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갑엽 목사- 1957년생으로 베뢰아아카데미 17기를 수료하였으며.
서울침례신학연구원(현 베뢰아대학원대학교) 5회를 졸업하였다.
대천성락교회는 충남 보령시 대천동 101-1에 위치하고 있다.
신약교회 성도의 5대 의무는 절대 주일성수, 온전한 십일조 생활, 매일 새벽기도, 매일 말씀상고, 매일 전도열심이다. 성도의 의무라 함은 당연히 지켜야 하겠지만, 사실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전교인이 신약교회의 5대 의무를 철저하게 지키는 교회가 있다. 바로 충남 보령의 대천성락교회다.
직접 만나본 대천성락교회 교인들은 역시 남달랐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입가에는 웃음이 배어 있었다. 어떤 일이든 이루어 낼 것 같은 승리자의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최선을 다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이들이 이렇게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하는 힘의 원동력은 어디 있을까? 그 고민은 그들을 섬기고 있는 고갑엽 목사를 만났을 때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서울성락교회 청년부 출신으로 청년 때의 열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사는 고갑엽 목사. 그의 한결같은 신앙이 전교인들을 그렇게 물들여 놓았던 것이다.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난 그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자랐다. 그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어린 시절 동네 장로님 때문이었다. ‘과자를 준다’고 해서 간 것이 교회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후 꾸준히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했다.
군 제대 후 그는 삼성종합건설에서 운영하는 직업훈련소에서 일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곧 리비아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가 리비아로 가던 시기는 활발했던 중동건설 경기가 주춤해진 1980년대였다.
비록 열사(熱砂)의 땅이었지만 그곳에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는 다가왔다. 그때 황은영이라는 형제가 그를 전도하고자 차트(Chart)에 찬양을 써 달라며 부탁해 왔다. 그는 흔쾌히 승낙했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후 고갑엽은 새벽기도, 성가대 봉사 등 교회 섬기는 데 열심을 냈다. 하지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풀리지 않는 고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고갑엽은 새로운 꿈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악감상실 아니면 전파사를 차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꿈은 좌절되었다. 귀국하기 6개월 전, 형수님의 질병으로 인해 그 동안 힘들게 번 돈을 몽땅 병원비로 써 버린 것이다.
그는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고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형수님도 어머님도 그리고 그 자신에게도 원망할 수 없었다. 이제는 리비아가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였다. 돈을 벌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과 결혼자금도 준비할 겸 다시 떠난 것이다. 비록 암담한 현실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만나주시고자 사전작업을 하신 것이었다. 그는 한신공영이라는 회사에 소속되어 일을 하게 된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을 하는 동안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같이 일하던 독일인 감독관의 운전수가 집중호우로 죽은 것이다. 그 나라는 11, 12월이 우기(雨期)라 한번 비가 오면 30분도 안 되어 커다란 드럼통이 떠내려갈 정도로 폭우가 쏟아진다. 바로 그 폭우에 감독관의 자녀들을 데리고 오는 길에 폭우로 객사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결코 사람은 내일 일을 모른다’는 너무도 평범한 이치를 깨닫는다.
사우디에서도 신앙생활을 꾸준히 했던 고갑엽은 이 사건을 계기로 열심을 내게 된다. 그러한 그의 열심은 비록 총각이었으나 교회에서 ‘집사 임명을 받으라’고 권유할 정도였다. 이렇게 열심을 내던 시기에 김황태 집사(필자주 - 현재 감리교에서 목회하고 있다)를 만나면서 그의 삶은 또 다시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사람은 만남을 통해서 변화한다. 하나님을 만나 죄인된 신분을 발견하고, 훌륭한 스승을 만나 인생에 대한 혜안(慧眼)을 갖게 된다. 그래서 만남이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린 창과 같은 것.
비록 신앙생활은 열심히 했지만 뭔가 모를 문제를 안고 있었던 청년 고갑엽은 김황태 집사와의 만남을 통해 명쾌한 해답을 얻는다. 그와 김황태 집사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김황태 집사는 고갑엽이 일하는 사무실에 새롭게 대리로 부임했다. 부임한 첫날 그는 사무실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을 찾았다. 이미 고갑엽은 사내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기에 두 사람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어느 날 그분을 모시고 교회에 갔습니다. 그분은 예배당 앞쪽에서 기도하고 저는 뒷자리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황태 집사님께서 소리를 크게 질러가면서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통성으로 기도해 본 적이 없던 제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이상한 소리로 기도하고 조금 뒤에는 ‘귀신아 나가라! 떠나갈지어다’ 하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저에게 다가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일하다가 다리가 삐었는데 다 나았다’고 간증을 하시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분이 사우디아라비아로 오기 전에 베뢰아를 공부하신 목사님에게서 3개월 동안 성경을 배우셨던 것이다.
청년 고갑엽이 보기에 김황태 집사의 신앙생활은 확실히 달랐다. 말과 행동이 동일했으며 그가 가는 곳마다 예수 향기가 물씬 풍겨났다. 부하직원들의 고충을 너무도 잘 이해해 주었고 실수로 부하직원들이 강제 출국조치를 당할 때도 그들 편에서 처리해 주었다.
이러한 김 집사의 신앙생활은 청년 고갑엽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성경에 대한 질문을 하면 명쾌하게 해답을 주니, 그를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분이 ‘기도하라’면 기도하고 ‘말씀을 보라’면 말씀을 보았습니다. 일과가 끝나면 숙소에 가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잠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신령한 생활을 했습니다.”
김 집사는 사내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고 전도된 사람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쳤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공부가 끝났을 때 김황태 집사는 청년 고갑엽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갑엽아, 가르쳐 줄 것이 있는데, 더 배우겠니? 하지만 갈등할 바에야 아예 처음부터 안 배우는 것이 낫다.”
