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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4월 11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대승찬 61번부터 할 차롄데
61.다만 지짐 냄비 옆에서 구운 떡 먹기를 바랄 뿐
근본으로 돌이켜 밀가루를 볼 줄은 모른다.
但欲傍鏊求餠하고 不解返本觀麵이로다
단 욕 방 오 구 병 불 해 반 본 관 면
단욕방오구병但欲傍鏊求餠하고 불해반본관면不解返本觀麵이로다 이게 이제 위에서부터 이제 내용이 이어지는데요
가소중생준준可笑衆生蠢蠢이 각집일반이견各執一般異見이라
중생들이 꿈틀거린다고 하는 것이 뭐 몸이 꿈틀거린다는 뜻은 아니구요 마음이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고 계속 꿈틀대고 있죠 뭐 나부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냥 한시도 안 있고 우리의 그 마음이 작용을 하는데 그 작용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좋은 어떤 사고를 하면은 좋겠으나 그렇지 못하고 자기 좁은 소견을 가지고 또 자기가 그 먼저 이렇게 어디서 들은 거라든지 배운 거라든지 이런 그 선입견을 가지고 거기에 딱 매여가지고 더이상 그 어떤 변화가 없는 그런 그 소견을 가지고 별별 생각을 지어낸다면은 그건 참 문제가 많죠.
그래서 각집일반이견各執一般異見 이말은 이제 모두 다 똑같이 이말입니다. 일반이라는 것은, 한가지로가 한가지 이견이 아니라 똑같이 그렇게 뭐 한가지로라는 뜻도 이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만은 다른 소견을 각각 집착한다는 이말이예요. 누구나 다 일반이라면 누구나 다 다른 소견을 가지고 있다.
그렇죠, 사람들이 그, 불교에 우리가 입문하는 것 그것만 가지고 우리가 이야기해 보면은 전부 자기가 만든 불교가 있어요 보면은. 뭐 불교 공부했든 안했든 어디서 줏어들었든 자기나름대로 짐작을 했든 간에 처음에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도 그 나름대로 자기 불교를 가지고 그렇게 이제 불교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뭐 상당히 믿을 만한 사회적 학식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뭐 불교가 와서 불교를 배울려고 하는 그런 자세가 아니고 자기가 불교는 이런 것이려니, 또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이러이러한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려니 이렇게 이제 어림짐작을 해와가지고 수십년 절에 드나들고 스님들과 아주 친하게 지낸다고 자랑은 하면서도 그 소견은 하나도 불교적인 소견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실천 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그건 그 다음 문제예요 일단은 바르게 알고 그것을 이제 중생들의 어떤 그 집착이라고 할까 욕심이라고 할까 어떤 본능이라 할까 이런 것 때문에 바꾸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올바른 생각은 아니고 아전인수격인 내 개인의 욕심이다 하는 것 이건 분별할 줄 알고 해야죠.
한 예로써 부처님은 어떻습니까 왕위를 다 버린 분이죠. 버리고서 행복을 찾도록 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뭐 대다수 사람들은, 대다수 사람들은 불교에 와서 또 부처님에게 와서 버림으로써 어떤 그 소득을 얻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취하고 얻음으로써 뭔가 자기의 어떤 그 행복을 추구할려고 하는 거죠.
불교는 버림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는 길이라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행복은 취하고 얻음으로써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 이렇게 이제 선입견이 그래 들어있기 때문에 부처님도 그렇게 보고 불교도 그렇게 보고 이제 그렇습니다. 그게 이제 참 중생의 한계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그러나 이제 알고는 있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어떤 그 행복의 길은 버림으로써 행복에 나아가는 것, 또 보통 세속적인 행복의 길은 취하고 얻고 가짐으로 해서 행복에 나아 간다 이렇게 이제 보는 거죠. 여기 이견異見이라고 하는 한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은.
그러나 이제 뭐 이런저런 여러가지 소견이 다른 것이 근본은 어떻습니까 텅 빈 마음자리죠 텅 빈. 공적한 마음자리입니다. 적멸寂滅 적멸이라고도 말을 하고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그랬습니다. 적멸이 왜 낙이 되느냐 우리 본성이 적멸하기 때문이죠. 그게 이제 정말 근본자리인데 여기 이제 비유를 이렇게 들었습니다.
다만 냄비 옆에서 구운 떡 먹기를 바랄 뿐 그 지짐 냄비 옆에서 구운 떡을 구할려고만 하고 불해반본관면不解返本觀麵이로다 근본으로 돌아가서 근본에 돌이켜서 밀가루를 볼 줄 모른다. 이건 이제 밀가루를 볼 줄 모른다 하는 것은 뭐 별별 떡이 다 있죠. 또 밀가루로 만든 음식이 얼마나 여러가지입니까 그런데 하나의 밀가루다 하는 것입니다. 근본은 하나의 밀가루다. 우리 소견이 각양각색하지만은 근본은 공적한 마음자리, 적멸한 마음자리다.
62.밀가루가 옳고 그름의 근본이지만,
사람의 조작을 말미암아 백가지로 달라진다.
