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사 장 하나님의 속성(상)-비 공유적(非 共有的) 속성(屬性)
제1절 하나님의 속성(屬性)개관(槪觀)
一, 용어와 정의
하나님의 속성들의 개관을 술(述)함에 있어서 그 용어의 평가(評價)와 주제(主題)의 정의로 발단을 지음은 바른 순서일 것이다.
<속성>(attribute)이라는 명사는 유럽어에서 무엇을 부가(附加) 혹 지정(指定)한다는 관념을 표시함으로 하나님의 성질을 가리켜 사용되는 때에 그의 실유(實有)에 무엇이 부가되었다는 인상을 주기 쉬운즉 이 용어는 전적(全的)으로 적당한 것이 아니다. <특성>(properties)이라는 말이 하나님에게 특별히 있는 무엇을 지적함에서 보다 더 우승(優勝)할 것이나 하나님의 어떤 속성(屬性)들은 사람으로 더불어 공유(共有)한 것인즉 절대적 의미에서 그에게 특별히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완성>(perfections) 혹 <덕>(德, virtues)(이 경우에 <덕>을 순전한 윤리적(倫理的)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라고 칭함이 최선할 것이다. 그렇게 칭함은 성경의 용법(用法)에 따름일 수 있고 [벧전2:9에 사용된 아레테>(αρετη)는 덕 혹 <우수(優秀)>로 역술됨] 하나님의 실유(實有)에 무엇이 부가되었다는 암시(暗示)를 피함일 것이다. 하나님의 완성 혹 덕들은 그의 실유에 부가된 것 아라, 오직 그의 실유가 그의 덕(德)들의 <충만(充滿)>(plethoma)이며 그것들로 그 자체를 계시(啓示)한다.
하나님의 덕(속성)들을 정의하면 그것들은 <성경에서 신적 본체에 대하여 술정(述定)된 혹은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創造), 섭리(攝理), 구속(救贖)의 사역에서 나타내시는 완성들이다> (A. A. Hodge; “Outlines of Theology”. p. 125). 또 <하나님의 속성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 자신과 판이한 무엇이나 그의 본체의 분할편(分割片)들이 아니라, 단순히 그의 실유(實有)와 성격(性格)의 결정(決定)들이니 그 결정들은 세계와 사람에 향한 그의 관계들에 함의된 것이요, 우리의 사상(思想)이 반드시 구별하여야 되는 것이나 그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 그것들 상호간에 참으로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하지는 않는다>(James Orr, “Side Lights on Christian Dpctrine”, p. 24).
二, 하나님의 속성을 결정하는 방법
합리적 방법
(一) 인과(因果)의 방도(方途) (via causalitas)는 장녀과 마음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 안에 요구되는 속성들을 그에게 술정(述定)함이다. 이 방도로 우리는 우리의 주위에 보이는 결과들에서 제 일 원인에로, 조화적(調和的)이며 도덕적인 세계의 고찰에서 전능(全能), 전지(全知), 전선(全善)하신 창조주, 통치주(統治主)의 관념에로 올라간다.
(二) 부정(否定)의 방도(方途) (via negationis)는 창조된 실유(實有)들에 발견되는 모든 불완전들을 하나님에게 부정함이다. 이 방도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들이 가지는 모든 불완전에 반대되는 완전을 하나님에게 돌려서 그를 독립(獨立), 무한(無限), 무형(無形), 무량(無量), 불사(不死), 불가(不可)완해(完解)의 실유로 말한다.
(三) 우수(優秀)의 방도(方途) (via eminentia)는 피조물들에 발견되는 모든 완성들을 무한도로 하나님에게 귀속시킴이다. 이 방도로 우리는 결과(結果)에 존재하는 바는 그것의 원인(原因), 가장 절대적인 의미에서 가장 완전한 실유인 하나님에 선재(先在)한다는 원리에 의하여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상대적 완성(完成)들을 가장 우수한 양식(樣式)으로 하나님에게 돌려드린다.
이 밖에 사람의 성질의 구조로부터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결정하는 원리를 인출(引出)함도 있다. 사람 안에는 영혼(靈魂)의 실체(實體, substance) 혹 본체(本體, essence) 지성(知性), 의지(意志)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속성들을 세 제목(題目) 아래 배열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그의 본체에 관계있는 속성들, 둘째는 그의 지성(知性)에 관계있는 속성들, 셋째는 그의 의지에 관계있는 속성들이라 한다.
경험적 방법
근대(近代)경험(經驗)신학(神學)의 대표자들은 종교적(宗敎的)경험(經驗)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속성들을 결정하려 한다. 매킨토쉬(Macintosh)는 신적(神的)실재(實在)의 직관들, 사람의 종교적 수요(需要), 하나님의 하시는 바에 기초하여, 슐라이어막허(Schleiermacher)는 의존(依存)의 감(感)에서 시작하여, 릴츌(Albrechl)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관념(觀念)으로 출발하여 신적 속성들을 결정하려 하였다.
성경적 방법
신적 속성들의 지식을 얻는 유일(唯一)정당(正當)한 방도(方途)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自己)계시(啓示)를 연구(硏究)함이다. 사람이 하나님 자신에 관한 참 지식을 얻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찾아 겸손히 수납(受納)함으로만 성공된다. 이 계시된 하나님 자신의 취득과 이해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形狀)으로 창조되어 그 자신의 생활에서 도움 되는 유추(類推)들을 발견할 수 있음이 극히 중요한 사실이다. 이 성경적 방법은 저 완전한 실유의 관념에서 속성들을 추론하여 낸 스콜라 신학자(Scholastic 神學者)들의 연역적(演繹的) 방법(方法)과 구별하여 귀납적(歸納的) 방법(方法)이라 칭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방법은 출발점(出發點)을 추상적(抽象的)인 완전한 실유에 정하지 않고 오직 신적 자기계시의 충만에서 시작하여 그것의 광명(光明)에 비추어 신적(神的) 실유(實有)의 지식을 추구하는 때문이다. 성경적 방법은 성경에 입각하여 신적(神的)속성(屬性)들을 이해할 때에 합리적 방법을 중요히 참고할 것이나 오직 계시(啓示)진리(眞理)를 최고위로 하여 운동할 것이다.
신인(神人)동형(同形)동성(同性)주의(主義)
전항에서 사람은 계시된 하나님 지식의 취득과 이해에 자신의 생활에서 도움 있는 유추(類推)들을 발견한다고 말할 때에 우리는 소위신인동형 동성주의에 언급하였던 것이다. 신인동형 동성주의(Anthropomorphism=ανθρυπος, man+νορφη, form) 란 하나님이 더불어 공통한 속성(屬性)들을 소유하거나 행사하시는 줄로 사유(思惟)하는 견해를 지시함에 사용되는 명사다. 고대(古代)의 신인동형 동성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것과 같은 신체(身體)의 부분들과 기관(器官)들을 소유하셨고 따라서 그의 이(耳), 목(目), 수(手), 족(足) 등을 말하는 성경구절들은 문자적으로 해석될 것이라고 그릇 주장하였다. 성경 주에 하나님에게 인생(人生) 신체(身體)의 부분들과 기관들이 있는 것처럼 또는 후회(後悔) (창6:6,7)와 질투(嫉妬)(신29:20) 같은 인생적(人生的) 약점들이 있는 것처럼 말한 것은 하나님의 성행(性行)을 인생의 경우에서와같이 비유와 유추로 표현한 것이니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범신론자(汎神論者)들과 월리암 하밀톤(Wi;;iam Hamilton)과 기타 철학자(哲學者)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영(人格的靈)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모든 개념들은 신인동형 동성주의라고 즉 객관적(客觀的) 사실(事實)과 부합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사상(思想)양식(樣式)의 주관적(主觀的) 상태(狀態)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결정되는 개념(槪念)양식(樣式)들 뿐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는 다 신인동형 동성주의의 오해요, 악용(惡用)이니 우리의 찬동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의미의 신인동형 동성주의는 진실하고 필요하며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자유적(自由的) 이성적(理性的) 영(靈)으로서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形像)으로 창조된 고로 그의 영에 속하는 모든 본질적(本質的) 속성(屬性)들이 완전 무한히 하나님에게 있다고 사유(思惟)하는 것은 성경적이요, 합리적이며 객관적 사실에 적응한다. 하나님이 지식하신다. 의욕 하신다. 감상하신다. 또는 공의(公儀)하시다. 진실하시다. 긍휼(矜恤)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에게 속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속성들을 완전 무한한 정도로 우리의 전형인 하나님에게 귀속시킴이다.
三, 하나님의 속성의 분류
절대적 상대적 속성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들을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으로 구별한다. 전자는 그 자체 안에서 고찰된 대로의 신적(神的) 본체(本體)에 속하니 자존(自存), 무량(無量), 영원(永遠) 같은 것이요, 후자는 하나님의 창조(創造)와의 관계에서 고찰된 대로의 신적 본체에 속하니 편재(遍在), 전지(全知) 같은 것을 포함한다. 절대적(絶對的)속성(屬性)들은 하나님 그 자신에 대한 관계들을 포함하나 우주에 대한 관계와는 독립하여 있으며 상대적(相對的) 속성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관계들에 포함되고 우주의 존재의 결과로 행사되는 것이라 한다(A.H. Strong). 그러나 절대적 속성들이 상대적 속성들에 반영(反映)되며 영향을 주어 두 사이의 관계가 부정되기 어려우니 이 분류는 전적으로 정확한 것이 아니다.
내재적 혹 자동적, 유출적 혹 타동적 속성
다른 사람들은 신적(神的)완성(完成)들을 내재적(內在的) 혹 자동적 속성(屬性)들과 유출적(流出的) 타동적(他動的) 속성들로 구분한다. 스트롱(Strong)은 이 분류를 제일의 분류와 종합하여 절대적 혹 내재적 속성들과 상대적 혹 타동적 속성들을 말하였다. 전자는 신적 본체의 외변(外邊)에 진출하여 공작하지 않고 내재적으로 남아있는 무량성(無量性), 단순성(單純性), 영원성(永遠性) 같은 것들이요, 후자는 유출하여 하나님에게 외계적인 결과들을 산출하는 전능, 자비, 공의 같은 것이라한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속성들 중의 어떤 것은 순전히 내재적이라고 하면 그것들이 지식은 불가능할 것이다. 에취.비. 스밑(H.B. Smith)은 하나님의 각 속성이 반드시 내재적이며 또 타동적(他動的)일 것이라고 논평(論評)하였다.
자연적 혹 형이상학적 도덕적 속성
하나님의 자연적 속성(屬性)들과 도덕적 속성들을 구별하여 말함도 있다. 전자는 하나님의 의지와 구별되어 그의 소질에 속하는 자존재(自存在), 단순, 무한 같은 것이요, 후자는 하나님을 도덕적 실유(實有)로 만드는 진실(眞實), 선(善), 긍휼(矜恤), 공의(公義), 성(聖)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분류에 대한 의의(意義)는 소위 도덕적 속성들도 하나님안에서 참으로 자연적 창시적(創始的)이기는 다른 속성들과 일반이라 함이다. 댑네(Dabney)는 이 분류법을 채택하나 전기와 같은 이의를 돌아보아 사용된 명사(名辭)들의 적절하지 않음을 시인하고 차라리 도덕적 속성들과 비도덕적 속성이라고 말려 하였다.
긍정적, 부정적 속성
하나님의 속성들은 긍정적(肯定的), 부정적 속성들로 구별되기도 한다. 긍정적 속성은 편재(遍在), 전능(全能) 등 신적 본체의 어떤 적극적 완전을 표현하는 것이다. 부정적 속성은 불변(不變), 무한(無限), 불가(不可)완해(完解) 같은 모든 종류의 흠결(欠缺)이나 제한(制限)을 하나님에 관하여 부정하는 것이다.
여러 류(類)의 속성
신적 속성의 분류법이 그 속성들을 두 류(類)로 크게 나누는 것으로 많이 지향(指向)하나 그 이상수의 구별을 시도하는 예도 종종 볼 수 있다.
