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흥적인 여행 떠나기....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
어디로 : 삼척 환선굴, 동해 촛대바위, 강릉 오죽헌 경포대, 오대산 방아다리약수터 월정사
언 제 : 2003년 5월 4일 ~ 5월 5일
누구와 :아이들과 함께
--------------------------------------------------------------------------------------
저녁을 먹고 온가족이 둘러 앉아 연휴동안에 지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큰아이는 어린이날도 끼어있으니 집에서 실컷 컴퓨터게임을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작은아이는 놀이공원에 가자고 졸른다
아이들을 설득을하여 무작정 여행을 떠나본다
목적지는 강원도 삼척의 환선굴. 죽서루... / 동해의 촛대바위/
강릉의 오죽헌.경포대 .../ 오대산 방아다리약수터. 월정사 ...
저녁 11시에 아이들을 태우고 여행을 떠난다...
경부고속도로을 지나 중부고속도로을 경유하여 호법인터체인지에서
다시 영동고속도로로 들어선다
영동고속도로를 들어서자마자 차가 밀리기 시작한다
시간은 12시 20분경....
여주까지 거북이 걸음으로 간다
길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도로변에 차를 세워놓고 있었다
차가 밀리니까 쉬었다 가자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긴 터널인 진부 제1 제2 ....제7터널을 통과하고
드디어 대관령에 도착
전에는 대관령휴게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고속도로가 새로
생겨서 강릉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하였다
시간은 2시 30분경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다시 동해고속도로를 차는 달린다
말이 동해고속도로지 일반 국도보다도 못한도로인것 같다
동해고속도로을 가다가 정동진 평면교차로에서 차를
돌린다
드디어 정동진도착 시간은 4시
오늘도 해돋이의 기대를 가지고 정동진에서 일출을
구경하리라 마음을 먹어본다
아직 해뜰려면 1시간 20분 남아있다
오늘은 정동진에서 5시 25분에 해뜬다고 하였다
1시간가량 차에서 눈을 붙여본다
잠이오지 않는다
밖에는 아직도 암흑의 세계이다
벌써 많은 차들이 와 있었다
드디어 시계가 5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정동진 해수욕장에서 해돋이을 볼려면 정동진역를
지나가야한다 입장료를내고 정동진역을 지나 해수욕장으로
들어갔다
하늘은 구름이 조금끼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왠 하늘의 조화인가
5시 30분이 되어도 해는 떠오르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오늘의 일출은 포기해야 할것 같았다
작년가을에는 낙산 의상대에서 멋진 해돋이를 보았었는데
하면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차에 올라 탔다
아침을 식당에서 먹고 차를 몰고 모래시계공원으로 갔다
이 모래시계는 1년간 모래가 떨어지도록
과학적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하얀 구름다리와 모래시계, 소
나무가 어루져 정동진의 새로운 명소로 각광 받고 있다.
정동진 모래시계는 허리가 잘록한 호리방벽 모양의 유리그릇이
아니고 둥근모양인 것은 시간의 무한성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또 둥근것은 동해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상징하고, 평행선의
기차레일은 영원한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지름 8.06m, 폭3.02m, 무게 40톤으로 세계최고의 모래시계며,
시계 속에 있는 모래가 모두 아래로 떨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꼭1년이 걸린다고 하였다.
다음 해1월1일 0식에 반바퀴 돌려 위 아래를 바꿔 새롭게
시작하게 한다.
흘러내리는 모래와 쌓이는 모래는 미래와 과거의 단절성이
아닌 영속성을 갖는 시간임을 알린다.
또 주위에 있는 12지상은 하루의 시간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모래시계공원에서 남쪽을 보면 커다란 배를 볼 수 있다
이름하여 썬클루즈.....
배모양으로 호텔을 지어 놓은 것이다
썬클루즈에 도착하니 그곳안에는 참소리에디슨박물관이 있었다
입장료가 만만치 않았다
그곳에는 에디슨이 만든 측음기..전화기..등이 많이있었다
박물관을 나와서 썬클루즈전망대(옥상)에 올라갔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동해안과 정동진은 한폭의 그림과 같았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최고의 걸작품인것 같았다
썬클루즈에서 나와 왼쪽으로 난 길을 달려간다
그곳은 이름하여 헌화로....
푸른바다위를 차가 달리는 느낌을 주었다
신라시대 충신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여 강릉을 가던 중
그의 부인 수로부인에게 소를 끌고 가던 한 늙은이가 절벽 위의
꽃을 꺾어 바치면서 불렀다는 헌화가. 그 헌화가가 불려진 장소로
추정되어 이름붙여진 곳이, 바로 정동진을 지나 심곡항에서
금진항을 잇는 해안로 '헌화로' 다.
