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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묵대사는 비록 불문에 출가하였지만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부모님 공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바친 제문은 스님이 얼마나 삶을 소중히 했고 효성이 지극했는지를 절절히 보여줍니다.
胎中十月之恩 何以報也 (태중에 열 달을 품으신 은혜 어이 갚으리)
膝下三年之養 未能忘矣 (슬하에 삼 년을 키우심도 잊을 길 없네)
萬歲上更加萬歲 (만 세 위에 다시 만 세를 더 할지라도)
子之心猶爲嫌焉 (아들의 마음은 오히려 부족하기만 하여라)
百年內未滿白年 (인생 백년에 백년을 채우지 못하시니)
母之壽何其短也 (어머님의 수명은 어찌 그리 짧으신지)
單瓢路上行乞一僧 (표주박 하나로 노상 걸식하는 이 중도)
旣云已矣 (이미 말할 것도 없으려니)
橫𨥁閨中未婚小妹 (비녀도 꽂지 않은 규중의 시집 안간 어린 누이야)
寧不哀哉 (어찌 슬프지 않으리까)
上檀了下壇罷 僧尋各房 (상단불공 마치고 하단제사 파하니 스님마저 제 방으로 돌아가고)
前山疊 後山重 (앞산 첩첩하고 뒷산 또한 겹겹이 쌓였는데)
魂歸何處 嗚呼哀哉 (어머니 혼은 어디로 가시는가, 아 슬프도다)
어머니가 후사가 없어 제사를 걱정하시자 스님이 직접 만경현 유앙산(維仰山) 아래에 무자손 천년향화지지(無子孫 千年香火之地; 자손이 없어도 천년동안 제사 공양의 향불이 끊이지 않을 곳)를 찾아 어머니 묘를 썼습니다.
진묵대사가 직접 쓴 어머니 묘 터는 연화부수의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스님의 생가 터 일대는 동쪽 청학산에서부터 산맥을 이어 산봉우리가 실낱같은 선으로 살아나 마치 물 위에 뜬 수련의 잎을 닮은 형상으로 생가 터 일대에서 북쪽 수방(水方)에 성모를 모셨는데, 그곳이 바로 연화부수(蓮花浮水)의 명당으로 전해집니다. 산소가 바라보고 있는 청학산의 청학은 음역하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천상의 새로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해 주는 새를 바라보는 성모야말로 극락에 오르기 위해 연화대에 안에 머무르는 것이고, 청학이 성모를 안아 극락으로 인도하는 절묘한 명당이라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성모(진묵대사의 어머니)님 산소에 술과 향을 올리고 벌초를 해주면 집안의 우환이 사라진다는 전설이 내려왔다고는 하지만 긴 세월을 내려오는 동안 묘소가 무너지기 직전에 이르렀었다고 합니다.
1927년 5월, 이순덕 화부인이 계룡산 신도내에 있다가 고향인 임실 땅으로 가던 중 이 곳 이웃마을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날 밤 화부인의 꿈에 서쪽 하늘로부터 흰 가마가 하나 내려오더니 한 스님이 나타나 가마에 타라 하여 가마 안에 들어가 앉으니 공중을 날아 어느 묘소에 내려앉았습니다.
이 때 꿈에서 깨어난 화부인은 불현듯 부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이 생겨 집주인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꿈 이야기를 듣고 난 집주인은 이곳에 진묵대사 어머님 산소가 있으니 가서 참배하고 소원을 빌어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화부인이 그 길로 묘소를 찾아갔더니 묘는 허물어져 겨우 흔적만 남아 있고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자 화부인은 바로 묘소에 떼를 입히고 십여 년에 걸쳐 묘를 돌보며 지방의 뜻있는 신도들과 봉황계를 만들어 산소를 돌보는 한편 1937년 진묵사를 창건하였습니다.
진묵대사 모친 묘 주위는 성모암(어머니 묘를 모시고 있음)과 조앙사가 자리하고 있고 지금은 없어진 진묵사가 있었던 진묵성지입니다. 성모암은 지난 2002년 진묵대사 모친 묘 옆에 ‘고시례전’을 건립해 고시래 의미를 계승하고 있으며 성모암 전각 안에는 진묵대사와 모친 조의부인 영정이 모셔져있고 조앙사 진묵전에도 진묵대사와 모친 조의씨, 누이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성모님의 영험을 빌고 갑니다.
*** 고시래 ; 야외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조금씩 떼어내 던지며 ‘고시래’하고 외치는 것으로 고수래, 고시례, 고씨네 등으로도 불리며 지신(地神)이나 수신(水神)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고 무사히 행사를 치르게 해달라는 기원과 잡귀 추방의 주술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내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평야 만경 벌에서는 진묵대사가 ‘고시래’의 원조로 알려져 오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내려오는 구전에 따르면, 만경 벌을 지나던 진묵대사는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로부터 공양 받을 때마다 음식을 조금 떼어내 어머니를 위해 들판에 던졌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농부들도 논에서 일을 하다가 음식을 먹을 때면 진묵대사 어머니 고씨(사후 조의씨로 추존)를 부르며 음식을 나눴고 세월이 흐르면서 ‘고씨에게 예’를 올린다는 말이 ‘고씨네’ ‘꼬시래’ ‘고시래’ 등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래에 정리해 놓은 것처럼 진묵대사의 탄생과 출가 그리고 입적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진묵스님이 보였다고 하는 이적들이란 것이 과장된 이야기들일 지는 모르지만 그 속에는 기실 당대나 후세 사람들의 진묵스님에 대한 존경과 추앙하는 마음이 담겨있을 것입니다.
