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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10> | |||||||
김양도(金良圖) 그리고 흥륜사…… | |||||||
2005-04-04 오전 11:32: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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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신주편은 밀교 승려들의 신이(神異)한 일들을 주로 기록하고 있는데 “밀본이 사특한 도를 부수다”라는 뜻의 ‘밀본최사’조에 보면 밀본이 이적(異蹟)을 보이는 얘기 중에 김양도라는 인물이 어린 시절에 겪은, 일화 하나가 소개되고 있다. “승상(丞相) 김양도가 어렸을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서 말도 못하고 수족도 놀리지 못했다. 항상 보면, 큰 귀신 하나가 작은 귀신을 데리고 와서 집안에 있는 음식을 모조리 맛을 볼 뿐 아니라 무당이 와서 제사를 지내면 귀신들의 무리가 서로 다투어가며 욕을 보이곤 했다. 양도가 귀신들에게 물러가라고 명하고 싶었지만 입이 붙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법류사(法流寺)의 중을 청하여 불경을 외게 했더니, 큰 귀신이 작은 귀신에게 명하여 쇠망치로 중의 머리를 때려 땅에 넘어뜨려 그 중이 피를 토하고 죽었다. 며칠 후 심부름꾼을 보내서 밀본을 맞아오도록 했더니 심부름꾼이 갔다 와서 말했다. "밀본 법사가 오신다고 했습니다." 여러 귀신들은 이 말에 모두 실색을 하고 작은 귀신이 "법사가 오면 이롭지 못할 것이니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큰 귀신은 거만을 부리고 태연스럽게 말했다. "무슨 해로운 일이 있겠느냐." 그러자 사방에서 대력신(大力神)이 온 몸에 쇠갑옷과 긴 창으로 무장하고 나타나더니 모든 귀신들을 잡아 묶어 가지고 갔다. 다음에 무수한 천신(天神)들이 둘러서서 기다렸다. 잠시 후에 밀본이 도착하여, 경문(經文)을 펴기도 전에 양도의 병은 나아서 말도 하고 몸도 움직였다. 그리하여 사건 이야기를 자세히 말했다. 양도는 이 일로 해서 불교를 독실히 믿어 한평생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흥륜사 오당(吳堂)의 주불(主佛)인 미타존상과 좌우 보살을 소상(塑像)으로 만들고, 또 그 당에 금으로 벽화를 그렸다.”
‘밀본최사’조에서 말하고 있는 김양도의 독실한 신앙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김양도는 자신의 딸들을 흥륜사에 종으로 바치기까지 했던 것이다. 『삼국유사』 흥법편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태종왕 때에 재보(宰輔) 김양도가 불법을 독실히 믿어 두 딸 화보(花寶)ㆍ연보(蓮寶)를 흥륜사에 바쳐 절의 종이 되게 하였으며, 또 역신(逆臣)) 모척(毛尺)의 가족을 데려다가 절의 노예로 삼았으니 이 두 가족의 후손은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고 있다”(‘원종흥법 염촉멸신’조 夾註) 『삼국유사』의 이런 기사를 다리 삼아 눈을 『삼국사기』 쪽으로 돌려보면 우리는 김양도의 전혀 다른 면모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김양도의 보다 공식적인 활동상이 여기 저기 흩어져 나온다. 『삼국사기』는 열전 제6 강수 열전의 말미에서 『신라고기』를 인용하여 “문장(文章)은 강수, 제문, 수진, 양도, 풍훈, 골번이라” 하여 김양도를 신라의 문장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는가 하면, 아울러 김양도가 삼국통일 전쟁 때에 장군이자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전해 주고 있다. 무열왕 7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쳐서 멸한 후에 당제(唐帝)가 사신을 보내 포상할 때 소정방이 무열왕과 신하들 사이를 이간시키기 위해 김유신, 김인문, 김양도 세 사람에게 “내가 황제의 명을 받아 적당한 권한을 가지고 일을 보게 되었으니, 지금 얻은 백제 땅을 공들에게 나누어주어 식읍을 삼아 공(功)에 보답하려 하는데 어떻겠소?”하고 물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김양도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요량이 된다. 문무왕 2년 정월에는 왕이 김유신과 김인문, 김양도 등 9명의 장군에게 쌀 4천석과 벼 2만 2천석을 싣고 고구려 영토에 들어가 평양 근처의 당군 진영에 전할 것을 명하였다. 신라군이 2월 6일 평양 근처에 이르자 김유신은 아찬 김양도 등을 시켜 군량을 전하게 했는데, 이때 김유신이 ‘한어(漢語)를 아는’ 양도 등을 보냈다고 되어 있음에 김양도가 장군으로 외교관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삼국사기』열전 제4 ‘김인문’조의 말미에서는, 김인문이 일곱 번 당나라에 들어가 그 조정에 숙위한 월일을 계산하면 무릇 22년이나 된다고 하면서 양도(良圖) 해찬도 여섯 번 당나라에 들어갔다고 적고 있어 그의 활발했던 외교 활동을 암시하고 있다. 문무왕 9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당군에 저항하여 전쟁을 벌인 끝에 당군을 몰아내자 당 고종이 노하게 되고, 이에 신라에서는 각간 김 흠순[일설에는 김인문]과 파진찬 양도를 당에 보내 사죄하였다. 당 고종은 김흠순에게 이듬해 환국을 허락했으나, 김양도는 감옥에 가두어 마침내 원옥(圓獄)에서 죽었다.
