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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 많아 둘로 나누었습니다.
④ 3대 소설집
고소설을 묶은 소설집은 언제부터일까?
소설집의 전성기는 17세기요, 출발은 16세기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다.
역시 우리 소설의 온전한 출발점인 김시습이 그 처음에 선다. 김시습의 매월당금오신화(梅月堂金鰲新話) 는 그의 사후 반백년이 지난 명종(明宗) 연간(1546∼1567)에 윤춘년에 의해 간행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어 1553년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기재기이(企齋記異)가 선을 뵌다.
대련도서관에 소장된 윤춘년(尹春年) 편집본, 매월당금오신화(권두:매월당선생전(윤춘년), 목차, 본문(10행18자), 판심 금오집. 권두3엽, 본문51엽, 권두1엽, 권말1엽 혹은 2엽이상 결장.)에는 전기소설(傳奇小說)인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등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원래는 이 5편이 작자가 지은 전부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이 5편 밖에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그것도 국내에는 필사본 밖에 없고 일본에서 간행된 것이 1927년 계명(啓明) 제19호에 최남선(崔南善)에 의하여 소개된 것이다.
이외에 국문소설을 필사한 묵재(黙齋) 이문건(李文楗, 1497∼1567)의 묵재일기(黙齋日記)가 있으나 온전한 소설집이 아니라 자신의 일기에 소설을 필사해 놓았다. 묵재일기 제3책(1546∼1547년)의 이면에는 한문소설 <설공찬전>․<주생전>의 국역본(국문본), <왕시전>․<왕시봉전>․<비군전> 등의 국문․국역소설이 필사되어 있다.
17세기는 한문소설필사집이 대거 등장한다.
이른바 ‘한문소설집 필사의 동기화(synchronization)’시기라 부를만하다. 동기화(同期化:synchronization)란, 독립된 2개 이상의 주기적인 사건을 적절한 방법으로 결합, 제어함으로써 일정한 위상 관계를 지속시키는 일이다. ‘소설집의 동기화’란 우리 소설사에 꽤 의미망이 넓다. 그것은 우선 ‘진정한 의미의 소설독자’와 ‘소설의 대중화’라는 점이다. 소설독서체험→필사자의 선집의식→수용층의 확장→대중화라는 일련의 흐름에서 진정한 소설 독자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다른 소설의식이 없다면 필사란 애당초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그렇다.
또 이들 17세기 필사집의 공통점은 모두 두세 편 정도의 같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애정전기소설이 중복 필사되어 있다. 예를 들면, <주생전>은 김집수택본, 화몽집, 묵재일기, 선현유음본에 보인다. <상사동기>는 김집수택본, 삼방요로기, 화몽집, 선현유음본에 보이고 <운영전>은 화몽집, 삼방요로기, 선현유음본에 <왕경룡전>은 김집수택본, 삼방요로기, 선현유음본에 필사되어 있다. 특히 김집수택본(온전히 필사된 것은 7편)과 화몽집에는 9편이라는 다량의 한문전기소설이 선집 필사되어 있다. 현재 우리의 고소설사에서 이러한 현상은 분명히 17세기에만 한정하는 주목할 만한 동기화 현상이 아닌가 한다.
이들 ‘소설집의 출현’으로 우리의 소설사는 고전문학사에서 풍요로운 영역을 가질 수가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17세기 중엽 김집(金集, 1574∼1656)의 김집수택본(金集手澤本), 1630년 어름의 화몽집(花夢集), 1678년 이후로 추정하는 삼방요로기(三芳要路記), 역시 1673년 어름의 선현유음본 등이 17세기의 한문소설필사집이다. 잠시 김집이란 이를 짚어보자. 이 김집이 우리 고소설사의 거봉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광산김씨로 조선 중기 대표적 학자인 사계 김장생(金長生,1548~1631)이 김집의 아버지이다. 김집의 형이 김반(金槃)이고, 이 김반의 셋째 아들이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성을 지키다가 김상용과 함께 분신 자결한 김익겸(金益兼, 1614~1636)이다. 이 강개한 사내 김익겸이 바로 김만중의 아버지이니, 김집은 김만중에게 작은 할아버지가 된다. 김만중의 소설적 성향은 그의 작은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졌는지도 모르겠다.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 김집수택본에는 <만복사저포기>․<유소낭전>․<주생전>(한 장만 필사)․<상사동전객기>․<왕경룡전>․<왕시붕기우기> 자전적 고백이 담긴 <寡妓嘆>․<古班僧>․<이생규장전>․<최문헌전>․<옥당춘전>(한 장만 필사), 악부체 고시인 <去時鞍馬別人歸> 등 12편이 필사되어 있다. 소설은 9편이고 작품 전체가 필사된 것은 7편이다. 이 중 전기소설은 7편(<만복사저포기>․<이생규장전>․<주생전>․<상사동전객기>․<왕경룡전>․<왕시붕기우기>)․<옥당춘전>, 영웅소설 1편(<최문헌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경룡전> 같은 경우는 전반과 후반부의 필체가 다르다. 현재 정학성 교수가 소장하고 있다.화몽집은 현재 김일성대학에 소장되어 있어 그 온전한 실체를 보기는 어렵다. 다만 소재영 교수에 의해 <주생전>․<운영전>․<영영전>․<동선전>․<몽유달천록>․<원생몽유록>․<피생명몽록>․<강로전>․<금화영회:금화사몽유록> 등 9편의 한문소설이 필사되어 있다고 학계에 알려져 있다. 전기소설 1편(<강로전>), 몽유록 4편(<몽유달천록>․<원생몽유록>․<피생명몽록>․<금화영회:금화사몽유록)>) 애정소설 1편(<동선전>)이며, 전기소설은 3편(<주생전>․<운영전>․<영영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방요로기는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삼방록(三芳錄)이라고도 부르는데 <왕경룡전(王慶龍傳:옥단전)>․<유영전(柳泳傳:운영전)>․<상사동기(相思洞記:영영전)> 등 세 편과 박두세(朴斗世, 1654∼?)의 수필인 <요로원기(要路院記)>가 筆寫되어 있다. 삼방요로기(三芳要路記)의 필사 시기는 <요로원기>의 저자가 숙종 4년 과거를 보러 상경하였다가 돌아가는 길에 충청도 아산 요로원의 어느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일을 기록한 것이기에 1678년(숙종 4) 이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기를 알 수 없는 정경주본과 이헌홍본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정경주본에는 <왕경룡전>․<상사동기>․<주생전>․<원생몽유록>이, 이헌홍본에는 <왕경룡전>․<상사동기>․<주생전> 등 세 편이 필사되어 있다. 모두 18세기 이후의 것이고 필사 작품 또한 17세기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선현유음본에는 <주생전>․<운영전>․<최현전>․<강산변>․<상사동기>․<왕경룡전>․<최척전>․<최선전>으로 8편인데, 대부분 17세기나 그 이전 작품들이다. <최선전>과 우언인 <강산변> 2편을 제외하면 6편이 애정소설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선현유음의 필사 작품으로 미루어 볼 때 필사자의 선집에는 두 가지의 얼개를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전란’이고 다른 하나는 ‘애정’이다. 17세기에는 국문소설과 애정소설이 상당 수 유통되던 시기였고 그 주제 또한 광범위하였다. 그런데 이 작품집에는 유독 이러한 작품들이 필사되어 있다. 임란과 병란을 배경으로 한 <최척전>과 전란삽화를 넣은 <주생전>․<운영전>․<왕경룡전>의 시공소는 모두 ‘전란’이다. <주생전>의 후일담은 주생이 임란으로 조선에 온 이야기이고, <운영전>은 임란 후요, <왕경룡전> 역시 작품의 말미에 옥단의 한 아들이 1599년에 조선의 동방 왜란 정벌에 나선다. 그리고 <주생전>․<운영전>․<최현전>․<상사동기>․<왕경룡전>․<최척전> 등은 모두 ‘애정’을 다룬 전기소설들이다. 임란 후의 피폐한 현실, 그리고 전란의 시름을 달래려는 필사자의 의식이 이러한 소설들을 선집한 것은 아닐까 한다. 무던히 고민한 듯싶다.
선현유음본은 현재 필자가 보관하고 있다.
