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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강좌 포교사(녹취) / (2006년 9월 19일)-2
제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바른 믿음은 희유하다.
우리 기성 불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좀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할 부분인데, 뭐 새로 입문한 분들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어느 것이 正信이고, 어느 것이 私信이고 잘 모르지요. 그런데 이미 불교에 몸 담은지 좀 된사람들은 정말 바른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건 正信이란 말을 포괄적으로 제가 설명한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正信은 꼭 相을 떠나서 부처님으로 相을 떠나야 부처님을 본다. 이렇게 했는데, 아니 뭐 불상은 설사 부처님이 아니라고 합시다. 그런데 여기 금강경의 내용은 불상이 아니예요. 살아있는 부처님을 두고 하는 소린데, 살아있는 부처님 모습을 떠나서 如來를 보아야 된다고 하니, 이게 쉬운 이야기가 아니죠.
수보리 백불언(須菩提 白佛言)하사대
수보리가 말하대,
세존(世尊)하 파유중생(頗有衆生)이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득문여시언설장구(得聞如是言說章句)하사옵고
이와 같은 언설과 장구를, 이와 같은 말씀과 이걸 글로 썼을 때는 장구가 되겠죠. 말로 하면 언설이 되고, 이와 같은 말씀이나 이와 같은 글을 보거나 듣고, 여기서 이와 같은은 뭘 가르치죠?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라고 하는 이 구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뻔히 살아서 말하고 피가 끓고 하는 산부처님을 떠나서 여래를 봐야 한다 라고 하니 이말을 듣고,
생실신부(生實信不)잇가
실다운 믿음을 내겠습니까?
제대로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지금까지도 부처님 저렇게 설법하시는 당신보고 우리가 부처님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모습 말고 따로 부처님이 있다 라고 그렇게 봐야 제대로 여래를 본다고 했는데 그말 누가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랬어요.
불(佛)이 고수보리(告須菩提)하사대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고하사대,
막작시설(莫作是說)하라
그런 소리 하지마라.
여래멸후후오백세(如來滅後後五百歲)에 유지계수복자(有持戒修福者)
여래가 열반한 뒤에 후 오백세에 어떤 계를 가지고 복을 닦는 사람이 있어서
어차장구(於此章句)에 능생신심(能生信心)하야 이차위실(以此爲實)하리니
이 장구에, 이 구절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 라고 하는 이 구절에 “야, 이거야말로 정말 좋은 가르침이다” 能生信心, 능히 신심을 냈어.
그래도 깨달은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야지, 무슨 도덕적인 소리, 뒷집 할아버지나 옆집 어른이 다 하실 수 있는 그런 도덕적인 이야기 할려면 부처님이 그렇게 고생고생 하면서 6년 고행 안했어요. 불교 안에도 물론 그런 도덕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만은 그런 이야기 하려면 부처님이 그렇게 6년 고행까지 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건 불교 모르는 사람들, 세상좀 산 어른들은 다할 줄 아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야 이것이야 말로 진짜 성인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以此爲實하니 이것으로써 실다운 것, 이것이야 말로 진실이다. 라고 여기리니. 그랬어요.
유인물 잠깐 볼까요?
後五百歲
후오백세 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쓰느라고 나머지 뒤에 사과니 사성계급이니 하는 얘기 했었지만 정리를 했고, 그 다음에 부처님의 전법선언 이건 이제 오늘날 우리 불자들은 공부 조금하고 바로바로 전법 일선에서 포교를 했으면 하는 제 욕심으로 이런 것을 실었습니다. 여기는 포교사분들이 많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법수(法數)라고 하는 말부터 보면은
교리가 정형화 되어 숫자에 의하여 정리된 것을 법수라고 하여 법수만 모아놓은 그러니까 “숫자에 의한 가르침” 이런 뜻이 되겠지요.
삼보니, 사제니, 육도니, 십이인연이니 이런 것들이죠. 그래서 이런데 대한 책은 법집명수경, 법문명의경 명의집, 대명삼장법수, 이런 책이 있어요. 숫자만 가지고 쭉 모아놓은 책, 불교사전도 아니고 불교 사전 말고 숫자만 가지고 모아 놓은 경전과 책이 있습니다. 이걸 법수라고 해요.
불교 안에 면 숫자에 의한 교리가 많죠. 곳곳에 예를 들어서 기심론 하면, 일심, 이문, 삼대, 사심, 오행, 육자 전부 숫자로 기심론 한권을 꿰뚫고 있어요. 그런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여기 法數라고 하는 낱말도 이 기회에 알아 두시고.
後五百歲라고 하는 경전에 나온 말,
오오백년 이렇게도 말하고, 오오백세 그렇게 말합니다. 이건 금강경이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한 오백년 경에 성립된 경전입니다. 그래서 오백년을 기점으로 한 거예요. 그걸 알아야 돼요.