< 진묵대사의 탄생(誕生) >
당제산 중턱에 고씨 처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빨래를 하기 위해 냇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손발을 씻으려고 깨끗한 상류의 물을 찾아 조금 올라가고 있는데, 어디서 내려왔는지 예쁜 복숭아 한 개가 둥둥 떠 있었습니다. 마침 배도 고픈 터라 빨랫방망이로 복숭아를 건져 올려 입에 대자마자 달콤한 연시처럼 변하여 한 입에 다 녹아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맛이 너무 달콤하여 입맛을 다시며 집으로 돌아온 후 태기가 있어 대사를 낳았습니다.
태어난 뒤 3년 동안 초목이 말라 시들었고, 비린내가 나는 음식과 마늘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지혜롭고 자비로워서 사람들이 "불거촌에 부처님 났다." 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대사의 부모는 마흔이 넘도록 아이가 없어 봉서사에 다니면서 지극하게 생남불공을 하다가 어느 날 꿈에 천신이 빛이 영롱한 구슬 하나를 던져주었는데 점점 커지면서 모양이 변하더니 마침내는 연화대에 앉아계신 부처님으로 변하더니 어느새 나무석가모니불을 염하는 승속의 제자들이 법당에 가득 차니 어머니도 엎드려 절을 하다 깨어났는데 이후 태기가 있어 대사를 낳았습니다. 대사가 태어나던 날 밤에 대사의 집에는 밝은 서광이 충천하였다고 합니다. 구슬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꿈을 꾸고 낳으셨다 하여 이름을 일옥(一玉)이라 짓고 부처가 될 아이라고 정성을 다하여 길렀습니다.
< 진묵대사의 출가(出家) >
대사는 7세 때 완주 봉서사(鳳棲寺; 전북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종남산(終南山)과 서방산(西方山)의 계곡에 위치한 절로 서방산이 봉(鳳)의 형상을 하고 깃을 드린다 하여 봉서사라 하며 진묵대사가 출가한 곳으로 유명합니다)로 출가하였는데 불경을 한 번 읽으면 곧 암송하고 내용을 통달하였으므로 따로 스승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사의 출가에 관해서도 또 다른 설화가 있습니다.
대사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문득 어머니에게 자신이 바로 부처라며 출가할 뜻을 보였습니다. 대사의 뜻을 살핀 부모는 대사를 봉서사의 혜영대사에게 데려갔습니다.
혜영대사는 어린 일옥을 시험하였습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저는 성이 불가이고, 이름은 일옥입니다.”
“불가라는 성도 있느냐?”
“저의 아버지는 불교를 믿은 후로는 성을 석씨로 고쳤으니 석씨 집안의 아들인 저는 불가가 아니겠습니까?”
“나이가 몇이냐?”
“일곱 살입니다.”
“너의 몸이 일곱 살이냐, 마음이 일곱 살이냐?”
“스님의 머리가 백발이신데 스님의 머리가 세었습니까, 마음이 세었습니까?”
“나의 머리가 센 것이지 마음이 센 것은 아니다.”
“저도 육체가 일곱 살이 된 것이지 마음이 일곱 살은 아닙니다.”
“너는 왜 여기를 왔으며. 무엇을 하려고 왔느냐?”
“제가 본래 부처인데 세상 사람들이 몰라주기 때문에 부처가 되는 흉내를 내볼까 하고 왔습니다.”
“너의 말과 같이 본래 부처라면 어찌하여 지금 중생의 몸을 받았느냐?”
“스님, 중생과 부처가 어찌 둘입니까?”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이름이 있겠느냐?”
“스님, 아는 현자에게는 둘이란 말도 틀리고 둘이 아니란 말도 오히려 우스운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이에게는 분명히 부처는 부처요, 중생은 중생이라고 일러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요, 마음이 어두우면 중생이기 때문이지요. 같은 거울이라도 밝은 거울이 있고 흐린 거울이 있듯이 사람도 깨달은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중생과 부처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너는 그런 말을 누구에게서 배웠느냐?”
“스님은 숨쉬고 밥먹고 잠자는 것을 누구에게 배워서 아십니까?”
혜영대사는 간밤에 석가여래께서 수만 대중을 거느리시고 봉서사 동구로 들어오시는 꿈을 꾸고 깜짝 놀라 깼는데 꿈이 헛되지 않음을 알고 일옥을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진묵스님의 기이한 행적은 어릴 때부터 나타납니다.
< 어린 진묵스님의 소향예배(燒香禮拜) >
출가한 어린 진묵스님에게 아침저녁으로 신중단(神衆檀)에 소향예배(燒香禮拜)하는 소임이 맡겨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봉서사 여러 대중들의 꿈에 일시에 금강 밀적 신장이 무서운 얼굴로 나타나 호령했습니다.