두 마당: 작가론(作家論)
억눌려 온 자들의 존재증명(고소설 4대 작가 )
혹 도둑을 맞은 적이 있는지요? 기분이 어떨까요? 그런 적이 없다면 물건을 잃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겠는지요. 그런데, 물건을 잃은 것도 아니고 도둑맞은 것도 아닌, 삶을 강탈당했다면 빼앗긴 자의 심기가 어떻겠는지요?
이 질문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소설을 지은 이들의 이야기이다.
우리의 고소설 작가들을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프다.
시대로부터 억눌려 온 자들, 저들의 존재증명은 바로 소설을 창작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지어낸 고소설을 이렇게 편안히 쓴다는 것이 저 시절의 저 이들에게 죄스럽다.
이 장에서는 저러한 고소설작가들을 살펴보겠다. 이름이 밝혀진 고소설 작가와 소설은 아래와 같다. 800여 종이 넘는 고소설 중, 이름이 밝혀진 작가와 작품이 이토록 빈한하다.
김시습(金時習, 1435(세종 17)∼1493(성종 24): 금오신화
채수(蔡壽, 1449(세종 31)∼1515(중종10): <설공찬전>
심의(沈義, 1475(성종 6)∼?: <대관재몽유록>
신광한(申光漢, 1484(성종 15)∼1555(명종 10): 기재기이
김우옹(金宇顒, 1540(중종 35) ~ 1603(선조 36): <천군전>
임제(林悌, 1549(명종 4)∼1587(선조 20): <화사>․<수성지>․<원생몽유록>(?)
이항복(李恒福, 1556(명종 4)~1618(광해군 10): <유연전>(<유연전>의 소재가 사실이고, 또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항복은 소설이라 생각하고 이 전을 짓지는 않았다. 문제는 사실적인 상황을 설득력 있게 독자들에게 전달하느라고 소설이 되어버렸다.)
최현(崔晛, 1563(명종 18)∼1640(인조 18): <금생이문록>
조위한(趙緯韓, 1567(선조 1)∼1649(인조 27): <최척전>
허균(許筠, 1569(선조 3) ~ 1618(광해군 10): <홍길동전>(?) ‘4) (1) <홍길동전>은 허균이 지었나?’ 참조
권필(權韠, 1569(선조 3)~1612(광해군 4): <주생전>(?) (학계에서 <주생전>의 작가를 권필로 인정하는 분위기이나 필자는 권필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견해이다. 저간 <위경천전>으로 널리 알려진 <위생전>의 이본 작가도 권필로 보는 일부 학계의 견해가 있다. 필자는 이 또한 <주생전>을 보고 누군가 엇비슷하게 지은 것이라는 견해이다.)
윤계선(尹繼善, 1577(선조 10)∼1604(선조 37): <달천몽유록>
권칙(權侙, 1599(선조 32)∼1667(현종 8): <안여식전>․<강로전>
정태제(鄭泰齊, 1612(광해군 4)∼1669(현종 10): <천군연의>
김만중(金萬重, 1637(인조 15)∼1692(숙종 18): <구운몽>․<사씨남정기>
조성기(趙聖期, 1638(인조 16)∼1689(숙종 15): <창선감의록>
홍세태(洪世泰, 1653(효종 4)∼1725(영조 1): <김영철전>
이주천(李柱天, 1662(현종 3)~1711(숙종 4): <금산사창업연록(金山寺創業宴錄)>
이정작(李庭綽, 1678(숙종 4)∼1758(영조 37): <옥린몽>
안개(安鎧,1693-1769)의 부인 전주 이씨(李氏,1694(숙종 20)-1743(영조 19): <완월회맹연(玩月會盟宴)>(?)
이광사(李匡師,1705(숙종 31)~1777(정조 1): 슬하의 남매와 집안사람들: <소씨명행록(蘇氏明行錄)>(?)
김수민(金壽民,1734(영조 10)~1811(순조 11): <내성지(奈城誌)>
박지원(朴趾源, 1737(영조 13)∼1805(순조 5): <마장전(馬駔傳)>․<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민옹전(閔翁傳)>․<양반전(兩班傳)>․<김신선전(金神仙傳)>․<광문자전(廣文者傳)>․<우상전(虞裳傳)>․<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호질(虎叱)>․<허생(許生)>․<열녀함양박씨전 병서(烈女咸陽朴氏傳 幷書)>
이덕무(李德懋, 1741(영조 17) ~1793(정조 17): <관자허전(管子虛傳)>
구구년(具龜年, 1752(영조 28) ~ 1822(순조 22): <오일론심기(五一論心記)>
이이순(李頤淳, 1754(영조 30) ~ 1832(순조 32): <일락정기>
김소행(金紹行, 1765(영조41)∼1859)(철종 10): <삼한습유(三韓拾遺)>
목태림(睦台林, 1782(정조 6)∼1840(헌종 6): <종옥전>․<춘향신설>(19세기 말 고종대?)
심능숙(沈能淑, 1782(정조 6)∼1840(헌종 6): <옥수기>
정기화(鄭琦和, 1786(정조 10)∼1840(헌종 6): <천군본기>
서유영(徐有英, 1801(순조 1)~(1874)(고종 11)?: <육미당기>
남영로(南永魯, 1810(순조 10)~1858(철종 9): <옥련몽>․<옥루몽>
주학련(朱學鍊, 1824(순조 24)~1891 이후(고종 이후): <화운전(花雲傳)>
박태석(朴泰錫, 1835(헌종 1)∼ ? ): <한당유사>
정태운(鄭泰運, 1849(헌종13)∼ 1909(순종 3): <난학몽(鸞鶴夢)>
한은규: <쌍선기(雙仙記)>
김광수(金光洙,1883(고종20)~1915): <만하몽유록(晩河夢遊錄)>
위의 고소설은 대다수가 한문소설이고 작가들 또한 대부분 한문에 능한 양반 사대부였다. 그 중에는 김시습․박지원․임제 같이 뛰어난 재주를 펴지 못한 이나 김소행 같은 서러운 신분의 서얼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영화로운 지위에 있었던 이들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신숙주의 손자로 기재기이를 지은 신광한이나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사대부 김우옹 같은 이가 그들이다. 하지만 이들 몇을 제외하면 고소설의 대부분은 저자가 벼슬자리에서 물러났거나 어려운 시기에 지어진 것들이니, 억눌려 온자들의 존재증명인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안개의 부인 전주 이씨가 지었다는 <완월회맹연>과 이광사의 자녀 남매와 집안사람들이 지었다는 <소씨명행록>이다. <완월회맹연>을 대사헌을 지낸 안겸제(安兼濟, 1724~?)의 어머니인 전주 이씨가 지었다는 것은 고소설의 작자가 남성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소씨명행록>의 경우는 더욱 흥미로우며 작가의 폭을 여성에서 집안사람들까지 서너 발짝을 더 나아간다.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보면, ‘이원교(李圓嶠:匡師)의 자녀 남매가 <소씨명행록>을 지었는데 집 안에 변고가 낫다. 이유인 즉은 원교의 꿈에 한 여인이 나타나 스스로 소씨라며 “사람을 위태로운 처지에 빠뜨려 놓고 구해주지 않느냐?”고 해서이다. 이 소씨는 물론 <소씨명행록>에 등장하는 여인이다. 아마 이원교의 자녀 남매가 소씨를 위태롭게 해놓고는 쓰기를 그친듯하다. 그래 남은 부분을 이원교의 형과 아우, 삼촌, 조카가 모두 한자리에 앉아 도와서 지었다 한다. 그 날이 마침 제사였는데, 이 일 때문에 제사를 늦게 지냈다.’는 것이 이유원 기록의 대략이다.
이 기록 모두를 믿는 것도 그렇지만, 또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고 단정 짓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적극 이해한다면 고소설은 집단창작으로까지 작가의 범위를 넓혀야만 한다. 물론 이광사 집안의 경우와 같은 예는 얼마든 있을 수 있다.
재설하고, 여하튼 오늘날 소설가들이 신춘문예 등을 바라고 소설을 짓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안타깝게도 국문소설 중에는 작자가 밝혀진 작품은 이 외에 거의 없다. 특히, 국문소설의 경우 소설을 짓는 일이 명예롭지 않다고 여겨 이름을 숨겼기 때문이다.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은 작가는 사대부일 수도 있고, 그 이하 신분일 수도 있다. 소설의 영리적 유통이 확대되면서 서민층 출신의 직업적 작가는 더 많아졌을 것이다.
