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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안내 자료
1일차 (2011년 8월 13일)
상림공원
상림은 함양읍 서쪽을 흐르고 있는 위천의 냇가에 자리잡은 호안림(護岸林)이며 신라 진성여왕 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에 조성한 숲이다. 당시에는 지금의 위천수가 함양읍의 중앙을 흐르고 있어 홍수의 피해가 심하였다고 한다. 최치원 선생이 둑을 쌓아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지금까지 이어오는 숲을 조성하였다. 당시에는 이 숲을 대관림(大館林)이라고 이름 지어 잘 보호하였으므로 홍수의 피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 후 중간 부분은 파괴되고 지금까지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으며, 하림구간은 취락의 형성으로 훼손되어 몇 그루의 나무가 서 있어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총면적이 약 21Ha로써 숲의 길이는 1.6Km에 달하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인공림이라 하겠다. 울창한 이 숲에는 120여종 20,000그루의 낙엽, 활엽수로 어우러져 봄의 신록, 여름의 녹음, 가을 단풍과 겨울의 설경들 사철을 통하여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숲 속에는 가운데로 수로가 있어 날씨가 가물 때에도 충분한 수분을 공급할 수 있어 항상 녹음이 짙으며 잔디밭(3,000여 평)과 이은리 석불(유형문화재 제32호)과 함화루(유형문화재 제258호) 및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문화재자료 제75호), 척화비(문화재자료 제264호) 그리고 사운정, 초선정, 화수정 등 정자와 만세기념비, 독립투사들의 기념비와 동상, 역대군수/현감선정비군, 야외 공연장인 다볕당 등이 있어 이 숲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지안재
함양인터체인지에서 함양읍을 지나 24번 국도를 타고가다 지리산으로 가는 1023번 지방도를 만나 갈아타면서 좌회전. 인월면사무소 방향으로 가다 구룡리 방향으로 또 좌회전하면 지안재가 멀지 않다.
왼쪽은 법화산이요 오른쪽이 백운산. 그 사이의 삼봉산에 지안재가 있다. 재는 아무런 잡목이 없어 훤히 그 오름이 멀리서도 보인다. 구불구불. S자형의 그 곡선이다. 밤이 되면 그 곡선은 차량의 불빛 궤적이 일구는 형용할 수 없는 묘미를 자아낸다. 그 때문에 숱한 사진가들이 매력을 느끼는 길이다.
오도재
마천면 삼정리 영원사(靈源寺) 도솔암에서 수도하던 청매(靑梅) 인오조사(印悟祖師)(서기1548~1623 西山大師의 弟子)께서 이 고개를 오르내리면서 득도한 연유로 오도재라는 이름을 얻었다. 오도재(773m)는 삼봉산(1,187m)과 법화산(991m)이 만나는 지리산 관문의 마지막 쉼터로 예로부터 영남학파 종조인 김종직 선생을 비롯하여 정여창, 유호인 선생, 서산대사, 인오조사 등 많은 시인 묵객들이 걸음을 멈추며 지리산을 노래했고, 벽소령과 장터목을 거쳐 온 남해, 하동등지의 해산물이 이 고개를 지나 전라북도, 경상북도, 충청도 지방으로 운송된 육상 교역로였다.
1888년(고종25년)까지 오도재 아래 제한역(蹄閑驛) (현재 함양읍 구룡리 조동)을 두어 이곳을 통행하는 人馬와 物産을 관장케 했던 것으로 보아 오도재를 통행한 교통량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자동차 도로가 만들어지고 蹄閑驛이 폐지되면서 수많은 길손들의 만남의 광장이었던 여기 오도재는 옛날의 추억을 간직한 채 삼봉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무릎을 내어주는 쉼터가 되어 왔다.
2003. 11. 30일 지리산 천왕봉과 마주선 이 곳 오도재에 『지리산 가는 길』이 새로이 뚫려 전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되면서 비로소 함양 지리산 관광시대의 서막을 열게 되었다. 靑梅 印悟祖師께서 득도한 神靈스러운 곳이며, 한양가는 길이었던 오도재가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으로 찾아드는 가장 짧은 길목이며 관광도로로써 지리산의 기를 받는 곳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조망공원
오도재 정상 바로 아래 지리산 주능선 (노고단~천왕봉)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드넓은 지리산 조망공원을 조성하여 이곳을 지나는 관광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뿐 아니라, 대자연의 어머니라 불리는 지리산을 한눈에 바라보고 있으면 속세의 모든 근심을 잊고 호연지기가 절로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실상사
실상사(實相寺)는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최초의 선종(禪宗)사찰이다. 구산선문이라 함은, 신라말부터 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禪宗)이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고려초기까지 형성된 9개의 산문을 말한다.
