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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전략과 맥아더의 리더십
6ㆍ25전쟁 당시 구경 406㎜ 주포로 지상에 맹렬한 사격을 가하고 있는 미 해군 전함 미주리함의 모습.
1950년 9월 13일 상륙 이틀 전 미주리함은 상륙 장소를 속이기 위해
서해의 인천이 아닌 동해의 삼척 앞바다에 머무르고 있었다.
9월 5일부터 요코하마, 고베, 사세보, 부산에서 차례로 출항한 유엔군 함정들은
포인트 캘리포니아에서 최종 합류, 9월 13일
인천으로 향하는 바닷길인 비어수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천상륙작전 반대론자들은 8월 23일 도쿄회의 당시 맥아더 장군의 명연설에 감동했으나 그 논리까지 승복한 것은 아니었다. 8월 24일 미 해군 참모총장 포레스트 셔먼 제독은 태평양사령관 아서 래드포드 대장, 극동해군사령관 터너 조이 중장, 1상륙전단장 제임스 도일 소장, 1해병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과 만나 대응책을 논의했다.
미 해군의 대표적인 상륙전 전문가였던 도일 제독은 경기도 평택 포승면 일대를 새로운 상륙 후보지로 선택했다. 포승면 일대는 육군이 선호했던 군산보다는 수도권에 더 가까웠지만 인천처럼 위험한 장소는 아니었다. 이 제안에 해군과 해병대도 일제히 지지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반응은 차가왔다. 맥아더 장군은 8월 26일 인천상륙작전 상륙군부대의 주축이 될 미 육군 10군단을 창설하는 등 상륙작전 준비를 계획대로 진행했다. 워싱턴으로 복귀한 콜린스 육참총장과 셔먼 해참총장은 존슨 국방장관에게 도쿄 방문결과를 보고했다. 존슨 국방장관은 맥아더 장군의 계획을 지지했다. 이 같은 사태 진전에 따라 미 합참은 8월 29일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조건부로 승인했다. “상륙계획은 승인하지만, 다른 후보지도 계속 검토하라”는 취지의 모호한 결정이었다.
■ 주어진 시간은 20일
이런 논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상륙작전 준비라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상륙작전의 주인공이 될 미 해병1사단이 완전 편성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 해병대 병력이 급격하게 축소되어 완전한 병력을 갖춘 사단은 단 하나도 없었다. 캘리포니아에 주둔하고 있는 미 해병1사단은 8월까지도 부대 편성이 지지부진했다. 미 해병2사단으로부터 7000명, 신병 800명, 기타 세계 각지의 해병대로부터 3630명을 차출하고서도 해병1사단의 병력은 여전히 모자라 이미 전역한 예비역 1만 명까지 소집해야 했다. 심지어 8월 21일 7해병연대 1대대장으로 임명받은 레이 데이비스 중령은 불과 수 명의 기간병을 갖고 일주일 만에 현역 대대를 창설해야 했다.
미 해군 7함대사령관 아서 스트러블 중장은 8월 26일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상륙작전 계획을 구체화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상륙작전 결행 시점은 9월 15일로부터 불과 20일 전이었다. 스트러블 제독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스무 차례가 넘는 상륙전 경험을 가진 역전의 노장이었지만 너무도 짧은 준비시간에 경악했다. 요컨대 인천상륙작전은 “사실상 종이 위에 서류로 존재하는 부대를 예비군까지 긁어모아 불과 한두 달 만에 정원을 채운 다음,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격전을 치르면서 불과 20일 만에 상륙전 준비를 완료하고, 조수간만의 차까지 엄청나 상륙 시간까지 제한되는 인천 항구의 수직 안벽으로 사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가, 공격자에게 불리하다는 시가전에 돌입하는 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은 5000분의 1’이라는 이야기는 그냥 나온 이야기가 아니었다.
