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문헌
統一新羅.渤海와 日本의 關係 : 崔在錫 著, 1993
百濟에 의한 倭國統治 三百年史: 尹營植 著, 1987
이야기 일본사 : 김희영 엮음, 1987
노래하는 역사 : 李寧熙, 1994
20 세기의 세계사의 특징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미국
과 소련에 의한 양극체제가 붕괴되었고 미국에 의한 단극체제가
확립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20 세기 말부터 이에 도전하는 세계
각국들의 블럭화가 이루어져 왔으니 소위 유럽공동체, 아프리카연
합, 아세안, 이스람제국연합, 북미연합, 남미연합 등이 그들이다.
지정학적으로 상고시대로부터 밀접한 역사적 관계를 유지하여 온
우리 한국, 중국, 일본도 동북아연합이라는 연합을 이루어야만 앞
으로 닥아오는 21 세기 역사시대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
다. 이와 유사한 시도는 이미 일본에 의한 소위 대동아단결로 나
타났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이 任那日本府說이라는 역사왜곡에
의한 일본의 침략식민정책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 중국, 일본이
서로 마음의 벽을 허물고 연합하기 위하여서는 삼국의 공동의 역사
속에서 최대공약수를 찾아, 삼국 공동의 최소공배수로 내일의 역사
를 창조하여 가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려
함이며, 任那日本府說을 바로 알려함이다.
일본에서는 지금까지도 四世紀 후반에 大和(야마토)政權이 대군을
내어 거의 二世紀 동안 한국의 남부지방을 지배하였다는 것을 기정
사실로하여 다음과 같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크게 취급하고
있다.
'야마토조정은 반도의 철 자원이나 선진 기술 등을 확보하기 위해
4 세기 후반경 조선의 낙동강 하류의 가라(任那) 지방에 진출하
여 거점을 두었다. 고구려 好太王(廣開土王)碑文에 의하면 倭人이
百殘(百濟), 新羅에 대하여 우월권을 둘러싸고 A.D.391년에서 404
년에 걸쳐서 고구려와 교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조선
반도까지 세력을 넓히고있던 야마토조정은 5세기에 이르러서는 중
국의 南朝(宋,齊)와도 적극적인 외교를 전개하였다.
일본의 학자들은 그 근거로서 '日本書紀'의 '진구황후의 한반도 정
벌설', '宋書', '광개토대왕비',등을 제시하고 있다.
다음은 2001년 7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한국정부의 日역사교과
서 수정요구에 대한 日측 검토결과 가운데 '임나일본부설' 부분이
다.
한국측 수정요구 의견
1. '임나일본부설'은 한국과 일본의 50여년간의 연구결과, 인정받
지 못하고 있는 설
2. 명백한 오류, 신라의 지원 요청으로 고구려군이 왜군을 격퇴(광
개토왕비문)
3. 상설적인 주둔을 전제로 한 내용으로 명백한 오류
4. 점령국인 일본이 피점령지늬 임나로부터 철수한 것을 전제로 기
술, 주둔, 철퇴의 기록이 없기때문에 오류이며 삭제 필요
일본측 검토결과
1. 일본 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의 존재를 지지하고 있지 않으
나, 한반도 남부의 가야제국(諸國) 에 대해 어떤한 형태로든 왜
(倭)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은 폭넓게 인정하고 있음. 본 기술
은 '임나일본부설'를 명기하고 있지않고, 또한 '거점을 둔 것으
로여겨진다'고 하여 단정적 표현을 피하고 있음. 학설상황에 비
추어 명백한 오류라고는 할 수 없으며, 제도상 정정을 유구할 수
없음.
2. 일본학계에서는 고구려의 남하에 대해 신라와 백제가 왜에 구원
을 요청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광개토왕비문에는 신라가
왜에 구원을 요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고, 역으로 신라가
고구려왕에 귀의한 것으로 명기되어 있음.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본 기술은 적절하지 않고 오류로 생각되며 정정할 필요가 있음.
자체 정정 신청중(7월 2일자)
3. 일본 학계에서는 4-5세기에 왜가 한반도에서 백제와 연합하여 고
구려와 싸웠다는 것이 폭넓게 인정되고 있음. 또한 '기반으로 하
였다'는 기술이 '상설된 주둔'을 의미하지는 않음. 학설상황에
비추어 명백한 오류라고는 할 수 없어 제도상 정정을 요구할 수
없음.
4. 일본 학계에서는 가야제국의 멸망에 의해 한반도 남부에 대한 왜
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이 폭넓게 인정되고 있음. 이를 '임
나로부터 철퇴하여'라고 표현한 것은 학설상황에 비추어 오류라
고 할 수 없으며, 제도상 정정을 요구할 수 없음.