“대중들은 듣거라, 새로 오신 동자스님께 향로다기를 들려서 신중단에 나오시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불보살님을 모시고 받드는 신장인데 어찌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인 동자스님께 향다를 올리게 하느냐. 우리가 송구스러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으니 아침저녁으로 우리를 편안케 해달라.”
절에서는 그 후 어린 진묵스님에게 향다 올리는 일을 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 사미(沙彌) 진묵의 해인사 장경각 진화(鎭火) >
전주 봉서사에 있던 스님이 아직 사미(沙彌)로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점심 공양할 상추를 여러 사람과 함께 씻고 있던 스님은 멀리 해인사 장경각에 불이 난 것을 신통력으로 관(觀)하게 되었습니다. 다급한 스님은 손에 들고 있던 상추에 물을 묻혀 해인사 쪽으로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스님들은 진묵스님의 행동에 의아해할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진묵스님은 지금 해인사 장경각에 불이 나서 끄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해인사에서는 때 아닌 화재로 장경각의 경책(經冊)이 모두 타버릴 위기에 처해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서쪽에서 비바람이 몰려오더니 장경각 위에만 억수 같은 소낙비가 쏟아져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해인사 큰 스님이 입정에 들어 관(觀)해 보고 진묵대사가 불을 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또는 후에 해인사의 한 스님이 봉서사를 찾아와 장경각 화재 사건을 이야기하게 되어 진묵스님의 이적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 진묵대사의 이락삼매행(離樂三昧行) >
사미 시절에 창원의 마상포(馬上浦)를 지나갈 때 한 동녀(童女)가 사랑을 느꼈으나 따를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죽어서 남자가 된 뒤 다시 전주 대원사(大元寺)에서 만나 기춘(奇春)이라는 시동이 되었다. 대사가 그를 각별히 사랑하였는데 이것을 대중들이 비난하였습니다. 대사는 그것이 이락삼매행(離樂三昧行 : 일체의 즐거움에 대한 애착을 떠난 삼매행)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기춘을 시켜 국수로 대중 공양을 하겠다는 것을 알리게 하였습니다. 대사는 대중에게 바루를 펴게 한 뒤 기춘으로 하여금 바늘 한 개 씩을 각자의 바루 속에 넣어 주게 하니, 대사의 바루 속 바늘은 국수로 변하여 바루를 가득 채웠으나, 다른 승려들의 바루에는 여전히 한 개의 바늘만이 있었습니다.
*** 삼매(三昧) ; 불교 수행의 한 방법으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하여,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정신력을 뜻함.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ādhi)에서 나온 말로 삼마지(三摩地) ·삼마제(三摩提) ·삼매지(三昧地) 등으로 음역되고 마음을 한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정(定)으로, 또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기 때문에 등지(等持), 또 정수(正受) ·정심행처(正心行處) 등으로 의역.
< 진묵대사의 득남(得男)기도 >
득남 기도를 위해 절을 찾은 어느 보살님이 진묵대사에게 기도염불을 간청하자 진묵대사는 곡차를 가져온다면 기도를 해 주겠다고 해서 보살님은 곡차를 가져다가 진묵대사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득남을 하기 위해 매일 절을 찾아와 기도를 하건만 진묵대사는 한 번도 법당에 들어와 같이 기도염불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백일기도가 거의 끝나갈 무렵 보살님은 진묵대사를 찾아갔습니다.
“스님께서는 곡차를 가져오면 기도를 해 주시겠다고 하시고선 매일 곡차만 마시고 기도는 안 해주시니 너무 하십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나한님에게 득남을 할 수 있게 부탁을 드려보지요.”
진묵대사는 나한전에 들어가 “보살이 득남이 원인데 한 번 들어주지” 하면서 나한의 빰을 일일이 때렸다.
그날 밤 보살의 꿈에 나한들이 나타나서 “진묵대사가 우리들의 뺨을 때려서 몹시 아프다. 득남의 소원은 들어 줄 테니 제발 진묵대사에게 다시는 부탁은 드리지 말라” 하고 사려졌습니다. 그 후 과연 그 보살님은 득남을 하게 되었고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그 절에서 기도를 한 후 영험을 보았다고 합니다.
<진묵대사와 나한동자(羅漢童子)>
어느 날 우연히 한 동자를 만나게 되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내려오다 냇가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전날 소나기가 내린 후라, 냇물이 많이 불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동자는 “스님 냇물이 많이 불은 것 같은데 제가 먼저 건너가 보지요. 스님께서는 제가 간 길만 따라오시면 안전할 것입니다.”라며 곧 바로 냇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보기에는 냇물이 불어 깊어 보이는데 동자가 냇물 중간쯤에 가도 발목까지 밖에 잠기지 않았습니다.
진묵 대사도 안심을 하고 곧 동자가 간 길을 따라갔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진묵대사가 냇물 중간 쯤 가니 가슴까지 물이 차올랐습니다. 어렵게 강을 건너고 보니 동자는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나한이 진묵스님을 골려 먹을 심산으로 동자로 변신했던 것입니다.
이때 스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고 합니다.