절경을 이루는 기암괴벽이 사이사이 솟아 있는 푸른 바다 위를
차로 달리는 기분. 그것이 바로 헌화로를 달리는 기분일 것이다.
헌화로를 달리면서 활짝 열려진 차창 사이에 보여지는 가드라인
바로 아래에 펼쳐진 시리도록 짙푸른 동해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더위나 스트레스도 싹 달아난다
환상적인 해안도로를 달리는 기분을 만끽하면서 잠시 상념에
잠겨본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을진댄
제 꽃 꺾어 바치오리다.........헌화가
다음으로 이번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7번 국도를 타고 환선굴로 향했다
환선굴에 가는 길목에는 너와집과 통방아를 재현에 놓았었다
신리 너와집을 지나 2㎞ 가량 더 가면 문의골에 이른다.
이곳 산비탈에도 주인잃은 지 수년쯤 지난 너와집 한 채가 남아 있다.
마을 앞 개울가에도 번듯한 통방아가 하나 있는데,
이것도 역시 물길은 끊기고 방아소리도 멈춘 지가 이미 오래됐다.
이처럼 사람의 체취와 온기가 사그라진 채 먼지만 잔뜩 뒤집어 쓴
'유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씁쓸하고도 허전한 마음이 앞선다.
물과 시간이 빚은 별천지 환선굴...
1인당 입장료가 무려 4,300원이다. 4인 가족이 오면 주차료 1,000원(소형)까지
합쳐서 기본이 거의 2만 원이다.
국내 관광지 어디에서든 입장료에 문화재 관람료까지 꼬박꼬박 내는데 이력이
났지만 너무 비싼 것 같았다.
국립이나 도립공원도 아닌 시립공원에서 말이다.
매표소에 선 다른 이들의 표정을 보니 마찬가지 생각인가보다.
환선굴(幻仙窟·강원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 여행은 이렇게 성급한 본전
생각으로 시작됐다.
6,2km 동양최대 석회암 동굴
폭포...기묘한 유석,석순...
공포는 어느새 탄성으로
환선굴 입구는 백두대간의 험준한 봉우리 덕항산의 해발 약 4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매표소에서 입구까지 1,370m. 30분 거리이다. 완만하던 언덕이 급경사를
이루고 마지막 절벽에는 철계단이 놓여있다.
덕항산은 돌덩어리 산. 절묘한 바위 봉우리가
눈에 들어오는 이 길을 오르면서 조금씩 기분이 나아진다.
길 옆으로 통방아(중요민속자료 222호)를 재현해 놓았었다는 터만 남아
있었다. 지난여름 수해로 통방아가 다 쓸려 갔다고 적혀 있었다
천연기념물 제178호인 환선굴은 1997년 10월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석회암 동굴이다. 총 연장이 6.2㎞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중 공개되는 부분은 1.6㎞ 정도이다. 5억 3,000만년 전부터 형성됐지만
여전히 노화와 회춘이 반복되는 살아있는 굴이다. 성장기부터 쇄락기까지
동굴의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입구 광장에 섰다. 잠시 심호흡을 하는 공간. 올라오느라 흘렸던 땀도 닦고
변화하는 온도에 대한 대비도 한다. 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원한 바람에
옷과 몸에 흘렀던 땀이 김처럼 하얗게 피어오른다. 환선굴 내부의 온도는
사시사철 크게 변하지 않는다. 섭씨 8도와 14도 사이만 오르내린다.
한여름에는 바깥과의 온도 차가 15도 이상 난다. 온도에 민감한 사람은
반드시 여벌의 옷을 준비해야 한다.
내부로 들어섰다. 모든 길은 쇠로 만든 다리와 난간으로 되어있다.
여행객들은 신발에 흙 한 점 묻히지 않고 굴을 샅샅이 훑을 수 있다.
대신 난간 바깥으로는 나가지 못한다. 안전과 보존을 함께 생각한 방식이다.
쇠로 만든 길은 전람회에서 그림을 감상하듯이 이쪽 저쪽 벽에 위치한
동굴의 예술품을 구경할 수 있게 오르락 내리락 하며 이어져 있다.
대충 보면 1시간, 메모라도 하려면 2시간은 족히 걸린다.
말이 굴이지 땅 속에 만들어진 또 다른 세상이다. 일단 거대한 규모에
입이 먼저 벌어진다. 가장 먼저 만나는 작품은 제1폭포. 항아리를
뉘어놓은 듯 커다란 돌구멍에서 물이 쏟아져 나온다.
