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세조 충정공 언수의 큰아드님이시며 시호(諡號)는 충간이시다.
진사에 이어 대과에 급제하시고 고려조 무신으로 벽상삼한삼중광정대부(壁上三韓三重匡靖大夫) 문화시중 동평장사 삼사우사상호군(三司右使上護軍)을 역임 하신바 있으며 문장으로도 지명도가 높았다.
고려조 무장인때 즉 우왕 8년 임술 서기 1382년에 후일 이태조가 된 이성계와 같이 황산에서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하셔서 그 승전비가 전북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 황산에 있는데 그 비는 선조 10년 정축 1577년에 건수(建竪)되고 그후 비각을 현종8년 정미 1667년에 건립 하였으나 왜정이 파괴하였다.(파괴된체 현존함)
배위는 장흥임씨(長興任氏)로 소부윤(小府尹) 기(琦)의 따님이시다.
묘는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두매리 원금곡 간좌합조(艮坐合兆)로 모셔 있으며 표석이 있다고 하나 이곳은 38선 비무장지대로 왕래할수 없으므로 서기 1972년 10월에 전남나주시 송월동 향선재 영역에 고위(考位)충정공 언수 설단(設壇)과 함께 고위단의 동편에 설단하고 매년 음 10월15일에 시제로 향사 하고 있다.
따님이신 나씨가 세종5년 계묘 1423년에 돌아가시고 그 이듬해인 1424년에 공의 서랑(壻郞)이신 직장공 첨께서 다섯 살과 네 살의 두아들과 두 살의 어린 따님을 남기고 돌아가시니 공께서 어린 외손 (外孫) 3남매를 무육(撫育)하여 성가시키시니 그 후손이 번무(蕃茂}하여 오늘날 그 수를 헤아릴수 없게 많다. 공의 화정(畵幀)은 아직도 장흥사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묘는 나주 송월동 세거당 뒷산에 모셔 있으며 후손이 없어 우리가 외손 봉사하다가 지금은 입양한 후손이 매년 음 3월13일에 시제로 향사 하고있다.
배위는 나주나씨로 도강공 감무 설(設)의 따님이신데 이 나씨 할머니께서 네 살과 세 살의 아들 형제분과 강보에 싸여있는 따님을 남기고 세종5년 1423년 1월26일에 타계하시니 공께서 어린 3남매를 데리고 경기도 송현으로부터 처가인 현 나주 송현으로 이거하여 오셨는데 마을 사람들이 송현댁으로 부르던 것으로 인하여 이 마을 이름이 송현으로 된것이라한다.
이때에 나주에 오셔서 후손이 이곳에 정착하여 살게되니 직장공을 입나주낙남선조(入羅州落南先祖)라고 이르는 연유이다. 공께서도 불행하게 그 이듬해인1424념10월29일에 별세하시니 묘를 전남 나주 송월동 우륵(右麓) 자좌오향(子坐午向) 전후조로 모셨는데 서기1972년에 합조로 개장하고 석물을 갖추어 세우고 매년 음10월 15일 시제로 향사하고 있다.
이곳 향선제 영역에서 실묘로는 최존위(最尊位)이시다.
● 우후공 종직(虞侯公 從直)
충정공 언수의 현손(玄孫)이시며 직장공 첨의 둘째 아드님으로 세종 신축 1421년에 출생하셨다.
충청도 수군우후를 역임하시고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병조참의(通政大夫兵曹參議)의 증직을 받으셨다.
배위는 계림 김씨로 제용감부록사(濟用監副錄事)효행(孝行)의 따님이시다.
묘는 나주시 송월동 향선제 영역 자좌쌍조로 모셔 있으며 시제는 음 10월15일에 향사하고 있다.
● 부사공 가동(府使公 可棟)
충정공 언수의 5대손이시고 직장공 첨의 손자이시며 초휘(初諱)는 행직(行直)이시다.