세존의 열반후 불교의 성세를 오종류의 오백년으로 나누어 나타내고자 하는 일종의 종교사관인데 대집경 월장품이라고 하는 그 군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게 이제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열반 이후 한 오백년경에 왕성하게 기치를 들고 대승불교 인도에서 일어났거든요. 금강경도 그때 결집이 된 거예요. 그때 성립이 된 것인데, 그래서 오백년쯤 지난 뒤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말세적인 그런 것을 느끼는 거야. 부처님 당시때 하고는 전혀 다르다 이거야. 그래서 오백년, 오백년 이렇게 지금 오백년까지 이렇게 변해 왔는데 앞으로 또 오백년이 흘러가면 얼마나 세상이 변할까 이런 생각을 한거예요. 그 다음에 또 오백년을 생각해 보고 생각해 보고 한 것입니다.
처음 오백년은 해탈(解脫)견고다.
해탈이 왕성하다. 우리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이 대다수가 해탈을 한다 이거지.
그 다음에 두 번째 오백년은 선정(禪定)견고 시대다.
물론 그 당시도 해탈한 사람도 있고, 투쟁만 하는 사람도 물론 있어요. 부처님 당시에도 투쟁만 일삼은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다문(多聞)견고라 해서 세 번째 오백년에는 학문적으로 많이 발달한 그런 시기다 이런 표현이고,
제4 오백년은 탑사(塔寺)견고라 해서 이것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탑이니, 사찰이니, 불교 미술품, 예술품, 조각품, 이런 것들이 1,500년이 지나고부터 2000년이 이르기까지 상당히 발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도 있어요. 塔寺견고.
그 다음에 투쟁(鬪爭)견고.
시시비비만 일삼는, 그런 투쟁만 하는 시대다. 이런 표현인데, 이걸 그렇게만 이해하면 치우치니까, 여기 해석을 좀 봅시다.
첫째는 우리가 불교에 입문할 무렵에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시시비비를 따지다가 그렇죠? 옳고 그르고, 이해관계 따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럽니다. 이게 세속적인 가치관이거든요. 그러다가 어느 인연에 의해서 사찰과 불상과 불교에서 하는 행사들을 보고 다니게 되지요. 사찰에 가면 환경이 좋잖아요. 특히 요즘은 더 그렇지요.
불교 미술품 근사하죠, 석굴암 불상보고 숙연해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이 세상에 있습니까? 불국사의 그 멋진 조화, 그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만들 수 있었을까? 다보탑이니, 석가탑이니 또 전체 어울림 같은 것,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예술품. 그게 좋아서 다니는 사람들도 있어요. 우리 불자들이 다 그렇게 하지 사실은.
그 다음에 그참 행사도 좋고, 불교의 예술이나 조각품, 사찰 이런 것 다 좋고 한데, 산도 좋고 물도 좋고 한데, 불교가 저렇게 되기까지는 뭔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교 공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거야. 그게 이제 제3 오백년 시대입니다. 그게 순서예요.
우리가 불교의 해탈에 이르기까지 순서를 따져보면은 그렇습니다. 누구나 다 순서를 밟고 있어요. 어느 시대에 있든지 부처님 시대에 같이 살더라도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시시비비를 따지는 사람은 말세오백년에 사는 사람이고, 또 사찰이나 불상과 행사만 보고 다니는 사람은 이게 부처님 당시 때나 앞으로 만년 후에나 항상 여기에 제4오백년 塔寺견고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고,
그 다음에 가르침을 듣고 배우고 하는 것, 이것만 가지고 계속 세월을 보내는 사람은 그래도 괜찮기는 하지. 多聞견고 시대에 사는 사람이야. 그래도 그거 가지고는 안되는거지. 그 다음 어떻게 해야 한다. 인생관과 가치관이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자리 이게 禪定견고 시대야.
아 인생의 가치가 바로 이것이구나. 나는 부귀공명이나 부귀영화가 좋은 줄 알았더니 불교공부 하고 보니까 여기 이렇게 보물이 있는 것을, 여기 이렇게 정말 만고의 진리가 있고, 이렇게 좋은 보물이 있고, 여기에서 내가 희열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이런 길이 있는 것을 이렇게 딱 그 마음이 정해져 버리면은요 세상사 별로 그렇게 연연해 하지 않습니다.