日本書紀에 의하면 진구황후의 정벌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가 7
국 4읍을 점령하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였다가, 562년
신라에게 멸망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일본부라는 명칭은 그 용어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우리나라 역사에서 倭를 일본으로 칭
하기 시작한 것은, 신라 문무왕 10년(670) 이후 부터다. 이와 같
은 사실은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중국의 문헌에서도 찾아 볼 수 있
다. 즉 당시에 만약에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면 '임나왜부'이지
'임나일본부'는 아닌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8년 전에 편찬된 고사기에는 진구황후의 한반도
정벌과 같은 기록이 전혀 없다.
宋書 '倭國傳'에 의하면 讚, 珍, 濟, 興, 武의 五代 倭王은 宋이나
齊에 사신을 보내어 조선 諸國에 대하여 군사지휘권을 갖는 것을 의
미하는 높은 작호를 얻으려고 하였다'
광개토대왕비문 가운데 특히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은 소위 이른바
신묘년기사이다. 그런데 1972년 재일본 사학자 李進熙는 여러가지
탁본과 해독문을 대조한 결과 그 비문은 일본 군부와 학자들이 계
획적으로 비면에 석회를 바르고 새로운 글자를 써 넣은 것이라고
비문 변조설을 제기하였다. 그 후 李亨求, 朴魯姬는 그들이 위조한
글자는 신묘년기사의 '倭'자로서, ,倭'자가 아니라 '後'자이고 다
음과 같은 내용이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百殘 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以後 以辛卯年不貢 因破百殘 倭寇 新
羅 以爲臣民
백제와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왔었다. 그
후 신묘년에 이르러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와 왜구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또한 임나가 가야가 아니라 대마도라는 설 등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
어 任那日本府說을 부정하고 있다.
여기서 또다른 방법으로 任那日本府說 또는 任那經營說을 부정하는
尹營植의 학설을 살펴본다.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第19代王으로서 정식 謚號는 '國岡上廣開土境
平安好太王'인데, 이를 줄여 廣開土王 또는 好太王이라 하고, 그의
年號를 따 永樂大王이라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A.D.391년(辛卯)
부터 412년(壬子)까지로서 백제의 阿莘王(아신왕), 倭의 讚왕(應神
天皇)과 같은 시대이다. 그가 死去하자 A.D.414년에 그 아들 長壽王
이 父王의 공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높이 6.3m나 되는 장대한
자연석에 1800餘字의 글자를 새겨 세웠던 것이다.
이 碑文이 일본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883년에 南滿洲 각지를 다
니며 첩보 활동을 하던 일본육군참모본부의 사고우중위가 그 비문을
가져와서부터다.
그 비문에는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口口口羅以爲臣民'이란 한 구절
이 있는데, 일본학계에서는 이를 '倭가 辛卯年(A.D.391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百殘(伯濟), 口口, 新羅를 쳐부수고서 臣民으로 삼았다.'
이렇게 읽고서 이 것이 바로 任那經營說을 뒷받침하는 근거 자료라
믿고 韓半島出兵과 半島南部支配에 대한 定說을 내세웠다.
'三國史記' '百濟本記' 近肖古王二十四年(A.D.369년)條에 의하면 이
해에 高句麗王 斯由(故國原王)가 步騎二萬을 이끌고 稚壤(지금 황해
도 재령)으로 來侵함으로 百濟 近肖古王이 近仇首太子를 보내 이를
격퇴하였고, 또 同二十六年(A.D.371년)에도 고구려가 침입함으로 이를
격퇴하고서 이어 近仇首太子가 三萬兵力으로 평양성을 깨트림으로써
마침내 故國原王이 전사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때 戰死한
故國原王은 廣開土王의 祖父이고 長壽王의 曾祖父인데, 이런 長壽王의
손에 의하여 남겨진 백제관계 사료가 바로 '辛卯年의 倭'로서, 이 倭
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 등을 쳐부수고 臣民으로 만들었다고 한 것
이다.
즉 첫째는 辛卯年(A.D.391년)에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를 공격한 집
단이 있었느냐 하는 것이고, 두째는 있었다면 그 실체가 과연 長壽王
이 말하는 '倭'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辛卯年(A.D.391년)은
百濟 辰斯王七年이고 阿莘王(아신왕) 즉위 前年이며, 日本書記로는
應神二年이다.
辰斯王은 沈流王의 동생이고 阿莘王은 沈流王의 아들인데 日本書記에
는 '沈流王이 돌아가자 太子 阿莘이 年少하므로 淑父 辰斯가 자리를
빼앗아 卽位하였다'하여 王權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쓰고 있다.
日本書記 應神三年 是歲條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百濟 辰斯王이 즉위하여 貴國의 天皇에게 失禮를 하였다. 그래서
紀角宿彌, 羽田矢代宿彌, 石川宿彌, 木토宿彌를 보내어 그 無禮狀을
꾸짖었다. 이렇게 되자 백제국이 辰斯王을 죽이고 사죄하였다. 紀角
宿彌 등이 곧 阿花를 세워 王으로 하고 돌아왔다.'
