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 오늘은 전홍준 시인의 시 「영락공원에서」를 논하기로 하겠습니다. 시인은 죽음에 관해서 처절하고도 집요하게 사유하면서, 이를 시작품 속에 영글어놓고 있어요. 가령 우리는 그의 시선집 『흔적』에 실린 시편 가운데에서 「영락공원에서」, 「영락공원에서 1」,「선택」, 「상가에서」등의 작품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 죽음에 대한 놀라운 사유는 「영락공원에서 1」에서 잘 나타납니다.
심장마비로 오십 대에 숟가락을 놓은
날벼락 앞에서도 상주들은
별리 입은 옷 같은 슬픔에 젖어 있다
품앗이문상객들은 조화로 치장한 슬픔에게
절하고 국밥을 먹는다
소주를 마신다
그리고 내일 돌아올 수표를 걱정한다
영정 속의 망자만이 선명한 비탄에 빠져있다
사자 입으로 들어가는 새끼를 쳐다보며
천연스레 풀을 뜯는 초식동물처럼
눈물샘이 퇴화한 자들의 송별연 때문에
죽음은 부도난 식당의 찌그러진 양은그릇이다
2.
너: “심장마비로 오십대에” 목숨을 잃은 것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가족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일 것입니다. 인생의 황금기에 세상을 떠났으니까요.
나: 그런데도 상주들은 시인의 눈에는 기이하게 슬퍼하는 것처럼 비칩니다. 상주들의 슬픔은 “빌려 입은 옷”과 같고, 그저 “조화로 치장”해 있으니까요.
너: 가족과 문상객들은 진정한 죽음의 의미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숟가락을 놓은” 자 앞에서 “국밥”을 먹지만, “내일 돌아올 수표를 걱정”할 뿐입니다.
나: 네, “비탄”에 빠져 있는 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망자”밖에 없다고 합니다. 죽은 자에게는 감정이 없는데, 이런 식으로 표현한 연유는 무엇일까요?
너: 아마 죽음에 대한 생존자들의 무심한 태도를 풍자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그들은 “새끼”가 사자에게 뜯겨 죽는데도 “천연스레 풀을 뜯는 초식동물”과 같이 행동하고 있으니까요. 전홍준 시인의 시에는 은밀한 풍자가 바늘처럼 돋아 있습니다.
나: 무심하다기보다는, 눈멀어 있다고 표현하는 게 더 나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자들은 “수표”, “부도난 식당”등과 같은 일상의 문제에 혈안이 되어, 죽음의 의미를 간과하고 있어요.
너: 죽음이 “식당의 찌그러진 양은그릇”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 의미심장합니다.
나: 네,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죽음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너: 아, 급박하게 차려진 장례식의 절차는 “눈물샘이 퇴화한 송별연”으로 각인되고 있군요.
3.
나: 전홍준 시인의 시편에는 전체적으로 인간 삶에 대한 부정적이고 허무적인 시각이 번득입니다. 그래서 독자들 가운데 시인의 세계관을 비관적 염세주의와 결부시키는 분들이 많더군요. “인간은 짐승이란 본질에다/ 선(善)으로 도금한 존재” (「인간」)라는 시구를 생각해 보세요. 여기서 우리는 인간 혐오주의 내지는 비관적 염세주의를 분명히 감지할 수 있습니다.
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시 속에 겉으로 드러난 정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급하다고 여겨집니다.
나: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너: 물론 시인이 인생을 “뒷골 당기는 근심” (「가을 운문사」)으로 표현한 것은 사실입니다. 인간의 삶이란 “화려한 한 컷의 장면을 기다리다가/ 끝없이 필름을 소진하다마는 것” (「폐교」)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이러한 시구들은 다르게 수용될 수 있어요. 시인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역으로 이를 거부하라고 촉구하는지 모릅니다. 이 경우 부정적 허무주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도입된 정조일 뿐이지요. 주위에 얼마나 가식적인 삶의 방식과 무책임한 행동 양상이 즐비합니까? 우리는 전홍준 시인의 시에서 기막힌 풍자를 도출해내야 할 것입니다.
나: 나와는 생각이 다르군요. 전 시인은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허구를 거부하고, 무겁고 불편한 참다움을 선호하고 있어요. 실제로 시인의 관심은 주로 에로스보다 타나토스로 향하고 있습니다. 내 견해로는 전홍준의 문학에서는 “희망”이 결여되어 있어요. 왜 연애시 한 편도 남기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너: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이에 관한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기는 게 어떨까요?
나: 그럽시다. 일단 작품에서 강조되는 죽음이라는 테마를 논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너: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관해서 논하고, 문학적으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몽테뉴는 철학 행위가 죽음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말했지요. 죽음에 관한 책만 해도 엄청난 양이기 때문에, 이를 요약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것 같군요,
나: 그래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요약해주시면 안 될까요?
너: 일단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의 죽음에 대한 견해 차이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특이한 것은 서양인들에게 윤회의 사고가 거의 드물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메소포타미아 문명 속에 “재탄생Karma”이라는 관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윤회는 동양 사상에서 빈번하게 출현하는 세계관입니다.
나: 사실 서양인에게 죽음은 삶이 끝나는 시점으로 이해됩니다. 삶이라는 과정은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변증법적 과정의 연속이지요. 그래서 서양인들은 죽음을 하나의 비극으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너: 그렇군요. 신은 영생을 누리지만,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죽음을 비켜갈 수가 없지요. 그래서 인간이 안 되는 줄 얼면서도 처절하게 저항할 수 있는 방도는 오로지 자살밖에 없었습니다. 소포클레스Sophokles의 「아이아스Αἴας」를 생각해 보세요.