麵是正邪之本이라 由人造作百變이라
면 시 정 사 지 본 유 인 조 작 백 변
면시정사지본麵是正邪之本이라 그랬어요. 밀가루라고 하는 것은 정과 사의 근본이다. 여기서 정正과 사邪라고 했지만은 뭐 별별 모양 상대적인 모든 현상들의 근본이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은 사람들이 조작함을 말미암아서 백가지 천가지로 변한다. 유인조작백변由人造作百變이라 그랬잖습니까.
밀가루 하물며 밀가루도 그런데, 모양이 없는 우리의 마음자리 적멸寂滅한 마음자리 공적空寂한 마음자리를 가지고 뭐 자기가 들은 대로 익힌 대로 습관 대로 또 뭐 가정에서 배운 대로 학교에서 배운 대로 친구에게서 배운 대로 어디 책에서 읽은 대로 그 나름대로 그냥 배운 것이 전부 그 하나의 살림살이가 되어 있어 가지고 다른 소견을 이제 가지고 있는 거죠. 근본은 텅빈 마음자리 공적한 마음자린데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문空門에 득도得道라 그랬죠. 득도공문得道空門 이런 말도 하고요. 텅 빈 문門에서 도道를 얻었다 행복의 길을 얻는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적멸위락寂滅爲樂 낙이라는 건 행복이죠. 그런 적멸한 자리 텅빈 마음자리를 우리가 볼 때 비로소 정말 바람직한 행복이 거기에 있다. 그래서 공문에서 도를 얻는다라고 하는 것 그 공문이 뭐겠습니까 공한 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텅 빈 마음자리 적멸한 자리 거기서 비로소 도를 얻는다 라고 하는 그런 표현, 똑같은 거죠. 밀가루는 그런 본성은 하나인 밀가루인데 백가지로 변하듯이 비유하자면 그와 같다 이런 말입니다.
63.필요에 따라서 마음대로 만들어 내나니
좋아하는 것만 치우쳐 탐할 것이 아니다.
所須任意縱橫이니 不假偏耽愛戀이라
소 수 임 의 종 횡 불 가 편 탐 애 연
소수임의종횡所須任意縱橫이니 구하는 바대로 필요에 따라서 마음대로 만들어내나니 불가편탐애연不假偏耽愛戀이라 좋아하는 것만을 우리가 치우쳐 탐할 것이 아니다. 이건 증도가나 뭐 신심명에서나 여기 대승찬에서나 끊임없이 깨달은 분들의 말씀은 중도中道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디에도 치우치는 것을 제일 금기사항으로 생각해요.
부처님이 처음 깨닫고 나서 오비구五比丘에게 설법하신 것도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다 그런 말을 해요. 중도를 나는 깨달았노라 그랬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뭐 아주 그 저 호화로운 그런 향락의 생활 태자시절의 향락생활도 지냈죠. 그러면서 정반대의 6년간이라고 하는 피나는 고행생활도 했죠. 그런데 그게 둘 다 다 바람직한 삶의 길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죠. 향락의 생활도 고행의 생활도 그게 바람직한 삶은 아니다 그랬습니다. 거기에 치우치고 떨어지면은 안된다는 거죠. 그래서 이제 중도를 선언하게 되었다 하는 것이죠. 그래서 불가편탐애연不假偏耽愛戀이라 자기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자기 좋다고 해서 거기 치우쳐서 그래 탐할 것이 아니다 어떤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64.집착 없음이 곧 해탈이요
구함이 있으면 다시 그물에 걸린다.
無著卽是解脫이요 有求又遭羅罥이라
무 착 즉 시 해 탈 유 구 우 조 라 견
무착즉시해탈無著卽是解脫이요 집착함이 없는 것이 곧 해탈이요. 그렇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치우치지 않는 것,
이것이 곧 해탈解脫이다. 벗어난 거죠. 그러니까 치우치지 아니하고 집착하지 아니하면은 무엇이든지 또 가능합니다. 뭐 다 버리는 것도 아니예요. 그저 단 집착하지 않고 치우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인연에 맡기는 것이죠.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선禪은 저절로 그러함입니다. 불교는 저절로 그러함을 우리가 이해하는 거죠. 모든 것은 다 저절로 그러하게 되어 있는 것. 그게 이제 가장 바람직한 삶이다 그걸 이제 해탈解脫이다 그럽니다.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유구우조라견有求又遭羅이라 구하는 것이 있으면은 또한 그물에 걸린다. 그물에 걸림을 만나게 된다. 그렇죠 무구내락이라 유구개고有求皆苦요 무구내락無求乃樂이라 그렇죠. 구함이 있으면 다 괴로운 것 말하자면 구함이 있으면 그 구할 것 때문에 움쭉 달싹 못하죠 국회의원 나올려고 하는 사람들이 평소에는 뭐 본 척 만 척 하는 사람들이 표하나 얻기 위해서 허리를 그냥 90도로 구부리고 땅에다 대고 그냥 큰 절을 해대고 그 저기 뭐 청소하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고 길거리에서 그냥 조그마한 바구니 하나놓고 소매상하는 고런 작은 그런 그 구멍가게도 쫓아다니면서 그렇게 큰 절을 합니다. 그거 왜 그렇습니까 구하는게 있어서 그렇게 그물에 걸린거죠. 그건 한 예로써 말씀드린 것이고 우리가 주변을 살펴보면은 우리들도 어디엔가 다 각자 걸려 국회의원은 그런데 걸려있지만 또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다 각자 그렇게 옴짝달싹 못하고 걸리는 데가 있을 것입니다. 그거 결국은 구하는 게 있어서 그렇죠.