비(非)공유적(共有的), 공유적(共有的) 속성(屬性)
가장 보통한 구별은 비공유적 속성들과 공유적 속성들을 나누어 논한다. 전자는 피조물(被造物)안에 유사한 것이 전연 없는 자존성, 단순성, 무량성 같은 것이요, 후자는 사람의 영(靈)의 특성들이 어떤 유사를 가지는 능력, 선, 긍휼, 의 같은 것이다. 이 분류는 루터파의 총애(寵愛)를 받지 못하였으나 개혁파 중에는 항상 인망적(人望的)이어서 라이덴 교수들(Leyden professors) (Synopsis Purioris Theologiae), 마스트리트(Mastricht), 투레티니(Turretiny)의 저서 같은 대표적 저서들에 발견된다. 만근(輓近)의 개혁파 신학자들 중에 이 분류법을 버리고 다른 어떤 방법에 흥미를 가지는 경향이 있으나 딬, 쉐드, 보스, 카이퍼(Dick, Shedd, Vos, Kuyper)(혹시) 바빙크, 벌콥, 벤틸(Bavinck, Ber,hof, Vam Til) 등은 이것을 보존하였다.
본서는 신적 속성들의 분류에 있어서 바빙크와 벌콥에 따르며 그 내용해설에서도 그리 한다.
제 2 절 하나님의 절대성(絶對性)과 자존성(自存性)
一, 하나님의 절대성(絶對性)
통상한 분류의 순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은 자존(自存), 불변(不變), 무한(無限), 유일(唯一)의 넷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을 거론(擧論)함은 그를 절대적 실유로 고찰함이니 어떤 때에는 이 속성들을 절대적 속성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본장 1절 三항 참조).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절대성>이란 제목을 놓고 그것의 함의를 고찰하는 것은 비공유적 속성들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절대자>라는 명사는 본래 철학에서 모든 존재의 구경적(究竟的) 근기(根基)를 가리켜 사용되는 말이나 신학에서도 하나님을 절대적 실유로 말하는 것이 보통한 일로 되었다. 철학의 절대자가 신학의 하나님과 동일시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답은 절대자에 대하여 가지는 개념여하에 달린 것이다. 스피노자(Spinoza)는 절대자는 한 자성립적(自成立的) 실유(實有, Self Subsistent Being)니 모든 특수 사물은 다 이것의 변전(變轉)하는 양태들 뿐이라고 보아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였으니 우리는 그의 절대자(絶對者) 즉 하나님이라는 견해에는 동참할 수 없다. 헤겔(Hegel)은 절대자(絶對者)는 사상(思想)과 실유(實有)의 통일이며 만물의 총화(總和)니 그 안에 모든 관계를 포함하며 현재의 모든 부조화를 완전한 통일로 해결한다고 보았으니 그의 절대자가 즉 하나님이라는 견해에도 우리는 따라갈 수 없다. 그리고 브레들리(Bradley)는 절대자는 아무 것과도 관계되지 않았다. 그것과 유한(有限)의지(意志)와의 사이에 아무 관계도 있기 불능하다고 하였으며 그이 절대자는 기독(基督)종교(宗敎)의 하나님으로 될 수 없다. 종교의 하나님은 유한신(有限神)이 나닐 수 없다고 단언하였으니 그의 절대자는 유한한 피조물과 관계를 짓는 우리의 하나님과 동일시(同一視) 될 수 없다. 그러나 절대자가 존재하는 만물의 제일원인 혹은 모든 실재의 구경적(究竟的) 근거(根據) 혹은 자존재(自存在)하는 실유(實有)로 정의되는 때에는 능히 신학(神學)의 하나님과 동일시(同一視)될 것이다. 하나님은 자존재하시는 고로 어떤 <필연적> 관계를 가지고 존재하지 않는 무한자이시나 동시에 능히 그의 피조물 전체와 인류로 더불어 <자유로히> 여러 가지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절대(絶代)>(absolute)라는 명사(名詞)는 <부터>(from)를 의미하는 (ab)와 <푸는 것>(to loosen)을 가리키는 솔베레(solvere)의 합성어(合成語)인 라틴어 <렙솔루투스>(absolutus)에서 인출(引出)되어 제약으로부터 자유함 혹은 제한이나 구속으로부터 자유함을 의미한다.
二, 하나님의 자존성(自存性)
자존성(Aseity)의 요의(要義)
(一) 자신(自身)의 원인(原因)
하나님은 그의 존재의 근거(ground)를 그 자신에 가지어 그 자신의 원인이시다(Causa Sui). 실유(實有)마다 그것의 존재의 근거를 그것 자체의 안에나 밖에나 반드시 가진다. 우리는 우리의 근거를 우리의 밖에 가지어 의존적(依存的)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여 독립적(獨立的)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원인>이라는 어구(語句)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 하여 이의하는자 있음은(말티뇨, 쉐드, 벌콥(Martineau, Shedd, Berkhorf)하나님은 원인없는 실유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 자신의 원인으로 말할 때에는 그에게 존재의 시작을 귀속(歸屬)시키지 않는다. 이 어구의 참 뜻은 하나님의 존재의 근거는 그 자신이외에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은 모든 세력과 모든 실유의 생적 원천이라 함이다. 또 만일 하나님을 그 자신의 원인으로 말한다면 또한 그는 그 자신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으니 그의 자존성은 의례히 함의되어 이쑈을 것이다. 이것은 단일(單一)실재(實在)를 시계(視界)에 두는 경우이니 원인과 결과라는 명사들은 통상한 의미를 넘어가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의도(意圖)된 단언은 단순히 하나님의 실유는 원인을 가지지 않으셨다고 함이다. 하나님은 계신다. 하나님은 항상 계셔왔다. 하나님은 항상 계실 것이다. 그의 실유는 이유 없는 사실(a brute fact)이다.
(二) 필연적 존재
하나님은 그 자신의 실유의 필연성에 의하여 존재(存在)하신다. 존재하는 것은 그의 성질(nature)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필연적인 존재이다. 이 존재는 그의 의지에 근거 하지 않고 그의 성질에 근거하였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의지이어서 그의 본체(本體)는 그의 행동이라고, <하나님의 본체는 그의 자유보다 선행하지 않았다.> 주장한 자(Julius Muller)있으나 그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의지에 의하여 존재하셨다면 그의 존재는 우연적일 것이요, 실유없이 의지가 있을 것이니 그것은 상상하기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그의 성질에 근거한 필연적 존재자시다. 다른 편에 사람은 그의 존재의 원인이 그 자신 이외에 있어 우연적으로 존재한다.
(三) 독립성
하나님의 자존재의 관념이 일반적으로 <자창시(自創始)>를 의미하는 <자존재 (aseitas)>라는 말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혁과 신학자들은 <독립성 (independentia)>이란 말을 대용하여 하나님은 그 실유에서 독립적일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점에서 (그의 덕, 예정, 사역등) 독립적이시라는 것을 표현하려 하였다. 또 <이 하나님의 자존성에는 실유의 자존재만 아니라, 그것의 충만이 사유(思惟)되며 다른 모든 덕이 포함되었으니 그것들은 하나님의 실유의 충만의 전개(展開)뿐이다>(Bavinck). 피조물은 아무리 그 자체의 판연한 존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절대적으로 의존적이며 불충족하여 자존재로 인정되기는 만무하다.
자존재의 정당성
하나님의 자존성(自存性)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며 이교(異敎)의 신관(神觀)과 철학의 절대자관(絶對者觀)에도 함의되어 있다. 절대자가 자존재자의 만유의 구경적 근거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다른 실유들과 여러 가지 관계를 맺는 자로 생각되는 때에는 신학의 하나님과 동일시 될 수 있는 것이다. 대개 자존재한 하나님은 그 자신에서 독립적이실뿐 아니라, 또한 만사(萬事)만물(萬物)을 자기에게 의존케하는 원인으로서 동작하신다. 영적 실유의 자존재는 우리에게 난해(難解)한 일이 아님이 아니라, 왜냐하면 마음으로부터 물질을 인출(引出)하는 것은 물질로부터 마음을 인출하는 것보다는 쉬운 때문이다.
또 실유(being)의 관념의 분석은 하나님의 자존재(自存在)의 증명을 구성한다. 클락(Clark)의 논증(論證)에 의하면 <무엇(something)은 있다. 무엇은 반드시 항상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무엇이 항상 있었다면 그것은 반드시 자존재 하였을 것이다.> (H.B. System of Christian Theology“, p. 17).
성경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함과 (출6:3) <나는 영원 자존자니라>라고 선언하므로 (출3:14) 하나님의 자존성을 표시한다. 하나님의 자존(自存)독립성(獨立性)만이 그가 자기의 백성과의 관계에서 영원히 동일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이 속성의 추가적 증명으로는 성부는 자기 속에 생명이 있다는 단언(端言)과(요5:26) 그는 만물로부터 독립하시고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한다는 선언(시94:8이하; 사40:18이하, 행7:25)과 그는 그의 사상과 (롬11:33, 34) 의지와(단4:35, 롬9:19, 엡1:5, 계4:11) 권능과 (시115:3) 도모(圖謀)에서(시33:11) 독립적이라는 진술이 있다.
제 3 절 하나님의 불변성
一, 요의(要義)와 증명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은 그의 독립 자존성(aseity)에 포함되어 있다. 어거스틴(Augustine)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불변성은 신적 실유(實有)의 독립(獨立)자족적(自足的) 충만(充滿)의 직접적 귀결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사상과 의지, 그의 모든 목적(目的)과 작정(作定)에서와 같이 그의 존재와 본체(本體)에서 불변적이시다>(Bavinck) 하나님의 불변성은 <모든 신적 행동(行動)에 그것들의 법칙과 원천(源泉)으로 존재(存在)하는 신적 성질(性質)의 항구와 계속(繼續)이다>(Bowne; “Philosophy, of Theisim”, p. 146). 이 속성에 의하여 하나님은 그의 실유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속성들에, 그의 목적들과 약속들에 변경이 전연 없으시다. 이 속성의 효능으로 하나님은 모든 생성(becoming)이상에 초월하시고 그의 실유의 속성들에서 승강(昇降)과 성쇠(盛衰)가 없으시다. 그는 그 자신 이외의 무엇에 의하여 변경(變更)될 수도 없고 그 자신 안의 어느 원리에 의하여 변경되지도 않으실 것이다. 그의 지식과 계획, 그의 도덕적 원리들과 결의들은 영원히 동일하다.
성경에 의하면 <여호와는 번역지 아니하나니>(말3:6)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1:17). 하나님은 그의 권능(사48:12, 13). 그의 계획과 목적(시33:2, 사14:24, 48:10, 롬11:29), 그의 약속(왕상8:56, 롬4:20, 21, 고후1:20, 히6:17, 18). 그의 인자와 긍휼(시103:17, 말3:6), 그의 공의(창18:25, 사28:17)에서 변함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은 다른 여러 성구(聖句)에서도 명시(明示)되었다(출3:14, 민23:19, 시102:26-28, 사41:4, 롬1:23, 히1:11, 12).
우리의 이성(理性)도 하나님 안에 변경이 있기 불가능함을 가르쳐 보여 준다. 원인 없고 필연적 독립적으로 자존재(自存在)하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그대로 존재를 영속하실 것이요, 변경이 있을 수 없다. 만일 그의 자존재(自存在)가 변한다면 의존적 존재로 될 것이니 그때에 그는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다. 또 그는 모든 계약들과 관계들과 불완전으로부터 자유하는 절대자시니 무엇 때문에 자신에 변경을 초래하실 것인가?(시7:11, 말3:6).
二, 오해와 이의(異議)
하나님에게 변경이 있음을 가르치는 듯한 성구(聖句)들이 있어 오해를 받는다. 과연 영원으로 거처를 삼으신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에로 과도(過渡)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성육신(成肉身)하시고 성령으로 교회안에 거주 하시지 않는가? 과연 그는 자신을 계시(啓示)도 하고 숨기기도 하시며 오고 가시며 자기의 의도를 후회하고 변경하시며 사람을 그의 회심전과 후에 달리 대우하시지 않는가?(창6:2, 출32:10-14, 삼상 15:11, 욘3:10, 잠11:20, 12:22, 시18:26,27 참조). 여기에 함의된 이의는 대체로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을 그의 부동성(不動性)을 그의 부동성(不動性)으로, 신인동형 동성의 표현들을 문자적 진술로 오해함에 기인한다.
