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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왕의 인구조사와 코로나 이후의 교회
사무엘하24장을 중심으로
다윗왕은 왕위에 오른지 35년경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태평성대를 누리면서 자신이 이룬 국력을 가늠하고자 인구조사를 명령하였다. 군사령관인 요압 장군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삼하24:3)라고 간곡한 진정에도 불구하고 인구조사를 재촉하였다.
일반적으로 인구조사는 군사력과 공공사업을 위한 노동력을 파악하고, 세금징수를 위하여 실행한다.(대상21:1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히고, 다윗을 충동하여 인구조사를 하게하였다)
왕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인구조사에 나선 장군들은, 9개월 20일 만에 이스라엘에서 팔십만명과 유다의 오십만명의 군사를 다윗왕에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다윗왕은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고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고 자책하였다. 심히 미련한 행동을 하면서도 악한 영에 사로잡혀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일에 열심히 헌신하는 자들과 부귀영화를 누리며 한가한 사람에게 접근하여 감언이설로 타락하게 만드는 전술을 사용한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타락하게 되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되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하여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번에 걸쳐 인구조사를 직접 명령하셨다. 첫 번째는 애굽에서 나온지 2년이 지난 B.C 1445년경 모세에게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모든 자를 군대대로 계수하라 하셨고(민1:19), 두 번째는 B.C1406년경 바알브올 사건으로 염병으로 이만 사천 명이 죽임 당한 후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셀에게 일러 이십세 이상으로 능히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하라(민26:1,2)고 하셨다. (1차 조사 603,550명 2차 조사 601,730명으로 1,820명이 줄었다)
다윗왕의 잘못된 명령으로 인한 징계는 칠 년 기근이나, 삼 개월간 전쟁으로 적에게 쫒겨다니거나, 삼 일간 전염병으로 고생하는 것이었으나, 다윗왕은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오직 여호와의 긍휼을 바랐으나 전염병이 발생하여 하루 만에 칠만 명이 죽임 당하였고, 다음 날 천사가 예루살렘을 치려할 때에 하나님께서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라고 하셨다.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는 약 4백만명 정도였기에 하나님께서 진노를 단축하지 아니 하셨다면 끔찍한 일이 될 뻔하였다.(출3장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보았고,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사백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애굽땅에서 나왔다)
의사이자 사회학자이며 생물학자인 니컬러스 A. 크리스타스는 「신의 화살」이란 책에서 인류는 전쟁과 기근과 질병에 반복적으로 희생을 당하며 산다면서, 이러한 유행이 지나간 후에 인류는 더욱 발전한다고 하며, 현재의 코로나는 2024년경에나 진정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동안 인류는 2002~2003년에 SARS(호흡기 질환)으로 774만명이 죽었고, 세계제1차대전(1914~1918)에 1.800만명, 1918년 전쟁 중에 스페인독감으로 1억명 이상이 죽고, 세계제2차대전(1939~1945)으로 8천만명이 죽고, 6.25전쟁(1950.6.25.~1953.7.27.)으로 남한에서 160만명 북한에서 350만명이 죽고, 중공군도 수십만명이 죽고, 남북한 이재민 1천만명이 발생하였다.
우리나라는 2022년도에 각종 암으로 83,378명 심장질환으로 33,715명, 코로나로 31,280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징계가 여러 번 있었다.
온 땅에 죄악이 관영하여 홍수심판을 내리심으로 노아의 가족 여덟 식구만 살아남았고, 광야에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들이 불뱀에 물려 죽었고,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게 반역하다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가족 전체가 땅이 입을 열어 한 순간에 음부에 빠졌고, 분향하던 250명은 여호와께로서 나온 불에 모두 소멸되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지팡이로 바위를 두드린고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피 흘림 없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였으나 유다 지파의 아간이 온전히 바쳐야 할 물건인 전리품 중에서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되는 금덩이 하나를 탐내어 감춤으로’ 아이성에서 참패를 당하였고 아간은 가족 전체가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이 죽었고, 다윗왕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므로 아이가 죽임당하는 벌을 받았다.