그래서 무구내락無求乃樂이라 구함이 있으면 괴롭지만 구함이 없으면 즐겁다. 그물에 걸리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뭐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시원하게, 시원하게 살라 또 무슨 그 사자처럼 당당하게 살라 그런 표현도 있죠.
65.자비로운 마음은 일체에 평등하고
진실하면 곧 깨달음이 스스로 나타나리라.
慈心一切平等하고 眞卽菩提自現이라
자 심 일 체 평 등 진 즉 보 리 자 현
자심일체평등慈心一切平等하고 자비로운 마음은 일체평등一切 平等하고 진정한 자비의 마음은 일체 평등합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은 정情이죠 그러나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의 중생을 위한 자비는 어떤 그 정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밑바탕에 되어있기 때문에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그런 그 자비를 행합니다. 그걸 비로소 자비라고 하는 거죠. 사실 내 자식 생각하듯이 모든 사람들을 다 그렇게 생각할 줄 알고, 우리 부모 생각하듯이 모든 그 어른들을 다 그렇게 생각할 줄 알면 그렇게 미루어서 생각할 줄 알면 그게 자비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데, 그런 그 자비심慈悲心은 일체평등一切平等하죠 일체평등해야 그게 비로소 자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 우리는 그런 한계를 언제 뛰어넘을 런지요 평소에는 뭐 누구에게든지 다 좋게 생각할 수가 있고 다 자비심을 행할 것 같지만은 전혀 그렇게 돼 있지 못하는 게 또 우리들의 실정이기도 하죠. 진즉보리자현眞卽菩提自現이라 진실하면 곧 깨달음이 스스로 나타난다. 저절로 나타난다.
66.만약 너와 나라는 두 마음을 품으면
부처를 대면하고도 부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若懷彼我二心하면은 對面不見面佛이라
약 회 피 아 이 심 대 면 불 견 면 불
약회피아이심若懷彼我二心하면은 만약 너다 나다 라고 하는 그런 두가지 분별심을 두가지 마음을 품게 될 것 같으면은 대면불견면불對面不見面佛이라 부처님을 얼굴에 앞에다 대하고도 부처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하는 것입니다. 얼굴을 뭐 마주하고 있은 들 그런 분별심이 있고 차별심이 있고 취사선택심이 있으면은 어떻게 부처님을 보겠습니까 부처님은 그런 것으로부터 취取사捨선選택擇으로부터 초월해 있는 분이기 때문에.
참 중요한 말입니다. 너다 나다 하는 뭐 우리가 당장에 그렇게는 안된다 하더라도요 부처님이나 깨달으신 분들이 보신 진리란 이런 것입니다. 어디도 치우치지 않고 궁극적으로 너다 나다 하는 그런 차별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부처님 마음을 알게 되고 부처님을 보게 될 것이고 그러면은 곧 부처님이죠 뭐 부처님 볼 줄 아는 마음이 준비돼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은 곧 부처님입니다.
대면불견면불對面不見面佛이라 너다 나다 그런 차별상 분별상에 떨어져 있으면은 뭐 부처님 보고도 부처님인 줄 모르죠. 당연하게 부처님은 그런 차별로부터 초월한 분이니까요 그러니까 부처님 안 봐도 부처님하고는 천리만리 떨어져 있어도 부처님의 정신에 입각해 살면은 그 사람은 부처님하고 더불어 사는 것이고 또 바로 부처님이고. 뭐 부처님을 그냥 항상 머리에 이고 산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정신에 입각해 있질 못하면 그사람은 부처님하고 천리만리 떨어져 있는 그런 그 삶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참 뭐 소가 수레를 끌 때 수레가 안 가면은 소를 때려야 옳으냐 그 수레를 때려야 옳으냐 하는 그런 그 조사스님들의 대화, 유명한 대화가 있듯이 불교를 이해하고 또 우리 삶의 바른 길을 이해하는데 참으로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지엽적인 것이고 무엇이 원리적인 것인지 그런 것을 참 깨닫게 해주는 아주 좋은 그 교훈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67.세간에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 많은가.
도를 가지고 다시 도를 찾으려 하는구나.
世間幾許癡人가 將道復欲求道로다
세 간 기 허 치 인 장 도 부 욕 구도
세간기허치인世間幾許癡人가 세간에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 많은가 장도부욕구도將道復欲求道로다 도를 가지고 다시 도를 구하고저 하는도다 그렇죠 도라는 게 뭐겠습니까 우리 삶이 그대로 도죠 그런데 그 삶을 도道로 볼 줄 모르고 다른데서 도를 구한다 말이죠 그게 이제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지공스님은 그것이 이제 우리들을 보고 세상사람들을 보고 어리석다 하는 것입니다. 손에 들고 찾는 격이죠.
그래서 도를 깨닫는 것은 세수하다 코만지기 보다 쉽다 그런 말을 해요. 코는 세수를 해야 만질 수 있지만 도는 그렇게 뭐 우정 어떤 노력을 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체가 도道니까요 삶 자체가 도기 때문에 세수하다 코만지기 보다 쉽다라고 하는 말이 맞는 말이죠. 그래 장도부욕구도將道復欲求道 로다 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시 도를 찾는다. 종로에서 서울이 어디냐고 하고 헤매면서 찾는 것과 같다
68.온갖 이치를 두로 찾기에 바쁘지만
자기 몸도 스스로 구제하지 못하네.