세종조에 진사가 되셨고 경원부사(慶源府使) 행직중(行職中) 진충선정(盡忠善政)의 공이 크셨으며 특히 백성들을 애무하시고 치적이 혁혁하셔서 지금까지도 칭송의 말이 전하여 내려온다고 한다.
배위는 경주김씨로 수지중추부사(守知中湫府事) 공평공 영유(恭平公 永濡)의 따님이시다.
묘는 실전되어 나주 향선제 선영하에 설단하고 매년 음10월 15일에 향사하고 있다.
배위는 남양방씨(南陽房氏)로 현감 규문(糾文)의 따님이시다.
묘는 향선제 선영하 자좌쌍조로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 10월 15일에 시제로 향사하고 있다.
● 참판공 만근(參判公 萬根)
충정공 언수의 5대손 이시고 직장공 첨의 손자이시며 자는 불발(不拔)이시다.
세조 5년 기묘1459년에 출생하셔서 중종20년 을유1525년에 돌아가시니 향년67세이셨다.
사온서주부(司 署主簿)를 지내시고 평양서윤(平壤庶尹)을 역임하셨으며 종2품 가선대부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의 증직을 받으셨다.
배위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서 군수 절( 璽)의 따님이시다.
묘는 향선제 선영 직장공의 묘하 자좌합조로 모셔 있으며 매년 음10월15일 시제로 향사하고 있다.
● 대호군 언신(大護軍 彦臣)
충정공 언수의 5대손이시며 참판공 길양의 증손이시고 자는 양필(良弼)이신데 세조13년 정해1467년에 출생하시어 향년52세인 중종13년 무인 1518년에 돌아 가셨다.
성종 정미 1487년에 무과에 급제 하시고 내금위(內禁衛)와 만호(萬戶)를 지내셨으며 대호군 종2품에 이르셨다.
이어 1489년에 북병사(北兵使)와 종2품 통사를 역임 하셨는데 공을 두고 병조판서 정론(廷論)이 있었다고 한다.
배위는 전주이씨로 충의위(忠義衛) 지(漬)의 따님이시다.
묘는 경기도 파주군 월릉리 능산리 월봉산하 건좌쌍조(乾坐雙兆)로 모시고 매년3월10일 시제로 향사하고 있다.
● 삼청당공 휴(三淸堂公 畦)
충정공 언수의 6대손이시고 진위공 백근의 둘째 아드님이시며 자는 동야(東 )이신데 성종9년 무술 1478년에 출생하시어 명종 5년 경술 1550년에 별세하시니 향년 73세이셨다.
연산 2년 병진 1496년 19세에 진사에 발탁(拔擢) 되셨으나 연산의 어두운 조정에 당하여 명리와 관직을 저버리시고 오직 학문에 힘쓰셨다.
손수 송죽회(松竹檜)를 심어 그 당에 편액(扁額)하시어 삼청(三淸)이러 하셨고 당질(堂姪)이신 금호공(錦湖公) 형수(亨秀)께서 그 문하에서 수업정진 하셨으며 공의 깊은 기풍(氣風)과 절조(節操)가 군자다운 학자로서 일망타진되는 사화(士禍)에서 초연하셨은즉 이는 기틀을 아는 것이 신처럼 틀림이 없으심이라 그 누구도 범 할수 없는 고상하신 분이다.
배위는 절도사(節度使) 수정(守貞)의 따님이신 영광김씨(靈光金氏)와 부사직(副司直) 회창(懷昌)의 따님이신 함평노씨(咸平魯氏)이시다.
묘는 광주 직할시 광산구 지산동 옥녀봉 아래 능동 오른쪽 기슭에 건좌품조(乾坐品兆)로 모시고 매년 음10월 10일에 시제로 향사하고 있다.
● 병사공 준(兵使公 畯)
충정공 언수의 6대손이시며 참판공 만근의 셋째 아드님이시고 자는 주경(周卿)이신데 공의 둘째 아드님 금호공(錦湖公) 형수(亨秀)께서 명종 2년 정미 1547년에 벽서지변(壁書之變)으로 사사(賜死)되시니 심상(心狀)으로 득병(得病)하시어 그 이듬해 1548년에 돌아가셨다.