친구들이 가자고 하면 같이 할 수 없이 한 번씩 어울리고, 옛날에 같이 놀던 일이라고 해서 같이 한 번씩 어울리고, 마지못해서 가고, 집안들이 가고, 친척들이 가고, 이웃이 가니까 한 번씩 어울리지 서서히 멀어져. 가도 재미없어. 놀이에 가봐도 별로 재미없어. 아이, 이까짓 아무 재미도 없는거. 그래 가지고 주머니에 금강경 넣어가지고 가서 혼자 저기 나무 그늘밑에 가서 그거 읽는거야. 그렇게 되어야 돼.
그게 이제 인생관과 가치관이 확립이 되는거야. 이게 禪定입니다. 요지부동이 되는거지. 어디가도 그사람은 하늘이 무너져도 불교 안믿고는 못살아. 그게 불교 믿는거야. 부처님에게 껌뻑 넘어가 가지고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해야 그게 부처님 믿는게 아니고 정말 인생관, 가치관이 이렇게 딱 섰을 때 이게 이제 참으로 불교 믿는 사람이지. 절 한 번도 안해도 좋아요. 그게 禪定견고다.
그럼 이제 앞으로 갈길은 뻔 한거야. 그사람 갈길은 뻔한거야. 초연해 지는거야. 세상사에 대해서 세상에 열심히 살아.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뒷전이 아니고 열심히 살지만은 초연해 지는거야. 초연해지면서도 자기가 맡은 일은 자기 임무에는 아주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줄 아는 것 이게 해탈이죠.
해탈이 뭐 다 벗어 던져버리고 산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세상에 모습을 안드러내는 것 이게 해탈이 아닙니다. 정말 바람직한 일로 열심히 세상을 사는 것, 그러면서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것. 이게 이제 비로서 해탈을 누림. 이게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순서예요, 여러분들 각자 어디쯤에 와 있는지 살펴보세요.
다섯계단 중에 어느 계단에 와 있는가, 때로는 첫계단에 한쪽발은 있고, 한쪽발은 두 번째 계단에 있고, 오늘같은 경우는 세 번째 계단까지 쭉 올라와 있고, 스님 이야기 들어보니까 오늘 괜찮거든 그래서 이제 이시간에는 내 인생관이 더 이상 안흔들리겠다 싶은 거예요, 네 번째 계단까지 올라온거야. 그러다 이제 공부 끝나면 슬슬 계단 내려가기 시작하는거야. 어째 이리 잘알어(허허허... ?), 저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들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내 자신보고 하는 소리예요.
언제나 시원하게 해탈해 버릴는지. 이렇게 이렇게 고개 쳐들어서 넘겨다 보여지면서, 해탈의 경지에 넘겨다 보여지면서 이제는 완전히 그야말로 어떤 세속적인 가치관에서 누구 시처럼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먼 젊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거울이 뭐예요? 나를 보는 거울이예요. 나의 지식이 탁 비치는 거울. 거울 앞에선 내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국화에서 해탈의 경지를 봅니다. 그 시한편 가지고 유명한 사람 되었잖아요. 그 해탈의 경지가 늘 손에 잡힐 듯 잡힐 듯해요. 열심히 공부하면은 그런데 한 번씩 떼르륵 굴려가지고 세단계는 어디 가버리고 부처님도 별로 보고 싶지 않고 그럴 때가 있어요.
사찰과 불상과 불교의 근사한 행사들, 불교의 미술품, 나는 사실 한 번도 주지 욕심내 본적이 없는데 딱 한군데 지금까지도 욕심내는 곳이 있어요. 석굴암. 석굴암 부전 한번 했으면 좋겠다 싶어. 주지까지는 욕심 못내고, 저 불상을 관리하는 이 법당 관리인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싶어요. 아, 참 기가 막히죠. 석굴암 불상. 천하에 멍청이라도 석굴암 불상보고 환희심 내고, 숙연해지고, 거기서 불교를 느껴. 부처님의 자비와 존엄함을 느끼게 되죠. 그런데 거기 마져도 다 등을 돌릴 때도 있지요.
이 다섯단계 정리가 잘 되어 있지요.
여기 後五百年 하면은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시시비비를 따지는 그런 세월에 있다가도 그런 말이예요. 그런 세상이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우리가 어떤 持戒, 지계가 뭐죠? 질서를 지키고, 도덕을 지키고, 자기 임무를 완수하고 이게 지게입니다. 자기 임무 완수하고, 질서 지키고, 법지키고, 도덕지키고 꼭 뭐 비구계를 250계 받아서 지켜야 된다거나 꼭 10계를 지켜야 된다거나 그렇게 매일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진정 행복의 길이 무엇인지, 제대로 행복을 길을 닦을 줄 아는 사람, 수복자(?). 행복의 길은 뭐죠? 이치를 알아야 돼요. 여리실견 이치대로 바로 보아야 돼. 여기에는 사구게의 설명 말고도 포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은 이 구절에 충분히 실다운 믿음을, 신심을 내고 이것이말로 진실이다. 이거야말로 진리다 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수보리 보고 그런 뜻에서 걱정을 하지 말라 이런 뜻이예요.
