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말
I. 교파란 무엇인가?
II. 교파형성의 배경
III. 미국의 독립과 교파의 등장
IV. 교파제도에 대한 도전
끝맺는 말
시작하는 말
한국교회는 교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하 나님의 성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파들이 있으며, 한국교회를 설명하는데 이런 교파들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정작 교파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별다른 연구가 이루어져있지 않다.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교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교파라는 단어를 뒤따라오는 것은 분열이며, 이것은 기독교의 가장 치욕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한 반동으 로 대두되는 것이 교파연합이다. 교파는 잘못된 것이며 이것을 극복해서 하나로 만드는 것이 교회의 지상과제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일면 타당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사실 교파분열의 배경에는 비 성 서적인 측면이 많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교파제도는 미국의 독립과 더불어서 시작된 정교분리에서 시작되었다. 정교의 분립으로 더 이상 국가는 개인의 신앙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개인의 종교적인 신념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다양한 교파가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교파들은 더 이상 국가의 지원을 기대하지 않고,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 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교파제도는 근대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런 교파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설명하고, 이것의 역사적인 기원과 발전과 정, 그리고 여기에 대한 반응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논문은 주로 미국교회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미국교회가 교파제도를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현대 기독교의 교파제도는 미국기독교의 수 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학자인 윌슨(Bryan Wilson)은 교파제도야말로 미국기독교가 교회의 제도적인 측면에서 세계교회에 공헌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한국교회의 교파제 도 역시 근본적으로 미국교회의 교파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한국의 여러 가지 상황이 한 국의 교파를 미국의 교파와는 다르게 만들고 있지만, 우리는 미국교회의 교파형성에 대한 연구를 통 해서 한국교회 교파연구에 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I. 교파란 무엇인가?
교회구조에 대해서 가장 널리 사용되어지고 있는 범주는 트뢸치(Ernest Troeltsch)의 [기독교 회의 사회적 교훈]에 나타나는 교회(church)와 분파(sect)의 구조이다. 트뢸치에 의하면 서구의 기독교 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교회타입(church type)이며, 다른 하나는 분파타입(sect type)이다. 교회타입은 세상과의 연속성 가운데서 자신의 위치를 정립한다. 반면에 분파타입은 세상과의 비연속 성 가운데서 자신의 위치를 정립한다. 그래서 교회타입은 기존 세상의 유지발전에 공헌하는 반면, 분 파타입은 기존의 체제에 대해서 도전적이다. 따라서 교회타입은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정을 받 지만, 분파타입은 기존의 체제로부터 이단이라는 정죄를 받게된다.
많은 학자들은 트뢸치의 이런 분류를 채용하여 교회를 설명한다. 하지만 트뢸치의 이런 분류 는 유럽의 국가교회라는 상황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럽의 교회는 국가의 지 원을 받고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국가교회와 여기에 도전하는 이단종파로 나뉘어져있다. 그리고 이 런 이단종파들은 국가의 권력에 의해 억제되고 제거되었다. 따라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교회는 국가 권력과 연속성 상에 있을 수밖에 없고, 국가에 의해서 제지를 받는 분파는 국가에 대해서 도전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트뢸치의 분석은 국가교회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타당하다.
한편, 콘스탄틴의 기독교공인 이후, 기독교제도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미국의 정치와 종교의 분리이다. 독립전쟁 이후 미국은 헌법으로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였다. 이것은 국가가 더 이상 종교의 문제에 간섭하지 않으며, 동시에 어떤 특정한 종교를 지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국가의 영역에서 해방된 것이다. 이것은 유럽인들의 눈에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국가의 도 움이 없는 종교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종교적인 합일점이 없이 국가가 존재할 수 있을까? 청교도 들마저도 신앙의 동질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국가의 동질성이 확보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9세기 미국을 방문한 많은 유럽인들은 미국의 종교가 과연 제대로 발전할 수 있을까 염려했다.
하지만 많은 미국인들은 이런 정교의 분리로 더 이상 종교가 국가의 간섭 없이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국가의 간섭이 없어지자 종교는 종교의 논리에 의해서 발전하게 되 었다. 곧 종교가 정치에서 해방되자 종교를 지배하는 것은 더 이상 정치나 사회가 아니라 종교 그 자 체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교의 분리는 종교를 정치에서 해방시켜 주어 더욱 종교적이게 만들었 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국의 종교는 유럽의 종교보다 더욱 종교적이다. 이것은 미국기독교가 보다 계시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기적을 강조하며, 기독교의 절대적인 진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 난다.
이런 정교의 분리는 교회의 형태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이젠 국가로부터 독립한 교회는 국가 를 절대적으로 의지할 필요도 없고, 국가와 절대적으로 대립할 필요도 없다. 이런 점에서 정교의 분리 하에서 교회는 국가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도 있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수도 있게 되 었다. 정치와 종교가 하나였을 당시에는 어떤 정치체제의 존망은 곧 그 체제가 지원하는 종교의 존망 과 직결되었으므로 종교는 필사적으로 국가를 지원해야 했다. 이것은 성공회가 영국왕실을 지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될 때에 종교는 그 기반을 국가권력에 두지 않기 때문에 어떤 체제를 절대적으로 지지할 필요가 없다. 이런 점에서 정교분리 아래서의 종교는 정교일치 아래서의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상황이 다르다. 따라서 국가와의 관계설정이라는 측면에서 만들어낸 트뢸치의 이론은 여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겠다.