奇汝靈山十六愚(기여영산십육우; 너희들 영축산의 열 여섯 어리석은 나한들아)
樂村齋飯幾時休(요촌재반기시휴; 마을의 잿밥이나 즐김을 언제나 멈추련가)
神通妙用雖難及(신통묘용수난급; 신통 묘용으로는 비록 미치기 어려우나)
大道應問老比丘(대도응문노비구; 대도는 마땅히 늙은 비구에게 물을 지니라)
< 진묵대사와 능엄경(楞嚴經) >
스님은 대원사를 비롯해 신라 때 부설거사가 창건한 변산 월명암(月明庵)도 재건하고 오래 주석하셨습니다. 여기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이곳은 신심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올라가기 어렵기 때문에 가을이 되자 대중 스님들은 탁발을 나가고 시자 한 사람만 남아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시자가 어머니 제사에 참석하러 마을로 내려가면서 때가 되면 스님께서 잡수시도록 공양을 준비하여 탁자 위에 올려놓고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여기에 공양을 차려 놨으니 때가 되면 스님께서 들어다 잡수십시오." 스님은 방문을 열어 놓고 능엄경을 보시는 채로 그냥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시자가 곧 마을로 내려가 일을 다 보고 다음날 암자로 돌아 와 보니 스님은 어제 그대로 앉아계셨는데 가까이 가보니 문지방에 얹혀진 스님의 손에서 피가 흘러 그대로 말라 엉겨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문이 여닫히며 문지방에 놓인 스님의 손가락이 깨어져 피가 흘러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삼매에 들어 계셨던 것입니다. 탁자를 올려다보니 어제 차려 놓은 공양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시자가 절을 하고 밤사이 문안을 올리니 스님은, "왜 제사 참례를 안하고 빨리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에 들어 하룻밤이 지나갔는데도 시자가 돌아와 소리 내어 문안을 드릴 때까지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 능엄경은 수능엄경이라고도 합니다. 원래 [대불정여래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이라는 긴 이름의 경전인데 흔히 능엄경이라는 약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원각경, 금강경, 대승기신론과 함께 4교과라 하여..스님들의 수행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배우는 경전입니다.
< 진묵대사의 참선 >
위의 이야기와 유사한 설화입니다. 스님이 봉서사의 산내 암자인 상운암(上雲庵)에 계실 때입니다. 공부하는 대중들이 결제(結制)를 앞두고 모두 탁발을 나갔습니다. 결제기간 중 참선도량에서는 일체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어 사람이 죽어도 그대로 두었다가 해제가 되어서야 다비식을 거행할 만큼 엄한 것이 선방(禪扉)의 규율이었습니다.
상운암의 대중들도 그런 엄격한 규율 밑에서 진묵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공부하고 있었으므로, 3개월 동안 참선을 하려면 그동안 먹을 양식을 미리 탁발해 두어야 했기에 스님만 혼자 절에 남기고 대중들은 한 달 동안을 기약하고 탁발을 떠났습니다.
탁발 나갔던 사람들이 상운암으로 돌아와 보니 스님은 석고상처럼 앉아서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스님의 얼굴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고 무릎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습니다.
얼굴에 얽혀 있는 거미줄을 걷어내고, 무릎의 먼지를 털어내며 "돌아왔습니다."고 인사를 드리니, 스님은, "너는 왜 그렇게 속히 왔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탁발을 내보내고 스님은 홀로 남아 앉은 채로 '정(定)'에 들어버린 것이었습니다.
< 진묵대사와 원등(遠燈) >
월명암에 계실 때 불등(佛燈)이 매일 밤 한 점 성광(星光)이 되어 멀리서 비치어 왔으므로 대사는 이것을 발견하고 목부암으로 옮겨가서 원등암(遠燈庵)이라 개칭하였습니다. 이곳은 원래 십육나한(十六羅漢)의 도량으로, 그들이 항상 대사를 시봉하는 마음에서 월명암으로 등광(燈光)을 비추었는데 그것은 대사의 뜻을 계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진묵스님은 계율에 얽매이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고 술을 유달리 좋아했는데, 요즈음 우리가 술을 달리 부를 때 흔히 쓰는 곡차(穀茶)라는 말은 진묵스님으로부터 유래됐다고 합니다. 스님은 술이라고 하면 절대 마시지 않았고 곡차라 해야만 마셨다고 합니다. 스님은 술 마시는 것을 타박하는 사람들에게 쌀과 누룩으로 만들었으니 곡차지 왜 술이냐며 세속인들은 취하기 위해 마시니 술이겠지만 나는 그것을 마시면 피로도 풀리고 기분도 상쾌해지니 곡차라 하셨답니다.
어느 때인가 곡차를 동이 째 마시고 읊었다는 게송이 지금껏 전해집니다.
天衾地席山爲枕(천금지석산위침 ; 하늘을 이불, 땅을 자리, 산은 베게삼고)
月燭雲屛海作樽(월촉운병해작준 ; 달은 등촉, 구름은 병풍, 바다를 술잔삼아)
大醉居然仍起無(대취거연잉기무 ; 크게 취해 거연타 일어나 춤추니)
却嫌長袖掛崑崙(각혐장수괘곤륜 ; 아, 날리는 소매깃 곤륜산에 걸릴까 염려되누나)
이토록 곡차를 즐긴 진묵대사이시니 당연히 곡차와 관련된 설화들도 전해집니다.