당지시인(當知是人)은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사실 내용을 알고 보면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佛於一佛二佛三四五佛)에 이종선금(已種善根)이라
한 부처님, 두 부처님, 세 부처님, 네 부처님, 다섯 부처님에게 선근을 심었다. 뿐만아니라.
이어무량천만불소(已於無量千萬佛所)에 종제선근(種諸善根)하야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처소에서 선근을 심었다.
이는 무슨 말인고 하니, 석가모니 부처님이 부처님인 줄 알고 대개 이제 선근을 심죠? 그러다가 석가모니 제자도 가만히 보니까 문수나 보현보살같은 그런 보살들, 관음보살, 지장보살은 말할 것도 없고, 가섭이나 아난이나 사리불이나 목불련 같은 분들도 역시 부처님 못지 않거든요. 역시 부처님처럼 위하고, 그렇게 위하는 것이 차츰차츰 확대되고 발전해서, 아, 이게 거기에만 부처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집에 부처님이 수두룩하구나.
아버지부처님, 할아버지부처님, 남편부처님, 아들부처님, 알고 보니 곳곳에 다 부처님인 것을, 나아가서 이웃사촌들도 전부 부처님인 것을 이렇게까지 내 안목이 확대되어 갈 때 그게 무량천만불소(已於無量千萬佛所) 종제선근(種諸善根)이야. 그뜻입니다.
그게 아니고 부처님이 석가모니 부처님 한분같은 그런 부처님이 나중에 뭐 미륵부처님이 나온다든지, 아니면 아미타불이 어디서 오셨다든지 이렇게 하면 무량천만불소불 어떻게 친견하겠어요? 이거 안되는 이야기예요. 이런 속뜻을 우리가 잘 알아야 돼. 글이야 뭐 별거 아니지.
석가모니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모시다가 제자들도 부처님이고, 경전에 나타나는 그런 많은 보살들도 역시 부처님이고, 심지어 우리 식구들 이웃들, 나아가서 모든 생명이 다 부처님이다. 그리고 결국 사람이 부처님이다. 人佛思想
불교는 그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인불사상이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부처님을 받들어 모실 때 그때만이 진정 세계평화가 이루어진다 이거지.
그렇게 선근을 심어서
문시장구(聞是章句)하고
이 장구에, 이 글구에서 이 글구를 듣고
내지 일념생정신자(一念生淨信者)니라
듣고나서 집에 가서도 그다음 내일 또 모래도 그렇게 되면 좋지만은 뭐 듣는 한순간만이라도 청정한 믿음을 내는 사람이예요.
일념생정신자(一念生淨信者)가 그 말이예요. 이런 설명할 때 만이라도 야 근사하다. 맞는말 같다. 뭔 말인지는 모르지만 좋은 말이고 맞는 말 같다. 이정도만 되어도 훌륭하다 이거야. 그런 사람은 바로 여기에서 정신희유가 희유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에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 꽉찼다. 이거예요.
수보리(須菩提)야 여래(如來) 실지실견(悉知悉見)하노니 시제중생(是諸衆生)이 득여시무량복덕(得如是無量福德)이니라
여래가 이와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은 사람들을 실지실견(悉知悉見)한다. 이 모든 중생들이 전부 한량없는 복덕인 것을 나는 다 알고 다 본다. 그러니까 몰라준다고 걱정할 것 없다 이거지.
이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을 사구게라고 해서 일단 형상에서 좀 벗어난 그런 안목, 아주 전문가적인 그런 눈은 가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래도 이 형상은 허망한 것인데 설사 살아있는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그 형상은 허망한 것인데, 이렇게 우리가 본다면은 우리 자신도 그렇고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 형상도 다 그렇지요. 형상에서 벗어났을 때 얼마나 홀가분하고 자유로워 지겠습니까. 참으로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져요. 경계가 없어지고, 선이 없어져버려요.
그러니 내가 많이 가졌다, 적게 가졌다 하는 분별심이 사라져버려요. 적게 가져도 하나도 섭섭할게 없고, 많이 가졌다고 해서 절대 오만할 까닭이 없어. 허망한 줄 아는 사람이 많이 가졌다고 뭐 그렇게 오만하겠어요. 또 허망한 줄 아는 사람이 아무것도 안가졌다고 해서 뭐 그렇게 서운해 하고 주눅들고 열등의식 가지겠어요. 절대 열등의식 안갖습니다. 많이 가져도 오만하지 않고, 없어도 열등의식 갖지 않고 그럼 어떻되요. 그게 무량복덕(無量福德)이야.