■ 주저하는 미 합참
맥아더 장군은 평범한 지휘관이라면 결코 감수할 수 없는 도박 같은 모험을 즐기고 있었다. 8월 31일 북한군의 9월 공세가 시작되자 미 합참은 초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전선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렸고, 급기야 4일과 5일에는 낙동강 방어선 포기 문제까지 거론될 정도로 전황이 악화됐다. 합참이 보기에 이런 상황이라면 맥아더 장군이 먼저 상륙작전계획 변경 방안을 보고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미 합참은 9월 5일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냈다. “전황에 따라 계획을 변경할 필요가 있지 않으냐”며 맥아더 장군의 의견을 묻는 취지의 전문이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상륙작전은 예정대로 감행한다”고 답변했다.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 대장은 고뇌했다. 낙동강 방어선은 금방이라도 붕괴할 것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더 이상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것은 모험이었다. 브래들리 장군은 9월 7일 맥아더에게 “인천상륙작전을 백지화하는 것이 어떤가”라며 전문을 보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반응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맥아더 장군은 작전 계획을 변경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마침 미 해병1여단과 국군 2군단의 역습이 성공하면서 낙동강전선도 급한 고비는 넘겼다. 결국 합참도 9월 9일 인천상륙작전을 최종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 적을 속여라
상륙작전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는 기습이었다. 상륙함정에서 내려 파도를 헤치며 해안으로 돌격하는 작전은 태생적으로 위험했다. 적이 예상할 수 없는 지역에, 적의 저항이 가장 약할 것으로 예상되는 장소에 상륙하는 것이 상륙전 성공의 관건이었다. 인천이라는 목표가 정해진 만큼 남은 변수는 북한이 상륙 장소를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극동군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기만작전을 시작했다. 9월 5일 낙동강 방어선이 붕괴 직전에 몰렸던 그 위기 상황에서 미 5공군 소속 전폭기들은 낙동강이 아닌 전북 군산 주변에 맹공격을 가했다. 마치 금방이라도 상륙할 것처럼 미 공군 전폭기들은 군산 주변 50㎞에 폭탄을 쏟아 부었다.
미군 당국은 영산 돌출부에서 역습에 성공하고 9월 초 부산으로 복귀한 5해병연대 장병들에게는 군산 지형을 따서 만든 모형을 보여주면서 상륙전 교육을 실시했다. 상륙작전을 사흘 앞둔 9월 12일에는 영국 해병 특수부대가 군산 해변에 침투했다. 첩보부대가 군산 주변으로 침투해 야전삽 등 미군 장비를 유기한 후 빠져나가기도 했다.
전함 미주리 함은 인천상륙작전을 이틀 앞둔 9월 13일 동해안 삼척 앞바다로 출동, 406㎜(16인치)에 달하는 대구경의 함포를 쏘아댔다. 같은 날 영국 항모와 순양함이 서해안 진남포 일대에 접근해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같은 날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기자들과 만나 “10월에는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고, 언론은 “유엔군 10월 중순에 반격할 듯”이라고 긴급 기사를 타전했다. 상륙작전 하루 전날인 9월 14일에는 국군 특공대가 포항 북쪽 25㎞ 지점에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 북한군의 긴급전문
미군의 기만작전은 상륙작전 자체를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장소와 시간을 속이는 것이었다. 미군의 요란한 움직임 자체만으로 북한군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상륙작전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일본은 공산권 스파이들이 활동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였다. 미군이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북한군은 그 시점과 장소가 9월 15일 인천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신하지 못했다.
1950년 8월 29일 북한의 김일성은 내무성(내무부)과 민족보위성(국방부)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비밀 연설에서 “미군의 상륙작전이 예상된다”고 명시했지만 예상 후보지로 서해안의 인천, 초도, 남포, 안주, 철산, 다사도와 동해안의 원산, 신흥, 신포를 열거했다. 다시 말해 북한은 여전히 인천이 미군의 상륙 목표라는 점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9월 초 북한은 18사단을 새롭게 창설했지만 예하부대를 서울ㆍ인천ㆍ수원에 분산 주둔시켰을 뿐 인천에 집중시키지는 않았다. 64해안보병연대가 인천을 지키고 있었지만 월미도와 인천항 부근에 제한적인 방어진지를 구축했을 뿐이었다. 이 밖에 98독립연대, 나남부대 등 신규 창설부대들은 여전히 인천이 아닌 낙동강으로 증원되고 있었다.