쏟아진 물은 아담한 소(沼)를 만들었다. 소에 녹색 황색 수중조명을
밝혀 놓았다. 신비롭다. 그러나 감탄은 아직 이르다. 연이어 오련폭포,
흑백유석, 꿈의 궁전, 도깨비 방망이, 대머리형 석순, 악마의 발톱 등
석회암과 물과 세월이 빚어놓은 세상이 계속 모습을 나타낸다.
모든 작품의 이름은 지역 주민들이 공모를 통해 붙여졌다. 가까운 것은
손에 닿는 위치에 있지만 치기를 부리는 것은 금물. 곳곳에서 감시용
카메라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등골이 오싹한 코스도 있다. 지옥교와 참회의 다리이다. 무심코 다리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중간에서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밧줄로 연결한
출렁다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중간 정도에 서면 흔들린다. 잠시
아래를 내려보다가 갑자기 발걸음이 빨라진다. 밑으로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다.
한 바퀴 돌아 다시 입구에 섰다. 바깥의 더운 날씨에 안경에 하얗게
김이 서린다. 안경을 닦으며 묘한 상념에 젖는다. 분명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는데 기분은 서글프다. 석순이나 종유석의 1㎝도 못 되는 세월을
사는 인간의 존재가 너무 초라해서일까.
환선굴을 보고나니 시간이 벌써 2시를 가르켰다
다음은 죽서루에 가기로 하였다
죽서루를 가려면 삼척시내로 다시 들어와야 한다
죽서루 가는 길 중간에서(부일막국수) 점심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부일막국수와 수육을 먹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식당에 들어가보니 막국수을 먹으려고 줄을 서있는 것이 아닌가
한 10분정도 기다리니 자리가 하나 났다
자리에 앉아서 또다시 20분정도을 기다리니 수육이 나왔다
배고파서일까 정말로 맛이 있었다
또다시 수육을 다 먹고 10분정도을 기다리니 막국수가 나왔다
남양주 양수리의 막국수촌인 천서리 막국수가 생각이 났다
양수리 막국수도 맛이 있었는데 이곳도 맛이 있었다
기다린 보람을 느끼게 하였다
식당에서 나와서 삼척시내에 있는 죽서루에 갔다
죽서루는 삼척 시내의 오십천변에 위치해 있다
삼척의 대표적인 문화재이자 관동팔경 중 제1경.
건물의 규모와 역사도 관동팔경 가운데 으뜸이다.
고려 충렬왕 때에 두타산에 은거하던 이승휴가 창건했다고 한다.
보물 제213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잠시 죽서루에 올라 앉아서 옛날 선현들을 생각해 본다
죽서루에서 바라보는 오십천은 정말로 멋있었다
죽서루에 누워서 낮잠을 한번자면 모든 스트레스가 풀릴것 같았다
다음은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한참 가면 몬주익의 영웅 올림픽을
제패한 황영조올림픽공원이 있다
올림픽공원 가기전에 봄날은 간다 촬영지가 있어서 그곳으로 차을
몰아본다
촬영지는 대나무숲인데 멀리서 보고 차를 돌렸다
올림픽공원에는 올림픽을 제패한 황영조동상이 있었다
올림픽기념관도 있었다
삼척시내로 들어오다보면 길가 약 100m 마을로 들어간 곳에
강원도 기념물 제71호인 고려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제34대)의
능묘가 있다.
공양왕은 왕조의 몰락과 함께 폐위되어
왕자 (석)奭, (우)瑀와 함께 원주와 간성을 거쳐
삼척에서 조선조 태조 3년(1394)에 교살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공양왕릉이 두 군데 있는데
이곳 宮村里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남아있다.
경기도에 있는 공양왕릉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곳 삼척의 공양왕릉은 민간에 오랫동안 구전되어 왔다.
현재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된 공양왕릉은 가장 규모가 크고
그 옆은 왕자, 나머지는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무덤이라고 전한다
이 곳 왕릉은 조선조 헌종 3년(1837)에 三陟府使 李奎憲이
개축을 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다.
<태조실록>과 <양촌집> 등에는 조선조 태조 4년(1395)에 고려왕조의
왕씨를 위해 삼척, 강화, 거제에서 水陸祭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이곳의 지명유래에 따르면 궁촌은 임금이 유배된 속이라 하고,
마을 뒷길 고돌산에 공양왕이 살해되었다는 살해재가 있다.
또한 공양왕의 맏아들 왕석이 살았다는 궁터, 말을 매던 마리방이라는
지명도 전한다.