구산선문은 최초로 남원 실상산문(實相寺)이 개창된 이후 장흥 가지산문(寶林寺), 강릉 사굴산문(屈山寺址), 곡성 동리산문(泰安寺), 보령 성주산문(聖住寺址), 영월 사자산문(興寧寺), 창원 봉림산문(鳳林寺址) 등 7개의 산문과 고려시대에 형성된 해주 수미산문(廣照寺址)과 문경 희양산문(鳳岩寺)을 말한다.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828년)에 홍척국사(洪陟國師)가 개창한 최초의 선종가람이다. 창건 초에는 지실사(知實寺)라고 하였으나, 구산선문이 분파 대립하던 시기에 하나의 종파로서 그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산문의 개산조 홍척대사의 존칭인 "실상선정국사(實相禪定國師)"의 앞머리를 따서 고려 초부터 실상사(實相寺)로 부르게 되었다.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천왕봉과 마주 하면서, 남쪽으로는 반야봉, 서쪽으로는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채 천년의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하여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 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 지리산 사찰 중에서 平地에 자리한 절은 이곳 실상사와 단속사가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된 채 석탑만 남아있고, 실상사는 여전하게 사찰의 구실을 하고 있다.
실상사(實相寺)는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 3)에 홍척국사(洪陟國師)가 창건하였으며, 구산선문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유서깊은 사찰이다. 선종이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것은 신라 제36대 혜공왕 때이지만 발전을 보지 못하다가,
도의(道義)국사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수학하고 돌아온 홍척(洪陟)스님이 흥덕왕의 초청으로 법을 강론함으로써 구산선문 중 최초 사찰로 개창한 것이다. 홍척스님은 이곳에 실상사를 세우고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전국에 선종을 널리 알렸는데 이들을 실상사파(實相寺派)라고 불렀다.
그의 제자로 수철(秀澈), 편운(片雲) 등 두 대사가 나와 이 宗山을 더욱 크게 번창시켰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어 약 200년간 스님들은 부속암자인 백장암(百丈庵)에 기거하다가, 1690년(숙종 16)에 이르러 침허대사(枕虛大師)가 300여 명의 스님들과 함께 나라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36동의 건물을 세우는 대규모의 불사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실상사는 우리나라에서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국보와 보물을 가지고 있는 절로도 유명하다.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보물 제33호인 수철화상능가보월탑, 보물 제34호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보물 제36호인 부도(浮屠), 보물 제37호인 삼층석탑 2기(基)가 있다.
또한 보물 제38호인 증각대사응료탑과 보물 제39호인 증각대사응료탑지, 보물 제40호인 백장암 석등, 보물 제41호인 철제여래좌상, 보물제420호인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 보물 제421호인 약수암 목조탱화 등이 있다. 모두 국보 1점, 보물 10점 등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귀중한 문화유산인 셈이다.
불교에는 교(敎)와 선(禪)의 양대 종파가 있다. 敎는 불교경전을 통하여 점차 道를 닦음이요, 禪은 문자를 통함이 없이 좌선(坐禪)을 통하여 도를 깨닫는 것이다. 신라의 교종에는 5宗이 있었는데, 열반종, 화엄종, 계율종, 법성종, 법상종이 그것이다.
선종에는 남원의 실상사, 장흥 가지산의 보림사, 곡성 동리산(棟裡山)의 태안사(泰安寺), 삼가리의 굴산사(屈山寺), 영월 사자산의 흥녕사(興寧寺), 창원 봉림산의 봉림사(鳳林寺), 문경 희양산의 봉암사(鳳岩寺), 보령 성주산의 성주사(聖住寺), 해주 수미산의 광조사(廣照寺) 등 구산선종 또는 구산선문이 있었다.
