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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7월 1일은 회사 창립기념일이라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3일간 쉴 수가 있다.
목요일 퇴근 무렵 기상청의 기상예보를 보니 장마이긴 하지만 충청북도 쪽에는 그렇게 많은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다. 아까운 황금연휴를 비가 온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집에 도착한 후 판쵸와 함께 배낭을 꾸려 동서울 터미널로 향하였다. 음성행 막차가 오후 9시에 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서둘러야 했다.
음성행 버스 안에서 무대포와 통화를 했다. 원주에 있다고 하면서 원주는 천둥과 벼락을 치며 곧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다고 하면서 극구 산행을 말렸다. 그러나 이미 음성행 고속버스를 돌릴 수는 없는 일, 일단 음성에 가서 산행을 할지 그만 둘지를 결정해야 했다.
도착한 음성은 마치 별이 쏟아질 것처럼 하늘이 맑았다. 이런 맑은 하늘에 무슨 비라고... 일단 택시를 타고 행치고개로 향했다. 가는 도중 택시기사가 등산복 차림의 내 모습이 궁금했는지 계속 질문을 한다. 야간등반한다고 하니 이 동네는 멧돼지가 자주 출몰하고 사람을 보면 저돌적으로 공격한다고 한다. 듣지 말았어야 할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슬슬 공포가 느껴진다.
★ 산행개요
- 산행코스 : 행치고개-상당산성
- 산행일행 : 돌쇠 단독산행
- 산행일시 : 7/1 (금요일) 04:00~16:45
- 산행거리 : 도상거리 40.2km
- 산행시간 : 14시간 45분
★ 기록들
6/30 23:00
오늘은 도상거리만 54km이상을 진행하기로 예정하였기 때문에 1시간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23시 정각, 이제 산행을 시작하기 위해 정맥길 들머리를 찾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일단 포장된 마을 길을 따라 나침반이 지시하는 남동쪽으로 향한 후 누군가 지나간 흔적을 쫓아 산을 올랐지만 올라갈 수록 가시덤불과 억세풀이 장난이 아니다. 곳곳에 멧돼지가 내려오지 못하도록 검정그물을 설치한 곳이 많았다. 그러는 과정에서 하늘은 시커먼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이내 컴컴해졌다.
이제는 진퇴양난이다. 돌아갈 수도 없고 계속 진행하기도 어렵다. 희미하게 보이는 산세가 정맥길인 것으로 판단하여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오르니 정맥길 리본이 보였다. 그런데 내가 올라온 방향이 내려가는 정맥길이었다. 무엇에 홀린 듯 또 내려가다 올라온 그 길마저 놓치면서 더욱 지독한 가시덤불 속으로 빠져 버렸다.
하늘에는 곧 폭우를 퍼 부을 듯 계속하여 천둥과 벼락이 내리치면서 온 천지가 요란하다. 도저히 더 진행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무대포로부터 또 산행 계속하는 지 전화가 왔다. 이제 포기하고 되 돌아가는 중이라고 하니 안심하는 모양이다. 어렵사리 가정자라는 마을에 도착하였다. 두시간 가까이 숲속에서 헤맨 꼴이 되었다.
이제 돌아가려면 택시를 잡든지 아니면 지나 가는 차를 얻어타야 했다. 차량 통행이 뜸하기 때문에 36번 국도의 차들은 마치 속도를 즐기듯 고속질주를 한다. 도저히 차들을 세워서 얻어 탈 수가 없다. 택시도 보이질 않는다. 그 사이 하늘은 조금 진정이 된 듯하다.
이제 비박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상 비박은 처음이다. 이것도 경험이라면 큰 경험이 될 것 같다. 마침 적당한 정자가 보였다. 막 누우려고 판쵸를 꺼내 이부자리를 만드는데, 정자 근처의 개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짖어대기 시작한다. 도저히 계속하여 있을 수가 없어 다시 일어나 행치고개 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갓길로 터벅거리며 올라가고 있는데 또 다른 정자가 보였다. 바로 큰 길가에 있어 지나가는 차량의 소음 때문에 시끄럽긴 했지만 그럭저럭 비박하기엔 괜찮아 보였다. 판쵸를 덮고 잠을 자려고 애를 써 봐도 도저히 잠이 오질 않는다. 소나기가 쏟아 부을 듯 잔뜩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휑하니 지나간다.