이런 새로운 상황에서 만들어 낸 새로운 교회구조가 바로 교파이다. 교파란 국가의 지원을 받는 국가교회도, 국가의 박해를 받는 분파교회도 아니다. 교파란 국가와는 관계없이 다양한 종교집단 이 자신의 주장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제시하여 사람들의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다. 이런 교파 제도는 사실 이미 정치제도와 경제제도에서 나타나 있는 현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근대민주사회는 다 양한 정치집단이 자신의 주장을 대중들에게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획득하는 사회인데, 여기에 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집단이 정권을 잡게 된다. 근대자본주의사회도 다양한 회사들이 다양한 상 품을 만들어 내어 소비자를 상대로 하여 경쟁을 하여 보다 많은 이익을 남기는 제도를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파제도는 여러 교파들이 다양한 교리와 정치제도, 예배 스타일을 놓고 보다 많은 신자 들을 확보하려는 경쟁시스템이다. 따라서 이런 제도 아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와의 관계가 아니 라 대중들과의 관계이다. 이런 새로운 제도가 교회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교파제도는 종교에 대한 다양한 욕구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고대사회는 사 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회였다. 고대사회는 모든 것이 지배자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사람들은 지배자가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정치제도에서도 항상 단일사상을 요구한다. 하지만 근 대정치사회의 다당제는 다양한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들이 돌아가면서 정권을 쥠으로서 다양한 계층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된다. 이것은 경제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고대의 상품은 항상 일정했다. 생존에 급급한 대중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근대자본주의는 다양한 상품이 다양한 소비자에 게 선보이고,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상품을 선택한다. 마찬가지로 정교일치의 사회에서는 국가가 종교를 선택해서 국민들에게 제시하고 국민들은 거기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근대사회 에서는 국가가 이런 역할을 하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사람들의 다양한 종교적인 욕구가 표출되기 시 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고전적인 예배 스타일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열정적인 예배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교파를 따라서 종교를 선택한다. 이처럼 교파제도는 다양한 종교적인 욕구 가 표출될 수 있는 사회에서 등장한 것이다.
이런 교파제도는 근본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고대사회는 근본적으로 선택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였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근대사회는 선택의 자유를 인정한다. 사실 하나의 종교만 있는 곳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그 종교를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뜻대로 결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종교에 대한 열정이 없다. 그리고 왜 자기가 그 종교를 선택했는가에 대한 확신도 없다. 하지만 여러 종교가 있고 그 중에서 하 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을 서로 비교해 볼 것이고, 그 장점을 생각하게 될 것이 다. 따라서 교파시스템은 보다 자의식이 강한 신자들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 경쟁시스템이다. 근대자본주의는 경쟁시스템이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다양한 상품을 내어놓고 이런 경쟁을 통하여 보다 질 높은 상품을 소비자들에게 제공한다. 이 런 점에서 잘 발달된 자본주의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다같이 유익을 보게 한다. 이것은 정치도 마찬가 지다. 여러 정당들은 표를 의식하기 때문에 더 나은 정치를 하겠다고 주장한다. 이런 것을 통하여 정 치가들은 정권을 잡고, 시민들은 보다 나은 삶을 갖게 한다. 민주주의는 이런 경쟁 시스템이 보다 나 은 삶을 가져왔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교파의 경쟁을 이해해야 한다. 다양한 교파들은 신자들에게 자신들이 참된 종교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근대기독교의 모든 교파들은 거의가 자신들이 보다 진리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궁극적인 판단은 대중들에게 달려있다. 어떤 교파는 자신들의 종교가 참되다고 주장하지만, 일반대중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종교에서 등을 돌린다. 이 런 점에서 최종적인 판단은 대중들의 몫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런 참된 종교의 기준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등장한 것이 성서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시작한 개신교는 참과 거짓의 기준은 성서에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어 떤 전통보다도, 합리적인 이성보다도, 개인의 경험보다도 우선적이다. 그러므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 이후 미국교회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교파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신약성서로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따 라서 교파제도의 등장 이후에 교회는 보다 더 성서적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침례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등은 다같이 자신들이 성서적이라고 믿는다. 사실 따지고 보면 20세기 초 에 벌어진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논쟁도 누가 더 성서적이냐를 묻는 문제였다. 이것은 교파제도 아 래서 경쟁하기 위해 성서적이 아닌 종교는 참된 종교가 아니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 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지적해야 할 것은 교파교회는 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국가교회나 분 파교회와는 다른 새로운 타입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 하에서 교파는 국가의 지원 도 박해도 박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교파교회는 국가교회와는 구분된다. 그리고 교파교회는 분파교회 가 갖고 있는 사회에 대한 극단적인 배타성을 갖고 있지도 않다. 교파교회는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운다. 그리고 정치에 참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자발적 인 헌금에 의해 가능하며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교파교회는 공적인 역할을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 지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단체를 자원단체(voluntary society)라 고 부른다. 자원단체란 강제력이 없다는 뜻에서 공적집단과 구분되며, 이익을 추구하는 단체가 아니라 는 점에서 사적인 이익집단과는 구분된다. 교파는 자원단체의 일종인 것이다.
II. 교파형성의 배경
그러면 역사적으로 볼 때 교파는 어떤 배경을 갖고 출발하였는가? 일반적으로 교파형성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의 독립을 든다. 왜냐하면 미국의 독립이후 국가와 종교의 분리가 이루어 졌고, 따라서 다양한 교파가 국가의 간섭이 없이 등장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양한 교 파가 하루아침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독립이후에 다양한 교파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전에 이미 다양한 그룹의 종교단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의적인 관점에서 교파제도는 종교개혁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천주교는 모든 교회가 단일 한 교리와 단일한 제도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천주교는 보편성을 강조하는 종교이다. 하지만 개혁자들은 교회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형태를 달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루터 교회는 독일인을 상대로 하였고, 개혁교회는 스위스를 대상으로 하여 발전하였다. 이들은 교회의 제도 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참 된 교회에 속한다고 보았다. 개신교는 교회의 참된 일치는 외적인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고백하는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개신교는 출발부터 가시적인 일치를 포 기한 것이다.
허드슨(Winthrop Hudson)에 의하면, 교파개념의 보다 직접적인 근원은 17세기 중엽 영국이 청교도 혁명의 열기에 휩쓸려 있을 때 독립파 청교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독립파 청교도들이 자 신들의 주장을 활발하게 펼친 것은 17세기 중엽의 웨스트민스터 회의 기간이었다. 이 당시 정권을 잡 은 장로파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국가교회로 만들려고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독립파(혹은 회 중파) 청교도들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이들은 국가교회 시스템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예수님은 어떤 특수한 교회제도를 제자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 떤 특수한 제도를 절대화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제도를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연약성은 어떤 교회제도도 절대화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회중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제도가 가장 성서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 역시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제도를 절대적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다.