廣尋諸義紛紜이나 自救己身不了로다
광 심 제 의 분 운 자 구 기 신 불 요
광심제의분운廣尋諸義紛紜이나 온갖 이치를 두루 찾느라고 바쁘다 제의諸義 여러가지 이치를 널리 찾느라고 아주 분주하고 어지럽게 그렇게 하지만은 자구기신불요自救己身不了로다 스스로 자기 몸을 자기자신을 구제하는 것도 마치지 못한다 구제하지 못한다. 불요不了 라고 하는 것은 그거 이제 일을 마치지 못한다 하는 것입니다. 널리 아무리 뭐 찾으려고 한들 당장에 자기자신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죠.
69.남의 글과 어지러운 말만을 오로지 찾아서
지극한 이치가 묘하고 좋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專尋他文亂說하야 自稱至理妙好라
전 심 타 문 난 설 자 칭지 리 묘 호
전심타문난설專尋他文亂說하야 남의 글과 타문他文 또 어지러운 설명, 어지러운 말들만 오로지 찾아서 자칭지리묘호自稱至理妙好라 스스로 아주 그 지극한 이치 지극한 이치가 묘하고 아주 좋은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일컫는다 말이죠.
뭐 이건 뭐 내가 늘 경전이나 어록을 보면서 아주 그 탄복하고 또 좋아서 그렇게 합니다. 뭐 그것이 여기에 딱 해당되는 소리네요. 전심타문난설專尋他文亂說해서 자칭지리묘호自稱至理妙好로다 스스로 아주 지극한 이치다 하고 미묘하고 참 뛰어난 빼어난 그런 가르침이다라고 뭐 만고의 명언이다 천고의 명언이다 뭐 이런 표현들을 자주 쓰죠 저는. 그렇게 한다 이거죠.
70.한갓 수고로이 일생을 헛되이 보내고
영겁토록 생사의 바다에 빠지는구나.
徒勞一生虛過하고 永劫沈淪生死로다
도 로 일 생 허 과 영 겁 침 륜 생 사
도로일생허과徒勞一生虛過하고 한갖 수고로이 일생을 헛되이 지내고 영겁침륜생사永劫沈淪生死로다 영겁동안 생사에 빠지고 빠진다
71.혼탁한 애욕에 묶인 마음 버리지 못하면
청정한 지혜의 마음이 스스로 번뇌하여
濁愛에 纏心을 不捨하면 淸淨智心이 自惱요
탁 애 전 심 불 사 청 정 지 심 자 뇌
탁애濁愛에 전심纏心을 불사不捨하면은 아주 그 혼탁한 애착 때문에 혼탁한 애착과 아주 그 전심纏心 묶여있는 마음 어디엔가 묶여 있는 것 애착하는 마음이 묶여있는 마음이죠 결국은. 탁애濁愛나 전심纏心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을 버리지 못할 것 같으면 청정지심淸淨智心이 자뇌自惱요 청정한 지혜의 마음이 스스로 아주 시끄럽게 한다 번뇌하게 해서
72.진여법계의 울창한 숲이
도리어 가시와 잡초만 무성하네
眞如法界의 叢林에 返生荊棘荒草로다
진 여 법 계 총 림 반 생 형 극 황 초
진여법계眞如法界의 총림叢林에 진여법계총림 그대로가 진여법계 총림임에도 불구하고 반생형극망초返生荊棘荒草로다 도리어 가시와 잡초만 무성하게 한다. 저 앞에 이제 탁애濁愛 전심纏心때문에 그렇죠 아주 혼탁한 애착 애욕과 또 얽혀있는 마음 여기 저기 얼마나 얽혀있습니까
사람에 얽혀있고, 물질에 얽혀있고, 명예에 얽혀있고 살아온 상식에 얽혀있고, 자기가 쌓아온 지식에 얽혀 있고, 자기 조금 노력들인 것 거기에 얽혀있고 이것저것 중생은 뭘 그렇게 익히거나 만나거나 하면은 그걸로 딱딱 끝나지 않고 그게 그냥 마음속에 찌꺼기로 남아있어요. 아무리 좋은 지식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지식도 물론 그것이 이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좋은 교훈이긴 하지만은 또 그것이 또 사람을 얽어매는 수가 있습니다. 찌꺼기로 남아 있어 가지고 그것이 하나의 틀이 되고 기준이 되어가지고는 나중에 그야말로 형극황초가 되는 거죠.
진여법계는 우리 본 마음자리인데 진여법계의 그 울창한 숲에서 그만 형극荊棘 가시가 무성하고 잡초가 무성하고 이렇게 돼서는 이제 안된다는 거죠 형극과 잡초란 우리 마음에 집착하는 마음 분별하는 마음 시시비비하는 마음 그런 것들입니다.
73.다만 누런 낙엽을 황금이라 집착하고
황금을 버리고 보배를 찾을 줄은 깨닫지 못하네.