< 진묵대사와 곡차(穀茶)1 >
곡차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고 하면 마시지 않는 것이 계행(戒行)이었는데, 어느 날 한 중이 술을 거르고 있는 것을 보고 진묵대사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세 차례나 물었으나, 중이 대사를 시험하기 위하여 모두 술이라고 대답하였으므로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 중을 타살하였다고 합니다.
< 진묵대사와 곡차(穀茶)2 >
스님은 익산군 춘포면 쌍정리에 있는 누님 집에 가끔 들렀고 누님은 동생을 위해 늘 곡차를 준비해 두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스님이 누님 댁에 들렸더니 집에 없어 밭일 나간 누님을 찾아가 안부를 묻고 돌아서려는데 누님이 집에 곡차를 준비해 두었으니 마시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은 그 좋아하는 곡차를 두고 그냥 갈 수 없어 누님이 일러준 대로 부엌에 들어가 술이 담겨 있는 것 같은 조그만 독의 뚜껑을 열어 독채로 들이마시고 기분이 좋아서 봉서사에 돌아와 정(定)에 들었습니다.
들일을 마치고 석양이 되어 집에 돌아와 부엌으로 들어간 누님은 술독은 그냥 있는데 그 곁에 있는 간수 독의 뚜껑이 뒤집혀 있는 것을 보고 심장이 멈춰 설 듯 놀라서 두 독의 뚜껑을 벗겨봤더니 간수 독은 비어 있고 술독의 술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간수 한 독을 마시면 황소라도 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누님은 자기의 잘못으로 동생이 간수를 마시게 됐다고 가슴을 치면서 이미 석양인데 정신없이 봉서사까지 삼십리 길을 단숨에 뛰어갔습니다. 봉서사에 당도한 누님은 절이 조용한 것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묵스님이 있다면 절 안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진묵스님이 조실 방문을 열어 놓고 기분이 좋아 빙그레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누님은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님이 "곡차로 알고 마시면 곡차가 되는 것이지 누님은 걱정도 많으십니다. 어둡기 전에 어서 돌아가십시오."라고 하자 살아 있는 동생이 한없이 고맙고 존경스러웠지만, 해가 져가는 시간에 삽십 리가 넘는 산길을 되돌아가라니 야속하고 섭섭했지만 동생의 신비스런 힘을 믿는 누님이었으므로, 그 길로 돌아서 집으로 왔습니다. 누님이 집에 다 올 때까지 서산에 꼭 그만큼 걸려 있던 해가 누님이 집에 들어서자 산너머로 들어가 버리고, 갑자기 캄캄한 어둠이 꽉 차는 것이었다.(이 부분은 진묵대사와 어머니 설화에도 등장합니다)
*** 전북 완주군 모악산 정상에 이르는 길목에 수왕사가 있습니다. 커다란 암벽을 뒤로 하고 토담으로 엉성하게 지어진 수왕사는 물이 좋습니다. 무량(無量)을 한자로 옮겨 수왕이 됐듯이 이곳의 물은 끝이 없으며 물 중에서 으뜸으로 칩니다.
정유재란으로 불탄 수왕사를 중창한 진묵대사는 이 석간수로 곡차를 빚어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약수가 흘러나오는 암벽 위에 참선하기 알맞은 공간이 있어 이곳에 머물렀다지만 진묵대사는 곡차 빚는 재미에 수왕사에 머물렀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진묵대사를 시작으로 수왕사에 전해 내려오는 술이 송화백일주와 송죽오곡주입니다
*** 송곡 오곡주 ; 진묵대사가 산사에서 참선 도중 고산병 예방과 편식에서 오는 신체적 손상을 보완하기 위하여 모악산 주위에 서식하는 각종 약초와 이곳 약수인 석간수를 이용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술로 5가지 약재가 조화되어 향긋한 냄새를 내며 보신효과가 좋아 3백년 동안 곡차라는 이름으로 빚어진 순한 명약주.
굴을 달리 부르는 석화(石花)라는 말도 진묵스님으로부터 유래됐습니다. 스님이 중건하신 김제 망해사는 바닷가 근처라 굴을 비롯한 어패류가 많은데 굴이 돌에 붙어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돌에 핀 꽃 같습니다.
하루는 굴을 따서 드시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왜 스님이 육식을 하느냐”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이것은 고기가 아니라 석화다고 대답했습니다.
본디 부처님이 육식 자체를 금한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부처님도 걸식을 하셨는데 걸식을 하면서 시주하는 사람이 주면 주는 대로 고맙게 받아먹어야지 고기는 빼고 또 무엇은 빼고 달라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음식이란 단지 생명을 이어가는 약과 같은 것이었으니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진묵스님이 굴을 석화라고 한 것은 그런 뜻에서였을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현신이라 불리던 진묵스님다운 일화입니다.
< 진묵대사와 어혼환생(魚魂還生) >
진묵의 기담포교(奇譚布敎)로 유명한 어혼환생(魚魂還生)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탁발을 나간 스님이 어느 마을에 당도하니 때 마침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큰 가마솥에 시뻘건 불을 지펴 놓고 물고기를 끓이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이를 보고 “이 무고한 고기들이 확탕(篳湯)의 고생을 하는구나” 하시며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진묵대사를 알아보지 못한 마을 사람 중 하나가 스님을 희롱하고자 “여보 스님! 이 생선국 한 그릇 하지 않으시려오."라고 말하자 스님이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후한 인심이로다. 그러면 나도 한번 먹어보지” 하며 장삼과 배낭을 풀어놓을 생각도 않고 그대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가마솥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큰 가마솥을 불끈 두 손으로 쳐들더니 가마솥 안에 든 물고기를 한 사발도 남겨 놓지 않고 꿀꺽꿀꺽 다 마셔버리고 말았습니다.