(1)심유적불(김시습)
‘심유적불(心儒迹佛)’ 선비의 마음에 승려의 발자취라. 김시습을 정리하는 데 이보다 정확한 말을 찾지 못하였다. 이 말은 이이 선생이 <김시습전(金時習傳)>에서 김시습을 평한 말이다. 그는 실상 마음은 유교에 있으나 중의 길을 걸었으니, 선비이면서도 선비가 아니요, 중이면서도 중이 아니었다.
필자는 지금까지 김시습이라는 이를 명확히 규명하는 글로 이이 선생의 <김시습전>보다 나은 글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부질없는 붓질만 하느니, 김시습의 재주 이야기나 하나 놓고는 이율곡의 <김시습전> 전문을 소개해 보겠다. 시습은 세상 구경한 지 여덟 달 만에 능히 글을 읽을 줄 알았다고 한다. 여덟 달 때 일이란다.
한 번은 그의 외조부가 글귀를 뽑아, “꽃이 난간 앞에서 웃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 花笑檻前聲未聽”하니, 곧 병풍에 그린 꽃을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또 “새가 수풀에서 우나 눈물은 보기 어렵도다 / 鳥啼林下淚難看”하니 또한 병풍에 그린 새를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한다. 여덟 달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뜻은 모두 통하였다하니, 놀랠 노자가 따로 없이 ‘김시습’ 세 글자 아닌가.
또 세 살에 유모가 맷돌에 보리 가는 것을 보고 또렷이 이렇게 읊더란다.
비는 안 오는데 우레 소리는 어디메서 울리는고 / 無雨雷聲何處動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 黃雲片片四方分
역시 세 살 때 일이란다. 그 할아버지에게 묻기를, “시는 어떻게 짓습니까?” 하니, 할아버지가, “일곱 글자를 이어 놓은 것을 시라고 한다.”고 대답하였더니, 그렇다면 일곱 자를 엮을 테니 첫 글자를 불러 보시라고 하였다. 할아버지가 봄 춘(春) 자를 부르자, 곧 “봄비가 새 휘장 밖으로 내리니 기운이 열리도다 / 春雨新幕氣運開”라고 일곱 자 시를 짓더란다.
이이의 <김시습전>은 그가 지은 유일한 ‘전(傳)’이다. 율곡의 나이 47세 7월에 지은 것으로, 대부분 김시습에 대해 있는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였으며, 다만 끝에 저자의 의견을 덧붙여 절의와 윤기를 내세워 백세지사(百世之師)로 찬양하여 그의 억울한 울분의 넋을 달래주고자 하였다.
<김시습전>의 내용은 김시습의 선세가계(先世家系)에서 시작하여, 어린 시절 학문을 처음 익히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와 단종의 손양(遜讓)과 세조의 즉위에서 비롯된 김시습의 행적이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아래는 이율곡의 <김시습전(金時習傳)> 선현유음본전문이다.
<김시습전(金時習傳)>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고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신라 알지왕(閼智王)의 후손에 주원(周元)이라는 왕자가 있어 강릉을 식읍(食邑: 공신에게 내리어 조세를 받아쓰게 한 고을)으로 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눌러 살아 관향으로 하였다.
그 후에 연(淵)이 있고 태현(台鉉)이 있었는데 모두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다. 태현의 후손 구주(久住)는 벼슬이 안주목사(安州牧使)에 그쳤는데, 겸간(謙侃)을 낳았으니 그의 벼슬은 오위부장(五衛部將)에 그쳤다. 겸간이 일성(日省)을 낳으니 음보(蔭補: 벼슬을 조상의 음덕으로 얻는 것)로 충순위(忠順衛)가 되었다.
일성이 선사 장씨(仙槎張氏)에게 장가들어 선덕 10년(宣德十年: 세종 17년, 1435) 시습을 한사(漢師: 지금의 서울)에서 낳았다. 특이한 기질을 타고나 생후 겨우 여덟 달에 스스로 글을 알아보았다. 최치운(崔致雲: 세종 때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崔潤德)의 종사관으로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웠다.)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기어 이름을 시습이라고 지었다. 말은 더디었으나 정신은 영민하여 문장을 대하면 입으로는 잘 읽지 못하지만 뜻은 모두 알았다. 3세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5세에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통달하니 사람들은 신동이라 불렀다. 명재상인 허조(許稠) 등이 많이 보러갔다.
장헌대왕(莊憲大王: 세종대왕의 시호)께서 들으시고 승정원으로 불러들여 시로써 시험하니 과연 빨리 지으면서도 아름다웠다. 하교(下敎)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친히 보고 싶으나 세속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할까 두렵구나. 마땅히 집에서 학문에 힘쓰게 하며 드러내지 말고 교양을 길러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하시고 비단을 하사하시어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명성이 온 나라에 떨쳐 ‘오세(五歲)’라고 호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시습이 이미 임금의 장려하여 주심을 받음에 더욱 원대한 안목으로 학업을 힘썼다.
그런데 경태(景泰: 명 태종의 연호 1450~1467) 연간에 영릉(英陵: 세종대왕)ㆍ현릉(顯陵: 문종대왕을 이름.)이 연이어 돌아가시었고, 노산(魯山: 단종)은 3년 되는 해에 왕위를 내놓았다. 이때에 시습의 나이 21세로 마침 삼각산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서울로부터 온 사람이 있었다. 시습은 즉시 문을 닫아걸고 3일 동안 나오지 않다가 이에 크게 통곡하고 서적을 몽땅 불살라 버렸으며, 광증을 발하여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자취를 불문(佛門)에 의탁하고 승명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그리고 여러 번 그 호를 바꾸어 청한자(淸寒子)ㆍ동봉(東峯)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그의 생김생김은 못생기고 키는 작았다. 뛰어나게 호걸스럽고 재질이 영특하였으나 대범하고 솔직하여 위엄이나 엄숙한 태도가 없고 너무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다.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분개한 나머지 심기가 답답하고 화평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세상을 따라 어울려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육신에 구애 받지 않고 세속 밖을 노닐었다. 나라 안 산천은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고 좋은 곳을 만나면 머물러 살았으며, 고도(故都)에 올라 바라볼 때면 반드시 발을 동동 구르며 슬피 노래하기를 여러 날이 되어도 마지않았다.
총명하고 영리함이 남달리 뛰어나서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시ㆍ서ㆍ역ㆍ예기ㆍ주례ㆍ춘추)은 어렸을 때 스승에게서 배웠고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전수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번 기억하면 끝내 잊지 아니하므로, 평일에는 독서하지 않고 또한 서책을 싸가지고 다니지도 않지만 고금의 서적을 빠짐없이 관통하여 사람들이 질문을 하면 의심할 여지없이 즉시 응대하였다. 돌무더기가 뭉쳐 있는 듯 답답하고 의분과 개탄으로 차있는 가슴속을 스스로 시원하게 풀어볼 도리가 없었다. 무릇 세상의 풍월운우(風月雲雨), 산림천석(山林泉石), 궁실의식(宮室衣食), 화과조수(花果鳥獸)와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의 시비득실, 부귀빈천, 사생질병, 희노애락이며, 나아가 성명이기(性命理氣)ㆍ음양유현(陰陽幽顯: 음은 유하고 양은 현하다)에 이르기까지 형태가 있고 없고 간을 통틀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면 모두 문장으로 나타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문장은 물이 솟구치고, 바람이 부는 듯하며, 산이 감추고 바다가 머금은 듯, 신이 메기고 귀신이 받는 듯, 특출한 표현이 거듭거듭 나와 사람으로 하여금 실마리를 잡을 수 없게 하였다. 성률(聲律)과 격조(格調)에 대하여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지만 그중에서 빼어난 것은 생각의 운치가 높고 멀어 일상의 생각에서 뛰어났으므로 글줄이나 자질구레하게 다듬어 수식하는 자로서는 따라 갈 수 없는 터이었다.