궁촌리에서는 3년마다 해신제를 지내기전에 반드시 왕릉에 와서
제사를 추모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시내로 들어오면 동해척주비가 있다
척주동해비는 삼척시 정라동 육향산(六香山) 산정에 있는
높이 175cm, 넓이 76cm, 두께 23cm의 큰 비석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된 이 비들은
조선 현종2년(1661)에 삼척부사 허목이 세운 것이다.
당시 삼척은 해파가 심하여 조수가 읍내까지 올라오고
홍수때는 오십천이 범람하여 주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은
신비한 뜻이 담긴 동해송을 지어 독창적인 고전자체로
써서 정라진 앞의 만리도에 척주동해비를 세우니,
바다가 조용해 졌다고 한다.
그후 비가 파손되어 조수가 다시 일자 숙종36년(1710)
이를 모사하여 현재의 정상동 육향산에 세워 조수를 막았다한다.
문장이 신비하여 퇴조비라 하는 이 비는
전서체에서 동방제일의 필치라 일컬어 지는 허목의 기묘한
서체로도 유명하다. 척주동해비와 조금 떨어져 있는
대한평수토찬비는 척주동해비와 같이 세운 것으로
비문은 중국 형산의 우제가 썼다는 전자비에서 48자를 선택하여
목판에 새기어 군청에 보관 하던 것을 고종 광무 8년(1904)에
칙사 강흥대와 삼척군수 정운석등이 석각하여 세운 것이다.
척주동해비에서 삼척항을 지나면 새천년해안도로가 나온다
후진해수욕장과 정라진항(삼척항) 사이의 아름다운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길이 4.2㎞의 해안도로.
지난 2000년 1월 1일에 개통되었다.
도로변에는 새천년의 시작을 기념하는 '소망의 탑'이 세워져 있다
소망의 탑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멋있었다
역시 이곳에 오길 잘했구나 하고 생각해 본다
삼척항근처에는 곰치국이 유명하다
그런데 식당마다 곰치가 다 떨어져서 곰치국을 못 끓인다고
하였다 곰치국을 먹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삼척항옆 회집에서 활어회와 소주을 사가지고
동해시내의 모텔방으로 왔다
방에서 아이들은 라면을 끓여주고 집사람과 둘이서 회를 안주로
소주2병을 금새 비웠다
어제 잠을 못자서 그런지 졸음이 살살왔다
다음날 일어나니 5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오늘도 구름이 껴서 해돋이는 못 볼것 같았다
아침 일찍 촛대바위에 가서 해돋이을 볼려고 했는데...
다시 잠을 자고 7시에 일어났다
아침을 대충 모텔에서 해먹고 해돋이는 못보아도
촛대바위는 보아야 할것 같아서 추암해수욕장에 있는
촛대바위에 갔다
추암해수욕장은 길이 150m 폭 30-50 M 내외의
백사장으로 고운 모래와 얕은 수심이 있는 아담한 해수욕장이며,
해수욕장 북쪽으로 촛대바위와 해암정이 있어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촛대바위는 동해 제일의 해돋이 명소로 유명하다.
해수욕장, 기암괴석, 정자 등의 어우러진 풍광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애국가의 배경화면으로 나오기도 했으며
한국관광공사에서 전국 가볼 만한 겨울철 관광지로 선정하기도 했던
추암의 촛대 바위는 동해시와 삼척시 경계지점의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
추암마을 동쪽은 촛대바위 북쪽에는지방유형 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된
해암정(海岩亭) 과 바닷가에는 금강산의 해금강에 버금가는
추암 해금강이 있고, 마을 앞 해변에는 천연 해수욕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추암 촛대바위 파도소리를 가장 아름다운 파도소리 선정했다고 한다
촛대바위 앞에서 여러장의 사진을 찍고 다시 동해시를 지나
망상해수욕장 근처에는 약천마을에 갔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1629~1711) 선생은 조선 후기 인조 .
숙종 연간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 또는 미재(美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라 한다.
약천 선생은 개국 공신 남재의 후손이며, 1656년 문과에 올라
도승지, 대제학,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사색당쟁 소용돌이 속에서 소론의 영수가 된 그는 1689년 2월
기사환국의 혼란을 피해 강릉 지역을 회유 하시다가 이 곳
망상동 심곡(약천) 마을에 머물었으며,1690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당대 학문과 정계의 거봉이던 그는 이곳에서 이 년 동안
전원의 목가적인 정서를 수없이 시조로 읊었다.
오늘날까지 널리 알려져 전해지고 있는 '<노고지리 우지짖는 >
사래긴밭(長田)'과 그의 호를 딴 약천샘은 예와 같이 남아있으며,
그의 사후 심곡(深谷)에는 약천사(祠)를 세워 제사 지냈다고 한다.