但執黃葉爲金하고 不悟에棄金求寶로다
단 집 황 엽 위 금 불 오 기금 구보
단집황엽위금但執黃葉爲金하고 불오不悟에 기금구보棄金求寶로다 다만 황엽을 누런 이파리를 집착해 가지고서 금을 삼고 금을 버려서 보배를 구할 줄을 깨닫지 못하도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아이, 우는 아이 달래기 위해서는 낙엽 든 어떤 나뭇잎을 낙엽을 가지고 이게 이제 금으로 만든 돈이다 이렇게 하는 거죠, 그러면 아이들이 그게 노라니까 금인줄로 그렇게 안다는 겁니다.
경전을 가지고 황엽이라고도 그렇게 하는데 부처님의 경전도 역시 이제 그런 그 가짜 돈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가짜 돈이 이제 진짜 돈인 걸로 그렇게 이제 착각을 하는 거죠 거기서 부터 집착을 떼야 되고 물론 그것을 통해서 눈을 뜨더라도 거기에서 또 초월해야 되는 것이 또한 그 불교공부의 요체입니다.
우리가 어록을 공부하고 경전을 공부하고 아 이 경전이나 어록을 통해서 그 참 과거에 대단히 뛰어난 뭐 우리는 뭐 백번 죽었다 깨나도 따라갈 수 없는 그런 뛰어난 성인들을 이렇게 만나게 됩니다. 참 고마운 일이죠. 이 저 지공스님 같은 이들도 이 대승찬이 없으면 어떻게 지공스님을 우리가 만나겠습니까 경전이 아니면 어떻게 부처님을 우리가 만나겠습니까 부처님을 만난다 성인을 과거 조사스님을 만난다 하는 것은 바로 경전과 어록을 통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또 설사 그 시대에 그런 위대한 분들과 같이 산다 하더라도 그들의 사상과 그들의 정신을 우리가 배우지 못하면 또 그것을 우리가 본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면은 뭐 부처님이 뭐 수억만명이 내 주변에 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경전이나 어록을 통해서 그들의 정신과 그들의 가르침을 이렇게 배우고 있음으로 해서 경전과 어록을 통해서 이제 그분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고 자꾸 친해지구요 대화가 되고 그분들의 뭐 백마디 말씀 중에 한마디만 우리가 귀에 들어오고 한마디만 감동을 해도 그게 어딥니까. 부처님의 말씀 백마디 중에서 한마디만 감동한다 하더라도 그건 큰 수확이고 그건 보통 행운이 아닙니다.
저는 그래요, 경전을 보든지 어록을 보든지 공부할 때 다 알려고 안합니다. 처음에 저는 그랬어요. 이 책 한 장에서 한 구절만 내가 이해해도 좋다 그러다보면 나중에 두 구절을 이해할 것이고 세 구절을 이해할 것이고 네 구절을 이해할 것이고 한 줄 이해하고 두 줄 이해하고 그럴 것 아니요. 아니 부처님 말씀을 경전 한 장에서 간단한 한 구절, 뭐 그게 한 구절이 석 자가 됐든 넉 자가 됐든 다섯 자가 됐든 그 한 구절만 내가 이해한다 하더라도 이건 뭐 보통 감지덕지한 일이 아니고 보통 큰 복이 아니다 저는 평소에 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차츰차츰 더 널리 더 깊이 더 높이 부처님께로 또 깨달으신 성인에게로 가까이 가까이 다가설 수 있고 친해질 수 있고 대화가 되고 또 뭔가 이렇게 교감이 되는 거죠
이것은 우리 이런 어록이나 경전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불자들은요 그 많은 팔만대장경 얼마나 성전이 많습니까 그게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거든요. 정말 죽을 고생을 천하에 당시로서는 머리가 아- 뛰어나고 뛰어난 분들로서 또 그냥 한 게 아니라 죽을 고생을 해가면서 깨달음을 이루고 난 그 나머지의 표현이 바로 경전이고 어록입니다. 그냥 나온 게 아니예요 보통사람이 뭐 그 고생고생해서 머리 짜내가지고 우리 글쓰듯이 그렇게 한 것 같으면 그 별게 아니죠.
천성이 대개 보면 뛰어났어요, 뛰어났는데 또 그 노력을 보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그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 그렇다 한들 다 깨달으리라는 보장은 없죠. 그런 그 천성자질과 또 정말 피나는 노력과 그 결과로써 큰 깨달음을 얻었을 때 비로소 이런 어록이라든지 경전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가 조사스님을 만나고 부처님을 만나고 보살을 만나고 온갖 성인들을 우리가 만난다고 하는 것이 보통 행운이 아니죠. 그러니까 경전이나 어록이 우리 팔만대장경을 이게 뭐 황엽으로 볼 때도 있어야 되지만은 또 소중하게 볼 때도 있어야 하구요.
또 소중하게 보면서도 소견이 아주 높아져서 그거 그야말로 눈가리는 뭐 심심하니까 도인이 심심하니까 눈이나 가린다 왜 그 도인이 경을 보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아 나는 심심해서 눈을 가리느라고 경을 본다 이런 대화도 있거든요, 결국은 이제 그런 차원에 까지 이르고 황엽인 차원에까지 이르러야겠지만은 그러나 또 아직까지는 우리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을 해야 되는 거죠.
