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성지주일 미사강론 노틀담수녀원에서
성지주일(입당 전)권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 얼음과 눈으로 뒤 덮인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산의 정상을 향해 오르다 텐트를 치고 잠을 잘 때 젖은 등산화를 가슴에 꼭 품고 잠을 청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다음날 아침 뽀송뽀송한 상태로 또 걸을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등산화를 가슴에 꼭 안고 죽어간 산 사람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얼음과 눈으로 뒤 덮인 산에서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얗게 얼어붙은 얼굴로, 하나 같이 등산화를 꼭 가슴에 끌어안고 나란히 얼어 죽어간 등반대원의 모습,
그 한 장의 사진이 오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오버랩 됩니다.
지금 우리도 저마다 어딘가를 향해 오르고 있고
그 길에서 죽어갑니다.
내일, 또 내일, 내일 아침이면 우리도 그렇게 죽어 있을 것입니다.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
그 분은 무엇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어가신 것일까!
우리, 무엇을 가슴에 꼬옥 끌어안고 죽어 갈 것입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늘 우리는 성서 안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전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전으로 입당하는 예수를 기념하는 예식을 단순한 기억으로서가 아니라 현재하는 사건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호산나 다윗의 왕!’ 이라 외치며 그분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던 백성들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갑자기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시오!’라고 소리질러댑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
과월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다인들은 과월절에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재림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해 왔습니다. 루가복음 13,1절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 여러 명을 처형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실로암 탑이 무너져 18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과월절을 앞두고 뭔가 불길하고 불온한 일들이 생겨나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민중들은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술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압제에 시달려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랬습니다. 세상이 확 뒤집어져 뭔가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염원은 예수라는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었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죽은 자를 일으키고, 사랑과 자비를 설교하고, 지배자들에게 거침없는 독설을 뿜어대는 사람, 주변에는 혁명당원 시몬을 비롯하여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드는 조직력과 선동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는 음식을 만들어 낸 사람....이제 그가 다가오는 과월절의 주인공으로 우뚝서길 이스라엘 백성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산상설교와 오천명을 먹이신 이야기의 연결
성서 안에서 산상설교가 일어난 장소를 ‘산’으로 기록하는데, 빵의 기적이야기의 장소, 배경으로 기록된 단어는 ‘외딴 곳’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장면이 모두 ‘마을에서 떨어진 곳’으로 해석되어 질 수 있으며 두 장면 모두 군중과 제자들 앞에서 행해 졌다는 점에서 두 개의 이야기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일어난 사건으로 서로 연관성이 있다고 많은 성서학자들이 말합니다. 과월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오후, 산에 모인 수 많은 군중은 예수에게 지금이야 말로 유다를 위해서 일어서야 할 때이며 당신이 중심이 되어 준다면 목숨 바쳐 따르겠노라고 외칩니다. 과월절, 민족의 감정이 고조되는 축제를 앞두고 군중들은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야기는 이렇게 흥분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이갸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이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가 군중들을 선동하여 과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자신들에게 고통을 부과하던 의회의 대사제와, 사제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처단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하는 그런 출사표를 던질 것이라 생각하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봄바람을 타고 예수의 음성이 속삭여 들려왔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말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데로 남에게 해주어라. 원수를 사랑하고, 보답을 받지 말고 베풀어라!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하는 법이다!
군중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대에 찬 외침, 민족적인 절규를 깨고 이와 같은 의외의 말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예수의 이미지와 사랑을 호소하는 실제의 예수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너무나 커다란 혼돈에 휩싸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고, 예수를 구름처럼 따르던 이들도 하나 둘 예수의 주변을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하나 둘 동요합니다. 예수가 묻습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 ...슬픈 표정으로 묻는 예수에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예수의 모습은 정말로 이사야서 53장이 묘사하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 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깍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를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예수가 만났던 많은 병자들, 아이를 잃은 어머니,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 발을 못쓰는 남자, 중풍병자, 죽음에 처한 소녀,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 함게 짊어지는 것, 그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는 것...따라서 예수는 과월절에 희생되는 어린 양처럼 자신도 그들의 모든 고통을 짊어지기를 바랬습니다. 진정 예수가 바랬던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저는 오늘 제 자신에게 그리고 이 식탁에 둘러앉은 모두에게 묻습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긴장과 좌절, 신경과민, 불안, 두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저는 그렇습니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려하고, 더 잘 생기려하고, 더 인기가 있거나 더 성숙한 사람으로 보여지고자 노력하고 있지는 않은지.....더 덕이 있고, 더 인자하고, 더 사색적인 사람으로 보여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저는 또 공동체 안에서의 찬성과 반대가 얼마나 나의 행동을 조종하는가를 들여다봅니다. 세치 혀끝, 칭찬의 한 마디로 내 마음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반대로 지나가는 하나의 비판에 내 맘이 깊은 나락에 떨어지는 제 갈대 같은 마음을 바라봅니다. 타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을 허비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규칙, 그들의 기준, 그들과 어울리고자 애쓰고, 그들의 사랑을 바라고, 그들의 비웃음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칭찬을 학수고대하고, 그들이 심어주는 죄의식에 무기력하게 굴복하고 마는 나의 모습...이러한 의존성과 노예의식, 남에게 기대어 나의존재를 확인하려 하는 모습....세상은 어둠의 영토, 삶을 위해 생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칭찬과 감탄을 얻으려고 생명을 소모하는 세계, 성공이나 명성이라는 헛된 것을 얻으려고 신경질적으로 경쟁하고 싸우는 곳...주위 사람들의 칭찬과 비판에 발목을 붙잡히면 긴장과 불안과 근심의 열매를 먹게 된다는 사실, 그것을 오늘 깨닫고 있습니다.
오늘 그들이 나를 아름답다고 말하여 내가 의기양양해 진다면, 또, 내일 그들이 나를 추하다 하여 내가 금새 풀이 죽어버릴 것이라면, 나는 무엇인가 껍데기로 인생을 살아온 것일 겁니다. 즐겨야 할 것은 사람들과의 친교이지 칭찬이 아닙니다. 즐겨야 할 것은 그 사람과 주고받는 교류이지 찬사가 아닙니다. “똑똑하다, 현명하다, 착하다, 거룩하다” 그 칭찬을 즐거워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들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난 그러한 견해를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지 싸워야 합니다. 실수를 할까 두려워하고, 자신의 인상을 흐리게 할까봐 모든 말이나 행동을 두려워합니다. 엄청난 불안과 부자유가 우리를 사슬로 묶어버립니다.
홀로 있음, 완전한 고독안에서만 의존과 욕망이 줄고 사랑의 능력이 생겨납니다. 아무도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도 비참하게도 하지 못하는 삶, 누구에게도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거부하며, 누구에게도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는 삶.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필요를 없애고, 완전히 혼자가 되는 것!
헨리뉴엔은 말합니다. “그대의 고독의 수준이 그대의 친교의 능력이다!”
예수! 그는 오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여 어두운 밤의 한 복판으로 들어갑니다.
철저한 고독의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라 이 주간 고독의 중심으로 들어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