(一) 하나님은 활동적(活動的)이시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하나님에게는 운동이 없다는 것처럼 <부동성>을 함의하는 줄로 해석되지 말 것이다. 신학에서 하나님을 항상 동작하시는 자(actus purus)로 말하는 것이 관례로 되기도 하였다. 찰스. 하지(Charles Hodge)는 말하되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실유(實有), 그의 완성(完成)들, 그의 목적들에서 불변적이시라는 것을 알고 또 우리는 그가 영속적(永續的)으로 활동적이 시라는 것을 안다. 그런고로 활동과 불변성은 반드시 서로 용납될 것이니 전자와 조응(照應)하지 않는 후자의 설명은 당연히 시인되지 못할 것이다(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1. I, p. 391). 만일 하나님의 불변성이 그의 부동성을 의미한다면 우리가 그에게 예배(禮拜)하는 것은 고대 헬라인(Greece)이 운명(運命, Fate)에게 예배한 것과 마찬가지로 허사일 것이다.
하나님은 변전(變轉)무상(無常)한 대소(大小)만사(萬事)를 간섭하여 섭리하시되 모든 활동을 통하여 그 자신은 성실과 의지에서 불변 동일자로 남아 계신다(사41:4, 43:10, 46:4, 10, 48:58, 히13:8). 창조 하려는 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것으로서 그의 의지의 단일(單一)영원(永遠)한 동작에 의하여 실현되었으니 그에게 변경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육신(成肉身)은 하나님의 영원한 기쁘신 뜻에 의한 계획이 실현된 것이니 그의 성질에나 의지에나 아무 변경도 가져오지 않았다. <기약이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시니>(갈4:4)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구속의 큰 공을 세우셨다(행2:23).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하심>은 (히2:10, 5:8,9) 그리스도가 수난(受難)을 통하여 부활과 승천의 완성된 영광에 도달하게 하신 것을 뜻하고 그 본체에 변화가 있었다 함이 아니다.
(二) 신인(神人)동형(同形)동성적(同性的) 표현(表現)이다.
만일 성경이 하나님의 후회(後悔), 의도(意圖)의 변경(變更), 죄인의 회개와 함께 그들에게 대한 관계의 변경을 말한다면 그것은 신인동형동성적 어법임에 불과한 것이다. 실로 변경은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사람에게와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후회, 번의(翻意), 변태(變態)를 말한 것은 인류의 변경하는 도덕적(道德的) 상태(狀態)와 기타 정지에 대한 하나님의 불변하는 속성(屬性)들의 계시를 신인(神人) 동형(同形)동성적(同性的) 표현으로 설술(說述)한 것이다. 하나님의 불변하는 공의는 의인과 악인을 다르게 처우(處遇)할 것을 요구하니 이인이 악인되거나 악인 의인될 때에 처우를 변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마치 태양의 광선이 납촉(蠟燭=밀초,)은 죽이고 진흙은 경화(硬化)시키나 실제(實際)로는 그 불변하는 일이 두 물건의 성질에 따라서 서로 다른 결과를 내는 것이라는 사실과 같다. 그런데 ㅎ나님의 이같은 행동들을 인간생활의 경우에서와 같이 비유(比喩)와 유추(類推)로 표현한즉 하나님에게 후회(後悔), 변의(변(變意), 변태(變態)가 있는 것 처럼 신인동형 동성적 언사들이 있게 된 것이다.
(三) 신적(神的) 목적(目的)전체(全體)를 살필 것이다.
어떤 사건에 관하여 하나님의 근재(近在)목적과 구경(究竟)목적(目的)을 종합하여 전체적으로 살피지 못하면 하나님의 목적에 변경이 있다고 오해하기 쉽다.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과 다윗의 인구조사(人口調査)에 관련된 신적 지시(指示)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전체적으로 살피는 때에 그 전후(前後)조응(照應)함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의 좋은 예증(例證)들이다.
(四) 이의(異議)는 부당(不當)하다.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에 대하여 이의(異議)하는 대적이 왕왕 있어왔다.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의 철학(哲學)같은 이교철학의 감화를 받은 이교(異敎)사상가(思想家)들 중에 이 진리의 대적들이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도르너(Dorner)는 하나님의 불변성과 우주(宇宙)만사(萬事)를 위한 그의 동적(動的) 관여(關與)의 사실과를 조화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의 실유(實有)의 윤리적(倫理的)인 면에서만 불변적(不變的)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은 항상 사랑이요, 항상 거룩하시나 현실적으로 세계를 창조하실 때와 성자(聖子)를 통하여 성육신(成肉身)하실 때에 변하셨다고 하였다.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와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는 하나님이 그의 실유에서는 불변하시나 그의 지식(知識)과 의지(意志)에서는 변하시므로 그의 결정(決定)들이 대부분(大部分) 사람의 행동에 의지한다고 가르치며 범신론(汎神論)은 하나님은 절대적 실유(實有)이기보다도 영원한 생성(生成)이며 무의식적(無意識的) 절대자(絶對者)는 사람 안의 의식적 인격(人格)에로 점차 성장(成長)하는 하나님을 말하려는 경향(傾向)을 가진다. 이런 이설(異說)들에 대항(對抗)하여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을 역설(力說)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제 4 절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
一, 무한성의 요의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도 그의 자존성(自存性)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자존성은 실유의 충만(充滿)을 함의(含意)하는 바 그 충만은 제한 없는 충만 이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그의 실유(實有)의 제한 없는 충만 이다> (Van Til).
하나님의 무한성이란 하나님이 모든 제한으로부터 자유 하시어 그의 실유(實有)나 속성(屬性)들에나 제한이 없음을 이름이다. 이 속성은 하나님은 어떤 양식(樣式)으로든지 우주(宇宙)에게 제한(制限)을 받거나 우주(宇宙) 안에 국한(局限)되거나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함의(含意) 한다. <여호와는 광대(廣大)하시니 그의 광대 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시145:3). <하늘의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는 것이다>(왕상8:27). 바사의 시인은 말하되 <세계는 그(하나님)의 미(美)의 수림(樹林)으로부터 온 한 개의 불꽃이요, 천공은 그의 권능의 바다에 한 개의 물거품이다>라고 하였다.
동시에 이 신적 속성(屬性)은 하나님을 존재(存在)하는 만물(萬物)의 총화(總和)의 동일시(同一視)하는 것을 함의(含意)하지도 않고 인출(引出)된 유한물(有限物) 들의 공동(共同)존재(存在)를 부인하지도 않는다. <무한은 총화가 아니니 전부(全部=the all)는 거짓 무한이다>(Shedd, “Dogm. Theol,”Vo1 I, pp. 189-191). 야곱 베메(Jacob Baehme)는 <하나님은 무한하시니 하나님은 전부(全部)이시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모든 완전(完全)으로 만듬과 함께 모든 불완전(不完全)으로 만듬과 함께 모든 불완전(不完全)으로 만드는 사상(思想)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성은 반드시 양적(量的), 외연적(外延的)으로 생각되어 마치 하나님이 전 우주에 전개(展開)되어 무제한(無制限)한 외연(外延)을 가지므로 유한물(有限物)들의 용소(容所)를 허락하지 않은 것처럼 고찰되지 말 것이니 하나님은 신체(身體)를 가지지 않으시고 따라서 외연을 가지지 않으신 때문이다.
二, 하나님의 완전성
하나님의 완전성은 신적 실유(實有)의 그 자체에서 고찰된 무한성이다. <무한은 비록 양의 무제한한 가능성을 포함할지라도 그 자체는 양적(量的)개념(槪念)이 아니라. 질적(質的)개념(槪念)이다>(Fullerton, “Conception of the Infinite”, p. 90). 그런고로 하나님의 무한성은 양적(量的)으로 이해되지 말고 질적(質的)으로 이해될 것이며 외연적(外延的)으로 보다도 내포적(內包的)으로 사유(思惟)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무한한 외연을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靈的)생명(生命)의 무한한 능력을 귀속(歸屬)시킨다. 능력의 한도까지 동작하는 것은 자연적 물리적 세력이요, 사람은 그의 능력의 보류(保留, reserve)의 효능으로 자연 이상에 높이 오른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그 보류(保留)가 무한하다. 그의 안에는 초월적(超越的) 요소(要素)는 질적으로 모든 제한(制限)과 결함(缺陷)에서 자유하는 실재(實在)이다.
양적이라기보다도 질적인 무한성은 하나님의 모든 공유적(共有的) 속성(屬性)에게 성격을 부여(賦與)한다. 즉 무한한 능력은 절대적(絶對的) 유량물(有量物)이 아니라, 능력의 무궁한 가능태(可能態)며 무한한 성(聖)은 성의 무제한(無制限) 양(量)이 아니라, 오직 질적으로 모든 제한(制限)과 결함(缺陷)에서 자유(自由)하는 거룩 이다. 무한한 지식과 지혜, 무한한 사랑과 의도 같은 모양으로 설명될 것이다. 오르(J. Orr)는 말하되 <아마 우리는 하나님 안에 무한성은 구경적(究竟的)으로 (1) 내면적(內面的)으로 또는 질적으로 모든 제한과 결함이 없음이며 (2) 무제한한 가능태라고 말할 수 있다>(James Orr, Op. Cit, p. 26). 이 의미에서 하나님의 무한성은 단순히 그의 신적 실유(實有)의 완전과 동일시될 것이다.
하지(A.A. Hodge)의 평이(平易)한 해설에 의하면 <무한은 제한을 가지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은 그이 실유에서 혹은 그의 지식에서 혹은 그의 능력에서 무한하시다고 말할 때에 우리는 그의 본체(本體)와 그것의 동적(動的) 특성(特性)들 (active properties)은 어떤 종류의 불완전(不完全)을 포함하는 제한들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시간과 공간의 모든 제한들을 초월하시며 모든 것을 절대적(絶對的) 완전(完全)한 양식(樣式)으로 아신다. 그는 무엇이든지 수행하시기를 의욕(意慾)하는 것을 수행하시되 방편(方便)이 있게도 하고 없이도 하시며완전한 용이(容易)와 성공으로써 하였다. 사람들이 하나님은 그의 공의 혹 그의 선(善) 혹 진실(眞實)에서 무한하시다고 말할 때에 그들은 그의 무진(無盡)불변(不變)하는 실유(實有)는 이 특성들을 절대적으로 완전히 소유(所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A.A. Hodge, Op. Cp, pp. 133,134). 욥11:7-10; 시145:3; 마5:48 참고.
三, 하나님의 영원성
(一) 정의(定義)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을 시간과의 관계에서 고찰할 때에는 이것을 그의 영원성(永遠性)이라 칭한다. 하나님의 영원성의 오랜 정의들 가운데 하나는 이것은 <하나님이 써 모든 시간의 계기(繼起)들로부터 자유하고 자신 안에 시간의 근거(根據) 혹 이유(理由)를 포함하시는 속성(屬性)이라>함이다. 이것의 다른 하나의 정의는 <하나님은 영원한 지금이시다>함이다.(Roethius) 이 정의들을 종합하였다고 볼 수 있는 또 다른 정의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원성은 <하나님이 써 모든 시간적 제한과 모든 순간(瞬間)들의 계기(繼起)이상에 높이 오르시고 그의 존재 전부를 한 불가분할(不可分割)의 현재에 소유하시는 그의 완성[完性(續成)]이다>(Berkhof).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성질은 無始無終 하고 모든 시간의 계기로부터 자유하여 초시간적(超時間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二) 시간과의 관계
하나님의 영원성이란 참으로 시간을 초월(超越)하고 그것과 본질적(本質的)으로 다른 바를 상징적(象徵的)으로 설술함일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영원성은 모든 시간적 제한을 초월하는 것에게 귀속(歸屬)된다. 영원성이 이런 의미로 하나님에게 귀속(歸屬)된다는 것은 베드로후서 3:8에 암시(暗示)되어 있다. 오르Orr)는 말하되 <시간은 계기적(繼起的)으로 존재하는 대상들의 세계와 엄밀히 관계를 가진다. 하나님은 시간을 채우시고 그것의 각부에 계시나 그러나 그의 영원성은 오히려 이 시간 안에 계시지 않으신다. 이것은 차라리 시간안에 있음과 반대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하였다(A.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Vo1. I, p. 276).