이런 독립파 회중교회의 가장 중요한 대변인은 보로우(Jeremiah Burroughes)이다. 보로우는 교회에 여러 제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보로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불완전한 세상이며, 사람들도 다양하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교회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보 았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건한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며, 이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 다 진리에 대한 열정이 강하기 때문에 그들과는 다른 주장을 할 수밖에 없다. 둘째, 경건한 사람들은 세상적인 것에 매이지 않고 담대하게 자유를 주장하기 때문에 여러 단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셋째, 경건한 사람들은 성결의 좁은 길을 가기 때문에 넓은 길을 가지 않는다. 넷째, 경건한 사람들은 영원 한 진리에 대해서 깊은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면 분명하게 반대하게 된다. 다섯째, 많은 부분에 있어서 종교적인 진리는 신비적이라서 하나님만이 궁극적으로 판단하실 수 있다. 여섯째,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하여 권 고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보로우는 교회에는 여러 집단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보로우의 주장은 교회의 여러 제도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생긴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양성과 일치성이 함께 공존해야 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로우는 신자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졌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같이 협력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다양성이 기독교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곳까지 나아가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즉 기독교의 다양성 이 기독교를 다른 종교로 만드는 데까지 나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모든 다양성은 기독교의 공동의 적을 공격하는 차원에서 연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은 또 다른 차원에서 인정되고 발전되어 왔다. 그것은 소위 17세기 영국 의 광교회파이다. 이들은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며 따라서 정통주의를 반대한다. 이들이 수적으로는 많 지 않았지만 계몽주의의 뿌리의 역할을 하였다. 즉 그들은 기독교교리의 다양성을 인정함으로써 기독 교의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고 따라서 기독교를 상대화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다양한 종교 집단의 출현을 위한 길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이런 것들이 하나의 법령으로 묶여서 나타난 것이 1689년 관용령이다. 청교도의 도움을 받아 천주교의 등장을 막으려고 했던 성공회는 관용령을 발표하여 천주교와 이단을 제외한 다양한 비국교 도들을 용인했다. 여기에서 법적으로 영국에서는 종교의 다양성이 인정받게 되었다. 물론 아직 성공회 이외의 다른 집단들은 온전한 대우를 받지 못했지만 이제 하나의 교회의 시대는 끝나게 된 것이다.
이런 시대의 사상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사람이 사회 철학자인 존 록크이다. 그는 종교의 관용에 관한 논문에서 더 이상 종교의 문제를 국가가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많은 사람들 은 국가가 종교의 문제를 취급하지 않으면 종교가 쇠퇴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록크는 오히려 종교의 관용이 종교의 진정성을 회복하게 만들 것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종교가 더 이상 국가에 의존할 수 없게 되면 종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새로운 방법을 택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콘스탄틴 이전의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모델을 초대교회에서 찾게 만들고, 이것은 자신들이 보다 성서적인 기독교라는 새로운 정당성을 주장 하게 만든다.
록크에 의하면 초대교회를 모델로 삼는 관용령 이후의 교회는 두 가지 특징을 갖게 된다. 첫 째는 자원적인 단체가 된다. 교회는 더 이상 신자들을 강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는 신자들의 자발 적인 동의에 의해서 헌금하게 되고, 규제하게 된다. 여기에서 교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것은 법이 아니 라 신자들의 동의이다. 따라서 교회는 법률적인 강제보다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한 설득이다. 다시 말 하면 강한 설득구조를 가진 교회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기적의 등장이다. 록크는 여기에서 신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기적을 들고 있다. 록크에 의하면, 초대교회에는 기적이 많았는데 콘스탄틴의 등장 이후에는 교회에서 기적이 사라졌다. 로크는 이것을 교회의 타락이라고 보았다. 하지 만 교회가 정치에서 자유로워지면 교회는 다시금 순수성을 회복하여 기적을 가져오게 되고, 사람들은 강요에 의해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여 신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관용령의 등장은 실질적으로 다양한 종교집단이 공존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관용령 이후에 많은 청교도들이 영국교회에 합하게 되었다. 물론 관용령 이전과 같이 여 전히 비국교도로서 남아있는 단체들이 많이 있었지만, 상당수는 영국국교회와 합하여 그 안에서 교회 를 갱신하고자 하였다. 관용령 이후에 영국국교회에 합류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웨슬리의 부모들도 있 었다. 잘 알려졌듯이 웨슬리의 부모들은 원래 청교도였는데 관용령 이후 영국국교회 내에서 국교회를 갱신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국교회로 바꾸었다. 이런 가운데 17세기의 많은 비국교도들은 18세 기에는 많이 쇠약해졌다.
영국국교회를 갱신하고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갱신단체들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당 시 영국교회는 카톨릭의 전통은 반대하지만 초대교회의 전통은 받아들였다. 특별히 콘스탄틴 이후 교 회의 타락을 갱신하기 위하여 새로 설립된 수도원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이런 역사적인 연구에 자극을 받은 영국교회 내의 갱신그룹은 수많은 자원단체들을 만들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SPCK(Society of Promotion for the Christian Knowledge)이다. 이들은 미국에 성직자가 부족한 것을 알고 그곳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이런 갱신단체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웨슬리의 감리회(The Methodist Society)이다. 웨슬리는 감리회를 분명한 목적을 가진 집단으로 설명했다. 웨슬리는 자신의 감리회가 영국사회를 갱신하고, 복음을 선포하며, 성결을 전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영국사회와 교회는 말할 수 없 이 타락하였다. 웨슬리는 감리교를 통해 이것을 갱신하고자 하였다. 또한 웨슬리는 교회조직의 근본적 인 목적은 복음전도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교회조직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사탄의 세력에서 건져내어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그들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가운 데서 양육하는 것이 아닌가? 교회조직은 이 목적에 대답할 수 있는 한에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만일 여기에 대답할 수 없다면 그것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감리회에 성결의 복음을 위탁하였고, 감리회는 이것을 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단체라고 보았다. 웨슬리는 세 상을 떠나면서 자신은 감리회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두렵지 않지만 성결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 감리회가 될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이런 분명한 자기목적은 교파의 중요한 특성이 된다.