위의 기사는 辛卯年의 다음해에 있었던 일로 廣開土王碑의'辛卯年의
倭'와 직접 관계가 있는 내용이다. 비록 一年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
만 통상 전쟁이 단기간으로 결말이 나는 것이 아니므로 辛卯年의 渡
海 집단은 그 다음해인 應神三年(壬辰)에 辰斯王을 공격하였다는 渡
海 집단인 것이다.
三國史記 辰斯王條를 보면 辛卯年의 前年에는 王이 狗原(지금 경남
김해)에서 사냥(전쟁을 숨겨 표현한 것임)을 하였고, 辛卯年에는 國
西의 大島(강화도)에서 친히 사냥을 하였으며, 辛卯年의 다음해에는
狗原에 사냥을 나갔다가 狗原幸궁에서 돌아갔다 하여 辰斯王이 金海
에서 전사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廣開土王碑에서 長
壽王이 말하는 '辛卯年의 倭'는 應神이 보냈다는 紀角宿彌 등을 지칭
한 것이 분명하다.
'辛卯年의 倭'는 辰斯王이 貴國의 天皇에게 失禮를 하였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고 阿莘의 정당한 王統을 세우기 위하여 阿莘에게 협력한
應神과 紀角, 羽田矢代, 石川, 木토 등 五名을 말한 것이 된다.
지금 일부 일본학계에서는 貴國은 일본을 지칭한다고 주장하고 있으
나 神田秀夫氏 같은 일본 학자마저 어째서 일본이나 왜라고 쓰지 않
고 하필 貴國리라고 하였겠는가 의문을 제기하고 貴는 상대편에 대한
경어로서 쓰여지고 있었다고 貴土, 貴鄕, 貴處, 貴上 등 여러 근거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즉 貴國의 天皇은 百濟의 沈流王이 된다.
辰斯가 그의 형 沈流王을 제거하고 즉위한 것은 日本書記에서도 확인
된다. 辰斯王이 이렇게 형 沈流王의 王位를 찬탈하였기에 倭에 있던
紀角宿彌 등이 阿莘에게 협력하여 辛卯年을 전후하여 三年 동안 韓半
島쪽의 辰斯王을 공격하였던 것이며 드디어는 辰斯王이 狗原(金海)에
서 이들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자 阿莘이 즉위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阿莘에게 협력하였다는 應神과 紀角 등은 어떠한 인맥을 가
진 사람들이며, 어째서 倭에 있으면서 阿莘王軍을 도와주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應神은 중국측 문헌에는 倭王 讚이라 하였고, 일본측 문헌에는 新羅
王子 天日槍, 이사사別神, 大己貴神 등 數十의 異名으로 활동하기도
하는데, 安羅(지금 경남 함안)를 본거로한 大加羅國王 阿羅斯等의 아
들이다. 이 분이 渡倭하여 九州西南部에 처음 新羅國을 건설하기도
하기도 한 것이고, 마침내는 阿莘과의 협력의 결과로 倭王位에 즉위
하기도 한다. 여기 新羅라 함은 韓半島인이 倭의 新天地를 발견하고,
처처에 진출, 그곳을 개척하고서 新土, 新國의 뜻으로 부르게 된 地
名 또는 國名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지배층의 姓氏를 집성해 놓은 新撰姓氏錄에 의하면 紀角, 羽田
矢代, 石川, 木토 등 四名은 모두 武內宿彌의 아들들로 되어 있다.
武內는 놀랍게도 百濟 近仇首王의 長子로 확인 된다. 武內는 沈流,
辰斯와 함께 近肖古王의 손자이고 近仇首王의 아들이므로, 沈流王의
아들인 阿莘에게 紀角宿彌 등은 사촌형제간인 것이다.
고구려 장수왕은 이들을 '倭'라 표현하였으며 일본서기는 이 때의
역사를 쓰면서 '貴國의 天皇'으로 얼벼무려 놓았고 '任那日本府說'
을 정설로 교과서에까지 크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辛卯年의 倭'는 倭國統治를 위하여 倭에 있었던 百濟, 大加羅國
등의 韓人 지배층이었던 것이다. 이는 任那經營說을 무색하게 할 뿐
만 아니라 도리어 倭의 땅이 오랫동안 百濟 및 大加羅의 屬領이었다
것을 입증하는 사료인 것이다.
일본은 이처럼 자신들의 歷史의 뿌리에 대하여 자신이 없었으므로
日本書記와 같은 僞史를 써놓았으며 奈羅(나라)에서 발견된 후지노기
고분의 石棺을 열기를 주저하다가 끝내 포기하고 任那日本府說에 집
착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