7/1 04:00
새벽 3시 30분, 아직 하늘은 여전히 흐리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있다. 한번 더 눈을 붙였지만 잠은 오지 않아, 배낭을 꾸렸다. 4시 정각, 일단 산행하기로 마음 먹고 36번 국도에서 바로 서당골을 지나 토골고개로 향하기로 하였다. 지난 밤 헤맨 것을 생각하면 행치고개에서 보천고개까지는 도저히 정맥길을 찾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육덕님의 산행기에도 그 들머리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았고, 다른 기록을 통해 들머리에 대한 정보를 확실하게 확인하고 오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04시 40분, 토골고개(보천고개)에 도착하였다. 음성과 괴산이 여기서 갈린다. 보호수인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그 반대편에 정맥 리본이 표시되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지금 이 시간이 랜턴을 꺼도 무방할 텐데 오늘은 흐린 날씨 때문에 랜턴을 계속 켜고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 진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비가 오느냐 그렇지 않느냐, 오더라도 얼마만큼 오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질 것이다.
05시 15분, 377.9봉에 도착하였다. 랜턴을 껐지만 날이 훤하게 밝지는 않았다. 05시 30분 내동고개를 지나 05시 55분 고리터고개에 도착하였다. 바로 임도가 나타나고 가로질러 능선을 가파르게 오르자 06시 10분 395봉에 도착하였다. 누군가가 커다랗게 보광산 안내표지를 설치하여 놓았다. 보광산은 정맥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잠깐 우측으로 갔다고 다시 되돌아 오도록 되어 있었고 정상에는 녹이 슨 리어카와 함께 보광산 비석이 있었다(06:30).
보광사 절을 우측에 두고 하산하는데, 이상하게도 남서쪽이 아닌 남동쪽으로만 진행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확인하였지만 모래재가 아닌 안심골을 지나 수암골로 빠지는 길이었다(07:00).
07:00
34번 국도를 지하도로 통과한 후 모래재로 갈까 말까 몇 번 고민하다 지도를 보니 수암골에서도 정맥 능선을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마침 지나가는 농부에게 길을 물으니 내황산은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되는데, 칠보산은 어떻게 올라 가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지도에 나타난 대로 움직여 보기로 하였다. 수암동 마을 길을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판자집 촌이 나타나고(아마도 개를 키우던 곳으로 생각됨) 이어 염소 목장이 나타났다. 철조망으로 둘러쳐 있어 철조망을 넘어야 했기에 철조망의 철사를 잡는 순간 찌리릿하게 전기가 통하면서 뒤로 나가 떨어졌다. 그러면서 뾰족한 돌맹이 위에 내 엉덩이가 그대로 찍혔다. 순간 숨이 멎을 정도의 고통이 느껴졌다. 한참동안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 통증을 멎을 때를 기다렸다. 욱씬거리는 느낌이 가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08:20
철사줄로 된 부분은 전기가 통하지만 잠긴 문에 살짝 손을 대보니 문에까지 전기가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 옆의 철망을 밟고 철조망을 통과하여 가파른 목장길을 터벅 거리며 올랐다. 막사에는 염소가 100여마리 정도 있었다.
8시 20분,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판쵸를 뒤집어 쓰고 계속하여 정상 근처에 도착하기는 하였지만 철조망 밖으로 넘어가는게 문제였다. 다행히 나무에 지지되어 철조망을 연결하고 있어 나뭇가지를 잡고 턱걸이를 하듯 몸을 들어 올려 맨 위의 철조망을 밟은 후 그 반대편으로 뛰어 내렸다. 이제는 어떻게 등산로(정맥길이면 더욱 좋고)를 찾느냐하는 문제가 남았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아니면 말고식이 그래서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무조건 정상에 오르다 보면 재수가 좋아 정맥길을 발견하면 다행이고, 아니면 핑계에 오늘 등산을 접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안심시켜 본다.