웨슬리의 사상에 나타나는 또 다른 특성은 근본적인 일치 가운데서 다양성의 인정이다. 웨슬 리는 평생 휫필드와 경쟁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휫필드의 장례식장에서 행한 웨슬리의 설교를 보면 그의 신학 속에는 다양성과 일치성이라는 교파정신이 철저하게 내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과 휫필드사이에 서로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휫필드는 칼빈 주의자였고, 웨슬리는 알미니안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 리에 대해서 일치하고 있다. 여기에서 웨슬리는 모든 기독교인이 근본적으로 동의해야 할 교리와 서로간에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의견을 구분하였다. 근본적인 교리에는 원죄, 그리스도의 신성, 속죄, 칭의, 성령의 사역, 삼위일체가 포함되어 있다. 웨슬리는 카톨릭정신(Catholic Spirit)이라는 설교에서 교회의 형태나, 기도의 스타일, 성만찬의 형식, 세례의 방식 등의 차이에 대해서 문제삼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것들은 서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웨슬리는 다양한 교회의 형태 를 인정한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교회의 일치성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교리나 제도가 아니라 마음이 다. 당신의 마음과 내 마음이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마음의 일치는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 을 말한다. 웨슬리는 참된 교회의 표징으로 산 신앙을 들었다. 곧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는 신앙이 있다면 교파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18세기의 복음적인 부흥운동의 중요한 요소이며, 복음적인 에큐메니칼운동의 핵심 사상이다.
이런 태도는 제1차 대각성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사람인 길버트 테넌트에 의해서 확인된다: "기독교라고 주장하며, 그의 근본적인 원칙을 갖고 있는 모든 단체들(all societies)은 그들의 다양한 명칭과 각양의 다른 정서에도 불구하고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며, 동시에 가시적인 메시아 왕국의 다양한 분파인 것이다." 여기에서 다양성과 일치성이 함께 보장되는 것이 다.
18세기의 영국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교파적인 요소의 또 다른 측면은 경쟁시스템이다. 영국의 산업혁명과 더불어서 영국에서는 아담 스미스의 시장경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1776년 미국이 영국을 향해 독립선언을 했을 때, 당시 영국에서는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썼다. 자유로운 시장경쟁 체제가 보다 더 나은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던 스미스는 이것을 종교에 대해서도 적용했다. 스 미스는 당시 영국의 종교시장에서도 경제시장에서와 같이 이미 독과점시대가 끝나가고 있었으며, 새 로운 종교상황이 등장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과거의 독점적인 지위에 있는 성공회는 쇠퇴하고 있 으며, 새로이 등장하는 교파들이 자유 경쟁을 통하여 영국의 종교시장을 잠식해가고 있다고 보았다. 스미스의 국부론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직자들은] 그들의 생존을 전적으로 청중들의 자발적인 헌금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보유토지나 십일조, 혹은 지세 등과 같은 확정된 월급이나 연금 같은 국가의 법이 그들에게 할당해 준 다른 기금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성직자들의 노력, 열정, 근면은 후자의 상황보다 전자의 상황에서 더욱 활성화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 등장하는 교파의 교사들은 기존의 국교시스템을 공격하는데 큰 이점을 가지고 있다. 국교시스템 하의 성직자들은 이미 확보된 기금에 의존하기 때문 에 신자들의 신앙과 경건의 열정을 유지하기 힘들다. 또한 자신들의 나태함을 이기지 못한 그들은 그들 자신의 확보된 종교를 옹호하는데에도 열심을 내지 못한다. 국가의 지원을 받거나 기금이 충분 히 확보된 종교의 성직자들은 종종 신사의 모든 덕목을 골고루 갖춘 지성과 교양의 사람이 된다. 그 러나 그들은 점점(좋던지 나쁘든지 간에) 이러한 자신들의 특징을 잃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한때 그들로 하여금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 대해 권위와 영향을 갖게 했으며, 또한 그들의 종교의 성 공과 확립을 위한 근본적인 요소들이었던 것이다. ---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모든 종파들은 한때 한 두 세기 동안 국가교회의 안정성을 즐기고 난 다음 그들의 교리와 생활을 공격하며 등장하는 새로운 종파들 앞에서 자신들을 방어할 능력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 학문과 문장은 국 가교회의 것이다. 하지만 대중을 설득하는 기술과 사람을 개종시키는 모든 방법은 계속적으로 그들 반대편의 것이다. 영국에서 충분한 기금을 갖고 있는 국교회성직자들은 오랫동안 이런 기술을 무시 해 왔으며, 현재에는 주로 비국교도와 감리교도들에 의해서 이런 측면이 개발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비국교도 교사들을 위한 독립파의 안수식은 자발적인 서명, 신용장, 그리고 법률의 교묘한 적용 을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이들의 열정과 활동은 지금 많이 약화되어졌다. 그들은 매우 학식 있게 되 었고, 창의적이며, 존경받는 사람들이 되었으나 그들은 더 이상 대중적인 설교자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학식의 반절 밖에 되지 않는 감리교도들은 훨씬 높은 대중적인 평판을 갖고 있다.
스미스는 성공회는 이미 경쟁력을 잃었으며, 17세기의 비국교도들도 점점 성공회를 닮아가서 경쟁력을 잃고 있으며, 18세기 말 영국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교회는 감리교뿐이라고 보았다. 감 리교는 국가의 후원에 의존하지 않고, 자생력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III. 미국의 독립과 교파의 등장
어떤 교회집단에 특권이 주어지지 않고 모든 단체들에게 공정한 경쟁의 룰을 마련한 현대적 인 의미에서의 교파는 미국의 독립에서 시작된다. 미국의 독립 당시에 미국의 종교현상은 매우 복합 적이었다. 비록 몇몇 교회들이 특정지역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보아서 이미 다양 한 교회단체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미국의 독립은 이것을 법적으로 보완하고, 구체적으로 확인한 것이 다.
18세기 미국의 교회지도는 매우 복잡했다. 뉴잉글랜드에서는 회중교회, 로드아일랜드에서는 침례교회, 뉴욕을 중심으로 한 중부에서는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남부에서는 감독교회가, 그리고 메 릴랜드에서는 천주교회가 강했다. 하지만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였을 때 미국의 독립에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은 회중교회, 장로교회, 그리고 침례교회였다. 이들은 미국의 종교지도를 보다 분명하 게 개신교로 그려 놓았다. 하지만 독립이후 미국의 종교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졌을 때, 이 들 종교들은 모두 자신들의 교파가 미국의 국교가 되기를 원했다. 심지어 정교의 분리를 주장한 침례 교까지 자신들의 교회를 국교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한 교파를 국교로 만든다는 것은 다른 교파를 비국교도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내린 결론은 결국 어떤 교파도 국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어떤 교파도 국가로부터 특권 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국가와 교회의 분리는 독립운동의 지도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미국의 독립운동가들 은 대부분 계몽주의자였다. 이들은 시민들의 도덕을 위해서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하지 만 이들은 동시에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새로 건설되는 미국을 종교에 근거한 나라가 아니라 이성에 근거한 나라로 만들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럴 즈음에 교파들 사 이에서 분쟁이 일어나 상호견제 했기 때문에 국가와 교회의 분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이것은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인 계몽주의자들에게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1787년 처음 만들어진 미국의 헌법은 공직자의 자격에 종교적인 문제를 상관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었다. 이것은 국가와 종교의 구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보다 구체적인 표현이 필요했다. 그리해서 1789년에 만들어지고, 1791년에 발효된 수정헌법 제 1조에는 미국은 어떤 국교도 세우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 한 어떤 종교의 자유로운 활동도 제한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여기에서 종교의 자유가 보다 명문화되었다.