배위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현감 석(錫)의 따님이시다.
묘는 향선제 성영 직장공의 묘 뒤에 자좌쌍조로 모셔저있고 매년 음 10월15일에 시제로 향사하고 있다.
● 금호공 형수(錦湖公 亨秀)
충정공 언수의 7대손이시고 직장공 첨의 현손으로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錦湖)이신데 중종 9년 갑술 1524년에 출생하셔서 명종 2년 정미 1547년에 34세 젊은 나이로 별세하셨다.
공은 중종 26년 신묘 1531년 18세에 진사가 되시고 22세이신 1535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시어 사국(史局)에 들어가 한림(翰林)에 오르시고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호당(湖堂)에서 학문을 닦는 사은(賜恩)을 받으셨으며 회령판관(會寧判官)으로 가셔서 호인(胡人)들을 진무(鎭撫)하시고 돌아와 사인(舍人) 전한(典翰)이 되셨다.
공은 문장(文章)을 잘하시어 활잘쏘시며 풍체(風體)가 좋아서 모두 재상(宰相)감이라 하였다.
인종 1년 을사 1545년 권간(權奸)들의 음모(陰謀)로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에서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좌천(左遷)되어 가셨다가 그후 나주 본가로 돌아와 계시다가 명종 2년 정미 1547년에 정미사화(丁未士禍) 즉 벽서지변에 관련시켜 처음에는 절도안치(絶島安置)가 논의 되었으나 정언각(鄭彦殼)의 참소로 사사(賜死)하시게 되었다.
이때 공께서 어린 아들을 불러놓고 글을 배우지 말라고 하셨다가 나중에는 다시 글을 배우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말라는 유언을 하셨다고 한다.
퇴계(退溪) 이황선생(李滉先生)이 가장 애지중지(愛之重之)하고 매양기남자(每樣奇男子)라 칭하였고 공의 자를 부르며 공이 없어 뉘를 상대로 정담(情談)할 것인가라고 하였고,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도 또한 한탄하여 작일벌료목(昨日伐了木)이 백척장송비야여(百尺長松非也歟)아 약사지금재(若使至今在)면 가작동량재(可作棟樑材)어늘 오호(嗚呼)라 명당경의(明堂傾矣)에 우하이지지(又何以支之)오 즉 (엊 그제 버힌솔이 낙락장송 아니런가, 적은 듯 두런듯하면 동량재 되리러니 어즈버 명당이 기울면 어느남기 받치리)하고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정조 20년 병진 1796년 이조참판 또 고종 5년 무진 1868년 이조판서와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양관 대제학(大提學)의 증직을 받으셨다. 나주 문평면 돈원리 송재사(松齋祠)에 송재 나세찬(羅世纘)과 연향(連享)하고 매년 음 2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하고 광주 광산구 등임동 등임사(登臨祠)에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매년 음 9월 15일에 향사하고 있다.
금호유고()가 숙종 7년 1681년에 이민서공(李敏 公) 의 서문(序文)과 송시열선생(宋時烈先生), 김수항공(金壽恒公)의 발문으로 2권이 발간 되었는데 그 목판(木板)이 등임사에 소장(所藏)되어 있다.
배위는 군수 홍필(弘弼)의 따님이시며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인지(麟址)의 증손녀이신 하동정씨이시다.
묘는 나주 향선재 영역에 자좌쌍조로 모셔있으며 신도비(神道碑)는 향선재 영역에 1991년에 건수(建竪)되었으며 매년 음 10월 15일에 시제로 향사하고 있다.
● 송호공 박(松湖公 樸)
충정공 언수의 8대손이시며 직장공 첨의 5대손이시고 자는 중질(仲質), 호는 송호(松湖)이시다.