도리에 대해서는 비록 꼼꼼히 음미하여 탐색하고 본마음을 잃지 않도록 착한 성품을 기르는 공부가 적었지만 탁월한 재능과 지혜로써 이해하여, 함부로 말하고 논리를 세웠지만 대부분 유가(儒家)의 본지를 잃지는 않았다. 선가(禪道)와 도가(道家)에 대해서도 또한 대의를 알았고 깊이 그 병통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선어(禪語: 선가의 말) 짓기를 좋아하여 현모하고 은미한 뜻을 드러내 밝히되, 날카롭고 훤해서 막히는 것이 없었다. 비록 이름 높은 중으로서 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도 감히 그 칼날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의 타고난 자질이 빼어났음을 이것을 가지고도 징험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명성이 일찍부터 높았는데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하여 마음으로는 유교를 숭상하고, 행동은 불교를 따라 한 시대에 괴이하게 여김을 당하였다’고 여겼다. 그래서 짐짓 미쳐서 이성을 잃은 모양을 하여 진실을 가렸다. 글을 배우고자하는 선비가 있으면 나무나 돌을 가지고 치거나 혹은 활을 당기어 쏘려는 듯이 하여 그 성의를 시험하였으므로 문하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적었다. 또 산비탈에 있는 밭을 개간하기 좋아하여 비록 부귀한 집안의 자제라도 반드시 김을 매고 거두어들이는 일을 시키는 등 매우 괴롭혔으므로 끝까지 학업을 전수받는 자는 더욱 적었다.
산에 가면 나무껍질을 벗겨 하얗게 하여 시 쓰기를 좋아 하였으며, 외워 읊조리기를 얼마동안 하고나서는 번번이 통곡하고 깎아버리곤 하였다. 시를 혹 종이에 쓰기도 하였으나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대부분 물이나 불 속에 던져버렸다. 혹은 나무를 조각하여 농부가 밭 갈고 김매는 모양을 만들어 책상 옆에 벌려놓고 하루 종일 골똘히 바라보다가는 통곡하고 불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때로는 심은 벼가 아주 무성하여 잘 여문 모습이 볼만하면 술에 취해 낫을 휘둘러 온 이랑을 다 베어 땅에 내어 버리고서는 큰 소리로 목 놓아 통곡하기도 하였다. 행동거지가 종잡을 수 없었으므로 크게 세속사람들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당하였다.
산에 살고 있을 때, 찾아오는 손에게 자신에 대한 서울 소식을 물어, '마구 비웃고 꾸짖는 사람이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으레 기쁜 빛을 하였다. 만일, '거짓으로 미쳤으며 속에 포부가 있다고 하더라'하면 문득 눈살을 찌푸리면서 기뻐하지 않았다. 사령을 받은 고관이 혹 인망이 없는 사람이면 반드시 통곡하여 이르기를,
"백성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 사람이 이 자리를 맡는가?"
하였다. 그 당시에 이름 있는 재상인 김수온(金守溫)과 서거정(徐居正)은 국사(國士: 나라의 모범되는 선비)로 칭찬이 자자했다. 하루는 거정이 바야흐로 행인을 물리치고 바삐 조회에 들어가는데, 시습이 남루한 옷차림에 새끼줄로 허리띠를 하고는 천한 사람이 쓰는 흰삿갓을 쓰고 가다가 거정을 저자에서 만났다. 시습은 앞에서 인도하는 무리를 무시하고 머리를 쳐들고 불러 말하기를, "강중(剛中: 거정의 자)이 편안한가?"하였다. 거정은 웃으면서 이에 응답하고 초헌(軺軒: 대부가 타는 수레)을 멈추어 서로 대화를 나누니, 온 저자 사람들이 놀라는 눈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조정의 선비로서 시습의 모욕을 당한 사람이 참지 못하여 거정에게 아뢰어 ‘시습의 죄를 다스려야겠습니다’하니 거정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만두시오, 미친 사람과 무얼 따질 것이 있겠소. 지금 이 사람을 죄주면 백대 후에 반드시 공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이오."
하였다.
김수온이 지관사(知館事)로서 "맹자 견양혜왕(孟子見梁惠王)"이라는 논제를 가지고 태학(太學: 성균관)의 유생들을 시험하였다. 어떤 상사생(上舍生: 진사나 생원)이 삼각산에 가서 시습을 보고 말하기를,
"괴애(乖崖: 수온의 별호)가 장난을 좋아합니다. '맹자 견양혜왕'이 어찌 논제에 합당하겠습니까."
하였다.
시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노인이 아니면 이 논제를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고 이에 붓을 들어 재빨리 한 편의 글을 만들어 주며 말하기를,
"그대가 스스로 지은 것처럼 해서 이 노인을 한번 속여 보시오."
하였다.
상사생이 그 말대로 따라하였더니 수온이 끝까지 읽지도 않고 다급히 묻기를,
"열경이 지금 서울의 어느 절에 머물고 있는가?"
하였다.
상사생은 숨길 도리가 없었으니, 시습의 명성이 이와 같았다. 그의 이론은 대략 '양혜왕은 폭력으로 군주의 지위를 빼앗은 자이니, 맹자가 만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인데 지금은 그 글이 없어져서 수집하지 못한다. 수온이 죽은 뒤 그가 좌화(坐化: 앉아서 죽음)하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시습은 말하기를,
"괴애는 욕심이 많은데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는가? 설혹 있었다 하더라도 좌화는 예가 아니다. 나는 다만 증자(曾子)의 역책(易簀:‘대자리를 바꾼다는 뜻’이다. 증자는 병 중에 대부의 신분에 맞는 화려한 대자리를 깔고 있다가 임종 때 신분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제자에게 대자리를 바꾸게 하고는 죽었다. 여기서 역책이란 말이 스승이나 현자의 죽음을 가리키게 되었다.)과 자로(子路)의 결영(結纓:‘결영’은 ‘갓끈을 다시 매고란 뜻으로 죽음의 자리에 처했을 때의 의연한 자세’를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전쟁터에서 창을 맞고 치명상을 당했을 때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끈을 풀지 않는 법이다.”라고는 죽었다)을 들었을 따름이오.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아마 수온이 부처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성종(成宗) 12년(1481) 시습의 나이 47세였다.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제문을 만들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은 대략 이러하였다.
"제(帝: 순임금)께서 오륜을 베푸심에 부자유친이 맨 앞에 위하고 죄가 3천 가지로 나열되지만 불효의 죄가 가장 크옵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살고 있는 이 누구인들 부모의 길러주시고 교육하여 주신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고 미련한 소자는 집안을 대대로 이어나가야 하온데 이단(異端: 불교와 노장)에 침체하여 말년에서야 겨우 뉘우치고 있습니다. 이에 예전(禮典)을 살피고, 성경(聖經)을 탐색하여, 조상의 덕을 생각하여 제사에 정성을 다하는 큰 의례를 강구하여 정하고, 청빈한 생활을 참작하여 간략하지만 정결하기를 힘쓰며 성의가 담긴 제수를 차리려 애썼습니다. 한무제(漢武帝)는 70세에야 비로소 전 승상(田丞相)의 ‘선술(仙術)을 멀리하라’는 말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100세에야 허 노재(許魯齋)의 ‘인의강상(仁義綱常)’의 권고에 감화하였습니다."
마침내 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얻었다. 많은 사람들이 벼슬하라고 권하였으나 시습은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고 언행에서 거리낌 없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달 밝은 밤을 만나면 이소경(離騷經:초나라 굴원이 억울함을 적은 시) 외우기를 좋아하였고, 외우고 나면 반드시 통곡하였다. 혹 송사하는 곳에 들어가 요사한 것을 정직한 것으로 만들어 궤변을 부려서 반드시 이겼으며, 판결 문안이 이루어지면 크게 웃고 파기하기도 하였다. 뛰노는 시장거리의 아이들과 어울려 놀며 취하여 길가에 드러눕기 일쑤였다. 하루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이 저자거리를 지나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저놈을 멈추게 하라."
고 하였다.
창손은 듣지 못한 체 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위험한 일로 여기어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절교하였는데 다만 왕족인 수천부정(秀川副正) 정은(貞恩)과 남효온(南孝溫)ㆍ안응세(安應世)ㆍ홍유손(洪裕孫) 등의 무리 몇 사람만이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효온이 시습에게 묻기를,
"나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시습은 대답하였다.
"창구멍으로 하늘을 엿보는 거지."
효온이,
"동봉, 그렇다면 그대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시습은 말하였다.