이런 정교분리의 원칙은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사상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록크의 제 자인 제퍼슨은 미국의 헌법을 만든 사람이다. 제퍼슨은 국가는 개인이 양도한 권한 내에서 활동하며, 어떤 개인도 종교의 문제를 국가에게 양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가 종교의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영적인 문제는 바로 그 개인에게 속해 있으며, 어떤 개인도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류는 오랫동안 종교의 단일성 위에 근거하여 왔다. 종교는 머리이며, 사회는 몸이기 때문 에 종교의 일치가 없이는 사회의 일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가의 일차적인 목표는 종교를 증진시키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위해서는 공권력을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럽과 마찬가 지로 미국도 자신들의 사회가 기독교에 근거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제퍼슨은 종교문제에 공권력을 투입해야 한다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제퍼슨이 미국사회의 기초로서 기독교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 다. 제퍼슨은 오히려 국가가 종교의 문제에 손을 뗌으로서 기독교의 자발적인 활동을 통해 기독교신 앙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제퍼슨은 이것을 "공정한 실험"(fair experiment)라고 불렀다. 이제 신앙의 증진은 국가의 임무가 아니라 전적으로 교회의 임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미드(Sidney Mead)에 의하면 미국의 독립이후에 생겨난 새로운 분위기가 교파제도의 등장에 공헌하였다고 주장한다. 미드는 이것을 여섯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첫째, 개인의 자유이다. 독립 전쟁이후 개인의 자유는 천부적인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강제로 이것을 제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 배했다. 이것은 종교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완전에 대한 추구이다. 자유한 인간은 보다 온 전한 종교와 사회를 추구할 수 있다. 완전에 대한 추구는 개인의 자유의 표현이었다. 19세기의 인간은 기존의 종교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완전한 형태의 종교를 추구하였다. 여기에 새로운 교파의 출현이 가능한 것이다. 셋째, 진보의 개념이다. 완전에 대한 추구는 진보에 대한 추구로 이어진다. 그리고 진 보한 사회는 보다 자유로운 사회라는 새로운 도식이 정립되었다. 여기에서 진보와 자유는 서로 만나 게 된다. 여기에서 독립이후의 많은 교파들이 적극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하게 되었다.
넷째, 평등의 추구이다. 미국사회가 주장하는 평등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능력과 권리를 가 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평등하게 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 평등하다 는 것이 아니라 평등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평등에 대한 사상은 종교에 있어서 엘리트주의 를 극복하게 만들었다. 다섯째, 자원주의이다. 자유한 개인은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 니라 자발적인 결단에 의해서 행동해야 한다. 제퍼슨은 하나님은 현세적인 징벌, 의무와 같은 외적인 것으로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여섯째 요소로 이어진다. 즉 설득구조의 발달이다. 강제력으로 더 이상 인간의 정신을 움직일 수 없다면 이제 가능한 방법은 설득을 통하여 인간을 움직이는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미국의 독립이후 미국의 종교들은 국가가 힘으로 할 수 없 는 시대에 종교가 마음을 움직여서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 리고 미국교회의 미래는 누가 보다 훌륭한 설득구조를 가지고 있는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미국의 독립이후 교파는 어떻게 발전되었는가? 독립이후 미국에는 수많 은 종교단체들이 있었다. 이 단체들은 각각 선교, 교육, 사회봉사 등 수많은 독자적인 목적을 가진 자 원단체였다. 예를 들면 American Board for Foreign Missions(1810), American Bible Society(1816), American Sunday School Union(1824) 등 수많은 단체들이 있었다. 독립이후의 미국교파들은 이런 단 체들을 자신들의 교파구조 밑에 종속시키면서 발전하여 나갔다. 많은 자원단체들은 이제 교파구조 속 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위원회가 되었다. 물론 미국성서공회 같은 단체들은 여기에 예외였다. 그러나 교파화 한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해외선교회였다. 원래 평신도들이 초교파적인 단체로 형성했던 해외 선교단체들은 점점 교파의 선교부로 흡수되었다. 그래서 교파라는 것은 여러 자원단체들을 산하기구 로 거느리고 있는 보다 큰 자원단체와 같았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종교단체들은 교파의 구조자체를 변화시키기도 하였다. 이전에는 성직자만으로 이루어졌던 교단의 조직들이 이제는 평신도들도 참여하 게 되었다.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개념은 교파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모인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한편으로는 사회의 개혁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전파였다. 독립이후 미국사회는 개인의 자 유를 천부적인 권리로 주장하였다. 따라서 국가의 권력은 이것을 가능한대로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국가의 도덕과 개혁은 누가 담당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독립이후의 교파들은 자신들의 자원활동을 통하여 새로운 국가의 정신적인 기초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교회가 더 이상 국가 의 기관은 아니지만 교회는 정교의 분리 이후에 새로운 형태의 자리매김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교육사업, 절제운동, 노예폐지운동과 같은 수많은 활동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정교분리 가 법적인 분리이지 내용적인 분리는 아니었다. 교회는 여전히 미국사회의 영혼이었던 것이다.
