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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明代:1368~1644)
(1) 명대의 시 明代诗
명대에는 황제의 전제체제가 확립되고 그에 따라 엄격한 사상적, 이념적 통제가 시행된 시기이다.
明朝时,随着皇帝专制的确立,严格的思想和理念管制开始实行。
오랜 기간 동안 원의 지배 하에 있었던 까닭에 명은 건국 이후 원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전 한족의 문화를 회복하는데 정책의
역점을 두었다.
由于长时间在元的支配下的缘故,明朝建国之后,着重实行政策想从元的影响从摆脱出来,从新恢复汉族的文化。
그 결과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서 의고주의(擬古主義)적 기풍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는 시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结果社会的各个领域擬古主義热风的主流开始形成,当然诗文化领域也不例外。
이 때문에 명대의 (擬古主義)을 대표하는 시문의 경우 비록 작가의 수와 작품의 분량에 있어서는 당송의 시문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몇 배가 넘었지만 문학적 성취나 가치는 이전 시기의 그것을 뛰어넘지 못하고 과거의 것을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 따름이었다.
因为这个,擬古主義代表的诗文,主要是以作家数和作品的分量为主,比唐宋的诗文全部合起来还多几倍,在文化成绩和价值上,没能超过这之前的时期,只是在沿袭过去的水准上逗留着。
1) 명초의 시단 明初的诗坛
명초 이러한 복고주의적 경향의 대표적 인물로는 송렴(宋濂) 유기(劉基) 고계(高啓)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가 한문화 회복의 이상을 지니고서 시에 있어서 일정한 시대를 고집하지 않고 한매에서 송대에 이르는 모든 옛 시의 형식과 정신을 본받으려 했던 사람들이다.
明朝兴起的擬古(复古)主義倾向的代表人物有송렴(宋濂) 유기(劉基) 고계(高啓)等,他们全部是拥有恢复汉文化的理想,偏执在沿袭宋朝兴起的所有的前代诗的形势和精神的一群人。
2) 전후칠자(前後七子)
전후칠자(前後七子)는 이동양(李東陽)의 복고적, 보수적 경향을 더욱 심화시킨 문인들로서 이후 명대시문의 성격형성을 주도한 사람들이다. 전칠자중 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후칠자 중 이반룡(李攀龍) 왕세정(王世貞) 등이 대표적인 문인들로서 꼽힌다 특히 이몽양의 "문필진한 시필성당(文必秦漢,詩必盛唐) "이라는 말은 이후 명대의 복고주의적 경향을 상징하는 구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이반룡(李攀龍) 왕세정(王世貞)等式这些人中的杰出代表,特别是 이몽양的 "문필진한 시필성당(文必秦漢詩必盛唐) "的诗句,被看成是明朝的复古主义倾向的象征口号。
前后七子是把이동양(李東陽)的复古,保守倾向更深化地推进的文人,是主导了明代诗文的性格形成的一群人。前七子的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后七子的
■전칠자 - 이몽양、하경명、왕구사、왕정상、강해、병공、서정경
후칠자 - 이반룡、왕세정、사진、서중행、종신、양유예、오국륜
前七子 - 李夢陽、何景明、王九思、王廷相、康海、邊貢、徐禎卿 後七子 - 李攀龍、王世貞、謝榛、徐中行、宗臣、梁有譽、吳國倫
이러한 전후칠자의 복고주의적인 경향에 반대하여 개성적인 문학창작을 주장하는 작가들도 있었으니 서위(徐渭) 이지(李贄) 초횡(焦竑) 탕현조(湯顯祖)와 같은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 중 이지는 태주학파(泰州學派)의 대표자로도 꼽히는데 그는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예교나 정신보다 경제적 이해관계로 보는 다분히 유물론(唯物論)적 측면이 강한 입장에서 문학을 평가하여 복고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당시 금서(禁書) 취급을 받던 천속한 민간문학 작품을 고금古今의 명작이라고 인정하기도 했다.