여기는 지공스님께서 당신의 어떤 차원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황엽을 집착해서 금으로 삼는다 경전을 가지고 진짜 도인줄로 삼는다 이 뜻이죠 그래 그것을 버리고 금을 버리고 진짜 보배, 진짜 보배를 구할 줄을 깨닫지 못한다. 그 금을 이라고 하는 것은 나뭇잎을 가지고 황금으로 삼는 그 금입니다. 불오기금구보不悟棄金求寶로다 하는 그 금은요. 나뭇잎을 가지고 금으로 삼는 가짜 금이죠 가짜 금을 버리고 진짜 보배를 구할 줄을 깨닫지 못함이로다.
74.그런 까닭에 실성하여 미쳐 날뛰며
억지로 겉모습 꾸미는 데에만 힘을 쏟는다.
所以로 失念狂走하며 强力裝持相好로다
소 이 실 념 광 주 강 력 장 지 상 호
소이所以로 실념광주失念狂走하며 그렇기 때문에 실성해서 생각을 잃어버리고 실성했다는 뜻이죠 미쳐 날뛰며 강력장지상호强力裝持相好로다 억지로 강력으로 하는 것은 억지로 겉모습만 꾸미는 데만 힘을 쏟는다 이거예요. 상호相好 상호를 장지裝持한다 상호를 장지한다는 것은 상호를 외모를 자꾸 이제 꾸미는 거예요. 모양만 낸다는 거죠. 그게 이제 실념 실성해서 미쳐 날뛰는 그런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 지식이나 쌓고 아는 것 많고 뭐 해가지고 하는 것이 정말 마음에 지혜의 문은 캄캄한데 뭐 이렇게 지식이나 자꾸 쌓고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자꾸 그 쪽으로 이제 어지럽게 내닫는 것이 지공스님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는 거죠 그래서
75.입 속으론 경을 외우고 논을 외우나
마음속은 언제나 바싹 말라 있구나.
口內誦經誦論이나 心裏尋常枯槁로다
구 내 송 경 송 론 심 리 심 상 고 고
구내송경송론口內誦經誦論이나 구내口內 입속으로는 경도 외우고 논도 외우나 심리심상고고心裏尋常枯槁로다 마음속에는 언제나 바싹 말라있다 고고枯槁로다
그러니까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라 청매조사靑梅祖師의 그런 말씀, 마음에다 반조해 봐야 된다. 우리 불교의 가르침은요 항상 마음에 근거를 두고 있고 마음을 설명하는 것이고 마음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에 항상 마음의 원리에다가 비춰봐야 되는 거죠. 마음의 원리에다 비춰보지 못하고 경을 보는 것은 아무 이익이 없다 그런 표현이죠 심불반조心不返照 간경무익看經無益이란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경을 외우고 논을 외우고 설사 염불을 하고 하더라도 그것을 마음에 반조해서 정말 마음의 지혜가 되고 양식이 돼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면은 항상 마음은 바싹 말라있다 하는 것입니다.
76.하루아침에 근본을 깨달아 마음이 공해지면
진여를 갖추어서 모자람이 없도다.
一朝覺本心空하면은 具足眞如不少로다
일 조 각 본 심 공 구 족 진 여 불 소
일조각본심공一朝覺本心空하면은 그러다가 어느 날 하루 아침에 근본을 깨달아서 마음이 공해질 것 같으면은 그러니까 근본을 깨닫는다는 게 마음을 깨닫는 것이고 그 마음의 실체는 공적한 것,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적멸하고 공적한 것이 마음의 실체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이제 표현이 되는 겁니다.
구족진여불소具足眞如不少로다 하루아침에 마음의 공적함을 깨닫게 될 것 같으면은 진여가 진여를 구족하는 것이 진여를 갖추어서 모자람이 없도다 아무 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공적하다 적멸하다 하니까 아 그 허무할 것 같고 도를 통할 것 같으면 정말 허무할 것 같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서 인생도 살기가 뭐 요렇게 인간으로 살 때 아주 그 짭짤한 그런 그 재미가 있는데 이 뭐 도를 통하고 나면 인간적인 짭짤한 재미가 하나도 없을 것 같은데 이거 허무해서 어쩌나 그런 염려를 하는 이들 적지가 않아요 사실은. 그건 참 천만의 말씀이죠. 그런 그 허무하고 텅 비고 그런 것 때문에 그 뛰어난 그 두뇌를 가지신 분들이 그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서 그 경지 터득하려고 그렇게 도를 통했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죠. 정말 범인들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그런 그 세계, 진여의 세계에 계합한다는 것입니다.
77.성문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나
능히 끊는 그 마음도 바로 도적이로다.
聲聞心心斷惑이나 能斷之心是賊이라
성 문 심 심 단 혹 능 단 지 심 시 적
성문심심단혹聲聞心心斷惑이나 성문聲聞들은 마음마음에 미혹을 끊지만은 능단지심시적能斷之心是賊이라 능히 끊는 그 마음이 또 도적이다 이거예요. 도적이라는 거는 결국 우리 마음의 보물을 훔쳐가는 것을 도적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성문聲聞이란 것은 불교에서 제일 그 뭡니까 하천한 공부꾼을 성문聲聞이라 그러죠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그 보살까지도 사실은 그 뭡니까 삼승三乘이라서 방편으로 취급하지요 그런데 제일 밑에 성문이야 뭐 말할 것 없습니다 그래 서 성문은 어떻게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혹을 끊고 번뇌를 끊고 뭘 끊고 뭐 하- 탐진치를 끊고 팔만사천 번뇌를 끊고 이런 식으로 이제 끊어야 한다. 그래 끊는 방법도 여러가지 있고 그래요 그런 식으로 이제 이야기가 되죠. 뭐가 뭘 끊는다는 말입니까.