독립이후 19세기는 미국역사에 있어서 서부개척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교파들은 자신들을 하 나의 선교단체로 인식하였다. 서구교회에서 기존교회는 항상 자신의 유지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선교 에는 관심이 없었다. 교파는 기존교회보다는 오히려 선교단체들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었다. 이것의 가 장 대표적인 경우가 감리교회와 침례교회였다. 특별히 감리교는 교회구조 자체를 선교를 위한 구조로 만들었다. 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하기 위하여 순회제도, 지역목회, 속장이 있었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총회, 연회, 계삭회 등이 있었다. 이것을 통하여 미국감리교회는 19세기 초에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침례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침례교회에 있어서 교파는 선교를 위해서 모인 연합체이다. 따라서 침례교회는 개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는다. 선교를 위해서 서로 협력할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교파가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교파의 정체성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것 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1830년대에 일어난 미국장로교회의 신구파의 갈등이다. 원래 독립전 쟁이후 회중교회와 장로교회는 갑자기 부상하는 계몽주의에 대항하고, 효과적으로 서부에 개척하기 위하여 일치조약을 맺었다. 이런 가운데 회중교회의 진보적인 신학이 장로교회에 진입하게 되었고, 따 라서 장로교회의 보수파들은 여기에 대해서 강한 견제를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결국 장로교의 보수 파들은 정통 칼빈주의의 수호를 명분으로 분열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미국교파의 발전에 있어서 전통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장로교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것은 유럽의 대륙에 뿌리를 둔 개혁교회나 루터교회나 성공회 등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이런 조 직 하에서는 신학교가 발전하고, 교단기관지가 활성화되며, 교단신학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같은 신앙 을 가진 국제적인 단체들을 묶어 연맹체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교파의 관심은 외부의 선교보다는 내부의 치리문제로 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19세기후반부터 미국의 교파들 가운데에서는 교파적인 관료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하 였다. 19세기 초에 교파조직이란 수많은 자원단체들의 연합체였다. 많은 자원단체들은 각각 자기들의 대표를 갖고 있었고, 이들은 독자적으로 후원금을 모집하고 사업을 발전시켰다. 또한 19세기 중엽부터 교파의 정체성이 강조되면서 수많은 기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은 자연히 교파의 관료주의로 이 어지게 되었다. 이런 관료주의는 자발성을 침해한다. 모든 것을 자신들의 컨트롤 아래 넣으려고 하며, 교단구조를 다이내믹한 운동구조로 이해하기보다는 딱딱한 법률구조로 변질시키게 된다. 또한 관료주 의는 항상 전문성을 내세운다. 여기에서 프로페서널리즘이 발전되게 된다. 여기에서 평신도들은 참여 의 기회가 적어지고, 다시금 성직자중심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프로페서널리즘 은 결국 교회의 목적을 선교로 생각하기보다는 사회참여로 이해하게 된다.
이상에서 미국의 교파들은 선교지향적인 목적그룹에서 교파의 정체성을 확보하고자하는 치 리기관으로 다음에는 전문집단에 의해서 움직이는 관료집단으로 바뀌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된 교파들은 처음의 다이내믹을 상실하게 되었다. 특별히 이것은 주류교회를 지칭하여 언급하는 것이 다. 60년대 이후 미국의 주류교파들은 점점 쇠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주류교회들은 여러 가지 모 양으로 쇠퇴를 막아보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쇠퇴는 계속되고 있다.
우드나우 같은 사회학자들은 후기교파주의(postdenominationalism)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한 다. 지금까지 미국의 교파를 가장 강력하게 묶어왔던 인종문제는 이민의 세대가 끝나가고 정착의 시 대가 오면서부터 점점 사라져간다. 다시 말하면 독일인=루터교, 화란인=개혁파의 도식이 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칼빈주의인가 웨슬리안인가의 차별도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지금 미국교회는 자 유주의와 복음주의로 양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구분은 교파의 라인을 필수적으로 대변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교회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카리스마적인 운동을 하는 성공회가 있고, 자유주의적인 침례교회가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교파주의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아 직도 많은 교파들은 성장하고 있다. 특별히 미국의 기독교는 아직도 교파를 중심으로 형성되어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크게 성장하는 교파는 침례교회이다. 미국에서 주류교회들이 쇠퇴하고 있지만 이들이 쇠퇴한 자리에는 수많은 새로운 교파들이 생겨나 급성장을 경험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오순절, 성 결계통의 단체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성회, 하나님의 교회(클리블랜드파), 나사렛, 기독 교연합선교회, 웨슬리안교회 등이 있다. 옛 교파들은 쇠퇴하고 새로운 교파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 다.
IV. 교파제도에 대한 도전
교파제도는 미국 기독교가 만들어서 세계 기독교에 수출한 가장 미국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이런 교파제도가 항상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세 그룹이 있다. 첫 째는 무교파주의이며, 둘째는 에큐메니칼운동이며, 셋째는 독립교회 운동이다. 이 세 가지 운동은 다 같이 교파는 인간의 죄악의 산물이라고 보며, 이것을 극복하고자 한다.
교파주의에 대한 도전은 교파주의의 생성과 함께 한다. 미국의 독립과 함께 본격적인 교파시 대가 도래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교파제도를 부정하는 소위 "크리스챤"운동이 나타났다. 여기에서 크 리스챤이란 인위적인 교파의 이름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교파라고 하는 단어가 특정한 종 교단체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이들은 그런 이름은 성경에는 없는 인간적인 제도이라고 비판한다. 그리 고 이런 장로교인이나, 감리교인, 회중교인과 같은 인간적인 명칭을 반대하며 단순히 성경에 있는 대 로 크리스챤이라는 말을 사용할 것을 강조했다.
사실 이런 크리스챤 운동의 근원을 우리는 휫필드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휫필드는 필라델 피아 법정의 발코니에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여! 하늘에 는 누가 있습니까? 감독교인들이 있습니까? 아니다. 장로교인이 있습니까? 아니다. 다른 독립파들이 있습니까? 아니다. 감리교도들이 있습니까?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누가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그런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크리스챤이다. --- 이것이 우 리가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분파의 이름을 잊게 하옵소서! 그리 고 행동과 진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여기에서 휫필드는 교파의 의미를 상대화하 며, 동시에 크리스챤으로서 공통분모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크리스챤운동이 꽃을 피운 것은 제2차 대각성운동 때이다. 철저하게 성서적이기를 원했 던 이들의 모토는 "성서가 말하는 것을 말하고, 성서가 잠잠하는 것은 잠잠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 하에 수많은 교회들이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명칭을 성서에 있는 대로, 그리스도의 교회, 혹 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아마도 최초의 미국 고유의 개신교단체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기존의 교파보다 보다 더 성서적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무교파주의 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교파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도 불구하 고 이들도 대부분 교파화 되어 또 다른 교파를 만든 셈이다.