与前后七子的复古主义倾向截然不同,出现主张个性主义文化创作的作家们以서위(徐渭) 이지(李贄) 초횡(焦竑) 탕현조(湯顯祖)为代表的一群人。他们中的首屈一指的代表이지(李贄)认为,对人来说最基本的要素,不是礼教和精神,而是经济利害关系,从大有唯物论观点的坚定立场上,评价文化,从正面上抨击复古主义,并且把当时被当作是禁书的贱(低)俗文化的民间文化作品认证为古今名作。
3) 공안파(公安派)
이들의 뒤를 이어 원종도(袁宗道)원굉도(袁宏道)원중도(袁中道)를 중심으한 (公安派)라고 불리우는 진보적인 문인들이 출현했다. 이들은 격률(格律)을 거부하고 대신 성령(性靈)을 내세웠으며 맹종적인 복고주의, 모방을 반대했고 민간문학의 가치를 상당부분 인정하는 진보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들은 또한 이지(李贄)의 문학적 주장을 완화시켜 명대의 보수적인 사대부 문학관의 틀 안으로 흡수하기도 하였다. 공안파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측면을 갖고 있었지만 그들이 주장한 성령(性靈)이 현실적인 체험이나 개인의 주체성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어서 실제 창작에 있어서는 현실 사회문제는 외면한 채 산수 속에 친구들과 어울려 개인의 느낌을 노래한 것에 그치고 말았다.
继他们之后 ,以원종도(袁宗道)원굉도(袁宏道)원중도(袁中道)为中心的公安派,被称为进步文人的出现。公安派拒绝格律,提倡性灵的盲从主义的复古主义,给我们展示了反对模仿,对民间文学的价值相当部分的认证的进步性的面目。他们和이지(李贄)的文学性主张融合,被吸收到明代保守士大夫文学观的缝隙中。公安派就当时来说,虽然具有相当进步的侧面,但是他们主張獨抒性靈、重視小說民歌的價值。
4) 경릉파(竟陵派)
공안파와 함께 종성(鍾惺), 담원춘(譚元春) 등도 복고주의적인 문단풍토를 비판하여 경릉파라는 문파를 이루었다. 그들은 개인적 정감이나 노래하고 무게가 없이 가볍기만 한 공안파의 천속한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 또한 실제 창작방면에 있어서는 공안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和公安派一起,함께 종성(鍾惺), 담원춘(譚元春)等也对复古主义的文坛风土进行批判的竟陵派的形成。竟陵派把个人情感,决定通过没有重量轻快的歌曲的形式,避开公安派的贱(低)俗的弊端,进行诗情的描述。但是他们在事迹创作反面和公安派其实没有什么差异。
청대(淸代:1644~1911/12)
(2) 청대의 시 清代的诗
17세기 중반 건국된 청은 이민족왕조(異民族王朝)이긴 했지만 정치체제의 성격으로 볼 때 明과 기본적으로 비슷했다. 왕王의 일인독재체제, 성리학(性理學)의 공식이념화, 강력한 문화통제정책 등은 명청에 공통된다.
청대 또한 명대와 마찬가지로 시에 있어서 복고적인 경향이 그대로 이어진 시기였다. 청대 초기에는 명대의 유신을 자처하는 왕부지(王夫之)등의 우국적인 시가 일부 나왔지만 얼마 안되어 현실과는 유리된 복고적인 풍으로 변화했다. 신운설(神韻說) 격조설(格調說) 기리설(肌理說), 성령설(性靈說) 등의 다양한 시론들이 제기되기도 했고 동성파(桐城派)의 엄정한 산문론(散文論)이 나오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복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17世纪中半建国的清朝,虽然战胜了异民族王朝,从政治体制上看,基本上和明朝相似。王的艺人独裁体制,性理学的公式理念化,强烈的文化同志政策等和明朝一致。清朝和明朝一样,是复古主义倾向继续延承下来的时期。清代初期,以明朝遗臣自处的왕부지(王夫之)等无国籍诗歌,虽然作为一部分突出来,但是没过多久,就演化成了与现实游离的复古主义热风。신운설(神韻說) 격조설(格調說) 기리설(肌理說), 성령설(性靈說) 等多种诗论被提及过,동성파(桐城派)严整的산문론(散文論)也出现过,仅本上还是没有从复古的空隙中分离出来。
1) 청초의 시단 清初的诗坛
명말 삼유(三遺)라고도 하는 고염무(顧炎武), 황종희(黃宗羲), 왕부지(王夫之)를 비롯한 명조 유신들은 청왕조를 위해 봉사하기를 거부하고 재야 문인학자로서 활동하면서 청대 초기에 민족주의적 성향의 애국적 정서, 세상의 개혁에 대한 생각 등을 담은 시를 많이 지었으니, 대개 민족주의적 비분을 바탕에 깔고 울분과 회한을 토로하는 작품이 많았다.