김양도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이다. 김양도의 사후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가 당나라에서 죽은 후 그곳에 묻혔는지, 그곳에 묻혔다면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만일 그게 아니라면 유골이라도 고국으로 돌아왔는지 등에 대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나는 김양도의 유골이 신라로 돌아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은,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김양도를 승상, 재보라고 호칭하는 데에서 알 수 있다. 김양도의 실제 관직은 아찬(제6등급), 대아찬(제5등급)이었다가 당나라에 사죄 사절로 갈 때에는 제4등급인 파진찬(해찬)이었다. 그런데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김양도를 ‘승상’, ‘재보’라고 호칭하고 있음에 미루어, 신라 조정이 김양도 사후에 그에 해당하는 직위를 추증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양도의 유골도 신라로 모셔져 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유골이 신라로 돌아왔다면, 김양도가 단월 노릇을 하면서, 주불삼존을 조성하고 금당에 벽화를 그리게 했고, 두 딸을 종으로 바치기까지 했던 흥륜사에 안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흥륜사의 남은 자취는 김양도가 남긴 자취만큼이나 영성(零星)하다. 흥륜사는 신라 최초의 사찰로, 아도의 전법(傳法)설화와 이차돈의 순교설화가 깃들어 있으며, 여기에다 법흥왕이 주석하여 ‘대왕흥륜사’ 또는 ‘대흥륜사’로까지 불리웠던 신라의 국찰급 절이었다. 그랬던 흥륜사가 오늘날에는 그 자취조차 더듬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다. 현재 공식적인 흥륜사 터는 경주시 사정동에 사적 제15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흥륜사 터에 대해서는 해묵은 논란이 있다. 흥륜사지 안내 표지판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이 곳은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 법흥왕 15년(528년)에 불교가 공인된 뒤 544년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흥륜사의 터이다. …… 그러나 이 곳에서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수습된 바 있어, 선덕여왕 때 처음 건립한 영묘사 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울러 현재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를 흥륜사 터로 보기도 한다.”
논란의 발단은 일제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10년대 일본인들이 경주지역의 신라시대 절터들을 조사하면서 이곳을 흥륜사 터로 지정했는데 1970년대에 이곳에서 영묘사(靈廟寺) 명(銘)이 새겨진 기와편이 몇 점 수습되었다. 이에 경주지역 향토사학자들은 흥륜사 터의 위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미추왕릉은 흥륜사의 동쪽에 있다”라는 『삼국유사』 기록을 근거로 현재의 경주공고 자리를 흥륜사 터로 추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화재 당국에서는 “현재의 흥륜사 터 일대가 기록에 보이는 ‘천경림’으로 알려져 있고, 가람 구조, 특히 창건 가람의 내용을 알 수 없는 현단계에서 영묘사와 흥륜사의 위치 비정(比定)은 앞으로의 조사와 연구 결과를 기다려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흥륜사 터 안내판에 “선덕여왕 때 처음 건립한 영묘사 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울러 현재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를 흥륜사 터로 보기도 한다.”는 모호한 문구가 실리게 된 것이다. 현지에서 출토된 명문 기와에 적힌 이름을 그 절의 정식 명칭으로 삼는 관행에 따라, ‘영묘사’라고 적힌 명문 기와가 출토된 현재의 사적 15호 자리를 ‘영묘사 터’로 부른다면 ‘흥륜사 터’는 향토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경주공고 터로 옮아갈 수밖에 없다. 향토사학자들이 흥륜사 터로 지목하는 경주공고에는 교정에 많은 석물들이 있어 그곳이 옛 절터임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주공고를 지을 때에 운동장 정지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유물들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그런 유물 중에서 그곳이 흥륜사 터임을 확실히 말해 주는 유물이라도 나왔더라면 흥륜사 터를 에워싼 논란은 잦아들었을 터인데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흥륜사의 유력한 단월(檀越)이었던 김양도의 최후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운 터에, 흥륜사의 위치를 에워싼 논란마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어정쩡한 현실이 다시 한번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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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서울디지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