이와같이 교(敎)와 선(禪)을 합쳐 오교구산(五敎九山)이라고 한다. 선종은 달리 달마종(達磨宗) 또는 조계종(曺溪宗)이라고 한다.
인과율(因果律)에 의한 기존의 교종불교는 사람의 운명이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적 인식이었고, 반면에 禪宗의 사상은 마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혁명적인 의식을 제공하였다.
선종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아[直指人心], 중생이 본래 지니고 있는 불성에 눈뜨고[見性成佛], 대립과 부정을 상징하는 문자를 뛰어넘어 초월의 세계로 지향하여[不立文字], 번쇄한 교리를 일삼은 교종(敎宗) 종파들이 소홀히 다루어 온 부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본래 의미를 따로 전한다[敎外別傳]는 4구의 구절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정리한다. 이것이 4구표방(四句標榜)이다.
실상사에는 "일본이 興하면 실상사가 亡하고, 日本이 망하면 實相寺가 흥한다"라는 口傳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에 있는 법계사에서도 같은 口傳이 있어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실상사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鐘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기듯 치고 있다.
벽송사
이 사찰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신라말경에 창건된 후 조선 중종 경진년(1520)에 벽송 지엄대사(碧松 智嚴大師)가 중창, 『벽송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 이전에 한국 선맥을 이어온 벽계정심(碧溪正心)과 벽송지엄(碧松智嚴), 부용영관(芙蓉靈觀) 뿐만 아니라 환성지안(喚醒志安), 서룡상민(瑞龍祥玟) 등 조선 선맥을 빛낸 8분의 조사가 이 벽송사에서 수도 정진한 도량으로써 한국 선(禪)과 벽송사의 인연은 각별하다 숙종30년(1704) 실화(失火)로 소실(燒失)되었다가 환성지안(喚醒志安)대사가 중건하였고, 철종 원년(1850)에 서룡당 상민(瑞龍堂祥玟)대사가 중수하였으나 1950년 6.25동란 때 다시 소실되어 1960년 원응 구한(元應 久閒)스님이 쓰러진 가람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법당인 보광전(寶光殿)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장선원(方丈禪院)과 간월루(看月樓)가 있으며, 전면에는 산문(山門)과 종루(鐘樓)를 배치하였고, 후면에는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또한 경내에는 보물제474호인 『벽송사3층석탑』과 민속자료 제2호인 『벽송사 목장승』,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인 벽송당지엄영정(碧松堂智嚴影幀), 경암집책판(鏡巖集冊版), 묘법연화경책판(妙法連華經冊版)등의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특히 이 사찰은 1950년대 전란(戰亂)시 빨치산 루트로 사용되는 등 처참한 비극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서암정사
서암은 벽송사의 주지스님이 15년 전에 이곳으로 옮겨와 주변 경관을 다듬었는데 가히 살아서 볼 수 있는 극락세계이다.
한국불교 禪宗의 법승을 계승한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고찰인 벽송사로부터 서쪽으로 600여m 지점에 위치하여 천연의 암석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사찰이다. 한국전란으로 인하여 황폐해진 벽송사를 다시 재건한 원응스님이 이 도량을 찾아 장구한 발원을 세우고 지리산의 장엄한 산세를 배경으로 수려한 자연자원과 조화롭게 자연암반에 무수한 불상을 조각하고 불교의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극락세계를 그린 조각법당을 10여년간에 걸쳐 완성하여 그 화려함과 웅장함이 과히 장관을 이루고 있다. 사찰 입구에 불교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대방광문이 있고 바위에 조각된 사천왕상을 지나 도량 안으로 들어서면 아미타여래가 주불이 되어 극락세계를 형상화한 석굴법당이 있고, 도량 위편에는 무수한 불보살이 상주하는 광명운대, 그리고 스님들의 수행장소인 사자굴 등이 있다. 이는 모두 자연의 암반에다 굴을 파고 조각을 함으로써 불교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건축학적으로도 특이한 기법을 보이고 있어 학계에서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 계곡 중 아름답고 웅장하기로 유명하여 3대 계곡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칠선계곡의 초입에 위치하고 있어, 연중 많은 신도 및 문화 탐방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용유담
엄천강의 상류에 있는 용유담은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인 송전리라는 마을에 속해 있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계곡들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이곳에서 합류된다. 깨끗한 물이 용유담에 이르러서는 해가 쨍쨍 내리쬐는 화창한 대낮에 우뢰 소리같은 천지폭포의 쏟아지는 소리를 비롯하여 장방형의 평평한 호수를 이루게 된다.