5.
나: 아, 그래서 서양의 비극은 언제나 죽음이라는 시간적 종말로 수용되어왔군요.
너: 잘 지적하셨네요.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죽은 자는 어두컴컴한 지하 명부의 세계에 영원한 그림자로 서성거리며, 기독교가 도래한 뒤에는 천당과 지옥이라는 영역이 자리하게 됩니다. 이러한 유형에 관해서는 단테의 『신곡』에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나: 네, 「지옥」 편에는 “이곳에 들어가는 자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라Lasciate ogni speranza, voi ch'entrate!”가 있습니다. 단테는 지옥을 두 개로 포개진 원 뿔 모양의 공간으로 묘사했습니다.
너: 어쨌든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서양인들은 죽음을 삶의 종말, 다시 말해서 더 이상 변화될 수 없는 춥고 어두운 영역으로 향하는 출구라고 이해해 왔습니다. 요약하건대 죽음은 서양에서는 대체로 비극적 사건이었지요.
나: 인간의 목숨은 실타래의 실과 같아서, 클로토Klotho가 실을 풀면, 라케시스Lachesis가 감고, 모이라Moira가 그것을 끊어버리지요?
너: 네, 전 시인도 이와 비슷하게 묘사한 바 있어요. “내 얼레에서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시간이 연실처럼 풀려나간다.” (「산벚꽃」). 모이라의 사형 집행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죽음의 여신은 인간의 목숨을 그냥 앗아갑니다. 어떠한 막강한 신도 이를 막을 수 없지요. 죽음은 운명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나중에 기독교가 도래하면서 회개의 과정 속에서 인간은 예외적으로 운명을 비켜갈 수 있게 됩니다.
6.
나: 선생님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지요? 서양에서 죽음은 비극적인 종말로 이해되는 데 비해, 동양에서 그것은 대체로 다른 생으로부터 변모로 받아들여진다고요..
너: 네. 비근한 예로 서양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엄청난 사건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동양인들은 그것을 극적인 사건으로 수용하지 않고, 하나의 자연스러운 변모로 받아들입니다. 동양인들은 윤회 사상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나: 동양사상의 경우 인간의 삶에서 재탄생의 의미가 강화되어 있지요?
너: 그렇습니다. 불교의 경우 윤회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입니다. 불교 신자들은 죽음 자체를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지요. 죽음이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삶과 죽음 사이의 변화 과정이 고통을 안겨준다고 합니다,
나: 노장 사상 역시 죽음을 재탄생을 위한 사멸이라고 이해하지만, 그것을 커다란 고통으로 간주하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장자(荘子)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인간은 조물주라는 대장장이가 만들어낸 칼 한 자루에 불과하거늘, 대장장이에게 “막야(鏌鎁)와 같은 명검으로 만들어 달라.”, “다음 세상에도 인간으로 살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荘子』 「内篇」, 6 太宗師, 제 3장 참고) 이승은 작은 세계이며, 저승은 큰 세계이므로, 어디서 살든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게 장자의 지론이었습니다.
너: 마지막으로 전 시인의 명시,「영락 공원에서」를 다루어볼까요?
산비탈 양지 녁에 저승이 펼쳐져 있다
포실한 삶이었든
땟국물 흐르는 삶이었든
한 줄 생몰연대로 비문에 압축돼있다
쾌락의 씨알로 태어나
희로애락이란 연극판에서
각자 부여받은 배역으로
애면글면 숙제를 마친 배우들
은퇴하고 누워있다
통과의례에 수고했다고
정말 애썼다고
어미가 태어난 송아지 핥듯이
가을 햇살이 봉분을 한없이
어루만지고 있다
8.
너: 영락 공원이 마치 카메라의 앵글에 비친 상처럼 명료하게 투영되는군요.
나: 네. 해설이 불필요할 정도로 평이하게 읽혀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통과의례”라는 시어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장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지요?
너: 그는 현세의 고충을 저버리고 보다 큰 세계로 훌훌 떠난 아내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행동했지요. 범인은 이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장자에게 죽음이란 미지의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을 떠나는 자는 낯선 곳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반면, 배웅하는 자는 아쉬움과 불안감을 간직하곤 합니다. (Ernst Bloch: Spuren, Frankfurt a. M. 1985, S. 131).
너: 죽음 이후의 세계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닐까요?
나: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종교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찬란히 서술한다는 사실입니다.
너: 종교는 궁극적으로 영생에 대한 갈망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려는 신앙인의 욕구와 관련되지요.
나: 네, 작품을 논하기로 합시다. 인간은 누구든 간에 “쾌락의 씨알”로 태어나, “희로애락”의 무대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죽습니다. 망자들은 시인의 눈에는 “애면글면 숙제를 마친 배우들”처럼 비칩니다. 자신의 힘에 부치지만 그래도 정성을 다해 살아간 뒤에 “은퇴”한 자들의 휴식처 - 이곳이 영락 공원이라는 것입니다.
너: 놀라운 것은 마지막 연입니다. 죽음은 시인에 의하면 어떤 새로운 탄생으로 향하는 일시적인 “통과의례”와 같습니다.
나: “어미가 태어난 송아지 핥듯이/ 가을 햇살이 봉분을 한없이/ 어루만지고 있다.” 저승에서 가을 햇살은 어미의 혀로 봉분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한없이? 가을 햇살을 어미의 혀로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기막힌 발상 아닙니까?
너: 비록 시인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논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망자가 휴식하는 곳에서 삶과 죽음 사이의 문지방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