고갑엽은 생각해 볼 틈도 없이 김황태 집사의 제의를 기꺼이 수용했다. 이렇게 해서 고갑엽은 한국에서 시작된 베뢰아를 머나먼 타국에서 배우게 된다.
그리고 나서 고갑엽은 1985년에 귀국한다. 그는 온 가족과 함께 구로중앙감리교회에서 주일아침 예배를 드리고 저녁예배는 서울성락교회에서 드렸다. 그는 그가 본 성락교회의 예배 모습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앞자리 오른쪽 귀퉁이에 앉았습니다. 예배시간이 되자 저는 밀려서 한 가운데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찬송이 끝나고 찬송 인도자가 ‘다 같이 예배를 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하자 옆에 앉았던 아가씨들이 몸을 앞, 뒤, 좌, 우로 흔들어가면서 기도하는데, 저는 너무 당황했습니다. 그러더니 어떤 분이 올라오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때 생각하기에 ‘담임 목사님이 출타중이라 부목사님이 대신 설교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바로 김기동 목사님이셨습니다.”
성락교인들의 뜨거운 신앙에 감동된 고갑엽은 서울성락교회 청년부에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비록 다시 해외로 나가고자 하는 그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아침에는 성경 읽고 밤에는 구역장을 따라 가리봉 지역에 있는 청년들을 밤 늦도록 심방했다. 이러한 고갑엽의 성실함과 열심은 구역장, 지구장, 교구장, 청년선교회 총무, 회장의 직임에까지 이르게 한다.
한번은 교구장 때의 일이다. 그가 맡은 교구는 가리봉 교구였다. 그 교구는 공단지역이었기에 시골에서 상경한 이들이 많았다. 그는 부모와 가족을 멀리한 채 살아가는 청년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위로하고 섬겼다.
1989년 청년선교회 회장으로 일할 때는 직장생활과 직분을 감당하다 탈진한 교구장들에게 영양제도 놓아주고, 기력이 쇠한 직분자들을 위해서 피로회복제를 사줄 정도로 그의 영혼 사랑은 지극했다.
“청년들 퇴근시간에 맞춰 가리봉에 도착해서 그때부터 심방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러가고, 차편이 끊기게 되어 교회까지 걸어오면 어느새 새벽 1, 2시가 됩니다. 그 당시에는 차비도 없었기에 배고프면 수돗물로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그래도 영혼들을 돌아보고 심방하고 나면 벅찬 감격이 샘솟듯 했습니다.”
1989년 고갑엽은 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목회를 준비한다. 그러던 중 천안지방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자네가 와서 교회를 도와주어야겠네” 그리하여 곧바로 내려간 곳이 바로 ‘천북교회’였다. 그러나 그가 상상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교회는 결코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학생이었기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며칠 뒤 신학교 가는 길에 말씀이 그를 주장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목이 메었다. 초라한 예배당과 목자 없이 살아가는 영혼들에 대한 주님의 심령이 그를 울린 것이다. 그래서 1990년 10월 31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구역인 ‘천북교회’에 다시 내려간다. 그곳에서 교회를 몇 년간 섬긴 후 다시 교회를 개척한다. 남의 터 위에 건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교회가 오늘의 ‘대천성락교회’다.
그에게는 성도들을 향한 간절한 소원이 있다. 그것은 대천성락교인들이 모두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갑엽 목사는 아이들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신앙훈련을 시킨다. 주일성수, 십일조 생활, 새벽기도, 성경공부, 전도생활. 방학이면 모든 학생들이 새벽 5시부터 6시 30분까지 성경통독을 할 정도로 열심이다.
대천성락교회의 수련회는 말 그대로 수련회다. 주일학교 아이들을 비롯하여 전 교인이 새벽집회, 아침집회, 점심집회, 저녁집회 무려 하루에 4번 집회에 참석한다. 고갑엽 목사는 전 교인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신앙생활 하기 원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양육한다.
“저는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고, 그 다음 성령을 받게 함으로 첫째 부활에 참예할 수 있도록 준비되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도의 공생애를 살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하늘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김기동 목사님께서 ‘성도들에게서 시간과 물질을 빼앗아오지 않으면 삯군 목자’라고 말씀하셨듯이 성도들이 주님을 위해 철저하게 물질과 시간을 헌신하게 합니다.”
현재 대천성락교회는 위성예배를 드리고 있다. 처음에는 성도들이 반대했다. 이는 TV를 통해 영상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한국인 정서에 맞지 않을 뿐더러 성도들이 눈에 보이는 목회자를 통해 설교를 듣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갑엽 목사는 스승 목사로부터 은혜를 받고 싶었고, 또 성도들에게 김기동 목사의 설교를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에 위성예배를 적극 주장했다.
교회에서 가장 은혜가 필요한 사람은 바로 목회자 자신이다. 목회자의 심령이 부흥되지 않고서는 성도들의 심령 부흥도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갑엽 목사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준 김기동 목사에 대한 그의 사랑은 남달랐다. 기자가 취재하는 동안 김기동 목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는 울고 말았다. 그리고는 계속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시집간 외동딸이 친정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그에게는 그러한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이제 대천성락교회는 교회 건축을 계기로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교회 건축이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계속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예배가 끝나면 곧바로 기도하고 각자 집으로 가는 길에 『예수내구주』를 나눠주며 전도한다.
지금의 대천성락교인들 중 단 한 명도 스스로 온 사람은 없다. 모두 고갑엽 목사를 통해 변화된 사람들이다. 그를 만나면 확실하게 예수를 알게 된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은 제정신으로, 하나님을 관념적으로 알던 사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