9월 13일 마침내 미 해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의 대함대가 인천항으로 향하는 바닷길인 비어수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 극동사령부의 통신감청부대는 이 무렵 인천에 주둔하는 북한 부대가 평양으로 보내는 긴급 전문을 감청했다.
“적 함정들이 인천에 접근 중, 다수의 항공기가 월미도를 폭격 중, 유엔군 상륙기도가 극히 농후함. 휘하 전 부대에 전투준비를 명령하였음. 적이 상륙을 기도하면 저지ㆍ격멸할 것임.” 평양의 북한군 수뇌부는 소스라치게 경악했지만 기동력이 부족한 북한군이 대응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다음날인 14일 북한은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기도 사실을 소련 측에도 정식으로 통보하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는 소련이라 한들 묘책이 있을 리 없었다.
■ 태풍보다 먼저 상륙하라
`맥아더 리더십'… 6·25전쟁 양상 완전히 뒤바꿔 '태풍 `케지아' 9월12일경 대한해협 통과 예정 맥아더,
9월11일 전함대 인천 향해 진군 명령
함정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에 밀려 7월 말 미군과 한국군은 한반도 남동 끝쪽 도시인 부산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좁은 장소로 몰렸다. 유엔군은 포위됐다. 삼면이 적으로 싸였고 후면은 바다였다. 북한군은 집요하게 공격을 계속했다. 유엔군의 병력은 계속 충원됐지만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급급했다. 무언가 전쟁의 양상을 바꿀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맥아더 장군은 교착상태에 빠진 전세를 뒤집기 위해 후방지역인 인천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주장하자 미국의 군부는 온통 반대에 나섰다.
1950년 8월 23일 도쿄에서 열린 회의에는 콜린스(Lawton Collins) 합참의장 및 극동지역 대부분의 육해군 장군들이 참석했다. 기상대가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인천에서의 조수간만의 차는 10m로 세계적으로 가장 큰 지역이며, 하루에 두 번 발생하고 조류의 속도는 상륙주정의 최고 속도와 비슷했다. 썰물 때 인천은 해변으로부터 5500m나 바다 쪽으로 뻗는 평평한 벌판을 드러내는데, 벌판은 작전하기에 부적합한 갯벌로 이뤄져 있었다. 콜린스 합참의장은 군산을 최적지로, 도일 해군 제독은 포성면을 주장했다. “인천이 갖고 있는 이런 약점들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북한군은 우리가 인천에 상륙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허를 찌를 수 있는 이점이 있지요. 인천에서 동쪽으로 40㎞ 떨어진 곳에 한국의 수도인 서울이 있습니다.
서울은 북한군의 수송과 통신의 중심지입니다. 작전이 성공한다면 남북으로 이어진 보급라인을 차단해 낙동강 지역의 북한군을 지리멸렬하게 만들 수 있으며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또 서울 수복이 한국인에게 주는 심리적인 효과도 매우 큽니다.” 그의 확신에 찬 주장에 8월 28일 미 합참은 인천상륙작전을 승인했다. 모든 육해군 장군들의 반대에도 맥아더가 인천을 주장한 것에는 나름대로의 분석을 통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7년 전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반도에서 있었던 안지오 상륙작전의 실패를 심도 있게 분석했다. 맥아더는 인천이 안지오보다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확신했다. 첫째, 안지오 상륙작전 때는 이탈리아가 우기에 접어들면서 날씨가 악천후를 보였다. 인천의 경우 9월 중순 이후에는 좋은 날씨가 계속된다.