"넓은 뜰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 거지."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아내가 죽자, 다시 산으로 돌아가 중이 되어 머리를 깎아 버렸다. 강릉과 양양 지방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였고 설악산ㆍ한계령ㆍ청평 등지의 산에 많이 있었다. 유자한(柳自漢)이 양양의 원으로 있으면서 예로써 대접하며, 가업을 회복하여 세상에 나가기를 권하였다. 시습은 이를 서신으로 사절했는데, 거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장차 농사나 짓는 긴 자루가 달린 가래나 만들어 솔뿌리나 국화뿌리나 캐겠소. 온 나무가 서리에 얼어붙거든 중유(仲由;공자의 제자 자로)의 온포(縕袍:묵은 솜을 둔 도포로 평민들이 입는 옷: 공자는 『논어』「자한」편에서 ‘자로는 해진 온포를 입고 여우와 이리 털로 갖옷을 입은 자와 같이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자로일 뿐이다.’라고 하였다)를 손질하고, 온산에 백설이 쌓이거든 왕공(王恭:동진 시대에 청렴결백하고 지조가 있는 인물)의 학창의(鶴氅衣;학털로 만든 갓옷: 왕공은 청렴결백하고 지조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눈 오는 날 학창의를 입고 가는 것을 맹창(孟昶)이 보고서 신선이라고 찬탄한 고사가 있다.)를 매만지려 합니다. 넋을 잃고 세상에 사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거닐며 한 평생을 보내는 편이 나을 것이오. 천년 후에나 나의 본디 마음을 알아주기 바랄뿐이외다."
성종 24년(1493)에 충청남도 부여 홍산(鴻山)에 있는 무량사(無量寺)에서 병들어 누워 서거하니 향년 59세였다.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임시로 빈소차림을 하여 놓아두라고 유언하였다. 3년 후에 장사지내려고 빈소를 열어보니 안색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중들은 놀라 탄식하며 모두 부처라고 하였다. 마침내 불교식에 의하여 다비(茶毗: 불교의 화장)하고 그 뼈를 취하여 부도(浮圖: 작은 탑)를 만들었다. 생존시에 손수 늙었을 때와 죽었을 때의 두 개의 화상을 그리고, 또 스스로 찬(贊)을 지어 절에 남겨 두었다. 찬의 끝에 이르기를,
네 모습이 지극히 못났는데, 爾形至眇
네 말 너무나도 어리석으니, 爾言大侗
마땅치 않겠느냐 너를 둠이, 宜爾置之
엉구렁텅이 속에 두는 것이. 溝壑之中
하였다.
지은 시들은 흩어져 잃어버려 십분의 일도 보존되지 못하였는데 이자(李耔)ㆍ박상(朴祥)ㆍ윤춘년(尹春年) 등이 선후 수집해서 세상에 인쇄하여 내놓았다고 한다.
신 삼가 생각하옵니다.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는데, 맑고 탁하며 후하고 박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면서 아는 생지(生知)와 배워서 아는 학지(學知)의 구별이 있으니, 이것은 의리를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습과 같은 사람은 문(文)에 대하여 나면서부터 터득했으니, 이는 문장에도 생지가 있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미친 짓을 하여 세상을 도피한 은미한 뜻은 가상하나 그렇다고 굳이 윤리의 유교를 포기하고 방탕하게 스스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한 것은 무엇입니까.
비록 빛을 감추고 그림자마저 숨기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김시습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한다 한들 도대체 무엇이 답답하겠습니까. 그 인품을 상상해 보건대 재주가 타고난 기량의 밖으로 넘쳐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어찌 가볍고 맑은 기운을 받기는 풍족하였지만 두껍고 무거운 기운을 받기는 부족하였던 이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절의(節義)를 내세우고 윤리를 심어 그 심지를 끝가지 다하려 하였으니 해와 달과 더불어 광채를 다툴 만합니다. 그러므로 그 기풍을 접하면 나약한 사람도 감흥하여 일어서게 될 것이니, 비록 ‘백세의 스승’이라 한다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시습의 영특한 자질을 가지고 학문과 실천을 갈고 닦으며 힘썼던들 그 이룩한 바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 바른말과 준엄한 논의로 꺼리고 피해야 할 것도 부딪쳤으며, 높은 벼슬아치들을 꾸짖기를 조금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 당시에 그의 잘못이라고 말한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선왕의 성대하신 덕과 높은 재상들의 넓은 도량은, 말세에 선비로 하여금 말을 공손하게 하도록 하는 것과 견주어 볼 때, 그 득실이 어떠하겠습니까.
아! 거룩합니다.』
충남 부여 무량사에 있는 김시습의 초상.
그는 조선 초기의 학자·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서울 출생이다.
그는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이이(李珥)는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이제 김시습이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을 지은 이’라는 수식어는 붙이지 말자. ‘최초의 한문소설’은 <온달전>이나 <백운제후> 등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도 우리소설사에서 김시습의 자리는 굳건하다.)
(2)모정국문(김만중)
어머니와 한글에 대한 사랑
‘모정국문(母情國文)’이라.
굳이 풀이하자면 어머니에 대한 정과 국문인 한글에 대한 사랑이다. 김만중을 표현하는데 이 네 마디면 족하지 않을까한다.
모정부터 풀어나가 보자.
1637년 인조대왕 15년 2월 10일, 낮 12시, 강화도를 떠나 한양으로 오는 한 출렁이는 뱃전에서 사내아이의 고고한 일성이 우렁차게 울렸다. 산모는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윤방(尹昉)의 손녀요, 이조참판을 지낸 해평 윤지(尹坻)의 딸이자, 이미 병자호란으로 20일 전에 남편을 잃은 윤부인이었다. 윤부인에게는 남편을 잃은 전쟁터에서 얻은 귀한 자식이요, 조선 소설사에는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라는 걸작을 알리는 일성이다. 유복자로 태어난 김만중(金萬重,1637~1637) 옆에는 후일 숙종의 장인, 즉 숙종의 첫부인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가 될 5살된 형 만기(1633~1687)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김만중의 집안은 조선의 명문가였다. 그의 본관은 광산.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이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자이자 앞에서 살핀 신독재 김집(金集)의 동생인 김반(金槃,1580~1640)의 손자이다. 아버지 익겸(益謙)은 강개한 사내였다. 만중이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유복자로 태어 난 것은 아버지 익겸의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서였다. 익겸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윤부인과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갔다. 하지만 1월 22일 강화도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자 김상용(金尙容,1561~1637)과 함께 강화도 남문에 올라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태연히 앉아 폭사를 했다.
김만중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강한 삶은 이러한 집안 내력에서 비롯되었다.
만중은 1665년(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이 되고 헌납(獻納)·사서(司書) 등을 거쳤다. 1679년(숙종 5)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대사헌에 이르렀으나, 1687년(숙종 13) 경연에서 희빈 장씨라 불리는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일들로 인해 선천에 유배되었다. 만중이 평생 희빈 장씨에게 마음을 주지 않은 것은 형 만기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인 숙종의 첫부인인 인경왕후(仁敬王后)로 연유한다. 인경왕후가 일찍 죽자 숙종은 후비를 얻는데 이 여인이 바로 비운의 왕비인 인현왕후였다. 자신의 조카딸을 이어 국모가 된 인현왕후를 김만중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이 인현왕후와 적대에 선 희빈 장씨를 못 마땅히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듬해 왕자(후에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 그도 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어 결국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이렇게 유배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의 기반 위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카딸 인경왕후, 인현왕후, 희빈 장씨와의 관계도 한 이유가 되었을 것임은 <사씨남정기>의 저술에서도 귀띔 받을 수 있다.
김만중의 재주는 비상했다. 그의 시문집인 〈서포집>, 비평문들을 모은 〈서포만필> 등에 많은 시문과 잡록이 보이며, 〈구운몽>·〈사씨남정기>를 남겼다.〈서포만필>을 보면 그는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진 트인 사고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서포만필>에서 소식의 〈동파지림 東坡志林>을 인용하여 아이들이 〈삼국지연의>를 들으면서는 울어도, 진수의 〈삼국지>를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여 소설이 주는 재미와 감동의 힘을 긍정한 것이나 그 자신이〈구운몽>·〈사씨남정기>같은 소설을 직접 창작할 수 있었던 근원도 바로 이러한 폭넓은 사고의 소유자이기에 가능하였음을 넉넉히 어림할 수 있다.
특히 만중의 국문, 한글에 대한 이해는 남달랐다. 만중은 〈서포만필>에서는 한시보다 우리말로 쓰인 작품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여, 정철(鄭澈,1536~1593)의〈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을 들면서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오직 이것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유는 이 세 편의 가사가 우리말로 된 뛰어난 작품이어서였다.