교파주의가 비성서적이라는 주장은 19세기 후반에서도 강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소위 하나님 의 교회 운동에서 드러난다. 대부분 19세기 후반 감리교의 교권주의에 반대하여 감리교에서 갈라져 나온 그룹은 교파주의를 교권주의라고 하여 매우 경계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새롭게 만드는 교회는 인간이 만든 교파가 아니라 성서에 나타난 교회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교파들은 자 신들의 교파 이름을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렀다. 이들이 자신들의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른 이 유는 기존의 교회를 인간의 교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단체는 미국에 약 200개가 있으며, 여기에는 성결파와 성결/오순절파가 많다.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최초의 그룹은 앤더슨파 하나님의 교회이다. 이들은 기존교파가 행하 고 있는 성직자 자격증과 같은 것을 발행하지 않으며, 공식적인 교회 멤버십도 밝히지 않는다. 이들은 참된 신자는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이다. 이들은 기존교회의 조직을 반대하여 왔다. 하지만 조직이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자체는 조직할 수 없으나 교회의 사역은 조직할 수 있는 것이라고 수정하여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이런 조직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는 또 다른 중요한 하나님 의 교회인 클리블랜드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모두 제도화에 대한 반대와 그런 제도의 필요 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교파제도에 대한 보다 더 큰 도전은 에큐메니칼운동에서 나타났다. 에큐메니칼운동은 근본적 으로 교파제도는 전통적인 교회론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사실 기독교의 공인이래 서구사회는 하나 인 교회(one church)라는 개념 위에 근거하여 왔다. 콘스탄틴 대제는 교회의 분열은 국가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이것은 카톨릭교회에 서 받아들여져 왔다. 이것은 종교개혁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개신교 영주들도 하나의 교회 아래 자 신들의 지역을 묶으려고 했다. 이것이 붕괴된 것은 미국에서이다.
이런 하나의 교회를 주장하는 전통적인 교회론은 미국의 교파제도를 부정적으로 보게 했다. 이런 비판은 주로 유럽의 국가교회의 전통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그룹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하지 만 미국의 상황은 이런 것을 수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미국교회에 유럽의 영향이 강하게 등장하기 시작했고, 많은 미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유럽에서 공부하고 유럽교회의 눈으 로 미국교회를 바라보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교회연합운동이 보다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런 에큐메니칼운동은 주로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는 소위 주류교단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이런 에큐메니칼운동의 정점은 세계교회협의회의 설립이다.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1948년 암 스테르담에서 첫 번째 총회를 개최한 WCC는 그 후 "생활과 사업," "신앙과 직제," 그리고 국제선교 협의회 등을 흡수하면서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이런 WCC의 근본적인 정신 가운데 하나는 소위 "교 파분열"을 극복하고 신앙과 예배에 있어서 가시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WCC는 교파의 존재를 기독교의 가장 큰 스캔들이라고 규정하고 교회일치야 말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교회일치운동은 일반사회와 전 세계적인 주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특별히 교회연합은 교회를 성장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교회의 숫자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회학자 윌슨은 교회연합운동은 크게 보아서 쇠퇴하는 성직자들의 영 향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일어났지만, 실제적으로 연합된 교파들 가운데 성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 으며, 교회의 연합이 쇠퇴하는 교회를 성장시키지도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왜 이런 교회연합운동은 성공적이지 못할까? 사회학자인 핑크와 스탁은 연합운동이 교파의 경쟁시스템을 붕괴시키기 때문이라고 본다. 경제학자들은 경쟁이 없는 곳에 발전이 없다고 주 장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교파연합은 교파들로 하여금 경쟁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자동적으로 교회의 쇠퇴를 가져오게 하였다는 것이다.
핑크와 스탁은 이런 구체적인 실례를 20세기 초 미국교회에서 나타난 농촌교회연합운동에서 찾고 있다. 많은 교회사가들은 20세기를 전후하여 미국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의 인구는 도시로 이주하고 따라서 농촌교회는 침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주류교단들은 교회의 합 병운동을 벌였다. 그래서 교회를 통합하여 여기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20세기의 전반부에 많은 주류교회들이 합병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류 의 농촌교회들은 계속해서 쇠퇴하였다.
하지만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도시의 인구가 크게 늘은 것은 사실이지만 농촌의 인구 도 역시 작은 폭으로나마 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숫자도 그 이전보다도 상당한 숫자 로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쇠퇴한 주류교인들과 성장한 신자들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여기 에 사회학자들은 새로 등장한 소규모의 교파들을 들고 있다. 새로 등장한 수많은 소규모의 교파들은 주류교회들이 철수한 그 자리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916년과 1926년 사이의 미국교회의 성장 을 보면 장로교회가 -8.5%, 회중교회가 -14.8%, 감리교회가 -10.9%를 경험한 반면에, 하나님의 성회가 +553%, 하나님의 교회가 +442%, 나사렛교회가 +577%의 놀라운 성장을 경험하였다.
그러면 이렇게 주류교파가 쇠퇴하고 소교파가 성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교회에 대한 개념의 차이이다. 주류교회는 교회는 고전적인 건물과 거기에 합당한 악기와 교육받은 성직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 만 소교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어디서 든지 모일 수 있었다. 이들은 전례적인 음악보다는 복음송을 선호하였다. 이들은 높은 월급이 없어도 일할 수 있는 헌신자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교파들의 교회는 농촌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것이 다.