우리의 존재는 일(日), 주(週), 월(月), 연(年)으로 표지(標識)되나 하나님의 존재는 그렇지 않다. 우리의 생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되나 하나님의 생애는 이 같은 구분이 있지않다. 하나님은 인간생활의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을 무시하지 않으시나 과거와 미래를 밝히 시기를 현재와 같이 하신다. 솔리(Solly)는 말하되 <하나님은 시간을 투시(透視)하시기를 우리가 공간을 투시함과 같이 하신다>고 하였다(Solly, “The Will, p. 254).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에 살고 계신다.
(三) 비(非) 시간성(時間性)에 대한 양론(兩論)
영원의 비시간성(Timelessness), 따라서 하나님이 비시간성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기독교신학에 성행하여 온 사상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은 하나님에게는 실재적(實在的)이 아니라는 견해를 제출하였다 (“De Diversis Quaestionibus ad Simplicianum”, II, ii, 2).
찰스 하지는 <그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없고 모든 것이 동등으로 또는 항상 그에게 현재다. ....그에게는 영원한 지금이다> 라고 하였다.
四, 하나님의 무량성과 편재성
(一) 무량성(無量性, immensity).
1, 정의(定義). 정의하여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은 공간에 의하여 제한되거나 정계(定界)되지 않고 반대로 모든 유한(有限)한 공간(空間)이 그에게 의존(依存)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속성이다.> 이것은 소극적(消極的)인 면과 적극적(積極的)인 면을 아울러 가지니 속극적으로는 모든 공간의 제한들을 부정하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은 공간 이상에 계신다는 것을 단언한다(H.B. Smith). 범위를 넓혀서 좀 더 자세한 말로 원만히 정의하면 무량성은 <하나님이 모든 공간적 제한을 초월하시되 오히려 그의 전 실유로 공간의 매 부분에 임재(臨在)하시는 완성[完成(속성)]이다>(Berkhof). 이 정의는 소극적으로는 신적 실유에게 공간의 제한을 전연 부정하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은 공간 이상에 계셔서 그의 실유의 전부로써 공간의 매(每)부분(部分)을 채우신다고 단언한다.
2, 세 양태(樣態)의 임재(臨在).
우리는 투레티니(Turetiny)에 따라 공간에 있는 세 양태의 임재를 구별할 수 있다. 신체들은 공간에 경계적(境界的)으로 있음은 그것들은 공간의 어떤 부분들을 점령하여 사방으로 공간에게 경계를 당하는 때문이요, 창조된 유한(有限) 영(靈)들은 공간에 정한적(定限的, definitely)으로 있음은 그들은 공간의 어떤 부분을 점령하거나 그것의 어떤 부분에게 포옹(抱擁)되지 않으며 각처에 있는 것 아니라 어떤 정한된 곳에 있는 때문이요, 이 가지와 구별되어 하나님은 공간에 충만적(充滿的) 으로(repletively) 제삼은 그의 본체는 초월적 방식으로 전 공간을 체우시는 때문이다. 그는 공간의 어느 부분에 아니 계시거나 한부분에보다 다른 부분에 더 임재하지 않으신다. 그는 공간의 각점(角點)에 전체로 임재하여 일시에 전 공간을 채우신다.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되 하나님은 공기나 빛 같이 도처에 산포(散布)된 줄로 간주될 것이 아니라 하였다.
(二) 편재성(偏在性)
1, 무량성(無量性)과 다름. 하나님에게 적용(適用)된 <무량(無量性)>과 <편재성(omnipresence)>의 두 말은 어떤 의미에서 같은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며 따라서 동의어(同義語)다. 혹은 <무량성>이란 말은 회피함이 가하다고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자세한 고찰을 요하는 차이점이 있다. <무량성>은 하나님의 공간에 대한 관계의 그 자체(自體)에서 추상적(抽象的)으로 관찰된 특성이요, <편재성>은 공간 안에 여러 가지 처소들을 점령한대로의 피조물(被造物)들에게 가지시는 하나님의 관계의 특성이다. 다른 말로 하면 무량성은 하나님이 모든 공간을 초월(超越)하여 그것의 제한에 굴복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지시하고 편재성은 그가 오히려 그의 전 실유(全實有) 공간의 매 부분을 채우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의 치중은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에, 후자의 그것은 그의 내재성(內在性)에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전피조계(全被造界)에 내재하시나 오히려 그것들에게 한계(限界)되지 않으신다.
2, 경계할 두 사상(思想).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관계를 논함에 있어서 우리는 한 편에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정하고 그의 실유(實有)를 만물의 실체와 동일시(同一視)하는 범신론(汎神論)를 피하여야 되며 다른 편에 하나님이 피조계(被造界)에 그의 권능으로(per potentiam)는 임재하시나 그의 실유와 성질로(per essentiam et naturam)는 임재하지않고 먼 거리에서 세계 위에 동작하신다고 하는 소시너스(Socinus)주의와 초연(超然)신론(神論)을 경계하여야 된다. 하나님은 세계에 내재하시나 또한 초월하시어 둘의 동일시를 허락하지 않으시며 자유적(自由的), 인격적(人格的)으로 편재하시어 필연적(必然的), 비인격적(非人格的)으로 편재하는 범신(汎神) 이 아니시다. 또 비록 하나님은 세계와 판이하여 그것과 동일시될 수 없을 지라도 오히려 그는 멀리 떠나 초연히 계신자가 아니라, 피조계(被造界)의 각부분에 임재하시되 권능(權能)으로만 아니라, 또한 본체(本體)로써 임재 하신다. 하나님이 천성에 계신다고 하는 말씀은 천상영(天上靈)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가장 특별하고 영광스러운 자기(自己)현현(顯現)을 의미한다고 볼 것이다.
3, 임재의 여러 모양. 에이. 에이. 하지(A. A. Hodge)는 말하되 <하나님은 어느 처소에나 어느 피조물(被造物)과 몇 가지 양식(樣式)으로 임재하신다고 사유될 수 있으니 제 일은 그의 본체로요, 제 이는 그의 지식으로요, 제 삼은 지성적 피조물에게 그 임재의 현현으로요, 제 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피조물 안에나 위에나ㅣ 그의 능력을 행사하심으로써다. 본체와 지식으로는 그의 임재가 도처에 항상 동일하다. 그의 자기 현현(顯現)과 권능(權能)의 행사(行事)로는 그의 임재가 여러 경우에 정도(程度)와 양식(樣式)으로 무궁히 변이(變異) 한다>(Op. Cit., p. 141).
4, 편재의 이해. 하나님의 편재의 진리를 우리 자신들이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함에 곤란이 적지 않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사람의 음성이 방안을 채우는 사실을 예증(例證)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말하되 음성은 전체로서 방 낭에 있는 각 사람에게 들리며 방을 완전히 채운다. 청중(聽衆)의 통상(通常)경험(經驗)에 관한한 그 소리의 매 음절(音節)과 매 음조(音調)가 방안 매 곳에 있다. [이 사실을 평가함에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의 지식은 별조(別條)로 놓아두어야 할 것이다.]
전 우주의 만사만물이 하나님 앞에 즉각적(卽刻的)으로 있다는 사상에 의하여 하나님의 편재를 표현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일을 보때에는 모든 것이 내 앞에 즉각적으로 있다. 내가 강단에서 말할 때에는 강당 안에 매 사람과 매 물건은 말하는 내 앞에 있다. 공간(空間)관계(關係)들이 있으나 모든 실제적(實際的) 목적(目的)을 위하여는 공간은 난제가 아니니 그것도 내 앞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안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즉각적으로 있다. 공간은 하나님의 전능한 자신적 임재에게 난제가 아니다. 그는 우주의 매 곳에서 즉각적으로 들으시며 보시며 동작하신다.
5, 성경적(聖經的) 증명(證明). 하나님의 편재성(偏在性)은 성경에서 분명히 계시(啓示)되었다. 천지가 그를 포함하지 못하나(왕상8:27, 사66:1, 행7:48-49) 동시에 그는 천지를 채우시고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시다(시139:7-10, 행23:23, 24, 행17:27,28).
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一) 초월성. 하나님은 초월적(transcendent)시니 이 신적 속성이 초세적 혹 세외적(supramundane or extramundane)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때도 있다.. 하나님은 세계 위에 또는 세계를 떠나서 계신다.
헤겔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정하여 말하되 <하나님은 별들 저편에 계시는 영이 아니시다. 그는 모든 영 안에 영이시다>고 했는데 이것은 범신론(汎神論)의 입장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이다.
1, 혼동하지 말라. 우리는 범신론과 기독교(基督敎)정신요법(精神療法, Christian science)이 하듯이 하나님을 우주와 혼동하지 말 것이다. 이 둘은 서로 판이(判異)한 존재(存在)들이다. 하나님은 주체요, 우주는 객체니 주체와 객체는 판이하여 하나로 볼 수 없다.
2, 전체로 보지말라. 하나님은 우주를 그 한 부분으로 포함(包含)하는 전체(totality)라고 볼 것도 아니다. 그는 두 방면을 가진 하나의 동일체(unity)가 아니시다. 그는 데칼트(Descartes)가 생각한 것 같은 정신과 물질의 이원(二元)이 종속(從屬)하는 본체가 아니시다.
3, 영혼과 신체의 관계와 같지않다. 하나님의 우주에 대한 관계는 영혼(靈魂)의 신체에 대한 관계와 같다고 말하지 말것이다. 죤 톨랜드(John Toland, 1670-1722)가 그의 저서(“Pantheism)”, 1720)에서 <하나님은 우주의 마음 혹 영혼이라>고 한 유명한 진술(陳述)은 이 관계의 정확한 묘사(描寫)가 아니다. 현세(現世)에서 영혼은 신체 밖에 떠나 있을 수 없으며 신체의 영향(影響)을 받기도 하나 하나님은 우주 밖에, 우주를 떠나 계시며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그것을 섭리하신다.
4, 원인(原因)과 결과(結果)의 관계(關係)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원인시오, 우주는 그의 창조를 받고 또 그의 섭리를 받는 결과다. 공인(工人)은 그의 공작물보다 다르며 그것보다 더 되는 존재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주를 어찌 동일시 할 수 있으랴?
5, 종교(宗敎) 도덕적(道德的) 관계(關係)의 기초(基礎). 하나님의 사람에 향한 사랑과 사죄(赦罪), 사람의 도덕적(道德的) 책임(責任)의 감성(感性)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기초를 둔다. 하나님의 초월성이 잃어지는 때에는 범신론적, 반범신론적 체계들에서와 같이 사람의 죄의 감정은 사라지고 만다.
(二) 내재성
하나님은 내재적(immanent) 혹 세대적(intramundane)이시다. 하나님은 물질적(物質的) 우주(宇宙)이시다. 하나님은 물질적 우주 위에 분리되어 계실뿐 아니라, 또한 그의 신비(神秘)한 무형적 본체로 만물에 퍼져 계신다.
1, 인격적이다. 하나님의 내재성은 편재하는 법칙(法則)과 권능(權能)보다 더 되는 무엇 즉 인격적 내재다. 워커(W.L. Walker)는 그의 저서들(“The Spirit and the Incarnation”, “Christian Theism”)에서 하나님의 내재가 인격적이라는 것을 부정(否定)하고, 이같은 술어는 세계 안에 점진적(漸進的)으로 공작(工作)되어 나오는 관념(觀念)이나 원리(原理)의 현현(顯現)을 표현 할뿐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인격적이 아닌 하나님의 내재(內在)를 말하는 것은 이해되기 어렵다. 하나님이 세계와 동일시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의 내재는 본체(本體)와 실유(實有)의 내재, 가장 엄밀한 의미의 인격적 내재라고 말할 수 있다.
2, 안으로부터 일하신다. 사람은 밖으로부터 물질(物質)에 공작(工作)하나 하나님은 능히 안으로부터 일 하신다. 우주에 무슨 발전이 있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안으로부터 일하심을 예증(例證)한다. 사람은 집이니 배(船)를 밖으로부터 공작하여 건조하나 하나님은 나무를 안으로부터 일하여 자라게 하신다.