화강암으로 된 기암괴석이 첩첩이 쌓인 험준한 봉우리는 용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형상이라고 하겠다. 이 용유담은 신선이 노니는 별천지로서 여름이 되면 각처의 피서객들이 휴식처를 찾아 모여들어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세진대
세진대는 지리산 둘레길인 세동마을에서 송대마을 가는 중간에 있는 소나무와 바위로서, 소나무 쉼터라고도 불리어 지는 곳이다. 이 소나무를 마적송이라고도 하는데 높이 20m, 둘레 2.6m에 약 400년 정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큰 바위(마적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독특한 소나무다. 거대한 바위 위에 나서 자랐는데, 기름진 땅에서 자란 소나무들보다 더 푸르고, 울창하고 생기가 넘친다.
소나무 아래는 약 20명 정도가 한번에 앉을 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있고, 바깥쪽은 절벽으로 되어 있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너무나 아름답다.
이 소나무에서 아래를 굽어보면 엄천강 줄기와 용유담이 보이며, 고개를 들면 저 멀리 견불동 마을과 60번 국도가 한 눈에 보인다.
요즘은 지리산 둘레길의 많은 이용객들이 여기서 피곤한 심신을 털어내는 안식처로 삼고있다. 정확한 장소 지명은 세진대인데 소나무쉼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세동농장
총면적 33,835㎡(약 일만평)의 임야에서 일부(일백삼십평)를 창고용지로 전용하여 컨테이너농막 2동을 설치하고 전기 시설 및 지하수 개발을 완료.
2일차 (2011년 8월 14일)
칠선계곡
우리나라 3대 계곡이라면 보통 설악산 천불동계곡, 한라산 탐라계곡, 그리고 지리산 칠선계곡을 꼽는다. 이에 걸맞게 칠선계곡은 7개의 폭포와 수많은 소들이 모여 빼어난 계곡미를 자랑한다. 특히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 지대로 부르는 마폭포와 천왕봉간의 울창한 수림은 가히 독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아직은 오염되지 않은 느낌을 받는 칠선계곡 코스는 지리산 계곡 등반로 중에서 가장 길고 험한 곳으로 유명한데 세심한 주의와 충분한 사전준비가 요구된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 길이 비교적 뚜렷한 편이지만 종종 엉뚱한 길로 접어들어 고생하는 경우도 있다. 각 산악회에서 설치한 리본을 확인해가며 등반한다면 무난하다. 비 오는 날에는 미끄러운 바위 비탈길과 계곡 건너는 데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다. 특히 여름 장마철에는 계곡 내에 인공시설물이 전혀 없기 때문에 계곡을 건너는 데 극히 위험함은 물론 겨울철에도 북향의 깊은 골짜기라서 적설량이 많고 기온이 급강하하여 등반의 최악조건을 형성한다. 충분한 장비없이 섣불리 도전하는 것은 절대 삼가야 한다. 그리고 여름철 계곡에서 물놀이하다 심장마비로 익사하는 사건도 종종 발생하므로 주의를 요한다.
추성 삼거리에서 곧바로 오르면 우측으로 계곡 건너편에 노송이 운치있게 우거져 있는 솔밭이 보이고 감나무와 호두나무가 인상 깊은 추성동마을에 이른다. 여기서 계곡에 가로놓여 있는 나무다리를 건너면 멀리 하봉과 국골의 깊은 골짜기가 신비스럽게만 느껴진다.
논밭 사이로 잘 나 있는 길을 얼마간 오르면 갈림길 이정표가 나온다. 여기서 좌측 논둑길과 농수로를 따라 500m 간 곳에 추성 용소가 있다. 직사각형의 시퍼런 소로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가 우렁차고 길게 홈 파인 암반이 기묘하다. 옛날마을에 우환이 있을 때나 기우제 때 돼지를 제물로 바치며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전국 도처에서 몰려든 기도객들이 이곳에 간이천막을 치고 기거하고 있어서 마치 무당촌 같은 느낌이다.