약천사는 후일 노곡서원으로 이어졌으나 1855년 강릉 신석동으로
이전하여 신석서원이라 하였다가 고종 무진년 나라에서 서원
철페령으로 해체되었으며 영정은 그 본댁으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약천선생이 이곳에 오게 된 배경
남구만 선생이 이곳 망상동 심곡에 오게 된 것은 1689년 4월
대사헌 목창명과 장령 이원령은 약천 남구만이 역적 홍치상을 옹호하였다는
명목으로 중도부처(中道付處)시킬 것을 상소하였고
숙종이 이를 허락하여 이뤄졌다.
약천 선생은 강릉에 와 있는 망상의 경치에 매혹되어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
완상하고, 심곡의 샘이 약천이라는 말을 듣고 약천 샘물 맛을 보고 자신의
아호와 일치하여 즐거워 하여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고도 하며, 61세인 환갑 때
이 곳 망상에 내려와 있었던 기간은 약 1년 남짓이었다고 한다.
김종호의 (심곡사적기)
약천이란 샘물은 약천 선생이 이곳에 오기전부터 있었던 것이라고는 하나
오늘날 약천과 남구만 선생의 호와 같은 이곳의 약천 샘은 그 역사적 의미로서
그 가치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아니 잊엇느냐....
재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이 시조는 약천 남구만이 강원도 동해시 망상동 심곡(약천)마을에
머물렀을 당시 지은 시조이다.
약천 시조비는 현재 동해 고속도로 하행선 동해(망상)휴게소에 세워져 있다.
동해의 태양과 햇살. 쟁기 등을 형상화하여 조각작품을 만들고 여기에
시조작품과 약천의 약력을 새겨 넣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첫째장은 약천 남구만 선생이 살았던 망상의 약천집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동해바다를 가르킨다.
동창은 동쪽으로 낸 창문이라는 뜻으로 동쪽에 뜨는 해 즉 숙종 임금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밝았느냐’로 쓴 것은 임금의 성총이 흐리지
않았느냐는 뜻도 암시적으로 담고 있다.
‘노고지리’는 종달새 또는 운작(雲雀)이라 하는 데, 많은 정책이나
조정의 신하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모해한 사람들 뿐 아니라,
노론. 소론으로 갈려 권력다툼을 하던 당시의 조정대신들의 행동을
암시한다고 보여진다. 노고지리는 한자로 ‘고천자(告天子)’
‘규천자(叫天子)라는 데 이 뜻은 ‘임금에게 고해 바친다’ 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우지진다’는 ‘울다’와 ‘짓다’의 복합동사로서 ‘새가 울음소리를
한참씩 계속하여 우는 것’을 말한다고 하며, 마치 새들이 짹짹거리며
야단스럽게 우는 모습에 중신들 모습을 겹치게 표현 한 것으로 보여진다
(쇼칠 아히난 상기 아니 니럿느냐)
쇼칠 아히난' 는 소를 먹이고 기르는 목동을 말한다. 여기서 '소'는
백성을 뜻하며, '아히난' 은 목민관(牧民官: 지방의 수령이나 관원)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중앙의 정권과 연계되어 눈치를 보던 것과 달리
백성을 위해 바른 정치를 펴는 정직한 관리를 말한다.
'쇼'는 소, '칠'은 '치다' 동사로 지금은 짐승에게만 사용되나
옛 문헌에서는 사람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썼다. <삼강행실>에
"노모를 치다"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히'는 백성을 다스리는 관원을 뜻한 것으로 생각되고, `'여태'는
여내.상기.아직.지금.지금껏 등을 말하는 데 '여히'에서 온말이다.
'니럿느냐' '아직 일어나지 않았느냐?'는 훈계조로, 난세에 복지부동하고
있는 관료들의 자세를 탓한 것으로 보인다.
(재너머 사래 긴 밧츨 언제 갈려 하느니)
'재너머' 는 발락재를 말하며, 이 재를 넘으면 사래 긴 밭이 나오는데,
그곳은 괴란과 만우 사이의 장밭이다.
여기서 '재'는 시련이나 방해, 음모를 말하는 것이며, 숨차게 발락거리면서
넘어가는 재난, 고난의 고개를 넘어서 희망을 가져다 주는 곳이
'사래긴 밧츨'이다. 다른 뜻으로 수많은 국사를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언제 갈려고 하느냐'는 경세치국(經世治國)에 대한 염려와 경계가
포함된 말일 것이다.
'갈려'는 '갈려고'의 준말로 '하느니'는 의문 종지로
'하느냐(니야)'의 '아'가 탈락된 형태다.