스님은 입을 딱 벌린 채 말도 못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뒤에 두고 냇가로 가더니 냇물에 벌건 엉덩이를 내놓고 변을 보는데 그의 입으로 들어갔던 물고기들이 살아서 펄펄 뛰며 도랑으로 헤엄쳐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깨달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습니다. "미흡한 인간들이 미처 고명하신 대사님을 몰라 뵈었습니다. 하오나 고기가 다 살아서 저렇게 펄펄 뛰어 노는데 어찌하여 저놈 한 마리는 꼬리가 잘라진 채 소생하지 못하옵니까?" 하고 공손히 묻자, "그놈의 꼬리는 저 가마솥 가에 있을 것이요."하고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가마솥을 들여다보니 거기엔 잘라진 꼬리 한 토막이 붙어있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엎드려 잠시 전의 허물을 계속 사죄하였습니다.
*** 이 이야기는 전주, 김제 지역에서 어혼(魚魂)이 인도환생(人道還生)해서 바로 진묵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 진묵대사의 기타 일화 >
◆ 전주부에 있는 한 흠포자(欠逋者: 官物을 축낸 죄인)가 도망을 가려고 대사에게 인사를 하러 왔을 때, "관청의 공적인 물건을 사사로이 써 버림이 어찌 사내대장부로서 할 일이겠는가. 훔친 물건은 도로 관청의 제자리에 갖다 놓고 대신 쌀 몇 말을 가져다 저 나한들에게 공양하게. 그러면 머지않아 좋은 일이 있을 것이네"하고 일렀습니다.
부끄러워하며 돌아간 며칠 후 쌀 몇 말을 지고 와서 직접 공양간에 들어가 밥을 지어 나한들에게 올렸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옥(獄)의 형리(刑吏) 자리에라도 앉아 삼십일만 허물없이 있으라” 하고 일러서 그를 돌려보낸 다음 주장자(狏杖子)를 가지고 나한당에 들어가 차례로 나한의 머리를 세 번씩 때리며 "관리 아무의 일을 잘 도와주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밤에 나한이 그 관리의 꿈속에 나타나서, "네가 구하는 바가 있으면 직접 우리들에게 말할 것이지 어째서 대사에게 말하여 우리를 괴롭히느냐? 너의 소행을 보아서는 불고(不顧)하여도 가하나 대사의 명령이시니 좇지 않을 수 없다."하고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꿈을 깨고 난 흠포자가 곧 바로 전주 부청에 달려가 옥리 자리를 자청하자 전주 군수는 그 자리를 선뜻 내맡겼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봉급이 박한 자리라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던 것을 자청해서 맡으려 하니 군수로서는 다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송사는 계속해서 일어났고 송사가 있을 때마다 수당이 지급되어 아전은 생각보다 꽤나 넉넉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어느새 한 달이 지나자 하루는 군수가 아전을 불러 호방의 자리가 비었으니 그리 옮겨 앉으라 하였습니다. 아전은 비로소 나한님의 공덕과 대사의 덕화를 느꼈습니다.
◆ 대사가 하루는 시자를 시켜 봉서사 남쪽 며느리골 즉, 부곡(婦谷)으로 소금을 가져다주라 하여, 시자가 누구에게 주느냐고 반문하자 가보면 알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시자가 가서 보니 사냥꾼 여러 사람이 노루 고기를 회쳐놓고 소금이 없어서 먹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금을 받으며 "이것은 반드시 옥로(玉老)께서 우리의 주림을 불쌍히 여기심일 것이다. 활인지불(活人之佛)이 골마다 있다 함은 이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 대사가 전주 대원사(大元寺)에 있을 때 끼니마다 밀기울을 물에 타서 자시니 제자들은 그것이 묽다 또는 그것이 더럽다 하고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직 공양은 준비되지 않았고 때는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나 있었습니다. 대사가 선정에 들어 법희선열의 기쁨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웬 스님이 발우를 가지고 내려왔는데 발우에는 흰 쌀밥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대사가 말하기를 "공양만 보냈으면 되었지, 무엇하러 번거롭게 친히 왔는가?"하니, 그 스님이 "소납(小衲)은 현재 해남(海南) 대둔사(大芚寺)에 머물고 있습니다. 마침 점심 공양 때라 식사를 하려고 발우에 밥을 받았는데 갑자기 발우가 저절로 공중으로 뜨므로 발우를 붙잡았는데 저도 모르게 어떤 신력에 의해 여기까지 날아온 것입니다."하고 답하였습니다.
대사가 공양을 청하게 된 까닭을 말하자 그 스님은 매우 신기하게 여기고 "큰스님께서 드시는 공양은 앞으로 제가 올리겠습니다."며 대사에게 예배하고 대사의 공양이 끝나기를 기다려 발우를 드니 삽시간에 다시 대둔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4년 동안 해남의 대둔사와 전주의 대원사를 공양 발우가 오가곤 했습니다.