두지동
용소로 가는 갈림길에서 등반로는 위쪽길로 오르게 되는데 두지터가 보이는 고개마루에 이르면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곧바로 산비탈길을 가로질러가면 두지터 마을에 도착하게 되며 좌측 내리막길로 덤불숲을 헤쳐가면 모과나무밭을 지나 결국 칠선약수터가 있는 대숲에서 두 길은 만나게 되는데 요즈음은 주로 두지동마을을 경유하여 등정을 하는 경향이다.
담배건조소 건물이 우뚝 솟아 있는 두지터 마을에는 매점과 민박을 겸한 칠선휴게소와 산비탈에 호두나무 등을 가꾸는 농가 서너채가 있다. 오목한 평지로 사방을 산자락이 감싸고 있는 이곳 지형이 쌀뒤주를 닮았다 하여 두지터로 부르며(일설에 두지터가 가락국 어느 임금이 국골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 식량창고였다는 얘기가 있다. 지형상으로 부르는 의미가 아닌 역사적인 전설 속에서 해석되는 얘기인데, 또 한편으로 광점동에서 2km 들어간 얼음터가 당시 석빙고였다는 그럴 듯한 얘기도 전해온다) 두지터 뒤쪽 창암산 능선을 넘어 백무동으로 가는 희미한 길도 있다.
칠선동
대숲에서 조금 가면 거대한 소와 기묘한 암반 위로 맑은 계류가 흐르는 계곡을 철다리를 통하여 건너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덩굴숲 우거진 갈지(之)자의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가게 되고 감나무와 잡초속에 묻힌 옛 칠선동 마을터를 지난다. 화전민들의 독가촌 정리방침과 이농 등으로 지금은 한 가구도 살고있지 않다.
망바위
칡넝쿨과 잡목을 헤치고 올라서면 길은 평탄해지고 얼마 안 가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넓직하고 평탄한 바위가 나오는데 여기가 전망 좋은 쉼터인 추성 망바위이다.
선녀탕
망바위에서부터는 다소 오르내리지만, 계곡물 소리가 아득히 들리며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숲이 울창한 숲 소로길이다. 옛 숯가마터가 하나 나타나고 어느덧 물소리가 커지면서 계곡으로 나온다. 추성동에서 4km 지점인 선녀탕이다.
지금은 모래와 돌로 다소 메워진 선녀탕에는 동화와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일곱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곳 선녀탕에서 목욕할 때 평소 선녀들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곰이 선녀들의 옷을 훔쳐 바위틈에 숨겨버렸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맬 때 마침 사향노루가 자기의 뿔에 걸려있는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주어 일곱선녀는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곰이 바위틈에 누워 있던 노루의 뿔을 나뭇가지로 잘못 알고 선녀들의 옷을 숨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녀들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노루를 칠선계곡으로 집단이주시켜 살게 하고 곰은 이웃 국골로 내쫓아버렸다고 한다.
옥녀탕
선녀탕의 바로 위에 수심 3-4m, 넓이100여 평 남짓한 옥녀탕이 반긴다. 매끈한 암반으로 흘러내린 맑은 계류가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고, 푸른 하늘을 가려버린 짙은 녹음이 물에 비치는 꿈 같은 경치가 가히 일품이다. 칠선계곡에서 가장 넓고 빼어난 소가 바로 옥녀탕인데 그 옆에는 넓직한 반석도 있어 휴식에는 최적이다.
비선담
옥녀탕 위쪽으로도 계속해서 기암과 옥류가 멋진 소를 만들어내 비경의 연속이다.
돌길을 따라 때로는 아찔한 벼랑과 미끌미끌한 바위를 비껴 지나야 하는 다소 까다로운 길이지만 하늘이 그대로 잠긴 듯한 짙푸른 비선담에 이르러서는 피로도 싹 가신다.
첫댓글 조망공원(마고할미상 새로 세워놓은데)에 거기 가보고 싶고요, 칠선계곡 어디메에서 우리 모두 신선이 되어버립시다.ㅎㅎㅎ 제학사님 너무너무 감사하고요, 두손두발 다 들었으니 그냥 알아서 하십시오 ㅎㅎㅎ 꾸벅~~~
벌써 반 년이 훌쩍 날아가 버렸네요. 여름의 신선이 되게 많은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