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프랑스는 종교전쟁, 프롱드의 난, 페스트, 봉건제도로 인한 세금 탈취, 심한 빈부 격차 등으로 인해 참으로 비참한 시기였다. 길에는 굶주림에 죽어 가는 어린이들, 부랑자, 도둑들이 범람하였고 어디서나 거지들이 들끓었다.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 빈센트 드뽈은 1581년 4월 24일 프랑스 남쪽 가스코니 지방 뿌이의 가난한 농가에서 여섯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고, 1600년 세속적인 출세의 야심을 품고 사제서품을 받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사건과 만남을 통해 그를 회심에로 이끌었고 당신의 거룩한 도구로 쓰셨다.
1612년 가난한 본당인 클리쉬의 주임신부로 파견되어 행복한 사목생활을 하던 중, 당시 상당한 세력이 있는 공디 가문의 전속사제 겸 가정교사가 된다. 이 가족과의 만남은 앞으로의 성인이 펼칠 많은 자선활동의 버팀목이 되어 준다.
1617년 공디가의 영지인 폴빌을 방문하던 중, 한 남자에게 고해성사를 주면서 농촌 지역의 영적 빈곤을 깨닫게 되고, 잠시 샤띠옹이라는 가난한 마을의 본당신부로 있으면서 보다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애덕동지회를 시작한다.
드 공디 부인의 요청으로 공디가의 영적 지도자로 다시 돌아온 빈센트 드뽈은 갤리선의 총지도 신부로서 죄수들의 영혼구원에도 힘쓰게 된다.
1625년 시골지역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제양성을 돕기 위해 '전교회'를 설립하고, 이어서 1633년 루이제와 함께 '사랑의 딸회'를 창설한다. 이는 당시 필요에 의한 현실직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25년 생애 동안에는 신학교 건립,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사업, 전쟁과 흑사병, 기근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구제 사업에 온힘을 기울였고, 왕의 자문역할을 하는 양심회의의 봉사자로서도 일했으며, 당대의 많은 위대한 영성 지도자들의 친구이며 상담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660년 9월 27일 79세를 일기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 1737년 6월 16일 성인품에 올랐고, 1885년 5월 18일에는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모든 자선사업 단체와 병원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