대사가 대중들에게 "그대들이 밥투정을 한 과보로써 이 절은 앞으로 7대에 걸쳐 가난한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다."고 했으며 과연 대사의 말대로 대원사는 지금까지도 신도들의 발길이 끊어져 가난하다고 합니다.
◆ 천계(天啓) 임술년(광해군 14년, 대사의 나이 61세 때)에 완부(完府) 송광사(松廣寺)와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동시에 불상을 조성하게 되어 점안법회를 열고자 대사에게 증사(證師)로 와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사는 어느 쪽에도 가지 않는 대신 송광사에는 주장자를, 무량사에는 수주(數珠)를 신표로 보내어 증명단에 안치하고 점안법회를 하도록 일렀습니다. 그리고 훈계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 신표를 모시고 점안법회를 하게 되면 존상은 원만상을 성취할 것이다. 그러나 그 뒤로는 불사한답시고 무조건 존상에 개금하지 말라."
그리고 무량사 주지에게는 특별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무량사의 화주스님은 점안하기 전에는 결코 산문 밖을 나가지 말라. 명심하라."
그런데 무량사의 불상은 홍성 사람이 혼자 3천금을 대어 조성한 것으로 무량사로서는 아주 큰 시주였고 점안법회 시간이 다가왔는데도 그 시주가 오지 않자 화주를 책임졌던 스님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산문 밖까지 나갔다가 나중에 어떤 갑사에게 피살되어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스님은 출가자의 몸이었지만 어머니를 평생 절 근처에 모시며 지극히 봉양했다고 합니다. 출가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신 것이지요. 출가가 삶을 버리고 인간을 버리는 행위가 아님을 몸소 증명하신 것이지요. 어머니와 얽힌 설화들이 스님의 효심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 진묵대사와 어머니 >
◆ 대사는 전주 왜막촌에서 어머니를 봉양하였습니다. 대사는 그 마을 뒷산에 있는 일출암에 주석하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왜막촌을 오르내렸는데 늙으신 어머니가 여름 날 모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보고 산신령을 불러 모기를 쫓게 한 뒤로는 이 촌락에 영영 모기가 없어졌습니다.
◆ 어느 날 어머니가 스님을 보러 봉서사에 왔는데 그만 저녁에 일이 있어 집어 돌아가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진묵대사는 아쉬운 마음에 만류하다가 조심해서 잘 가시라고 보내드렸고 이런 저런 아쉬운 마음을 달래는 한편으로, 행여 해가 떨어지지 않을까하는 조바심에서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올 때까지 해가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이윽고 집 대문에 들어서자 갑자기 해가 떨어지고 깜깜한 한 밤중이 되었습니다.
< 진묵대사와 김봉곡(金鳳谷) >
◆ 봉서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봉곡(鳳谷)이라는 유학자가 살고 있었는데 대사가 하루는《강목(綱目)》75책을 빌려서 한 사람에게 짊어지워 가지고 절로 돌아가면서 한권씩 빼내어 읽고서는 길가에 내던지고 또 읽고 하면서 절까지 30리 거리에 전부 읽어버렸다. 후일 그 책 주인이 독후에 책자를 길가에 버린 이유를 물으니 “고기를 얻은 사람은 통발은 잊어버리는 것(得魚者忘筌)이오”라고 하여 그 사람이 책을 펴보면서 낱낱이 들어 물으니 무불통달(無不通達)하였다 합니다.
◆ 봉곡이 어느 날 저녁을 준비해 놓고 동비에게 모셔오도록 일러 놓았는데 동비가 봉서사로 대사를 모시러 가다가 우연히 길에서 대사와 마주쳐서 "선생님께서 큰스님을 모셔 오라기에 제가 이렇게 왔습니다."하고 봉곡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때 대사는 허공을 바라보면서 배회하고 있었는데 동비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너는 아들을 낳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동비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면서 대답을 못하고 있자 대사는 "네가 복이 없어서 그런 것을 누구를 탓하겠느냐. 가서 내가 곧 가겠노라고 선생께 아뢰어라."고 일렀습니다.
동비가 돌아와 그대로 아뢰니 봉곡은 대사의 얘기에 묘한 호기심이 일어서 대사가 도착하자 "어찌하여 이리도 늦으셨소이까?"하고 물었습니다.
대사는 "오다 보니 마침 서쪽 하늘 저편에서 한 줄기 신령스런 기운이 솟아오르고 있었소. 그것은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서기라서 내가 그것을 붙잡아 어디다 쏟고 싶었으나 쏟을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고 그것이 좋지 않은 척박한 땅에 흘러들어갈까 염려스럽기도 해서 그 기운을 부수어 멀리 허공 밖으로 보내고 오는 길이오“하고 답했습니다.
*** 증산교 경전에서는 봉곡이 진묵대사를 질시하여 죽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진묵대사의 입적과 관련해서도 다음과 같은 여러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 진묵대사의 입적(入寂) >
스님은 만년에 봉서사에 주석했습니다.
열반하실 때가 되어 스님이 제자들을 모아 놓고 "내가 몇 월 몇 일에 열반에 들어야겠으니 준비하라"고 하자 나이 어린 사미승이 "스님!, 그 날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정초여서 어려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고 얘기했습니다. 스님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도 그럴 듯해서 "그러면 어찌하면 좋을꼬?"하고 묻자 사미승은 그 다음날 돌아가시라고 했습니다.