만중은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詩文)은 제 말을 버리고 남의 나라 말을 배우고 있는데 비록 그것이 아무리 비슷하더라도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今我國詩文(금아국시문) 捨其言而學他國之言(사기언이학타국지언) 設令十分相似(설령십분상사) 只是鸚鵡之人言(지시앵무지인언)”라고 하였다.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낸다함은 남의 글 즉, 한문을 쓰는 일을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오늘날에도 영어를 숭상하고 공공연히 우리말을 비하하는 시대 아닌가. 더욱이 저 시절은 한문이 양반의 공용 문자요, 한글은 언문(諺文)이라 하여 ‘상놈글’이요, ‘암클’이라고까지 천시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 암클, 언문을 국문(國文) 즉 나랏글이라 명명한 것에서 그의 우리말에 대한 자각이 여하함을 알 수 있다.
만중이 어머니를 그리는 애절한 <사친시> 한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 아무리 문장의 대가인 만중일지라도 크나큰 어머니의 정을 한낱 문자로써 당해내지 못함을 절절히 기록한 시이다.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리는 시를 쓰고자 하여 (今朝欲寫想親語 금조욕사상친어)
몇 번이나 붓을 적시다가 다시 내던졌는가? (幾度濡毫還復擲 기도유호환부척)
글씨가 이루어지지 않아 눈물이 이미 적시니 (字未成時淚已滋 자미성시루이자)
마음을 집중하여도 사친시는 이루어지지 않네. (集中應缺海南詩 집중응결해남시)
(己巳 9월 25일)
정면관에 야인 차림을 하고 양손은 소매 안에서 마주 잡고 있는 김만중의 모습이다.
이 영정은 원본을 보고 다시 그린 이모본(移模本)으로, 본래 영정은 서화에 능한 조카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가 그렸다고 전한다.
(3)법고창신(박지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박지원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의 일원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 그러나 자신의 어제오늘의 삶에서 비겁하지 않은 날들이 얼마나 될까?
이 글을 쓰는 나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비겁하지 않고 산다는 것, 연암 시절은 미래를 담보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명을 따로 붙일 것 없다. <홍루몽>에 써 놓은 ‘진실은 숨고(眞實隱) 거짓말은 남아있다(假語存)’라는 6자만 잠시 빌리면 된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늘 ‘진실’보다는 ‘거짓’이 유행한다. 다만 ‘거짓’의 앞에, ‘조금’ 혹은 ‘더’라는 부사가 붙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물론 연암의 시절이나 지금이나 앞서거니 뒤서거니지만, 글에서만큼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거짓’인 저 시절이었다. 그래 비겁하지 않고 세상을 산다는 것이 참 어려웠다.
연암 당대 조선의 지배이념인 유학儒學, 다시 말하면 성리학性理學은 이미 400여 살이 다 되는 노회한 노인이었다. 연암은 글쓰기를 업業으로 삼고 유학에 붙은 저승꽃을 하나씩 떼어 냈다. 적당히 비겁하면 살아가는데 문제없는 화주현벌華冑顯閥이었다. 허나 그는 벼슬, 양반, 사대부라는 포구에 정박을 마다하고 풍파에 몸을 맡겼으니, 그의 글들은 결코 현학적으로 가볍게 던지는 방담放談도 일락逸樂도 아니다.
연암의 소설은 그렇게 저들의 소란스런 반향反響을 감내하고 쓴 글들이다. 더욱이 연암의 언행言行은 각 노는 적이 없으니 그의 소설에 보이는 이른바 상쾌한 우수憂愁, 시원한 역설逆說, 따뜻한 인간성人間性은 그의 삶이자 조선의 풍광이요, 진단서요, 처방전으로 읽고 싶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어 두고 연암의 초상肖像을 잠시 살려보자.
연암의 둘째 아들 박종채朴宗采가 지은 『과정록過庭錄』에 의거하여 살펴 본 연암의 생김은 이러하다.
아버지의 얼굴빛은 아주 불그레하며 활기가 도셨고 눈자위는 쌍꺼풀이 지셨으며 귀는 크고 희셨다. 광대뼈는 귀밑까지 이어졌고 기름한 얼굴에 수염이 듬성듬성하셨으며 이마 위에는 주름이 있는데 마치 달을 치어다 볼 때 그러한 것 같았다. 키가 커 훤칠하셨으며 어깨와 등은 곧추섰고 정신과 풍채는 활달하셨다.
아들이 쓴 것이기는 하지만, 연암의 인물됨이 여간 아니었던 듯하다. 그러나 연암의 바깥모습이니 이것만으로 연암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연암은 매우 여린 심성과 강인함을 동시에 지녔기에 불의를 보면 몸을 파르르 떠는 의협인義俠人이자 경골한硬骨漢이었다.
그의 성격에 관한 글을 찾아보면 연암은 상대에 따라 극단으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위선자들에게는 서슬 퍼런 칼날을 들이대는 맺고 끊음에 결연한 함을 보이다가도 가난하고 억눌린 자, 심지어는 미물에게까지 목숨붙이면 모두에게 정을 담뿍 담아 대하였다. 모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그 낙차가 여간 아니란 점에서 연암의 심성을 읽을 수 있다.
때로는 개도 사람보다 낫다∥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1891 ~1968 선생의 필적∥이병기 저, 『가람문선文選』, 신구문화사, 1966. 화보
그러고 보니 위대한 개들의 이야기는 즐비하다. 개에 대한 속담도 여간 많은 게 아니다. 심심파적으로 세어보니 한글학회 지음, 『우리말큰사전』에는 어림잡아 52개나 된다. 대부분 상대의 허물을 꾸짖는 비유로서 등장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우리와 삶을 같이하는 동물이라는 반증이다. 그 중 “개 같은 놈”이니, “개만도 못한 놈”이라는 욕이 있다. 앞 것은 그래도 괜찮은 데, 뒷 욕을 듣는다면 정말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사실하는 말이지만, 후자 쪽의 욕을 잡수실 분이 꽤 된다. 사람 사는 세상 그야말로 “개가 웃을 일이다”
‘개를 키우지 마라’는 연암의 성정性情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결절結節이다.
연암은 “개를 기르지 마라不許畜狗.”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러하다.
개는 주인을 따르는 동물이다. 또 개를 기른다면 죽이지 않을 수 없고 죽인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니 처음부터 기르지 않는 것만 못하다.
말눈치로 보아 ‘정을 떼기 어려우니 아예 기르지 마라’는 소리이다.
어전語典에 ‘애완견愛玩犬,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르는 개. 주로 실내에서 기르는데 스피츠, 테리어, 치와와 따위가 있다’이라는 명사가 오르지 않을 때다. 계층階層이 지배하는 조선후기, 양반이 아니면 ‘사람’이기조차 죄스럽던 때였다. 누가 저 견공犬公들에게 곁을 주었겠는가.
언젠가부터 내 관심의 그물을 묵직하니 잡고 있는 연암의 메타포이다. 연암의 삶 자체가 문학사文學史요, 사상사思想史가 된 지금, 뜬금없는 소리인지 모르나 나는 이것이 그의 삶의 동선動線이라고 생각한다. 억압과 모순의 시대에 학문이라는 허울에 기식寄食한 수많은 지식상知識商 중, 정녕 몇 사람이 저 개犬와 정情을 농弄하였는가?
이미 머리말에도 썼거니와 나는 연암을 켜켜이 재어놓은 언어들 중, 이 말을 연암의 속살로 어림잡고 그의 소설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한 번은 이러한 일도 있었다. 아래 글은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 소완정의 ‘여름밤 친구를 찾아서’에 답하는 기문」의 일부인데 위에서 말한 ‘개를 키우지 마라’는 말이 결코 말선심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까치 새끼 한 마리가 다리가 부러져서 비틀거리는 모습이 우스웠다. 밥 알갱이를 던져주니 길이 들어 날마다 와서는 서로 친하여졌다. 마침내 까치와 희롱하니 “맹상군(孟嘗君, 돈. 맹상군은 전국시대의 귀족으로 성은 전田, 이름은 문文이었다. 우리말로 돈을 전문錢文이라고 하기에 음의 유사를 들어 비유한 것이다)은 전연 없고 다만 평원객(平原客, 손님. 평원군은 조나라 사람으로 손님을 아주 좋아하였기에 비유한 것이다)만 있구나”하고 말하였다.