능단지심能斷之心이라는 게 결국은 끊을려고 하는 그 사람도 나고 끊길 대상도 나다 이거예요. 능히 끊는 그 마음도 역시 도적이다 이거 그렇게 되면은. 멀쩡한 데서 상대相對가 서버리니까요, 서로 대립對立이 서버리니까 끊는 것은 혹을 끊는다고 하는 것은 소단所斷, 끊어질 바죠 끊어질 바, 능단 陵斷은 끊는 마음 그렇습니다.
그럼 끊어질 바와 끊는 마음이 그게 전부 내 속에 있는 거예요. 내 속에서 그렇게 나눠놓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공부가 출발부터 잘못된 거예요. 출발부터 그게 그렇게 돼 있는 게 잘 못된 겁니다. 그러나 또 그런 근기가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 근기가 그러니까 깨달은 분들이 그런 근기에 맞춰서 되도 않는 법이지만은 그런 법을 또 설정해 놓은 거죠 일단은 이제 그런 그 법으로써 방편으로 건져 올려야 되니까 그래서 언젠가 정말 마음이 툭 터져서 끊을 것도 없고 끊는 나도 없는 그런 것을 이제 보게 되면은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런 방편들도 적지가 않습니다.
78.도적과 도적이 번갈아가며 쫓아내니
어느 때에 근본 어묵을 요달할 것인가
賊賊遞相除遣하니 何時了本語黙가
적 적 체 상 제 견 하 시 요 본 어 묵
적적체상제견賊賊遞相除遣하니 도적과 도적이 번갈아 쫓아내니 그러니까 소단所斷 끊어질 혹도 물론 그건 이제 처음에 도적이니까 또 능히 끊는 마음도 그것도 이제 역시 도적이니까 그래 도적과 도적이 서로서로 번갈아 가면서 쫓는낸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능히 끊는 마음이 미혹을 번뇌를 끊는다고 이제 끊는데 그놈도 도적이라 그럼 또 그거 도적 쫓아내려고 또 하다가 보면은 또 새로운 도적이 생겨서 또 그 도적을 쫓아내고 그 새로운 도적이 생겼다고 하는 것은 역시 내 마음에서 생긴 것인데 상대적으로 그렇게 대립을 세워놓고 내 번뇌를 제거하겠다고 하면은 천번만번 반복해서 쫓아내도 역시 도적입니다. 아주 이건 미세한 그런 그 이야기인데 일단 뭐 그렇게 이해해 두십시오.
그래서 적賊과 도적과 도적이 서로 번갈아 가면서 제견除遣하니 하시요본어묵何時了本語黙가 어느 때에 본 어묵을 요달할 것인가 여기 이제 번역에는 어느 때에 근본을 깨달아 침묵하려는가 이렇게 했는데 그게 아니구요 본本 어묵語黙 본래의 그 말과 침묵, 본래의 말과 침묵은 공空한 것이죠 그것을 요달하겠는가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근본적인 그런 입장에서 어語와 묵黙은 말하고 묵묵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인데
그러니까 누가 떠드는 사람이 있다 이거예요. 그럼 조용해 하면은 어떻습니까 그 조용해 하는 것도 역시 떠드는 소리죠 그러니까 옆에 사람이 있다가 너나 조용해 이런다고요. 그러면 너나 조용해 하는 사람이 얼핏 듣기에는 맞는 것 같지만 어떻습니까 그것도 역시 시끄러운 소리야 그래 옆에 사람이 있다가 너는 왜 그렇게 떠드느냐 깜빡 잊고 또 그렇게 또 하죠 그러니까 옆에 사람이 있다가 보니까 가관이야 그래 참지 못하고 또 한마디 거드는 거예요. 끊임없이 이렇게 말과 침묵과 말과 침묵이 번갈아 가는 것이고 내- 도적이고 소와 능能과 소所 주관과 객관이 그 한마음속에서 계속 번갈아 간다 그러니 어묵 語黙을 본래의 어묵을 언제 그래가지고 알게 되겠는가 이제 그런 표현입니다.
참 이번에 이 저 대승찬을 내가 강의를 하면서 옛날에도 아주 좋아해서 몇 번 봤지만 이번에 또 이제 읽고 읽고 또 읽고 이제 하면서 보니까 참 말의 함축이 그 심하구요 그만치 묘미가 있고 또 깊이가 있고 씹을수록 참, 맛이 나는 그런 가르침이 또한 이 대승찬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79.입으로는 천권의 경전을 외우고 있으나
근본 바탕에서 경전을 물어보면 알지 못한다.