마침 그 날짜가 닥쳐 스님이 또 내일은 가야겠다고 하자 제자들은 이번에도 “큰 49재가 들어왔는데 스님께서 그 날 돌아가시면 49재와 겹치게 되어 곤란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은 일리가 있다며 "그러면 49재 지나고 가야겠구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이 되자 진묵스님은 삭발 목욕 끝에 옷을 갈아입고, 지팡이를 짚고 대문 밖 개천가에 서서 시자에게 물 속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석가불의 그림자니라”고 하니, 시자가 “저것은 스님의 그림자가 아닙니까?”하고 말하자 “너는 어찌 그림자의 가상만 알고 석가의 진신을 보지 못하는가?”라고 말씀하신 다음, 방에 들어가 가부좌를 맺고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내가 곧 입적할 테니 너희들이 질문할 것이 있으면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스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묻기를 “스님은 누구의 법맥을 이어 받았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한참 있다가 “무슨 종승(宗乘; 각 종파에서, 자기 종파의 교의(敎義)를 이르는 말)이 있겠느냐.”하시나 제자들이 다시 수시(垂示; 가르침을 받음)를 걸(乞) 하자 마지못해 이르기를 “명리승...이긴 하나 서산 스님...으로 하라”하고 조용히 입적하시니 1633년 10월 18일이었습니다.
*** 어렸을 때 들은 이 이야기는 진묵대사의 여러 설화 중 가장 감명깊은 것이었습니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조 승려는 서산대사와 사명당일 것입니다. 두 분의 이야기는 영화로, 드라마로 그리고 위인전 등으로 잘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고승인데 그러한 서산대사를 명리승이라고 하는 대목은 진묵의 진면목을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 전북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서방산 봉서사에 가면 진묵대사 부도가 있는데, 6ㆍ25 이후 해마다 몇cm씩 살이 찌고 있으며 깨어진 부분이 다 아물어 흔적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진묵대사의 이적은 오늘 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나 봅니다.
< 증산도에서 전하는 봉곡과 진묵대사의 죽음 >
봉곡과 진묵대사는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진묵(震默)이 어느 하루 봉곡에게 성리대전(性理大典)을 빌려가면서도 봉곡(金鳳谷)이 시기심이 강한지라 반드시 후회하여 곧 사람을 시켜 찾아가리라 생각하고 걸으면서 한 권씩 읽고서는 길가에 버리니 사원동(寺院洞) 입구에 이르러 모두 버리게 되었다.
봉곡은 과연 그 책자를 빌려주고는 진묵이 불법을 통달한 자로 만일 유도(儒道)까지 통달하면 상대할 수 없게 되고 또 불법이 크게 성행할 것을 시기하여 그 책을 도로 찾아오라고 급히 사람을 보냈고 하인은 길가에 이따금 버려진 책을 한 권씩 주워 가다가 사원동 입구에서 마지막 권을 주워 돌아갔다.
후일 진묵이 봉곡을 찾아갔더니 봉곡이 빌린 책을 도로 달라고 하여 진묵이 그 글이 쓸모가 없어 길가에 다 버렸다고 대꾸하니 봉곡이 노발대발하는지라 진묵은 내가 외울 터이니 기록하라고 말하고 잇달아 한편을 모두 읽는데 그것이 한자도 틀리지 않으니 봉곡은 더욱 더 시기하였다.
그 후 어느 날, 진묵이 상좌에게 “내가 팔일을 한정하고 시해(尸解)로서 인도국(印度國)에 가서 범서와 불법을 더 익혀 올 것이니 방문을 여닫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고 곧 입적(入寂)하였다.
봉곡이 이 사실을 알고 절에 달려가서 진묵을 찾으니 상좌가 출타 중임을 알리자 봉곡이 그럼 방에서 찾을 것이 있다고 말하며 방문을 열려는 것을 상좌가 말렸으나 억지로 방문을 열었다. 봉곡은 진묵의 상좌에게 “어찌하여 이런 시체를 방에 그대로 두어 썩게 하느냐. 중은 죽으면 화장하나니라”고 말한 후 마당에 나뭇더미를 쌓아 놓고 화장하니 상좌가 울면서 말렸으나 봉곡은 도리어 꾸짖으며 살 한점도 남기지 않고 태웠다.
진묵이 이것을 알고 돌아와 공중에서 외쳐 말하기를 “너와 나는 아무런 원수진 것이 없음에도 어찌하여 그러하느냐.” 상좌가 자기 스님의 소리를 듣고 울자 봉곡이 “저것은 요귀(妖鬼)의 소리라. 듣지 말고 손가락뼈 한마디도 남김없이 잘 태워야 하느니라.”고 말하니 진묵이 소리쳐 말하기를 “네가 끝까지 그런다면 너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를 면치 못하리라”하고 동양의 모든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옮겨갔다.
*** 김봉곡(金鳳谷, 1575~1661). 이름은 동준(東準). 자는 이식(而式), 봉곡은 호.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에게 수학하였고, 병자호란 때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자 비분강개하여 숨어 살면서 계몽도설(啓蒙圖說), 심성서언(心性緖言) 등을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