08시 30분, 불과 10분만에 596.5봉에 도착하여 삼각점을 확인하였다. 산행기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수암골에서 올라오는 등산로가 있는 것은 분명하였고, 내가 약간 벗어나서 올라왔을 뿐이었다. 정맥 리본도 확인하였으니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08시 45분, 비가 잠시 멈추자 늦은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다. 09시 정각에 다시 비가 쏟아져 짐을 챙겨 칠보산으로 부리나케 진행하였다. 칠보산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에 도착하였지만 산행기에 적혀있는 칠보산 비석은 보이지 않는다. 억새풀속에 묻혀 내가 확인을 못한 것 같았다.
09시 30분 객골 임도가 나타났다. 갑자기 계속하여 보이던 리본이 보이질 않는다. 500여미터 이상 하산하였다고 생각되는데, 아무래도 길을 잘못 잡은 것 같았다. 다시 올라가 마지막 리본이 있는 장소로 가보기로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유심히 살펴보니 잘 표시가 나지 않는데 갑자기 우측으로 꺾도록 되어 있었다. 20분을 알바한 셈이 되었다.
<육덕 이병구님의 표시기>
10시 30분 칠보치를 지나자 굿소리가 들렸다. 도로에서 가까운 곳도 아닌데 이런 심산유곡에서 우중에 무당이 굿을 하는 모습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구경하다가 같텐데, 소름이 돋으며 그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 11시 30분 질마재에 도착하였다.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아예 양동이로 물을 퍼 붓듯 쏟아낸다.
13:10
좌구산에 도착하였다. 내리던 빗줄기가 약해지면 멈췄다. 판쵸를 뒤집어 쓰긴 했어도 온몸이 땀과 빗물로 인해서 안 젖은 곳이 없다. 등산화는 아예 잠수함이 되어 걸을 때마다 철퍼덕거리는 소리를 낸다. 좌구산 인근 주변이 어느 때인가 대형 산불이 났었는지 나무들이 온통 폭격을 맞은 것처럼 죽어 있었다. 그리고 정맥길은 1987부대 산악행군로와 같이 가고 있었다.
좌구산 정상에서 정맥길을 확인하지 못하고 약 1km 정도를 정남향으로 진행하니 헬기장이 나타났다. 운무가 얕게 깔리고 날이 밝아지는 느낌이다. 신발을 벗어 양말과 신발깔창의 물을 빼기 위하여 힘껏 짜냈다. 이제 출발하려고 보니 아까부터 보이지 않던 리본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헬기장에서 진행방향으로 조금 내려 서 봐도 여느 정맥길 같으면 지금쯤 붙어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은 게 이상하다. 그리고 분명 산행기에도 헬기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다시 좌구산 정상까지 되돌아 가서 조심스럽게 우측 방향으로 정맥길이 있는 지를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거의 감춰지다 시피한 정맥길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거의 30분을 헤매고 말았다. 이후에도 리본이 드물게 달려 있어 진행하더라도 정맥길인지 확신이 서지 않은 구간이 많았다. 온 정신이 정맥길을 확인하는 데에만 쏠려 있어 다른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14시 20분, 부점촌과 삼흥을 연결하는 임도가 나타났고, 15시 05분 증평저수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분젓치에 도착하였다. 15시 20분 구녀산에 도착하기 전 얼마전 이장한 것으로 생각되는 무덤가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였다. 부지런하게 구녀산에 오른 후 구녀성을 하산하여 16시 15분 이티재에 도착하였다. 매점이 보이길래 식수를 보급하고 음료수를 사기 위하여 지갑을 찾았지만, 지갑이 보이질 않는다. 배낭을 다 뒤져봐도 없다. 참으로 난감하다.