선조때 천거(薦擧)를 받아 왕께서 친히 사옹봉사(司饔奉事)를 제수(除授)하신바 있고 선교랑(宣敎郞)의 위계(位階)에 오르셨으며 1597년 정유왜란때 병사(兵使) 이복남과 더부러 남원에 입성하여 막하의 군병을 정돈하여 왜병을 친바 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성이 함락되자 북향사배(北向四拜)하시고 순절(殉節)하셨다.
조정에서 각별히 측은하게 여겨 어사(御使)를 파견하여 후하게 자손을 구휼(救恤) 하였으며첩문(帖文)이 지금도 남아있다. 영조 18년 임술 1742년 명하여 나주 송월동에 정려를 세웠으며 무진 1748년 종 3품 사헌부 집의의 증직을 하고 사당에 모셔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배위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의릉 참봉(參奉) 언성(彦誠)의 따님이신데 송호공이 남원에서 순절하시고 아들 경발(景發)이 또한 아버지의 시신을 걷우려고 남원전지(南原戰地)에 갔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어 돌아올수 없음을 알고 이씨는 자결하였다.
묘는 송호공의 시신을 걷우지 못하여 그후 초혼(招魂)하여 송월동 이산 사직공 주(司直公 疇)의 묘 남록유좌합조(南麓酉坐合兆)로 모시고 매년 음 10월 15일 시제로 향사하고 있다.
● 송파공 식(松坡公 植)
충정공 언수의 8대손이시며 직장공 첨의 5대손으로 자는 숙무(叔茂), 호는 송파(松坡)이시다.
중종 34년 기해 1539년 나주 송현에서 출생하시어 향년 51세로 선조 22년 기축 1589년에 돌아가셨다.명종 19년 갑자 1564년에 사마에 뽑히셨는데 율곡 이이와 동방(同榜)이신바 당세 17명현(17名賢)중 한분이시며 선조 임신 1572년에 문과에 급제하셨고 심충겸(沈忠謙)과 동방(同榜)이시다.
공은 후에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겸 경연 홍문관(經筵 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평능부원군(平陵府院君)의 증직을 받으셨다.
송파집(松坡集)이 이미 발간되어 있으며 광주 광산구 금강촌 금강사(錦江祠)에 향사되셨었고 광산구 등임동 등임사(登臨祠)에 중부 금호공 형수 주벽에 동편 배향(配享)되시어 매년 음 9월 15일에 향사하고 있다.
배위는 군수 제운(齊雲)의 따님이신 해주최씨(海州崔氏)와 참판 필의(弼毅)의 따님 창원유씨(昌原兪氏) 또한 전의 이씨(全義 李氏)가 있는데 모두 8남3녀를 두었다.
묘는 충남 청양군 화성면 수정리 수곡동 우록 유좌 쌍조로 창원유씨와 함께 모셔 있으며 시제는 매년 음 10월 초 정일(丁日)에 봉행하고 있다.
● 관해공 회(觀海公 檜)
충정공 언수의 8대손이시며 직장공 첨의 5대손으로 자는 공직(公直)이고 호는 관해(觀海)이시다.
명종 17년 임술 1562년 탄생하시어 인조 2년 갑자 1624년 순절(殉節)하시니 향년 63세이셨다.
선조 15년 임오 1582년 진사가 되시고 광해 3년 신해 1611년 50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시어 전적이 되셨는데 1613년에 이이첨(李爾瞻)등 대북파의 무고로 양산(梁山)땅에 유배되셨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후 예조정랑으로 등용되셨다가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을 지내시고 상촌 신흠(象村 申欽)의 추천으로 광주 목사(廣州 牧使)가 되셨다
이 때 공께서 남한산성을 수축하셨다. 갑자 1624년 이 괄난(李适亂)을 만나 경안역(慶安驛)에서 적과 대전하시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피집(被執)되시어 적의 검도에 전신이 난자되셨으나 적을 꾸짖고 호령하시고 마침내 단설(斷舌)하시고 순절하셨다.