굶주린 선비 연암과 다리 부러진 까치 새끼-, 까치에게 밥알을 주며 수작을 붙이고 앉아있는 연암의 모습이 보이듯 그려져 있다. 이 글을 쓸 때 연암은 사흘을 굶을 정도로 극도의 가난 속에 있었으니, 아닌 말로 달력을 보아가며 밥 먹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적절한 결핍에 욕심 없이 머무르는 ‘안빈낙도’라는 상투적 수식어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하루하루 끼니 때우기조차 힘든 철골徹骨의 가난, 그리고 다리 부러진 까치 한 마리, 절대적 빈곤가를 서성이기에 종이 할 일까지 하는 몹시 가난한 양반인 겸노상전兼奴上典이면서도 연암은 미물에게조차 애정을 거두지 않는다.
“맹상군은 전연 없고 다만 평원객만 있구나”라는 말은 ‘돈은 한 푼도 없는데 손님은 있구나’라는 말이다. 가난에 대한 자조自嘲로 언뜻 들리지만, 그 보다는 다리 부러진 까치를 손님으로 맞아 밥알을 건네주는 정겨운 연암의 모습이 더욱 다가온다. 이러한 다심多心한 성격의 연암이기에 그의 소설 속에는 각다분한 삶을 사는 상사람들이 점경點景으로 남은 것이다.
천품이 저러한 연암이었다. 따지자면 연암은 세상에 대해 야멸차게 독을 품고 대들었으니 재물이 따를 리 없다. 연암에게 재물은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얼음과 숯의 성질이 정반대이어서 서로 용납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물이 서로 화합하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 쯤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욱 이해를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또 한 번은 타던 말이 죽자 하인들에게 묻어 주게 하였으나, 그들이 이를 잡아먹어 버린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연암은 말의 뼈를 잘 수습하고는 하인들의 볼기를 쳐, 몇 달을 내 쫓아 혼쭐을 내었다.
그때 연암은 “사람과 짐승은 비록 차이가 있지만 서도 너와 함께 애쓴 짐승이거늘 어찌 이와 같이 잔인한 것이냐?”고 경을 쳤다. 한 자 한 자를 짚어 가며 읽을 필요도 없이 미물에게조차 따뜻한 마음결로 다가가는 연암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종채의 기록을 살피면 연암은 아버지가 위독하자 “곧 칼끝으로 왼손 가운뎃손가락을 베어 핏방울을 약에 떨어뜨려 섞어 드리니 잠시 뒤에 소생하셨다”라는 기록도 보인다. 연암의 반포反哺: 안갚음, 어버이의 은혜에 대한 자식의 효도가 어떠했는지는 이러한 행적으로 보암보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가끔씩 연암을 ‘이단적異端的’ 혹은 ‘괴팍乖愎’ 등의 치우친 성향의 어휘로 평가를 하는 글을 보는데 잘못이다. 연암의 본 마음밭은 저렇게 순후하였기 때문이다. 그래 연암의 삶의 강골强骨함이나 원융무애圓融無礙는 저 순후함과 나란한 선비의식을 본밑으로 한 것들로 읽어야 마땅하다. 그의 다소 바자위진 글 또한 저러한 이유로 접해야 할 것이다.
박지원朴趾源 초상∥
박지원의 손자인 박주수朴珠壽의 그림
어글어글한 눈, 눈초리가 올라간 것하며 오뚝한 콧날과 턱수염이 매서운 인상을 준다.
그러나 넉넉한 풍채에서 풍기는 기운은 대인처럼 우람하다. 『과정록』에 보이는 아들 종채의 기록과는 얼굴 모양이 사뭇 다르다.
연암의 성미를 잘 담고 있는 또 한편의 글을 보자. 이 글은 1901년 김택영이 간행한 『연암집』에 수록된 이응익李應翼이 찬한 「본전本傳」이다.
선생의 얼굴 모습은 괴이하고 기상은 드넓고 쾌활하고 너그러우며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아 천하사를 봄에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잘 것 없는 시문 따위로 사司에 간여하지 않고 또 과거 보는 것을 싫어하였다. 술이 얼큰하여 귀까지 붉어지면 당대의 지위가 높고 귀한 사람과 세상을 속이는 정도正道에 어그러진 학문을 하는 무리들을 거리낌 없이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고 기롱하여 배척하였다.
“지식인의 역할은 ‘깨어있고’ ‘보는 것’이다.” 콜린 윌슨이 <아웃사이더>에서 한 말이다. 연암은 중세에 깨어 있었다. 그래 그는 아웃사이더 선비였다. 가닥가닥 그의 천품이 참 선비임을 알 수 있는 글이다. 하지만 이편이 있으면 저편도 있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저러하여 흰 눈동자로 만 연암을 훑고 종주먹을 들이대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았던 듯싶다. 종채의 기록을 더듬어 따라가 보자.
아버지는 20여세 때부터 의지와 기개가 높고 엄격하였다. 어떤 법규 같은 것에 얽매여 구애되지 않았으며 왕왕 회해詼諧나 유희遊戱를 하였다.
‘회해’나 ‘유희’는 익살스러운 농담이다. 위에서와는 판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연암이다.
여기서 말하는 회해나 유희의 뜻은, ‘실없는 농담’이나 ‘즐겁게 놀며 장난함. 또는 그런 행위’이다. 그러나 그의 날카로운 구변이 사전적인 의미에 그치지 않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무세어誣世語로 당시의 세태에 대한 비꼼이었다. 무세어란, ‘세상을 속여 말한 말’이니 아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아버지께서는 젊었을 때부터 말씀과 의론이 엄정하여 겉으로는 안색이 엄격하여 위엄이 있는 것 같이 보이나 속으로는 온유하였다. 권력을 따라 아첨하는 사람을 보면 용납치 않았으며 문득 즐겁게 농담하고 웃고 즐기는 사이에 넌지시 비꼬았기 때문에 평생 노여움과 비방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연암은 자신이 지적하는 문제에서 자신 역시 자유롭지는 못했다. 여러 기록을 보면 연암은 선비다운 기질이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고집 또한 여간 아니었다.
한 번은 함양군수 윤광석尹光碩이 『후촌집後村集』을 간행하였는데 선조인 박동량朴東亮에 관한 사실을 왜곡歪曲 기술했다 하여, 그에게 「여윤함양광석서與尹咸陽光碩書, 함양 윤광석에게 주는 편지」 한 통을 주고는 아예 의를 끊어 버린다.
그 편지의 일부분을 보면 말결이 저처럼 매정하고 몰풍沒風스럽다.
… 지금 지난번에 만든 『후촌집後村集』을 보니 우리 선조 금계군錦溪君, 朴東亮을 도덕적으로 형편없고 어그러짐이 매우 심하게 해놓았으니 지금 나는 그대와 하루아침에 백세의 원수가 되었다. 나는 백세의 원수와 함께 술잔을 주고받고 베개를 나란히 하고는 웃으며 얘기하고 서로 붙좇으면서도 4년 동안이나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 선조의 후손이 된 자가 누가 이 원통하고 분하고 욕되어 토악질 나는 마음을 함께 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그대에게 더욱 통분한 것이 있으니 …
그렇게 면대하던 윤광석에게 연암은 조목조목 『후촌집』 편찬에 얽힌 일을 들어 차갑게 절교를 선언하는데 ‘백세의 원수百世之讐’니 ‘원통하고 분하고 욕돼서 구역질나는 마음寃憤沫飮之情’ 등, 그 문맥이 보통 냉엄冷嚴한 게 아니다.
한솥밥 먹고 송사한다는 격이니 아무리 조상의 문제라지만 연암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어 자못 흥미롭다.
박지원朴趾源 초상|| 홍기문 옮김, 『박지원작품선집1』, 북한의 국립문학예술서적출판사, 1960(조선고전문학선집25)에 실린 초상
누구의 그림인지는 알 수 없다. 기름한 얼굴, 약간은 처진 듯 하지만 매서운 눈매, 굳센 콧날과 턱수염의 흐름에서 강골强骨한 인상을 풍긴다. 풍채는 넉넉하기보다는 약간은 마른 듯싶으면서 단정한 모습이다. 이마의 주름이 없다는 것 말고는 『과정록』에 보이는 아들 종채의 기록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는 것 같다.
유한준과 척을 두고 지낸 것 또한 이러한 예인데 아주 유명한 일이니 잠시 살펴보겠다.