지갑속에는 9만원 정도의 돈과 주민등록증, 회사 신분증, 그리고 신용카드가 들어 있었다. 잃어버릴 만한 곳은 두군데이다. 행치고개까지 택시를 타고 왔으니 택시안에서 잃어버렸거나, 또 택시에서 내린 후 행치재 휴게소 앞에서 잘 챙기지 못해 떨어 뜨렸거나 아니면 정자에서 비박할 때 밑 바닥으로 떨어 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돈이야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신분증과 신용카드를 분실하였으니 사후처리 하기가 번거롭고 불편하다. 상점의 주인아저씨가 텔레뱅킹을 하도록 권유한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였었는데, 좋은 아이디어를 주신 것이다. 와이프에게 주인 아저씨께 5만원을 입금하도록 한 후 주인 아저씨가 입금을 확인하자 바로 5만원을 내주셨다.
16:45
지갑분실 때문에 30분을 지체한 후 상단산성으로 향하였다. 날이 어둡기 전에 끝내야 하기 때문에 통상 일반 등산객들이 4~5시간 걸리는 도상거리 10km 정도의 거리를 2시간에 끝내기로 생각하고 들머리를 찾았다. 산악마라톤으로 달렸지만, 갈림길이 많지 않고 대체적으로 리본이 촘촘히 달려 있어 길을 확인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안등뱅이를 지나자 커다란 오소리 한 마리가 나를 발견하지 못하였는지 뒤뚱거리며 내려오다 바로 앞에서 나를 발견하곤 황급하게 숲속으로 도망간다. 등산로마다 파놓은 구덩이가 전부 멧돼지가 그러한 줄 알았는데, 범인은 오소리였다. 돼지의 습성상 마구 파헤쳐 놓기는 하더라도 정교하게 구멍을 뚫지는 못하니 이제 확실한 범인을 알게 되었다. 오늘만 하더라도 벌써 두 마리의 오소리를 보게 되었다. 한 마리는 새끼였는데, 나를 발견하고는 줄행랑을 쳤다. 비가 와서 그런지 등산로마다 지렁이와 두꺼비가 지천으로 활보를 하고 있었다.
18:45
무덥지도 않은데다 날파리와 하루살이가 없으니 달리기에는 그만이었다. 18시 35분, 채 2시간도 되지 않아 상당산성에 도착하였다. 지도에는 산성 우측으로 진행하도록 되어 있는데, 리본은 좌측임도로 진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어차피 산성에서 마감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좌측으로 진행하고 산성안에서 자녁식사를 하고 시내버스 편으로 청주에 가기로 하였다.
18시 45분, 산성안으로 들어가니 토속 음식점들이 많았다. 정류장에서 가까운 식당에 들러 막걸리와 비빔밥을 주문하고 화장실에서 몸을 씻은 후 마른 옷으로 갈아 입어 막걸리를 들이키자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다.
와이프에게 전화를 했다. “지갑 분실한 것을 아깝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오늘 10만원의 가치보다도 더 큰 추억을 얻어 가지고 간다”라고 했다.
19시 39분, 상당산성에서 청주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20시 30분 청주 북부정류장에서 서울행 버스를 타니 22시 서울 남부터미널에 하차한다. 23시 정각, 집에 도착하여 잠을 청하니 세상 모르게 깊은 잠에 빠진다. 꿈속에서 산행 도중 갑자기 커다란 개가 달려들자 깜짝 놀라면서 잠에서 깼다. 오전 9시였다.
충분히 쉬고 오늘 밤 7시 20분 청주행 시외버스를 타고 상당산성에서 나머지 구간을 연결하고자 했으나 와이프가 극구 말린다. 내일 전국적으로 큰 비가 내리니 걱정되어 절대 안된다는 것이다. 할 수 없다. 거의 언제나 산에 가는 것만큼은 내가 이겼지만 이번에는 와이프에게 져 줘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나머지 64km는 다음 주 토요일과 일요일을 이용해서 연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남금북 정맥을 완주하고 백두대간을 연결하는 기대가 되는 다음 주 일정이 나를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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