코로나로 인하여 전 세계에 사망의 공포와 경제적인 후퇴 및 생활패턴이 바뀌고 교회가 어려움을 격는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은 조그마한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생각되는가?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 말씀을 상기하면서 질병을 통하여 시험하시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본다. 출석하던 교인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믿음이 허약하고 형식에 치우쳤으며, 믿음의 본질은 상실한 바리새인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기복신앙에 길들여진 성도들이 시련과 역경을 겪게 되자, 그 자리에서 슬그머니 피해버렸고, 목숨보다 귀한 믿음의 가치를 상실한 채 현실에만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를 보면 이스라엘에는 내전과 주변국들과의 전쟁이 그친 날이 없었다, 2021년 기준으로 이스라엘의 인구는 약 9,390,000명 정도이다. 이스라엘은 고도로 다문화적인 국가로, 유대인, 아랍인, 드루즈(이슬람 시아파의 분파), 그리고 다양한 기타 교민들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유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이며, 우리나라도 전쟁의 역사이다. 역사학자들은 내전과 외침으로 인한 전쟁을 950번 정도 전쟁을 경험했다고 한다.
우리가 겪은 가장 큰 환란의 때인 6.25전쟁 중 한국교회는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한국전쟁(6.25전쟁) 기간 동안 교회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힘들게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실천하는 데 헌신하였다. 다음은 6.25전쟁 중 교회의 활동 상황을 설명한다.
1)영성적 지원 : 교회는 신자들에게 영성적인 지원을 제공하고, 기도 모임 및 예배를 통해 힘을 얻게 도왔고. 전쟁 상황에서 국민들은 정신적인 지지가 필요했고, 교회가 이를 제공하였다.
2)구호 및 의료활동 : 6.25전쟁 중에는 전쟁 피해자들을 위한 구호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교회는 식량, 의약품, 의류 등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돕는데 기여하였다. 교회는 부상당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의료진 및 의료용품을 제공하고 의료시설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3)피난민 도움 : 전쟁으로 인해 수 많은 피난민들이 발생했고, 교회는 이들에게 예배당에 잠을 재우면서 급식을 제공하여 도움을 주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찬491장)
저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뜻과 정성 모아서 날마다 기도합니다.
괴롬과 죄가 있는곳 나비록 여기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내주여 내 맘붙드사 그곳에 있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코로나시대의 한국교회의 실태
코로나19가 창궐할 당시 한국교회의 상황은 여러 가지 변화와 도전을 겪었다. 다음은 주요한 측면을 요약한 것이다.
1.온라인 예배 및 디지털 전환 : 코로나19로 인해 모임 제한이 발생하면서 많은 교회가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였다. 이것은 기존의 전통적인 교회 활동 방식을 바꾸고 현대적인 디지털 기술을 도입하게 되었다.
2.많은 교회들의 어려움 : 온라인 예배와 영업장의 휴폐업과 실직으로 헌금액이 감소하거나 신도들의 예배참여 횟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많은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코로나 이후 상황 어떠한까?
1.일부 교회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예배를 겸행하고 있지만, 출석을 꺼리거나 온라인 예배에 익숙하여 출석을 게을리하는 경향이 있다.
2.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헌금액이 감소하여 교회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3.장기간에 걸친 교회 불출석 습관이 익숙하여 교회 출석을 도외시하거나, 세상으로 돌아간 성도들이 발생하였다.
위와 같은 상황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분석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날 밤새도록 기도하시고(눅6:12)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막13). 이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고, 또한 교회에서 여러 직분자를 세워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려(엡4:11,12) 하였다. 성도를 ‘온전케’한다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의 성품을 닮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품은 하나님과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에 대한 배려와 섬기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는 예수님께서 주신 천국시민의 도리를 지켜며, 선하고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살게 된다.
교회는 성도의 훈련장이다. 말씀으로 교훈 받고 체험한 성도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실하게 살면서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이, 원칙과 질서를 지키고, 공평과 정의가 실천되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교회는 이와 같은 성도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되어야 한다.
바닷물의 염도는 평균적으로 약 3.5% 정도이다. 이것은 바닷물 1리터당 약 35g의 염소화 나트륨 소금(식염)이 녹아있음을 의미한다. 이 정도의 염도면 바닷물에 물고기와 바다식물이 건강하게 생활하며, 물이 썩지 않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이 정도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속해 있으면 건강하고 도덕적으로 청렴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2021년 기준으로 약 9백만 명 이상의 기독교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2021년 9월 말 우리나라 인구는 52,710,000명이라고 하니 약 17%가 된다. 그러나 청렴도나 도덕 수준 및 행복지수는 그리 높지 않다고 본다.
