘)
도적무리의 괴수였던 도척(盜 )의 도(盜)를 공구(孔丘)의 공대신에 성(姓)을 갈아 도구라 표현한 말로, 도가서(道家書)의 조종(祖宗)중에 한가지인 장자서(莊子書)에 나타나 보이고 있다. 오사문화혁명시기에 오우(吳虞)는 도구의 끼친 화는 만세에 미친다고 극단적인 비판논리를 전개하였다.
㉢ 유동보살(儒童菩薩)
보살중에 동(童)보살이니 폄칭(貶稱)이요, 유가의 유동(儒童)이니 폄칭(貶稱)이다. 남송(南宋)의 나필(羅泌)이 쓴 전설자료인 [노사(路史)]에서 말하기를, 조천지경(造天地經)에 공자를 유동보살이라 하였다고 소개하였다.
㉣ 현궁선(玄宮仙)
도교(道敎)에서 공자에 대한 폄칭의 한가지이다.
㉤ 태극상진군(太極上眞君)
도교에서 공자에 대한 폄칭의 한가지이다.
㉥ 광정동자(光淨童子)
불교에서 공자에 대한 폄칭의 한가지이다. 남조(南朝)시대에 승려였던 혜통(慧通)이 이렇기 호칭하기를 시작하였는데, 공자를 불제자(佛弟子)로 폄하(貶下)시켜 표현한 것이다.
㉦ 흑제지자(黑帝之子)
공자의 어머니가 이구산(尼丘山)에 올라 아들낳기를 빌때에 흑룡(黑龍)의 정(精)을 받아 낳았다는 전설적 칭호로서, [춘추위(春秋緯)]와 [논어참(論語讖)]에도 이러한 표현이 보인다.
5. 맺는말
공자에 대한 존칭보다도 폄칭이 더 많았다는 것은 종교적인 반대 시각에서 비롯된것으로 보아진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공자를 추앙하여 존경하는 표현을 찾아 본다면 수 없이 많을 것으로, 청나라 말기와 민국초기를 거치면서 정치에 학술에 명성이 높았던 강유위(康有爲:1858~1927)는 공자의 본뜻은 제도의 개혁에 있다는 의미에서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30편 21권을 저술하였다. 이책의 권 8에서 공자는 법을 짓는 왕(孔子爲制法之王)이라는 제하(題下)에서 고문전적(古文典籍)의 내용을 인용하여, 공자를 신왕(新王) 소왕(素王) 문왕(文王) 성왕(聖王) 선왕(先王) 후왕(後王) 왕자(王者) 등으로 호칭할 수 있는 근거를 논증하여 놓았다.
공자는 시대여건에 따라서 성인(聖人) 성왕(聖王)으로 존칭되었는가 하면, 동자(童子)나 도구(盜丘)로 폄칭되기도 하였는데, 20세기의 이름난 사학가(史學家)였던 고힐강(顧 剛:1893~1980)은 문헌학적인 차원으로 중국의 고대사를 고쳐썼다고 볼 수 있는 [고사변(古史辨)]의 이책(二冊)에서, 춘추시대에 공자는 군자로 인정받았으나, 전국시대에는 성인으로 인정받았고, 서한(西漢)시대에는 교주로 추대되고, 동한(東漢)시대에는 완전한 성인으로 인정된 이래에, 5 4문화혁명이후에 성인이나 군자로 표현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사가(史家)로서 공자에 대한 호칭표현을 분석적으로 서술하여 놓고 있다.
그러나 5 4문화혁명운동이 끝난지 70여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는, 공자의 사상은 중국인의 위대한 정신문화유산으로 다시 추앙되고 있으며, 학술 사상적으로 공자를 빼고 나면 아무것도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을 뿐만아니라, 새로운 시각에서 공자에 대한 연구 저술이 활발하게 출간되어 나오고 있으니 존공(尊孔)의 시대가 다시 열려가고 있는 것이다.
<학력종술>에서 |
첫댓글 종원님 반가워요, 그런데 스크렙이 않되네요? 열쇠 잠가 놓으셨나요? 건강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