이것은 공군력을 전투에 적극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 둘째, 독일군은 안지오에 상륙할 것을 예측해 대비했으나 북한군은 인천에서의 상륙작전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대비가 거의 없다. 셋째, 안지오의 독일군은 잘 훈련된 정예병력이 있었고 로마로부터 예비 병력의 투입이 가능했다. 인천의 경우 북한군은 낙동강에 주력을 집결시키고 있었기에 수비 병력이 약했고, 예비병력 투입도 거의 없을 것으로 판단됐다. 이에 반해 유엔군은 7만5000명의 정예 병력으로 구성돼 있었다. 거기에다가 맥아더는 인천과 월미도 지역의 지형과 갯벌의 상태를 이용한 효과적인 공격작전을 수립했다.
조수간만을 참조한 D-day는 9월 15일로 정해졌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속이기 위해 기만작전을 실시했다. 9월 12일, 미 육군 코만도 부대와 영국 해병 코만도 부대가 군산 해변 상륙 후 위력수색을 실시했다. 9월 13일에는 미국과 영국의 전함들이 진남포·삼척·원산 일대에 공격준비사격을 했다. 군산 지역에 대한 공중 맹폭격도 이뤄졌다. 북한군은 끝까지 연합군이 군산으로 상륙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9월 초 태풍 제인의 영향으로 일본 고베에 정박하고 있던 상륙함대의 배 7척이 파괴됐다. 미 공군 기상대는 9월 7일 두 번째 태풍 케지아(Kezia)가 마리아나 해협에서 일본 쪽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중심최대풍속 125노트인 특급 태풍이었다. 태풍 케지아는 인천상륙작전 전체를 침몰시킬 수 있었다. 미 공군기상대는 태풍이 9월 12일에서 13일 사이에 대한해협을 통과할 것으로 예상했다. 기상대는 미리 함대가 출항해 인천 쪽으로 진행하면 태풍의 좌측반원에 들어가므로 항해가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기상장교의 건의를 받은 맥아더는 일본에 있던 전 함대를 9월 11일 인천으로 향해 진군하도록 명령했다. 미 공군기상대의 일기예보는 정확했고, 거친 바다에 시달렸지만 함대는 예정대로 인천에 도착했다.
9월 15일 새벽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막을 올렸다. 상륙에 성공한 유엔군은 뛰어난 용맹성으로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한 뛰어난 장군의 리더십이 13일 만에 6·25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것이다.
[TIP]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
- 성공 확률 5000분의 1…일거에 역전시킨 `최상의 작전조셉 사젠트 감독이 1977년 만든 영화 ‘장군 맥아더’에서 그레고리 펙(맥아더 장군 분)이 앞의 대사를 할 때 느꼈던 감동이란! 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장군으로 진급한 후 39세의 나이에 최연소 미 육사 교장이 된 사람이 맥아더 장군이다. 영웅적인 개성과 카리스마적인 위엄과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솔선수범했던 20세기의 마지막 영웅. 그가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 장군이었다.
그는 성공할 확률이 50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는 참모들의 말에 “아무리 낮은 성공확률이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도전하라”며 작전을 감행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무모한 작전이 아니었다. 치밀한 분석에 바탕을 둔 준비, 기만작전의 성공, 기상장교의 조언 수용 등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도전해서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킨 최상의 작전이었다. “주여, 약할 때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강한 힘과 / 무서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담대성을 가지고 / 정직한 패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힘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전투를 앞두고 했다는 맥아더의 기도가 생각나는 오늘이다.
첫댓글 북한군은 왜 서울에서 3일을 허비했는가..김일성은 수도 서울을 점령함으로써 전쟁을 끝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서울을 버리고 도망감으로서..전쟁은 새로운 양상을...우리는 다시는 한국전쟁의 비극이 없기를....
정말로 인천상륙작전으로 우리나라의 허리를 공략하지 않앗으면 아마 지금쯤 우리 국민들은.....
역사의 한장면 감사합니다.....한국전쟁의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맥아더가 아니었으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을까....맥아더동상을 철거한다는 좌파는 정신차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