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최씨의 유래
양주 최씨 (楊洲崔氏)의 시조(始祖) 최 억 (崔 億)은 득성조(得姓祖)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고려 때 한문과 덕행(德行)으로 명성이 높아 태사(太師)에 천거(薦擧)되었고, 1353년(공민왕 2)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여 양주군 (楊洲郡)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억(億)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양주 (楊洲)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그후 문경공(文敬公) 억(億)의 아들 연(淵)이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역임했고, 손자 숙(淑)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지냈으며, 증손 경운(慶雲)은 공조전서(工曹典書), 경운의 아들 항(沆)은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양주 최씨의 대표적인 인물인 정안(井安)은 1433년(세종 15) 우정언(右正言)을 거쳐 1437년(세종 19) 이 천(李 ?)의 종사관으로 함경도도(咸鏡道)에 침투한 야인(野人)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그후 벼슬이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다.
정안의 동생 정연(井涓)은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정연의 아들 결(潔)은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혼(渾)의 아들 홍도(弘渡)는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545년(인종 1) 저작(著作)을 거쳐 1564년(명종 19) 부정(副正)이 되었다가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역임한 후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홍도(弘渡)의 동생 홍개(弘漑)는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후손 정걸(挺傑)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며 적군을 쳐부수는 데 용맹(勇猛)이 뛰어나 많은 공훈(功勳)을 세웠다.
그외 완(浣)은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을 역임했으며 정해(挺海)는 절제사(節制使)를, 극태(克泰)는 군수(郡守)를, 선태(先泰)는 부사(府使)를 지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양주 최씨(楊洲崔氏)는 남한(南韓)에 총 1,016가구, 4,3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