事大交隣과 事大主義
1. 글을 쓰면서
김부식이 사대주의자의 전형이라고도 하고, 역사학자들을 사대주의자 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희망하는 역사와 반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대주의라고 쉽사리 규정합니다. 그러나, 사대라고 하는 말을 알고 사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글을 작성하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대(정확한 표현은 사대교린입니다)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입니다. 꼼꼼하고 자세한 글을 작성하지는 않습니다.
사대주의라는 것은 일본인들이 전통 한국 사회의 타율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전통 한국 사회는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는 종속적인 것이고, 항상 강대국에 대하여 복종했으므로, 당시의 강대국인 일본에도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사대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도록 합니다. 조선시대 까지의 대외정책은 사대교린이었습니다. 즉 강대국인 중국의 각 왕조에 대해서는 事大의 관계를, 그 밖의 野人(여진), 倭(일본), 琉球 등에 대해서는 交隣의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덴 이러한 사대교린을 사대의 관계에만 주목하고, 또한 事大를 단순히 '큰 나라를 섬긴다'라는 단순한 뜻으로 해석하여 외교에 있어서 주체성이 없는 것의 대명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린은 주변의 제세력과 맺은 소극적인 대외 정책으로 막연히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대교린은 외교정책의 방법으로서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통용된 보편적인 외교 규범으로, 오히려 현실 대응의 합리성을 가진 외교 정책입니다.
2. 사대는 현실적인 외교수단이다.
{左傳}에는 사대의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예라는 것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고(小事大),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돌보아 주는 것이다(大字小). 그리고 사대는 운명을 함께하는 것이며, 자소는 작은 나라를 돌보아 주는 것이다.
이것은 西周 時代의 역사적 산물입니다. 서주시대 각 제후들 간의 우의와 결속을 위해 모색되었던 禮治사상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맹자에게서 종합되고 있습니다. 맹자의 한 구절을 봅니다.
제선왕이 묻기를 "이웃 나라와 사귀는 방법이 있습니까?"
맹자가 답하기를 "있습니다. 오직 어진 사람(仁)이라야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길수 있으며, 오직 지혜로운 사람(智)이라야 능히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사람은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는 자요,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사람은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는 사람은 천하를 보전하고,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 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
이러한 것들로 볼때 사대란 결국 대소국간의 힘의 불균형을 仁信智라는 교린의 예를 통하여 유화시킨다는 상호공존의 외교규범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사대하는 이유는 곧 강대국에 대한 힘의 열세를 대신하는 자국의 보전책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대자소(事大字小)의 교린(交隣)의 예(禮)는 춘추전국시대에 국가간에 약육강식의 패권 싸움이 난무하자, 강대국의 무력적인 위협에 대응하여 일방적인 사대의 예가 요구되었고, 여기에는 필수적으로 많은 헌상물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을 조빙사대(朝聘事大)라고 하는데 조빙이란 조정에 나아가 문안을 드리는 예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조빙사대의 관계는 이후 중국과 그 주변국 간의 동아시아 국제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이라는 독특한 외교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거은 중국과 주변국간의 외교 규범으로써, 정치적 군사적 요인에 의해 조성되는 긴장관계를 완화하고 억제하는 외교수단으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강대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민족에 대한 기미정책(羈靡政策 : 기미란 말의 굴레와 소의 고삐를 가리키는 말로 견제한다는 의미를 가진다)에 의하여 주변국과의 교린을 도모하였고, 주변국은 자국의 안정을 위하여 조공과 책봉의 외교행위를 호국책으로 택한 것입이다. 대외정책으로서의 기미의 뜻은 羈靡不絶而已(기미부절이이; 기미란 끊지 않을 뿐이다)라는 말로 표현된다. 즉 不絶(사신의 왕래에 의한 외교관계의 유지)할 뿐으로 而已, 즉 더 이상의 적극적인 조치(군사적 행위)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빙사대와 기미정책의 원리는 한대 이후 우리나라 뿐이 아니라 중국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외교규범으로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나 일본은 물론 만주, 몽고, 서장, 안남 및 중앙아시아 등지의 주변국이 모두 그러했고 19세기 초 영국이나 프랑스 등의 유럽국가들이 중국과의 통상을 요구할때에도 이 형식이 요구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볼때 전통 한국사회의 사대는 중국의 기미정책에 대응하는 상호 공존의 교린정책이며, 자국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호국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취한 역대의 사대는 대륙과의 관계를 평화공존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를 갖는 지극히 현실적
이며 상황주의적인 대외인식임과 아울러 정책이었던 것입니다.
3. 사대와 교린은 중국과의 관계만이 아니다.