교회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잘못된 사회풍조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데, 오히려 교회의 일탈된 행동과 본분을 망각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며 “목사님들이 왜 저래”라고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걱정한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세상에 비춰진 참 모습이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세계 어느 곳에 거하든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살아간다. 하마스의 불의의 습격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생업을 중단하고 고국에서 눈물과 피를 흘리는 동포를 구하기 위하여 귀국하였고, 30만 명의 예비군이 동원되었다. 우리 교회도 이와같은 절대적인 신앙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유대인은 18세 이상 국민은 방위군에 입대하여 남자30개월, 여자 24개월간 복무함)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성도들이 교회를 떠난 후 돌아오지 않는 이유)
1.목회자는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을 바르게 교육시켜야 했다.
교육의 내용은 구원은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세에 관하여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신6:7)고 하셨다.
말씀으로 무장한 성도들은 어려운 환경과 조건에서도 결코 신앙의 본질을 망각하지 않는다. 코로나로 인하여 모임이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참석 제한이없고, 감염의 위험도 사라졌지만, 떠났던 성도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는 신앙에 대한 절실함이 없기 때문이다.
『말의 품격』이란 책에서 저자 이기주는 ‘칼에 베인 상처는 바로 아물지만, 말에 베인 상처는 평생 아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말의 힘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며, 설교자는 순화된 성경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는 설교는 영혼을 잠들게 한다.
그들이 교회에서 말씀에 대한 진수를 맛보았다면 반드시 돌아와야 하지만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교육을 받지 못하였기에 세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십일조와 한금을 드리고 축복기도 받을 때 감정적으로는 좋았지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영생을 취하는(딤전6:12)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을 영적인 교육은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마음에 새겨지는 말씀의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 된다.
강원도 양양의 남대천에서 사는 연어 치어는 민물에서 태어나 바닷물에서 3~4년간 알라스카해 까지 4만키로의 여행을 통하여 3~4키로그램으로 성장하여 산란기를 맞이하여 돌아와서 3,000개의 알을 낳고 일생을 마친다. 이는 남대천의 맑은 물을 마시며 살던 고향이 그리워 찾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도들의 영혼을 적시고 가슴에 새기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역할인 성도의 신앙교육이 철저하지 못하여 코로나란 시험으로 절망적인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6.25전쟁 중에도 교회에서 피난민을 돌보고, 구호사역과 의료봉사를 하면서도 예배를 중단하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밤을 지새우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비록 예배당은 폭격당하여 파괴되었어도, 무너진 토담 위에서 무릎을 꿇고 찬송하며 기도하였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환난 날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왔다. 오늘까지 그분들의 땀과 눈물의 헌신으로 우리가 복을 누리며 산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는 성도들의 영혼에 새겨지는 생명있는 설교를 하지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2.성도로서의 믿음의 도리를 지켜도록 해야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들을 말씀을 묵상하면서 순종하는 것은 성도들의 몫이다. 예배를 통하여 들은 말씀을 실천할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을 수 있고, 그에 따른 복을 누리게 된다. 듣고도 준행하지 아니하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무너지고 만다.
우리 교회가 무너졌다. 불같은 시련에도 굳건히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할 성도들이 부족하여 교회를 지켜내지 못하였다. 말씀은 홍수처럼 풍성하였지만, 생명력이 없는 말씀이었고, 교회 내에 알곡이 아닌 가라지만 풍성했던 것은 아닌가?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성실하고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전도서를 기록한 지혜자는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것이라”(전7:29) 정직은 인간의 본성이다. 본성을 지키는 사람은 자신감과 능력이 있어 주변에 그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게 된다. 하나님이 도우시기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는 지도자가 되어 수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환난과 역경 속에서 신앙의 열매를 맺는 정직한 성도들을 교회 공동체의 주인공으로 양성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는 질병과 환난이 닥쳐도 능히 견뎌내는 내성이 건강한 공동체이다. 그런데 우리는 목사에게 복종하는 교육은 시켰지만, 사회에서 소금과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교육시키지는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는 부정, 부패, 비리에 성도들이 꼭 끼어있다. 우리는 장차 어떠한 어려움을 겪게 될지 알 수 없다.