창애蒼厓 유한준兪漢雋, 1732 ~1811은 연암을 ‘호복임민胡服臨民, 오랑캐 복장을 하고서 백성들 앞에 섬’, ‘노호지고虜號之稿, 오랑캐의 연호를 사용한 원고’라는 말로 모함하여 연암을 꽤 난처하게 만든 사람이다. 여기에는 꽤 깊은 유감이 있었다.
언젠가 유한준의 글을 연암이 혹평한 적이 있었다. 그 평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연암의 기질로 보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듯한데, 이로부터 유한준은 꼬부장한 마음으로 끝내 연암을 등져버리고 만다. 어찌 보면 조선시대 내내 글깨나 읽는 사람들이라면 몸에 밴 문인상경文人相輕이란 뜻도 연유이겠지만, 그보다 연암과 유한준은 학문의 길이 딴판인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문인상경이란, 글을 쓰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자기야말로 제일인자라고 자부하여 글 쓰는 사람끼리 서로 상대를 경멸한다는 뜻이다.
아마 연암 당대에는 아이들에게 변발(辮髮,남자의 머리를 뒷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을 깎아 뒤로 길게 땋아 늘어뜨리는 머리)하는 풍습이 그대로 내려왔던 듯하다. 이 제도가 들어 온 것은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로 굴욕의 상징이라 여긴 연암은 안의(安義,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일대 고을)의 원으로 가자 잔심부름을 하던 아이들에게 땋은 머리를 풀고 머리를 양쪽으로 가르고 양쪽으로 뿔처럼 동여 맨 쌍상투를 틀게 하였다. 또 연암은 자신도 옛날의 제도에 따라 학창의鶴氅衣를 평상복으로 만들어 입고는 관아에서 일을 보았다. 이 학창의는 지체 높은 사람이 입던 웃옷의 한 가지로 흰 창의의 가를 돌아가며 검은 헝겊으로 넓게 꾸민 옷이지 별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복식에 대해 잘 모르던 사람들은 이를 오랑캐의 풍습으로 여겼다. 더구나 여기에 연암이 청에서 배운 벽돌을 사용하여 정각亭閣을 신축하자, 함양군수였던 윤광석尹光碩이 연암이 오랑캐 복장을 하고서 백성을 다스린다는 ‘호복임민胡服臨民’ 설을 지어 서울에 퍼뜨린 것이었다. 이 말은 반청反淸 감정이라는 사회풍조에 편승해서 연암을 궁지로 모는데 꽤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열하일기』에 대한 비방으로까지 비화됐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의 연호를 썼는데 이것이 사단이었다. 연암과 감정이 있던 또 한 사람인 유한준이, 이 ‘호복임민’에다가 명에 대한 의리를 망각하고 오랑캐인 청을 추종한 연호를 썼다는 ‘노호지고虜號之稿’를 덧붙여 비방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공식문건이나 외교문서에는 이미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기에 사실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
유한준은 연암 당대에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로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 척화파斥和派였던 유황兪榥의 후손이었다. 그래서인지 유한준은 강경한 존명배청주의자尊明排淸主義者였으며 진한고문秦漢古文에 문장의 모범을 둔 의고주의擬古主義를 표방하였다.
따라서 실학사상과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을 추구했던 연암과는 판이한 문학론을 지녔다.
분함을 끝내 삭이지 못한 유한준은 이후, 연암이 포천에 묘지를 만들자 일족을 시켜 고의로 그 묘자리를 파내 집안 간에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대립을 빚었다.
박종채는 이때 일을 『과정록』에다 유한준이 이러한 것은 연암이 젊었을 때 자신의 글을 인정해주지 않았던 일에 원망을 품어 꾸민 일이라 하며 상세히 전말을 적어 놓고는 “아아, 험하구나. 이 사람은 우리 집안과 백대의 원수이다嗚呼 險矣 此吾家百世之讎也.”라고 하였다.
하지만 연암이 학문적 차이로 척을 두고 지낸 경우는 유한준 외에는 별로 없다. 연암이 면천군수로 있을 때 한원진韓元震, 1682 ~1751의 서원에 치제하라는 명이 있자 연암은 이에 순순히 따른다. ‘치제致祭’란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내려 죽은 공신을 제사 지내거나 또는 그러한 일을 말한다. 한원진은 노론이기는 하지만 호론湖論의 영수였기에 대다수 낙론계열 사람들은 참석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연암은 낙론洛論계열이면서도 학파를 초월하여 한원진이 호서지방의 위대한 선생이라며 참석하였다.
또 이광려李匡呂, 1720 ~1783 같은 이는 당색이 소인이었지만 연암이 먼저 찾아 평생지기처럼 지내었다. 당대가 파당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연암의 도량度量을 어림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욱이 연암은 적자와 서자를 가리지 않고 사귀었으니 종채의 『과정록』에는 “이에 세상 사람들은 벗을 가리지 않고 사귄다고 이를 비방하고 헐뜯었다人又以交不擇人 謗毁焉.”라고 하는 기록도 있다.
연암이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의 일대를 관장하는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의 일도 연암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1793년 봄, 도내에 흉년이 든 가운데 안의 고을이 가장 심하여 응당 공진公賑을 설치해야 했으나, 연암은 자신의 봉록俸祿을 털어 사진私賑, 흉년이 들었을 때, 개인이 사사로이 백성을 도와주던 일을 실시한 일이 있었다. 이유는 ‘사진’이라도 이 땅에서 난 곡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조정에서 그 정성을 인정하여 초피貂皮, 소목蘇木 등속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초피는 담비가죽으로 아주 진귀한 것이요, 소목은 콩과에 속하는 상록 교목의 속살로 한약재로 쓰인 귀한 것이었다. 연암은 공명첩空名帖도 돌려보냈다. 공명첩은 성명을 적지 않은 백지 임명장이다. 국가의 재정이 궁핍할 때 나라곳간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중앙의 관원이 이것을 가지고 전국을 돌면서 돈이나 곡식을 바치는 사람에게 즉석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어 명목상의 관직을 주었다. 물론 여기서는 연암의 벼슬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내린 것이었다. 권문세가에 뇌물을 디밀고 엽관獵官, 관직을 얻으려고 갖은 방법으로 노력함 운동을 하는 자들이 여간 많지 않을 때 일이다.
연암 박지원 사적비의 앞면과 뒷면∥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203번지 소재 안의 초등학교 교정
이 비는 진단학회, 국어국문학회, 한국사연구회, 고전문학연구회, 한문학연구회, 다산연구회 및 함양지역 유지들이 성금을 모아 1986년 안의초등학교 교정에 사적비를 세워 재임기간 동안의 빛나는 업적을 기린 것이다. 연암은 이곳에서 1792년부터 5년간 안의현감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다.
비문碑文은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선생이 썼다.
연암은 또 관아에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나누어주고는, 자신도 동헌東軒에 나와 그들과 함께 죽을 먹었다. 죽 그릇도 소반을 바치지 않은 것도 백성들과 똑 같았다.
“이것은 주인의 예이다此主人之禮也.”
연암이 이때 한 말이란다. 구휼을 받는 백성들을 손님으로 맞이했다는 소리이다. 이제나 그제나 말할 것도 없이 ‘예’, ‘도덕’이 우리의 미래인 것은 틀림없다. 물론 바람도 머무는 히말라야 정상에서 찾을 것도 아니다. 내 몸에서 한 치도 떠난 적이 없는 마음에 있다.
그래서인지 연암이 남긴 마지막 말씀은 이랬다.
“깨끗이 목욕시켜다오潔沐洗.”
글의 대가 유언치고는 좀 싱겁다.
그러나 죽으면 모두 깨끗이 염을 하는 것이거늘 굳이 유언까지 남기는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면 꽤 실다운 맛이 있는 듯싶다. 그는 퍽 개결한 성품을 지녔음을 여기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암이기에 고질병이 되어버린 사대사상의 타파를 역설하고 양반의 지나침을 경계하면서 상민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이미 화석화한 조선후기의 유교입법을 거부하고 양반의 처세와 유학자들의 위선을 매도하는 한편, 여성의 해방과 낮은 백성 심지어 미물에게까지도 마음자리 한쪽을 넉넉히 준 것이 아닐까 한다.
영국에서는 세익스피어를 중심으로 한 연구가 30만종이 넘는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할만한 연암 박지원에 대한 연구는 얼마나 될까? 만 편만이라도 넘었으면 하는 ‘바람’이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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