재산이 적은 사람들은, 재벌들 계속 회사 넓혀가고 계속 그렇게 하는거 보면 이해가 안되게 돼 있어요. 나도 이해가 안돼. 뭐 그렇게 먹고 살게 부족하지도 않은데 그렇게 자꾸 넓혀가고 넓혀가고 무리를 쓰다가 나중에는 한꺼번에 망하고 그런 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게 괜히 무리하다가 그렇거든요. 도대체 얼마를 많이 가져야 안가질 수 있을까? 그건 끝도 없어요.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참 이런 가르침,
뭐 그렇다고 하시는 사업 중단하라는 뜻도 아니고, 하시는 사업 남주라는 뜻도 아니고 열심히 잘하되 이러한 사실을 알고 하면은 잘 될때는 잘 될때대로 즐겁고, 못될 때는 아 인연이 그렇게 돌아가는구나. 아 이게 인연이구나. 그게 여리실견이야. 아, 인연이 그렇게 되었다고 볼줄 알면 그게 인연이야. 망하면 망한대로 아 이게 망할 인연이 되었구나. 낙엽이 떨어질 때 되면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는게 정한 이치지. 내가 망하도록 해놓았으면 당연히 망해야지, 망하도록 돼있는데 안망하면 그게 이상하지. 이렇게 좀 초연할 줄 알아야 돼. 그게 무량복덕(無量福德)입니다.
뭐 산더미처럼 어떤 재벌보다도 열배, 스무배 재산이 많아지는 것이 이런 것을 무량복덕으로 착각한다고요. 그래 보았자 그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늘 배가 고파. 그 사람들이 더 배고파요. 더 굶주려 있습니다. 재벌들이 더 욕심이 많고 욕심이 많다는 것은 더 마음이 굶주려 있다는 뜻입니다. 굶주려 있어서 자꾸 그런 거예요. 절대 굶주려 있어서 그렇게 하지 굶주려 있지 않으면 그렇게 안하지.
굶주려 있는 정도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많이 가졌느냐, 적게 가졌느냐 이걸 따져요. 복이 있느냐 없느냐, 그러니까 수조원을 가지고 있어도 마음이 굶주려 있는 사람은 아주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이고, 뭐 겨우 먹고 살정도 연명할 정도만 가지고 있어도 크게 배고파 하지 않고 그냥 내 분이다. 내 분을 만족하고 내 분을 즐길 줄 아는 그런 사람이 진짜 제대로 인생을 살줄 알고 그게 부자다. “지족이 제일부라” 족한 줄 아는 사람이 제일 부자다.
여기 무량복덕(無量福德)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세속적인 가치로써 그어 놓은 선, 세속적인 가치로 만들어 놓은 틀 이게 相이거든요. 돈이 얼마 있어야 된다 이게 아니고, 그런 相과 틀과 선이 무너졌을 때 무량복덕입니다. 그게 무량복덕이야.
무량복덕(無量福德)을 제대로 알면 당장에 부자가 되어요. 이순간 부자돼요. 불교는 그렇게 횡재할 수가 있어요. 당장에 부자가 되면 횡재하잖아요. 이보다 더 횡재가 어디 있습니까? 내가 만들어 놓은 기준 내가 몇억이 있어야 된다. 몇백억이 있어야 된다 하는 기준이 다 없어졌을 때, 그랬을 때 무량복덕이지. 그렇지 않고는 전세계 재산 다 줘봐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별에 내가 살만한 땅이 없을까 이렇게 생각 한다고요. 그렇게 된다고요 사람 욕심이라는게, 그러니까 참 기가막힌 말이야. 무량복덕(無量福德).
相. 내가 그동안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설정해 놓은 선이 무너졌을 때 그게 없어졌을 때, 그게 희미하게만 지워져도 약간은 있고, 희미하게만 지워져도 상당히 복을 누릴거야.
우리 자꾸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사유하고 집에 가서 ‘야~ 횡재하는 길이 여기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이 가르침을 자꾸 깊이 사유할 때 그때 희미하게 지워져요. 우리 경계선, 우리가 그어놓은 경계선, 우리가 짜놓은 틀이 희미하게 지워진다고, 그러다 어느날 용맹정진(?)해서 싹 마져 지워져버리면 경계가 무너지고, 선이 무너져버려요. 그럼 그야말로 온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거지,
무량복덕(無量福德)이라는 말이 절대 거짓말이 아닙니다. 한계 때문에 무량복덕을 모르는거야. 많이 있는 사람이 늘 불안하고 늘 더 가지려고 하고 그러지. 그런 이치를 우리가 불교 공부하면서 확연히 어떤 가치관을 세워 놓아야 됩니다.