사건에 대하여 자책하며 책임지려는 다윗왕
백성들이 죽어가는 참담한 현상을 보고 다윗 왕은 자책하며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삼하24:17)라며 이 사건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으니, 양무리의 희생이 아니라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벌해주시길 청원하였다. 지도자는 자신은 물론 백성의 실수에 대하여도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교회나 사회는 지도자들이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책임지는 풍토를 조성해야 바람직한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김수환 추기경의 ‘내 탓이요’라는 책임지는 자세) 지위가 높을수록 책임보다는 변명이나 책임전가가 당연한 듯 말하면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한다. 다윗왕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늦게나마 깨닫고 책임지려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세상의 불의와 죄악과의 전쟁이다. 십자가 군병 되어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전쟁에서 지휘관은 병사들의 목숨과 국가를 지켜야 한다. 그들에게는 충성이 요구되며 국가 안위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다윗은 백성의 안위와 평화를 지켜야 할 왕이지만 잘못된 명령과 교만으로 인하여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상황에서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
해결책을 제시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선지자 갓에게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라고 전하게 하셨다. 질병으로 죽어가는 백성을 보시며 예루살렘의 거민에게 질병을 내리려는 천사에게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삼하24:16)하시며 자비를 베푸시었다. 잘못한 것은 징계하시되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다윗 왕이 자책하며 회개하는 모습과 백성들의 눈물을 보시고 용서의 길을 제시하신 것이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역사적으로 커다란 의미가 서린 장소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듣고, 아내 사라와는 상의도 하지 않았다. 사흘 길을 가서 아들 등에 장작을 지우고 자신은 불씨와 칼을 들고 산을 오를 때에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라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아들 이삭의 질문을 듣고, “내 아들아 번제 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7,8)하였다. 돌을 주워다 번제단을 쌓고 아들 이삭을 밧줄로 묶어 단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내려치는 순간 아브라함아 아브라람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다급하게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진실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인정받은 곳이며, 솔로몬 왕이 7년간에 걸쳐 성전을 세운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다윗 왕은 이곳에서 값을 지불 하고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제사를 받으시고 전염병으로 참혹하게 죽어가는 그 땅에 내리신 재앙을 그치시었다.
우리는 교회의 목회자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코로나 이후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
1)다윗왕이 인구조사 명령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자책하였듯이, 오늘의 교회의 심각한 문제가 목회자에게 있음을 자책해야 한다.
자신이 잘못한 부분에 대하여 책임의식을 갖는 것은 성숙한 목회자의 소양이라 할 수 있다. 잘못된 결정에 대하여 책임을 전가하거나 부인하는 행위는 지도자의 자질 부족이라 할 수 있다. 지도자는 부하의 잘못에 대하여도 책임의식을 갖고 통솔할 때에 그들은 자부심은 물론 신뢰감을 갖고 충성하게 된다. 지도자가 우리를 보호해 준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어야 한다.
오늘의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목회자 때문이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이 대하여 다윗왕과 같이 회개해야 한다.
2)변화해야 한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내 어린양을 먹이라”하셨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어린 양들을 제자들에게 맡기셨다. 그 양들이 좋은 꼴과 신선한 음료를 마시게 하며 안전하게 보호하는 책임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맡기시는 것은, 말씀으로 양육하여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성하여 하늘나라를 확장하시기 위함이다. 죄악과 불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영육을 강건하게 훈련시켜 영적 싸움에서 승리의 깃발을 날리게 하기 위함이다. 그 교육과 양성의 책임이 목회자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목회자는 성도들을 목회성공을 위한 희생양으로 생각한다. 교회 성장이 목적이라며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교회가 성장할수록 목회자 자신의 꿈을 이루는 과정에 성도의 눈물과 희생은 필연이라 생각한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목자에게 당부를 하셨는데, 오늘의 목회자들은 목자를 위한 양으로 착각하여 양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잘못된 사고를 갖고 있다. 이는 본말이 전도된 어이없는 일이다. 참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지, 목자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양들을 희생하는 요구하는 것은 양을 매개로 하는 삯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목회자의 근본적인 생각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3)목회자의 영적상태와 사회적 수준을 향상시켜야 한다.
성도들의 교육과 소득수준이 향상되면서 사고방식과 생활패턴이 바뀌었다. 과거의 목회자들은 기도하고 전도하고 심방하는 것이 목회의 전부라고 생각하여, 바뻐서 성경연구 할 시간이 없다고 하였다. 성도가 어려운 질문이라도 하면 목사의 권위로 누르면서 “덮어놓고 믿어라”라고 하였지만, 지금의 성도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알아야 믿지 어떻게 덮어놓고 믿으라고 하느냐고 한다.
고령의 목회자가 목회하는 교회에 젊은 성도들이 등록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목회자의 애매한 성경해석과 사회 수준의 차이에 있다고 한다. 목회자의 교육수준과 성경해석에 대한 명확한 실력을 갖춰야한다.