以被称为明末三遗的고염무(顧炎武), 황종희(黃宗羲), 왕부지(王夫之)为首的明朝遗臣们,拒绝为清朝效命,作为在野文人学者,在活动的同时,写了很多把清朝初期民族主义倾向的爱国情绪,关于世上的改革的想法等隐藏在其中的诗句,大体上写照了民族主义的本分情节,吐露了郁愤和悔恨的作品居多。
이후 명말 유신들의 시는 맥이 끊어지고 대신 청 왕조에 나아가 군신 관계를 맺은 타협적인 사대부들의 시가 시단을 주도하면서 복고풍의 시가 주류를 이루었다. 복고적 풍토의 초기 단계를 대표하는 청초의 시인으로는 전겸익(錢謙益)과 오위업(吳偉業)을 꼽는다. 두 사람은 스스로 자기들의 입장을 명확히 천명하지는 않았지만 전겸익은 송시 오위업은 당시를 중시하여 각기 종송파와 종당파의 출발을 이루었다.
以后明末遗臣们割断了诗的脉络,取而代之倾向于与清王朝结君臣关系的妥协士大夫们的诗歌诗坛的主导,复古风诗歌种类形成。代表复古风土的初级阶段的清初诗人以전겸익(錢謙益)과 오위업(吳偉業)为杰出代表。二人虽然没有主动明确地阐明了自己自己的立场,전겸익(錢謙益)重视宋诗,오위업(吳偉業)重视唐诗,形成各自的崇宋派和崇唐派。
2) 종당시파(宗唐詩派)
오위업 이후 본격적으로 성당의 시를 내세웠던 이로 왕사정(王士禎)이 있다. 그는 전대의 명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연구를 바탕으로 풍취가 뛰어나고 탈속적인 맛이 두드러지는 시를 지었다. 또한 송대 엄우(嚴羽)의 창랑시화(滄浪詩話)의 이론을 계승하여 신운설(神韻說)을주장, 시의 인위적인 수식이나 논리를 반대하고 자연스럽고 청신(淸新)한 시 창작을 강조하였다.
오위업(吳偉業)之后,从本格出发,有提倡盛唐的诗的왕사정(王士禎)。他以前代的明诗渊博的知识和研究为背景,写出饶有风趣地章显脱俗的韵味的诗,而且继承了宋代엄우(嚴羽)的창랑시화(滄浪詩話)德理论继续主张신운설(神韻說),反对诗的人为的修饰和伦理,强调自然的清新的诗创作。
대표적인 시인들로는 시윤장(施閏章) 송완(宋琬) 주이존(朱彛尊) 심덕잠(沈德潛) 옹방강(翁方綱)등이 있다. 이들 중 심덕잠은 시작으로도 유명했지만 온유돈후(溫柔敦厚)와 풍아(風雅)를 중시하는 격조설(格調說)을 제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또한 한위육조의 시 가운데 그의 시론과 부합하는 시들을 모아 유명한 고시원(古詩源)을 편집하기도 했다. 또한 금석학자(金石學者)로서 유명한 옹방강은 왕사정(王士禎)의 신운설(神韻說)을 보강한 기리설(肌理說)이라는 시론을 주장했다. 그는 감성이나 운치에만 의존하면 깊이가 모자람을 지적하고 학문에 근간을 둔 주제, 논리의 강화를 중시했던 것이다.
代表诗人有시윤장(施閏章) 송완(宋琬) 주이존(朱彛尊) 심덕잠(沈德潛) 옹방강(翁方綱)等。这些人中심덕잠(沈德潛)不仅诗作有名,也因为重视온유돈후(溫柔敦厚)和풍아(風雅) 的격조설(格調說)再次被提及而有名。他把汉魏六朝时期,也曾因为他的诗论复合的诗聚集起来,编辑成有名的고시원(古詩源)而有名。而且充实了作为금석학자(金石學者)有名的왕사정(王士禎)的신운설(神韻說),主张随之形成的기리설(肌理說)。他指责伊夫在感性和韵致,却缺乏深度,把主体放在句子的骨干上,重视伦理的强化。
3) 종송시파(宗宋詩派)
송시를 정식으로 표방하고 나온 작가에는 송낙(宋犖)사신행(査愼行)여악(厲鶚) 같은 이가 있다. 이들 중 사신행(査愼行)은 시에 있어 전고의 사용이나 문장의 수식에 힘쓰지 않은 이른바‘백묘’라는 점에 있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또한 여악은 송시기사100권을 지어 본격적으로 송시를 연구하기도 하였다 .