하이고(何以故)오 시제중생(是諸衆生)이
어찌된 까닭인가 ? 이 모든 중생이
무부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며 무법상(無法相)하며 역무비법상(亦無非法相)이니라
더 이상 아상, 중상, 인생상, 수자상이 없으며,
무법상하며, 역무비법상이라.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 아니라는 상도 없다. 여기 이제 사상에서 오상, 육상이 나왔어요.
법상은 다섯번째 상이고, 비법상은 여섯번째 상이다.
법은 말하자면은 가르침이든지, 준수해야 할 것이라든지 어떤 격식이라든지 이러한 것을 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매이면 이미 相이예요.
그런데 여기 “약견제상비상하면 즉견여래라” 라고 하는 여기에 눈을 뜨는 사람은 이게 법이다, 저게 법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 다 무너져버려요. 그래서 뒤에 가면은 “일체법이 개시불법이다”. 모든 법이 다 부처님 법이야. 깨달은 법이야. 그러면은 이건 법이고, 이건 법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지. 그러니까
우리가 사찰에서 정해 놓은 예의라든지 이런 것들도 너무 고집할 게 아닙니다. 부처님 앞에 꼭 절 세 번해야 된다. 한 번해도 되고, 반배만 해도 되고, 그것마저 못하면 손한번 들어도 되고, 법화경에 다 있어요. 손 든다는 말이 법화경에 있거든요. 꼭 법당에 들어가야 되는 것도 아니야. 일본 사람들은 보니까 법당에 잘 안들어가대요. 불공하는 사람들 외에는 법당 안들어가. 전부 법당 밖에서 불전함도 법당 문앞에 딱 갖다 놓았어. 밖에서 예배하고 마는거야. 고정된 법이 없어요. 여기 여러번 나오고 여러번 이야기 되겠지만 “무유정법(無有定法)” 금강경에서 그거 하나 건질만한 말이죠. 고정된 법이 없다.
옛날에 뭐 밥을 꼭 불때서 해야만 되는 줄 알았지. 연탄 나왔을때는 연탄불로 해도 밥이 잘되고, 가스 나오니 가스불로 해도 밥이 잘되고, 석유곤로에 얹어도 또 밥이 잘되고, 쪄도 이제 밥이 잘되고, 생식하는 스님들은 밥안하고 그냥 먹어요. 물에 묽커 가지고 씹어먹기 좋거든요. 그것도 좋은 식사거든요. 無有定法이야. 너무 그렇게 꼭 이렇게 해야 된다 하는 그런 틀, 불교가정에서만이라도 너무 고집세워서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그런것 서로 괴로운 일이거든요. 그 틀을 정해놓고 그 틀에 맞추려고 하다보면 서로 괴로운 일이야. 맞지도 않은 그런 법인데. 그래 법이니 비법이니 하는 거 이거다 相이다 이거야. 相이다.
하이고(何以故)오 시제중생(是諸衆生)이
왜 그러냐? 이 모든 중생이
약심취상(若心取相)하면
마음에 만약에 어떤 상을 취할 것 같으면 어떤 틀, 어떤 기준, 어떤 선을 이런 것을 정해놓고 그것을 취할 것 같으면
즉위착아인중생수자(卽爲着我人衆生壽者)니
그 순간 어떤 상이라도 상을 취할 것 같으면 그 순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죽 그냥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듯이 모든 상들이 따라온다. 법상도 따라오고, 비법상도 따라와.
그러니 참 간단명료하면서도 어떤 경우에도 상을 조심해고 되고, 왜, 조심해야 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진정으로 행복한 길은 어떤 틀에서도 벗어나는 것, 그렇다고 무질서하게 방만하게 살자는게 아니라, 매이지 않는 것이죠. 지키면서도 매이지 않고, 매이지 않으면서도 잘 지키는 것,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부처님께 절같지 않은 절이라도 세 번 후다닥 하고 그 음식을 내려다 먹는 것 그자세, 그게 중도예요. 여기 매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 상에 취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 그게 중도입니다.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은 그런 사찰이고 도량이라면 아예 건립할 필요가 없겠다 이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은 허망한 도량이지만은 열심히 건립하고 건립하되 그런 것인줄 알고, 그게 중도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지요. 내 인생도 그렇게 전부 중도적으로 되어 있으니 중도적으로 보라. 억지로 그렇게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전부 중도적으로 중도의 이치대로 존재한다. 그 존재에는 이치가 있어요. 그것을 불교에서 중도라고 이름을 붙였어. 모든 존재에는 그런 이치가 있는데 통일된 이치가 하나 있는데 그 이치의 이름을 중도라고 했어. 그러니까 그 이치대로 보라. 여리실견이라. 그래 중도정견이라는거지. 중도로 보자 이거지. 그러면은 우리가 서로 상처받지 않고 다치지 않고 순리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이야기예요.