3, 우주와 동일시(同一視)함이 아니다. 우리는 우주에 내재하시는 하나님과 우주와 동일시되는 하나님을 구별하여야 되는 것이니 후자(後者)는 범신(汎神) 이다.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되 하나님을 자연법칙(自然法則)에서 잃어버리기에 이르러서는 안되는 것이다. 반면에 우주와 자연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여 제이원인(第二原因)들의 실재성(實在性)을 부정하거나 인적(人的)의지(意志)를 신적(神的)의지(意志)에서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악의 직접(直接) 동작자(動作者)로 만드는 것도 부당(不當)한 일이다.
4, 세계에 미(美)를 준다.
땅은 하늘에 접하여 있고
떨기마다 신화(神火)가 불건만
보는 자만이 발에 신을 벗고
타인들은 둘러앉아 여름만 딴다. (Elizabeth Barreth Browing)
고귀한 생각의 기쁨으로 나를 소동시키는 임재와
더욱 깊이 혼합(混合)된 무엇의 숭엄감(崇嚴感)을 나는 느꼈노라.
그 거처는 서산(西山)낙일(落日)의 광선에와
태양의 활공기(活空氣)에와 청천(靑天)과 인심에로라
모든 생각하는 것들과 모든 생각의 대상을 떠밀어서
만물을 통해 운행하는 동작과 정신을 나는 느꼈노라.
(Wordsworth).
(三) 병립(竝立)의 태세(態勢)
기독교(基督敎)신학사상(神學思想)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과 내재성(內在性)은 서로 모순되는 듯하되 어느 하나를 버릴 수 없는 진리(眞理)들로 병립되어 왔다. 둘이 다 성경에서 계시(啓示)된 진리들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따라 어느 하나에 편중(偏重)하는 일은 있으나 그 편중이 영속(永續)하지는 못한다. 가까운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Protestant Liberalism)는 신적 내재성에 편중하였다. 하나님은 자연(自然), 역사(歷史), 사람 안에 개진(開陣)되는 실재(實在)시라 하였다. 이 편중은 종교를 과학(科學), 현대사상(現代思想), 인적(人的)정신(精神)과 조화(調和)시키려는 자유신학(自由神學)의 욕망(慾望)에 융합(融合)하였다.
제 5 절 하나님의 유일성(唯一性)
一, 하나님의 단수성(單數性)
(一) 독일성(獨一性). 이 속성은 다른 모든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오직 한분의 신적(神的)실유(實有)가 계신다는 긍정(肯定)을 함의 한다. <다른 모든 신들을 제외하고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신다>( A.A. Hodge). 성경은 여러 구절에서 하나님ㄴ의 독일무이(獨一無二)하심을 확언(確言)한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으며 (신4:35)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것이며 (왕상8:60)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고전8:6) <하나님은 한분이시니라>(딤전2:5)고 한다.
합리적으로 고찰하더라도 하나님의 독일성은 확인되지 않을 수 없다. (1) 무한하고 절대적이신 자는 본체에서 하나이실 수밖에 없으니 만일 그런 실유가 둘이라면 둘은 서로 포함하며 포함되어 결국 동일(同一)실유(實有)로 되고 말 것이다. <두 무한히 완전한 실유들의 공존의 관념이 성경에 모순되는 것 같이 인생이성에게 모순된다는 것은 확실하다>(A.A.Hodge).
(2) 하나님의 존재는 영원부터 그 자체에 원인(原因)을 가지어 필연적(必然的)이니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에 동일하여 독일이실 수밖에 없다. 다른 모든 존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의지(意志)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우발적(偶發的)이지만 자신에 원인(原因)을 가지신 하나님이 어느 때에나, 공간의 어느 부분에나 존재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不合理)하다. 그런데 모든 때와 공간의 매 부분에 일양적(一樣的)인 이 필연(必然)은 분명히 유일(唯一) 또는 불가분(不可分)이어서 능히 유일 하나님의 존재의 근거(根據)가 될 수 있다. (3) 우주의 현상은 모든 계획과 공작의 통일성을 계시(啓示)한 즉 그것을 창조(創造)하고 섭리(攝理)하시는 자는 독일이실 수 밖에 없다. 전 피조계(全 被造界)는 현저히 단일(單一) 불가분(不可分)의 세계(世界)다. 만일 결과가 먼저 있는 원인의 공작을 증명한다면, 의장(意匠)의 자취드리 의장자(意匠者)를 증명한다면 그 의장과 그것의 실행에 있는 계획과 공작의 단일성은 의장자가 하나라는 것을 증명한다.
우주는 하나의 통일체(unit)라는 것은 현대(現代)과학(科學)과 철학(哲學)의 확정(確定)된 결론(結論)이며 이것의 추론(推論)으로 우주를 창조(創造)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하나이시라는 귀결(歸結)이 나온다.
(二) 독특성(獨特性).
하나님의 수적 독일성(獨一性) 보다도 그의 성질상 독특하심을 강조(强調)하는 성구들도 있다. 유명한 신명기 6:4의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시니라>한 말씀에 <오직 하나>의 히브리어 <에하드, אחד >는 독특성을 의미한다. 카일Keil)은 이 구절은 하나님의 수적(數的) 유일성(唯一性)을 가르치는 것 아니라, 여호와는 유독히 여호와라는 이름을 받기에 합당한 신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였다. 이것은 또한 스가랴 14:9에 있는 명사의 의미며 출에굽기 15:11의 수사적(修辭的) 질문(質問)에도 이와 같은 관념이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광명에 비추어 보아도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은 절대(絶對), 자존(自存), 불변(不變), 무한(無限)하시니 유(類)가 없는 독특한 영(靈)이시다.
(三) 다신(多神)과 이원(二元)의 배제(排除)
하나님의 단수성(單數性)은 많은 신의 존재를 믿는 종교(宗敎)들의 다신론적(多神論的) 신관(神觀)을 다 배제한다. 그리고 우주에 서로 독립한 선악의 두 원리(原理)가 본래부터 대립(對立)하여 무궁(無窮)한 투쟁(鬪爭)을 계속(繼續)하고 있다고 하는 이원론(二元論)도 신속성(神屬性) 앞에는 용인(容認)될 수 없다. 다신론과 이원론에 대항하여 우리는 주장하기를 둘이나 그 이상수의 신들을 생각하는 것은 자가(自家)모순(矛盾)이니 왜냐하면 그 경우에는 각 신이 다른 신을 제한(制限)하여 그의 신격(神格)을 파괴하겠기 때문이라 한다. 사리상(事理上)절대, 자존, 불변, 무한은 하나님에게만 속한다. 뿐만아니라 한 신으로써 우주의 모든 사실들을 다 설명할 수 있는 때에 둘이나 그 이상수의 신들을 주장(主張)하는 것은 철학적(哲學的)이 아니다.
二, 하나님의 단순성(單純性)
(一) 요의(要義)와 관련(關聯)
이 속성은 신적(神的)실유(實有)이 내면적 품질적(品質的) 유일성(唯一性) 즉 하나님의 단순한 품질, 분할 될 수없는 동시에 복합적이 아닌 상태를 함의 한다.이 속성의 요의는 (1) 하나님 삼위는 신적 본체를 구성하는 여러 부분이 아니며 (2) 하나님의 본체와 속성은 판연(判然) 분립(分立)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속성은 그의 본체에 첨가(添加)된 무엇이 아니라 함이다. 본체와 속성은 하나이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을 빛과 생명으로 의와 사랑으로 말하여 그를 그의 속성들과 동일시하였다.
(二) 증명(證明)
하나님은 영원부터 자존, 불변하시어 필연적으로 계기(繼起)없이 동일하신고로 그 안에는 본체의 특성과 양식(樣式)이 하나라고 신학자들은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항상 그가 어떠하신 바(what he is) 그대로니 그의 지성(知性), 감정(感情), 결의(決意)의 다양(多樣)상태(狀態)들은 계기적(繼起的), 무상적(無常的)이 아니라 공존적이며 영구적이요, 그는 본체적으로(essentially) 그가 어떠하신 바 그대로니 동일한 필연에 의하여 존재하신다. 하나님 안에 있는 무엇이든지 사상(思想), 정서(情緖), 결의(決意), 행동(行動) 그 무엇이든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비록 하나님의 속성을 솔직히 단언(斷言)하지 않으나 그를 의, 진리, 지혜, 빛, 생명, 사랑으로 말하여 이 특성들의 각자가 그 절대적 완전성(完全性) 때문에 하나님의 실유와 동일하다는 것을 지시하는 곳에서 이 진리를 함의 한다. 본체와 속성을 동일시하는 성경적 표현들은 그의 단순성을 증언함이 분명하다.
(三) 이의(異義).
하나님의 단순성은 중세기간(中世紀間)에 이의되었고 쏘시너스(Socinus)파와 알미니안(Arminian파에게 부정되었다. 최근의 신학(神學)서류(書類)에는 이 신적 속성들이 드물게 거론된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것을 적극적(積極的)으로 부정(否定)함은 이것은 순전히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추상(抽象)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그들의 평가에 이것은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교리(敎理)와 충돌(衝突)된다고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댑네(Dabney)는 하나님의 실체에 합성이 없다고 믿으나 그 안에 실체와 속성들이 하나요, 같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이 그 점에서는 유한영(有限靈)들보다 더 단순하지 않으시다 하였다(R.L. Dabney, “Systematic and Polenic Theology”, p. 431).
바빙크(H. Bavinck)말하되 <하나님의 단순성의 관념은 추상의 결과가 아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피조물들에 속하는 모든 대당(對當, appositions)과 차이들(distinctions)을 배제(排除)함에 의하여 또는 그를 그 안에 대당(對當)들이 없는 실유로 묘사(描寫)함에 의하여 도달되지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의 단순성은 하나님에게 모든 피조물적(被造物的) 완전(完全)들을 가장 전적이며 신적인 양식으로 돌린 결과다. 하나님을 <가장 ㄷ나순한 보체>로 묘사하므로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는 그를 완전(完全)한 실체로 지시하며 우리는 그에게 본체(本體)의 무한(無限)한 충만(充滿)을 돌리며 우리는 그가 무한하고 끝없는 <대양(大洋)의 본체(本體), essence of ocean>라는 것을 고백한다. (Herman Bavinck, “The Doctrine of God,” 1955, p. 171).
신적 단순성(單純性)의 교리가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교리(敎理)와 충돌된다는 견해는 논건의 고찰이 천박(淺薄)한 때에만 가질수 있는 것이다. 장차 삼위일체(三位一體)의 논의(論議)에서 밝히려는 바와 같이 영원적 자존적 신적 본체가 같은 의미와 정도로 모든 위(位)들에 공통한다고 생각하면 신적 단순성에 아무 지장도 오지 않는다. 또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바와 같이 하나님 안에 삼위는 그의 존재 혹 실유의 삼양태(三樣態)라고 생각하는 것도 신적 단순성을 이해함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제 五 장 하나님의 속성(屬性)(下)- 공유적(共有的) 속성(屬性)
제 1절 하나님의 영적 생적 인격성(서언)
一, 하나님의 영성(靈性)
(一) 요의(要義)
성경에서 하나님의 정의에 가장 접근(接近)한 표현들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은 영(靈)이시니라>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다(요4:24). 주께서는 하나님을 일종의 영(a spirit)이라고 말씀하심이 아니라, 관사(冠詞) 없이 <영이시니라 (He is Spirit)>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하는 단언(斷言)에 포함된 의미를 정당히 해설(解說)한다면 소극적으로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라며 의뢰하지 않으신다 함이다.
1, 물질이 아니심.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시다. 영은 정미(精微)한 형식의 물질이 아니라 무형(無形), 비합성(非合性), 불가멸(不可滅)의 비물질적 실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신체적(身體的) 감관(感官)의 대상으로 지각되실 수 없으며 물리적 요소들이나 신체적 부분들로 구성되지 않으셨으며 물질적 존재의 제한 혹 파멸의 조건들에 굴복하지 않으신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말씀하시고(눅24:39) 바울은 하나님을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자>로 말하고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단언하였다(딤전1:17, 6:15, 16).