把宋诗正式标榜的作家有송낙(宋犖)사신행(査愼行)여악(厲鶚)等。在他们中,사신행(査愼行)在认为在诗中不注重运用典故和进行文章的修饰叫做白描的观点上,算是某种程度上获得了成功。还有여악(厲鶚的宋诗纪事100卷也算是从本格上对宋诗进行了研究。
4) 성령시파(性靈詩派)
청대의 시론에 성령설을 도입한 이로 원매(袁枚)가 있다. 그는 의고(擬古)나 문구의 수식에 치우친 심덕잠의 격조설에 반대하고 도덕으로 시가의 내용을 제한하려하는 태도를 배척하면서, 시는 작가의 참된 감정과 개성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성령의 주장은 명말 원굉도(袁宏道)를 중심으로 한 공안파(公安派)의 낭만주의적 문학 이론을 계승한 것으로 성령의 자유로움에 거리끼는 모든 것을 반대하고 배척하였던 것이다.
清代诗论导入了성령설(性灵说)的원매(袁枚)的产生。他反对去出拟古和文句的修饰的심덕잠的格调说,排斥运用道德了来限制诗歌的内容的态度,主张诗应该是作家的真感情和个性的表现。他的这张性灵主张继承了明末원굉도(袁宏道)为中心的公安派的浪漫主义文学理论,排斥妨碍性灵的自由的一切事物。
5) 청말의 시단 清末诗坛
내부의 부패와 외부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으로 몰락해 가는 청을 후기의 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공자진(龔自珍)이 있다. 그는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시詩 작품을 통해서도 사회비판과 풍자의 정신을 나타내었다.
内部的腐败,外部的侵略面前束手无策走向没落的清朝后期的诗个代表诗人공자진(龔自珍)。他不仅主张根本上的社会各个,而且通过诗歌作品展示自己的社会批评和讽刺的精神。
이후 아편전쟁을 통해 서구제국의 막강한 물리력 앞에 굴복한 중국의 비참한 운명을 깨달은 진보적인 문인들은 시를
통해 국가의 개혁을 주장하는 한편 시를 자체의 개혁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청말의 이 개혁운동을 가리켜 흔히 시계혁
명이라고 부른다.
시계혁명은 비록 혁명이란 이름을 달고있기는 하지만 고전시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휘를 쉽게 쓴다
는정도에 머물렀을 뿐, 근본적인 면에 있어서의 변화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后来又有通过鸦片战争,看清中国屈服在西欧列强面前的无力感的诗人们,他们通过诗的形式,主张国家的改革,形
成了通过诗的形式来主张改革的现象。清末泛指这种改革运动为诗界革命。诗界革命虽带有革命的表面,还是没有完全的
从古典式中脱离出来,只是在词汇简单地运用的程度上停留,不从根本面上构筑变化。
《参考》
明代因八股取士,散文、詩歌頹然不振,故各派文學思想之興起,目的皆在振起衰蔽之詩文
1.明初文壇 元季散文頗為纖穠縟麗,明初承其遺風,僅宋濂文雅醇、劉基文雄奇,最為傑出
2.前後七子 領導人物:前七子以李夢陽、何景明為領袖;後七子以李攀龍、王世貞為領袖 主張:復古(擬古),李夢陽有
「文必秦漢、詩必盛唐」之說,大致一同 結果—失敗:只是一味模擬而缺乏獨創的精神與風格,再加上前後七子把持文壇,
或相互標榜或相互排擠,目空一切的態度令人厭惡
3.唐宋派
主張:該派反對前後七子的擬古主義,因為擬古主義「文必秦漢,詩必盛唐」的主張,使當時的文學作品漸漸流於仿古、抄襲。該派主張作文應抒發自己最真摯的情感,雖然崇尚唐宋古文的風範,但不一味仿古。該派在當時擬古成風的文壇中洩出
一道清流,並且確立唐宋古文八大家的地位
4.公安派 興起:前後七子振興之舉未果,萬曆中遂有公安派興起,反對復古擬古之作風 領導人物:宗道、宏道、中道「三袁
兄弟」,其中以袁宏道最為重要 主張:
5.竟陵派 興起:繼公安派的文學理論而來,詩文風格一變公安之「清新輕俊」而「幽深孤峭」。
領導人物:鍾惺、譚元春為其領袖,復矯公安派之蔽—倡清真而流於膚淺輕脫 主張:造怪句、押險韻,造成幽深孤巧之格調
以挽救公安之蔽
【明代文學派別】 擬古派 (秦漢派)→王世貞、李攀龍等人→文必秦漢,詩必盛唐
公安派 (公安體)→袁宗道、袁宏道、袁中道→文學重性靈、貴獨創
【清代詩派】
性靈派→袁枚 神韻派→王士禎 格調派→沈德潛 肌理派→翁方綱 聲調派→趙執信