장밭(사래긴 밭)
장밭은 동해시 만우리 초입에 이르는 넓고 큰 밭이다.
장밭 또는 장전이라고도 하고 약천 시조에 나오는 사래긴 밭은 이곳을 말한다
다음으로 동해고속도로를 지나서 강릉 오죽헌에 갔다
오죽헌은 조선시대의 대학자 율곡 이이와 관련하여 유명해진 강릉 지역
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오죽헌은 조선 초기의 건축물로, 건축사적인 면에서 중요성을 인정받아
1963년 보물 제 165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몽룡실(夢龍室)에서 율곡 이
이(李珥)가 태어났다고 한다.
경내에는 오죽헌을 비롯하여 문성사(文成 祠), 사랑채, 어제각(御製閣),
율곡기념관, 강릉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문성사는 율곡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며, 어제각은 율곡의 저서 <<격몽
요결>>과 율곡이 유년기에 사용 하였던 벼루(용연)를 보관하기 위한 유
품소장각이다. 한편 율곡기념관은 율곡의 저서와 신사임당의 유작을 비
롯하여 매창·옥산 이우 등, 율곡 일가의 유품 전시관이다.
한편 강릉시는 1961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10월 25, 26일 율곡을 추모하
는 율곡 제전을 봉행하고 있다.
기념품가계에서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한권을 사서 큰아이에게 주었다
시간이 벌써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는 강릉하면 유명한 초당순두부마을에가서 순두부요리를 먹기로 하였다
초당순두부마을 안에는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의 생가가 있었다
허균의 생가 근처의 공원에는 허씨일가의 여러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허균의 시비를 비롯하여 허난설헌시비 허봉시비등 여러개의 시비가
한곳에 모여있지 않고 초당마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허균과 허난설헌은 쌍매당 이첨(조선초 대학자이며, 호는 쌍매당, 시호 문안
본관 신평, 정헌대부, 지의정부사, 예조.이조판서, 대사성, 대사헌,
대제학을역임하고 삼국사략과 저생전의 작가,쌍매당협장집이 전함)의 후손이며,
삼당시인(이달/최경창/백광훈)이고 서얼출신인 스승인 손곡 이달의 영향을받아
한시를 잘썼다고 한다
홍길동전(길동이 서자로 태어남)도 손곡 이달의 영향을 받아 지은 소설이라고
한다교산 허균의 저서중 [손곡산인전]은 손곡이달의 한시를 모은책이다
초당은 광해군때 초당 허엽이 당파싸움에 휘말려 화를 입어 산수가 수려하고
풍경이 좋은 초당동에 기거 하였다. 여기서 허난설헌과 허균이 태어났으며,
마을이 번성하게 되어 허엽의 호를 붙여 '초당동'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하고,
조선 선조때 공조참의를 지낸 유동양이 초당을 지어 후진들을 가르쳤으므로
초당이라 칭하였다고도 한다.
초당순두부는 '홍길동전'을 지으신 허균의 부친인 초당 허엽이 집앞에 있는
샘물 맛이 좋아 이 물로 콩을 불리고(가공하고) 바닷불로 간을 ??추어 두부를
만들었다고 전하여 지며 두부의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자 이때부터 초당두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샘터에는 '초당두부'의 제조법이 전래되어 오다가 약100여년 전부터
가정에서 초당두부를 제조, 판매하는 가구가 모이기 시작하여
고유의 구수하고 부드러운 맛을 재현, 3~4대째 가업으로 맥을 잇고 있는 곳이
현재의 초당순두부마을이다.
초당순두부에는 식물성 단백질, 식물성 지방(불포화 지방)이 있어 성인병,
동백경화, 심장병이 예방되며, 뇌기능 및 집중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
초당순두부전골을 시켜서 먹었는데 정말 색다른 맛이 있었다
다시 경포해수욕장과 경포호수로 왔다
오늘날 동해안에서 가장 유명한 해수욕장의 이름을 낳게 한 경포대는
사람들이 주로 해안으로 몰리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한적한 곳으로 남아 있다.