2, 물질에 의뢰하지 않으심. 하나님은 물질에 의뢰하지 않으신다. 인생의 마음도 현세(現世)이외(以外)의 다른 상태에서는 의식(意識)생활(生活)에 물질적 신체를 의지하지 않을 수 있다. <인생(人生)경험(經驗)의 한도 안에서 마음은 뇌(腦)와 연합(聯合)해서만 알려진다고 하여 그것이 다른 양식으로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 아니다>(Romanes, “Mind and Motion”, p. 34). 하물며 하나님이 물질적 우주를 자기의 지각(知覺)기관(機官)으로 의지하실 것인가?
(二) 증명
1, 성경의 단언(斷言). 성경은 하나님의 영성(靈性)을 솔직히 단언(斷言)하며 이미 알려진 일로 인정하고 나간다.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영이시니>라 하신 말씀과 (요4:24) 바울의 하나님은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는 교훈은(딤전1:17, 6:16) 위에서 이미 언급되었던 것이다. 바울이 다른 성구들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 (롬1:20),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골1:15)을 말한 것도 하나님의 영성에 대한 명확한 증언들이다.
2, 무한, 절대(無限, 絶代)의 觀念. 영성의 관념은 무한, 절대의 관념에 따라온다. 물질은 분명히 영보다 열등(劣等)하여 여러 종류의 불완전과 제한을 포함하여 있다. 분리되고 부절히 반동하는 원자들로 구성된 물질은 <하나>될 수도 없고 <무한>할 수도 없고 불변(不變)할 수도 없다. 사람 안에서와 같이 하나님 안에 물질이 영과 연합하였을 수 있다는 관념은 그를 낮추어 시간과 공간의 제한에 속박하려는 경향을 가지니 허용될 수 없다.
3, 유신론증(有神論證)의 증명(證明). 우주의 창조주(創造主)와 섭리주(攝理主)에게 물질적 특성들이 있다는 종적(蹤迹)은 아무 곳에서도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의 존재를 밝히는 모든 증명은 합력하여 그는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선하시고 능하신 영(靈)이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二, 하나님의 불가견성(不可見性)
하나님의 영성은 그의 불가견성(invisibility)을 함의 한다. 위에서 하나님의 영성은 그에게 형태적(形態的) 존재(存在)를 도리는 것을 필연적으로 배제한다고 말할 때에 우리는 잠간 이 논건(論件)에 접촉(接觸)하였던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 속성을 강조로 선포(宣布)한다. 하나님은 <아무 사람도 보지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딤전6:16),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며 (요1:18),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形容)을 보지 못하였으며>(요5:37), <어는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일4:12),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골1:15).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출33:9, 10)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볼 수 없음을 표시한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출24:9, 10)라 한 말씀도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이 나타난 것을 표시할 뿐이요, 그들이 하나님 자신을 보았다 함은 아니다(신4:12, 15 참조).다니엘과(단7:9,13) 요한은 (계4:3, 5:7) 환상(幻想)중에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다고 한 것도 하나님의 영적(靈的)성격(性格)의 상징적 묘사(描寫)들이요, 환상 중에 나타난 광경(光景)이니 사람으로서 하나님 자신을 본 실례(實例)라 할 수 없다. 아브라함(창18:) 야곱에게(창32:24-30) 하나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은 그 때 그 때 사람의 형체(形體)를 취하여 외면적(外面的)으로 계시(啓示)하심이요, 하나님 자신의 본체(本體)를 사람에게 보여주심은 아니었다.
三, 하나님의 생명성(生命性)
성경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제시한다.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렘10:10) <자기 속에 생명이 있으매> (요5:26)<살으시고> (살전1:9)<죽지 아니함이 그에게만 있다>(딤전6:16).
성경이란 단순한 관념(觀念)이어서 정의(定義)하기 곤란하나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이것을 안다. 혹자는 생명은 과정(過程)뿐이라(Dewey, “Psycho;ogy”, p. 247)고 정의하나 우리는 하나님 안에 생명을 그렇게 볼 수 없음은 신적(神的) 주체(主體)없이 신적(神的)생명(生命)이라는 과정 혹 활동은 사유(思惟)하기 불능한 때문이다. 혹자는 생명은 외계(外界)상태(狀態)와 환경에 적응함이라고(Herbert Spencer, “Biology”, 1:57-71) 정의하나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것은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생명은 불가능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四, 하나님의 인격성(人格性)
성경적 관점에서 보아 인격적 실유란ㅁ 자의식(自意識)과 자결정(自決定)의 재량(才量)을 가진 <나>, <너>, <그>라는 대명사들이 의미있게 적용될 수 있는 실유(實有)다.
(一) 절대(絶對)와 인격(人格)
인격적(人格的)존재(存在)가 절대의 관념(觀念)에 조응(照應)하느냐 하는 것은 오래동안 철학자(哲學者)들의 주의를 끌어온 문제요, 아직도 쟁론(爭論)의 제목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대부분 <절대>라는 말에게 들리는 의미가 어떠함에 달린 것이다. 철학에서 <절대>라는 말은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으니 즉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논리적(論理的), 원인(原因)적(的)의미(意味)다.
1, 불가지론(不可知論)적(的) 의미(意味).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에게는 절대자(絶對者)란 무관계자(無關係者)니 그것이 전연 아려질 수 없음은 사물은 그것들의 관계에 의해서만 알려지지는 때문이다. 인격은 관계를 떠나서는 사유(思惟)되기 불가능한즉 그 본체에서 무관관계적인 절대자와 동일시될 수 없ㄱ도 알려지지 못하는 그것에는 술정(述定)되기도 불가능할 것이다.
2, 논리적 의미. 논리적 절대자(絶對者)에 있어서는 개체(個體)는 보편(普遍)에 종속(從屬)하고 최고(最高) 보편(普遍)은 보편은 구경적 실재니 스피노자(Spinoza)의 절대적 실체와 헤겔(Hegel)의 절대적 정신이 다 이러하였다. 이 절대자는 유한(有限)에서 또는 유한을 통하여 그 자체를 표현할 수 있으나 유한한 아무것도 이것의 본래적(本來的) 성질을 표현하지는 못한다. 이것에게 인격을 돌리는 것은 이것을 실유의 한 양태(樣態)에 제한하여 그 절대성을 파멸하게 될 것이니 불가능한 일이다.
3, 원인적 의미. 원인적(原因的) 절대관(絶對觀)은 절대잘ㄹ 만물의 구경적(究竟的) 근거(根據)로 설술(說述)하나니 이 절대자는 그 자체(自體)이외(以外)의 아무것에도 의뢰하지 않고 만물을 그 자체에게 의뢰하게 한다. 그리고 이 절대자는 반드시 전적으로 무관계적이 아니라, 오직 유한 피조물들과 능히 다양(多樣)관계(關係)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절대자의 개념은 인격의 관념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 뿐ㅁ 아니라 철학자들은 항상 사람 안에 실현(實現)된 대로의 인격의 관념을 가지고 변론하였고 하나님 안에 있는 인격은 무한히 더 완전한 무엇이라는 사실을 살피지 못한 것 뿐이다. 사실상 완전한 인격(人格)은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고 우리가 사람 안에서 보는 바는 그 원형(原型)의 모사(模寫)뿐이다.
(二) 성경적(聖經的) 증명(證明)
1, 자의식적(自意識的) 자결정적(自決定的) 실유(實有). 이 논제의 해설의 첫머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격적(人格的) 실유(實有)의 본질(本質)은 자아(自我)의식(意識)과 자결정의 재량인데 하나님은 이 재앙을 완전히 가지신다.
첫째로,하나님은 자기를 자기의 공작(工作)의 주체(主體)로 아시어 <나는 나를 안다> <나는 나다>라 하시고 스스로 말씀하실 수 있는 자의식(自意識)을 완전히 가지고 계신다. 이 진리는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를 통하여 계시(啓示)되었다. <그(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하는 가상적(假想的)이스라엘 사람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답변하시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하시고 다음에는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셨는데 <옇와>는 <존재하는자> 혹은 <계속적으로 있는 자>를 의미한다(출3:13-15).<I am I who am, 나는 있는 나니라>.
2, 인격적(人格的) 실유(實有)의 기타 특성(特性).
(1) 지정의(知情意)의 소유(所有) 하나님 를 지, 정, 의의 소유자로 묘사한 성구들은 그의 인격성(人格性)을 지시함에 특별히 유력하다(고전2:11, 시2:4,5, 엡1:9, 11, 욥23:13).
(2) 신인(神人)동형(同型)동성적(同性的) 계시(啓示) 성경의 하나님에 관한 신인동형동성적 제시들은 하나님의 영성(靈性)과 성성(聖性)에 충돌되지 않도록 해석됨을 요하지만 그 지시하는 바가 인격적(人格的) 속성(屬性)들을 가진 진정한 인격이라고 추상(推想)하지 않으면 정당하게 보여 지기 어렵다(第四장 1절 二의 <신인동형동성주의>참조)
(3) 인격적(人格的) 교제(交際)
(4) 인격적 임재(臨在)
(5) 인격적(人格的) 계시(啓示) 요한복음 14:9.
(三)합리적(合理的) 고찰(考察)
1, 사람의 인격성(人格性)
2, 세계의 증거(證據)
3, 사람의 도덕적(道德的) 종교적(宗敎的) 특질(特質)
사람의 종교적 성질은 그로 하여금 고등 실유와의 인격적 교제를 추구 케하니 의존과 회개, 신앙과 순종, 교제와 사랑, 봉사와 충성, 생과 죽음에서의 신뢰 같은 모든 것이 인격적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는 의미 없는 것이다.
제 2 절 지성적(知性的) 속성(屬性)
一, 하나님의 지식
(一) 부정(否定), 증명(證明), 정의(定義)
1, 부정(否定), (1) 무한(無限) 안에는 지식(知識)이 없다함. 범신론(汎神論)에 의하면 우주는 하나님의 존재형식이요 , 무한은 유한(有限)에서만 지성적 의식과 생명에 온즉 유한과 구별된 무한 안에서의 지식은 있지 않으며 또 있기 불능하다. 하나님은 유한 실유들이 사는 한도만치만 사시며 그들이 생각하며 아는 한도만치만 생각하시며 아신다. 전지(全知)는 유한실유들의 지성의 총화(總和) 혹 집합(集合)뿐이다. 이것은 하밀톤(Hamilton)과 맨셀(Mansel)도 시인(是認)한바와 같이 의식이나 지성에 포함된 것과 같은 상태들이나 관계들의 가능성을 제외하는 절대적 실유의 관념으로부터 필연적으로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스트라우스(Strauss)는 말하되 <그 자신에서 말고 유한한 지성에서 하나님은 전지하시니 그것은 함께 지식의 모든 가능(可能)한 형식(形式)들이나 정도(程度)들의 충만 혹 완성을 구성한다.>고 하였다(Strauss, “Dogmatik”, Vo1., I, p. 575).
(2) 지식(知識)과 능력(能力) 사이에 구별이 없다 함. 하나님 안에 지식의 가능성은 또한 지식과 능력 사이에 구별을 부정하는 사람들에 의해 실질적(實質的)으로 부정된다. 지식이 능력이라면 지식됨을 중지(中止)할 것이니, 만일 전지(全知)가 전능(全能)의 다른 이름뿐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판이한 속성됨을 중지할 것이다. 유감스러운 일은 교부(敎父)들만 아니라, 루터파(Luther)와 개혁파의 신학자들도 스콜라학자(Schoiastic)들의 권위(權威) 부인한 후에 거의 즉각적(卽刻的)으로 사색(思索)들에 투신(投身) 하였다는 것이다.