口內誦經千卷이나 體上에는 問經不識이라
구 내 송 경 천 권 체상 문 경 불 식
구내송경천권口內誦經千卷이나 입속으로는 천권이나 되는 경전을 외우고 있으나 체상體上에는 문경불식問經不識이라 체상에서 근본바탕에서 경전을 물어볼 것 같으면 알지 못한다. 근본바탕에서 경전이 뭐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경이죠
흔히 우리 말하는 아유일권경我有一卷經하니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이라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나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라 그 말이 있죠. 나에게 한 권의 경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펼쳐봐야 아무것도 글자 한 자 없지만은 항상 대광명大光明을 놓고 있다. 항상 대광명을 놓고 있는 게 뭡니까 이렇게 말하고 여러분들처럼 그렇게 듣고 또 이제 시간이 다 됐구나 이렇게 생각할 줄 알고 상황 따라서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고 감지하는 그 능력 이게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입니다. 바로 그게 이제 체상경전體上經典이예요.체상의 경전.
체상體上에 문경問經하면 불식不識이라 그러니까 뭐 천수경 다르르 외우고 무슨 뭐 반야심경 잘 외우고 금강경 잘 외우고 온갖 뭐 경전 보통 신도님들도 뭐 외워라 하면 한시간 정도 외울거리는 있죠 그런데 정작 진짜 경전, 진짜 경전 한 번 이야기 해보라 하면은 이제 말을 못하는 거죠. 사실은 우리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그대로 경전에서 광명을 놓는 것인데도 그렇습니다.
오늘 대승찬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참석하셔서 법석을 빛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리:꽃물들다)
첫댓글 이렇게 일찍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륵골님 오늘 진땀 흘리셨죠? 감으로 올리신다 하셨는데 잘 들립니다. _()_
미륵골님! 감사드립니다... _()()()_
중생들의 마음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모두다 똑같이 다른 소견에 집착한다.불교의 행복의 의미는 버림으로서 얻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취함으로서 행복을 추구하려고 한다.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근본자리가 적멸하기 때문에 적멸이 곧 樂이다.空門에 得道라.텅빈 문(적멸위락)에서 道를 얻는다
집착함이 없음이 곧 해탈이요 구함이 있으면 그물에 걸린다.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시원하게,사자처럼 당당하게 살라!!.자비로운 마음은 일체 평등하고 진실하면 깨달음이 저절로 온다.우리의 삶 자체가 道다. 道는 세수하다 코만지는것보다 쉽다.온갖 이치를 찾느라고 바쁘지만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제하지 못한다.
남의 글과 어려운 말만 찾아서 스스로 지극한 이치가 묘하고 좋은 것이라고 일컫는다.한갖 수고로이 일생을 헛되이 보내고 영겁토록 생사의 바다에 빠진다.진여법계의 총림이 도리어 가시와 잡초만 무성하다.心不返照면 看經無益이라(청매조사).입속으로 經을 외우고 論을 외우나 마음속은 언제나 바싹 말라 있다.
하루 아침에 근본을 깨달아 마음이 공적해지면 진여를 갖추어서 모자람이 없다.주관과 객관이 한마음 속에서 번갈아 가면 언제 어묵을 요달하겠는가? 나에게 한 권의 經이 있으나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펼쳐봐야 아무것도 없지만 대광명을 이루고 있다(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展開無一字 常放大光明)_()()()
근본 자리에서 보면 성인의 가르침도 방편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방편을 통해 우리 삶 자체가 道 인것을 깨닫게 되는것이다. 常放大光明 이렇게 말하고 듣고 상항따라 감지하는 그 능력 그작용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광명을 놓는것이다. 부처님의 사상.....은혜에 감사드립니다._()()()_
미륵골님 감사드립니다._()()()_
미륵골님 고맙 습니다. 다시 입장 하셔서 잘들리시는줄 알고 있었는데...... 애쓰심에 감사 드립니다.
63. 所須任意縱힁.,不假偏耽愛戀. 64. 無著卽是解脫. 有求又遭羅견..필요에 따라서 마음대로 만들어 내나니. 집착없음이 곧 채탈이요. 구함이 있으면 다시그물에 걸린다. 참절실한말씀임니다. 스님법문감사함니다. 합장._()()()_.
감사하다는 말씀이외에 다시 드릴 말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賊賊遞相除遣(적적체상제견)하니 何時了本語?(하시요본어묵)가 : 도적과 도적이 번갈아가며 쫓아내니 어느 때에 근본 어묵을 요달할 것인가 ..... 큰스님 감사드립니다....꽃물들다 님 감사합니다. _()()()_
合 掌" " 三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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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버림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는 길 得道空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常放大光明이라.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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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
삶 자체가 도이다......_()()()_
진짜경전 일거수일투족~
유구개고有求皆苦요 무구내락無求乃樂이라. ㅡ구함이 있으면 괴롭지만 구함이 없으면 즐겁다. _()()()_
自然 = 中道 = 解脫 = 禪 = 平等 나무마하반야파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口內誦經千券(구내송경천권)이나 體上(체상)에는 問經不識(문경불식)이라. 입으로는 천 권의 경전을 외우고 있으나 근본 바탕에서 경전을 물어보면 알지 못한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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慈心一切平等하고 眞卽菩提自現이라... 자비로운 마음은 일체에 평등하고 진실하면 곧 깨달음이 스스로 나타나리라...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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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고맙습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_()()()_ 大方廣佛華嚴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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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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