강릉에서 북동쪽으로 6km 가면 해안모래와 만나는 곳에 민물과 바닷
물이 섞이는 경포호가 있고 이 호반 서쪽 언덕 위에 유명한 경포대가
있다. 경포호는 옛부터 시인묵객들이 예찬한 곳으로 호수가 거울처럼 맑
다고 하여 이름지어졌는데 일명 경호(鏡湖), 군자호(君子湖) 라고
부른다. 정철(鄭徹)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소개되는 이 호수
는 바다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아침해, 붉게 타오르는 석양, 달
밤의 호수경치,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백사청송(白沙靑松)과
해당화가 어울려 연출하는 경치가 절경이다. 옛날에는 호수 둘레가
20리(里)에 달했으나 오늘날에는 상류 하천으로 토사가 흘러들면서
호수면적이 줄어들어 10리에 지나지 않는다. 늦가을이 되면 북쪽
에서 철새들이 찾아와 월동을 한다. 호수 주위에는 과거 12개의 정
자가 있었으나 현재에는 경포대(鏡浦臺), 금란정(金蘭亭), 경호정(
鏡湖亭), 호해정(湖海亭), 석란정(石蘭亭), 창랑정(滄浪亭), 취영정
(聚瀛亭), 상영정(觴詠亭), 방해정(放海亭), 해운정(海雲亭), 월파
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경포대는 고려 충숙왕 13년(1326년)에 강원도의 한 관리였던 박숙정이
당시의 인월사 옛터에 세웠던 것을 조선 중종 3년(1508년) 강릉 부사
한급이 지금의 자리에 옮겼고, 여러 차례의 중수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경포대 내부에는 숙종의 어제시와 율곡이 10세에 지었다는 경포대부
를 비롯하여 조하망의 상량문 등 수많은 명사와 시인묵객의 글이
게시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호수를 바라보는 쪽 누대의 단을 한 단 더 높여 놓았
다. 이는 방문객들이 주변의 경치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거울처럼 맑다는 뜻에서 이름붙여진 경포에는 달이 다섯 개이다.
하늘에 뜬 달, 바다에 비친 달,호수에 그려진 달, 술잔에 어린 달,
그리고 그대의 눈동자에 떠있는 그리운 달 하나까지....
경포호에 얽혀있는 옛이야기로 이 호수는 원래 논과 밭이었으며
그곳엔 황부자가 살고 있었다. 시주를 청한 스님에게 황부자는 불거진
심술로 쌀 대신 똥을 퍼주며 내쫓자 갑자기 물길이 솟아 오르며 논과
밭을 호수로 만들고 곳간의 곡식이 모두 조개로 변해 버렸다는 것이다.
경포호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으로 호수 가운데 위치한 우
암 송시열이 쓴 "조암"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누각이 있고,
호수 주위에는 경포대, 해운정, 방해정, 금란정 등 열 두 개나 되는
정자가 서 있다.
그러나 호수 가운데에 있는 곳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경포호의 경관을 보기위해 지어진 누각의 수에서 그 은근한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4km남짓되는 경포호 둘레에는 도로와 보도가 나있어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기에 안성맞춤일뿐 아니라,새롭게 조성된 조각공원으로 인해
사진찍기에도 손색이 없다.
강릉시에서는 앞으로도 경포호를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주변에
"야생화 군락지", "생태공원", "인공식물섬", "뗏목둥지"등을 조성해 나갈
예정이라고 하였다.
다음에 꼭 다시 와서 시간을 넉넉히 가지고 자세히 보았으면 좋겠다
다음으로 선교장에 갔다
이 선교장은 18세기 초에 효령대군의 10대손인 이내번이 이주해 살기
시작하면서 몇 번의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안채인 동별당과 사랑채인 열화당 등과 연지(蓮池) 가의 정자인
활래정(活來亭)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열화당에는 용비어천가, 고려사 등의 고서와 여러 민속자료 등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의 선교장은 경포호와 좀 떨어져 있는데,
예전에는 선교장이 경포호에 거의 붙어 있었다고 한다.
해서 선교장으로 들고나려면 배를 타고 경포호를 건너다녔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선교장(船橋莊)이란 이름을 얻었고, 이 이름을 우리말로 풀어
'배다리'라 부르기도 했는데, 아직도 선교장 부근에서 '배다리'라는
지명이 들어간 간판을 쉽게 볼 수 있다.
선교장 입구에는 민속자료전시관이 있어 전통복식의 변화 과정을
시대별로 전시해 놓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오대산의 방아다리 약수와 월정사 8각 9층석탑를 보기로
하였기 때문에 선교장을 빨리 한바퀴 돌고 차에 올라 탔다
영동고속도로를타고 대관령을 지나면 바로 진부터널로 유명한 진부가있다
진부 IC을 빠져나와 10여km을 가면 방아다리약수터가 나온다
신비의 약수 : 방아다리약수 -오대산국립공원내 위치한 방아다리약수는
조선의 숙종조 이래 알려진 역사 깊은 약수터이다. 이곳은 1910년경 경남
이모씨가 현몽으로 점지받아 발견한 곳으로 이곳의 지형세를 따라
방아다리약수라 불리우며 북한의 삼방약수터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약수로서 그 진가가 인정된 곳으로 전국의 약수애호가의 발길이끊이지
않는 곳이다.방아다리약수는 탄산,철분등 30여종의 무기질이 들어있는데,
특히 많이 함유된 철분은 위장병, 빈혈증, 신경통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철분등 다양한 성분으로 인해 위장병등 각종질병에 효험이 있어
북한의 삼방약수터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약수로 알려져 있다.