2, 증명(證明). (1) 성경적 견해. 이 주제에 관한 성경적 견해는 하나님 안에 속성(屬性)들을 판이(判異)한 것으로 구별하며 그의 안에 지식은 그것의 근본적 성질(性質)에서 우 리 안에 지식이 어떠함과 같다고 추상(推想)한다. 이 견해는 영적(靈的)실유(實有)이신 하나님의 유일성(唯一性)과 단순성(單純性)에 충돌하지 않는다. 사람 안에 지식(知識)과 능력(能力), 지성(知性)과 의지(意志)는 여러 실체(實體)들이 아니라 영혼의 생명 혹 활동이 나타나는 여러 양식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영(靈)으로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를 합성(合成)된 실유(實有)로 알지 않고 그 무한한 생명과 활동을 아는 것, 의지하는 것, 행동하는 것에서 나타내시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질을 바로 이해하려면 그 안에 지식은 지식이요, 능력이나 영원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근본적 성질에서 우리 안에 지식이 어떠함과 같다는 것을 확신(確信)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적 속성들의 개념에서 우리 안에 있는 속성들에 속하는 제한(制限)들과 불완전(不完全)을 반드시 제외(除外)할 것이나 그것들의 차이를 무시(無視)하지 말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 앞에 만물이 완전히 드러나는 항시 임재하는 눈이시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잠15:13, 삼상2:3, 욥12:13, 시94:9, 139:1, 2, 12, 147:4,5, 잠15:11, 사29:15, 40:27,28, 겔11:5, 행15:18, 마10:30)등이다.
(2) 절대(絶對)완전(完全)한 실유(實有)의 관념(觀念)에 포함되었음, 이 무한한 하나님의 지식은 성경에서 부절(不絶)히 단언(斷言)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절대적으로 완전한 실유의 관념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이 같은 실유는 무엇을 알지 못하시기 불능(不能)하며 그의 지식은 증가되기도, 감소(減少)되기도 불능하다. 하나님의 전지는 또한 그의 편재(遍在)에 따라 온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채우심으로 천만사물(千萬事物)이 그의 앞에서 처리된다. 그는 우리의 생각들을 아시되 그것들이 우리 자신들에게 알려지는 것보다 더 잘 아신다. 이 신적 지식(知識)의 완전성은 모든 예배의 행위들에서 의당(宜當)한 것으로 인정된다. 우리는 우리의 상태(狀態)와 궁핍(窮乏)을 아시며 우리의 말하는 바를 들으시며 우리의 모든 수요(需要)에 응수(應酬)하기에 유능(有能)하신 이라고 믿는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전지하지 않으시면 그는 세계를 의(義)로 심판(審判)하지 못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속성의 완전성을 믿는 신앙은 자연(自然)종교(宗敎)에게도 근본적(根本的)으로 중요하다.
3, 정의(定義). 찰스 하지(Charles Hodge)는 지식을 정의(定義)하여 말하되 <지식은 진리(眞理)의 지성적(知性的) 이해(理解)(intellectual apprehension)다. 그것은 본체(本體)와 이해되는 참된 무엇이다>고 하였다(“Systematic Theology”, I, p. 393).
스트롱은(Strong)은 하나님의 지식을 정의하여 말하되 <이것으로 우리는 현실적이거나 가능(可能的)이거나 과거, 현재, 혹 미래의 것이거나를 물론하고 지식의 대상들인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완전하고 영원한 지식을 의미한다>고 하였다(A.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Vol. I, p. 282).
투레티니(Turretin)에 의하면 <하나님의 지식에 관하여 다른 아무 것보다도 먼저 두 가지가 고찰(考察)될 것이니 즉 그것의 양식(樣式)과 대상(對象)이다.> (Turretin, "Locus", III, p. 12). 이 두가지 고찰을 염두에 두고 구체적(具體的)으로 정의하면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이 전연 독특(獨特)한 양식으로 그 자신과 가능적(可能的) 또는 현실적인 모든 사물을 한 영원하고 가장 단순한 동작에 의하여 아시는 그의 완성(完成)(속성)이다.>(Berkhof) 아랫 글은 이 정의의 상해(詳解)로서 하나님의 지식(知識)의 성질(性質)과 대상(對象)의 설명에 전력할 것이다.
(二) 성질(혹 양식)
1, 원형적이니 즉 하나님은 우주를 아시되 그것이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안에 유한적 실재로 존재하기 전에 자기의 영원한 이념(理念)안에 존재한대로 아시며 따라서 그의 지식은 절대적(絶對的) 완전(完全)을 특성으로 한 지식이다.
2, 직각적(直覺的)이어서 그 자체의 광명(光明)에 의하여 모든 것을 직접적(直接的)으로 식별(識別)하는 지식이요, 기지(旣知)에서 미지(未知)에로, 논리적(論理的)으로 진행(進行)하는 변론적(辯論的) 증명적(證明的)인 무엇이 아니다.
3, 독립적(獨立的)이니 그의 피조물(被造物)이나 그것들의 행동에 의하여 외계(外界)로부터 얻어지는 지식이 아니다.
4, 총괄적(總括的) 동시적(同詩的)이요, 계기적(繼起的)이 아니니 하나님은 일시에 모든 사물을 그 총화(總和)로 보고 한 가지씩 연차(連次)관찰(觀察)하지 않으신다.
5, 개별적(individual)임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직각적으로 인식의 직접동작에 의해 아시고 추론적으로 여러 갈래의 변론(辯論)의 과정(過程)에 의해서나 혹은 한 가지를 다른 한 가지와 비교함에 의해서 알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6,명확(明確, distinct)함은 하나님은 사물들의 여러 가지 술정들(predicates)을 여러 가지 개념들에 의하여 연합시키시는 것 아니라, 오직 하나의 가장 명확한 직각의 동작(動作)에 의해 모든 것을 투시(透視)하시므로 아무 것도 심지어 가장 작은 것이라도 그를 피하지 못하는 때문이다.
7, 불변적(不變的)임은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며 스스로 변함없이 남아 있으되 만물을 움직이시며 그리하여 하나의 변치 않는 인식(認識)의 동작(動作)에 의해서 사물들의 다양(多樣)변동(變動)들을 모두 지각(知覺) 하시기 때문이다.
8, 완전(完全)하고 충분히 의식적임은 하나님은 자기자신 즉 자기의 본체(本體)를 통하여 모든 것을 아시고 피조물(被造物)인 인생들이 대상들을 아는 것 같이 사물들의 현상에 의해서 알리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三) 대상(혹 범위)
1, 모든 것의 전지(全知)
(1) 하나님은 그 자신을 아시며 자신 안에서 자신으로부터 오는 만사를 아신다(내면적 지식). (2) 그는 과거, 현재, 미래에 가능적(可能的)인 모든 사물을 아시나니 일정한 정상(情狀) 아래 일어나려는 모든 사물이 다 그의 마음에 임재(臨在)한다. (3) 그는 모든 과거, 현재, 미래에 현실적(現實的)으로 생성(生成)하는 대로 아시며 그것들을 그 참된 관계들에서 아신다. 그는 사람의 지식이 투입하지 못하는 사물들이 숨은 본질을 아신다. 욥37:16, 삼상16:7, 대상28:9, 17, 시139:1-4, 렘17:10), 사람의 행로(行路)를 관찰(觀察)하시며 (신2:7, 욥23:10, 24:1023, 31:4, 시1:6, 119:168). 그들의 거처를 아시며(시33:13), 그들의 생명의 날들을 아신다(시37:18). 그는 무기적(無機的) 피조물(被造物)과(시147:4) 유기적(有機的) 피조물(被造物)을 아시며(마10:29), 과거와(말3:16) 미래를 아시며(사46:9, 10), 관념적으로 가능한 것과(삼상23:12, 마11:23) 불가(不可)완해(完解的)인 것을 아신다(시139:6, 롬11:33).
2, 필연적(必然的) 지식(知識)과 자유적(自由的) 지식(知識).
필연적 지식은 하나님의 자신과 가능적인 모든 사물에 대하여 가지시는 지식이다. 하나님은 그의 성질의 필연(必然)에 의하여 그 자신(自身)을 아시며 그의 권능의 지식에 의하여 모든 가능적(可能的)인 사물을 아신다. 이것을 <필연적 지식>이라 칭함은 이것은 신적(神的)의지(意志)의 동작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닌 때문이다. 이것을 또한 <단순한 지성의 지식> (the knowledge of simple intelligence)이라 칭함도 이것은 신적 의지(意志)의 병발적(倂發的)동작(動作)이 없는 단순한 신적 지성의 동작인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유적 지식은 현실적(現實的)인 모든 사물(事物) 즉 과거에 존재한, 현금에 존재하는, 미래에 존재할 사물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가지시는 지식이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전포괄적(全包括的)이며 불변적(不變的), 영원적(永遠的)인 목적의 무한한 지식에 기초한 것이니 신적 의지의 병발적 동작에 의하여 경정되는 고로 자유적 지식이라 칭한다. 이 지식은 또한 <통찰의 지식>(scientia visionis)이라고도 칭한다.
2, 미래(未來)에 우발(偶發)할 일의 예지(預知)
하나님의 예지에 관하여 특별한 논의(論議)를 요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사람의 자유(自由)행동(行動)에 관한 따라서 미래에 우발적(偶發的, contingent), 조건적(條件的, conditional)사변들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가 어떻게 가능 한가 함이다. 우리는 필연이 관할(管轄)하는 곳에 하나님의 예지가 가능하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있으나 사람이 자유로 일으키는 동작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예지(預知)하실까?
이 문제의 난관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자유(自由)행동(行動)의 신적 예지를 부정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자유를 부정하였다. 소시너스(Socinus)의 항론파(抗論派, Remostrants)의 어떤 사람들은 자유행동의 예지를 부정하였다. 전지(全知)란 지식(知識)할만한 매 사물의 신적지식(神的知識)인 바 자유행동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어서 성질상 미확실(未確實)한 것이므로 생성(生成)하기 전에 예지되기는 불가능하다고 소시너쓰는 변론하였다.
그러면 골돈(A.J. Gordon)이 말한 바와 같이 이 같은 하나님의 지도 아래 사는 것처럼 처참하고 무서운 일은 없을 것이다. 우주는 전등이나 기관수 없이 어두움 속에 돌진(突進)하는 급행차(急行車)와 같이 모험(冒險)행진(行進)함일 것이며 우리는 어느 순간에 깊은 곳에 떨어져 빠질런지 알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신적 예지의 진리를 옹호(擁護)하기 위하여 인적 자유의지(自由意志)의 원리(原理)를 희생시키는 언론을 말한 자도 있다. 매카비(Mecabee, "Divine Nescience of Future Contingencies a Necessity")는 말하되 베드로의 부인과 유다의 배반과 같은 성취된 예언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 결과를 얻기 우ㅢ하여 특별한 감화력(感化力)을 사용하시어 베드로와 유다의 의지(意志)는 원인(原因)과 결과(結果)의 법칙(法則)아래 무책임적(無責任的)으로 동작(動作)케 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사람의 자유행동의 결과인 우발적(偶發的) 조건적(條件的) 사건들의 신적예지를 가르친다(삼상22:10-13, 왕하 13:13:19, 시81:14, 15, 사42:9, 46:9, 10, 48:18, 렘26:2, 3, 38:17-20), 겔3:6, 마11:21, 행2:23, 15:18). 그리고 하나님은 자주 미래에 우발(偶發)할 일을 예언 하셨는 바 후에 과연 성취(成就)되었다(막14:30). 동시에 성경은 사랑의 자유에 관해서도 의문(疑問)을 허용(許容)하지 않는다. 즉 성경은 문제되는 두 사건의 하나라도 부정(否定)하는 것을 승인(承認)하지 않는다. 성경은 미래에 우발할 일의 신적 예지와 사람의 자유행동을 아울러 사실로 인정하되 두 사이에 모순(矛盾)과 충돌(衝突)이 있음을 의식(意識)하지 않는다.
사람의 자유행동에 의하여 우발할 일의 신적 예지의 가능성에 관하여 몇 가지 설명이 제출되었다. 이 설명들은 이 난제(難題)를 충분히 해결하지 못할지라도 해결에 접근(接近)할 수는 있을 것이다.