위에서 사대와 교린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위의 설명은 중국과 우리의 관계만이 설명되었으므로 아직도 체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중국을 제외한 여타의 나라들간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강대국인 중국에 대해서는 그들의 기미 정책에 대응하여 조빙사대의 외교정책을 사용하였고, 중국을 제외한 우리의 주변국과는 교린의 정책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교린은 중국이 주변국에 하는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적례(敵禮: 서로 필적할 만한 상대에 대한 외교관계의 설정)적 교린을 사용합니다. 일본(倭)과 琉球에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설정되는 것은 조선 태종 4년입니다. 그것이 늦은 것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내부적 문제에서 파생되는 것입니다. 잘 알고 계시다시피 일본의 막부통치는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않아 외교대상이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전의 일본과의 교린정책은 중구과 조선이라는 단선적인 관계가 아닌 조선왕:足利將軍, 조선왕:諸大名, 조선왕:中小領主처럼 다원적인 관계로 설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우리의 입장에서 볼때는 일본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혼란이 어느정도 수습되는 과정에서 일본을 국가로 인정하고 동아시아의 예적 외교질서에 편입하고자 했던것이 태종 4년 무렵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고려말 왜구의 창궐이 심하였던 관계로 어려움을 겪은바 있었으므로, 일본의 통일과정에 대하여 조속한 국가의 인정으로 왜구를 제어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본과의 교린에 관해서 다음의 사료를 봅니다.
너희(왜) 왕이 교린을 돈독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일본의 사신)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게 하였으니 내가(태종) 심히 기뻐하노라
({태종실록} 14년 7월 임오조)
내가(세종)..... 교린의 예를 중히 여겨, 특별히 사신을 (왜에) 보내어 서로 사귀며 서로간의 믿음과 의리를 알리고자 하노라.
({세종실록} 28년 9월 갑술조)
교린의 도는 (우리와 왜가) 왕래하지 않으면 안되는 교빙의 예절일 것이다. ({성종실록} 14년 9월 을묘)
이러한 것들로 볼때 교린은 예를 가지고 신의를 나타내는 것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우선하거나 상대국에 위협을 주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과의 적례적 교린정책이 곧 대등한 관계는 아닙니다. 한때 일본의 학자들은 대등한 관계라고 주장하였지만, 지금의 일본 학자들 마저도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상하관계로서 일본이 여진이나 유구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을 정도 였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유구나 여진과의 관계는 절대적인 상하관계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사대의 대상은 조선이고, 조선은 이에대해서 기미의 정책을 취합니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가 이들과 차이가 있는것은 그 지향점은 동등한 관계에서의 적례관계였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일본의 내부사정에 따라 잦은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4. 사대주의가 아니라 사대교린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부 한사동의 회원들께서 알고 있는 사대주의는 사대교린을 잘못 알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대주의는 자기 비하의 표현인 것입니다. 일본에서 "나는 한국인입니다"라고 하는것이 아니고 "나는 죠센징입니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나는 쪽발이입니다."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대주의는 사대교린이라고 하여야하며, 그것은 외교정책의 한가지로 19세기 이전의 동아시아 전체에 해당하는 외교규범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중국에 대해서는 조빙사대를 통한 국가적 안녕을 도모하고, 주변국인 일본이나 여진 유구 등에게는 기미정책(회유책)을 통하여 또한 마찰을 최소화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국력에 따른 상하관계의 설정은 지금의 입장에서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2000년 가까운 기간의 동아시아의 외교질서입니다. 이러한 사대와 교린을 통하여 적은 군대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부담이 적은 조용조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국가를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왕조들을 보면 그 지속성이 중국 등의 나라보다 2배 이상 깁니다. 조선도500년이 넘는 지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은 군대를 소유하고, 국가의 지출을 줄임으로써 국민의 부담을 가볍게 하는 현실적인 정치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의 물결속에서는 무참히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의 멸망도 이렇게 형성된 국제질서를 거부한 측면이 있습니다.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고구려의 천하관(華夷觀)에는 중국이 아니라, 고구려를 세계의 중심(華)으로 보고 중국을 오랑캐(夷)로 보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내부적인 모순 구조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수, 당 등의 국가와의 잦은 마찰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신라의 경우는 이러한 세계 질서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고려와 조선은 이러한 역사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만약에 이러했다면 어떠했을까"하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역사에서는 추호도 허용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인과적 설명입니다. 어떤한 사건에 대해서 그 요인과 결과를 살피는 것입니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형태의 것은 역사가 아니라 문학입니다. 카아(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표현대로 그것은 Might have been School에 불과 합니다.
역사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지 공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