하이고(何以故)오 약취법상(若取法相)이라도 즉착아인중생수자(卽着我人衆生壽者)며
마음에 상을 취할 것 같으며 곧 아상도 생기고, 인상도 생기고, 나라고 하는 고집, 남이라고 하는 차별의식, 중생이라고 하는 열등의식, 수자라고 하는 한계의식, 나는 몇살이라고 하는 한계의식, 불교에서는 나이 인정 안한다고 그랬지. 인정할래야 불교좀 알고보면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을. 어린 사람 가만히 보니까 과거에 내 어른이야. 나 위에 어른이야. 그분이 나보다 먼저 돌아가셔가지고 내 밑에 사람이 되었어. 그러니 저 사람을 저 밑에 한 30~40년 나보다 어린 사람을 어른이라고 해야 좋을지 아이라고 해야 좋을지,
그거 뭐 과거생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불교의 이치에 조금 뜻을 두고 본다면은 사실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어른이라고도 할 수 없고, 아이라고도 할 수 없는거야. 어른으로 대접하면서도 또 아이로 역시 취급할 때는 아이로 취급하고, 이게 중도로 보는 것입니다. 양면으로 같이 볼 줄 알아야 돼.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이, 과거 전생에는 자네가 나보다 어른이었다고 계속 어른으로 위하면 그 어떻게, 꼴이 뭐가 되겠어요? 안되겠지요. 어린사람이라고 끊임없이 어린사람이라고 몰아부치면 그건 또 말이 아닌거야.
그래서 모든 세상을 중도로 전개하니까 중도로 보라. 낱낱이 그렇게 일일이 그렇게 집어서 이야기 해주지 못하니 그런 원리만 알고 그렇게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고오 약취법상이라도
만약 법상을 취한다 하더라도 이게 원칙이다. 이게 법이다 라고 하는 틀입니다. 그걸 취한다 하더라도
즉착아인중생수자며
그 속에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따라온다. 어떤 것도 우리가 고집을 세우기 시작하면 저절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따라온다. 거기에 집착하는 게 되어요.
약취비법상(若取非法相)이라도
비법상을 취한다 하더라도 그거야 두말할 것도 없지. 법상도 아닌데 하물며, 비법상을 취한다 하더라도
)니라
즉착아인중생수자(卽着我人衆生壽者
거기에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저절로 따라온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고, 본래 자유로운 존재고, 당당한 존재고, 정말 시원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복락으로서 살 수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못사는 이유가 그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선, 틀, 기준, 그 알량한 기준이고, 알량한 틀이고 한데 그것 하나 버리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고, 그러니까 부처님은 내 모습 가지고 부처라 하지 말라 이거야. 모습이 부처님이 아니라면 얼마나 자유롭겠어요? 상상 한 번 해봅시다.
시고(是故)로 불응취법(不應取法)이며 불응취비법(不應取非法)이니라
그런 까닭에 응당히 법도 취하지 말아야 하며, 응당히 비법도 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법 취하지 말고, 비법도 취하지 말라. 때로는 법도 취하고, 때로는 비법도 취해야 되고, 이게 또 중도라. 취하지 말라고 하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또 그런 과정에서 취해야 필요가 있을 때는 취하는 것. 그러면서 어디에도 매이지 아니하는 것, 상황에 따라서, 無有定法이니까 고정된 법은 없으니까.
이시의고(以是義故)로
이러한 까닭으로
여래(여래) 상설(常說)호대
여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여등비구(汝等比丘)
너희들 비구들이여
지아설법(知我說法)을 여벌유자(汝筏喩者)라하노니
내 설법 알기를, 내가 설한 바 법을 알기를 뗏목의 비유와 같이 알라. 이렇게 했거든요.
뗏목은 뭐죠? 강을 건너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럼 건너갔으면 당연히 버려야지요. 강을 건너가는데 고맙다고 해서 그 뗏목을 짊어지고 길을 걸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의 그 어떤 위대한 가르침도 위대한 법도 말하자면 뗏목처럼 알아라.
이 주옥같은 가르침을 가지고 뒤에 보면 무득무설이라. 나는 설한것도 없다. 나는 깨달음도 없다. 당신의 그 주옥같은 법문, 그 법문 한 한말씀을 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얼마나 큰 희생을 했고, 얼마나 그많은 투자를 했습니까? 태자의 지위를 버렸지요, 그 귀하신 몸으로 6년이라고 하는 피나는 고행을 했죠. 그리고 큰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거기서 나오는 한말씀, 한말씀입니다. 한말씀 한말씀이 바로 그런 거예요.