(1) 간접적 예지. 하나님은 사람의 자유행동의 원인을 아심으로 그것의 결과를 예지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만사를 작정(作定, 配布)하셨고 그것들과 함께 그것들의 원인들과 상태들을 그 되어 나오는 정확한 순서 그대로 작정하셨으니 未來事들의 신적 예지는 그의 작정에 의지한다. 사람의 자유의지(自由意志)도 원인과 이유를 갖고 동작하는 것이니 구경적(究竟的)으로 하나님의 작정에 관계를 가진 것이요, 따라서 그 결과의 신적 예지는 가능하게 된다. 만일 의지의 자유가 전단(專斷, indifferentia)을 의미한다면 그것의 행동의 결과를 알 길이 없다고 보여질 것이다. 그러나 의지(意志)의 자유를 전단으로 보는 것은 부당한 개념이다. 사람의 의지란 결코 전연 미정적(未定的)인 공중에 달려 어느 방향에든지 전횡적(專橫的)으로 흔들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우리의 성질에 근거(根據)를 두고 우리의 가장 깊은 본능들과 감정(感情)들에 연결되고 우리의 성격과 지성적 고찰에 의하여 결정되는 무엇이다. 이렇게 인적 자유가 이성적인 자결정(自決定, Lubentia rationalis)으로 생각되면 이것이 신적예지와 조응(照應)하지 않는다는 말은 부당할 것이다.
(2) 직접적 예지. 자유행동의 결과를 그것의 원인에 의하여 아는 것은 예지가 아니라, 추론(推論)이며 변론이라고 반대하는 견해가 있으나 이 같이 지정할만한 객관적(客觀的) 근거(根據)를 가진 것에서는 또한 직관적이니 하나님의 모든 지식은 직관적인 때문이다. 신적 작정에 의한 미래사의 지식이 동시에 직관적이니 구경적 으로 신적작정에 관계있는 이 예지도 역시 그리하다.
자유행동의 신적 예지는 또한 직관적(直觀的)이다. <어거스틴(Augustine) 이후로 예지와 자유를 조화시키는 난관을 해결하는 방도(方途)는 이 난관을 주관적(主觀的)인 것뿐으로 제시함이었다. 지식과 예지의 구별은 우리 안에 만 있다. 하나님 안에는 이 같은 차이가 있지않다> (Charles Hodge, Op. Cit., p. 146) 하나님은 초시간적(超時間的)이어서 시간적 계기로부터 자유하시고 영원한 현재에 살고 계시니 그의 지식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별이 있을 바 아니다.
(3) 중간(中間)지식(知識). 예수 교사파(敎社派), 루터파, 알미안파 신학자들은 소위 중간지식(Scientia media)이라는 것을 제언하여 이 문제의 해결을 삼으려 하였다. 중간지식이라는 명칭은 이것이 하나님의 필연적 지식(단순한 지성의 지식)과 자유적 지식(통합의 지식)의 중간(中間)지대(地帶)를 점령(占領)한다는 뜻을 표시한다. 중간지식은 그 대사이 모든 가능적인 사물이 아니라, <오직 장래에 실존(實存)할 특별한 무리의 사물들인>점에서 전자(前者)와 다르고 그 근거(根據)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아니라, <오직 단순히 선견(先見)된 인생의 자유적 동작인 점에서 후자(後者)와 다르다(A.A. Hodge, Op, p. 147). 뎁네(Dabney)는 말하되 <이 지식을 <중간적>이라 칭하는 이유는 그들의 추측(推測)에 하나님이 이 지식에 도달(到達)하심은 직접적(直接的)으로 자기의 목적을 아시는 것에 의하지 않고 오직 간접적(間接的)으로 하나님의 선견(先見) 혹 산출(産出)하신 외계적 정상(情狀)아래 우발적(偶發的)인 제이 원인이 동작할 양식의 무한한 통찰에 의하신다고 한 때문이다.>고 하였다(Dabney. "Systematic and Polemic Theology", p. 156). 중간지식은 전항의 <직접적 예지와 유사 한듯 하나 자세히 살피면 크게 다르다. 직접적 예지는 신적지식의 완전성(完全性)과 영원성(永遠性)에 의한 자유행동의 예지인 동시에 그 자유행동의 배면(背面)에 하나님의 여원한 목적(혹 작정)에 관계있는 원인, 이유있음(가접적 예지)을 인정(認定)한다. 그의 중간지식은 원인도 이유도 없는 순(純) 전횡적(專橫的)인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의미의 자유행동을 신적 예지(預知)의 대상으로 삼아 하나님의 지식을 순전한 인적 의지에 의뢰(依賴)케 함에서 매우 다르다. 하나님의 전지(全知)는 인적 의지의 전횡적 자유행동이라도 예지하지 못할 바 아니나 사실상 사람의 자유행동은 전횡적이 아니다. 그런데 중간지식은 인적 의지의 자유행동을 전횡적인 것으로 보며 따라서 그 행동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무관(無關)한 것으로ㅓ 보는 점에서 크게 잘못이다. 이 설은 사도행전 2:23, 로마서 9:16, 에베소서1:11, 빌립보서 2:13 같은 성구들에 베치 한다.
二, 하나님의 지혜(智慧)
(一) 지식과의 구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제4)은 하나님의 지혜를 그의 지식과 구별하지 않고 후자(後者)를 전자(前者)에 포함시켜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지혜에서 무한하시다고 하는 진술(陳述)은 그의 전지(全知)를 표시하기로 의도하였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정밀히 고찰하면 지식과 지혜는 비록 서로 밀접히 관계 되었으나 동일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둘이 항상 함께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배우지 못한 자라도 지혜에서 학자보다 우월할 수 있다. 지식은 연구(硏究)에 의하여 취득되나 지혜는 사물의 직관적(直觀的) 통찰(洞察)에서 오는 것이다. 전자는 이론적(理論的)이나 후자는 실제적(實際的)이어서 전자를 어떤 특별 목적에 이용한다. 지식과 지혜가 다 사람 안에서는 불완전하나 하나님 안에서는 절대적 완전을 특성으로 갖고 있다.
(二) 정의(定義)
지혜는 단순히 <모든 사물을 그것들의 상당(相當)한 가치대로 평가하는 것> (Olmstead)이 아니니 이것에는 도모(圖謀)와 목적의 요소(要素)도 포함되어 있다. 지혜는 <사람이 자기의 재량들을 사용하는 재량>(the talent of using one's talents)이라고 정의(定義)되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지혜는 수단(手段)을 목적에 조절시킴에 나타나는 대로의 하나님의 지능(知能)이니 그는 항상 가능한 최선(最善)의 목적을 정하시고 그것의 실현을 위하여 최선 한 수단을 선택하신다는 사실에 지향(指向)한다. 에취.비.스밑(H.B. Smith)은 이것을 <하나님이 가능한 최선의 수단으로 가능한 결과를 산출하시는 속성(屬性)이라고 정의하였다. 벌콮(Berlhof)은 좀더 특수하게 이것을 <하나님이 자기의 목적을 달하려고 자기의 지식을 응용하시되 자기를 가장 영화롭게 하는 방식으로 하시는 신적 완성이다>고 칭할 수 있다 하였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지혜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을 가능한 최고의 목적으로 선택하신다(A.A. Hodge).
(三) 증명(證明)
성경은 여러 구절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관설(關說)하며 잠언 8장에서는 이것을 인격화하여 말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지혜는 특수적으로 창조(創造)와(시19:1-7, 104:1-34), 섭리(攝理)와(시33:10, 11, 롬8:28), 구속(救贖)에(롬11:33, 고전2:7, 엡3:10) 나타났다.
三, 하나님의 진실
하나님의 진실(眞實)은 그 가장 넓은 의미에서 그의 지성적 도덕적(道德的) 모든 속성들에게 성격을 부여(賦與)하는 속성이다. 그의 지식과 지혜는 대상(對象)들과의 관계에서 무한히 진실하고 그의 선(善)과 공의(公義)는 그것들의 모든 행사에 있어서 그 자신의 성질의 완전한 표준에 조응(照應)함에서 무한히 진실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실을 몇 가지 문자로써 표현하였으니 구약에서는 <에메트>(תמא), <에무나>(אמונה)<아멘> (אמן)이요, 신약에서는 <알레데스> (αληθης), 알레데이아(αληθεια), <알레디노스> (αληθινος), <피스티스> (πιστις)이다. 이 사실은 벌써 하나님의 진실(truth)은 진정(眞正, veracity), 신실(信實, faithfulness) 같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관념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지시한다. 하나님은 진실이라고 칭하는 말은 가장 포함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一) 진정성(眞正性)
성경은 <진실>이란 말을 하나 이상의 의미로 사용하며 철학은 진실의 삼중(三重)개념(槪念)을 구별하여 <본체 즉 자체에서의 진정>, <표현 즉 말에서의 진정>, <지식 즉 지성에서의 진정>을, 다시 말하면 <형이상학적, 윤리적, 논리적 진정>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을 삼중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1,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의미(意味). 제 일로 하나님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진정하시니 즉 그 안에 신격(神格)의 이념(理念)이 완전히 실현(實現)된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은 그 안에 신격이 내포하는 모든 것이 발견되는 신이시다. 그는 모든 속성에서 완전하여 하나님으로서 당연히 되어 질 바의 전부시니 이 점에서 그는 공허(空虛)와 거짓이라고 정하여진 허위의 신들과 구별되신다.)시96:5, 97:7, 115:4-8, 사44:9,10).
2, 윤리적(倫理的) 의미(意味). 하나님은 또한 윤리적 의미로 진정하시니 그는 자신을 그 실상(實狀)대로 계시(啓示)하여 자기의 계시를 절대적으로 신뢰할만하게 하신다. 그는 자기의 피조물(被造物)인 인류(人類)에게 자기의 속성(屬性)들을 외적(外的)으로 나타냄에 있어서 진정으로 자기의 성질에 조응(照應)하게 하신다(민23:19, 롬3:4, 히6:18). 그는 자신에 대하여 선언(宣言)하시되 자신이 어떠하신 그대로 진정(眞正)히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과거의 모든 하나님의 계시들은 우리의 장래(將來)지식(知識)의 증거함에 따라 불신임(不信任)될 수 없다. 사람의 지식은 폐하되 하나님의 말씀은 영구히 폐하지 않는다(사40:8, 마5:18).
3, 논리적(論理的) 의미(意味). 끝으로 하나님은 또한 논리적 의미에서 진정하시니 이것의 효능(効能)에 의하여 그는 사물(事物)을 그 실상대로 아시며 사람의 마음을 구조(構造)하시되 사람으로 하여금 능히 사물의 외관(外觀)만 아니라, 그 실상(實狀)까지 알 수 있게 하시었다. 하나님의 논리적 진정성은 우리의 심력들은 정상상태(正常狀態)에서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것. 사상의 법칙들은 또한 사물의 법칙들이라는 것. 동일한 원인들은 항상 동일한 결과들을 산출(産出)한다는 것. 외계적 세계(外界的世界)와 그 안에 있는 제이 원인들은 객관적 존재를 가진다는 것을 보증한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진정성은 모든 지식의 기초이다.
성경적 증거: 출34:6, 민23:19, 신32:4, 시25:10, 31:6, 사65:16, 렘10:8, 10, 11, 요14:6, 17:3, 딛1:2, 히6:18, 요일5:20, 21).
(二) 신실성(信實性). 하나님의 진실의 다른 한 면은 신실성이라 칭하는 것이니 이 속성의 효능(効能)으로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을 항상 기억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맺으신 약속들을 성취하신다. 구속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우리의 어떠함과 어떤 일을 한 것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하신 바에 기초하는 때문에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고 신앙하는 한 우리의 결함(缺陷)들과 허물들은 그 약속 들을 무효(無效)되게 하지 못한다.(요일1:9). 하나님의 신실은 또한 우리의 금생(今生)내세(來世)의 모든 수요를 체워 주시려는 그의 약속들의 실현을 보증한다(시84:11, 91:4, 마6:33, 고전2:9).
성경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로써 말한다(민23:19, 신7:9, 시89:33, 사49:7, 고전1:9, 딤후2:13, 히2:13, 히6:17, 18, 10:23).
(三) 이의(異議). 하나님의 어떤 경고들이 실현되지 않음과 구원의 대상이 아닌 자들에게 초청(招請)과 권면(勸勉)을 말함은 하나님의 진실에 조화되지 않는다고 이의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 부조화(不調和)는 외관적(外觀的)이요 사실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