이 부분은 단시일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목회자는 사회지식은 부족하더라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최고여야 한다. 성도들 가운데는 전문적인 직업을 갖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목회자가 설교시간에 그들의 분야에 대하여 예를 들어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지, 자신들의 전문적인 지식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성경연구에 전념하면 사회적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성경에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또한 독서량을 늘려야 한다. 목회자라면 1년에 최소한 20권 이상의 책을 읽으며 상식과 교양을 쌓야한다. 주로 인문학 서적을 읽는 것이 좋으며, 독서를 해야 정확한 정보와 통계를 얻을 수 있고, 사회의 흐름을 감지하며, 성도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많은 독서는 목회자의 인격과 품격을 높여 준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성경연구와 독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면 하나님은 영감을 주시고, 목사는 열정적으로 설교를 하게 되며, 성도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므로, 좋은 교회로 소문나게 되어 목마른 사슴들이 모여들게 된다.
이찬수 목사는 교회를 개척할 당시 그와 함께 교회를 세워가는 성도들이 고마워 심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깨달은 것은 그들을 찾아다니는 시간에 은혜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성경연구와 설교 준비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였다고 한다.
빌리 그래햄 목사는 유럽의 목회자 세미나에서 “나는 각지를 다니며 너무 많은 말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른 삶을 주신다면 성경을 연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 하였다.
코로나로 인해 황폐하고 황량한 벌판처럼 삭막한 교회에, 생명수 흐르는 은혜의 전당으로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믿음 없는 행위를 회개하고 겸손하지 못한 자세를 낮추며, 겸허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떠났던 성도들이 교회로 돌아오고 교회는 다시금 감사와 찬양이 울리며 말씀이 흥왕하게 될 것이다.
목자 없는 양들을 위하여 죽음의 길을 선택한 목자에게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
1954년 7월 17일 28세의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는 살림살이를 가득 실은 이삿짐 자동차에 태어난지 6주된 어린 딸과 아내와 함께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사를 갔다. 이삿짐 쎈터 직원이 “빨갱이 아니면 바보 천치나 자진해서 동독으로 가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공산치하의 동독에서 270만명이 서독으로 이주하는 가운데, 카스너 목사는 성직자가 부족한 러시아가 점령한 동독지역에서 성직을 수행하라는 함부르크 주교 한스 오토 뵐버의 부름에 화답하고 떠나는 것이다.
함부르크에서 안정적으로 목회를 하였고, 동료들은 물론 성도들도 만류하며, 친척들이 절대반대 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가겠다”고 말하고 동독의 템플린(Templin)근처의 작은 교회에 부임하였다. 아내는 영어교사였는데 사회주의 국가에서 취직을 할 수도 없어, 경제적인 어려움은 물론 부당한 대우와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였다. 그곳에서 목회하는 35년째인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독일이 통일되었다. 그동안 공산치하에서 공부한 그의 딸 앙겔라 메르켈은 물리학 박사를 취득하고, 연구실에서 근무하다가 슈뢰더 총리에게 발탁되어 환경부장관(1994~1998년)으로 입각한 후 독일 최초의 여성총리가 되어 4번 연속 16년간 총리로 재임(2005.9~2021.9월)하였다.
목자 잃은 양처럼 불안하고 초조한 시골 작은 마을에 복음 들고 찾아간 카스너 목사에게, 하나님은 최고의 선물을 주셨다. 그의 딸 메르켈 총리는 통일 독일의 위상을 높이고, 유럽을 통합시키며, 유로 단일화 및 동서화합의 정치력을 발휘하고, 이스라엘을 수차례 방문하며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새겨진 어린이 희생자 170만 명의 이름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고, 독일의 존재 이유는 600만 희생자들과 그 민족에게 사과하고, 이스라엘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라 하였다. 하나님은 목자 잃은 양을 위해 희생적으로 헌신한 카스너 목사에게 훌륭한 딸을 선물로 보상해 주셨다.
야곱이 세겜에 머물며 사랑하는 딸 디나의 수치스러운 일로 그 땅의 주민들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야곱에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창35:1)는 명령을 듣고,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고 벧엘로 올라가 환난 날에 응답하시고 그의 가는 길에 함께하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것 처럼 우리도 환난 중에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나아가자.
다윗왕이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삼하24:25)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새중앙총회를 사랑하시는 교역자 여러분!
이 시간 우리의 가슴을 찢고 통곡하면서 우리 자신을 번제와 화목제로 드립시다, 하나님은 이 땅에 내리신 재앙을 멈추시고, 교회를 떠났던 성도들이 다시 돌아오게 하시며, 찬양과 감사가 넘쳐나는 교회로 회복시켜 주시리라고 나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