핑크와 스탁은 연합운동이 실패한 또 다른 예를 종교방송에서 찾고 있다. 미국에 방송이 시 작되었을 때 모든 방송들은 의무적으로 일정한 시간을 공적인 프로그램에 할당해야만 했다. 이 당시 에 종교방송은 공적인 프로그램에 해당되므로 방송사들은 제작비가 덜 드는 종교프로그램을 방영하기 를 원했다. 그 다음 문제는 어떤 종교단체들에게 방송기회를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대 답은 미국교회협의회(NCC)에 속한 교회들에게만 방송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류교 단들은 독점적인 방송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소교파들이 방송권을 요구하였을 때에 그들을 배제 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소교파 내지 독립선교단체들이 방송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돈 을 주고 방송시간을 사서 방송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송시간을 사기 위해서 방송전도자들은 청 취자들에게 헌금을 호소해야 했다. 이렇게 비 NCC 계통의 교회들은 불공정한 상태에서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국 미국의 방송들이 종교프로그램을 공공의 영역에서 제외하고 모든 종교기관들에 게 방송시간에 대한 사용료를 지불하도록 했을 때, NCC계통의 교회들은 여기에 대처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비 NCC 계통의 독립선교단체들은 이런 새로운 상황에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않았다. 결국 청 취자들에게 근거한 독립선교단체들이 승리한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이런 연합활동은 종교의 카르텔 제도라고 부른다. 기존의 교파들이 연합하여 새로 등장하는 교파들을 여러 가지로 제한한다. 하지만 이런 카르텔 제도는 자유경쟁을 원칙으로 하 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기존의 교파들이 연합회를 통하여 과거의 독점적인 지위에 연연하는 동안에 소교파들과 독립선교단체들은 대중들을 향하여 직접적으로 호소한다. 이런 대중들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가 비 NCC계통의 성장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교파주의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은 독립교회운동이다. 독립교회 운동은 1960년대 중반부터 등 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독립교회운동은 관료적인 교파구조에 대항하여 개교회의 자율적인 활동을 보 장받으려고 일어난 운동이다. 기존교파의 관료적인 엄격성은 개교회로 하여금 자율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여기에 대해서 많은 교회들이 그런 교파조직을 떠나서 독립적인 단체들을 만들고 있다.
최근에 미국에서 크게 성장하는 교회는 대부분 독립교회들이다. 이들은 시카고의 윌로우 크 릭교회, 남가주 새들백교회, 갈보리 채플, 빈야드 크리스챤 펠로우십, 홉 채플 등 수많은 교회들이 있 다. 이들은 교파의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 다. 이들은 성서중심적이며, 체험적이고, 평신도 중심적이다. 이들 독립교회는 기존교파가 갖지 못한 다이내믹을 갖고 있다. 변화하는 사회에 쉽게 적응하고 있다. 그래서 남가주대학교의 사회학자 도날드 밀러는 이들 독립교회 운동을 또 하나의 종교개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 독립교회들은 크게 성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65년에 시작된 갈보리 채플은 미국에 약 600교회, 다른 나라에 약 100교회가 있으며, 빈야드는 미국과 해외에 약 600교회가 있다. 학자들 은 아직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미국 전역에는 이런 독립교회들이 수천 교회 이상이 된다고 주장한다. 풀러신학교의 피터 왜그너는 이들 교회들이 기존의 교파를 부정하고 사도행전적인 교회로 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신사도개혁(New Apostolic Reformation)운동이라고 부른다. 이들 가운데는 "사도적 네트 웍"(apostolic network)이라고 부르는 느슨한 조직에 참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독립교회 운동들도 완전히 교파적인 개념을 탈피하지는 못한다. 이들 독립교회 들은 자기교회의 제도와 예배 스타일을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 퍼트리고 있다. 이들은 이미 전 세계 에 네트웍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친교와 교육을 위하여 모이고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교회들처럼 관 료적인 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조직은 유사 교파조직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런 독립교회 운동은 교파제도를 부정하기보다는 교파제도의 경직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단체들이 앞으로 성장하면서 어떻게 교파의 관료화에 빠지지 않으면서 발전할 수 있는 가는 주목해 보아야 할 과제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교파주의에 대한 여러 가지 반대운동들이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무교회 주의도 독립교회주의도 결국에 가서는 또 하나의 교파가 되고 만다. 이것은 인간사회의 모든 운동은 궁극적으로 제도라는 틀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제도가 자체적으로 목적이 되지 않고 운동을 위한 도구로서 머물지 않는데 있는 것이다. 에큐메니칼운동은 다른 차원에서 교파주의에 대해 서 반대했다. 그들은 전통적인 하나의 교회를 재건하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양한 종교적인 취향이 존재하며, 동시에 어떤 특정한 종교를 강제로 강요할 수 없는 사회에서 하나의 교회를 만든다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요, 가능하지 않다. 현대사회는 다양성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기독교는 교 파제도를 인정하고, 이런 다양한 교파들이 선의의 경쟁을 하도록 함으로써 복음전파를 극대화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끝맺는 말
지금까지 교파주의의 기원과 발전, 그리고 도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교파주의란 정치와 종 교의 분리 이후에 다양한 종교적인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등장한 새로운 교회의 형태를 말한다. 이 것은 정치와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유럽의 국가교회와 분리되며, 그렇다고 정치로부터 박해를 받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유럽의 섹트교회와도 다르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더 이상 교회가 국가권력을 의 식하지 않고 일반대중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 에서는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교파가 승자가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교파의 존재를 분열로 이해하고 비판한다. 하지만 더 크게 보면 다양한 교파 의 존재는 다양한 종교적인 욕구의 존재 때문이다. 따라서 교파의 다양성은 사회의 다양성에 기인하 는 것이며, 다양한 사회일수록 더욱 다양한 교파들이 존재하게 된다. 또한 다양성이야말로 근대사회의 특성인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교파들이 선의의 경쟁을 통해서 더 나은 종교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 력한다. 이러는 가운데서 교회들은 보다 대중들에게 친숙한 형태로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파제도가 갖는 문제점도 많이 있다. 첫째는 지나친 경쟁을 통해서 교회의 이미지가 쇠락한다는 것이다. 경쟁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수적이다. 경쟁이 없으면 경제도, 교육도, 정치도 발 전하지 못한다. 이것은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경쟁은 항상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파제도는 선의의 경쟁의 룰을 가져야 한다. 선의의 경쟁의 룰이 마련되지 않으면 악화가 양화 를 구축하듯이 잘못된 종교가 득세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사회는 교파간의 선의의 경쟁을 유도할 수 있는 경쟁의 룰을 가여야 할 것이다.
둘째는 교파의 관료화 현상이다. 대부분의 교파들이 처음에는 목적지향적이다. 하지만 그 다 음에는 관료화하여 경직화되고, 결국은 쇠퇴하고 만다. 미국의 많은 교파들이 이런 길을 걸어갔다. 하 지만 남침례교의 경우에는 교파조직을 탈 관료화하려고 노력하였고, 따라서 쇠퇴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파제도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바로 이런 관료화 현상 때문이다. 관료화되면 다이내믹을 잃어버리고,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교파제도 자체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근대사회에서 당연하게 나타나는 종 교제도이다. 이것을 인위적으로 하나로 만들려고 하는 어떤 시도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교 회들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선의의 경쟁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런 점에서 교파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런 기초 위에서 새로운 연합운동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