한말씀, 한말씀 속에는 바로 그 희생과 노력이 그속에 묻어 있는데 그걸 뗏목처럼 알아라. 강을 건넜거든 뒤도 돌아보지말고 버리고 가거라. 부처님의 말씀에 집착하지 말라 이거야. 어떤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에도 집착하지 말라. 뗏목 버리듯이.
뗏목에 대해서 또 한가지 부연해서 말씀드릴 것은 우리가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면은 강을 건너야되요. 강을 건너야 되는데 뗏목을 타고는 그냥 강을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도로 뗏목 출발지 도착해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예요. 뗏목은 방편 아니겠습니까? 방편이예요. 방편이라고요.
우리나라 불교에는 방편이라고 하는 거품이 너무 많아요. 불교의 거품이 우리나라 같이 많은데는 아마 없을 거예요. 다른 나라는 잘 모르지만 불교의 거품 많다는 소리 처음 듣지요? 거품 정말 많습니다. 거품이라는 말은 방편이예요. 방편이 너무 많아요. 그래 가지고 그 방편에 전부 우리가 놀아나고 있고, 거기에 현혹되고 있습니다. 일일이 꼬집지 않더라도 여러분들 무엇이 방편이고, 무엇이 실법인지 잘 아시겠죠?
이 경전 이 주옥같은 경전 이건 우리 최후의 보루입니다.
불교의 최후의 보루는 경전이예요.
부처님 이제 열반해서 가셨지.
그 다음 스님들 그만그만 하지. 삼보라 하지만은
정말 의지할 곳는 법보야. 진짜 의지할 곳은 법보야. 그런데 이 법보를 스스로 뭐라고? 뗏목처럼 알아라. 뗏목처럼 알고 버리고 가라. 제발 거기에 매여 있지 말라. 그렇게 스스로 말씀하셨어요.
이 한말씀 한말씀에 당신이 쏟은 노력과 정력과 투자가 얼마나 합니까? 그분의 생애를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냥 나온 소리가 아니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얼른 뗏목을 탔으면 강을 건너고,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리고 잊어버리고 가야 되는데 뗏목놀이만 계속하고, 3000년동안 뗏목 놀이만 하고, 특히 한국에 와서는 뗏목놀이만 하는 사람이 거의 10명에 9명은 뗏목 놀이만 하는 거예요.
방편이라고 하는 미명하에 별별 일들이 벌어지는데 이게 이제 불교를 제대로 정상적으로 공부하고, 차원높은 불교, 깊이있는 불교를 공부하는 여기 모이신 분들이 불교공부 잘해 가지고 그런 것 좀 깨우쳐주고 가르쳐 줘야 되요. 제대로 된 불교를 했을 때 소득이 훨씬 큽니다. 방편불교 해가지고 소득이 얼마 안됩니다. 소득이 많은 것을 해야지.
법상응사(法尙應捨)어든 하황비법(何況非法)가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법도 오히려 응당히 버려야 한다. 꼭 버려야 한다. 응자 꼭 버려야 한다 그말입니다. 법도 꼭 버려야 한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 좋다 하고, 저야말로 부처님 법이 좋다고 정말 푹 빠져 있는 사람이죠. 여기에 온 생애를 다 바치고 있는 상황인데 여기에서 초월해야 됩니다. 여기에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뭐 나는 이제 불법하고 관계없다 이렇게 살자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열심히 정법하고 더 열심히 포교하는 것 이게 법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법아닌 것이야 더말할 나위도 없죠. 불법아닌 것 그거야
하황비법(何況非法)가
어찌 하물며 비법이겠는가? 법 아닌 것이겠는가? 법아닌 것이야 뭐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참 금강경은 법적으로 소위경전 교과서로 정해져 있고, 우리 불자들에게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것이 우리 국민의 교과서가 되고, 전인류의 교과서가 되었으면 참 내 소원 그거 하나인데, 제발 그렇게 되어서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미 가지고 있는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가치를 한껏 발휘하면서 그러면서 좀 당당하고 시원시원하고 모든 사람을 다 부처님으로 이해하면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본래의 해탈과 무량복덕을 누리면서 살았으면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첫댓글 소중한 가르침에 합장 예배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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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信希有 .... 지아설법(知我說法)을 여벌유자(汝筏喩者)라하노니 : 내가 설한 바의 법을 알기를 뗏목의 비유와 같이 알라.... 감사드립니다! 사바하님!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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持戒,,, 질서를 지키고, 도덕을 지키고, 사회의 규율과 규범을 지키고,,,자기의 주어진 責務를 완성 하는 것 ! < 無有定法 >
<已於無量千萬佛所에 種諸善根하야...> <無有定法..>...수고하셨습니다..사바하 님! _()()()_
삼배 올립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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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감사드림니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나무 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