약수물을 직접 먹어보니 천연 사이다 같이 혀을 쏘는 느낌을 주었다
탄산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것 같았다
약수물을 항아리에서 퍼서 먹게 하여서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약수터에서 물통을 사서 약수물을 가득 받아 왔다
또한 약수터 주변 250만평에 낙엽송, 전나무, 소나무, 주목, 잣나무,
박달나무 등 70여종의 나무들이 빽빽히 우거져 있어 산림욕이나
데이트코스로 인기가 있으며 주변에 월정사, 상원사 등이 산재해 있어
중,고등학생들의 단체여행 장소로 점차 각광을 받고 있다.
<겨울연가, 유리구두 촬영지 : 약수터 진입로(연인들의 숲)>
매표소로부터 약수터까지 200m구간은 길게 쭉쭉뻗은 낙엽송이
진입로 양편으로 늘어져 있어 한폭의 그림같은 광경이 연출되는
곳으로 KBS인기드라마 '겨울연가' 와 SBS '유리구두'에서 방영되기도
하였던 곳이다.
'겨울연가'촬영장소로 알려지면서 주말이면 약수를 마시러 오는
사람들외에 드라마에서 주인공(유진과 준상)이 걸었던 진입로
(연인들의 숲)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오는 단체관광객이나
데이트를 즐기려는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 매표소에서 약수터까지
비포장길로 200M정도이며 여름철이면 진입로 아래로 작은 개천(개울)이
흐르고 있어 여름철 산림욕을 겸한 피서지로도 손색이 없다.
다음으로 월정사에 갔다
월정사는 오대산 동쪽 계곡의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은 조계종 제4
교구 본사이며, 60개의 절과 8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자장율사가 오대산의 비로봉 밑에 적멸
보궁이라는 사당을 짓고,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이 절을 세웠다
한다. 현재 이 절에는 권선문과 높이 15m의 8각 9층석탑, 높이
1.8m의 석조 보살좌상, 적멸보궁 등 많은 문화재가 보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1Km에 달하는 500년 수령의 전나무 숲과 함께 오
대산을 상징하는 절이다.
강원 평창군 진부면(珍富面) 동산리(東山里) 월정사에 있는 8각 9층석탑.
국보 제48호.높이 15.2 m.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2중 기단으로 지대석은 1단의 받침이 있어 하층 중석(中石)을 받치고 있다.
각 면에는 1면 2개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었으며 갑석(甲石)은
복련(覆蓮:아래로 향한 연꽃)으로 덮고, 그 위의 상층 면석을 받치는
받침돌이 있다.
면석(面石)에는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고, 갑석 위에 탑신을 괴는
받침돌이 1매 있어 첫층 옥신(屋身)을 받치는데 8면에 1면씩을 건너뛰어
4개면에 직사각형 홈이 패어져 있다.
옥개의 각 구석에는 풍탁(風鐸)이 달려 있고 상륜부도 완전히 보존되어 있다.
탑 앞에는 보살좌상 1구가 탑을 향해 안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자리만 남아 있었다
다음에 다시 갔다 논다고 써 있었다
해체, 수리할 때 사리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중층탑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탑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 북부 지방에서 주로 유행하던 다각다층석탑의 하나로
고려 초기 석탑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8각이중기단 위에 8각의 갑석이 놓여 있는데 갑석 위에 새긴 복련이나
기단 중석에 안상을 새긴 점 등에서 고려적인 특징을 엿볼 수 있다.
1층탑신받침도 아울러 고려 특유의 특징이며 탑신 각 면의 감실과
수평적인 옥개석도 고려 특유의 것이라 하겠습니다. 9층으로 된 탑신과
옥개석은 높이에 비해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주며 모서리의 반전이나
탑신의 감실, 8각의 다양한 변화, 상륜부의 꾸밈 등은 고려 불교 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반영해주고 있다.
성보박물관에는 옛 큰스님들의 행적과 유품이 보관되어 있었다
절 입구에는 수백년된 전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전나무 숲속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생각보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사찰이었다...
다음에 다시 올때는 경포호수 근처에다 모텔을 정해 놓고 밤에
연인과 함께 경포호수가을 거닐면서 꿈과 희망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
2003 년 5월 4일 -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