인조조에 도승지, 고종 5년 무진 1868년에 이조참판응 증직 받으셨으며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세울 것을 명하여 나주 송월동 에 정려를 세웠으며 나주시 송현동 정렬사(旌烈祠)에 배향되시어 매년 10월 1일 나주시에서 봉향하고 있다.
또한 광주 광산구 등림동 등임사(登臨祠)에 숙부 금호공 형수의 서편에 배향되어 매년 음 9월 15일에 유림에서 향사 한다. 또한 유고 관해집(觀海集)이 발간되었다.
묘는 승주군 송광면 낙수리 모후산에 모셔저 있었는데 승주땜 건설로 묘지통행이 어렵게 되어 나주 향선재 영내로 1990년 천장(遷葬)과 아울러 신도비를 이수(移竪)하고 매년 음 10월 15일에 시제로 향사하고 있다.
● 촌초당공(寸草堂公) 광윤(光胤)
충정공 언수의 九代孫이요 三淸堂(삼청당공) 畦(휴)의 曾孫(증손)이시고 字는 顯述(현술)이시며 호 는 촌초당이시다.
宣祖(선조) 6年 癸酉(계유) 1573年에 出生하시어 仁祖(인조) 21年 癸未(계미) 1643年에 돌아가시니 향년 71歲이시다.
1606年 생원이 되셨는데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 하셔서 십세에 아버지의 腫氣(종기)를 우시면서 혀로 뽑아 내심으로 효험이 있었는데 향리에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1697年 정유왜란때 아버님 처사공 桂(계)께서 南原城(남원성)에서 殉節殞命(순절운명)하시자 廬幕(여막)을 지어 시묘3년 哀毁(애훼)가 과도하셨다.
성균관 장의로 계실 때 광해 5年 계축 1613年에 있었던 廢母論(폐모론)에 항의상소를 하여 高晴沙(고청사)와 高會浪(고회랑) 두분의 원한을 펴주시고 이로 인하여 세상에 뜻이 없어 결국 과거를 그만두시고 전원으로 돌아오셔서 서책으로서 낙을 삼으셨다
인조 갑자 1624年 이 괄 난에 의병으로 正窩公(정와공) 은과 매설당 枓(두) 두아드님을 보내어 공주에서 인조대왕을 扈從(호종)케 하셨다. 그 후 1636年 병자호란때는 청에 굴복하여 강화하였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북향통곡하시며 문을 닫고 七年을 두문불출하시고 돌아가셨는데 후에 光州 光山區 錦江村 錦江祠(금강사)에 배향되었었다.
배위는 靈光金氏(영광김씨)로 통정대부 중인의 따님이시다.
묘는 光山區 黑石洞(흑석동) 右麓(우록) 草堂嶝(초당등) 乾坐合兆(건좌합조)로 모시고 每年 陰曆(음력) 10月 10日에 시제로 향사하고 있다.
선조 18年 을유 1585年 將薦(장천)에 의하여 등제하셨는데 충성이 대단하시며 기개가 출중하셨다. 1592年 토적 李夢鶴(이몽학)이 鴻山(홍산)에서 난을 일으켜 洪州(홍주)로 다가오자 적을 통쾌하게 격멸 하신바 있어 홍주 김마천에 勝戰碑(승전비)가 있다. 이몽학이 병을 모아 난을 일으켜 각 고을마다 무너지고 세에 눌려 감히 저항을 하지 못할 형편이였는데 다만 洪州牧使(홍주목사) 洪可臣(홍가신)이 城(성)에 의하여 지키고 있을뿐 그 기세가 심히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에 평성군께서 원래 지략과 용력이 있으셔 의병 800을 인솔하고 검을 휘두르시며 포위된 성에 달려가 방책을 세워 결단을 내리신바 수일내에 찬비가 내릴 것을 미리 예측하시고 초막을 모두 불태워 적들이 의지할 곳을 없애버린 후 성을 나가 적을 추격하셨고 괴수가 참사된 첩보를 王에게 올리시니 忠情道 水軍虞侯(충청도 수군우후)에 제수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